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자기 이해와 예술경험
1. 예술경험과 공감
우리가 도덕적 인간이 되고자 할 때 예술 경험이 직·간접적으로 유용 한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 즉 선과 미의 관련성에 대한 주장은 역사 적으로 깊은 기원을 가진다. B.C 5세기경 그리스에서 심신을 함양할 수 있는 소수의 귀족에게 국한되어 사용되던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라는 용어는 ‘선(to kalon)’과 ‘미(to agathon)’의 합성어로 그 관련성을 잘 나타내며, 이것은 계몽주의에 와서 하나의 교육이 이상이 되었고 칸 트와 쉴러에게서 그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윤영돈, 2010). 이후 미 적 교육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예술과 도덕적 인간에 대한 연구는 현대까 지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그 중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보다 급진적으로 윤리학의 ‘내용’이 ‘예술’이 되어야 된다 고 주장하는 현대의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예술 중에서도 특히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윤리학적 지식의 성격과 내용이 어떤 것이 되어 야 하는지 제안한다.
누스바움은 ‘윤리’와 ‘도덕’을 다루는 철학적 작업이 ‘인물’과 ‘사건’이 없는 추상적인 글에서는 빈약하고 제한적인 작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1990, p. 290).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기원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 해에 기대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무대에 올려지던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든다. 이렇듯 윤리학과 문학을 관련 지 어 우리 삶의 문제로 끌어오는 작업은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행해진 예 술과 철학 간의 오래된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대화가 우리 삶 의 진짜 문제로서 살아날 수 있는 까닭은 누스바움(1990, p. 289)이 프로 스트(Proust)의 말을 인용하듯이 우리의 삶에서 특정한 자기 검열은 특 정한 맥락, 즉 그 생각을 환기시킬 만한 특정한 네러티브 형식을 요구하 기 때문이다. 문학의 형태로 제시되는 예술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은, 작품 안에서 특정한 상황에 놓인 특정한 인물이 대면하는 삶 의 문제로서 그것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즉, 우리의 삶과 관련된 가치에 대한 감수성이 가장 적절하게 불러일으켜지
려면, 우리에게는 그것과 관련된 특정 유형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은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형식을 빌어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을 비롯한 예술경험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도덕적 인간의 면모는 어떠한 것인 가? 이 질문에 대해 누스바움은 우리가 인간의 내면의 깊이에 대해 인식 하게 되고 이로써 타인과 상호작용할 때 그들의 내면을 존중할 수 있는 것에 도덕성의 핵심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예술을 통한 경험은 타 인을 사물이 아니라 온전한 인격체로 인지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가능 하게 한다는 것이다(Nussbaum, 2010, p. 164).11)
그녀는 현대의 다층적이고 복잡한 세계와 맞닥뜨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이 “자기 자신이 다른 이의 입장에 있다면 사태가 어떠할지 생각할 줄 아는 능력,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지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 그러한 위치에 처한 이라면 가질지 모르는 감정・소망・욕구를 이해하는 능력”(Nussbaum, 2010, p. 163)등의 ‘서사적 상상력’이라고 제안한다. 그 리고 인성의 이러한 ‘감정적’이고 ‘상상적’인 능력이 바로 예술과 만나는 경험에서 함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삶과 감정의 다채로움에 대한 묘사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형상의 ‘내적 세계’에 대해 궁금하게 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면적 깊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논의에 따르면, 이렇게 자신의 내 면적 세계를 들여다볼 줄 아는 인간은 타인 역시 그러한 내적 깊이를 가
11) 누스바움은 어린 아이들의 공감능력에 대해, 그들이 기초 수준의 공감과 관 심능력을 지닌 채로 태어나기는 하지만 이 시기의 경험들은 주로 강력한 나 르시시즘에 지배되기 때문에 타인을 자신만의 소망과 감정을 위해 기능하는 단순한 도구로 여기기 쉽다고 말한다(2010, pp. 164-165). 따라서 여기서 그 녀가 말하는 ‘타인의 깊은 내면의 존재를 인식할 줄 알고 그럼으로써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은, 후천적인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생성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이며 이것은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라 고 말할 수 있다.
진 영혼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누스바움이 예술경험을 통해 이러한 ‘공감하는 능력’, 혹은 ‘상상력’과
‘감정 능력’을 함양시키고자 하는 궁극적인 까닭은 그것이 민주시민, 혹 은 세계시민이 가져야할 핵심적인 덕목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가 묘사하는 ‘시민’이란 지리・계급・인종의 특성이 자신과 친숙한 사람에게 만 공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멀리 있는 이들, 혹은 소수자 집단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Nussbaum, 2010, p. 183).
연구자는 점차 민족 및 타 집단에 대한 배제가 지양되고 국경 없는 세계 시민의 개념이 대두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공감’ 능력의 자질을 강 조하고 이것을 배양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으로서 예술경험을 통한 윤리 교육을 제시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우리는 서두에서 특수한 상 황에 처한 인간, 혹은 그의 행위를 판단하고 윤리적 선택을 고려하는 문 제에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본 바 있으며, 이때 우리에 게 요구되는 능력의 핵심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따라서 연 구자는 예술경험을 통해 기대할 수 있는 도덕적 인간의 특성이 곧 ‘공감 할 수 있는 인간’으로 표현되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예술경험 이 자칫 타인과의 연대 및 공감을 위해 필요하다고 일축되어 제시되는 것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술 경험이 단지 예술작품을 통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특정 분야에서 발생 하는 일이나 그러한 사건에 처한 사람에 대해 알게 하는 것에 국한된다 면, 그러한 앎으로부터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예 술경험의 핵심적인 특성을 반영한 도덕성의 발달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누스바움이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해 예술경험이 필요 하다고 제안할 때 주로 제시하는 작품은 민주주의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 는 소외된 자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예컨대 그녀는 소포클레스의 <필로크테테스 Philoctetes>라는 작품을 제시하면서 이 작 품을 통해 우리가 함양할 수 있는 민주시민의 자질을 언급한다. 그 자질
이란 민주주의 사회에서 쉽게 도구로 전락할 수 있으며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 즉 잘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Nussbaum, 1997, p. 85). 예를 들어 그녀는 그 작품의 주인공인 필로크 테테스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던 중 부상으로 혼자 섬에 남겨졌을 때의 심정을 합창대가 표현하는 것을 듣고서 중·상류층에 해당하는 청중들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 존재인 노숙자의 처지나 소외된 자의 모습을 상기하고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연구자가 우려하는 바는 그녀가 특별히 이러한 주제를 표현한 예술작품에 관심을 두고 이로부터 함양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강 조하기 때문에, 예술경험의 역할이 단지 소외된 자들에 대한 묘사를 통 해 그들의 상황을 ‘알리는’ 것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데 있다.12) 물론 간 과하기 쉬운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을 통해서도 타인을 향한 우리의 행위 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이러한 정보적 역할이 평가 절하되어야 하 는 것은 아니지만, 정보적 차원의 전달은 굳이 예술이 아닌 다른 영역이 나 매체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경험을 통해 우리 사 회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들에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정보 를 획득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의 감정이 어떠한 지, 즉 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어떠한 것인지 나의 내면에서 상상13)해볼 수 있는 강점을 가진다. 그리고 예술경험이 이러한 강점을 12) 연구자는 물론 누스바움이 주장하는 예술 교육을 통해 함양하고자 하는 능 력이 ‘서사적 상상력’이며 이것은 단지 어떠한 상황에 ‘대해’ 표면적으로 상상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직접적으 로 그 맥락 안에 처해진 것처럼 감정이입하는 능력을 지칭한다는 것을 인정 한다. 그러나 연구자가 여기서 ‘각자의 내면에서 시작’하는 감정이입의 능력 을 강조하는 까닭은 감정이입의 발단이 각자의 신체적 반응으로부터 이루어 져야 하는 내밀하면서도 직접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도 덕적 반응으로서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이다.
13) 여기서의 ‘상상’의 개념은 베리스 고트(2007, pp. 154-155)의 상상력에 관한 구분을 참조한 것으로 우리는 ‘고문’이라는 상황을 상상한다고 할 때, ‘A가 독립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는다’라고 명제적으로 상상할 수 도 있지만, 마치 내가 고문을 받는 상황에 처한 것처럼 ‘직접 뜨거운 것이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