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김일성-김정일 쌍두체제의 성립

문서에서 김정일 체제의 연구 (페이지 18-25)

Ⅱ. 김정일의 성장과 등장과정

3. 김일성-김정일 쌍두체제의 성립

1) 후계체제의 확립과 수령 승계

김정일이 후계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공개한 것은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6 차 대회에서였다. 제5차 대회가 있은지 10년만에 열린 이 대회에서 조선로동당은 중앙지도 기관 선거를 통해 신세대의 등장과 함께 김정일 후계체제의 확립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였다.

중앙조직의 경우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가 폐지되는 대신 정치국이 신설되고 정치국 내에 정치국과 같은 기능(전원회의와 전원회의 사이에 당중앙위원회의 명의로 당의 모든 사업을

16) 고유한(1997), 전게서, p.107.

조직 지도한다)을 하는 상무위원회가 신설되었다. 물론 이러한 중앙조직의 개편은 두말할 나위없이 김정일 후계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회의는 먼저 중앙위원회 총비서 로 김일성을 선출한 뒤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김일성 김일 오진우 김정일 이종옥을 선출하였으며, 정치국 위원으로 상무위원들을 포함하여 박성철 최현 등 정위원 19명과 후보 위원 15명을 뽑았다. 이와 함께 비서국 비서로는 김일성 김정일을 비롯하여 10명을, 군사위 원회 군사위원으로는 김일성 김정일을 비롯하여 19명을 선출하였다.17)

이상의 지도부 인선에서 김정일은 김일성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정치국‧비서국‧군사위원 회라는 당내 3대권력기구에 모두 선출되었다. 이는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 공식서열로는 김 일성 김일 오진우에 이어 4위였으나 실질적으로 2인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일성 김정 일을 제외한 상무위원 3명중 국가 부주석 김일은 건강 등의 이유로 사실상 은퇴 상태에 있 었고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김정일을 후계자로 옹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김정일 측근 이었으며, 정무원 총리 이종옥은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실무형 지도자였다. 따라서 상무 위원회는 사실상 김일성 김정일의 2인 위원회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상무위원회가 김정일 후계체제의 확립을 촉진하기 위해서 신설된 기구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제6차 당대회가 김정일 후계체제의 확립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단순히 그의 위치 강화 때문은 아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 대회가 1980년대의 중요한 과제로

‘혁명전통의 계승발전’을 공식화했다는 점이다. 김일성의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에 근 거하여 작성된 제6차 당대회 결정서는 1970년대 총결기간 동안 당내에서는 당사업의 획기 적인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 주된 성과는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하며 우리 당 을 영원히 주체의 혁명적 당으로 강화 발전시킬 수 있는 조직사상적 기초가 다져진 것”이 라고 스스로 평가하였다. 물론 이러한 평가의 배경에는 김정일이 지도한 3대혁명소조운동을 통해서 전 사회적으로 진행된 세대교체 작업과 김정일의 후계체제 확립문제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는 자체적인 평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에 기초하여 당대회 결정서는 “혁명의 세대가 바뀌는 현실은 혁명전통을 계 승 발전시키는데 대한 문제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면서 ‘주체의 혁명의 대를 잇는 과업’을 제기하였다.18) 이것은 당이 1980년대에는 전사회적인 세대교체와 김정일 후계체계 의 공고화 작업을 중요한 과제로 추진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7) 상게서, pp.34∼37.

18) 통일부(1998.9.6),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 결과 , p.67.

제6차 당대회에서 내외에 공식적으로 김정일의 후계자의 위치가 공개된 뒤 북한사회에서 는 그에 대한 찬양이 공개화 되기 시작하였다. 로동신문 을 비롯한 각종 보도 출판물들은

‘영광스러운 당중앙’이 1960, 1970년대에 보여준 ‘뛰어난’ 지도력을 선전하는데 동원되었다.

북한문헌들이 1960년대 말 이후 1970∼1980년대에 이루어진 북한사회의 중요한 사업과 성과들을 대부분 김정일의 치적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인 것으로 보 인다. 첫째, 이미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실제로 김정일이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경우가 많았다. 둘째, 주체사관에 입각한 서술이 갖는 특징이다. 주체사관은 자주성에 기초 한 주체적 관점을 견지하고 '수령'의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는 지점을 서술하며 '수령'지도 의 당연한 귀결로 승리적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주체사상체계는 '수령'의 지도와 후계자의 지도를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수 령의 업적과 후계자의 업적은 분리되지 않는다. 셋째, 김정일의 인민적 정통성 확보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1981년 6월부터는 언론이 ‘영광스러운 당중앙’이라는 호칭 대신에 ‘친애하는 지도자 김 정일 동지’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19) 1982년부터는 그를 찬양하는 전기들이 출판 되었으며 그의 성장 과정과 관련이 있는 지역들이 혁명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20) 김정일은 1982년 7월 시작된 제2차 7개년 계획(1978년에 시작)이 예상외로 부진하게 추진 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1980년대 속도창조운동’을 발기하였다. 이 운동은 “사회주의 건 설의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는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켜 제2차 7개년 계획을 수행하고 1980 년대 사회주의 건설의 10대 전망목표를 성과적으로 달성”할 것을 목적으로 전개되었다.21)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평양의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김일성 경기장, 인민대학습당, 창광 거리와 문수거리 등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얻은 건설속도를 모든 부문에까지 확대시켜 생산 과 건설에 일대 약진을 가져오게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1982년 7월 김책제철 소의 노동자 궐기대회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제6차 당대회 이후 김일성의 현지 지도의 빈도수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대신에 김정일의 실무지도와 시찰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22)

19) 내외통신 1795호, (1981.6.6) p.17.

20) 김정일 관련 사적지로는 백두산 밀영 혁명사적지(그의 출생지로 선전되는 곳), 어은산 혁명사적지(평양 시 어은동, 김정일이 어린시절을 보낸 곳), 덕골 혁명사적지(평북 구장군, 전쟁 당시 그가 장자산으로 피난가다가 하루 낮 동안 체류했다는 곳), 장자산 혁명사적지(자강도 강계시, 그가 전쟁 당시 피신하여 전선원호사업을 했다는 곳), 내외통신 567호, (1987,12.11), p.295.

21) 내외통신 , (1984.11.30), pp.73∼78.

초기 김정일의 실무지도나 시찰은 주로 문화, 보건, 체육 등에 치중되고 김일성의 현지지 도나 시찰을 수행하는 보좌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1983년부터는 경제, 군사 부문 등에까지 공개활동의 폭이 넓어지고 그 성격도 ‘보좌’에서 독자적인 ‘지도’의 측면이 더 강해졌다.23)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이 권력승계 작업의 일환으로 경제사회 등 실무분야에서 자신의 현지지도의 역할을 김정일에게 넘기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의 실무지도나 시찰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경공업, 주택건설사업 등과 같은 인민생활 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부문의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사회주의 개혁 이 휘몰아치는 1980년대 말부터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김정일의 공개적인 현지지도와 시찰이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는 가운데 북한 언론들의 그에 대한 개인숭배 캠페인도 가속화되었다. 평양방송은 그의 ‘탁월한’ 지도능력을 선전하기 위해서 1984년 5,6월 김일성의 동구 방문기간 중 “전체 당원과 근로자들이 당중앙의 영도밑 에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기적과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면서 이 기간 동안 총공업생산액은 작년 비례 117% 신장했다고 발표하였다.24)

신문들은 공식석상에 나온 지도자들의 이름을 나열할 때 그의 이름을 다른 지도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중간활자로 쓰기 시작했으며 1987년이래 주체혁명 위업의 완성을 위하 여 ,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문헌집 , 김정일선집 등 여러 이름으로 그의 저작들이 출판되어 대중학습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김일성은 1986년 5월 31일 ‘김일성 고급 당학교’ 창립 40주년 기념연설에서 북한사회에서 ‘수령의 후계자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분명히 하였다.25)

김정일 개인숭배 캠페인은 두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먼저 북한의 이데올로기들은 인민적 정통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먼저 그의 생래적 정통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항 일 유격대 대장 김일성과 유격대 전사 김정숙을 부모로 둔 이른바 ‘혁명적 가문’과 자 22) 김일성의 1978년도에서 1984년도까지의 현지지도의 빈도수와 지도 일수의 추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8년 9회 41일, 1979년 14회 53일, 1980년 13회 35일, 1981년 13회 35일, 1982년 1회 24일, 1983년 6회 15일, 1984년 2회 2일, 한편 같은 기간 김정일의 실무지도는 1981년 3회, 1982년 2회, 1983년 3회, 1984년 7회였다.

내외통신 412호, (1984.11.30), pp.76∼77.

23) 1983년 김정일의 현지지도 대상은 남포갑문 건설현장과 고급장교 교육기관인 조선정치대학, 외교관 접 대시설인 옥류관 확장 공사장이었다. 그리고 1984년 실시된 7회의 실무지도는 경공업, 중공업 공장들과 대규모 건설현장, 수출품 전시장 등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김정일의 실무지도가 묘향산 개발지 구, 각종 경기장 등에 치중되었던 1981, 82년도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양상이다. 내외통신 360호,

23) 1983년 김정일의 현지지도 대상은 남포갑문 건설현장과 고급장교 교육기관인 조선정치대학, 외교관 접 대시설인 옥류관 확장 공사장이었다. 그리고 1984년 실시된 7회의 실무지도는 경공업, 중공업 공장들과 대규모 건설현장, 수출품 전시장 등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김정일의 실무지도가 묘향산 개발지 구, 각종 경기장 등에 치중되었던 1981, 82년도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양상이다. 내외통신 360호,

문서에서 김정일 체제의 연구 (페이지 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