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현실주의의 체득과 진보 질서의 균열 시도
2.2. 젠더화된 도시 질서를 전복하는 상상력
김채원이 소설에 관심이 없었던 자신이 동경 유학 시절 처음 글을 쓰 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는 점에서,287) 김채원의 유학 시절의 글들은 김 채원의 문학 세계의 시초가 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언니 김지원의 에세 이에서도 드러나는 사실로,288) 작가 자신과 타인이 증언하듯 김채원에게 유학 경험은 김채원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단초가 되었던 것으로 사료 된다. 덧붙여서, 김채원이 1983년 쓴 소설 「가득찬 조용함」(현대문학, 1983.1.)을 개작해 2010년대에 발표한 작품집 쪽배의 노래(현대문학, 2015)에 싣는가 하면, 2015년 베를린 필(현대문학, 2015)에서 1979년 소설 「초록빛 모자」(현대문학, 1979.6.)를 함께 읽을 소설로 선정하는 등 초기 단편 소설에 나타난 문제의식의 지속성을 2010년대에 이르러서 도 강조함을 고려할 때, 김채원의 유학 시절 소설을 비롯해 1980년대 초 반까지의 소설들을 통해 김채원의 문학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문제의식 과 미학 방식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을 앞당겨서 말하자면, 유학 시절의 소설에서는 환상과 상상력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돌아온 후의 소 설에서는 예술가 여성들이 만들어내는 1)뮤즈로서의 남성 3)파편화된 육 체 3)콜라주와 같은 초현실주의적 상상력들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며 김채 원의 초현실주의적 양식에 대한 경도를 증명하는 한편, 여성의 욕망을 체현하는 이미지들이 뮤즈로서의 여성이라는, 반복되어온 의미작용에 균 열을 낸다.289) 무엇보다 화자가 예술가라는 점에서 이 소설들을 김채원
287) 김채원(1993), 39면.
288) 김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고 신춘문예에 도전했던 자신과 달리, 김 채원은 어린 시절 많은 책을 놔두고 친구들과 놀러다니기를 좋아했고, 대학 무렵 에는 집에 놀러 오는 수많은 문인들을 보고도, 작가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김지원, 앞의 책, 392-393면.) 김지원에게 김채원이 글을 쓰겠다고 말한 시점은 일본에 그림 공부하러 갔다가 미국으로 와서 1년 쯤 공부를 하던 시점, 파리로 그림 공부를 하러 가기 직전이다.(김지원, 위의 책, 395면.)
289) Natalya Lusty, “Conlusion: Disturbing the Feminist Subject”, Surrealism, Feminism, Psychoanalysis, Routledge, 2016, p.152.
의 예술관을 대변하는 예술론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김채원 소설을 초 현실주의적 이론으로 설명할 근거가 될 것이다.
김채원이 동경, 뉴욕, 파리 등지의 진보했다고 여겨지는 대도시에서 유 학할 당시,290) 전세계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된 상태였으며, 한국 역시 기 술적 진보로 급진적인 산업화·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진보적 이념 운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도시는 다양한 권력, 억압 관계가 생성되는 대 표적 공간이 되었으며, 주류 담론으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된 ‘비체화된 주 체’들이 포진하게 되었다.291) 사람들은 도시에서 인종, 언어, 문화, 신념 이 서로 다른 다양한 타자를 마주하면서, 좌절, 분노, 불안과 같은 감정 의 격동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 시기 김채원은 “허공을 딛는듯한 나의 초라함”292)을 느끼고 물질문명이 발달한 대도시에 대한 비판의식을 지니게 된다.293)
이에 따라, 이 시기 쓴 소설에서 물질문명 이면의 관계 단절과 인간 소 외라는 문제의식이 나타나는데, 중요한 점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남녀 간 의 사랑의 불화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대도시에서 유학하는 여 성 화자들은 물질 문명을 내면화한 남성이 강요하는 질서에 분노와 불안 의 감정, 메스꺼움과 같은 감각을 느끼면서 소외되기를 택한다. 이는, 김 채원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물질 문명을 넘어 젠더화된 도시에 대
290) 김채원은 1972년부터 집을 떠나 만 7년간 동경, 뉴욕, 파리를 전전한다. 1972년 동경에 가 동경 한국초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며, ‘크라식’이라는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1975년에는 언니 김지원이 사는 뉴욕의 아트스튜던트리그에 서 공부한다. 1976년에 파리로 가서 화가 이응노를 도우며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다가, 1978년 귀국한다. 동경 하숙집 아들, 동경 시절 만난 교포 작가 이희성, 음악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하자, 파리에서 만난 화가 이응노가 새로운 문을 열어줬다고 김채원은 그의 수필에 쓴다.
291) 정현주, 「젠더화된 도시담론 구축을 위한 시론적 검토: 서구 페미니스트 도시 연구의 기여와 한계 및 한국 도시지리학의 과제」, 한국도시지리학회지 19, 한국 도시지리학회, 2016, 294-295면.
292) 김채원, 「파리의 창」, 현대문학 730, 현대문학 편집부, 2015.10., 214면.
293) “1970년대 초, 내가 들어 있던 하숙집 아들이, 한국은 현 정권이 국민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어 놓고 TV나 스포츠에만 열을 올리게 해서 정권을 연장해 나 간다, 국민들의 머리가 깨이지 못하게 막고 있고 있다고 말했다. … 그 얘기는 내 게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주었다. … 동경에서 뉴욕으 로 갔고, 뉴욕에서 다시 파리로 갔다. 무엇이라고 확실히 윤곽을 잡은 것은 아니 지만 아마도 희구하는 세계를 찾아서였을 것이다.” (김채원(1993), 23-24면.)
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대도시는 문명, 이성, 진보의 요람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남성성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서구 근대는 공간을 도시와 시골, 도시와 재생산 영역인 가정, 도시와 자연 등으로 이 분화시키고, 전자는 남성성과, 후자는 여성성과 결부시켜, 과학의 요구 조건인 객관성을 근거로 들어 전자의 우월성을 정당화했다.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영역은 객관성을 담지하지 않아 과학적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문명, 문화, 진보를 도시로, 그에 대비되는 야만, 자연을 비도 시로 인식하고, 전자가 후자보다 우월하다는 도시라는 담론은, 젠더화된 이분법에 기초한다.294)
김채원의 특이점은, 이러한 젠더화된 도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기 인한다. 김채원은 도시에서 작용하는 권력과 억압 체계에 가부장제를 겹 쳐 사유하며, 젠더화된 도시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김채원 소설에 나타 난 환상과 가부장제와의 관련성을 논하는 연구에는 변신원295)의 김채원 론이 있는데, 변신원에 따르면, 김채원 소설의 여성들은 자신에게 가해지 는 구속을 감내하며 분열적 정서를 지닌 인물들로, 지속적인 억압 장치 를 극복하기 위해서 “현실의 가차 없는 논리”296)에 저항하는 여성만의 공간, 환상을 창조해낸다. 억압에 대응하여 여성 화자가 환멸을 느끼고 환상에 빠지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우회적 해체라고 변신원은 논 한다. 그러나, 김채원 소설의 “이국적 배경은 민족적, 역사적 현실에서 자유로워져 좀더 보편적인 인변신원, 「환멸에서 환상으로-김채원론」,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 한길사, 2000.간의 문제를 통찰하는 데 도움 을 준다”, “사회문제”가 아닌 “모녀관계나 남녀관계, 친구관계에서 일어 나는 소소한 갈등” 등 “우리에게 친근한 일상들을 소재”로 다룬다는 논 의는,297) 재고할 만하다. 일상은 차별과 억압이 벌어지고 삶과 노동력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정치적 공간으로 비정치적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 다.298)
294) 정현주, 앞의 글, 287-288면 참고.
295) 변신원, 「환멸에서 환상으로-김채원론」,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 한길사, 2000.
296) 변신원, 위의 글, 114면.
297) 변신원, 앞의 글, 117면.
공적인 것은 외향적, 객관적이고, 사적인 것은 내향적, 주관적이라는 젠 더 이분법적 공적·사적 분리 논리299)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구분 자체를 문제시할 때, 제국의 도시들을 활보하며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을 지니는 여성 화자들을 그리는 소설들과, 도시에서 남성과 관계 맺은 것을 계기로 집 안에 소속되어 남성에게 분노하는 여성 화자들을 그리는 소설들이 공존하는 김채원의 문학 세계는 근대 문명이 주조해낸, 젠더화된 도시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로 읽을 수 있다. 김채원의 소설 세계에서, 제국 도시에서 살며 남성성의 도시를 경험한 여성 화자들은, 다른 소설들에서 어느 순간 외부적 배경이 지워진 ‘집 안’에 들어가있는 여성 화자로 변모한다. 그 외적 배경을 배제시킨 일상이라는 공간은, 완 전한 것으로서의 진보, 문명, 도시, 남성 관념을 부정하는 한편, ‘집 안’의 밖을 상상하게 하게 하며 은폐된 지리적 불균등을 깨우치도록 한다.300)
요약하자면, 일견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김채원 소설의 공간은 그 자체 로 도시라는 담론과 그 담론이 만들어낸 젠더적 문제에 균열을 내며, 그
298) 손유경, 앞의 책, 29면.
299) 도린 매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욱 지방화된 삶을 산다는 논의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하는 이분법에 의거한다며,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 자체를 문제 시 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 논한다. 이에 대해 역자인 정현주는, “공적·사적 분리(public and private divide)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서양의 문 화적 관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젠더 이분법의 틀이 되었”음을 강조하며, 이 분리 에 의하여 “공적인 남성은 외향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주체가 되”는 반면,
“사적인 여성은 내향적이며,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주체로 규정”된다고 보충한다.
(도린 매시, 정현주역, 공간, 장소, 젠더,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5, 55면.) 300) 데리다에 따르면, 보충물은 보충되는 것의 풍요에 더해지는 것이 되기도, 보충
되는 것의 결핍에 더해져 보충되는 것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되기도 한다. 다 시 말하면, 보충물은 그것이 보충하는 것의 완전한 현전(presence)을 암시하기도 하고, 부족한 현전(presence)을 암시하기도 한다. 즉, 보충물이 있어서 보충되는 것인 현전(presence)이 있는 것이다. 결국 어떤 것의 현전(presence)은 경험하는 주체가 직접 접촉할 수 없으며, 반드시 그것의 보충물, 즉 재현(representation)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에 따라, 존재는 기원적이고, 순수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보충물은 2차적이고, 인위적인 것으로 계층화되지만, 보충물이 있어야 현전 (presence)은 존재할 수 있으므로 현전(presence)은 언제나 연기(defer)된다.
(Serk Bae Suh, “The Location of “Korean” Culture-Choe Chaeso and Korean Literature in a Time of Transition“, Treacherous Translation: Culture, Nationalism, and Colonialism in Korea and Japan from the 1910s to the 1960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3, p.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