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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체제의 대외전략

문서에서 김정일 체제의 연구 (페이지 42-56)

Ⅲ. 김정일 체제의 정당화 논리와 대외전략

3. 김정일 체제의 대외전략

1) 김정일 체제의 대남전략 : 특성과 변화

(1) 김정일 체제의 대남정책 기조

북한은 1964년 2월이래 3대(북한‧남한‧국제)혁명역량 강화를 통한 ①사회주의체제 의 유지와 ③남한의 적화통일을 중요한 국가목표로 간주해 왔다. 1980년대 말 이후 지 난 10년간 소련 및 동구의 체제변혁과 북한내 체제위기가 가속화되면서 사회주의체제 유지라는 첫 번째의 목표에 주력하고 있으나, 이것을 북한이 남한의 적화통일이라는 두 번째의 국가목표를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국가목표들에 대한 비중상의 변화 라고 보아야 한다.

이같은 변화는 1988년 김일성의 신년사 중 ‘先 남북공존, 後 연방통일’이라는 주장에 서 드러나기 시작하였으며, 동구 및 소련 사회주의체제 해체로 북한체제의 취약점이 노 정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체제유지라는 국가목표(‘先 남북공존’ 주 장)를 남북한관계의 실질적 개선과 평화적 공존을 통해 성취하려 하는 데에는 소극적 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북한은 1991년 12윌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남북사이의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 한 기본합의서」 작성에 합의함으로써 남북대화를 통한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듯 보 였으나, 1993년 1월 한‧미 양국의 팀스피리트훈련 실시 결정을 계기로 남북대화를 중단 하였다.

김일성은 1993년 4윌 「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하여, 남조선혁명을 통한 하나의 조선 건설이라는 기존의 패권적 혁명전략에서 남북한간 ‘현상유지적 경쟁전략’으로 이 행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민족자주, 사대주의 및 민족허무주의 배격을 강조하여 남한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협력과 지원을 배제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었다.

북한은 핵개발 의혹을 둘러싸고 IAEA의 특별사찰 요구 등 국제적 압력을 받던 중, 1993년 3윌 NPT를 탈퇴함으로써 체제유지라는 국가목표를 미국(또는 미국이 대표하는 국제사회)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성취하려는 전략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1994년 7월 김일성의 사망으로 김정일은 대미관계에서 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핵동결 대가로 경수로 건설을 양보 받아내는 1994년 10윌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결국 김정일은 핵문제를 계기로 체제유지라는 국가목표를 위해 1993년경부터 ‘통미봉

남(通美封南)’으로 요약되는 대남 및 대외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하는 바, 이것은 대미관 계 개선을 꾀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및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는 반면, 남한과 는 대화를 단절하고 적대관계를 고수하는 것이었다.50)

(2) 김정일 체제의 대남정책 동향과 전망

1998년 9월 5일 북한은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를 개최하 여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키고 국가주석제의 폐지를 포함한 정부기구의 대폭적인 개편 을 실행했다. 이는 북한이 1994년 7월 김일성주석 사망 이후 줄곧 유지해왔던 비상관리 체제를 최종적으로 마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동안 북한은 내외 경제‧사회환경의 악화로 인해 정부기구와 경제시스템이 정상적 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주민들에게 ‘고난의 행군’을 호소하면서 ‘준전시체제’로 위기극복을 꾀해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북한 지도부는 최악의 상황이 이미 지나갔다 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이번 최고인민회의는 하루만에 끝나 상징적인 의미 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의 ‘축배’ 분위기까지 만들어냈는 데, 이는 북한 지도부가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했다는 하나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첫째, 1995, 96년에 발생한 대규모 수재가 북한경제에 가져다 준 1차적 영향이 이미 기본적으로 끝났다는 점이다. 식량난을 포함한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은 장기적인 성질 을 띠고 있는데, 2년 남짓한 기간을 통해 북한 경제시스템은 이미 어느 정도 이러한 상 황에 적응되었다.

둘째. IMF사태를 맞으면서 북한에 대한 한국의 경제적 우위가 상대적으로 크게 약화 되는 바람에 북한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IMF관리체제는 대북 협 상력 약화라는 부정적 효과와 북한의 흡수통일 두려움 완화라는 긍정적 효과의 두 가 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남한에서는 대북지원에 부정적인 보수주의, 조건부 지원을 표명하는 자유주의, 전면지원을 강조하는 급진주의적 여론이 상호 경쟁하는 가운데 대체로 대북지원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 또는 신중성에 대한 요

50) 1994년 10윌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와 함께 1996년 4월 한‧미 정상들에 의한 「4자회담」제 의는 한반도문제가 국제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북한은 이같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 서 ‘通美封南’을 통한 남한 배제 정책을 보다 구체화시켜 나갔음.

청이 높아짐에 따라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 입장이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개방경제체제의 약점을 노출한 세계적 금융위기로 인해 북한 지도부는 대외개 방 정책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북한 지도부는 지금까 지 개방과 외자도입 실적이 부진한 데 대해 자위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없이 자 주적으로 경제개방 방식을 선택할 필요성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할 구실을 가지게 된 것 이다. 한편, 북한도 점진적인 개혁‧개방으로 인해 경제위기의 영향을 적게 받고 국제사 회에서 영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의 위상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내외정세에 대한 새로운 판단은 북한 지도부의 대외전략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 확실하다. 만약 한국정부가 북한의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IMF이 전의 사고 방식으로 북한을 바라본다면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1998년 4월에 북경에서 열렸던 남북한 비료회담이 결렬된 것은 바로 북한 이 경제사정 때문에 비료를 얻기 위해 큰 양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정부당국의 안일한 판단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은 그 동안 한국의 새 정부가 과거 정부와는 달리 확실히 ‘흡수통일’ 할 의지가 없다는 입장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으며, 동시에 IMF시대에 한국도 그러한 능력이 없 을 것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이 향후 남북 관계에서 어느 정도 여유를 보이며 심지어 과거와는 달리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주도권을 쥐려고 할 가능성까지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두가지 위협을 보이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첫째, 최근까지 북한은 정치적 불안정성 지속, 경제적 불안정 요인 점증 속에서 ‘사회 주의 혁명역량’은 대체로 약화되는 추세에 처해 있다. 북한은 체제 생존을 위해 내부적 으로는 조정, 즉 통제된 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대외관계 개선과 국제적 지원 획득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예컨대, 김일성 사망 이후 각종 상징조작과 사상 사업의 강화를 통해 김정일 정권의 정당성 제고에 심혈을 기울여왔으며. 최근 ‘强盛大 國’론을 새롭게 주창, 주민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코자 노력하는 등 정치적 정당성 강화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군사력 강화와 관련, 군사력 증대정책 및 군부 우대정책의 지속을 통해 군사문화의 확산을 통한 ‘전사회의 군사화’작업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 북한 지도부는 이중적인 정세 인식을 표출하고 있다. 예컨대, 대내외 상황변화 속에서 북한 지도부는 체제유지를 최우선적 과제로 인식하는 정세관을 보이고 있다.

1998년에도 ‘경제건설’이 ‘최대의 힘을 넣어야 할 주되는 전선’이며 ‘자주적 평화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게 될 역사적인 해’로 강조하였으며 김정일의 국방위원장 재 추대 에 즈음해 ‘강성대국’론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 그 실례이다.

향후 북한은 과거보다 현실 타협적 정책을 보다 많이 고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비록 IMF사태로 남한 ‘혁명역량’이 다소 회복되더라도, 북한 및 국제 ‘혁명역량’의 약화 추세 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남관계에 있어서도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직후보 다 상대적으로 유화정책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은 敵對的 공존에 서 柔化的 공존으로의 전술적 전환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위의 두 가지 위협은 북한이 1998년 상반기에 보여준 대남전략과 큰 차이가 없는 것 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은 ‘남북당국대표회담’ (1998.4.11∼17.북경)과 ‘금강산 관광사업’

을 추진하는 동시에, ‘8‧15통일대축전’과 ‘잠수정 및 무장간첩 침투사건’(1998.6.22, 7.12) 을 병행함으로써 대화와 전복의 이중 전략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따라 서 최근에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대남정책 변화는 전략적 변화라기보다는 전술적 변화 로 성격 규정할 수 있을 것이며, 당분간 이같은 전술적 변화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 다.51)

(3) 남북 대화 : 양자적 차원과 다자적 차원

남북관계는 다음의 두 차원에서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① 그동안 북한이 남북한간의 적당한 대립과 긴장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 위기의식을 대

남북관계는 다음의 두 차원에서 김정일 정권의 안정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① 그동안 북한이 남북한간의 적당한 대립과 긴장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 위기의식을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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