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신익성(申翊聖)의 심양(瀋陽) 체험 기록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신익성(申翊聖)의 심양(瀋陽) 체험 기록 "

Copied!
22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신익성(申翊聖)의 심양(瀋陽) 체험 기록 󰡔북정록(北征錄)󰡕

40)

김 은 정*

❙국문초록❙

동양위

(

東陽尉

)

신익성

(

申翊聖

, 1588~1644)

1642

12

월에 척화오신

(

斥和五臣

)

으로 지목되어 심양

(

瀋 陽

)

에 압송되었다가 이듬해

2

월에 방면되어 돌아왔다

.

이 때 지은 시문은 가장 필사본 󰡔선집

(

先集

)

󰡕에 󰡔북정 록

(

北征錄

)

󰡕으로 엮여 수록되어 있다

.

본고는 󰡔북정록󰡕의 시문을 살핌으로써 신익성의 심양 체험의 실상을 확 인하는 한편 그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

신익성은 여정 동안 내면의 은밀한 심경을 한시로 드러내는데

,

사지에 끌려가면서도 당당하려는 다짐을 시 화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불안과 초조를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

방면되어 귀로에 오르고서는 안도 와 유흥의 마음을 구가하다가도 다시 회한의 내용을 담은 시를 쓰기도 하였다

. <

북행시말

(

北行始末

)>

에서는 자신과 조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기도 하면서 사건의 이면에 있는 사실들을 기록하는 데 주력하였다

.

신익성은 이에 그치지 않고 만록

(

漫錄

)

으로서 여정 중에 자신이 견문한 사건과 풍경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

.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서 각기 다른 문학 양식을 선택하여 자신의 견문을 기록하고 소회를 표출한 것 이다

.

심양은 명청교체기라는 역사적 변전의 시기에 동아시아의 중심지였다

.

신익성은 비자발적인 형태이지만 그 곳을 직접 체험하고

,

압송되었다가 방면되는 과정에서 느껴야만 하였던 감정의 모든 결

,

보고 들은 객관적 사 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주관적 판단을 기록하였다

.

이렇듯 󰡔북정록󰡕은 신익성 개인의 심양 체험 기록이지만

,

조선의 사대부가 급변하는 국내외 정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파악하였는지 보여준다

.

[

주제어

]

신익성

(

申翊聖

),

󰡔북정록

(

北征錄

)

󰡕

,

명청

(

明淸

)

교체기

,

심양

(

瀋陽

),

압송

(

押送

)

과 방면

(

放免

)

❙목 차❙

.

서 론

.

북정

(

北征

)

의 배경과 󰡔북정록

(

北征錄

)

󰡕 체제

.

한시

(

漢詩

)

:다짐과 불안에서 안도와 회한의 내면 표출

.

「북행시말

(

北行始末

)

」:자기해명과 미시적 사실

(

史實

)

기록

.

만록

(

漫錄

)

:압송

(

押送

)

과 방면

(

放免

)

의 견문 기록

.

결 론

* 홍익대학교(세종) 조교수 / eunsiro@hanmail.net

(2)

Ⅰ. 서 론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월경

(

越境

)

은 사행

(

使行

)

의 형태를 띤다

.

특히 중국사행은 국제외교의 행위로서뿐만 아니라 경제

·

문화적 교류로서도 의미가 깊었는데

,

인문교양을 갖춘 엘리트들이 사행을 담당하였고 그 경험 을 다양한 기록으로 남겼다

.

그런데 사행의 대상이 명

(

)

에서 청

(

)

으로 대체되면서 사행의 명칭이

조천

(

朝天

)’

에서

연행

(

燕行

)’

으로 바뀌었다

.

이러한 명칭의 변화는 대상에 대한 의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므 로

,

사행사가 남긴 기록물인 연행록에도 자연히 이러한 의식이 투영되게 마련이다

.

따라서 연행과 연행록의 의미는 동아시아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시기별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

1)

그런데 명청교체기에는 비공식적 월경이 비일비재하였다

.

피납

(

被拉

)

이라는 비자발적이며 강제적인 형태 로 국경을 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

특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5,60

만명의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가 심양

(

瀋陽

)

에 억류되어 생활하였다

.

여기에는 볼모로 잡혀간 왕자와 대신들 및 척화인

(

斥和人

)

으로 지목되어 압송된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들 상층 사대부들은 피로인

(

被擄人

)

이라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월경 과정과 이국 체험을 기록물로 남길 수 없었다

.

그 결과 심양에 억류된 대신들과 백성의 삶은

󰡔심양장계

(

瀋陽狀啓

)

󰡕

·

󰡔심양일기

(

瀋陽日記

)

󰡕와 같은 공적인 보고서에 의존하여 파악할 수밖에 없으며

,

개 인적인 소회를 피력하는 한시작품으로는 처형당하기 전의 심사를 읊은 삼학사

(

三學士

)

의 시편 등이 있을 뿐 이다

.

2)

따라서 심양에 압송되어 가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여정과 견문을 충실히 기록한 동양위

(

東陽尉

)

신익성

(

申翊聖

, 1588~1644)

의 󰡔북정록

(

北征錄

)

󰡕은 매우 예외적이라 하겠다

.

특히 그의 심양 여행은 병자호란의 치 욕을 지닌 채 북경에 남아 있는 명 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하던 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

즉 조선이 조근 대상을 명에서 청으로 대체하기는 하였으나

,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명을 황제국으로 받들고 있었던 시기 였기 때문에

,

이에 임하는 신익성의 태도는 보다 복잡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의도하 지 않은 인적 교류와 체험이 당대 지식인들의 동아시아 공간 인식에 큰 변화를 주기도 하였던 것도 사실인 만큼

,

3) 선조

(

宣祖

)

의 부마이자 상신

(

相臣

)

신흠

(

申欽

)

의 자제인 신익성의 「북정록」을 통해서 당대 조선 왕실 과 지식인층의 심양 체험의 일단과

,

그들이 파악한 국제 정세를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1) 1기; 明淸 교체기의 해로사행(1621~1636년) 시기, 2기; 반청의식에 사로잡힌 시기, 3기; 실학적 각성의 시기, 4기; 조공체제 의 해체기(임형택, 「17~19세기 동아시아 상황과 燕行·燕行錄」, 󰡔한국실학연구󰡕 20, 2010, 22쪽).

2) 남은경, 「한국한문학 속의 경계, 좌절, 반성의 공간 ‒ 瀋陽」, 󰡔한국한문학연구󰡕 45, 2010, 238~253쪽. 3) 최원오, 「17세기 서사문학에 나타난 월경의 양상과 초국적 공간의 출현」, 󰡔고전문학연구󰡕 36, 2009.

(3)

Ⅱ. 북정(北征)의 배경과 󰡔북정록(北征錄)󰡕 체제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1616

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금

(

)

이라 하고

, 1627

년에 는 조선을 침공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

이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동맹을 맺었는데

,

조선은 여전히 후 금의 실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경계하지도 않았다

.

반면에 후금은 점차 명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여 수 도를 심경

(

瀋京

)

에서 요양

(

遼陽

)

으로

,

얼마 후 다시 심양으로 옮겼고

, 1636

년에는 나라이름을

으로 고치 고 조선을 재차 침공하였다

.

병자호란 이후 조선과 청은 형제국에서 군신국으로 변하게 된다

.

병자호란은 짧은 기간의 전쟁이었지만 그 피해는 막대하였다

.

우선 임금이 직접 청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어 항복하였고

,

왕세자와 대군 그리 고 공경의 자제가 대거 인질로 잡혀가게 된 것이다

.

이에 앞서 청측은 화의를 극력 반대한 척화신들로 인해 정묘호란 때 맺었던 맹약이 깨지고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것이라 하며

,

전쟁의 죄를 척화신들에게 돌려 이들 을 중국 심양으로 끌고 갔었다

.

청은 비협조적인 조선 인물들을 강력히 응징하여 일벌백계하겠다는 태도로 왕자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바로 그 달 삼학사

(

三學士

)

를 사형하였다

.

척화신에 대한 응징은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 1640

(

인조

18)

세모에 청의 용골대

(

龍骨大

)

등이 조선에서 군대를 징발하는 일로 들어와서 청에 군사적 협조를 거부하는 여론을 조장하는 인물을 색출한 것이다

.

이 때 청음

(

淸陰

)

김상헌

(

金尙憲

, 1570~1652)

이 지목되어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 심양으 로 잡혀갔다

.

심양에서의 유폐 생활 동안 김상헌은 꼿꼿이 절개를 지켜 그 이름이 절의를 상징하고 있었는 데

, 42

년에는 잠시 용만

(

龍灣

)

으로 나와 있었다

.

이러한 와중에

1641

년 말에 명나라와 밀무역하던 선천부사

(

宣川府使

)

이계

(

李烓

, 1603~1642)

가 청나라 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어 심문을 받게 된다

.

이계는 심문 과정에서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면서

,

신익성

·

신익전

(

申翊全

허계

(

許啓

이명한

(

李明漢

이경여

(

李敬輿

)

를 척화오신

(

斥 和五臣

)

이라 지목하였다

.

당시 용골대는 이계가 국가와 왕을 배신하는 자로 판단하고 조선에서 처단하도록 연락하였고

,

조정에서는 의금부도사 정석문

(

鄭錫文

)

을 보내어

1642

년에 그를 참수하였다

.

그러나 이계가 고한 내용은 그대로 청에 전달되어

,

심사

(

瀋使

)

가 와서 척화오신을 압송할 것을 조선에 통 보하였다

.

결국 척화오신은 심양으로 호송되었으며

,

의주에 잠시 나와 있던 김상헌도 일행에 포함되어 압송 되었다

.

심양에 도착한 후 심문 과정에 소현세자

(

昭顯世子

)

가 신익성이 국왕의 인친임을 적극 주장하였고

,

결국 일행 가운데 신익성 형제만 풀려날 수 있었다

.

비록 방면되기는 하였으나 심양 억류기간에 신익성은 생 명의 위험을 느끼며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하였다

.

신익성은 비자발적이며 강제적으로 국경을 넘었다

.

그리고 이때의 견문과 심정을 여러 편의 한시와 글로 제작하여 󰡔북정록󰡕으로 엮었다

.

4) 이 기록은 현재 가장 필사본 󰡔선집

(

先集

)

󰡕의 속

(

)

17

로 확인할 수 있 는데

,

이들 시문은 󰡔낙전당집

(

樂全堂集

)

󰡕으로 간행될 때는 탈락되고 일부 시편만이 수습

,

수록되었다

.

첫머 4) 가장 필사본의 체제에 대해서는 김은정, 「樂全堂 申翊聖의 文學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5) 참조.

(4)

리에는

21

29

수의 시편과 소현세자에게 올린 편지

2

편이 있으며

,

이어서 일의 전말을 기록한 「북행시말

(

北行始末

)

」이 있다

.

이어서 별도의 제목을 부기하지 않은 채

38

칙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

여정 중의 다 양한 견문을 자유롭게 기록한 필기

(

筆記

)

의 형식을 취하는 만록

(

漫錄

)

에 해당한다

.

5) 마지막으로 날짜별 여정 을 기록한 「일록

(

日錄

)

」이 수록되어 있다

.

신익성과 동일한 경험을 한 김상헌도 억류기에 지은 시편을 엮어 󰡔설교집

(

雪窖集

)

󰡕을 남기기도 하였다

.

6) 이때 독자는 저자의

비상한 체험

을 전제로 하여서

,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견문과 감동을 시편 속에서 기대하 게 될 것인데

,

그가 놓인 특수한 상황과 한시라는 양식적 한계로 인해 구체적인 양상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

반면에 신익성의 「북정록」에는 한시 외에도 다양한 양식의 글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

그의 주관적 내면 뿐 아니라 객관적인 상황과 이를 인식하는 조선 지식인의 태도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Ⅲ. 한시(漢詩):다짐과 불안에서 안도와 회한의 내면 표출

한시라는 양식은 엄격한 형식적 제약에 맞춰 내면의 정서를 펼쳐야 한다

.

따라서 신익성의 심양행처럼 비 자발적이면서 강압적인 상태에서는 시를 제작할 여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정록」에는

21

29

수의 시편의 수록되어 있어

,

신익성의 절박하면서도 솔직한 내면을 살필 수 있다

.

다만 󰡔북정록󰡕 소 재 한시 중 반 이상이 귀로에 올랐을 때 지은 작품이며 그 중에서도 국내에 들어와서 지은 시가 대부분이라 는 사실을 통해 여정의 절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

다음은 󰡔북정록󰡕 첫머리에 수록된 작품으로서 신익성의 비 장한 내면을 표현하였다고 하겠다

.

「움집에 올라

(

乘藁窩戱作

)

積雪關河路 눈 쌓인 관하

(

關河

)

의 길 行窩次第聯 움직이는 집이 차례로 이어졌네

.

應知九霄上 응당 알겠네

,

구소

(

九霄

)

의 위에는 光動五星躔 오성

(

五星

)

의 궤적에 빛이 일렁이는 것을

.7)

자신과 동료의 처지를 행와

(

行窩

)

로서 희화하여 지은 작품으로서

, “

수레를 탈 수가 없어서 제비집 모양으 로 풀을 엮어 짊어지고 가다

(

不敢駕輪

,

結草如燕窩狀

,

用扶擔行

)”

의 주가 달려 있다

. 1,2

구는 겨울 추위를 이 기기 위하여 짚으로 몸을 감싼 채 걸어가는 모습을 형용하였고

, 3,4

구는 행와 위로 하늘이 훤히 보이는 정황 을 읊으면서도

,

하늘의 별이 그 궤적을 이탈하지 않고 빛을 발할 것이라 하여 자신들의 고난 역시 우주의 순

5) 신익성은 여행의 견문과 소회를 짧은 필기체 산문으로 남기기를 즐겨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후고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6) 󰡔淸陰集󰡕 권11-12.

7) 󰡔樂全堂集󰡕 권4에도 수록되어 있다.

(5)

행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

이렇듯 마음을 다잡은 신익성이었지만 압록강을 건널 때에는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몰라 깊 은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압송되는 죄인의 처지였으나 국내에 있을 때에는 어느 정도 의지 할 바가 있었지만

,

국경을 넘고 나면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더군다나 압록강의 중강

(

中 江

)

에서 자신을 좇아온 자제들과 이별을 해야만 하였고

,

이제부터는 온전히 자신이 모든 것을 견뎌야만 하였 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동생이 함께 간다는 것이었다

.

신익성은 이 때의 심정을 다음으로 읊었다

.

「압록강을 건너며

(

渡鴨口呼

)

扶衰能到義州城 쇠약한 몸을 이끌고 의주성에 도착하였는데 前路茫茫又幾程 망망한 앞길은 그 얼마인가

?

天下古今夷夏界 천하고금의 이하

(

夷夏

)

의 경계에서 人間父子弟兄情 인간 부자형제의 정이 애틋하네

.

平生肝膽今猶在 한 평생 마음을 터놓고 지낸 이들이 여전히 함께 있으니 萬死艱關不足驚 만사의 어려움도 놀랍지 않다네

.

滿目昭蘇陽布澤 눈 가득히 소생하는 볕이 펼쳐져 있으니

歸時重賦鴨江行 돌아올 때 압강행

(

鴨江行

)

노래를 다시 지으리라

.8)

신익성 일행이 압록강을 건넌 것은

1

15

일로 겨울 추위가 여전히 남아 있을 때이다

.

그러나 신익성은 마음을 다잡고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겠다하면서

,

돌아올 때 다시 압록강을 읊겠다고 다짐하였다

.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볕이 희미하게나마 있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다짐은 이어진 제

2

수에서도 확인되는데

,

9) 신익성 은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떠오른 태양을 보고 그 빛이 자신의 일편심

(

一片心

)

을 비춘다고 하였다

.

어둠 속에 서도 희망을 찾고자 하는 신익성의 의지가 드러나 있는 대목으로 보인다

.

압록강을 건넌 날 일행은 동팔참

(

東八站

)

의 첫째인 탕참

(

湯站

)

에 묵었다

.

10)마침 그날은 보름이어서

,

만약 신익성이 압송되지 않았다면 귀전한 동회

(

東淮

)

에서 상원의 달맞이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

동일한 달을 낯선 곳에서 바라보며

,

신익성은 다음의 시편으로 읊었다

.

「탕참

(

湯站

)

시냇가에서 묵으며 상원

(

上元

)

의 달을 보고 느낀바가 있다

(

宿湯站川上看上元月有感

)

春入關河雪未殘 변방에도 봄이 왔건만 눈은 아직 남아 있는데

客心牢落客裝寒 나그네 마음은 쓸쓸하고 여장 또한 차갑네

.

8) 이 시에는 “아들 昇은 함께 가고 冕, 炅, 最는 義州에 남았으며, 아우 翊全은 함께 붙잡혀 갔다(子昇帶行冕炅最留義州, 弟翊 全同被拿去)”의 주가 있다. 배행하였던 자제들은 이후 의주에 계속 머무르면서 기다리는데, 아마도 신익성의 죽음까지 각오 하고서 장사를 지낼 준비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9) “松鶻山高鴨水深, 塞垣蒼靄曉沈沈. 天東初日晴無翳, 來照孤臣一片心.” 이 시는 󰡔樂全堂集󰡕 권4에도 수록되어 있다. 10) 十五日(庚戌). 曉發, 憩中江宴廳. 愽氏駐馬點檢. 金淸陰更爲加鎖而行. 三兒告別. 中火于老木(站), 宿湯站路處川邊.(󰡔北征錄󰡕

일록) 동팔참에 대해서는 이승수, 「조선후기 연행 체험과 고토 인식:東八站을 중심으로」(󰡔동방학지󰡕 127, 2004)를 참조하 였다.

(6)

可憐淮上占年月 가련하구나

,

회상

(

淮上

)

에 비추던 달이 却向遼山一樣團 오히려 요산

(

遼山

)

에서 매양 둥그네

.

의주를 출발할 때 다잡았던 마음이 하루의 일정을 겪고 갑자기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

신익성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이 시를 동료에게 보였는데

,

여기에 화답한 이는 오직 김상헌뿐이였다

.

11)의주에 억류되어 있 다가 재차 심양으로 압송되는12) 김상헌은

70

세의 노구인데다가 병까지 들어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하였지 만

,

다른 압송인처럼 쇠사슬이 씌워져 한 차례 기절하기까지 하였었다

.

13) 그런데 다른 동료들은 시를 짓지 못하였지만 김상헌만은 약해진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는 차운시를 지어준 것이다

.

이에 대하여 신익성은 김상 헌의 굳은 절개와 노익장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

14)

한편

,

신익성 일행은 압록강을 건너 요양까지 이른바

동팔참

을 따라 가게 된다

.

15) 보통

6

7

일이 소요되 는 일정을 신익성 일행은

5

6

일만에 소화하였고

,

다시 심양까지

2

박이 더 걸려서 모두

7

8

일의 여정을 마 무리하였다

.

이 기간 동안 신익성은 빡빡한 일정 때문에 신익성은 많은 시편을 지을 수 없었고

,

16)심양에 도 착한 뒤로는 거듭된 심문이 있어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야하였기에 시편 제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

그러 다가 신익성 형제의 방면이 결정되었고

,

봉림대군

(

鳳林大君

)

은 그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어 주었다

.

17) 이에 신익성은 다음의 시를 지어 올렸다

.

「봉림대군에게 올리다

(

呈鳳林大君

)

來卽貽憂去是恩 올 때 걱정 끼쳤는데 은혜 입어 돌아가게 되니 旣披霜雪又逢春 눈서리 헤쳤는데 다시 봄을 만난 격이라네

.

臨關不作鳴鷄客 관문에서는 닭 울음 소리도 못 내었는데 入塞飜爲擁傳人 변새에 들어와서 승전

(

承傳

)

을 받들게 되었네

.

九死有知堪結草 아홉 번 죽어도 결초

(

結草

)

의 은혜 잊지 않을 것이며 餘生無地不捐身 여생에 어느 곳에선들 몸을 버리지 않으리오

?

11) 上元到湯站, 設幕露處, 雪月如晝, 口呼一絶, 示同行, 同行戒不作詩, 唯淸陰和之.(󰡔北征錄󰡕 만록 10칙) 김상헌이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鳳凰城途中, 次東淮上元感懷韻」. 其一:悲歡百變一身殘, 世事驚心骨欲寒. 惟有遼山今夜月. 淸光猶似昔年看. 其二:形容憔悴鬢毛殘, 故國回頭望眼寒. 今夜長安月明裡, 碧紗紅燭幾人看.(󰡔淸陰集, 雪窖後集󰡕 권12)

12) 入龍灣之日, 博氏在前, 急招押送使, 疾於星火, 晡後進到, 城中洶洶不定言, 鄭譯直就淸陰下處, 加鐵鎖于頸, 帖於大木, 不可動 而盡籍衣服器物燒書冊無餘, 將欲拿去云.(󰡔北征錄󰡕 만록 7칙)

13) 渡江之日, 愽氏閱視五臣及金判書, 金判書疾不能運步, 任人背負, 愽氏發怒, 鄭譯大喝, 加大鎖以行. 到湯站氣塞將絶, 一行遑 遑, 李譯亨長言于鄭譯, 稍寬鎖限.(󰡔北征錄󰡕 만록 9칙)

14) 日寒路險行數十里, 便御五藁窩于路左, 或燃南草, 或飮燒酒, 間以談謔, 不知被驅之行, 淸陰七十之年, 再入虎口, 而無毫髮幾微, 談故實如昨日事, 詩章翩翩可詠, 不唯其所操之確, 精力亦大異於人矣.(󰡔北征錄󰡕 만록 11칙)

15) 이색(李穡)이 1355년에 진봉사(進封使)로 가면서 읊은 시에 ‘동팔참’이 언급되었데, 이후 사행 동팔참을 지나가는 것이 정례 화되었다.

16) 「松站曉起」 3수와 「藁窩中戱爲俳體效香山」을 지었다.

17) 初二日(丙寅). 早詣館所, 呈肅拜單子, 下令還出肅拜單子, 引接還質子館. 午間以衙門分付, 詣館所, 龍賤及范噶皮盧四愽氏與世 子同坐于書筵廳, 招入坐于廳中, 世子以下起立, 噶以帝命傳諭云, 孕令出去卽日發行, 候諸胡還, 肅拜後引接, 因詣大君館, 大君 設別杯, 承言色兪後善承令饋酒, 晡時李芿叱石韓巨源等護行, 到秫門點出, 諸質子作別. 宿野板. 禁軍吳成國來見.(󰡔北征錄󰡕 일 록 2월 2일)

(7)

秦裘謾說千金直 진

(

)

나라 갖옷이 천금이라 부질없이 말하나 一札昭回字字神 일찰

(

一札

)

의 빛나는 글자마다 상서롭네

.18)

1

연은 은혜롭게 방면되는 기쁨에 대해 봄을 만난 격이라 하였고

, 2

연에서는 맹상군

(

孟嘗君

)

의 문객처럼 자잘한 재주도 없는데 오히려 승전을 받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

이어

3

연에서는 죽어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한 다고 하였고

,

마지막으로 자신을 방면해줄 것을 청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정문

(

呈文

)

이야말로 글자마다 상서롭다고 하였다

.

19)

동료와 작별하고 야판

(

野坂

)

20)에서 유숙한 다음 곧바로 떠난21)신익성 형제는 올 때보다 더 빨리 동팔참 을 지나 의주에 이르렀다

.

사지에서 어서 벗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며

,

이 와중에 시편의 제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

압록강을 건넌 뒤에도 일정을 재촉하였는데

,

가흥

(

嘉興

)

에 이르자 신익성은 갑자기 형제 만 빠져나온 사실을 깨닫고

,

먼저 방면된 미안한 마음과 무상한 인생을 연환체

(

連環體

)

의 시로 읊기도 하였 다

.

22)이후 신익성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정에 임한다

.

마침 계절은 봄날이었기 때문에 유람의 흥취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래서 신익성은 유흥을 돋우는 기녀들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

23)

그런데 신익성은 관향

(

貫鄕

)

인 평산

(

平山

)

을 지나게 되자 여러 복잡한 생각이 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그 곳에는 선조의 철상이 있는데

,

자신이 직접 사당을 짓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달랐던 것이다

.

이에 신익성은 「평산산성에 있는

3

구의 철상은 모두 고려때 元功이 있으면서 本府에 적을 둔 사람들로서

,

그 첫째는 우리 선조 壯節公의 遺像이라고 한다

.

오래전의 일이라 감히 質正할 수 없지만 사 적에 기록되어 있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

다만 옛 사당이 임진년의 병화에 불타서 병자년에 내가 左相 平 城公과 함께 공의 내외 후손에게 통문하여 재물을 모아 사당을 다시 지어 안치하였다

.

내가 이제 심양에서 석방되어 돌아오다가 사당 아래를 지나며 비로소 瞻拜하였는데

,

배회하며 사모하니 실로 羹墻의 생각이 들어 서 드디어 八韻으로 느낌을 기록하여 李明府에게 올리고 겸하여 同宗의 제인에게 보이다

(

平山山城有鐵像三 軀

,

皆麗代元功籍於本府者

,

而其首座卽我鼻祖壯節公遺像云

.

事在遐逖

,

雖不敢質焉

,

而紀之史籍不可誣也

.

舊 宇燬於壬辰兵燹

,

丙子年翊聖與左相平城公

,

通文于公之內外裔孫鳩財

,

刱祠屋以安之

.

翊聖今自瀋中釋還

,

過祠 下

,

始瞻拜焉

,

徘徊顧慕實有羹墻之思

,

遂述八韻以志感錄

,

呈李明府兼眎同宗諸人

)

」라는 시를 지었다

.

󰡔북정

18) 󰡔樂全堂集󰡕 권3에도 수록되어 있다.

19) 後漢 光武帝는 조칙을 내릴 때 모두 친필로 一札十行을 썼기에 一札은 황제의 조칙을 말한다. 󰡔시경󰡕 「雲漢」에 “倬彼雲漢 昭回于天”라 하였다.

20) 淸측에서는 세자에게 1641년 2월에 채소밭을 떼어주고 也里江 강변을 갈아 野坂을 설치하여 채소와 과일을 심고 정자를 지어 목축하는 곳으로 삼게 하였다. 세자는 답답할 때 야판에 나가 바람을 쐬기도 하고, 관소 안의 종인이나 마부가 사망한 경우 이곳에 초장하였다가 후일 조선으로 내보기도 하였다.(김남윤, 「󰡔瀋陽日記󰡕와 昭顯世子의 볼모살이」, 󰡔규장각󰡕 29, 2005, 53쪽)

21) 야판까지 전송나온 봉림대군에게 「野坂鳳林來錢扇頭求詩次韻」의 시를 지어 올렸고, 통원보에 이르렀을 때도 봉림대군에 올 리는 시 「到通遠堡書呈鳳林」를 지었다.

22) 「瀋中歸路到嘉興, 逢李賓客汝漢, 效連環體仍爲首尾吟, 奉朴輔德尙之」

23) 「肅寧小妓昆玉夙惠精變色甚黑, 戱改其名曰烏玉, 書一絶以嘲之」 玉之所以珍, 在於質之栗. 無論白與烏, 均是崑山出.

「贈定州小妓女香」 荳蔲芳心澁, 東風浥露斜. 十分春意淺, 猶是未開花.

「中和戱贈箕妓」 柳絮霏霏細, 林香冉冉傳. 西行一千里, 佳節百五天.

(8)

록󰡕에 수록된 마지막 한시 작품인 이 시의 결말 부분은 다음과 같다

.

24)

乃有孱孫在 이에 보잘 것 없는 후손이 있어 纔從異域還 이역

(

異域

)

에서 돌아왔다네

.

典刑瞻鐵像 모범으로 남아 있는 철상을 우러르니

基業憶鴻田 기업

(

基業

)

을 닦아 홍전

(

鴻田

)

을 하사받던 일 추억하네

.

磅礴山河壯 넓디 넓어 산하처럼 씩씩하고

滄茫海日懸 창망한 바다에 해가 걸려 있네

.

顙泚追祖烈 부끄러운 마음으로 조상의 충렬 따르고자 하니 獨立故城顚 옛 성 꼭대기에 홀로 서 있다네

.

본래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

(

谷城

)

출신인데 관향이 평산이 된 것은 고려태조와의 사냥 일화가 있기 때문 이다

.

신숭겸이 태조의 명대로 기러기를 명중시키자

,

태조는 여기에 감탄하여 평주

(

平州

)

를 주어 관향으로 삼게 하는 한편

,

기러기를 쏜 옆의 밭

[

射雁傍田

]

까지 하사하여 대대로 조세를 받아먹도록 하였다고 한다

.

25) 그러한 조상의 업적을 추억하자 죄인의 몸에서 간신히 풀려나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도

,

26) 조상의 충렬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

이렇듯 신익성은 척화죄인으로서 심양에 압송되고 억류되는 과정에

,

기개를 잃지 않기 위해 마음을 추스 르기도 하고 신변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불안을 느끼기도 하였고

,

석방되어서 귀로에 오른 뒤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으로

,

두고온 동지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

최종적으로 는 관향에서 선조의 철상을 마주하며

,

이 모든 여정이 삶과 죽음을 넘어선 영원과 비교하면 보잘 것 없음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

그리고 이러한 모든 내면의 변화를 한시에 담아내었다고 하겠다

.

Ⅳ. 「북행시말(北行始末)」:자기 해명과 미시적 사실(史實) 기록

신익성은 심양에 오고가는 중에 한시로서 내면의 흔들림을 표출하는 한편으로

,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전 말을 「북행시말」로 기록하였다

.

그런데

1700

여자로 이루어진 「북행시말」은 모든 상황을 장황하게 기술하 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오히려 신익성은 사건의 중요 장면만을 자신의 입장에서 진술하고 있다

.

그 결과 「북

24) 시의 전반부는 다음과 같다. 佐運開麗社, 肇封卜世綿. 文魁詳籍記, 武德煥銘鐫. 偉表王公似, 孤忠紀侯聯. 千年還廟宇, 一氣 貫人天.

25) 諺傳崇謙嘗從太祖獵, 見三雁盤旋, 太祖命射第三雁左翼, 崇謙果中如命. 太祖嘉嘆, 賜平州爲鄕, 並賜射雁傍田, 世食其租.(김창 업, 󰡔老稼齋燕行日記󰡕 권1)

26) 상체(顙泚)는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다. 󰡔孟子·滕文公上󰡕에 “其顙有泚, 睨而不視.”라 하였는데, 어버이가 짐승에게 잡아 먹혀 형체가 훼손된 것을 보고 참담하여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을 말한다.

(9)

행시말」은 조정에서의

12

12

일과

18

일의 심문

,

심양에서의

1

22

일과

28

일의 심문 장면을 주로 기록하 고 있다

.

우선

12

일에 심사

(

瀋使

)

가 대궐에 들어서 오신의 죄를 묻자

,

임금이 이들을 적극 변론하는 내용을 기술하 였고

,

27)

18

일에 남별궁

(

南別宮

)

에서 이루어진 오신에 대한 심문을 자세히 서술하였는데

,

공경 이하가 지켜보 는 가운데 면박

(

面縛

)

을 하고 밧줄을 목에 건 오신이 끌려나오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

28)이어서 박씨

(

朴氏

)

가 오신의 죄를 각각 묻자

,

신익성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본국의 법례에 부마는 단지 녹

(

)

을 먹을 따름이지 조정의 정사에 간예하지 않으며

,

하물며 늙고 병들어 두문불출하여 친척들과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데 어찌 결사를 맺고 모임을 만들 리가 있겠습니 까

?

다만 불행히 간인

(

奸人

)

과 같은 동네에 살아 그 악한 정상을 익히 알아서 그가 은밀히 일을 야기할 것임을 일찍이 말하였다가 원수를 맺게 되었기 때문에 이같은 무고를 입었습니다

.

천지가 내다보고 있 으므로 다시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29)

신익성은 자신이 오신의 모함을 받게 된 것은 이계와 구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같은 동네에 살면 서 그의 악한 면모를 익히 알고 언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와 같은 사실은 국가공식기록에서 는 알 수 없는 내용으로서

,

사건의 이면에 감추어진 사실을 밝혀 준다

.

반면에 심양 압송이 결정된 오신이 조정에 배사

(

拜辭

)

하여 심양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은 매우 압축적이면서 소략하다

.

30)

그러나 일행이 심양에 도착한 날 이루어진 심문의 내용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이때의 심문은 용골대가 척화오신을 고한 이계를 조선 정부에서 신속히 처형한 사실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

신익성은 이에 대해 적극 적으로 해명하여

,

이계가

1624

년 이괄의 난 때 조부 이심

(

李愖

)

과 부친 이진영

(

李晋英

)

과 함께 모두 도주하 여

삼세부국

(

三世負國

)’

이라 지목되었던 사실과 이후에 이계의 죄가 드러나 조정에서 죄를 묻고자 하였던 사 실 등을 말하고

,

그의 처형이 무고에 대한 입막음으로 급히 행해진 것이 아님을 설파하였다

.

31) 신익성은 이 과정에서 척화오신의 압송이 있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계의 고변이었지만

,

조선 정부에 대한 청측의 의심

27)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는 오신에 대한 심문이 12일자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博氏招大臣備局堂上, 齊會館所, 引五臣入跪于 楹外, 各言其罪目, 令家丁縛其兩手, 而鉤問之. 申景禛言於博氏曰, “此人等原非負國之臣, 初無罪犯, 而因一時不逞之輩誣害之 言, 終被構陷, 則小邦之冤痛, 無以暴白矣.” 博氏曰, “當還報帝前.” 諸宰同辭伸辨, 博氏相顧曰, “當一一回報帝前.” 仍令大臣以 下, 押領五臣而出.(󰡔인조실록󰡕 1642년 12월 12일)

28) 十八日, 愽氏招三公六卿備局堂上訓練大將于南別宮, 黃昏愽氏出坐大廳, 三公以下坐西壁, 盛陳兵衛, 拿致五臣于楹外, 去冠解 帶, 從胡五人, 從壁後而出, 各持一人, 以索面縛繫頸.(󰡔北征錄󰡕 「北行始末」. 이하 인용문도 같다.)

29) 本國法例駙馬只食祿而已, 不得干預朝政, 況衰病杜門, 雖親戚罕與相接, 豈有交結聚會之理乎? 但不幸與奸人同里而居, 慣知其惡 狀, 嘗言其隱惹, 故遂成仇敵, 以此誣告, 天地鑑臨, 更無所對.

30) 二十日五臣拜辭朝廷, 請留愽氏一日. 二十一日始發到西郊. 愽氏駐馬點閱, 五臣加鎖以行. 癸未正月十五日渡鴨江, 幷拿金判書 尙憲以去.

31) 龍曰, “此皆李烓所告, 李烓若在, 可以對辨, 而你等急於滅口, 徑先殺烓, 從何査正? 且以李烓負國貪敵等罪爲言, 而前則不殺, 上國拘留之後, 何爲徑殺也.” 余對曰, “所謂李烓三世負國云者, 甲子年逆臣李适稱兵犯闕, 朝廷不免播越, 烓之祖與父皆帶職名, 烓則侍從之臣, 棄君付賊, 朝廷請誅之, 而國王仁恕, 貸死放逐. 數年之後, 以其年少有才, 湔滌罪, 累試之外郡, 烓乃不悛, 貪賊 狼藉, 方議其罪, 自瀋陽推勘拘置, 故本國不得用律, 鳳城再勘之後, 有自本國處斷之令, 國王遣使者, 亟正其律, 烓之誣告之事, 發於烓死之後, 何以逆知而徑殺乎? 曲折如此, 非前日不殺今日徑殺也.”

(10)

이 근원적인 동기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

이후 일행은 동관

(

東館

)

에 억류되어 엄한 감시 속에 놓이게 된다

.

그러나 억류

4

일만에 신익성 형제는 세 자관소

(

世子館所

)

에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왕의 인친이므로 방면한다는 결정을 듣게 된다

.

이러한 내 용은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다

.

「북행시말」의 마지막 부분은 억류

6

일째에 세자관소에서 황제의 명을 전해 듣는 장면이다

.

이때 신익성은 황명을 그대로 기록하였는데

,

그 내용은

임진년에 구제해준 남조

(

南朝

)

의 은혜는 선왕대에 있었고 병자년에 다시 살려준 은덕은 금왕 때에 있다

.’

라는 것이었다

.

황제의 명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

신익성에게 이의를 만 들어내어 양국의 화평을 깨뜨리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

이에 대해 신익성은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지도 않고 잡아들이면 오히려 양국의 화평에 해가 된다고 대꾸하였다

.

32)그러자 황명을 전하던 가린

(

加獜

)

은 심양에는 조선에 화척

(

和斥

)

의 분당

(

分黨

)

이 있는 사실과 조정에서의 논의를 모두 알고 있으며

,

척화인의 이름이 공공 연하게 떠돌고 있으므로 부득이하게 잡아들인 것이라 하였다

.

33)

이때까지 신익성은 심양으로 끌려오는 과정이나 심문과정에서 자신이 무고를 당하였음과 이러한 사건을 일으킨 이계와 청측의 처사를 비난하는 말을 서슴지 않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

그러나 가린의 이와 같은 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대응을 하지 못하고 다음의 언급으로 「북행시말」을 마무리하였다

.

신득연

(

申得淵

)

4

인을 고발한 것 외에

5,6

인의 이름을 써서 정역

(

鄭譯

)

에게 밀고하였지만 정역이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

수년 뒤에 마침 이계의 입에서 고발되었으니 이계가 신득연이 흘린 것을 주워서 까불리다가 하늘을 사르는 화를 이룬 것이다

.34)

1640

년 용골대가 조선에 나온 것은 청에 반대하는 인물을 색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

이 때 용골대는 도승 지였던 신득연

(

申得淵

, 1585~1647)

을 위협하며 척화인의 명단을 대도록 하였고

,

결국 신득연은 최명길

(

崔鳴 吉

)

과 김상헌 외에 조한영

(

曺漢英

)

및 함창의 유생 채씨

(

蔡氏

)

를 고한 바 있다

.

35) 그런데 신득연은 이계의 외숙이다

.

위의 글에서 신익성은 바로 그 때의 일과 이계의 무고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

신 익성은 자신들이 척화오신으로 지목된 것이 청의 억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

조선 내부의 지속적인 고발로 인 한 것이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

결국 「북행시말」에서 신익성이 힘주어 기록하고 싶었던 것은 척화오신 압송 사건의 전말과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던 자신의 언행뿐 아니라

,

조선 내부의 정치적인 동향까지 포함하는 것이 었다고 보인다

.

32) 對曰, “余亦有所欲言, 合無採聽兩國之人往來無間, 其中豈無邪枉之人, 匹夫之因嫌誣告, 不辨眞僞, 發使拿致, 人心震懼, 擧國 鼎沸, 若此不已, 則 勢將難堪, 本國難堪, 則亦非淸國之利也. 此後如有訐告者, 執送本國, 閱其虛實以其罪, 罪之則兩國可以和 平矣.”

33) 加獜曰, “此言亦是矣. 但自前間言何限微細人之言不曾聽理, 近來所發者皆爾國士大夫之言, 何可置之云. 瀋中之人言朝鮮名士以 和斥分黨, 臺評文字流入傳布, 至以斥和人之名字列書以示者, 瀋中無不聞知, 拘問之擧亦出於不得已也.”

34) 申得淵發四人之外, 又書五六人名字密告於鄭譯, 鄭譯不納, 數年後竟發於烓賊之口, 烓特收拾得淵之餘, 燼以成爇天之禍也. 35) 󰡔인조실록󰡕 1640년 11월 17일 기사.

(11)

Ⅴ. 만록(漫錄):압송(押送)과 방면(放免)의 견문 기록

신익성은 「북행시말」로써 척화오신의 압송 사건에 대한 전말을 기록하는 한편

,

만록으로써 압송의 여정을 통해 견문한 바를 기록하고 있다

.

이를 통해 압송과 방면의 과정에 신익성이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한 바를 모두 알 수 있다

.

1. 국내(國內)의 주변 탐문과 정황 분석

척화오신이 떠날 때

,

임금은 신익성이 왕실 일족인데다가 노쇠하였기 때문에 여러 편의를 제공하였다

.

역 관

(

譯官

),

의관

(

醫官

),

침의

(

鍼醫

)

까지 배행하도록 하였고

,

36)갖가지 일용품도 넉넉히 지급한 것이다

.

37) 뿐만 아니라 각 도의 수령에게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일행을 도와주도록 하유하기도 하였다

.

38)

그러나 압송되는 형세는 매우 비참하여 쇠사슬로 묶인 채 끌려가야만 하였다

.

그런데 압송되는 일행을 찾 아와 쇠사슬로 묶인 모습을 보고 눈물 흘리며 전송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

39) 죽은 사람 취급을 하여 오히려 호역

(

胡譯

)

정명수

(

鄭命守

)

의 핀잔을 듣는 수령들도 있었다

.

40) 신익성은 이러한 내용을 모두 만록으로 기록 하고 있는데

,

「북행시말」에서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조선 내부의 움직임에서 찾은 것처럼

,

만록에서도 주 변의 정치적 동향을 감지하고 정황을 분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

평양에서 신익성은 정명수로부터 자신들이 압송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듣고는 사건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

이에 앞서 신익성은 정명수가 심하

(

深河

)

전투 때 포로가 되었다가 호역이 된 인물로 서 우리나라 일을 휘두르므로 조정에서 그를 극진히 대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

이어 정명수 가 그 어미의 초상 때 힘을 다한 김국남

(

金國南

)

에게

이계가 청국을 존봉

(

尊奉

)

하는 자

13

인과 남조에 부식

(

扶植

)

하는 자

23

인을 써서 용장

(

龍將

)

에게 고하였는데

,

오신은 각각 이름 아래에 죄목이 쓰여 있어서 우선 잡아가는 것이다

.”

라고 말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

41)

이렇듯 신익성은 주변을 살핌으로써 이 사건의 본질을 찾고자 하였고

,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만록의 기록 으로 남기고 있다

.

특히 의주에 머무르는 동안 신득연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그가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음

36) 󰡔인조실록󰡕 1642년 12월 13일 기사.

37) 內賜貂裘一領, 胡椒十斗, 丹木百斤, 外賜黃金十兩, 百金五百兩, 該曺例賜細木綿五十匹, 綿紬幾匹, 霜華紙二十束, 獺皮鹿皮白 紙苧布等物.(󰡔北征錄󰡕 만록 2칙)

38) 壬午十二月十三日備忘記, 東陽尉非但位高乃是先朝駙馬, 其待之之禮, 宜從優厚. 譯官邊成吉起服, 給送鍼醫藥醫, 令該院定送帶 行. 下諭于京畿黃海平安三道監司曰, 東陽尉某瀋陽入去一路護送俾無他虞.(󰡔北征錄󰡕 만록 3칙)

39) 趙漢原·李判尹時白·韓右尹必遠·尹墀·崔茂及親屬數人, 送之良鐵, 見吾輩纍纍加鎖於野中, 莫不殞淚.(󰡔北征錄󰡕 만록 4칙) 40) 諸邑守令之出站者, 視吾輩死底物, 或撻隨行驛子, 或不遞擔夫冷眼相看, 滔滔是也. 鄭譯謂守令曰, 五臣雖得罪於瀋陽, 是本國大

官, 何如是賤蔑待耶?(󰡔北征錄󰡕 만록 5칙)

41) 鄭命守殷山土兵, 戊午深河之役, 以都訓導隨姜弘立以去, 爲虜所獲, 隸於仇永介高山, 仍爲胡譯, 從瀋使往來本國. 庚辰以後, 得 志用事, 凡係東事皆專擅, 故朝廷待之極優, 授崇祿知中樞府事, 其遠近族黨皆免賤. 其母之喪, 監司鄭太和盡力營葬, 縣監金國男 負土成墳, 故鄭譯視鄭太和金國男如骨肉, 雖機密事無不言之. 到平壤諸守令滿座, 鄭譯謂國男曰, 烓列書尊奉淸國者十三人, 扶 植南朝者二十三人, 告于龍將, 而五臣則各於名下書其罪目, 故先爲拿去云.(󰡔北征錄󰡕 만록 6칙)

(12)

을 확신하게 된다

.

즉 일행이 의주에 도착하자 그곳에 억류되어 있던 박황

(

朴潢

, 1597~1648)

42)과 조한영

(1608~1670)

43) 등이 일행을 찾아와 서로의 행색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는데

,

당시에 의주에 머물러 있던 신득연 역시 일행을 찾아오기는 하였으나 부끄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44) 이보다 앞서서 신익 성은 다음과 같은 정보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던 터였다

.

<38

>

일행 중 한 명이 정역에게 묻기를

이계가 청국의 작은 벼슬자리를 원했다고 하는데 그러합 니까

?”

라고 하자 정명수가

신득연이 경진년

(1640)

에 용장에게 한인향화추쇄사

(

漢人向化推刷使

)

되기를 바랐는데

,

용장은 그가 나라를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꾸짓기를

개자식

,

득연

이라고 하였다

.

이와 같은 데 이계가 청국의 관직을 원한들 다시 의심이 없었겠는가

?

신득연이 그 때 추쇄사가 되었다면 조선은 어찌 감당할 수 있었으리오

?

용장이 조선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

.”

라고 대답하였다

.

호인

(

胡人

)

은 질박 하면서 속이거나 일러바치는 일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심양에서 득연을 개돼지로 여긴 것이다

.

따라 서 본국이 이계를 죽이지 않았다하더라도 반드시 청국으로부터의 죽임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45)

신익성은 의주까지의 여정 과정에 여러 정보를 수집하여

,

자신들이 왜 압송되는지

,

동지와 내부의 적을 구 별하기에 이른다

.

특히 다음의 기술은 척화오신의 압송이

,

이계의 무고가 임경업

(

林慶業

)

의 도주 사건과 연 결되어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한 사건임을 서술하고 있다

.

<21

>

이계가 고발하였을 때 먼저 위협하기 위해 말하기를

, “

동양위의 권력이 대단하므로 불러들 여도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

라고 하였다

.

박씨가 그 말을 믿었고

,

또 임경업이 도망친 것을 보고 더욱 의심하는 단초를 가지게 되었다

.

입경할 때는 얼굴에 그러한 사정을 드러내지 않고 호위를 엄하 게 하였고 송경

(

松京

)

에 이르러 비로소 중요한 일을 말하였으니

,

우리나라가 따르지 않아서 병사를 내 어 포획하기에 이를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

참인

(

讒人

)

의 망극함이 이에 이르렀다

.46)

신익성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척화를 강하게 주장하다가 임금의 항복을 목도하고는 귀전하였었 다

.

남한산성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

그러나 귀전 뒤에는 모든 것을 잊고 한가로이 지냈었기에 국내외의 정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었다

.

그러나 심양으로 가는 과정에 자신의 압송이 국내외 의 정치적인 상황과 형세에 따른 결과임을 알게 되고

,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42) 본관은 潘南, 자는 德雨이다. 병자호란 뒤 昭顯世子를 모시고 瀋陽에 갔다가 돌아왔으며, 김상헌과 鄭蘊 등을 모함하는 자 들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심양에 다시 불려 갔다가 돌아왔다.

43) 본관은 昌寧, 호는 晦谷, 자는 守而이다. 청나라에서 元孫을 볼모로 瀋陽에 보내라고 요청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萬言疏 를 올렸다. 이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져 金尙憲·蔡以恒 등과 함께 심양으로 잡혀가 투옥되었다.

44) 朴德雨曹守而輩乘昏夜來訪, 德雨病餘瘦削, 遇吾輩行涕泣相視. 申得淵亦來, 揚揚無怍色.(󰡔北征錄 만록 8칙)

45) 行中有人問于鄭譯曰, “李烓有願爲淸國小官之言云然.” 鄭曰, “申得淵庚辰年, 願爲漢人向化推刷使于龍將, 龍將嫉其背國叱之曰, 狗子得淵. 如此, 烓之乞爲淸國之職, 更何疑乎? 得淵其時爲推刷使, 則朝鮮何以支當, 龍將之爲朝鮮地大矣.” 胡人質朴最厭詐該 訐告之事, 故瀋中視得淵如狗彘矣. 本國雖不誅烓, 烓必不免於淸國之誅矣.(󰡔北征錄󰡕 만록 38칙)

46) 烓賊告時, 先爲恐動之說曰, 東陽尉大有權力 招之必不來 愽氏信其言 且見林慶業之逸頗持疑畏之端, 入京不露面目, 嚴其護衛, 到松京始言所幹之事, 猶恐我國不準, 至有發兵捕獲之意. 讒人罔極乃至於是矣.(󰡔北征錄󰡕 만록 21칙)

(13)

2. 적국(敵國)의 동정 파악과 정보 수집

여정 중 주변을 탐문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신익성의 태도는 의주를 떠나서도 변함이 없었다

.

다만 국내에 서는 주로 내부의 적을 찾는 데 목적을 두었지만

,

조선의 강역을 벗어나 적국의 땅을 밟게 되면서부터는 외 부의 적에게 있을 수도 있는 단점을 찾는 것에 주안점을 둔 것이 다를 뿐이었다

.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익성 일행은 여정을 촉박하게 진행하여

7

8

일만에 심양에 도착하게 되는데

,

정보를 수집하거나 탐문할 기회가 상 대적으로 적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익성은 자신이 견문한 한도 내에서 여러 정보를 추출해 내었다

.

<14

>

본국에서 일찍이 책문

(

柵門

)

에 대해서 듣고는 성채를 견고하게 설치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였 다

.

그런데 그 아래에 이르고 보니 마치 나무판을 새끼로 묶어놓은 것 같고 그 높이는 겨우 어깨 정도여 서 손으로 밀치면 무너질 듯하였다

.

그러나 사람들은 감히 넘지 못하고 금성

(

金城

)

처럼 바라보았다

.47)

책문은 압록강을 건넌 이후 맞닥뜨리는 관문이었다

.

특히 이 즈음 청에서는 조선이 명과 왕래하는 것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

이계의 사건이 터지자 조선 정부에서는 백성들이 책문을 출입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도록 하고 있었다

.

48) 신익성은 그러한 사정을 소문으로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실물을 보게 된 것이다

.

그러 나 상상하였던 모습과 달리 그 실상은 매우 허술했고

,

더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마치 금성처럼 우러른다는 것이다

.

엄중할 것이라 생각하였던 국경지역의 경계가 전혀 그렇지 못한 데 대한 놀라움과

,

사람들의 몸사림 에 대한 의아함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

신익성은 여정을 거듭하며 이러한 놀라움과 의아함을 곳곳에서 발견한다

.

변방지역 백성들의 식량 사정이 나쁠 뿐만 아니라 그나마 그 수가 적어서 봉화로 연락을 취할 뿐이며

,

49) 심양은 주변에 있는 귀족들의 농장 에서 물품을 수급받는데 땔감이 부족하여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1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기도 한다

.

50) 이러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신익성은 청의 실제가 의외로 약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깃든 판단을 내 렸을지도 모른다

.

그리고 심양에 도착하여 드디어 청의 실제를 직접 보게 된다

.

<19

>

심양성은 벽돌로 쌓았는데

,

성 밖은 토성

(

土城

)

을 쌓았으니 주위가 수십 리였다

.

성 안에 궁 궐과 관청과 제왕

(

諸王

)

의 집이 있고

,

중앙에는 가루

(

街樓

)

와 시장이 있었다

.

그 외에는 비록 용골대나 정명수일지라도 외성

(

外城

)

에 산다고 하였다

.

성에는

8

(

)

8

고산

(

高山

)

이 있고

,

각기 지키는 성의 문 밖에 고산군점

(

高山軍店

)

을 두었다

.

이른바 군점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서울에서 왕사

(

王事

)

를 호

47) 本國嘗聞柵門, 意謂設柵堅牢也. 及到其下, 如拘之木編以葛索, 其高才齊肩, 可而手拳打破. 而人不敢踰, 望之如金城.(󰡔北征錄󰡕

만록 14칙)

48) 󰡔인조실록󰡕 1642년 9월 12일 기사. 이 기사가 책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49) 自鳳城至冷泉, 設胡臺十里二所, 臺下小茅茨, 婦幼不能具食. 甜水通遠數處稍實, 若撤一路烽火數百里, 無人迹矣.(󰡔北征錄󰡕 만 록 15칙)

50) 自東八站至瀋陽, 小車駕牛或駕驢, 聯轂接軸, 日夜無休. 時盖皇帝以下, 皆置農庄, 積財於庄所, 隨運隨用, 而柴炭甚貴, 瀋中無 一月之蓄, 皆言若有外敵, 無守成之備云.(󰡔北征錄󰡕 만록 18칙)

(14)

(

號令

)

하는 것과 같다

.

호서

(

胡書

)

로 작은 나무판에 베껴서 각 점에 전달하면 점주가 일시에 퍼뜨린 다

.

그래서 비록 대규모의 거사가 있어도 오로지 군점에서만 알고 다른 곳에는 알지 못한다고 한다

.51)

벽돌로 쌓은 내성과 흙으로 쌓은 외성으로 이루어진 심양성은 의외로 견고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

궁궐이나 관청 같은 중요 건물과 시장은 내성 안에 있고 대부분의 민가는 외성에 있어서 이중의 방어를 할 수 있었고

, 8

문과

8

고산이 있어 각기 군점이 이를 지키고 있었다

.

만약 연락할 일이 있으면 비밀 통신 수단 이 있어서 보안이 철저하기까지 하였다

.

이러한 철저한 보안의식은 구성원이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

관소의 금군

(

禁軍

)

이 박씨에게 보고를 할 때조차 귓속말로 소곤거릴 정도로 비밀을 엄히 지키고 있었다

.

52) 신익성은 짧은 기간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도 청이라는 나라가 세를 확장해 나가는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비밀 통신이나 보안의식을 직접 확인하였다

.

이는 앞서 심양에 오기까지 느꼈던 의외의 허술함과는 사뭇 대조되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

이렇듯 신익성은 견문을 통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탐문하고자 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

그러나 그 가 접할 수 있는 인물이나 장소가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탐문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

결과적으로 단편적인 정보를 얻는데 그쳤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익성은 자신이 견문한 바를 충실히 기록하여 청의 실 제에 접근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

3. 이역(異域)의 풍경과 변화한 실상 포착

신익성의 심양 행은 죄인의 신분으로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

기행의 형태를 띠는 것이기도 하다

.

따라서 신익성은 여정 과정에 접하게 되는 색다른 풍경과 풍속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기록하는데 주력하였 다

.

압록강을 건넌 이후 이역

(

異域

)

에 접어들자 이러한 마음이 더욱 강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

왜냐하면 수많 은 문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그곳의 풍경과 풍속을 간접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

<12

>

동팔참

(

東八站

)

의 산세나 물의 흐름은 본국과 같으며

,

골짜기에는 살 만한 땅이 많았다

.

봉 황산

(

鳳凰山

)

은 빼어났으니

,

마음이 씩씩해졌다

.

월정

(

月汀

)

이 기록한 바를 일찍이 본바

,

그 아래에 은 자가 산다고 하는데

,

다만 그 외면만 보아 골짜기가 과연 어떠한지는 알 수가 없다

.53)

동팔참 구간은 분명 이역에 해당하지만

,

그 지형이 우리나라와 비슷해 친근한 느낌이 들고

,

봉수산은 장대

51) 瀋城甓築, 方城外築土城, 周迴數十里. 城中則只設宮闕公廨諸王之家, 中建街樓市廛. 其餘雖龍骨大鄭命守皆居外城云. 城置八 門八高山, 各自主之城, 門外置諸高山軍店. 所謂軍店者, 如我國之京邸(發)有號令王事 以胡書寫小板傳于各店, 店主一時傳布, 故雖有大擧, 只店知之, 他無知者云.(󰡔北征錄󰡕 만록 19칙)

52) 館所遣禁軍李曄, 於也里江外押去者逐之, 不得相語, 曄言愽氏出去時, 所言極微, 實不知所幹何等事也. 其國之嚴秘如此.(󰡔北征 錄󰡕 만록 21칙)

53) 東八站山形水勢如本國, 峽中多有加居之地. 鳳凰山峭拔秀麗, 其襟抱亦壯. 曾見月汀所記, 其下有隱者居之云, 但見其外面, 不知 洞中果如何也.(󰡔北征錄󰡕 만록 12칙)

(15)

한 느낌을 준다

.

신익성은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인데

,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이를 확인한 점을 기록하고 있다

.

다만 월정 윤근수

(

尹根壽

)

의 기록에서 본바 봉수산 아래의 은자가 사는 곳을 직접 가보 지 못함을 한하였다

.

압송되는 처지이다 보니

,

평소보다 빡빡한 일정으로 진행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사정은 귀로에 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귀로의 신익성 일행은 심양에 갈 때보다 더 서둘러 여정을 진행하여

6

7

일만에 용만에 도착하게 된다

.

그러다 보니 말로만 듣던 명승명소를 직접 볼 수 있기도 한 반 면에

,

지척에 두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있었다

.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22

>

요동 벌판의 드넓음과 백탑

(

白塔

)

의 높이는 천하에 알려졌는데

,

뜻밖에도 직접 볼 수 있었 다

.

그러나 신성

(

新城

)

을 경유하는 길로 나와서 요성

(

遼城

)

과의 거리가 제법 멀었기 때문에 화표주

(

華 表柱

)

를 방문할 수 없음을 한할 따름이다

.54)

(

)

나라 때 지어진 백탑은

13

층 높이의

8

각 전탑으로 각 면마다 다양한 부조물이 있어 조형적으로 완 성도가 높은 요양의 상징물이다

.

그러나 이 탑을 보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 하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사 행을 하지 않을 경우 이를 직접 볼 가능성이 없다

.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신익성은 사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 탑을 보게 된 것이다

.

드넓은 요동 벌판에 갑자기 우뚝 솟은 백탑은 크나큰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

한편 화표주 역시 백탑과 짝을 이루는 요양의 상징물이다

.

백탑을 보고 나서는 화표주를 보아야 하는 것이 다

.

그러나 신익성은 화표주를 끝내 보지 못하였다

.

일행의 여정이 화표주가 있는 구성이 아닌 신성을 경유하 였기 때문이다

.

55) 국제정세가 바뀌면서 지형지물도 조금씩 변한 결과이다

.

신익성은 이전과는 달라진 사행로 를 직접 체험하고 이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언술로 나타내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실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56) 또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고 익숙한 것에 대한 반가움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

특히 한족

(

漢族

)

이나 한

(

)

의 제도를 접하였을 때 소멸되었다고 여기던 것을 다시 찾은 듯한 마음을 가졌다

.

한인

(

漢人

)

집에서 마신 차에 서 한인의 풍미가 난다고 하고

,

57) 석동사

(

石桐寺

)

에는 明의 장수이었다가 중이 된 자가 있는데 그곳의 일용 품과 언어가 화제

(

華制

)

였다고 한 것이58) 그러하다

.

여기에는 중화

(

中華

)

야말로 불변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는 의식이 깔려 있다

.

다음의 기사에서도 신익성의 그러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

<32

>

절강

(

浙江

)

출신 맹영광

(

孟永光

)

은 글도 잘하고 그림도 잘하여 연중

(

燕中

)

에 노닐었다

.

조 대수

(

曹大壽

)

가 대능하

(

大淩河

)

에 있을 때 초상화를 그리고자 하였는데

,

성이 함락되는 날 맹영광은 잡

54) 遼野之廣, 白塔之高, 聞於天下, 不意親目覩之. 路出新城, 距遼城頗遠, 恨不能訪華表柱耳.(󰡔北征錄󰡕 만록 22칙)

55) 청 태종(太宗)은 구성(舊城)에서 10리 떨어진 지점인 태자하(太子河) 동쪽에 요성을 옮겨 설치하고는 신성(新城)이라고 하 였다.

56) 신익성은 이 때의 감회를 「遼東」시로 읊었다. 遼東城外野連天, 北指瀋陽更杳然. 際海靑山分漢界, 干霄白塔紀唐年. 千秋高躅 乘桴客, 一柱奇觀化鶴仙. 回首中原增感慨, 滿空風雪暗幽燕.

57) 回路不入遼城庄頭家, 憩于太子河邊漢人家. 漢女老少窺見者甚多, 路渴求茶, 卽設數器果進天池茶, 頗有漢人風味.(󰡔北征錄󰡕 만 록 23칙)

58) 太子河邊石桐寺名刹也. 遼東見敗將令二人直趨寺中, 落髮爲僧, 至今二十年猶存焉. 一寺之內, 服用言語, 皆華制云.(󰡔北征錄󰡕

만록 24칙)

(16)

히고 말았다

.

그 후 머리를 깎인 채 심양에 살고 있다가 봉림대군을 뵙고 그림을 그렸다

.

내가 심양에 있을 때 봉림대군이 술자리를 베풀고 맹영광을 불러들여서 오농사

(

吳儂詞

) 2

(

)

을 부르게 하였는 데

,

그 소리가 청월비원

(

淸越悲惋

)

하여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하였다

.59)

맹영광은 훗날 소현세자를 따라서 조선에 들어와

3

년간 머물다가 돌아간 중국 화가로서

,

조선 화단에 많 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

그러나 신익성이 그를 심양에서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가 조선에 갈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다만 맹영광은 볼모로 잡혀 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과 친밀히 지내고 있었 고

,

마침 술자리에서 그의 노래를 듣게 된 신익성은 맑고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

맹영광의 노래가 슬플 뿐 아니라

,

심양에 억류된 명인과 조선인이 각자의 조국과 처지를 슬퍼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

여기에는 무너진 중화의 질서에 대한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다

.

중화의 질서가 무너졌다는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질서 또한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실제로 신익성은 귀로에 황폐한 철옹성을60)보게 되는데

,

중화 질서가 파괴됨으로써 자신의 세계 또한 질서를 잃어버렸음을 확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이처럼 신익성은 이역의 풍경과 풍속을 충실히 기록하면서

,

변화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모습을 감지하였다고 하겠다

.

Ⅵ. 결 론

17

세기에 이르면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요동치면서 조선에서 중국 사행의 의미가 크게 변하게 된다

.

더군 다나 병자호란 직후에는 사행의 의미에 대한 고찰이나 명칭에 대한 규정이 이루어지지도 못한 혼란이 있었 다

.

조선은 명왕조가 존속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려니와 그 이후로도 공식적인 사행 대상을 청으로 삼고 있었 지만 심정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

따라서

17

세기 초반에는 문학 작품이 제작될 만한 여건 이 안 되었기 때문에 사행 문학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 전혀 없다

.

그러한 점에서 신익성의 심양 체험과 그에 대한 기록인 󰡔북정록󰡕은 매우 예외적인 사건에 대한 예외적인 문학기록이라 할 수 있다

.

신익성은 척화오신으로 지목되어 강제적으로 국경을 넘어야 하였으며

,

그 행선지 또한 연경이 아닌 심양이었다

.

결과 또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즉 그의 월경은 조건이나 목적 지면에서 사행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

그러나 신익성은 여정 동안 내면의 은밀한 심경을 한시로 드러내는데

,

사지에 끌려가면서도 당당하려는 다 짐을 시화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불안과 초조를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

방면되어 귀로에 오르고서

59) 浙江人孟永光, 能文善畵, 客遊燕中, 曹大壽在大淩河時, 欲寫眞, 邀致城陷之日, 永光被執, 不免剃頭, 寓居瀋中, 謁鳳林作繪事. 余在瀋日, 鳳林設酒, 招永光酒間, 令永光唱歌以吳儂詞兩闋, 其聲淸越悲惋, 可令人泣下.(󰡔北征錄󰡕 만록 32칙)

60) 丁酉之難, 來寓鉄瓮城, 節度營門器設甚宏, 營府敎坊紅粉雜踏, 京中士夫, 松都富商, 皆集於此, 繁庶華侈, 甲於西土. 今來營門 撤去, 民物凋殘, 荒墟敗堞, 蓬蒿滿目, 無復昔日所見, 相識者只有老妓一人名曰小天生者存焉.(󰡔北征錄󰡕 만록 30칙)

참조

관련 문서

즉, 삼각측 량에서는 기선관측의 정밀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거 리 측량”의 주요 부분은 본 기선관측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EDM 의 출현으로

정보가 들어오는 시기, 아직 성공 없이 개인이 문제를 해 결하거나 일부를 해결하려고 의식적으로 시도하는

이를 위하여 기록의 관리와 관련된 구체적 인 행위와 조치사항, 기록관리의 정책 과 체계 등에 대하여 기록화해야 하며, 신뢰할 수 있는 기 록관리가

그러나 잠재적 문제와 리스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잔류 농약과 수의약품의 기준 초과와 생산지 환경오염 문제는 일부 지역과 품종 , 시기 등에 여전

다은이의 운동화는 작아지긴 하였으나

이러한 점 때문에 본 연구에서 다양한 항우울제의 처방경향과 이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밝혀보고자 하였으나 특별히 항우울제의 약물처방경향에 유의있게 영향을

태도는 새로운 경험과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장애학생에 대한 일반 학생의 태도는

I. 꿀벌통 속에서 일어나는 꿀벌의 성장 동영상을 본 후 USB 카메라를 통해 연결된 벌통 속 꿀벌들의 활동 모습을 휴대폰 앱으로 실시간 관찰해 봅시다... 꿀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