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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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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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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회와 국가 박해의 원인

•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했을 때는 박해를 하지 않았 음. 당시 유대교는 유대인들을 고려한 통치방식과 맞물려 로마제국에서 합 법적인 종교(religio licita)로 인정받고 있었다.

• 유대인들은 제국내에 흩어져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전체적으로 번성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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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원인

• 초기 기독교시대, 사도 바울의 선교에서 그를 박해한 것은 주로 유대인이었 고, 로마정부는 이것을 유대인 내부의 종파싸움으로 여겨 관여하기를 꺼리 고, 때로는 바울로를 유대인의 박해의 손길로부터 구출해낸 적도 있다. 그러 나 기독교가 차차 유대인의 민족적 기반을 떠나 세계종교로서 발전하기에 이르면서 로마정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로마정부는 대체로 외래종교에는 관대하였는데, 거기에는 로마의 국가 제의, 특히 황제예배의 인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 똑같은 일신교인 유대교는 전적으로 민족종교였으므로 황제예배에 참여하 지 않는 것도 원칙적으로 용인되어 있었으나, 세계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 서는 이같은 예외 조치가 인정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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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회와 국가 박해의 원인

• 1세기말 도미티아누스황제 치하에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로마와 소아 시아에서의 박해가 잘 알려짐. 그러나 현제시대(96∼180)에는 제국전반에 걸 쳐 교도 박해가 심하지 않아 관헌들도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도를 탐색하지 는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교에 적의를 품은 민중의 소란이나 개별적 밀고에 의한 경우가 많았고, 배교의사를 표명한 사람은 석방하였다. 그러나 스토아 철인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도를 가혹하게 학대 하여 이 무렵부터 순교자도 점차 늘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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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정부는 이방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취했다. 기독교가 로 마 정부 당국에 의하여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되는 한 멸시와 미움을 받을 지언정 고유한 민족 종교로서 합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정부가 기독교의 실상을 분별할 수 있기 전에 제국의 주요 도시에 이미 뿌리 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라는 사실을 밝 혀지고 또 급속히 제국내에 퍼지게 되자 불법 종교로 진압의 대상이 된 것이 다.

• 로마정부는 기독교인들이 고결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옛 종교적 전 통에 대해 적대적이며 일탈에 있어서 지나치게 완고하기 때문에 관용을 베 풀수 없다고 파악하기 시작. 기독교 신앙은 사형에 해당되는 범죄로 금지하 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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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회와 국가

박해의 원인 (정치적 원인)

• 또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대하여 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유대적 요소가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기독교교인들은 황제숭배를 단호히 거절하였는데 이는 로마정부로부터 반역 행위의 혐의를 받았으며 기독교도는 국가 모반의 음모를 꾀하는 무리들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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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이 섬기는 신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했기 때문에 이교도의 미움을 받았다. 즉 이교도의 분노를 산 것은 그들의 제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또 제신들을 숭배함으로 이교도들 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부정한 점이다. 그것은 곧 전통적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전반기 박해의 자극이 되었다. 또한 로마인들의 미신적 사상도 한 몫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이방의 신들을 노엽게 한 연고로 자신들에게 재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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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회와 국가

박해의 원인 (사회적 원인)

•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사회의 하층 계급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당시 영 향력있는 상층 귀족 계급의 무시와 증오를 받았다. 켈수스(Celsus)는 기독교 인들을 무식한 대중들로 보았는데 오리겐은 '켈수스에 대항하여'(Against Celsus)라는 작품속에서 이 문제에 관하에 켈수스를 반박하지 못한 점은 실 제로 초대 기독교신자들이 비천한 계층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이들의 판 단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실제 처음 3세기 동안 기독교 신자들 의 다수가 사회 하류층 출신이었다는 증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 서나 바울의 서신에 등장하는 신자들은 그것을 증거한다. 당시 이교 사회에 서는 소수의 특권층이 다수의 하층계급의 사람들이나 노예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귀족적인 사회구조의 지속을 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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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이교사원이나 극장, 오락장소 등에서의 모임에 참여하 지 않고 당시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관습들을 따르지 않아 미움을 받 게 되었다.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 들은 인류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고 로마인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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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회와 국가 박해의 역사

•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는 주후 64년에 네로 황제에 의하여 처음 일어났다. 주 후 64년 로마에는 대화재가 발생해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네로는 방화의 협 의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속죄양으로 삼기로 결 심했다. 이 네로 치하의 박해는 오래 계속된 것은 아니라 뒤에 따른 다른 박 해의 전례가 되었다. 한편 네로는 68년 로마 상원의 지원을 받은 반란에 의 해 퇴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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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역사

• 트라야누스 황제(98-117)는 자신에 대한 숭배가 강제적인 충성 시험수단으로 상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위기는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112년 소아시아 비누니아(Bithynia) 지방의 총독이던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황제에게 문의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널리 퍼져 있 었던 것을 말해준다. 플리니우스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일부 그리 스도인들은 처형했고, 시민권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재판을 받도록 하기 위 해 로마로 압송하기 위해 대기시켜 두었다.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당한 선례를 알고 있었고 망설임 없이 이를 시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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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회와 국가 박해의 역사

•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이 고결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옛 종교 적 전통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이며 그 일탈에 있어서 지 나치게 완고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동정을 거두어들이고 관용을 배 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교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 으며, 2세기의 여러 사람들이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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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역사

•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모든 지방 총독들이 앞장서서 박해를 가하는 것을 만류했다. 몇몇의 지방 총독들은 실제로 교회를 보호하기도 했으며, 이 에 고마움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총독이 비록 이교를 신봉하기는 하지만 죽은 후에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2세기 후반 무렵에 그 리스도교는 사회의 상류층에 침투하고 있었으며, 많은 고위 인사들은 밤에 잠이 깼을 때 부인이 철야 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당황 스러워 하기도 했다. 코모두스(Commodus, 주후 80-92) 황제의 첩이었던 마 르키아(Marcia)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로마교회를 위해 상당한 정도로 박해 를 완화시켜 줄 수 있었다.

3세기 이전에는 로마 정부가 그리스도교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사 실로 인해 교회는 활동 공간을 넓혀가고, 내적인 비판적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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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회와 국가 박해의 결과

• 로마제국의 박해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다.

후에 이들 가운데 다수가 그 죄를 뉘우치고 교회로 돌아오고자 하여 자연히 이들을 용납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는 교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교회는 박해로 말미암아 야기된 내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북아프리 카와 로마에서는 3세기 중엽 데키우스의 박해 때에 이교의 제단에 제물을 바쳤던 배교자들과 무수한 사람들이 박행 굴복하여 타협하였다. 디오클레티 안의 박해 때 박해 자들에게 성서를 내주었던 배교자들 중에서 회개한 사람 들을 처리하는 문제로 두 차례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을 교회와 전혀 교제하지 못하게 하기를 원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어느 정 도 근신기간을 둔 후에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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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결과

• 도나투스 논쟁은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에서 야기된 것으로서 콘스탄틴 시대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안 시대의 박해로 말미암아 교회는 신약성서의 정경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논쟁으로 야기된 결과가 항상 파 괴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교회는 권위있는 정경을 발달시키게 되 었으며 최종적으로 교회를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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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교회와 국가 도나투스주의

• 박해시 성경을 버린 자들 용납안함 (배교자들의 재세례를 주장)

• 엄격한 교회의 규칙과 교인의 순결 주장

• 세속적 교직자 배격

• 감독정치주장

• 세례받아야 구원을 얻을수 있다

• 개인주의로서 편협, 완고, 광신 상태로 흘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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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의 결과

• 로마제국의 박해로 말미암의 순교자와 변증가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헤드 마스(Hermas),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의 폴리갑(Polycarp)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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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대교회와 이단

율법주의적 이단(에비온주의(Ebionism))

• 바울의 세계적 전도, 율법을 초월한 복음과는 반대되는 사상을 전개했으며 오직 유대교의 중개를 통해서만 온전히 구원이 확보된다는 주장(율법과 할 례의 중요성)을 함

• 에비온파는 엣세네파 유태교의 한 변형이라고 보며 다만 예수를 그 신학적 체계 내에 인정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에비온주의는 널리 퍼지지는 못 했고 교회의 구성원중 이방인들이 많아지고 유대인이 줄어들면서 자연히 소 멸된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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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

• 영지주의(Gnosticism) : 선한 영적인 세계와 악한 물질세계를 엄격히 구분하 고 오직 영지(Gnosis)에 의해서만 신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인간적 인 생활이나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의 깊은 종교적 의미 부정. 이에 대해 아 우구스티누스는 육체는 선한 것이지만 육체를 위해 산다는 것은 탐욕이며 타락의 징조이듯이 정신 또한 선한 것이지만 정신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최 고의 거만이라하며 악의 책임을 물질적 조건에 돌리는 것에 반대

• 원죄 이후 자기보다 낮은 것에 예속된 인간은 영이 육에 예속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주의자들이 인간의 육체를 천박함과 불결 함의 원천이며 인간의 지성이 고양되는 데 대한 장애라고 본 반면 아우구스 티누스는 인간의 육체는 존엄하며 본질적으로 선한것

•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죄악의 시초는 인간의 자만심이며 육체를 타락시킨 것은 ‘죄지은 영혼’,’ 오만한 영혼’이라 봄. 원죄로 인해 감미로운 자유 는 저주로운 속박으로 변했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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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대교회와 이단

영지주의

• 영지주의(Gnosticism)는 2세기에 발생한 이원론적 종교체계로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며, 구원은 비의적 지식, 즉 영지(Gnosis)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고 주장했다. 이 이단은 물질은 불완전하고 본질적으로 불순하다는 사상에 서 출발했다. 철저한 가현설 신봉자들은 그리스도가 물질(육체) 없이 태어났 으며, 생전에 그가 겪은 고통, 십자가 수난은 모두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부정했다. 온건한 가현설 신봉자들 은 그리스도가 공기(에테르) 같고 천상의 몸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리 스도가 실제로 육체로 살고 수난당했는가 하는 문제에서만 정통신앙과 의견 을 달리한다. 가현설은 모든 영지주의 적대자들, 특히 2세기 안티오크의 주 교 이그나티우스의 공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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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

• 3세기에 페르시아왕국의 마니가 창시한 이란 고유의 종교.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파생되고,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종교 로서, 창시자 마니의 이름을 따서 마니교라고 불렀다. 마니에 관한 사실은 불확실한 점이 많으나, 일찍이 조로아스터교에 귀의하여 신의 계시를 받고, 30세 때 예언자로서의 자각을 한 후,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깨달은 바를 전파,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분파하였다. 그 후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를 받고 화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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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대교회와 이단 마니교

• 태초에 빛과 어둠이 투쟁을 벌였다는 마니교의 신화는 왜 현실 세계에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가를 설명하고, 금욕적이고 윤리적인 생활의 근거를 제공

• 윤리적 생활에 힘씀으로써 자기들의 육체에 갇혀있는 신적 빛의 분자들을 풀어주게 될 것이라고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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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

• 마니교에는 간명한 교의와 예배 양식, 엄격한 도덕계율이 있었다. 그 교의는 광명 ·선과 암흑 ·악의 이원론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현실세계는 명 ·암 이 혼돈되어 있으나 멀지 않아 광명의 세계가 예정되어 있고, 그 예언자이며 지상의 구제자로서 마니가 파견되었다고 말한다. 마니교도에게는 각자 속에 내재하는 광명의 소인을 기르기 위한 엄한 계율이 요구되었다. 육식과 음주 를 엄금하고, 악행을 삼가며, 정욕을 멀리하여야만 했다. 마니교는 당시 교 세가 급격히 발전하여 중앙아시아 일대와 로마제국에까지 확장되고, 다시 인도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나 13∼14세기에 쇠퇴, 소멸하였다. 그러나 마 니교는 동서 양세계를 문화적 ·종교적으로 결부시키는 가교적 역할을 한 공로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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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대교회와 이단 신플라톤주의

• 신플라톤학파는 재래의 철학사상에다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신비 철학을 구성한 것이다. 시조는 암모니우스 삭카스(Ammonius Saccas, 243년에 죽음) 였는데 부모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나 후에 옛 종교로 돌아간 자이다.

이 학파의 중요 학자는 플로티누스와 포르피리우스이다.

신플라톤 학파의 최고 지도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인데 삭카스의 제자였 다. 그는 208년 애굽에서 출생하여 244년경부터 270년까지 로마에서 활동했 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란 영혼이 감각에 속한 것들(물질)로부터 해방되어 그 근원인 신께로 돌아가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배척함은 물론 영 지주의적 기독교도 배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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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플라톤주의

•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는 3세기의 플로티노스가 발전시키고 그 후계자 들이 수정해나간 그리스 철학의 마지막 형태로서, 6세기 후반 비그리스도교 적인 철학이 금지될 때까지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의 핵심 개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존재의 위계질서가 있으며, 가장 낮은 단계 는 시공 속에 존재하고 감각에 지각되는 물리적 세계이다. 둘째, 각 단계의 존재는 그보다 상위 단계로부터 파생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공 속에서 일어 나는 과정이 아니다. 셋째, 각각의 파생된 존재는 그보다 상위 단계로 귀환 하려는 관상적 욕구의 운동 속에서 자신의 실재성을 확립한다. 이러한 욕구 는 상위 단계로부터 받은 유출의 창조적 힘 속에 이미 잠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유출과 귀환이라는 이중의 운동으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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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초대교회와 이단 신플라톤주의

• 넷째, 각 단계의 존재는 낮은 단계에 비친 그보다 상위 존재의 영상 혹은 표 현이다. 다섯째, 존재의 등급은 단일성의 정도를 보여주는 등급이기도 하다.

물리적 세계의 원자적 개별화에 이를 때까지 존재의 단계를 따라 내려가면, 다수성과 분리성, 그리고 한계는 더욱 증가한다. 여섯째, 최상위의 존재는 모든 실재성을 초월하는 궁극적 원리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에 '존재 너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어떤 한계도, 어떤 속성도, 어떤 부분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실제로는 이름 붙여질 수 없으며 존재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완전한 단일성을 지칭하기 위해 '일자'라고 불릴 수는 있다. 그리고 모든 완 전성의 원천이자 귀환의 종착점이기 때문에 '선'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일곱째, 이러한 최상의 원리는 하나의 대상(분리되고, 규정되고, 제한되는 사물)이 아 니며, 어떠한 술어도 그것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그것 자체와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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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누스주의

• 몬타니즘(Montanism) 이라고 하는 운동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상 기독교 운 동이었다. 이 운동은 교회의 신앙 그대로 창조자 하나님과 구속자 그리스도 를 믿었다. 이 접에서 몬타니즘은 영지주의나 마르시온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성령의 사역에 대 한 몬타누스의 잘못된 이해 때문이었다. 몬타누스는 그를 통하여 보혜사 성 령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선지자 몬타누스를 통하여 성령은 말씀하신다고 했 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페푸자(Pepuza) 라는 도시 근처에 서게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일 에서 떠나 페푸자로 가서 종말을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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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그 리스 철학자·변증론자.

• 헬라인으로써 사마리아에서 출생.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에베소로 감

•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여기며 성직자 로서 인정된 철학교사의 복장을 착용.

• 165년 로마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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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그의 저서들은 그리스 철학을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긍정적으로 접 목함으로써 역사 신학의 토대를 마련함.

• 유대교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이교도로 자란 그는 스토아 철학과 플라톤 철 학 및 그외 철학들을 공부한 뒤 132년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오늘날 터키 셀 추크 근처에 있는 에페소스에서 개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135년부터는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이교도 지식인들을 개종시키려는 희망을 가지고 자신 이 새로 발견한 그리스도교 철학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에서 상당 기간을 머물렀다. 몇 년 뒤 견유학파의 크레센스와 변론을 벌인 뒤 로마 장 관에게 파괴분자로 고소를 당하고 사형판결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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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그가 저자로 명기되어 있고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책들 가운 데는 2편의 변증(Apologies)과 트리포와의 대화 (Dialogue with Trypho)가 있 다. '제1변증' 또는 '대변증'(Major Apology)이라고 불리는 것은 150년경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스토아주의자이자 기독교 박해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글이다. 여기서 저스틴은 이방종교의 그릇됨과 기독 교의 참됨을 논리적으로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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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저스틴은 이교의 신화와 예배를 순전히 악에 의해 감염된 미신으로 여겨 강 력히 배척했으나 고대의 철학적 전통은 매우 적극적으로 환영함.

• 저스틴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있는 플라톤의 초월적 하나님은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었음.

• 저스틴은 플라톤철학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플라톤은 영혼이 하나님과 특별 한 유사성을 갖고있고 인간은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하고 장차 올 세상 에는 심판과 정의가 있다고 가르쳤으며 이에 대해 저스틴은 전적으로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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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저스틴은 플라톤의 심오한 성찰에 대해 두가지 가설을 내세웠음. 첫번째 가 설은 플라톤과 그리스의 현인들은 모세오경의 신비한 우의를 접했으며, 이 것들이 그들에게 진리에 대한 희미한 암시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두번 째 가설은 바울신학의 발전인데, 어떤 특별 계시에 별로 의존하지 않는 보편 적인 도덕적 양심의 가치와 타당성에 대한 주장이었음

• 저스틴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은 하나님의 로고스(인간의 자연법 인식)에 의해 심겨진 것이라고 주장함. 하나님의 로고스는 예수안에서 성육 신했으며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최고의 선과 지서안에서 보편적으로 활동하 고 현존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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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구약의 선지자들의 열망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것처럼 그리스 철학자들 이 획득한 정확한 통찰 역시 최고의 도덕적 이상을 구현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그 완성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 저스틴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통일성의 원리이며, 우리가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다. 진리는 다양한 철학학파들과 종교와 도덕을 다루는 한, 나누어진 씨앗처럼 이들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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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저스틴은 영지주의를 논박하는 소책자를 썼다. 영지주의가 자연적 물질적 세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창조는 로고스를 중재자로 하여 활동하시는 최고의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을 강조.

• 성육신을 통해 로고스는 완전한 인성, 즉 영과 혼과 육을 취하였으며 그리스 도는 수난속에서 진정으로 고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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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저스틴은 예수 그리스도가 총체적인 신의 로고스의 구현이며 따라서 위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구현한 것인 데 반해, 이교 철학자들의 위대한 저서들에 서는 오직 진리의 흔적들만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세 상에 온 목적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마귀들의 세력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제1변증 셋째 부분에서는 초기 기독교도들이 성찬식과 세례식을 거행한 방법을 생생히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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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트리포와의 대화는 트리포라는 이름의 유대인 지식인에게 그리스도교의 진 리를 증명하려고 한 변론서임.

• 저스틴은 하느님이 유대인들과 맺었던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대체했음을 보여주려고 했으며, 예수가 구약성서 예언자들이 선포한 메시아인 동시에 하느님이 성서에서 자신을 계시할 때 사용한 선재 로고스라는 점, 이방인들 이 이스라엘 대신에 하느님의 선민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했다.

제2변증 (Second Apology)이라는 간략한 책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 에게 부당한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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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하느님이 역사 안에 계획을 세워놓았다는 저스틴의 사상은 기독교 신학에 뚜렷하게 이바지했다.

• 역사는 하느님이 뼈대를 잡아놓은 구원의 과정으로서, 그 안에서 여러 중대 한 역사적 시점들이 초자연적인 목적을 지향한 하나의 유기체로 모이며, 구 약성서와 그리스 철학이 합류하여 기독교라는 하나의 강을 이룬다는 것이다.

저스틴이 세례식과 성찬식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내용은 초기 교회사를 이해 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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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저스틴; 유스티누스(St. Justinus Martyr; Iustinus Martyr; 103-165)

•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체계적인 신학을 통해 설명함. “불꽃이 불꽃에 의해 불이 붙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의 로고스로서 성부와 동일한 본 질을 소유한 존재라고 설명

• 저스틴은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에 영향을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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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캅

• 신약성경 시대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마지막 인물로서 사도 요한의 제자

• 156년 로마황제를 주로 인정하고 그 앞에서 분향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 로 스미르나에서 체포되어 86세의 나이로 화형에 처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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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타티아누스(Tatian the Assyrian; 120-180)

• 유스티아누스의 제자로서 2세기 중반 이후에 헬 라인들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저술

• 이 책에서 타티아누스는 기독교가 그리스 사상보 다 탁월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공정히 대우할 것을 요구하였고 2부에서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그리스의 신화와 철학과 비교

• 최초로 사복음서 요람인 디아테사론을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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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고라스(Ἀθηναγόρας ὁ Ἀθηναῖος; 133-190)

• 2세기경에 활동한 그리스의 그리스도교 철학자·변증가.

• 그의 논문 ‘그리스도교도를 위한 임무 (Presbeia peri Christiann) (177년경)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예배를 설명해주고, 그리스도 교도들이 로마에 불충하며 비도덕적이라는 초기 이교도의 비방을 반박하기 위해 신플라톤주의의 개념들을 사용한 최초의 저술 중 하나이다.

• 초기 역사가들에 따르면 아테나고라스는 아테네 토박이이며 기독교로 개종 한 플라톤주의자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뒷날 유명해진 기독교 아 카데미의 원형을 세웠다. 30개 장으로 구성된 변증론인 ‘기독교인을 위한 임’〉를 박해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콤모두스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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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터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A.D. 160-220)

• 초기 그리스도교의 주요 신학자·논쟁가·

도덕주의자.

• 카르타고에서 출생하고 로마에서 법률교육을 받고 날카로운 지성을 사용하여 기독교 진리 를 변증함

• 최초의 라틴 교부로서 그뒤 1,000년 동안 기 독교의 어휘 및 사상 형성의 기초를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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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A.D. 160-220)

• 197년 변증에서 그는 기독교에 대한 통속적이고 철학적인 비난들에 방 어적으로 응답할 뿐만 아니라, 다신론적 사회의 부패와 몰합리성, 그리고 정치적 불의에 대해 전투적이고 통렬한 공격을 가함.

• 기독교인은 우상을 숭배하는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전적으로 지 켜야 한다고 주장

•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터툴리아누스의 개념은 일차적으로 사탄ㄴ과의 전쟁이라는 것, 기독교 사상가의 지적 과제는 사탄적 세력과의 투쟁이라 고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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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터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A.D. 160-220)

•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했으나 실제로 터툴리아누 스는 철학적 논쟁에 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진 잘 교육받은 사람이었음

• 그는 복음을 이교적 관습의 편견을 벗기고,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어 창 조주의 의도에 맞는 자연적 성취를 이루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

• 모든 신자가 다 사제라는 만인사제설에 관심을 갖음

• 하나님은 본질이 하나이며 삼위로 계신다는 삼위일체의 정통적 입장을 고수하는데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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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A.D. 160-220)

• 헬라어를 사용하는 학자들은 기독교를 마치 철학처럼 다룰려는데 반발 하고 헬라어보다 정확하고 덜 철학적인 라틴어로 책을 저술.

• 삼위일체 교리를 명쾌하게 진술하고 인간은 혼과 영과 육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

• 세례와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 규명

•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해이에 반대 청교도 운동을 벌인 몬타누스 주의 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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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터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A.D. 160-220)

• 210년 이전 테르툴리아누스는 정통교회를 떠나 당시 소아시아에서 아프 리카까지 퍼져 있던 몬타누스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예언분파운동에 가 담했다.

• 당시 그리스도교도들의 게으른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외치면서 엄격한 도덕생활을 강조한 몬타누스주의 의 교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세상의 생활 방식에 조금이라도 타협하 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몬타누스주의라는 이 새로운 운동의 대변자가 되 어 이 운동을 옹호하는 데 헌신했다. 그러나 몬타누스주의자들조차도 그 가 만족할 만큼 엄격하지 않았던 까닭에 결국 그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분파를 세웠는데, 이 분파는 5세기까지 아프리카에 존속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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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나이우스(St. Irenaeus;

Εἰρηναῖος; ?-202)

• 루그두눔(리옹)의 주교이며 2세기의 대표적 인 그리스도교 신학자. 순교자 폴리캅의 제 자

• 180년경 ‘이단들을 반박함 Adversus haereses’을 써서 영지주의를 반박.

• 저작 활동을 통해 성서의 정경·신조·주교 직의 권위를 한 단계 더 높게 끌어올렸다.

• 기독교 신학의 안정되고 체계성을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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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이레나이우스(St. Irenaeus; Εἰρηναῖος; ?-202)

• 이레나이우스의 논박은 마르키온과 발렌티누스를 향하고 있음. 그의 반 마 르키온 논쟁은 고대 예언의 성취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구약과 신약의 확 연한 통일성에 근거하고 바울에게서 발견한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대비를 강조

• 이레나이우스는 구원을 타락 이전 낙원에서의 상태의 회복이라고 여김.

• 인간의 존재 목적은 난관과 시험을 극복함으로써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것

• 권위있는 신약 문서들에 대한 고정된 목록인 정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정 경 확립에 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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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나이우스(St. Irenaeus; Εἰρηναῖος; ?-202)

• 성경에 흩어져 있는 진술들이 하나의 체계로 정리될 때에만 영지주의 이단 이 성공적으로 논박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

• 그는 사도들이 비밀로 가르친 적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 영지주의에 맞섬.

• 권위는 혁신과 위험스러운 사변에 대한 저항에 있어서 가장 좋은 보증이다.

이단은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호기심에서 나오 는 것인데. 호기심이란 인간이 알 능력도 없고, 심지어는 생각할 자격조차 없는 그러한 문제를 들여다 보려는 것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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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이레나이우스(St. Irenaeus; Εἰρηναῖος; ?-202)

• 이레나이우스는 로마에서 분파 운동을 이끈 마르키온과 급속히 팽창하던 교회 안에서 이원론을 주장한 당시의 지적 운동인 영지주의에 대해서 철저 히 부정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보임.

• 영지주의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이레나이우스를 비롯한 초기 교부 들의 노력을 통해 극복되었기 때문에 영지주의 저서들은 대부분 소멸. 그러 므로 오늘날 학자들은 영지주의 교리들을 재구성하려고 할 때 영지주의자들 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견해를 정리한 이레나이우스의 저서들에 크게 의 존한다. 1940년대에 이집트 나즈함마디 근처에서 영지주의 도서관이 발견된 뒤 자신이 배척한 교리들을 매우 정확히 기록했음이 입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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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나이우스(St. Irenaeus; Εἰρηναῖος; ?-202)

• 2세기에는 많은 책들이 성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었고, 이 가운데는 영지 주의자들이 쓴 책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 을 비판함으로써 그들이 쓴 책들의 중요성을 축소시키고 성서의 정경을 확 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 사도신경과 주교직의 발전도 영지주의자들과 벌인 그의 투쟁에서 유래한 것 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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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앙을 위한 진지한 싸움

이레나이우스(St. Irenaeus; Εἰρηναῖος; ?-202)

• 가장 오래된 주교들의 목록도 예수에게 직접 받은 비밀 구전전승을 갖고 있 다고 주장한 영지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서 이레나이우스는 여러 도시들의 주교들이 사도시대에 이미 있었고, 이들 가운데 영지주의자는 하나도 없었으며, 주교들만이 성서 해석에 안전한 지 침을 준다고 주장했다. 후대에 생긴 주교들의 '사도직 계승권' 교리는 이러한 주교들의 목록과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모호한 문맥이긴 하나, 이레나이우스는 로마 주교가 가장 권위 있는 지위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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