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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의 관계에서 모색되는 미의 가능성

3. 모성적 사유와 초현실주의를 통한 미(美)의 창조

3.2. 분신의 관계에서 모색되는 미의 가능성

이 절에서는 김채원 소설에 나타난 분신 모티프가 초현실주의적 사랑이 라는 미적 체험으로까지 연결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채원 소설 에서 ‘분신’은 자매애를 의미하는데, 도시 질서에 상처받은 인물들은 자 매애로써 욕망, 사랑, 삶을 성찰하고 추구해간다. 인물들이 초현실주의적 분신을 경유해 ‘대립적이라 상정되는 것들의 조화’로서의 초현실주의적 사랑에 도달할 때, 사랑이 지닌 혁명적 에너지로써 예술을 창조할 수 있 다. 이제까지 두려움에 떨며 사랑에 실패하고 불통감을 느끼던 여성들은, 분신과의 교류를 통해 사랑이라는 욕망을 지니게 되며 “내가 하겠다”449) 라는 마음가짐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노래”450)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즉, 분신의 존재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 내기라는 행위를 하게 하며,451) 이렇게 자매애를 경유해 삶의 성찰과 사랑의 추구로써 창 조해낸 예술을 통해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해진다. 이때 현대 문명이 부

448) 발터 벤야민(2008), 349면.

449) 김채원, 형자와 그 옆사람, 도서출판 창, 1993, 242면. 이 책은 앞으로 제목과 함께 표기.

450) 김채원, 형자와 그 옆사람, 244면.

451) 변신원, 앞의 글, 133면.

여한 상처 역시 치유된다.

김채원 소설에서 화자들은 어떤 측면에서 자신과 닮아 있는 여성들과 만나는데, 이들은 “쌍둥이”(「자전거를 타고」)452), “분신”453)(「여름의 환- 미친 사랑의 노래」)이라고 소설에서 직접 언급되는 한편, 연구자들 역시

“쌍둥이를 넘어서 분신”454) 같다고 논한다. 분신을 형성하는 관계는 친 구, 부부 등이 있을 수 있지만, 김채원이 언니 김지원을 “分身”455)이라 언급한다는 점에서, 김채원의 분신 모티프는 ‘자매애’와 깊은 연관이 있 는 듯하다.456) 수필에서 김채원은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살아 김지원과 서 로 너무 간섭하는 경향이 있다고 쓰는데, 이는 김채원과 김지원이 서로 의 자아를 형성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김채원은 언니와 “아직 옆에서 이야기하듯이 모든 일을 편지로 쓴다”고 밝히며, 언니의 편지가 항상 꿈, 이상한 향수, 동경을 준다고 말한다.457) 김채원 소설 전반에 편재해있는 시간의식도 김지원으로부터 들었다고 김 채원은 회고한다.458) 김지원의 타계 후 김채원이 “가는 매 길목마다 서 있던 언니”라며 그녀가 없는 세상을 혼자 걸어가는 것이 과제라고 언급 한 점에서,459) 자매 김지원은 김채원의 삶에서나, 문학관의 형성에서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채원이 미국에 사는 사촌언니와 전화 통화하는 이야기가 담긴

「서산 너머에는」(현대문학, 2002.5.)을 언니 김지원을 모델로 썼다고 밝

452) 김채원 외(1990), 216면.

453) 김채원, 가을의 환, 열림원, 2003, 282면.

454) 권택영, 「수채화 같은 내면소설」, 달의 강, 해냄, 1997, 195면.

455) 김채원, 「언니의 편지」, 조선일보, 1981.12.12.

456) 변신원 역시, 「여름의 환-미친 사랑의 노래」에 나타난 여성 인물들 간의 감정 을 자매애라 논한 바 있다. (변신원, 위의 글, 133면.)

457) 김채원, 「언니의 편지」.

458) “‘시간은 수평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도 흐른다. 즉 과거, 현재, 미 래가 하나가 되는 지점이 있다’라고 언니는 얘기했었다. 언니가 떠난 후 그것이 수직으로 흐른다는 시간의 한 지점이었을까 생각해본다.” (김채원, 「비둘기」, 대문학721, 현대문학 편집부, 2015.1., 369면.)

459) “살아볼수록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더욱 간절하다-<쪽배의 노래>

작가 김채원.” Book DB. 2015.3.18. 수정,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 No=60340.

힌 바 있듯,460) 김채원의 소설에 여성 화자가 누군가에게 쓰는 편지가 삽입되거나, 멀리 있어 통화로만 소통하는 듯한 여성이 주요 인물로 등 장하는 것은, 김지원과의 관계를 상정한 듯하다. 편지로 이야기를 나누던 김채원과 김지원은 국제전화가 발달된 시점부터는 전화로 자주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보이며,461) 소설에서 편지를 받는 대상과 통화하는 여성은 동생, 사촌언니, 친구로 변화하기는 하지만, 김지원과 매우 닮아있기 때 문이다. 김채원, 김지원과 닮은 이 여성 인물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생각 을 나눔으로써 자기를 되돌아보고 삶을 성찰한다.

이러한 자매애로 맺어진 분신 관계는 초현실주의적 분신 모티프로 해석 이 가능하다. 핼 포스터는 초현실주의의 분신 모티프를 프로이트에 의거 해 설명하므로, 프로이트의 분신 모티프를 간략히 알아보자면, “한 인물 의 정신적 움직임이 다른 인물에게로 즉각적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통해 강조되어서 한 인물은 다른 인물의 지식과 감정과 모든 경험들에 관여”

하게 된다.462)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가 진정한 자아인지를 물어야 하거 나, 혹은 낯선 자아를 진정한 자아의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463) “자아의 분할, 구분, 교 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464) 이러한 과정을 지나 인물에게 자리 잡은 새로운 자아는 “옛날의 자아와 대립할 뿐만 아니라 자아를 관찰하고 비판하기도 한다”.465) 즉, 분신은 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자아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과거에 상실한 자아와 욕망을 불러일으킨 다.466)

그러나, 핼 포스터도 지적했듯, 초현실주의, 특히 본고에서 참고하는 브 르통의 초현실주의는 정신분석학을 일부 차용하긴 하지만, 프로이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골칫거리이기까지 했다.467) 무엇보다, 여성

460) 김채원, 앞의 인터뷰.

461) 김채원, 「깊은 골짜기 등불 향하는 마음으로」, 김지원 소설 선집 1- 폭설 外, 작가정신, 2014.

462)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장진 역,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열린책들, 1996, 122면.

463) 지그문트 프로이트, 위의 책, 122면.

464) 지그문트 프로이트, 위의 책, 122면.

465) 지그문트 프로이트, 위의 책, 123면.

466) 핼 포스터, 앞의 책, 79면.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를 신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 서,468) 프로이트의 분열적, 병리적 분신이 아닌 초현실주의적 양식인 ‘객 관적 우연’의 한 예로서의 분신 모티프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전술했 듯이 초현실주의의 존재 이유는 ‘화해’다.469) 젠더화된 도시를 살아가는 김채원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과 닮은 듯, 다른 분신과 만남으로써 자기 를 객관화시켜 되돌아보고,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욕망을 발견한다. 그때 비로소 자기 소외에서 벗어나 욕망의 대상이 아닌 욕망의 주체로 거듭나 며, 욕망의 주체가 된 이들은 사랑과 삶의 원칙을 탐구함으로써 의식적 현실이 아닌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지니게 되고 초현실주의적 사랑이 라는 미적인 창조에로 나아간다. 초현실주의에서 사랑은 나만의 순수한 희열이 아닌 타자와의 합일이다. 사랑은 타자의 존재와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나의 인식의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처럼 전혀 다른 성질을 가 진 두 세계의 융합으로서의 사랑은 초현실주의에서 예술의 창조적 에너 지가 되며,470) 연애는 혁명과 동격으로 찬양된다.471)

여성들 간의 욕망의 공유와 연대는 1970년대부터 소설 「밤인사」(현대 문학, 1976.12.), 「자전거를 타고」(문학사상, 1977.6.), 「밀월」(문학사상

, 1978.2.)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980년대 소설 「공중에는 또 하나 의 다른 방이」(문학사상, 1983.11.)에는 김채원이 묘사하는 김지원과 굉 장히 유사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인물이 화자인 휘자에게 건네는 편지 가 서사 곳곳에 삽입되며, 편지로의 공감으로 노래가 만들어질 수 있다 는 점이 강조된다. 특히 형자와 그 옆사람(1993)은 화자 형자, 분신인 윤희, 사랑과 미의 대상인 우진, 질서에 붙잡혀 있는 타자 ‘낯선 남자’의 구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 소설은 분신을 통해 타인과의 합일로서의 사랑을 배우고 추구함으로써 미적 언어를 창조할 수 있으며, 그 예술을 통해서 타자와 연결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후 「달의 몰락」(현대문학, 1994.12.)에 이르러서, 화자는 초현실주의적 사랑으로

467) 핼 포스터, 위의 책, 34면.

468) 휘트니 챠드윅, 앞의 책, 123면.

469) 핼 포스터, 앞의 책, 54면.

470) Andre Breton(1987), p.8.

471) 신현숙, 앞의 책, 83면.

서의 합일에 성공하며, 새로운 신화를 쓸 것임을 다짐한다. 마지막으로,

「봄날에 찍은 사진」(문학사상, 1995.7.)에서는 시간의식과 미적인 창조 가 결합된다. 이 소설에서, 화자가 선적인 시간을 거슬러서 발견한 여성 들의 합창은, 새로이 질서를 만들어내며 화자의 상처를 치유한다. 새로운 시간 질서를 통해 창조해낸 미(美)로써 비로소 치유가 가능해진 것이다.

먼저 여성 화자가 친구와 만남으로써 욕망과 새로운 시선을 지니게 되 는 서사는 1970년대 소설 「밤인사」, 「자전거를 타고」, 「밀월」에서부터 지 속적으로 나타나며, 여성들 간의 욕망의 공유를 통해 현대의 질서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밤인사」는 일본으로 유학가 음악실에서 일하는 아자가 함께 일하는 하루나, 요시꼬와 교류하며, 손님 재일교포 박상과의 미묘한 관계를 변화시켜가는 이야기다. 「밤인사」에서 아자는 조국의 통일과 민족주의 이념을 좇는 재일교포 남성 박상이 강요 하는 질서에 악마의 얼굴로 변해가면서도,472) 그의 말을 따른다. 그러나 아자는 “내가 나를 맡아서 애인과 싸워 나가기는 싫”473)은 자신과 상반 되어 “내가 나를 맡아서 싸워 나가는 것에 살아나가는 재미가 있다고 생 각”474)하는 여성 하루나와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허영 적이고 에고에 찬 남자보다 하루나, 요시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475) 라며 박상에게 선언하자, 심장 주위가 아파오며, “살아가기에 고달파하는 같은 민족의 한 남자”476)를 목격하게 된다. 이념지향적 남성에 대해 분 노하던 감정은 슬픔으로 바뀌고, 그의 눈물을 알아보는 눈이 생기는 것 이다.

아자가 하루나처럼 행동하기를 상상해보는 마지막 장면은, 아자가 하루 나와 같이 적극적으로 사랑과 욕망의 주체로서 도취될 준비가 되어있음 을 드러낸다. 도시에서 여성들은 공과 사 모두에서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데, 이러한 감정을 해소케 하는 장치가 바로 무엇을 욕망하고 소비하는

472) 중세에서 멜랑콜리는 악마적인 것으로 간주됐다는 점에서, 아자가 멜랑콜리적 감각을 느끼고 있다고 가늠해볼 수 있다. (백수향, 앞의 글, 21면.)

473) 김채원 외(1990), 274면.

474) 김채원 외(1990), 274면.

475) 김채원 외(1990), 283면.

476) 김채원 외(1990), 2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