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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사건을 순수한 것, 탈물질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경험주의에 저항하는 동시에, 사건을 물체의 표면으로 봄으로써 플라톤주의에 저항한다. 이러한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을 데콩브(V. Descombes)는 ‘선험적 경험론’이라 부른다(<의>, p. 124, 역자 주).19) 여기에 다 시 한 가지 특징이 추가로 강조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들뢰즈가 ‘형이상학적 표면’ 또는 ‘객 관적 선험의 장’ 등으로 부르는 사건의 표면 또는 장이 주체 이전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것 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객관적’이라는 마지막 특징은 들뢰즈의 경험론과 선험론에 덧붙여 진 또 하나의 특징이라기보다는 들뢰즈의 경험론과 선험론과 직교하는 특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체발생에 있어서 구조의 객관성과 더불어 발생에 반하는 주관성이 나 란히 배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들뢰즈는 주체의 발생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적 표면 또는

소설을 추천할 만하다.

19) 데콩브가 ‘선험적 경험론’이라고 부르기 이전에 이미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명명하고 있다(Deleuze, 1968/2004, p. 147). 이 저서를 번역한 김상환(2004)은

‘transcendental’을 ‘초월론적’으로, ‘transcendent’를 ‘초월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전자는 인식론적 으로 ‘선험적’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존재론적으로 신이 인간세상을 초월하여 있다는 말처럼 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서동욱(2002)은 전자를 ‘초월적’으로, 후자를 ‘초재적’으로 번역한다.

객관적 선험의 장의 객관성을 주장하지만, 발생에 거슬러 대응하는 주체의 반-발생에 있어 서는 주관성을 수용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저항하는 ‘경험주의’는 사건을 사고(事故)와 혼동하는 사유를 말한다(<의>, p.

124). 사물의 상태가 시공간적으로 현실화한 것으로서의 사고를, 사고에 의미를 주는 사건 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사고에 대하여 그 의미를 묻지 않 는다면, 그것은 그 사고가 이미 특정하고 일방적인 의미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 대 교통사고에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우리는, 비록 의사의 사망원인 진단과 같은 전문적 세밀함은 발휘하지 못하나,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교통사망사고에서 죽은 사람은, 과장 되게 표현하면, 짓이겨진 파리의 시체와 진배없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조폭의 기업비리를 파헤치던 수사관이었다고 하면, 이제 이 교통사망사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 어났는가?’라는, 경찰과 기자가 가질 법한 사건적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사건에는 이처럼 사고의 물체적 원인과는 다른 비물체적 준원인이 개입한다. 그리고 그 사건의 준원인들 간 의 관련이 어떻게 계열화되는가에 따라 단순사고가 범죄사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의 삶이 사건의 연속이라고 할 때, 이 사건은 이리저리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다. 들뢰즈가 비판하는 ‘경험주의’는 사실 다양한 계열화를 허용하는 사건을 일방적 통념으로 규정되는 사고로 취급하는 생각 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들뢰즈는 사건이 언표적 명제 속에 다양한 계열로 내속한다는 점 과 더불어, 사건이 무수한 의미가 바글대는 무의미 층위에 잠재적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그의 ‘경험론’이다. 이 내속/존속하는 사건의 성격은 ‘잠재성 (virtuality)’이라고 불리거니와, 이 잠재성은 ‘현실성(actuality)’과 더불어 ‘실재성(reality)’의 한 층위를 구성한다. 말하자면, 잠재성과 현실성은 실재성의 두 가지 존재방식이다. 잠재성 은 현실화된 것이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실현된다는 뜻 의 ‘가능성(possibility)’과는 엄격히 구분된다.20)

들뢰즈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 교육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잠재성의 효과화 내지 현 실화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현실화는 아무리 극대화된 것이라 하더라도 무수한 잠 재성 중에서 어느 하나의 것이 효과화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사회화에 불과한 것이 아닐

20) 잠재-가능, 가능-실재, 실재-현실, 현실-잠재의 네 가지 대립관련에 대한 설명은 김재인의 용어 설명(Deleuze, 1966/1996, pp. 180-187)을 참조할 수 있다.

까? 이 지점에서 교육은 잠재성의 극대화라는 현실화 방향을 거슬러 잠재성 그 자체와의 일치를 기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잠재성이 존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여여한 현실성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는 뜻이 된다. 들뢰즈의 경험론적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이 반-효과화로서의 교육의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21)

그런데 들뢰즈는 사건의 잠재성이 ‘현실화 이전’의 순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경험주의에 저항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유를 경험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아닐 것이다. 왜냐면 들뢰즈가 생각하는 사건은 순수한 것이기는 하지만 ‘초월적’

인 것은 아니고, ‘초월론적’이거나 ‘선험적’인, 따라서 ‘경험 내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내재의 사유는 스토아 학파의 사유에 따라 플라톤주의에 저항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사건이 경험주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경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적인 것과 구분되는 잠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잠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과 분리되어서 초 월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과 더불어 내재적 지위를 갖는다는 뜻이다. 플 라톤에게 있어서의 원본과 복사본의 분절이 스토아 학파의 물체와 비물체의 분절로 대치 될 때, 원본이 비물체적 사건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복사본이 ‘진짜 복사본’인 에이콘과

‘가짜 복사본’인 시뮬라크르로 비평형적으로 분할되어 실재의 한 측면으로서의 표면에 시 뮬라크르가 올라오고 사건이 얹히게 된다. 촛대와 촛불, 머리와 얼굴, 물과 표면장력, 몸과 피부에서 후자들은 전자들과 분리될 수 없지만, 전자들로 환원될 수 없는 사건의 장소, 즉

‘형이상학적 표면’ 또는 ‘객관적 선험의 장’의 비유적 상징을 제공한다. 촛대 없는 촛불, 머 리 없는 얼굴은 그 밝음, 그 표정이라는 비물체적 사건이 아닌가.

들뢰즈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 교육은 우선 순수사건의 현실화로 규정될 수 있다. 그 러나 이 현실화로 인해 형성된 주체에게 순수사건은 충분히 이해되기 어렵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두려움과 놀라움에 떨게 하는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이 사건들을 배후세계 적으로 설명하면서 우리의 공포감 내지는 불안감을 감소시켜주는 초월적 담론들이 존재하 게 된다. 이제 반-효과화로서의 교육은 이러한 초월적 담론에 맞서, 이데아로 비상하거나 물체의 심연으로 추락하지 아니하고, 표면에 머무는 것이 된다. 천국이건 지옥이건 이러한

21) 경험주의자로서 듀이(Dewey)는 이러한 들뢰즈의 견해에 얼마나 일치하는 것일까? 세메스키 (Semetsky, 2006)는 들뢰즈의 사유를 듀이가 예비해 놓았고, 그런 만큼 들뢰즈의 사유는 듀이 로 환원될 수 있다는 논지를 펴고 있지만,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추후 검토를 요한다.

배후세계를 가정하지 않는 것, 매끄러운 표면에 홈을 파는 방식이 아니라 그 표면에서 순 수사건을 이해하고 그 사건을 실행하는 것, 그것이 들뢰즈의 선험론적 측면에서 드러나는

‘표면의 교육’이자 ‘대지의 교육’이다. “천국이 따로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하려고만 하면 그건 어렵지 않은 일. 그러면 우리 발밑에 지옥도 없을 것이고 우리 머리 위엔 창공 만 펼쳐질 뿐이에요.”22) 이러한 상상은 몽상가의 것은 아닐 것이다. 비참한 전쟁들은 모두 배후세계를 빙자하여 일어나지 않던가. 이런 의미에서 표면의 교육은 ‘평화의 교육’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평화를 깨는 폭력에 대한 항전은 불사하면서 말이다.

들뢰즈의 사유가 ‘선험적 경험론’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경험주의가 아닌 경험론, 초월주의가 아닌 선험론이기 때문이다. 선험적 경험론은 사건이 경험적인 것 또는 현실적 인 것과 구분되는 실재의 한 측면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표면으로서 내재한다는 점을 동시 에 요약하고 있다. 여기에 따라오는 교육에 대한 이미지는 잠재적 장에서 발생한 주체가 방향을 역전시켜 표면의 잠재적 장과 합일되는 것이다. 이 장을 들뢰즈는 ‘객관적 선험의 장’이라 부르거니와, 이때 ‘객관적’이라는 말은 칸트철학의 ‘인식주관’과의 대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잡다한 인식질료가 경험으로서 성립하는 것은 시공간, 범주, 이 념 등의 주체의 형식 또는 아프리오리에 기인한다. 이것이 흔히 인식론에 있어서의 칸트의 의의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이 전회는 “전통철학과 칸트철학의 차 이는 전자가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대전제에 입각해 전개된 데 반해, 후자는 이 일치를 부정(이정우, 2003, p. 238)”한다는 것에서 촉발되며, 이제 인식은 대상과의 일치가 아니라 인식질료의 주관적 구성에 의한 것이 된다. 칸트의 의식내재적 사유의 특징을 ‘주관적 선 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스토아 학파와 라이프니츠에 기대고 있는 들뢰즈의 사유의 특 징을 ‘객관적 선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들뢰즈의 사건의 존재론에 있어서의

‘선험’은 경험을 구성하는 주체의 조건이 아니라, 주체가 그 안에서 구성되는 장으로 된다.

그러나 들뢰즈의 사건의 교육론에 따르면 주체가 선험적 장에 의하여 결정되는 측면, 즉 객관적 선험의 장이 주체를 형성, 발생시키는 측면을 넘어서서 주체가 모종의 실천적 행위 를 통하여 이 장과 합일되는 반대행위, 즉 반-효과화가 드러난다. 그런데 과연 칸트철학은 이제까지 논한 사건의 교육론에 얼마나 일치하는 것일까? 여기서 반-효과화를 규명하는데

22)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only the sky.” 존 레논(J. Lennon)의 노래 ‘이매진’의 앞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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