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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순수다수”로서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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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다자”로서의 존재와 “일자”로서의 진리*

1)

-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 -

홍 기 숙*

[논문개요]

“순수다자”로서의 존재와 “일자”로서의 진리라는 큰 제목 하에 이 논문은 바디 우에게 있어서의 존재문제와 진리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용의 방대함 을 이유로 이 번 논문은 그 시리즈 중 첫 번째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 여기선 주로 바디우의 “존재문제”에만 집중하여 다루었다. 특히 바디우가 플라톤의 깃발 을 높이 치켜세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의 존재론적 개념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그의 저서 존재와 사건 을 통해 의미를 좁혀 집약적으로 보고자 하였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들뢰즈와의 연관 속에서 플라톤의 독해를 중심으로 두 철학자의 대립지점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무엇보다도 바디우의 존재론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간의 구분을 따르는 사유체계로서 이전의 철학적 전통과 많은 부분 결별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철저히 서양 존재론의 역사 한 가운데 서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첨예한 논쟁적 위치를 점 하고 있다. 그의 존재론은 “일자란 없다”로부터 출발하여 “순수다수”로서의 존재 혹 은 “공백”으로서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존”과 구별되는 용어로 써 “현시”라는 개념 하에 펼쳐지는 그의 존재 개념은 수학 안에 존재론의 역사를 위치 지운다. 플라톤의 사상에서도 역시 바디우는 “일자”는 버리고 “다자”만 취하 며, 들뢰즈의 “플라톤 뒤집어엎기”에 반하여 그 근거와 타당성 없음을 주장한다. 그

* “Multiple”과 “un”을 ‘‘다자’’와 ‘‘일자’’로 옮기고, 때로는 어떤 규정 없이 “다수”

와 “하나”로도 옮겼다.

**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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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이 논문에서는 바디우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의 철학에 대한 연구의 첫 발 딤 딤에 만족하고자 한다. 이어 나올 연구논문 속에서 지금은 잘 정리되어 있지 않지 만 그에 대한 평가를 어느 정도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주제어 : 존재로서의 존재, 일자, 다수, 공백, 현시, 플라톤주의, 질 들뢰즈.

1. 들어가는 말

바디우의 철학을 특징짓는 두 개념어인 “존재”와 “사건”은, 소위 “대가”라 일컬어지는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이전에 이해되어 왔던 방식과는 완전히 결별된 모습을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 본 철학사적인 선 이해만을 갖고 그에 접근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바디우의 존재론과 진리개념이 그 이전의 내용으로부터 극명한 단절을 주 장하고 있고, 개혁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는 점은 그의 철학을 이해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중의 과제를 부담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그가 언급하고 있으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철학자들의 사유에 대한 바디우 식의 이해와, 또한 바디우 철학의 단절의 지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철학 이 지니는 고유성 혹은 특이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무엇보다도 바디우가 자신의 존재론을 “순수다자” 혹은 “일자란 없다”는 데 서 출발한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 스스로 플라톤의 계승을 주장한다는 사 실은, 그의 존재론이 서양 존재론의 역사 한 가운데, 그 치열한 논쟁의 한 복판에 서 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1)

그러나 본고에서 이 모든 논의를 살펴본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결코 효율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바디우가 그의 철학 체 계 내에서 다루고 있는 다른 여러 철학자들을 잠시 밀쳐두고, 먼저 그의

1) “일자란 없다”는 그의 주장은 예컨대 플라톤의 소피스트 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 - 엘레아학파의 “일자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반박하는 플라톤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 쉽게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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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과 플라톤 철학과의 관계만을 그 논의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반 플 라톤주의가 성행하는 현실의 흐름 속에 플라톤주의의 진영에 선다는 것은 바디우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그가 플라톤주의의 새로운 복원으로 들뢰즈의 철학을 규정, 비판하는 것은 어떤 철학적 맥락과 의미를 지니는 가? 따라서 전체 논의의 성격상 진리(vérité)에 대한 본격적인 내용 전개 는 다음의 기회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말하자면 본고는 이 주제로 다루어지게 될 첫 번째 논문으로 앞으로 두 편 정도의 논문이 같 은 주제로 혹은 그 연장선상에서 쓰여질 것이다. 우선 본격적으로 본문의 내용을 전개시키기 전에, 존재론과 관련된 바디우의 철학적 개념들이나 주장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것이 앞서 언급한 바디우 사유의 고유성 에서 기인하는 독해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안이지 않을 까 한다.

2. “순수다수”로서의 존재

2.1. “일자”란 없다 (L’Un n’est pas)

바디우의 철학은 무엇보다도 존재론에 대한 모든 형이상학적 시도를 배 격한다. 즉, 존재로서의 존재(l’être en tant qu’être)에 대한 탐구에 “일 자(un)”와 “무한(infini)”을 연결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일자”와 “무한”을 연결시키려는 형이상학적 시도들은 지난 서양철학 존재 론의 주된 과제였으며, 이제는 과감히 그런 시도들과는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Court traité d’ontologie transitoire (잠정적 존재론 에 대한 짧은 논고) 에서 바디우는 프롤로그의 주제로 “신은 죽었다(Dieu est mort)”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시대는 의심할 여지없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신들의 사라짐으로 특징 지워지는 시대이다. 이러한 사라짐은 구별되는 세 과정에 의해 이루어 지는데, 왜냐하면 세 가지 중요한 신인 종교의 신, 형이상학의 신, 시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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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있기 때문이다.2)

철학에서 철저한 무신론을 외치는 바디우가 종교적 혹은 신학적 신들뿐 만 아니라 니체나 하이데거 이후의 모든 “시인들의 신” 조차 거부하는 이 유는 존재론에서의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적 시도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다시 말해 “하나”와 “무한”의 결합을 배제하려는 그의 현시대에 대한 철학 적 판단으로부터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종교적, 신학적 신들이 죽은 바로 그 자리에 시인들의 신이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시대 는 더 이상 종교적 신을 죽여야 할 이유도 가치도 없으며, 그러한 신들은 이미 철저히 죽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현시대는 새로운 봉합(suture)의 형태가 꿈틀거리고 있고, 따라서 철학이 중단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한 봉합에서 벗어나려는 절실한 몸짓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봉합은 조금 전에 언급한 다름 아닌 시(예술)에의 봉합이다.3) 바디우의 이러한 철저한 무신론은 또한 그의 철저한 유물론과 함께, “일자” 혹은 “하나”가 없다는 그의 존재론을 특징짓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 “하나란 없다. 있 다면 다수로서의 다수 혹은 순수다수만이 있을 뿐이다.” 이 논의는 바디우 의 대표저서 존재와 사건 의 서두를 장식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논의를 시작으로 서두에서 밝힌 바의 중심 내용 을 펼쳐나갈 것이다.

많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이 그렇듯이 바디우 또한 철학내의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지금껏 모든 가능한 존재론의 선험적 조건이었던 “일자”와 “다자” 간의 문제를 바디우는 “하나란 없다(L’un n’est

2) Alain Badiou, Court traité d’ontologie transitoire, ed. seuil, 1998, p. 22.

3) 바디우는 자신의 저서 철학을 위한 선언(Manifeste pour la philosophie, seuil, 1989) 에서 철학의 가능조건인 4가지 진리 절차(과학, 정치, 예술, 사 랑)를 언명하면서, 그 중 철학이 어느 한 곳에 봉합되어 나타나는 사태, 즉 철 학이 중단되는 사태를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 규명한다. 예컨대 영미의 실증주 의, 과학주의에의 봉합, 맑스주의의 정치에의 봉합, 니체, 하이데거 이후의 시 에의 봉합, 그리고 레비나스와 같은 사랑의 노예로서의 봉합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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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로 선택, 결정한다. 우리가 흔히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란 무엇인가?

바디우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란 있음의 “전체(Tout)”를 가리키는 그 무 엇이 아니라, “하나로 고려되는, 하나로 셈 되는 것”으로서 어떤 한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바디우에게 “하나란 없다”는 결코 하나로 셈하기로 서의 “하나에 대한 것은 있다(Il y a de l’un)”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 려 한 상황은 그 상황이 하나로 고려되고, 셈 되어짐에 의해 안정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불안정한 다수가 안정의 다수의 형태를 취하게 됨은 바로 이 “하나-로-셈하기(compte-pour-un)”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바디우는 주 장한다. 다시 말해, 바디우에게 “하나”란 어떤 존재의 이름이 아닌 불안정 한 다수를 안정하게 해주는 하나의 법칙으로서 어떤 작용일 뿐이고 그 작 용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실재로서의 “하나”를 거부하는 그의 주장은 현 존(présence)으로서의 존재론을 떠나 현시(présentation)로서의 존재론 으로 나아가게 된다.

2.2. 현시(présentation)로서의 존재론

- “순수다자(multiple pur)”, “공백(vide)”으로서의 존재

“하나, 즉 전체란 없다”라는 바디우의 주장이 어떻게 현존과 구별되는 것인 “현시로서의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가? 현존이 “거기 있음”을 말 하는 것이며 하나의 구조화된 상황 안에 드러난 어떤 존재를 의미한다면, 바디우가 현존과 구별하여 말하고자 하는 현시란, 엄격히 말해 존재가 하나의 구조나 상황 안에서 파악될 수 없음을, 즉 존재가 하나로 파악될 수 있는 구조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이렇게 볼 때 바 디우의 “존재로서 존재”, 즉 현시로서의 존재는 비어있음(공백, vide)의 형태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무, rien)의 형태를 지니는 것일 수밖에 없 다.4) 말하자면 바디우의 현시로서의 존재란 “공백으로서의 존재”로서 “불 안정한 다수성(multiplicité inconsistante)” 혹은 “순수다자(multiple

4) 바디우는 개인적으로 “rien”보다는 “vide”를 선호한다고 말한다. 존재와 사건 , pp.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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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적으로 다수가 존재한다는 사실 을 인식 할 수 있는가? 바디우의 설명에 따라 논의를 진행시켜보면 “순수 다자”라는 존재는 마치 칸트의 “물자체”의 경우에서처럼 결코 파악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5) 그러나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하였던 하이데거 에서도 세계 안에 던져진 “거기 있음”으로서의 개별자, 즉 “현존재 (Dasein)”가 사유의 궁극적 중심 대상이었듯, 바디우에게도 “거기-있음 (l’être-là)”, 즉 인식 가능한 안정된 다수가 그의 사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거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6) 따라서 불가피하게 바디우 에게서 다수(다자) 는 둘(deux)이라는 갈라짐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불안정한 다수성(multiplicité inconsistante)”과 “안정된 다수성 (multiplicité consistante)”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다수란 상황 속에 드러난 안정된 혹은 하나로 셈이 가능한 형태를 지니는 것으로

“안정된 다수성”이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존재를 사유함에 있어서 이 안정 된 다수로부터의 출발이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란 있을 수 없 고, 항상 새로운 존재의 출현은 바로 이 비어있음으로부터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디우에게서 존재란 항상 자신의 불안정성 즉 공백의 긍정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하나”가 존재의 이름이 아닌 어떤 작용의 결과를 지칭하는 것이고, 그 리고 우리에게 드러나는 존재적 상황이 하나에 의해 고려될 수 있는 안정 적 형태를 갖는 것이라면, 바디우의 “존재로서의 존재”는 결코 구조화된 상

5) 그러나 이 경우에도 칸트와 바디우 사유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즉 칸트에 게 있어서는 ‘‘물자체’’가 영원히 인간에게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 반면, 바 디우에게 있어서 ‘‘순수다자’’는 새로운 인식대상으로 떠오르게 될, 다시 말해

‘‘안정된 다자’’로 인식 가능하게 될 존재이다.

6) 존재와 사건 이후 10년 만에 출간된 존재와 사건2-세계의 논리(Logique du monde, 2006) 의 많은 부분이 어떻게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 가능한가, 즉 세 계의 안정성(consistance)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논리에 집중적으로 할 애되고 있다는 점은 바디우의 중심 사유 대상이 “지금(maintenant)”, “여기 (ici)”의 현실태(actualité)에 집중되어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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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안에서 드러나는 안정된 다수의 형태가 아니라 불안정하고 동요 (errance)하는 순수한 지점인 공백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이다. 말하자 면, 바디우에게 “공백(vide)”이란 “존재의 고유명사(le nom propre de l’être)”로서 모든 존재 출현(apparition)의 토대(fondememt)이자 그 자 체 무한의 성격을 갖는다. 또한 공백으로서의 존재가 언제나 상황의 관점 에서 볼 때 “초과(excès)”7)의 지점을 갖는다는 특징은 다시 한 번 “일자란 없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2.3. 수학(mathématique)과 존재와의 등가

바디우는 왜 “하나”를 거부하는가? 아마도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 즉 전체가 있다”는 사유가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는 폐쇄적이고 닫힌 체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 디우에게서 “존재로서의 존재”의 이름이 “순수다수”라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계속의 무한으로서 타자(autre) 혹은 차이(다양성, différence)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열린 체 계라는 점에서, 즉 언제나 존재가 하나의 주어진 상황을 벗어난다는 “초과”

를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현시대의 새로운 유물론적 존재론의 틀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디우에 의하면 의식적이던 그렇지 않던 간에 존재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역사적으로 볼 때, 수학의 고유한 사유와 일치되어 진 행되어 왔으며, 비록 철학자들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지라도 그에 대한 답을 구한 자들은 철학자들이 아닌 바로 수학자들이라고 주장한다.8) 수학은 그리스 시대 이후로부터 다수성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학문으 로서 자신의 본업, 즉 존재의 문제에 충실했던 학문이었다. 다시 말해, 바 디우에 의하면 수학적인 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

7) ‘‘상황에 포함(appartenance)되어 있지만 상황에 속해(inclusion)있지 않은 다수가 언제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한다’’는 칸토르, 코헨-이스턴의 ‘‘초과점 의 정리’’에 의해 주장된 이론.

8) A. Badiou, L’être et l’événement,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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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를 절대적으로 인지하는 유일한 담론이었던 것이다.9)

이렇게 수학적 사유 위에 존재의 문제를 사고하려는 바디우의 시도는 그의 저서 존재와 사건 의 많은 지면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떻게 하이데거 류의 “시적 존재론”에 맞서 수학적 방법을 통한 존재론적 개혁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가 그의 주된 관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 바디우는 수학적 사유에 근거하는 존재론적 개혁을 말하는가? 왜 수학 인가? 바디우에 따르면 존재란 순수다수로서 모든 질적인 차이나 정도에 서 벗어난 것이어야 하는데 바로 수학만이 이러한 모든 것을 배제한 순수 다수성을 사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칸토르에 의 해 그 절정에 다다르는데, 말하자면 바디우의 수학적 존재론에 대한 사유 는 집합이론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의 공백의 존재로 서 불안정한 형태를 지니는 순수다수는 필연적으로 한 상황 속에서 안정 적인 형태로 드러나야(se présenter) 하는데 그 때의 다수란 바로 수학 적 의미의 “집합”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칸토르의 집합이 론에서 말하는 “공집합”으로서의 존재는 집합이론에 의해 “알 수 없는 것 에 대한 사유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서, 실제 바디우의 공백으로서의 존 재에 기본 토대를 제공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칸토르의 집 합이론 중 “상황에 포함되는 다수이되 상황에 귀속되지 않는 다수가 언제 나 적어도 하나 이상은 있다”는 초과점에 대한 이론이나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 코헨과 이스턴에 의한 “강제(forçage)이 론” 등의 존재론적 수학 개념들이 바디우의 존재론에 대한 상세한 이론적 뒷받침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왜 수학과 존재를 등가로 여 기는가에 대한 자명한 해답을 갖게 한다. 여기서 이 모든 문제들을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바디우 그 조차도 600페이지에 걸쳐 수학적 존재론을 규명하고자 존재와 사건 을 썼으며, 따라서 개괄적인 그의 수학적 증명

9) 반면, 바디우의 ‘‘존재와 수학의 등가’’라는 주장은 ‘‘존재가 수학이다’’라는, 즉 존재가 수학적 대상성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학은 그의 역사적 생성 안에서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해 언급될 수 있는 것을 언명한 학문일 뿐이다. Ibid.,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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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한 존재론 논의를 살펴본다 하더라도 족히 한 권의 책은 나와야 할 것이다.

3. 바디우 플라톤 독해

3.1. 일자 버리기, 다자 취하기

많은 사람들이 바디우의 존재론을 처음 접하면서 왜 바디우가 플라톤주 의의 계승을 이야기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한다. 왜냐하면 바디우의 어 떤 면을 보아도 유일자로서의 “선의 이데아”같은 것을 찾을 수 없으며, 또 한 본(모델, original, paradigme)이나 이데아의 세계를 의미하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도 볼 수 없고, 이원론적인 역학관계에서 다루어진 그에 따 른 상(모방, copy, icon) 또한 그의 논의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렇다면 바디우가 플라톤주의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다고 하는 건 무슨 의미인가?

바디우가 플라톤을 계승한다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그의 “일자란 없다”

라는 사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플라톤의 대화편 파 르메니데스 나 소피스트 에서 그 주요 논쟁이 바로 이 “일자란 없다”로부 터 출발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문구인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던가 “하나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와 같은 논의, 혹은 소피스트 에서 볼 수 있는 엘레아학파의 “만물은 하나 이다”라는 논의에 맞서 플라톤이 비판적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시 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일자(un)가 없다”는 전제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다자(multiple)”를 알게 해준다고 말하며,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 를 통해 “하나가 없음”으로부터 “다름”을 읽어낸다. 즉 하나 (un)가 아닌 것은 다른 것들(autres)인데, 그것은 그 자신의 차이성 (différence)과 이질성(hétérogénéité) 안에서 파악되어야만 하는 것이 고, 이 “다른 것(autre)”은 다름 아닌 타자(Autre)로 해석될 수 있으며, 여기서 타자란 절대적으로 순수한 다수, 즉 바디우가 말하고자 하는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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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 다수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타자란 모든 구조에, 모 든 하나의 결과에 우선하는 것으로서의 순수 현시(présentation)인 것이 다.10)

또한 이러한 불안정한 다수는 “만일 하나가 없다면 아무 것도 없다(si l’un n’est pas, rien n’est)”는 그리스 언명에 의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고 한다. 즉 “아무 것도 없다는 것(rien n’est)”은 그리스어가 훨씬 정확히 말해주는 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있다(rien est)”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이다. 이 때 rien이란 무엇인가? 바디우의 플라톤 독해에 의하면 이 rien 은 바로vide의 이름으로서 무한하고 불안정한 다수의 지점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가 없다면 “여럿(plusieurs)”의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존재”로 서 유일하게 존속 가능한 공백(vide)의 순수이름이다”.11)

바디우는 플라톤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 “하나”에 대한 이념 즉 “하나의 이데아”가 없음을 증명하며 결론짓는다. 즉 “이념(idée)” 혹 “이데아”가 플 라톤에게 있어 사유 가능한 존재자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이념으로부터 각각 분유 받는 존재자들이 있음을 상정해본다면, “일자”의 경우 그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른 이념 즉 “하나”에 대한 이데 아 역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소피스트 에서 나오는 5가지 기초가 되는 변증법적 이념에 “일자”가 없다는 것은 바디우가 보기 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 다섯 가지 이념은 “존재”, “운동”, “정지”, “동 일자”, “타자”이다.

3.2. Ultra(초) 그리고 citra(미) 플라톤주의자

(ultra-platonicienne et citra-platonicienne)

바디우가 플라톤을 독해하는 방식, 즉 “하나가 없음”을 읽어내고 그에 따른 순수다자로서의 존재를 파악하는 방식이 “선의 이데아”와 같은 일자 를 받아들일 수 없음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식 플라톤주의”라 함

10) Ibid., pp. 42,43 11) Ibid., pp. 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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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플라톤에게서 일자는 버리고 다수로서의 존재만을 취하는 것이라고 정 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학적 사유 위에 존재론을 전개시키고 있는 바디우에게 플라톤이 수학과 관련지어서 진리의 범주의 타당성을 말하고 부활시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 수 학이 존재와 상관관계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플라톤적이라고 바 디우는 말한다.12) 그렇다면 수학을 통한 존재론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바 디우식 플라톤주의를 추가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바디우는 자신의 저서 잠정적 존재론에 대한 짧은 논고(Court traité d’ontologie transitoire) 에서 플라톤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초플라톤 주의자(ultra-platonicienne)이자 미플라톤주의자(citra-platonicienne) 라고 규정한다. 왜 바디우가 플라톤주의를 그 이상으로 까지 밀고 나가는 초플라톤주의자인가? 그것은 수학의 존재론적 권위에 대한 인정을 플라톤 이 부여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극한으로 밀고 나가, 존재론은 수학 그 자체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존재론의 실재 역사가 정확히 수학의 역사와 일치함을 바디우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플라톤주의에 미치지 못하는 미플라톤주의자라고 주장하는가? 이 미플라톤주의자를 설 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논의를 좀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사실 바디 우는 존재를 수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존재와 사건 이후 “존재의 논 리(Logique de l’ontologie)”에 관심을 기울이고 세계의 논리 혹은 존재 가 출현하는 논리를 설명하는 데 그의 많은 논의를 할애한다. 그러나 우 리가 알고 있듯이 플라톤에게서 논리란 수학의 존재론적 권위에 비교될 수 없는 순수하게 비어있는 것으로서 단순한 한 형식적 분과일 뿐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논리학은 파면의 대상이었다. 비교하여 말하자 면, 오늘날 현대 영미철학의 “언어적 전회(tournant langagier)”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형식적 논리학이 바로 플라톤이 파면을 주장하고자 했던 류의 논리학이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철학자인 우리들은 사물들로부터 출발해야지 단어들(mots)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즉 수학으로부터 출발해야지 형식적 논리로 출발할 수 없다는 12) Court traité d'ontologie transitoire, p.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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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가 절대적이었다. 말하자면 수학의 존재론적 권위를 갖지 못하는 형 식 논리학은 파면의 대상일 뿐이었다. 바디우 또한 “언어적 전회”에 의한 논의를 재검토 철회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플라톤에서처럼 논리를 단순히 파면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논리를 언어적 형식적 규정이 아닌 수학적 존재론적 규정 하에 다시 높임에 의해서 재검토할 것을 주장 한다. 그런 의미에서, 즉 논리(학)의 파면을 전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재론과 수학을 철저하게 일치시키면서 논리학을 형식적 분과가 아닌 수 학적 논리학으로서 규정, 위치 지운다는 점에서 바디우는 스스로 미플라 톤주의자라 칭한다.

그러나 바디우의 이러한 초플라톤주의자이자 미프라톤주의자인 입장은 미묘하게도 플라톤의 사유를 전복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플라톤에게 있어서 애매하고 유동적이며 도피적인 사유 불가능한 것이 외 관(apparence)이고, 수학을 포함해 정적이고 단일하며 사유에 드러나 있 는 것이 관념(idéalité)이라면, 바디우의 경우는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대립되는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즉 바디우에 있어서 고정적이고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안정적인 것은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이 세계이고 현 상계라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거기-있음에 사로잡혀 있는 세계이며, 서 로의 관계가 연결되고 결합되어 안정성을 갖는 세계이다. 반면 무정부적이 고 중성적이며 불안정한 것은 “존재 그 자체(l’être en soi)”로서 수학에서 사유 가능한 “순수다수”이다. 말하자면 바디우에게서 모든 존재는 “거기-있 음”으로서의 존재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플라톤주의는 기존의 상식적인 수준에서 파악 가능한 의미의 플라톤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임을, 그럼에도 바디우가 현실적인 것 이 존재자이며 “다자”라는 사유를 플라톤에게서 주요사항으로 끄집어내었 다는 것은 플라톤 사유의 본질적 핵심에 가장 가깝게 다가선 독해 중 하나 가 아니었을까 한다. 어쨌든 바디우의 “플라톤 계승의 외침”이 가질 수 있 는 오해를 잠식시키기 위해 이러한 구별된 고찰의 필요성이 있었음을 밝 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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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들뢰즈의 “플라톤주의 뒤집어엎기(renversement)”

여기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디우의 플라톤 독해를 염두에 두고 들뢰즈 의 “플라톤 뒤집어엎기”에 대한 바디우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이 주제를 한 논문 내의 작은 장에서 짧게 다룬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이를 제대로 다루려면 족히 한 권의 책 분량은 나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전제로 현대 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두 대가의 철학적 사 유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두 철학자 간의 긴밀한 이론적 대립이 이루어지는 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 나 그러한 밀도 있는 내용을 다룰 수 있는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 고, 여기서는 바디우의 플라톤주의를 살펴본다는 뜻에서, 즉 그 연장선상 에서 들뢰즈의 “플라톤주의 뒤집어엎기”가 갖는 핵심적 의의만을 파악하고 자 한다.

들뢰즈가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고, 다양한 장르들을 섭렵하 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 중 영향을 받았거나 혹은 들뢰즈 식으로 재구성한 대표적 철학자들을 꼽는다면 베르그송과 스 피노자 그리고 니체가 아닌가 싶다. 아마 이런 정도의 논지는 들뢰즈 전문 가들이라도 별 논란의 여지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특히 니체의 영향에 대 해서는 들뢰즈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바인데, 예컨대 “힘의 의지”라던가

“영원회귀”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살펴볼 들뢰즈의

“반플라톤주의” 역시 니체에게 기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다룰 들뢰즈의 “플라톤주의 전복”에 대한 논의는 논리의 연구 의 「계열1, 순수 생성(du pur devenir), 「계열2, 표면 효과들(des effets de surface)」, 그리고 보론으로 들어가 있는 「플라톤과 시뮬라크르」에서 주로 언급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면 들뢰즈의 “플라톤주의 뒤집어엎기”의 구체적인 주된 내용 은 무엇인가?

들뢰즈 철학 전반이 데까르뜨로부터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양식(bon sens)”이나 “상식(sens commun)”에 반대하면서, 즉 기존 인 식의 틀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일반적 견해(억견, doxa)에 반대하면 서, 오히려 “역설(para-doxa, contre-sens)”을 의미하는 다른 두 방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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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인정하는 사유체계를 말한다는 점13), 그리고 진리 존재 자체를 부 정한다는 점 등은 그의 철학이 반플라톤적인 계열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들뢰즈는 논리의 연구 에서 플라 톤의 이원론을 소개하면서 플라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뿐 아니 라, 스토아학파에 의해 이미 이루어졌던 플라톤주의의 전복에 주목한다.

이 논의 속으로 좀 더 자세하게 들어가기 위해, 잠시 그 부분을 살펴보도 록 하자.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플라톤의 이원론은 평상시에 우리가 잘 알고 있 는 예지계와 가시계의 구분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들뢰즈는 원형(모델, 원상, original, paradigme, modèle)과 복사(상, copie, icon)의 구분이 아닌, “복사와 시뮬라크르(simulacre)”의 구분으 로부터 출발한다. 예컨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에 등장하는 “데미우르그”

라는 창조의 신이 혼돈 속에서 만든 질서의 세계, 즉 이데아와 이데아로부 터 분유 받은 개별자의 세계, 그리고 거기서 불가피하게 벗어나는 혼돈된 세계인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 살펴보면, 좀 더 쉽게 들뢰즈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에 의해 채택되어 논의되고 있는 플 라톤의 이원론은 다음과 같다.

1)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측정 가능하며 고정된 질을 갖는 사물의 차원, 즉 그러한 사물들은 영구적이거나 한시적이며, 그렇지만 휴지기와 같은 정지 의 순간을 갖고 있고, 현재라는 시간성과 주체의 부여가 전제로 있어야 하 는, 즉 어떤 순간에 어떠한 크기와 작기를 갖는 주체가 전제되어야 하는 사

13) 들뢰즈는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의미의 논리 에서 루이스 케롤의 “엘리스”의 경우를 그 예로 든다. 엘리스의 커지고 작아짐은 “커짐”과 “작아짐”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즉 역설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다. 엘 리스가 어느 순간 더 커지고 따라서 이전에는 작았었지만, 그 두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커지지 않으면 작아질 수 없으며 작아지지 않고는 커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의 논리 에서 들뢰즈는 역 설의 논리, 즉 두 의미가 동시에 생성되는 논리의 예로 플라톤의 “시뮬라크르”

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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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차원 2) 측정 불가능한 순수생성, 즉 현재를 벗어나며 과거와 미래로, 최고와 최소로, 지나침과 모자람으로 동시에 결코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미 친 듯 움직이는 생성의 차원이 그것이다.14)

첫 번째는 질서의 세계 안에서 이데아에 의해 각각의 형상을 분유 받은 개물들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 개물들의 세계는 무한하거나 한정되어 있으며, 운동과 정지의 지점을 갖고 있고, 현재라는 시간성과 주체를 가지 면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유해왔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이다.

그러나 두 번째의 혼돈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는 역설이 지배하며, 정지 의 지점이 없이 무한이 운동하고 생성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정해진 방향성 도 갖지 않는 혹은 동시에 양방향을 갖는 무규칙적인 생성의 세계로서 과 거와 미래를 자신의 시간성으로 갖고 있는 세계이다. 여기서 들뢰즈가 “플 라톤 뒤집어 엎기”를 시도하기 위해 두 번째의 역설의 세계를 취한다는 것 은 당연할 것이다. 즉 한 방향점을 갖는 유일한 의미로서의 “양식”과 고정 된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상식”의 세계를 벗어나 역설의 세계를 자신의 철 학적 사유의 근간으로 삼는다.15)

들뢰즈의 이야기가 플라톤의 시뮬라크르의 세계만을 선택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진다면, 그의 사유는 엄밀한 뜻에서 “뒤집어엎기”의 의미를 지닌다 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스토아학파의 이론에 기대어 플라톤주의의 본 격적인 전복을 시도한다. 아니 “스토아주의자들에 의해 어떻게 플라톤주의 가 전복되었는가를 다시금 고찰한다”는 표현이 들뢰즈의 입장에서는 더 정 확할 것 같다. 스토아주의자들의 이원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 째 로는 물체(corps), 즉 고유한 장력과 물리적 질, 관계, 능동과 수동 등의 속성을 갖는 물체와 그에 조응하는 사물들의 상태(etat des choses)가 그것이다.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물체뿐이고, 또한 이 물체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형상을 분유 받은 개물들의 경우에서처럼 자신의 시간 성을 현재성으로 갖는다. 이들 사이에는 결과(효과)는 없고 원인만 있는

14) G. Deleuze, Logique du sens, p. 10.

15) Ibid., p. 12.

(16)

데, 이러한 물체들은 다른 것과 비교하여 볼 때도 원인이며, 또한 다른 것 을 위한 원인일 뿐이다. 두 번째로 들뢰즈는 스토아주의의 효과들(effets) 에 주목한다. 모든 물체가 서로서로에게 원인들이기만 하다면 결과란 무엇 이란 말인가? 즉 그것들은 무엇의 원인이란 말인가? 들뢰즈에 의하면 이 원인을 스토아주의자들은 “비물체적인 것(incorporels)으로서의 순수한 효 과나 결과”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어떠한 사물들이나 그 사물들의 상태 (l'état des choses)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들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 “사건”이나 “효과”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 효과들은 물체의 경우처럼 존재한다(exister)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의 존재(minimum d'être)를 가지면서 존속하고(subsister), 주장한다 (insister)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물체를 설명하거나 그 속성을 말해주는 주어나 형용사일 수는 없지만, 순수한 효과들이 일어나는 생성을 말해주는 동사들이고, 그 자체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일 수 없지만 수동적, 능동적 행위의 결과, 즉 무감각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 효과는 살아있는 현재성을 자신의 시간성으로 가질 수 없으며 “무한한 아이온 (Aiôn illimité)”을 자신의 시간성으로 갖는다. 언제나 현재를 빗겨나가면 서 과거와 현재로 무한히 나눠지는 생성으로서의 무한의 아이온, 즉 연속 성을 지니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차원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두 독 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아이온을 자신의 시간성으로 갖는다.16) 들뢰즈는 스토아주의의 이러한 이원론이 그 당시 철학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혁명적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이루어 낸 사건이었다고 본 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도가 실체와 실체의 우연성을 다른 것으로 보았 다면, 스토아주의자들은 속성과 같은 우연성을 포함하는 모든 사물들의 상 태를 사물과 같은 것으로 즉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어떤 것(Quelque chose, aliquid), 즉 비존재적인 것으로서의 비물 체적인 것을 형성하는 “존재를 넘어서는 것(초존재, extra être)”을 구별 된 것으로 보았다. 실체나 실체의 상태가 아닌 효과들, 사건들. 그것이 플 라톤주의를 전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즉 이러한 16) Ibid., pp. 13-14.

(17)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념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 오히려 사물들의 표면 위에 비효과적이며 무능력하고 무감각적인 초존재인 효과들뿐이라는 것이 다. 그리고 이러한 스토아주의적 작용의 결과는 모든 무한성을 표면 위로 올라오게 하는데, 즉 밑바닥의 으르렁거리는 시뮬라크르가 표면 위로 올라 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토아주의자들에 의해 이데아의 이념적 세 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를 오히려 시뮤라크르들인 무한한 생성이 즉 초존재 인 효과들, 사건들이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감각적 개물뿐만 아니라 환영이라 할 수 있는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승격되고 그들의 권리가 긍정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따라서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은 “시뮬라크르를 올라오게 하고, 상들 (icônes)이나 복사들(copies)의 권리를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7)

모든 시뮬라크르들이 이제는 표면 위로 올라온다. 그것들은 더 이상 밑 바닥에서 으르렁거리지 않고 미친 듯한 생성으로서, 무규정적인 생성으로 서 모두 표면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이제 그것들은 표면 위의 효과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효과들이 바로 이념적이며 비물체적인 사건 그 자체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디우의 눈에는 들뢰즈가 “플라톤의 전복”이라는 이름으로 플라 톤에게 부여하고 있는 확신, 즉 존재자들이나 시뮬라크르들을 플라톤이 격 하시키고 있다는 확신이 타당치 않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환영들을 승 격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긍정해야 한다는 들뢰즈의 플라톤 전복의 확신은 실제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위에서 살펴본 것처 럼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 식의 “일자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논증을 통 해 반박해 나갔으며, 플라톤에게 존재하는 것은 이념적 형상을 포함하는

“다자”뿐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그리고 플라톤의 어느 저서를 보아도 “시 뮬라크르”나 “개물”을 격하시키고 있는 부분은 없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바 17) Ibid., p. 302.

(18)

디우 시각에서 보자면, 바디우 자신은 “현재성만 갖는 다자”를 플라톤 철학 에서 취하는 반면, 들뢰즈는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와 같은 일자를 잠재적 인(virtuel) 것으로서의 “전체로서의 하나(전일자, l'Un-tout)”라는 이름 하에 혹은 “생명(une Vie)”이라는 이름하에 복원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런 의미에서 바디우는 들뢰즈를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일자를 주장하는 플 라톤주의자라고 극단적으로 명명한다. 다시 말하자면, 비록 들뢰즈 자신이 폐쇄성을 갖는 일자를 거부하고 열린 체계를 갖는 전체(Tout)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의 다자성(복수성, multiplicité)이 일자와 다자의 구 분이라는 형이상학적 전통의 물음에서 빗겨난다 할지라도, 따라서 “관계 (Relation)”로서밖에 그 이름을 명명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새 로운 형태의 일자 개념을 복원한 것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즉 들뢰즈를

“재강조된(ré-accentué) 플라톤주의자”로서 규정한다. 이는 일자와 무한을 결합하려는 모든 형이상학적 시도를 반대하는 바디우의 이론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떤 형태이든 “일자”를 복원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무한 과 연결시킨다는 것은 “무한한 다자”만을 주장하는 그로서는 비판적, 대립 적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들뢰즈가 주장하는 잠재성이나 시간 개념 을 받아들이지 않는 바디우로서는, 니체식의 “영원회귀”와 같은 의미로서 동일성의 반복이 아닌 관계로서 반복을 주장하는 시간으로서의 “밖”의 개 념, 혹은 중성으로서의 순수 사건이며 순수 잠재성인 “생명” 개념을 받아들 이기가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바디우가 일자를 버리고 "다자로서의 플라 톤주의"를 취한다면, 들뢰즈는 새로 복원된 “잠재적인 것의 일자로서의 플 라톤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이 바디우의 들뢰즈 “플라톤주의 전복”에 대한 요지이다. 즉 들뢰즈가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전복의 근거는 불확실하고 오히려 들뢰즈 그 자신이 새로운 플라톤주의자로서 규 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의 논의에 의하면, 바디우에게서 “존재로서의 존재”란 “순수다

(19)

수”를 의미하며, 그 다수란 이질적인 것이요, 그 자체 차이(difference) 와 타자(autre)라는 것, 즉 존재하는 것은 “다름”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실제 바디우의 주된 관심사는 “다름”에 있지 않다. 그는 줄 곧 어떻게 “같음(동일자, même)”을 사유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바디우 에 의하면 다름에 무관심한 유일한 것, 그것은 보편성의 이름을 갖는 동 일자이며 모두에게 전달되는 것으로서 “진리”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비록 “존재”와는 완전히 단절된 모습을 취하게 되지만, 바디우에게서는 진 리의 문제, 주체 및 윤리의 문제가 중요하게 떠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존재로서의 존재가 “자연”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사건을 통한 진리의 영역 은 “역사적인 것”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 내용이 그의 대표저서 존재와 사건 의 후반부를 차지한다. 그러나 여기서 또한 주목해야 될 점은, 바디 우의 존재 개념이 그 이전의 사유와 철저한 단절의 형태를 지녔듯, 사건 에 종속되는 진리나 주체, 윤리 개념 또한 이전의 사유와 단절된 형태를 갖는다.

바디우와 함께 과연 우리는 미래를 사유할 수 있는가? 이 문제가 아마 도 바디우 철학에 대한 우리 사유의 궁극적 목적이자 관심일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논의를 통해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담보 로, 여기서는 바디우 철학에 대한 초보적 연구로서 만족하고자 하며,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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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tre et l’événement, Seuil,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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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thique, Essai sur la conscience du Mal, Hatier, 1993.

(20)

, Deleuze. La clameur de l’Être, Hachette, 1997.

, Court traité d’ontologie transitoire, Seuil, 1998.

G.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UF, 1962.

, Le Bergsonisme, PUF,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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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gique du sens, Minuit,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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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u’est‐ce que la philosophie ?, Minuit, 1991.

Zourabichvili F., Deleuze, Une philosophie de l’événement, PUF, 1994.

_________________, Le vocabulaire de Deleuze, Ed. Ellipses, 2003.

(21)

Lêtre comme multiple pur et la vérité comme un

Hong, Ki-sook

[Résumé en Français]

Le propos de ce texte est à examiner le problème de l’être en tant qu’être et de la vérité chez A. Badiou. Cependant, le contenu de ces recherches est délimité: «L’être en tant qu’être chez A. Badiou dans le rapport avec la pensée de l’être chez Platon». Car, traiter tout ce que nous avons proposé au-dessus, est trop grand pour cet article, alors il est obligé de dire ce que cette recherche serait une partie parmi des séries de ce sujet. Le premier chapitre dont le titre est “L’être comme multiple pur”, développe la question si l’Un est. A. Badiou insiste

«l’Un n’est pas, mais il n’y a que des multiples». L’ontologie comme présentation qu’il soutient, constitue la deuxième partie dans laquelle nous traitons le sujet concernant le multiple pur et le vide. Et la troisième partie consiste à situer le problème de l’ontologie dans la mathématique. Le contenu principal commence à partir de deuxième chapitrequi s’intitule “la lecture de Platon par Badiou”. Dans ce chapitre, nous pouvons discerner le platonisme de Badiou comme ultra-platonicienne et citra- platonicienne. Le troisième chapitre touche au point de vue de G. Deleuze concernant le platonisme. A vrai dire, Deleuze cherche à renverser le platonisme par le stoïcisme. Et inversement, Badiou critique la pensée de Deleuze concernant le platonis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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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mots de clé : l’être en tant qu’être, l’un, le multiple, le vide, la présentation, le platonisme, G. Deleuze.

논문접수일: 2006년 7월 27일 논문심사일: 2006년 9월 5일 게재확정일: 2006년 9월 23일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