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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기에 유럽 전력망 연계: 1951~1980년대

가. 미국의 봉쇄전략

1947년 3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으로 알려진 미국의 외교정책을 발표하였다. 소련의 공산주의 세력 팽 창을 막는 미국 봉쇄정책은 유럽 개별국가의 전력시스템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경제 군사 원조를 받은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미국 전 력기업(예, Ebasco)에 의해 전력망이 구축되었다. 다국간 전력복구 사 업은 커다란 성과 없이 끝났는데, 단지 국방과 관련된 사업(예, 인(Inn) 강 유역의 브라우나우 발전소 프로젝트)만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그림 2-4] 미국의 경제·군사 원조액(1948~54년)

(단위: 백만 달러)

자료: 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 Overseas Loans and Grants, Lagendijk(2008), p.163 재인용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는 1952년에 상호안보청 (Mutual Security Administration)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럽경제협력 기구(OEEC)는 안보관련 업무가 점차 NATO에 이양되었고, 1957년 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로 개편되었다.

1) 동유럽에서 서독으로의 전력공급 추진 실패

전쟁이 끝난 후에 서독의 전력수급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석탄 부족으로 인한 잦은 전력 중단, 전쟁 중 파괴된 전력시설의 복구 지체 등이 주된 원인이었다. 서독의 주변국인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지로부터 전력을 공급받는 것이 UNECE를 중심으로 관련 국가들 간에 협의가 진행되었지만, 전후 복구과정에서 각국은 자국의 전력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접국으로의 전력수출을 원치 않았고, 또한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직 간접적인 반대로 인해 서유럽지역으로 전력을 수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은 잉여전력을 갖고 있어도 발전소 및 송전선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장비와 자재를 서유럽 과 미국으로부터 도입할 수 없었다. 이들 장비는 서유럽과 미국에 의해 1949년에 조직된 대공산권 수출통제위원회(Coordinating Committee for Multilateral Export Controls, COCOM)의 통상금지 품목에 포함되어 있었다.24) COCOM으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CoEP(Committee on Electric Power)에서 탈퇴하였고, UNECE 회의에도 1953년과 1954년 에만 참석하였다.

24) 미국은 동맹국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상호방위원조통제법(Mutual Defense Assistance Control Act)을 1951년에 제정하였는데, 미국의 교역국 중 미국의 안보이 익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하는 국가에는 군사·경제적 원조를 종료하였음.

물론, NATO 동맹국들이 UNECE를 완전히 배척하거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UNECE가 동서 유럽을 포함하는 모 든 유럽 국가가 모일 수 있는 유일한 협상 플랫폼이었기 때문에 연결 다리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하였다.25)

2) 유고슬라비아 잉여전력 놓고 미 소간 이해 충돌26)

소련 스탈린과 유고슬라비아 리더 조지프 티토(Josip Broz Tito)가 대립을 빚으면서 소련은 1948년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중단하였다.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전력 상황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전후에 야심찬 5개년 계획을 세웠는데, 소련의 경제 제 재는 유고슬라비아의 경제에 부담을 주었다. 유고슬라비아의 계획은 산 업화율을 1939년 40%에서 1951년 64%로 증가시키고, 농업화율은 1939년 60%에서 1951년 35%로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산업발전을 위 해서 광물자원 채굴이 매우 중요했으며 이를 위해서 수력발전소에서 전력생산을 종전보다 400% 이상 증가시켜야 했다(아래 표 참조).

25) NATO(Mar. 12, 1962), “NATO Countries’ Policy in the Economic Commission for Europe,” file AC/127, document WP/82. Lagendijk(2008), p.174에서 재인용 26) 냉전시대 유고슬라비아 전력부문에 대한 소련과 미국 및 서유럽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Lagendijk(2008), p.174-180의 내용을 요약 정리했음.

분야 예산

채굴·금속 31

전력 30

제조업 55

통신 72

농업 19

기타 71

합계 278

자료: Caesar(1962), “Yugoslavia: Geography and Postwar Planning,” Transactions and Papers, Vol.30, p.34, Lagendijk(2008), p.175 재인용

<표 2-9> 유고슬라비아의 5개년 계획(1947~51년)

(단위: 백만 디나르)

UNECE 사무국은 역내 주요 전력 수출국으로서 유고슬라비아의 잠 재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다른 주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도 단절되었는데, 그래서 서 유럽 국가들로의 전력 수출 확대를 희망하게 되었다. 1950년에 오스트 리아, 서독,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는 UNECE의 후원으로 전력수출에 관한 연구그룹을 조직하였다. 여기서 법적·경제적·재정적·기술적 관점 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전력수출에 대한 연구가 시행되었다. 유고슬라비 아 내 Idnjca, Lika-Gacka, Cetina, Trebisnjica 등에 대형 발전소와 다 국간 송전선을 건설해서 자국 전력 수요와 수출 물량을 동시에 충족시 키는 구상이 세워졌다.

자료: Document EP(March 1954), "Yougelexport", No.1, p.16, Lagendijk(2008), p.176 에서 재인용

[그림 2-5]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오스트리아・서독간 전력망 연계 구상

이러한 연구를 통해 도출된 문제점 중 하나는 이러한 계획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는 가에 있었다. 당시에 IBRD(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는 한 국가의 정부에게 자 금을 빌려주었지만, 다자간협의체에게 자금을 빌려주지 않았다. 기술 적 부분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연구보고서 결과에 대한 신뢰에 있어서 서방국가들은 UN전문가가 제출한 보고서를 더 신뢰한 반면, 유고슬라비아는 자국의 전문가가 제출한 보고서를 더 신뢰하였다. 또 한, 외교적인 분쟁도 유고슬라비아 전력 수출 프로젝트에 장애물로 되 었다. 이전에 서독은 유고슬라비아에 4억 마르크를 빌려주었는데 유고

슬라비아는 전쟁 보상금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갚지 않았었다. 서독 대 표는 1957년 12월, 동 프로젝트의 논의에서 빠졌다. 유고슬라비아의 알루미늄 생산기업인 Yougelexport가 동 프로젝트의 시행자로 되었는 데, 미국의 원조와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재정지원을 통해 발전소를 건 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전소들은 유고슬라비아 자체의 재 정으로 건설되었다. 이후에 유고슬라비아가 스탈린의 후계자인 크루슈 체프와 1954년 관계를 회복하면서 소련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56 년 유고슬라비아는 CMEA 국가들간 전력 교환과 다뉴브강 수력 자원 활용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련을 포함한 CMEA 국가들 의 참여가 유고슬라비아와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종료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나. UNECE의 범 유럽(all-european) 전력협력

UNECE는 동서 유럽이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지원해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자 했다. UNECE의 미르달(Gunnar Myrdal) 사무총장은 냉전으로 인해 유럽 전체가 경제적 발전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고 생각 했다. 그는 유럽 내 교역을 촉진시키기 위해 UNECE가 “소련과 그 위 성국을 포함하여 모든 유럽 국가를 위한 범유럽(all-European)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그는 소련 대표를 조직 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으며, 모든 국가가 국제조직에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동유럽 국가들이 1955년부터 UN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27) 그는 “하나 된 유럽에서 석유·가스 파이프라인이 중동으로부터 대규모 소비지로 자 유롭게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남에서 북, 동에서 서로 전 대륙을 가로질러 연료들이 수송될 수 있을 것이다. 석탄 자원을 유럽 전체적인 관점에서 봐야 하며 정치적인 갈등과 무관한 지리적인 요인으로만 간주하여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 음. Lagendijk(2008), p.218

UNECE의 중앙위원회와는 달리 기술위원회에서는 주로 정치인보다 전기기술자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UNECE 산하에 전력위원회(Committee on Electric Power, CoEP)는 냉전 적대감을 최소화하고, 중동부 유럽 국가를 최대한 많이 포함시키려고 하였다. CoEP는 전쟁 기간 중에 논 의되었던 유럽통합 전력망 계획은 비현실적이며 경제적이지 않지만, 국가간 전력망 연계는 역내 화력 및 수력 자원의 활용도를 높이고 긴 급한 수급 불안정 상황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데 필요하다고 주장했 다. 또한, CoEP는 각국의 법률이 국가간 전력교역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UNECE도 유럽 국가간 전력협력에 있어서 OEEC 및 ECA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국가간 전력 교역을 통해 예기 치 않은 전력중단 사태에 대비하고, 수력발전소에서의 계절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된 잉여 전력을 인접 국가들로 공급함으로써 역내 발전자 원의 효율적 활용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UNECE는 OEEC, ECA와 달리 서유럽 국가들에 국한되지 않고 동유럽국가(폴란드, 체코슬라비키아,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오스트리아를 통과국으로 해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전력을 상호 융통하는 장기 투자계획들도 발표 했다.28)

다. 1970년대 전력수급 불안정 경험

전후 복구사업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각국의 에너지 소비가 기하급수적 으로 증가하였다. 유럽은 전력 생산의 주요 원료였던 석탄과 석유를 해외 로부터 수입하였다. 정책결정자들은 긴급히 에너지 정책을 새롭게 수립해 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제 해결 방안의 일환으로 제기된 국

28) Lagendijk(2008), p.166

가간 전력망 연계는 서유럽 회원국 간 내부 전력망을 강화하거나, UCPTE 회원국 외에 동유럽 국가와의 신규 연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OEEC는 1955년에 ‘유럽 에너지 문제의 몇 가지 측면(Some Aspects of the European Energy Problem)’과 ‘유럽의 에너지 수요 증가(Europe’s Growing Need of Energy)’라는 보고서를 각각 발간하였다.29) 당시 서 유럽의 에너지 소비는 연간 7%씩 증가했다.30) 전후 서유럽에서 빠른 전력소비 증가에 대응해서 서유럽 국가들은 개별국가 및 서유럽 지역 전체 차원에서 전력 수급 안정을 위해 역내 수력과 석탄을 대체 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역내와 역외에서 찾아야만 했다.

한편, NATO 회원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의 에너지 자원을 서유럽으로 공급받는 방안이 UNIPEDE와 UCPTE에서 제기되었다.

1964년에 UNIPEDE 내 ‘전력망 연계 연구위원회’는 서유럽의 전력망 연계 기술이 매우 발전되어 주변국으로의 전력망 연계가 빠르게 이루 어질 수 있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1960년대 초에 380kV 송전 시스템 이 개발되었고 기존 시스템을 확장하는 형태로 제안되었다. 동유럽 국 가들은 UNECE 회의에서 이와 비슷하게 주장했다. 당시 동유럽 국가 들은 CDO/IPS라는 전력풀(power pool)을 조직하고 있었다.31)

당시에 동-서 유럽간 전력망 연계에 있어서 안정적인 동기 운전에는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오스트리아-유고슬라비아 간 SUDEL 전력망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가 포함되어 있는 UCPTE 전력망, 그리고 유고슬로비아가 포함되어 있는 CDO 전력망 등과도 각

29) Louis Armand(1955), Some Aspects of the European Energy Problem: Suggestions for Collective Action, Paris: OEEC. OEEC(1956), Europe’s Growing Need of Energy: How Can They Be Met? A Report Prepared by a Group of Experts, Paris:

OEEC.

30) OEEC(1956), p.33.

31) Lagendijk(2008), p.181

각 분리되어 운영되었다. 또한, 1963년에 연결된 오스트리아-체코슬로 바키아 간 송전선도 양국의 통합 전력망에 접속되어 있지 않고 독립적 으로 운영되었다.

[그림 2-6] SUDEL 전력망(1970년)

자료: UCPTE(1970), SUDEL, Lagendijk(2008), p.183에서 재인용

오스트리아는 지리적으로 서유럽과 동유럽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1960년대 초부터 통과국으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오스트리 아는 1955년에 영세중립을 선언했다. 이는 오스트리아가 동유럽 인접국에 게 계통운영자로서 더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림 2-7] 1963년 중・동유럽 국가간 전력망 연계 계획

자료: UNECE(1964), Outline of a Study on the Possibilities of Increasing Interconnexion Between Electric Power Transmission Networks in Europe, Geneva, Lagendijk (2008), p.185에서 재인용

1963년에 UNECE는 유럽 전체 전력망 연계 계획을 발표했는데, 여 기에는 서유럽의 수력발전 자원이 고갈되고 공급 불안정이 증대되기 때문에 동서 유럽 간 전력망 연계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32) 구체적으로 서독의 자금 지원으로 폴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 내 신규 발전소를 건설하고, 여기서 생산된 전력을 동독 송전망을 이용해서 서독으로 공급하는 방안도 있었다. 또한, 유고슬라 비아의 수력 발전자원을 추가로 개발해서 서독과 오스트리아로 전력을 공급하는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UNECE의 계획에 대해 일부 유럽국가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서독을 포함한 다른 국가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서독 은 동 계획에 동독이 포함되는 것을 정치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크게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신규 발전소 건설을 포함한 대규모 전력망 연계 사업은 관련 국가들간에 강한 신뢰가 구축되어야 하며, 특히 서독, 영 국, 벨기에, 그리고 미국 등의 신뢰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전력분야에서 동-서간의 냉전 분위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 다. 많은 사람들은 서독이 동-서간 협력 기회를 찾고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NATO도 미래 동서간 화합의 가능성에 대해 연구 하기 시작했다. 서독의 윌리 브랜트(Willy Brandt) 외교장관은 동유럽 에 대해 ‘Ostpolitik’로 알려진 유화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미국의 존슨 대통령도 1966년 연설을 통해 동유럽과 화합과 협력을 강조하는 외교 정책을 발표했다.33)

32) Lagendijk(2008), p.184

33) Helga Haftendorn(2001), “The Adaptation of the NATO Alliance to a Period of Détente: The 1967 Harmel Report,”, Crises and Compromises: The European Project 1963-1969, Wilfried Loth, Baden-Baden, pp.285-286., Lagendijk(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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