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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도시정책의 특성

1) 개혁개방 이전

중국 공산당은 혁명운동을 전개시켜 오면서, 고전적 Marx노선에서 중요 시한 도시 보다는, 농촌지역과 농민운동을 중요시 해 왔다. 또 혁명전쟁 에서 승리한 1949년 이후에는, 기존도시를 배후 농촌지역을 수탈하고, 또 농촌지역에 기생하면서 성장해 왔다고 비판해 왔다. 따라서 중국공산당 은 기존의 도시를 소비도시로 규정하고, 사회주의하의 도시는 생산도시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비도시를 생산도시로 전환 하 려는 방침은 신중국 성립 이후, 도시정책의 기본원칙이 되어왔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공업도시건설에 주력하는 한편, 비공업도시에 대해서는 성 장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급진파에 의하여 도시주민에게 농 촌적 가치관을 주입시키자는 의도하에, 도시민을 농촌이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하방운동(下放運動) 이 추진되었다.

이같은 분위기하에, 거주이전의 자유가 점차 제한되고 人民公社17) ,

17) 중국공산당은 반봉건상태에서 공산주의 단계로의 진입과정을 단축한다는 유토피아적인 목표하에, 1958년부터 대약진운동 을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농업생산의 비약적인 발전 을 위해 전국의 농촌 생산조직을 대규모적이고 농(農), 공(工), 상(商), 학(學), 병(兵)이 상호결합 되어있는 정사합일(政社合一)의 인민공사로 재편하였다. 인민공사는 농업은 물론 공업, 상업 등을 종합적으로 관리할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활동, 그리고 민병대 의 조직까지 담당하는 총체적인 생활단위이며, 동시에 과거의 향(鄕)정부의 기능까지 수 행하는 그야말로 정사합일의 조직체였다.

戶口制度 등과 함께 철저한 배급경제가 강력히 집행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또 도시간의 인구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중국 의 도시화는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특히 문화대혁명기와 같은 시기에는, 총인구에서 도시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오히려 감소하기도 하 였다. 또한 기존도시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정치이념과 경제정책에 따라 도시내 사회간접자본이나 하부구조에 대한 투자도 지나치게 경시되었다.

특히, 문화대혁명기와 같이 급진파가 주도했던 시기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계획경제에 따른 공상업공유제(工商業公有制)를 실시함에 따라, 도 시에서의 상품교역과 시장유통기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처럼 시장경 제적 원리가 경시되고, 행정적 차원에서 경제가 운영되면서, 도시간의 경 제적 연계가 행정기능상의 연계로 대체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의 전통적 인 경제적 기능은 점차 사라지거나, 기형적으로 변하였다.

2) 개혁개방 이후

1980년 7월, 중국 사회과학원의 경제학자 마홍(馬洪) 등은, 사회주의경 제도 상품경제이므로 시장이 요구되고, 도시는 상품경제의 중심이므로 사 회주의경제체제하에서도 도시가 경제적인 주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 다. 이러한 요지의 주장은 1981년 12월, 정부보고를 통해, 大中都市가 주축이 되어 각종 경제중심을 형성하고, 합리적이고도 경제적인 연결망을 조직해야 할 것 이라고 제시되었다.

그러나, 시장기능 회복을 위한 새로운 정책은 농촌 및 농업부문에 먼저 적용되었다. 소득증대와 농업노동력의 비농업부문으로의 이동을 촉진시 키려는 정책들은, 생산책임제, 물가개혁, 鄕鎭企業 육성 등이다. 향진기업 이란,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흡수하기 위하여, 농촌의 행정단위인 鄕과 진 鎭에 비농업기업을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이는 공업화과정에서 불가피한 농촌잉여노동력의 지리적 이동을 최소화 하기 위한 전략이다. 한편, 도시 정책의 주요 전략은, 도시체계를 통하여 상위에서 하위체계의 도시로, 그

리고 연안지역으로 부터 내륙지역으로 개발효과를 분산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연안지역도시와 대도시들을 거점지역으로 선정하여, 각종 혜택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도시화가 지체된 것은 농촌에 편향된 경제정책이 성공했기 때문 이라기 보다는, 戶口制度와 배급제도에 의해서 농촌으로 부터 도시로의 인구이동을 직접적으로 통제하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개혁개방 이전 의 철저한 계획경제하에서는 식량,의복 등의 일상용품에서 주택, 의료, 교 육 등, 기본적인 복지혜택들이 철저하게 배급제도에 의하여 공급되었다.

당시에는 국가가 제공하는 배급외에는 생활용품 및 기본 복지써비스에 접 근할 수 있는 통로가 거의 없었다. 호구가 없으면 그러한 배급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호구가 없는 지역에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원천적으 로 불가능했었다. 또한 농촌의 모든 농민은 인민공사에 소속되어 출퇴근 을 비롯한 모든 행동을 통제받았다.

그러나 농촌에서 연산승포책임제(聯産承包責任制)가 실시되고, 전면적인 개혁개방이 가속화되면서 시장경제적 요소의 보급이 확산되자, 호구제도 가 갖고 있던 이농인구의 도시유입통제 효과는 점차 떨어지고 있다. 개 혁개방 이후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텐진(天津), 광저우(廣州) 등의 대 도시에 비공식부문의 일거리가 많이 생겨나게 되자, 종래의 호구제도에 근거한 복지혜택의 공급을 못 받아도, 도시에서 개인소상점이나 노점상이 라도 벌리는 것이 농사짓는 것 보다 낫다며 도시로 전입해 오는 이농인구 (離農人口)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2. 중국의 도시화 동향 및 도시체계

1) 중국의 도시화 과정

중국공산당이 도시 보다 농촌을 중시하는 정책을 시행해 온 결과, 중국 의 도시화율은 세계평균 수준 및 개발도상국가들 보다도 낮은 수준이 다.18) 1996년 중국의 도시총인구19)는 5억 1511.3만인으로 전국 총인구의

42.1%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 城鎭인구20)는 3억 5950만인이고 城鎭인구 중 비농업인구는 2억 7618.5만인이며, 이의 총인구에 대한 비중은 각각 29.4 %, 23.1%이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의 도시화 수준은 23.1%이다.

1996년말 현재 중국 전국의 도시 총수는 666개이다.21)

신중국 건국이후의 보편적인 역사적 시기구분 단계에 따라, 각 단계별 도시화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22)

첫째, 전후 회복기와 1차 5개년계획기(1949- 57)이다. 이기간중에는 대 체적으로 도시인구로 간주될 수 있는 시진(市鎭)비농업인구, 또는 시진(市 鎭)총인구의 증가율이 전국총인구의 증가율 보다 훨씬 높았다. 이같은 도 시인구 증가의 원인은, 자연증가와 함께,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호구제도 가 강력히 실시되지 않 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기간중의 도시인구증가에서 유의할 점은, 행정구역의 조정에 따른 영향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즉 1955년에 처음으로 중국 국무원에 의하여 시(市),진(鎭)의 설치에 관한 규 정( 國務院關干設置市,鎭,建制的決定 과 國務院關干城鄕劃分標準的決定 ) 이 발표되어, 1956년부터 적용되었다. 그 결과, 1956년의 도시(市鎭)인구 증가율은 기간중 가장 높은 10.9%로 나타났다. 이때 적용된 도시(市,鎭) 의 설치기준을 보면, 인민위원회가 설치된 지구나 현(縣)이나 기(旗) 이상 의 소재지, 상주인구 2,000명 이상, 또는 거주인구의 50%이상이 비농업인 구인 경우 등이었다.

둘째, 대약진기와 경제조정기(1959- 65)이다. 이기간중에도 도시인구가 증가되었으나, 대약진정책이 실패로 끝나고,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도시 인구는 물론 총인구규모도 크게 줄었다. 총인구 규모는 1962년 부터 회 복세를 보였으나, 도시인구는 경제조정정책 기간에도 계속 하락하였다.

18) 도시화율은 총인구에 대한 도시비농업인구의 비율로 나타내며, 세계은행 발표에 의하 면, 1992년 세계의 도시화율은 42%이다.

19) 市區의 농업인구는 포함하나, 시 관할현의 인구는 포함하지 않았음.

20) 城과 鎭 행정구역내의 인구

21) 國家計劃委員會國土地區司, 97中國地區經濟發展報告 , 改革出版社, 1998.3, p .101 22) 임길진/ 이만형, 1990, p . 75-81의 내용을 바탕으로 요약 및 보완하였음.

이 시기중 도시인구의 가장 높은 증가율은 1959년에 15.4%로 기록되고 있 다. 그 원인으로서는 대약진운동에 따라 소도시건설이 장려되었고, 철을 생산하기 위해 농민을 도시의 공장으로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 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도시로 강제동원된 농민이 귀향조치되면서 도시인구는 다시 감소추세로 전환되었다.

세째, 문화혁명기(1966-1976)이다. 이기간에는 계급투쟁과 농촌적 가치 를 강조한 급진파의 이념에 따라, 강력한 반(反)도시정책 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동기간중에는 도시인구 증가율이 총인구 증가율 보다 낮았다. 문 화대혁명이 극성을 떨치던 1960년대 후반에는 도시 비농업인구의 절대수 가 감소하였다. 동기간중에는 호구제도 가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또한 노동개조를 통한 농촌적 가치관을 주입시킨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문화대 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 지식인, 학생 등을 대거 농촌이나 변경지역에 이주시키는 하방운동 이 실시되었다.

네째, 개혁개방기(1977년-현재)로서 모택동 사후 현재까지 이다. 개혁개 방정책 실시 이후, 도시인구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표 4-1> 참 조) 이같은 도시인구의 급격한 증가현상의 원인은, 첫째, 개혁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도시지역, 특히 대도시지역에 공식, 비공식적인 경 제활동을 통한 이윤획득의 기회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 둘째, 시장경제적 요소가 확산되면서 호구제도 등 종전의 계획경제식 통제 및 규제가 이완 되고 있다는 점 등이라할 수 있다.

<표 4- 1> 개혁개방 이후 총인구 및 도시인구비중 변화추이

연 도 총인구

(천만명)

도시인구비중 (%)

1978 96.3 17.91

1979 97.5 18.96

1982 101.7 21.13

1985 105.9 23.71

1988 111.0 25.81

1991 115.8 26.37

1994 119.9 28.62

1996 122.4 29.37

자료: 中國城市統計年鑑 1997, p . 69,

2) 중국의 지역별 도시화 현황23)

영토가 광활하고 각 지역의 자연, 경제 및 사회조건의 차이가 큰 중국 은 도시화 진행 정도도 도시별로 차이가 매우 크다. 90년대초부터 최근 까지 동부지역 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동부지역의 도시화가 상대적으 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1991년과 비교할 때 1996년 동부지역의 총인구는 4억 9230만인이고 도시비농업인구는 1억 3093만인으로 각각 전국의 41.2%, 47.4 %를 차지하고 있다. 중부지역은 각각 4억 2924.7만인(35.9%), 9835.1만인(35.6%)이며, 서부지역은 각각 2억 7391.4만인(22.9%), 4690만인 (17%)이다. 토지면적은 동부지역이 전국 토지면적의 13.5%에 불과하나 서부지역은 전국 토지면적의 56.3%를 차지한다. 따라서 동부와 서부지역 간에는 10배 이상의 인구밀도의 차이가 있다. 도시화 수준도 동고 서저 현상을 보이는 데, 동부는 26.6%, 중부 22.9%, 서부 17.1%이다.

1996년말 현재 중국 전국의 666개 도시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동부연 해지역에 298개, 중부지역에 245개, 서부지역에 123개로, 각각 44.7%, 36.8%, 18.5%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96년 한해 동안 전국적으로 26 개의 도시가 새로이 지정되었으며, 동부지역에 8개, 중부지역에 11개, 서 부지역에 7개이다. 행정구역 위계상 한국의 邑과 비교되는 鎭(建制鎭)은 전국에 1만 7770개인데, 이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동부지역 8041개 (45.3%), 중부지역 5429개(30.5 %), 서부지역 4300개(24.2%)이다. 1996년 한 해 동안 신설된 鎭은 778개이며, 동부지역에 349개, 중부지역에 275개, 서 부지역에 164개이다.

1978년에서 1994년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새로이 발전한 도시들이 특정지역에 일단의 도시군집들을 형성하였는데, 이중 장 강삼각주에 신설 도시의 15%, 화북평원 일대에 14%, 동북지방 송랴오(송 평원일대에 11%, 장강 중류 쟝한(江漢)평원 일대에 9%, 주강삼각주 지역 에 4% 정도가 집중되었다. 이상 5개 지구에 신설 도시 총수의 59%가 집 중되었다. 이러한 기초위에 랴오닝성 중남부, 베이징-텐진-탕샨(京津唐),

23) 國家計劃委員會國土地區司, 1998.3, p . 101-104의 내용을 재정리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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