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후기 불복장 직물의 일고찰 (高麗時代 後期 佛腹藏 織物의 一考察)
-온양민속박물관(溫陽民俗博物館) 소장(所藏) 1302년(年) 아미타불복장직물(阿彌陀佛腹藏織物)을 중심(中心)으로-
金 英 淑
(동양복식연구원 원장)
Ⅰ. 머리말 2. 1302年 佛腹藏 織物의 特性 Ⅱ. 高麗 後期의 織物 製織環境 1) 絞染 織物과 그 變貌 1. 元服屬期의 服飾 環境 2) 梅竹紋綿의 美的 價値 2. 工匠制度의 定着 3) 花兎紋의 변용 Ⅲ. 佛腹藏 織物의 意味와 價値 4) 金織錦의 實體 1. 《造像經》에 따른 服藏 織物의 構成과 意味 5) 羅․綾織의 傳統 1) 五境 2) 보리수엽 3) 五色綵幡 Ⅳ. 맺음말
4) 五色線 5) 五帛杵
Ⅰ. 머 리 말
온양민속박물관에는 1302년에 조성(造成)된 아미타불 불복장에서 출현한 복장물 다수 가 소장되어 있다.1) 이중 220여 점에 달하는 직물류는 이 시대의 현존 직물이 많지 않 은 현실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불복장에서 직물류가 출현한 바가 없는 것은 아니나2) 이처럼 한 시대의 다양한 직물이 출현한 것은 처음있는 일로 학계의 상당한 주목(注目)을 받았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認識)한 박물관 측에서는 이에 대한 전문연구를 실시하여 이 직물에 대한 세부적(細部的)인 연구를 실시해 오고 있다. 이러한 박물관의 연구사업은 박물관이 유물(遺物)을 전시(展示)하는 1차 기능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의 수집
1) 불복장에서 출현한 직물류는 직물 조각 220점과 의류 3점, 향주머니 5매 등이 있고 이외에 경전, 다라니, 발원문 4매 施主記 1매가 있다. 시주기에 의하면 大德 6년(1302)에 불상을 조성하고 복장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 기에 복장된 직물류는 발원문에 따라 네 가문의 권세를 보여주는 고급 직물로 고려시대의 대표적 직물이라 할 수 있다.
2) 현존하는 고려시대 염직물로 장곡사 약사불복장에서 약 30점 이상 출현한 바 있고, 문주사 금동여래좌상의 복장 과 기타 탑에서 출현한 직물이 있다. 1302년 아미타불복장에서는 220점이상 다량으로 출현 하였고, 더욱이 고려 시대 上衣 3점이 출현하여 주목되고 있다.
과 연구기능, 사회적 확산(擴散)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 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1991년에 1302년 아미타불 불복장물을 중심으로 개최되었던 종합적(綜合的)인 연구 (硏究)도 이러한 연구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되어 직물 연구에 있어서 큰 성과를 거두었 다. 복식이나 직물에 있어서 얻어진 첫 번째 성과는 이 직물이 발견된 명문(銘文)과 같 이 고려시대 직물이라는 점을 확인했다는 점이 될 것이며, 각 직물의 조직과 밀도 측정 등을 실시하여 연구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3)
또한 박물관에서는 직물의 보존을 위하여 외국 전문가(專門家)를 초청하여 직물을 검 토한 바도 있다. 1991년 일본의 염직연구가 산변지행(山邊知行) 선생(전 동경국립박물 관)을 초빙하여 직물에 대한 세부적인 상황을 검토한 바 있으며, 신탁근 관장은 직물 보 존의 방법을 찾기 위하여 일본의 유수 직물연구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장 직물에 관한 관심은 이전부터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었으나, 그렇지 못한 것도 사실이 었다. 이러한 복장 직물에 대한 관심의 필요성을 고조시킨 것도 ‘1302년 아미타불복장직 물’이 가지는 의의라면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복장 직물에 대한 연구는 복식이나 직물, 그 자체(自體)만을 대상(對象)으로 한 것 도 큰 의의를 지닌다. 조성 연대가 정확한 상태에서 그 시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복장 직물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그 직물이 지니 는 종교성(宗敎性) 및 사상성(思想性), 또는 당대의 주변환경과의 영향성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직물의 발달사적 검토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특 히 연대가 올라갈수록, 자료가 부족할수록 이러한 문제는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1302년 아미타불 복장 직물을 중심으로 당시의 제직 환경 속에서 불복장 직물 이 가지는 의의를 찾아보는 한편, 염색․문양․직조 등에 있어서 1302년 직물이 가지는 특성을 찾아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글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앞서 조사연구에서 발표 된 복식관련 두 논문과 허흥식 교수의 ‘1302년 아미타불복장의 조상경위와 사상경향’, 배영동 학예연구사의 ‘불복장의식(佛腹藏儀式)의 구성(構成)과 의미(意味)’가 많은 참고 가 되었다.
Ⅱ. 고려(高麗) 후기(後期)의 직물(織物) 제직환경(製織環境) 1. 원복속기(元服屬期)의 복식(服飾) 환경(環境)
1302 아미타불 복장직물의 보다 정확한 검토를 위하여는 이러한 직물이 직조되었던 당시의 제직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직 환경이란 제직 기술의 발전 뿐만 아니라 직물에 반영(反映)된 색상(色相)이나 문양(紋樣)에 대한 미의식(美意識), 또는 주변 국가 와의 직물 교역관계 등을 포함한다.
먼저 이 직물이 복장된 충렬왕대는 몽고 풍속에 의하여 변발 호복(胡服)하는 등 전
3) 연구결과는 《1302年 阿彌陀佛腹藏物의 調査硏究》(온양민속박물관, 1991)로 간행되었다. 복식에 있어서는 柳喜 卿원장이 ‘1302年 阿彌陀佛服藏 腹飾의 樣式 特性’을, 金美子․金孝淑 교수의 ‘1302年 阿彌陀佛腹藏 織物의 分 析’ 등 두 논문이 발표되었다. 紫衣․中衣․上衣 등 3점과 옷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 앞의 논문에서는 매듭 단추 사용의 단서가 된다는 점, 동정의 확인, 重□形 여밈법, 목판깃으로의 변모 등을 들었다(앞의 책, p 93). 뒤 의 논문에서는 출현 직물을 직물별로 대별하고 각각의 조직․문양상의 특성을 들고 있다.
통적 복식에 있어서의 일차적 변화(變化)를 겪었던 시기이다. 변발 호복의 출발은 이미 원종(元宗) 13년(1272)에 세자가 몽고에서 돌아올 때 변발 호복하고 입국한데서 출발한 다. 충렬왕은 원종 원년(1260) 8월에 세자에 책봉된 후 13년 원나라에 가 15년에 원(元) 세조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해 6월 원종이 세상을 뜨자 귀국하여 황포(黃布)를 입고 즉 위하였다.4)
충렬왕이 즉위한 해 재추회의(宰樞會議)에서 개체 변발이 논의되어 조신들도 거기에 따르게 되었다.5)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고려가 한동안 원(元)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복식에 있어서 많은 변용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두발의 개체(開剃) 는 상당한 변용이라 하겠지만, 이는 관원(官員)이 중심이 되었고 몽고식 관모는 서인(庶 人)들의 관모에 자취를 남겼을 뿐이다.6)
이러한 가운데 직물에 있어서도 고려적인 특성을 가진 직물들이 생산되고 있음을 본 다. 고려의 직물은 견백(絹帛)과 청포(靑布), 세포(細布), 종포(綜布), 금총포(金總布), 릉 라금세(綾羅金細), 어아주(魚牙紬 ), 조하주(朝霞紬 ), 하면(霞錦) 등이 모두 훌륭하다고 평하고 있으나,7) 아무래도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직물은 백저포였다. 충렬왕 31년(1305) 에 공주와 황태자 진금(眞金)의 비(妃)에게 세저포 45필과 기타 여러 가지 보화를 보낸 기록이 있는데, 이는 상하귀천없이 널리 사용한 직물이었다.8) 백성들 뿐만 아니라 왕들 도 이 백저포의 옷을 입었으며, 인종은 저포로 의복을 만들어 평상시에 착용하였다고 하는데, 그 깨끗함이 뛰어나 백옥과 같다고 하였다.9)
또한 이 저포를 세금으로 거둬들여 백성들의 폐단이 되었던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충렬왕 때 홍자번(洪子藩)이 상소하기를 “여러 도가 저포를 납세(納稅)로 거두어들이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을 것을…” 이라고 하였는데10) 이것으로 보면 중앙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품질 좋은 모시를 제직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가혹한 정책 때문에 백성들 이 제직하는 것을 꺼려 제직기술단절의 한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11)
특히 충렬왕 때에는 화문정포(花紋苧布)라는 전에 없었던 우수한 직물이 제직되어, 원 (元)에 공물로 보내기도 하였는데12) 이러한 일면이 바로 고려조 직물 발전의 일단을 말 해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2. 공장제도(工場制度)의 정착(定着)
복식문화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는 직조(織造)와 염직(染織)에 있어 세분화(細分化)된 공장제도(工場制度)의 확립을 들 수 있다. 세분화, 전문화된 공장제도 의 확립은 이 분야 발달에 기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긍이 고려의 공예를 ‘고려공기 지교기절예(高麗工技至巧其絶藝)’13)라고 평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제도정비의 일면을
4) 《고려사》 권 제 28 충렬왕 1
5) 《고려사》 권 제 28 충렬왕 즉위년 12월
6) 김동욱, 《이조복식연구》(亞細亞文化史, 1973) p.62 7) 《神檀民史》. 권1 제7 風俗
8) 《神檀民史》 제 17장 풍속 9) 《宣和奉仕高麗圖經》 工技 10) 《고려사》 권30 충렬왕 34년 3월 11) 이여성 《朝鮮復飾考》
12) 장경희, 〈14世紀의 高麗 染織 硏究〉《美術史學硏究》 190․191 합집〈韓國美術史學會〉, 1991), p40 13) 《高麗圖經》 권19 庶民 工技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려의 복식 분야 공장(工匠)들이 어떠 한 측면으로 정비되어 갔는가 하는 점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제도적인 측면에서 의복과 관련한 부서의 변천(變遷)을 살펴보기로 한다. 어의 (御衣)를 담당하는 장복서(掌服署)는 목종(穆宗) 때 상의국(尙衣局)으로 출발하였다. 여 기에 소속된 관원은 봉어(奉御)(정 6품) 1명, 직장(直長)(정 7품) 1명 등이었다. 충선왕 2년(1310)에는 이를 장복서(掌服署)로 명칭을 변경하고, 봉어(奉御)를 령(令)으로 개칭 하였다.
공민왕 때에 와서는 상의국과 장복서를 오가다가 21년에 장복서로 환원하고 봉어를 령(令)으로 고정하였다. 이러한 변동을 거쳐 공양왕 3년(1391)는 공조에 병합시키는 결 과를 가져온다.14)
염색에 관한 일은 도염서(都染署)에서 담당하였다. 이를 충렬왕 34년 (1308)에는 잡직 서와 합쳐 염직국으로 변경하여 선공사(繕工司)에 속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사(使) 2명 (종 5품), 부사(副使) 1명(종 6품), 직장(直長) 1명(종 7품)을 두었다. 그 후에 충선왕은
‘천을 짜고 물들이는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하여 내알자감(內謁者監), 내시백(內侍 伯), 내알자(內謁者), 장원정(長源亭) 직(直)을 각각 2명씩 더하여 그 일을 담당하게 하 였다. 충선왕 2년(1310에는 염직국에 도염서를 따로 설치하고 정 8품의 령(令)과 정 9 품의 승(丞)을 다시 두었다.15)
직물을 짜는 일은 잡직서(雜織署)에서 담당하였는데, 여기에는 령(令) 2명(정 8품), 승 (丞) 2명(정 9품) 등을 두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충선왕이 잡직서를 도염서에 합쳐 직염국으로 하였다. 그 후 다시 잡직서를 두고 영, 승을 회복하였다.16)
이상의 직제 변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충선왕 대의 일이다. 충선왕은 상의국을 장복서 (掌服署)로 개칭(改稱), 도염서 설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러한 변모의 원인(原因)을 원 나라의 공납(貢納) 요구(要求)가 많아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제직의 필요성이 증가 하였으므로 조직체제를 정비하여 생산성 향상(向上)을 도모한 데서 찾기도 하지만17) 이 러한 제도적 정비는 결과적으로 직조, 염색 등 이 분야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 져왔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이러한 각 아문에 소속되어 실질적으로 직조나 염색을 담당하였던 인원은 공장(工匠) 이라고 볼 수 있다. 각 아문에 속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던 인원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 되는 바 아니지만, “여러 도에 있는 김기방(金綺坊) 잡직방(雜織坊)(모시 및 수 등을 담 당하던 곳), 갑방(甲坊)(가죽신 만드는 곳)의 장인들은 모두 그 인원을 축소하여 농업에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성종 때의 기록을 보면18) 중앙 뿐만이 아니고, 지방에도 공장 들이 활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공장들은 무엇보다 공기(工技)이외의 일로 생업을 삼을 수 없었고 이 일은 세습되었 다.19) 또한 이들은 환로에 나갈 수 있는 신분도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관속공장(官屬 工匠)은 직임에 따라 쌀이나 벼를 별사(別賜)로 내려주었고, 비관속공장은 자신들이 만 든 제품을 판매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산활동을 해주고 급료를 받아 생활하였
14) 《고려사》 권 제77 志, 제31 掌服署 15) 《고려사》 권 제77 ,志 제31 백관 2 都染署 16) 《고려사》 권 제77 志 제31 백관 2 17) 장경희, 앞의 글, p.35
18) 《고려사》 권 제79 志 제33 農桑
19) 洪永基, 〈高麗時代 工匠〉《진단학보》40(진단학회, 1975), p.70
다.20) 이것은 곧 장인(匠人)들의 사기를 진작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상의국(尙衣局)의 장인은 수장지유(繡匠指諭)에게 쌀 10섬을 비롯하여 복두장․화장 (靴匠)․대장(帶匠)․피혜장(鞁鞋匠)․홀대장(笏袋匠)들에게 각각 차등있게 별사를 지급 하였다. 잡직서의 장인 계장(罽匠)은 쌀 7섬을 비롯하여 수장(繡匠)에게 별사를 나누어 주었으며, 액정국(掖庭局)의 금장(錦匠)․수장(繡匠)․릉장(綾匠) 등에게도 각각의 직책 에 따라 쌀과 벼를 별사로 지급하였다.21)
이상의 염직에 관련한 공장들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 고려시대 관영장인
掌服署 掖庭局 雜織署 都染署 供造署 掌活署
幞頭匠 錦匠 罽 匠染 紅鞋匠 銀匠
帶匠 羅匠 繡匠 梳匠 皮帶匠
靴匠 綾匠 朱紅匠 金箔匠
鞁鞋匠 絹匠 鏡匠
繡匠 白銅匠
芴袋匠
앞에서와 같이 세분화된 공장제도와 또 이들에 대한 정책적인 지원 등은 지굴의 발전 을 가져오게 하는 주된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Ⅲ. 불복장(佛腹藏) 직물(織物)의 의미(意味)와 가치(價値)
1.《조상경(造象經)》에 따른 복장(腹藏) 직물(織物)의 구성(構成)과 의미(意味)
불복장물의 근본적 의의는 신앙(信仰)의 대상(對象)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배(敬拜) 의 대상이 시간을 초월하여 직물 연구의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불복장의 기본 적인 의의에 비추어볼 때, 불복장물 중에서 직물만을 분리하여 물리적인 연구를 시도하 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조성된 것인만 큼, 개별적으로 갖는 의미를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방법이 바람직할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복장한 당사자들은 이것을 단순한 천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의 미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복장물 중 직물류는 용도(用途)를 가지거나, 아니면 형태(形態)나 색깔에 있어서 상징성(象徵性)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번 1302년 아미타불복장에서 출현한 직물은 첫째 기존의 불복장에서 출현한 직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종류가 다양하다는 점, 둘째 직물의 형태에 있어서도 어떤 체계(體系)를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가지 형태 를 취하고 있다는 점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출현 당시의 면밀한 자료를 검토하면 바로 해결될 문제이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어려운 문제이다. 이 직물은 단순히 복 장을 채우는 충전용으로만 쓰이지는 않았던 점은 직물에 준제구자도(准堤九字圖)를 찍은
20) 洪永基, 위의 글, p.72 21) 《고려사》 권 제80 志 제34
점, 또는 일부 직물이기는 하지만 형태나 색상에 있어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등 에서 확인된다.22)
불복장물에 대한 방법과 절차 등을 알 수 있게 하는 문헌으로《관상의궤(觀象義軌)》
와 《조상경(造象經)》이 전한다. 《관상의궤》는 1677년 팔영산(八影山) 방가사에서 간 행한 것이며, 《조상경》은 1824년 금강산유점사에서 판각한 것이다.23)
불상 조성시 복장하는 이유는 《조상경》 ‘제상보살복장단의식(諸像菩薩腹藏壇儀式)’
에 나타나 있다. 이 경에는 복장의 취지와 물품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크기와 개수, 색상, 넣는 방법 등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 경은 비록 연대는 후대 이기는 하지만, 1302년 불복장에서 출현한 복장물과 일치되는 점도 찾아진다.
즉 오곡(五穀), 오향(五香), 오약(五藥), 범서(梵書), 오색선(五色線), 발원문(發願文), 오륜종자(五輪種子) 등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조상경》에서 제시하 고 있는 복장물 중 직물과 관련이 있는 것을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아울러 여기에 제 시한 사항과 출현물의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편 조선초기에 해당하는 흑석사 아미타불에서 출현한 직물류와 비교 검토(檢討)하는 것도 시대적인 변천(變遷)이라는 점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조상경》에서 제시한 복장물 중 직물과 관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 방위에 따른 복장물의 구성
(후령통 안에 들어가는 염직물과 불복장 일부)
위에서와 같이 6종 외에 소위 핵심 복장물을 담는 후령통을 싸는 보자기류, 전적을 쌓 는 보자기류 등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보면 일차적으로 동서남북 중앙의 방위가 고 려되고, 여기에 맞는 색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일차적으로 공통된 점이다. 그러면 이 들을 세부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22) 이 점에 대해서 허홍식 교수도 의미성에 주목하면서 “3점의 옷과 다양한 색상과 모양의 옷조각은 단순한 충전 용으로 보기는 어렵고, 당시 복잡한 구조를 보이는 사상적 배경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하여 단순충전을 위 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1302년 아미타불복장물의 조사연구》, p22) 그러나 趙孝淑 교수는 직물 조각 220여 점을 분류하면서 “크기는 다양했고 복장을 위해 별도로 재단한 것이 아니고 쓰다 남은 천조각이며 小圓形曼茶羅가 찍힌 것이 많았다”라고 하여(앞의 책, p113) 직물이 지니는 의미를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23) 裵永東, 〈佛腹藏儀式의 構成과 意味〉,《1302년 아미타불복장물의 조사연구》(온양민속박물관, 1991), p213
1) 오경(五鏡)
다섯 개의 거울을 안치하는 것을 말하지만, 위에 제시한 형태의 천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오륜종자(五輪種子)란 방위에 따라 오륜형을 만들고 흰비단의 원륜(圓輪)에 붙여 복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오륜을 직물로 하기 때문에 당대의 직물이 보존될 수 있었다.
방위에 따른 형태와 쓰인 글자는 다음과 같다.
■오륜종자의 방위내용
이러한 오륜종자의 형태는 조선 초기 흑석사 아미타불복장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데,24) 이를 본다면 1302년 아미타불복장에서 출현한 직물에도 이와 같은 오륜종자가 있 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DB 29(원형), DB 33(사각형), DB 88(삼각형), DB 123(반 원형) 등 형태적인 면에 있어서는 유사한 점이 발견되나 방위색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 다.
2) 보리수엽
오보병(五寶甁) 안에 넣는 다섯가지 보리수 잎을 말한다. 동에 향수엽(香樹葉), 남에 추수엽(楸樹葉), 서에 야합수엽(夜合樹葉), 북에 오동엽(梧桐葉), 중앙에 정수엽(挺水葉) 을 넣는데, 이는 깨달음을 뜻한다. 석가모니가 이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 다. 흑석사 아미타불복장에서 출현한 보리수잎은 비단 헝겊으로 나뭇잎 형태를 만들어 복장하였다. 그러나 이 복장물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직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실제로 나뭇잎을 복장하여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직물이 소실된 것인지 문제로 남는다.
3) 오색채번(五色綵幡)
번(幡)은 부처님의 몸을 표시하는 것으로 불교의식 때 쓰이는 장엄구이다. 방위에 따 라 동(東)에 청채번, 남(南)에 홍채번, 서(西)에 백채번, 북(北)에 황채번을 넣는다. 형태 는 인체와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각 부위의 명칭도 번두(幡頭)․번수(幡手)․번신 (幡身)․번족(幡足)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흑석사 아미타여래목불에서 출현한 직 물류 중에서는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번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는 번은 보이지 않 았다.
24) 김영숙, 〈朝鮮朝前期 織物의 한 樣相〉 - 흑석사 아미타불 복장 유물을 중심으로, 《문화재》 27호(문화재연 구소, 1994), p,p,127-156
4) 오색선(五色線)
오보병의 입에 맨 후 팔엽개(八葉蓋)의 중앙(곧 후혈(喉穴))으로 관통시켜 후령통을 싼 황초보자기 밖으로 나오게 하는 5색실을 말한다. 길이는 10자인데 방향색에 따라 오 보병의 입에 맨 뒤 하나로 합해서 후령통 밖으로 내서 팔엽대홍련(八葉大紅蓮)의 중앙 을 뚫고 황초보자기 밖으로 나오게 하여 가로세로 두루 묶는다. 이 실은 총명한 지혜를 표시하고 한계(限界)의 결성을 표시하므로 일체의 천마(天摩)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1302년 아미타불 복장에서는 오색선이 출현하였는데, 련사(練絲)하지 않은 명주실이 다.25)
아울러 불복장시 핵심이 되는 물건을 넣는 후령통을 싸는 황초(黃綃)보자기는 유물번 호 DB-228의 보자기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이 보자기에는 준제구자도(准堤九字圖) 인 (印)이 찍혀 있다.
5) 오백저(五帛杵)
동에 청백저(靑帛杵), 남에 홍백저(紅帛杵), 서에 백백저(白帛杵), 북에 흑백저(黑帛 杵), 중앙에 황백저(黃帛杵)를 넣으니 이를 가리킨다. 이 오저(五杵)는 오금강갈마저(五 金剛羯摩杵)를 뜻하는데, 오개(五蓋) 와 함께 오병의 안에 넣는 물질의 뚜껑과 같은 셈 이다.
이상에서 불복장물에 포함되는 직물의 여러 가지를 살펴보았다. 직물에 있어서는 핵 심 복장물을 싸는 황초(黃綃)보자기를 비롯하여 오경(五鏡)을 상징하는 오륜종자, 오백 저, 오색채번, 보리수엽 등과 오색사 등이 포함된다. 이 1302년 아미타불복장물이 《조 상경》에서 제시(提示)하고 있는 것과 거의 전형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 하면26) 직물들도 맥락을 같이 하여야 할 것이겠으나, 조선 초기에 비하면 오색채번 보 리수엽 등이 발견되지 않는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직물류에 준제구자 도(准堤九字圖)가 찍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 1302년(年) 불복장(佛腹藏) 직물(織物)의 특성(特性)
1) 교염(絞染) 직물(織物)과 그 변모(變貌)
고려말 충렬왕(1274∼1308)대에 복장된 1302년 아미타불복장에서 출현된 직물은 당시 의 직물 직조의 상황(狀況)을 짐작케 한다. 이중 교힐염으로 염색한 직물이 있어 당대의 염색 기법을 짐작케 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유물번호 DB-32의 교힐염견(그림 1)은 상당히 파손된 상태이지만 그 염색법에 있어 서 다른 직물과 특징을 이룬다. 이 보자기는 아미타불복장시 경전(經典)을 싸는 데 사용 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직물의 전체 바탕에 준제구자도(准堤九字圖) 인(印)이 찍혀
25) 趙孝淑 교수는 5색사를 언급하면서 흑갈색 실과 흰색 실이 圓紋羅(DB 103∼109)의 경사와 위사와 같은 것으로 보고 제직한 실과 동일한 실이 함께 넣어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직물은 고려시대에 직접 제직한 것으로 보 았다. 〈1302년 阿彌陀佛腹藏 織物의 分析〉,《1302년 阿彌陀佛腹藏物의 調査硏究》(온양민속박물관, 1991), p.123
26) 허홍식, 〈1302년 阿彌陀佛腹藏 織物의 造成經緯와 思想傾向〉,《1302年 阿彌陀佛腹藏物의 調査硏究》(온양민 속박물관, 1991), p21
있다. 연분홍색 평견(平絹) 박지(薄地)로 된 바탕에 교힐(絞纈)의 방법으로 콩알 모양의 무늬를 넣고 있다. 원무늬의 크기는 큰 것이 지름 0.9㎝이고, 작은 것은 0.7㎝이다. 밀도 는 40×33이다. 이 염직물은 식서가 있어(직물 폭 : 47.5㎝)당대 직물의 폭을 파악할 수 있게도 한다.
바탕에 작은 원형 대소 화문(花紋)을 균형있게 배치하였는데, 이는 하나의 화판(花板) 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꽃잎이 어울리는 6화문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는 점선 상태의 작은 콩알무늬 염색(두교(豆絞))의 윤곽을 이중으로 한 것과 한번으로 선염한 것도 있 다. 이렇듯 묶음(교(絞))에 의한 교힐의 기법은 간단한 듯하면서 다양한 문양을 나타내 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삼힐(三纈)의 염색 방법에서 기술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식물의 전즙(煎汁) 을 만드는 것을 염색에 응용한 결과 염료로써 완성시키기도 하였다.27) 이러한 교힐염은 고구려 매산리 고분 인물이 착용하고 있는 포 (袍)에서 확인되기는 하였으나 실물로 나타난 것은 이 직물이 처음이어서 중요한 의의 를 지닌다.
고려는 이 직물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견직물 염색에 있어 교힐의 방법을 계승(繼承) 하여 발전(發展)시켰던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염 색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잡직서 염장(染匠)의 기술적 면모를 확인하는 결과가 되는 것 이다.
한편 시대는 이 직물보다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본 정창원에도 교힐의 방법을 이용한 고대 염직물이 소장되어 있다.(그림 3)일본에서는 나라시대에는 교힐보다 협힐․갈힐 등이 번창하였으나, 9세기 이후에는 협힐․갈힐은 약세를 보이고, 반면에 교힐 염이 주 류를 이루었다.28) 명석염인(明石染人)은 동대사헌물대장(東大寺獻物臺帳)에 적혀 있는
‘목교(木交)’를 천의 한 면을 실로 묶어 방염(防炎)하는 염색법으로 보고, 그 원류(源流) 를 인도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염색법에 의하여 염색된 직물은 동대사(東大寺)를 비롯 하여 법륭사, 기타 민간에서도 소장하고 있고, 색치는 황록(黃綠)․벽록(碧綠)․홍주람 (紅朱藍) 등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29)
중국에서는 이러한 교힐 염색법에 의하여 염색된 직무로 토노번(吐魯番) 서경촌묘(西 京吋墓)에서 출토된 북조시대(北朝時代)(220∼581)의 견(絹)(그림 4)이 있다.30) 이는 홍 색 교힐 견인데 색채가 선명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삼힐의 염색법에 있어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법륭사 소장인 삼힐의 염직품은 거의 삼국시대의 잔존이라고 생각된다. 고려의 본 유물과 같은 염색 보자기의 염법은 삼국시대부터 계승되어 좋은 결과로 생각된다.
그림 1. 교힐염견(DB-32, 43.5×47.5) 그림 2. 교힐염견 부분 확대(DB-32) 그림 3. 교힐(정창원(正倉院) 소장)
그림 4. 홍색교힐 견(토노번(吐魯番) 서경촌묘(西京吋墓) 출토(出土))
27) 上村六郞, 《東方染色文化 硏究》, p16∼17
28) 宋本包夫, 〈正倉院의 染織〉 《日本美術》 11(至文堂, 1974), p60 29) 明石染人, 《日本染色工藝史 Ⅰ》(사문각, 1943), p217
30) 膠良雲, 《中國歷代 絹織物文樣》(紡織工業出版社, 1988), p45
2) 매죽문면(梅竹紋錦)의 미적(美的) 가치(價値)
유록지황위(柳綠地黃緯) 매죽릉금(梅竹綾錦)(그림 5)은 직조도 직조려니와 세련된 매 죽문양을 나타내어 문양미의 극치를 이룬다. 이 직물의 바탕조직은 꼬임이 있는 황색 경사와 꼬임없는 굵은 유록색의 지위사(地緯絲)로 이중으로 무늬를 나타낸 수자 능직이 며, 밀도는 50×25이다. 유록색 바탕에 황색대나무와 매화가 배열된 화려한 무늬의 금 (錦)으로 전면에 준제구자도인을 찍었다. 이러한 직물은 매우 진귀한 것으로 일본 정창 원에 한 점 있을 뿐이다.31)
유록색 바탕에 황색 대나무와 매화가 직물 전체에 꽉차게 배치되었다. 대나무는 3개 내지 6개씩의 잎을 단순하게 도안화하여 방향을 90도씩 돌려가며 배열하였으며 대나무 사이의 여백에는 매화를 배치하였다. 매화는 5개의 화판을 갖은 인화형(印花形)인데 사 이사이에는 1개 혹은 2개씩의 꽃잎과 짧은 가지들이 일정한 형태나 규칙없이 흩어져 있 어 미완성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32)
매죽문은 매화와 대나무를 단순화하여 표현한 것으로 송대(宋代) 문인(文人)들 사이에 유행되었으며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부터 지조와 절개를 지닌 군자로 비유되어 즐겨 사 용되었던 문양이다. 또 송(松)․죽(竹)․매(梅)를 세한삼우(歲寒三友), 매(梅)․란(蘭)․
국(菊)․죽(竹)을 4군자라 하여 회화에서도 많이 다루어지는 소재였다.33)
산변지행(山邊之行) 선생도 “송죽매문(松竹梅文)은 일본 강호시대(江戶時代)에 부인 소수(小紬)(고소데, 매죽문이 있는 통소매의 평상복. 후일에 겉옷이 되었음)에 많이 사 용되어 왔지만, 이 문양은 일본 고유의 독특한 문양은 아니다. 중국에서 세한삼우(歲寒 三友)라 하여 그 지조와 절개를 높이 샀다.”34)라 하여,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고급 직물의 직조는 고려 관영 공장 장복서(상의국)의 도염서에서 염색을 맡 아보며 특수직물의 제직을 담당하는 금장(錦匠)이 직조의 수요에 충당케 하였던 점35), 염직기술의 향상을 위하여 변방의 포로와 귀순병에게서도 직조 기술을 채용 도입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36) 결과에서 온 것이다. 이와 같은 직물이 정창원에 보존되어 있다 고 하니, 세부적인 비교검토가 필요하다.
그림 5. 류록지황위(柳綠地黃緯) 매죽릉금(梅竹綾錦)(DB-28)
그림 6. 류록지황위(柳綠地黃緯) 매죽릉금(梅竹綾錦) 부분(部分) 확대 뒷면
3) 화토문(花兎紋)의 변용
갈지화토문릉(褐地花兎紋綾)(그림 7)은 밀도 48×49로 상당히 촘촘히 제직한 직물이 다. 바탕은 경3매능이고, 문양은 위3매직이다. 이 직물에 있어서 특징을 이루는 것은 화 토문(花兎紋)이다.
직물 전체에 화토문(花兎紋)을 배열하고 있는데, 꽃과 토끼의 형태를 조화시켜 반원형 (꽃아치)으로 구성하였다. 토끼의 형태는 앞다리를 가볍게 쳐들고 고개를 돌리고 돌아보
31) 山邊之行, 〈고려시대아미타불복장직물 조사보고서〉(온양민속박물관, 1991) 32) 趙孝淑, 〈韓國絹織物硏究〉(세종대 박사학위 논문, 1992)
33) 林周永, 《전통문양자료집》(미진사, 1986), p.44
34) 山邊之行, 〈일본염색에 있어서의 외래요소〉《染織硏究會報告書》 2(공예학회, 1987. 6), p20 35) 《고려사》 권2 定宗 3년 3월
36)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3 雜俗
는 동작을 나타냈다. 또 이러한 문양을 좌우 대칭되도록 배치하고 있다. 문양과 문양 사 이의 간격은 0.8㎝ 정도이고 토끼문 크기는 2.3×1.7이다.
중심문양인 토끼의 머리 위에 큰 꽃 한송이를 배치하여 꽃과 토끼가 조화를 이루고, 또 이 문양을 대칭으로 전면에 배치하여 자연속에 노니는 평화스러운 느낌을 갖게 한 다. 토끼의 동작 또한 자연스럽게 표현하여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토끼문양은 중국이나 일본의 직물에서도 발견되는 문양이다. 중국 감숙성(甘 肅省) 장현(漳縣)에서 출토된 송대(宋代) 금직(錦織)에 토끼문(그림9)이 들어있어 시초 가 된다.37) 중국에서는 이것을 천마문이라고 부른다. 명대(明代)의 출토 염직에서도 이 와 유사한 문양을 찾을 수가 있는데, 명정육출토(明定陸出土) 직금저사문양(織金紵絲文 樣)은38) 구름 속에 토끼를 조화시킨 문양으로 금직으로 직조된 염직이다. 형태면에서 차이는 있으나 토끼를 중심문으로 했다는 점은 공통성을 지니고 있으며 황색 수자직지 에 표현된 문양이 입체감을 나타낸다.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도 화토문(그림 10)의 직물이 전시되어 있다. 소립원소지(小笠 原小枝)는 중심문양인 토끼문이 기린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있고, 부속문인 꽃이 구름으 로 대체되는 경우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기린에 구름을 곁드리면 운기린문(雲麒麟 紋)이 되고, 꽃을 곁드리면 화기린문(花麒麟紋)이 된다. 어찌되었든 이 문양의 원형은 감숙성 장현 출토의 금직으로 원대(元代)를 그 시초로 보고 있다.
이러한 문양을 후세에 일본에서 모방한 것도 있으나 동경국민박물관 동양관에서 소장 하고 있는 백지화기린문(白紙花麒麟紋)의 금직의 꽃토끼는 약간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문양이 4×3㎝의 큰 것을 각창(角倉)(圖 10)이라고 부르는데, 각창(角 倉)은 도산시대(桃山時代)의 뛰어난 상인(商人)이자 다인(茶人)이었던 ‘각창료이(角倉了 以)’를 말한다. 즉 사람의 이름을 따서 ‘각창화토(角倉花兎)’라고 직물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또한 후세의 모방함은 화기린(花麒麟)보다 일상적인 화토(花兎)에 인기가 집중 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39)
일본의 각창화토(角倉花兎)와 1302년 고려 직물의 화토(花兎) 직물에서 두 토끼의 형 태적인 면을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 고려 직물에서는 꽃이 토끼의 상 단에 위치한 반면에 각창화토에서는 꽃의 줄기가 아래까지 내려오고 있어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토끼의 형태에 있어서 고려직물의 토끼(DB-102)는 뒤돌아 보며 달리 는 동작을 표현하고 있음에 반하여 각창화토(角倉花兎)는 오른쪽 다리 한쪽만 약간 쳐 들고 뒤돌아 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고려직물의 토문이 동적 (動的)인 느낌을 준다면 각창화토(角倉花兎)는 정적(靜的) 인상을 준다.
그림 7. 갈지화토문릉(褐地花兎紋綾) (DB-102, 7.8㎝×15.5㎝)
그림 8. 갈지화토문릉(褐地花兎紋綾) 부분(部分) 확대 앞면 화토문(花兎紋)
그림 9. 감숙성(甘肅省) 장현출토(漳縣出土) 금직(綿織) (원대(元代) 14세기 토끼문(紋) 의 시초)
그림 10. 각창(角倉) 김란(金襴) 화토(花兎)
37) 小笠原小技, 《日本의 美術》 220 金襴(至文堂, 동경, 1984), p.52 38) 武敏, 《織繡》(臺北 , 幼獅文化事業有限公司, 1984), p.240 39) 小笠原小技, 앞의 글, p.78, 81
4) 금직금(金織錦)의 실체(實體)
주홍색금직금(朱紅色金織錦) 토끼문(紋) 귀주머니(그림 11)는 겉은 주홍색 금직금이 고, 안은 주홍색(朱紅色) 무문평견(無紋平絹)이며 밀도는 52×20이다. 주머니 바탕은 경 삼매릉(經三枚綾)이며, 문양은 금사(金絲)로 중위(重緯)하여 위사목릉(緯四 綾)이다. 금 직으로된 토끼의 문양은 DB-102의 형태와는 달리 동체가 앞으로 달리는 형태인데, 머 리쪽에 운문(雲紋)이 있어 특색(特色)이 있다. 문양의 크기는 1.8㎝×1.6㎝이다. 전면에
“유씨선가(兪氏仙駕)”라는 묵서가 있다. 주머니의 끈은 길이 43.9㎝의 매듭으로 하였다.
주머니의 둘레를 녹색으로 겉이 보이도록 홈질하여 돋보이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금직은 삼국시대부터 다양하고 화려하게 제직되어온 사실을 기록을 통하 여 확인할 수 있는데, 현전하는 유물로는 금사로서 백제시대 것이 유일하다. 즉 부여 능 산리 1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사(金絲)가40) 현존하고 있다. 이는 릉견(綾絹)같은 문양을 놓았던 것으로 금사(金絲)만이 남아 있다.41) 필자도 수년전 이 금사를 확인할 기회가 있었는데 S자형으로 련사(練絲)되었다. 이 고분에서는 기타 머리장식류도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귀족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금사는 출토 당시 전문적인 조사가 이 루어졌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점이 있다. 일본은 3세기 고분인 후지노키 고분의 진흙 속에서 직물 조각을 찾아 당시의 문양까지 살려 복원하는 작업과정을 거치기도 한 것과 비교한다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금직으로 용무늬를 넣어짠 말 안장을 송나라 황제께 양여하였다.’42)라고 한 기록이나, 송 황제가 붉은 바탕에 금은 오색실로 용을 제직한 물품을 선물 받고 ‘아름답기가 중국 보다 더 하니 진기하다’라고43) 칭송한 고려 금직의 평가를 확인하는 직물이 되는 셈이 다.
그림 11. 주홍색금직금(朱紅色金織錦) 토끼문(紋) 귀주머니(DB-233, 9.5㎝×10㎝) 그림 12. 주홍색금직금(朱紅色金織錦) 토끼문(紋) 귀주머니 부분(部分) 확대 앞면
5) 라(羅)․릉직(綾織)의 전통(傳統)
고려시대는 자화라(紫花羅), 홍화라(紅花羅), 백라(白羅), 항라(亢羅), 모라(帽羅) 등의 직물을 직조하여 상류층의 의복(衣服)에 사용하였던 기록이 보이는 바, 이번 직물에서도 특히 라(羅)직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중 황색무문라(黃色無 紋羅)(DB-228), 청색당초풍초화문라(靑色唐草風草花紋羅)(DB-186, 6.9㎝×50.9㎝), 청색 호접문라(靑色蝴蝶紋羅)(DB-191, 5.9㎝×3.6㎝), 주홍무문라(朱紅無紋羅)(DB-25, 18㎝
×88㎝) 등이 라직물(羅織物)로는 상태가 좋은 편이다.
황색무문라(黃色無紋羅)(그림 13)는 황색(黃色)의 라(羅)로 성글고 얇은 직물이다. 사 경교라(四經絞羅)이고 4개의 경사로 서로 꼬이며, 사이로 위사가 한줄씩 지나갔다. 밀도 는 40×15이며, 식서가 있어(직(織)폭 39㎝) 당시(當時)의 직물(織物) 폭을 파악할 수 있 다. 네귀 모서리에 오색(五色)의 술이 달려 있어 불복장 시에 보자기 용도로 사용된 것 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염색(染色)에 있어 《고려사》에 의하면 황염(黃염(染))은 산
40) 《국립부여박물관》(삼화출판사, 1993), p.43
41) 朴日熏, 〈百濟金銀製 裝身具와 金絲〉 《고고미술》 12호, 1979, p.326 42) 《고려사》 권4 현종 5년 8월
43) 《고려사》, 권2 혜종 2년
뽕나무와 치자나무로 물들이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다.44)
청색당초풍초화문라(靑色唐草風草花紋羅)(그림 15)의 바탕은 삼경문라(三經紋羅)이며, 문양은 당초풍초화문(唐草風草花紋)이다. 꽃과 잎이 넝쿨이 되며 뻗어나가는 모양이고, 문양은 평조직으로 밀도는 60×40이다. 바탕 전체에 준제구자도인(准堤九字圖印)을 찍었 다.
청색호접문라(靑色蝴蝶紋羅)(그림 17)는 바탕 조직이 삼경문라(三經紋羅)이며 문양은 기쁨을 상징하는 호접문(胡蝶紋)으로 평직이다. 밀도는 45×31이다. 나비는 한줄씩 엇갈 려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홍무문라(朱紅無紋羅)(그림 19)는 장방형의 라(羅)이다. 성글고 얇으며, 네 가닥의 경사를 서로 꼬고 그 사이로 위사가 한줄씩 지나가는 사경문라의 조직으로 된 무늬없는 직물(織物)로 밀도는 44×19이다. 염직물(染織物)의 상태는 손상된 곳이 있어도 짜임이 고르게 직조되었다. 특히 이 주홍직물은 “홍색은 국내에서 생산(生産)되는 홍화(紅花)와 주홍(朱紅)을 물들인다”45)라는 염색에 관한 문헌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능직물로는 소색문릉(素色紋綾)(그림 21), 흑색화조문릉(黑色花鳥文綾)(그림 23) 등이 대표적이다. 소색문릉(素色紋綾)은 부드러운 연견직물로 소색릉(素色綾) 바탕에 경사매 릉(經四紋綾)이고, 문위사매릉(紋緯四枚綾)이다. 문양은 잔무늬의 점묘(點描) 같은 기하 문양(사매위릉(四枚緯綾)이 주체(主體))이고, 밀도 50×40으로 직물의 상태는 양호하다.
준제구자도 인(印)이 직물 전체에 찍혀 있다.
흑색화조문릉(黑色花鳥紋綾)은 검정색 바탕은 경삼매릉(經三枚綾)이고, 문양은 위육매 릉직(緯六枚綾織)이다. 문양은 꽃 사이에 새를 자연스럽게 배치하였고, 즉 당초풍에 소 화문릉(小花紋綾)이며 밀도는 41×34이다. 특히 이 직물은 다듬이질 한 흔적이 있으며.
직물의 상태가 양호하다. 특히 색상이 검은 바탕에 약간의 쪽빛이 도는데, 이것은 처음 하염(下染)시 쪽으로 하고, 그 다음 검은색으로 물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림 13. 황색무문라(黃色無紋羅) (DB-228)
그림 14. 황색무문라(黃色無紋羅) 부분(部分) 확대 (DB-228) 그림 15. 청색당초풍 초화문라(靑色唐草風草花紋羅) (DB-186) 그림 16. 청색당초풍 초화문라(靑色唐草風草花紋羅) 부분(部分) 확대 그림 17. 청색 호접문라(靑色蝴蝶紋羅) (DB-191)
그림 18. 청색 호접문라(靑色蝴蝶紋羅) 부분(部分) 확대 그림 19. 주홍무문라(朱紅無紋羅) (DB-25)
그림 20. 주홍무문라(朱紅無紋羅) 부분(傅粉) 확대 그림 21. 소색문릉(素色紋綾) (DB-27)
그림 22. 소색문릉(素色紋綾) 부분(部分) 확대 그림 23. 흑색화조문릉(黑色花鳥文綾) (DB-113) 그림 24. 흑색화조문릉(黑色花鳥文綾) 부분(部分) 확대
44) 《고려사》志, 권25, 輿服 45) 《고려사》志, 권25, 輿服
Ⅳ. 맺 음 말
그간 1302년 아미타불복장에서 출현(出現)한 직물류에 대한 연구는 여러 사람에 의해 서 진행된 바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이 직물이 가지는 의의(意義)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직물(織物)을 대상(對象)으로 한 연구는 직물의 재료나, 직조방법, 또는 염색의 방법, 직 물 속에 나타나는 문양 등 그야말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이러한 현상적인 문제가 통시 적으로 놓고 보면 어떠한 시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는 것도 간과 해서는 안될 문제일 것이다. 1302년 아미타불복장 직물에 대한 연구도 궁극적으로는 이 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본다.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되, 여기에 복장직물에 대한 이해(理解)의 폭과 의미를 확산(擴散)시켜 보려는 의도(意圖)에 출발하였다. 이 직물은 시대성을 지니 고 있는 동시에,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직물외적인 면에서 이러한 문제도 검토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를 위하여 첫째로 당시의 직물 환경을 먼저 검토하였다. 이 직물류가 제직되었던 시점(時點)을 충렬왕대로 보고 이 시기의 원(元)과의 관계속에서의 복식환경을 살펴보 았다.
그리고 훌륭한 직물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제직기술의 발달, 염색술의 발달, 또는 미의식(美意識)의 성숙(成熟) 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겠지만 봉건사회에서의 제 도적인 장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보아, 당시의 직물을 직조하고 염색하는 장인제 도의 세부적인 문제들을 검토하였다.
둘째로 불복장물에서 직물이 갖는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였다. 불복장물에서 직물에 관련된 내용물은 오경(五鏡), 오륜종자(五輪種子), 보리수잎, 오백저(五帛杵), 오색선(五 色線) 등이 있는데 이는 방위색, 형태 또는 직물명 등과 관련을 맺고 있기도 하다. 1302 년 아미타불복장에서 출현한 불복장물은《조상경》에서 제시한 복장의 내용과 큰 차이 가 나지 않으나, 직물에 있어서는 조선초기의 복장으로 생각되는 흑석사 아미타목불에 서 출현한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체계적인 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셋째, 1302년 아미타불 복장 직물의 특성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다. 앞서 여러 논 문에서도 이 점을 언급하고 있지만, 220여 점의 직물류 가운데 당대 직물의 특징을 일 별해서 보여줄 수 있는 염색, 문양, 직조에 있어서 특징적인 직물을 선정하여 그 양상을 살피는 한편 중국․일본 등에서 출토된 직물들과의 비교 검토를 시도하였다.
1302년 아미타불 복장물을 통하여 당대의 직물 양상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복장물에서 직물이 차지하는 의의를 보다 명확히 인 식하여 문화유산으로서 보존 관리에 철저를 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림 1. 고힐염견(絞힐染絹)(DB-32, 43.547.5)
그림 2. 고힐염견 부분 확대(絞힐染絹 部分 擴大)(DB-32)
그림 3. 교힐(絞힐)(정창원(正倉院) 소장)
그림 4.황색교힐 견(紅色絞힐 絹)(토노번 서경촌묘 출토(吐魯番 西京촌墓 出土))
그림 5. 유록지황위 매죽릉금(柳綠地黃緯 梅竹綾錦)(DB-28))
그림 6. 유록지황위 매죽릉금 부분(柳綠地黃緯 梅竹綾錦 部分) 확대 뒷면
그림 7. 갈지화토 문릉(褐地花兎 紋綾)(DB-102, 7.8㎝15.5㎝)
그림 8. 갈지화토문금 부분(褐地花兎紋綾 部分) 확대 앞면
화토문(花兎紋)
그림 9. 감숙성 장현출토 금직(甘肅省 장縣出土 綿織)(원대(元代) 14세기 토끼문(紋)의 시 초)
그림 10. 각창 금란 화토(角倉 金란 花兎)
그림 11. 주홍색금직금(朱紅色金織錦) 토끼문(紋) 귀주머니(DB-233, 9.5㎝10㎝)
그림12. 주홍색금직금(朱紅色金織錦) 토끼문(紋) 귀주머니 부분(部分) 확대 앞면
토끼와 운문(雲紋)
그림 13. 황색무문라(黃色無紋羅)(DB-228)
그림 14.황색무문라 부분(黃色無紋羅 部分) 확대 (DB-228)
그림 15. 청색당초풍 초화문라(靑色唐草風草花紋羅) (DB-186)
그림 16. 청색당초풍 초화문라 부분(靑色唐草風草花紋羅 部分) 확대
그림 17. 청색 호접문라(靑色蝴蝶紋羅) (DB-191)
그림 18. 청색 호접문라 부분(靑色蝴蝶紋羅 部分) 확대
그림 19. 주홍무문라(朱紅無紋羅) (DB-25)
그림 20. 주홍무문라 부분(朱紅無紋羅 部分) 확대 (DB-25)
그림 21. 소색문릉(素色紋綾) (DB-27)
그림 22. 소색문릉 부분(素色紋綾 部分) 확대
그림 23. 흑색화조문릉(黑色花鳥文綾) (DB-113)
그림 24 흑색화조문릉 부분(黑色花鳥文綾 部分)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