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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한국영화의 국제 교류에 관한 연구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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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교류에 관한 연구

28)

* **

29)

-국내와 해외의 국제영화제와 영화의 한류에 관하여-

이지현

한양대학교 강사

목 차 1. 들어가며

2. 한국의 국제영화제 활성화 경향 3. 해외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보인 성과들 4. 영화 분야에서의 한류

5. 나오며

<국문초록>

본 연구는 2000년대 한국영화의 국제 교류에 대해서 살핀다. 우선, 국 내의 국제영화제 개최 경향을 알아본 뒤, 해외의 국제영화제에 수상했던 한국의 감독들에 대해 정리한다. 그리고 해외에서 영화의 한류가 존재하 였는지, 만일 존재했다면 그 역할은 어떠한지를 살피려 한다.

2000년대 국내의 국제영화제 활성화가 분명한 하나의 결과를 도출하진 못하였더라도, 국내 영화산업 전반의 활성화를 이끈 것은 분명해 보인다.

관객들에게는 다양한 양질의 영화들을 접할 기회를 주었으며, 영화인들

* 이 논문은 2013년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NRF-2014S1A8A4A01022506).

** 본 연구는 2014년 9월 27일 개최된 현대영화연구소 정기 학술대회 “21세기 한국영화:

IMF 이후의 변화상을 중심으로”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 보완한 논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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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교류의 장 역할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영 화는 지역 문화산업의 발전을 도왔고, 문화의 다양성을 증진시킬 수도 있었다. 이 장점들 덕분에 1995년 이후 지방자치단체들은 국제영화제 유 치를 위해 애썼다. 따라서 이후 10년간 국제영화제는 포화됐으며, 2000년 대 후반부터 영화제들은 스스로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를 제외한 나머지 영화제들은 현재 제자리걸음 중이다. 그럼에도 국제영 화제가 지니는 근본적 장점은 여전하다. 개최지의 입장에서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단순한 관광 상품 이상의 ‘지역 문화 강화에 대한 표본’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해외의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는 2000년대 이르러 비로소 선전하기 시작했다.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등 작가들이 해외에서

‘한국영화의 누벨바그’를 일으킨 것으로 평가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들은 해외의 주요 국제영화제들을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각각의 작가들은 한국의 특이점을 공간의 문제를 통해 발현시키거나, 시간이나 사회의 공시적 문제점들로 영화 속에 치환시켰다. 더불어 국내 학계에서

‘포스트 코리안 누벨바그’라 불리는 이들의 활동이 국내에서 ‘포스트’가 제외된 채 언급된다는 점 역시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더불어 다양한 문화콘텐츠 중 ‘한류 콘텐츠’로서 한국영화의 역할 또 한 중요하다. 1999년 완성된 <쉬리>가 불러왔던 아시아에서의 한국영화 열풍은 200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엽기적인 그녀>가 대표적 인 한류 콘텐츠 상품의 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문화 마켓이 지속적으 로 그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에서 영화적 한류는 그 열기가 미미해 한류로서의 경향은 거의 없었다고 정리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 영화는 특화된 문화상품이 아니라, ‘다 양성’을 무기로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주제어: 한국영화 국제교류, 2000년대 한국영화, 국제영화제, 해외영화제, 한국영화의 누벨바그, 포스트 누벨바그 필름, 세계 3대 영화제, 영화의 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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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2000년대 한국영화는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고 심층적 성과를 이루어갔다. 변화의 양산은 영화산업의 기초적 분야에서 간접 적 문화의 차원을 거쳐, 영화창작에 이르는 실질적인 과정까지 영향을 미쳤다. 시기적으로는 제15대 대통령과 제16대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 기, 영화진흥위원회의 출범 이후 제4기에 이르기까지 약 10년여의 기 간 동안 한국의 영화계에는 다이나믹한 많은 변화들이 생겼다. 영화 산업 전체가 다른 사회의 문화적 기반들과 연관 지어 발전했던 것이 다. 이 시기 약 10년간의 한국영화의 국제교류 흐름에 관해 기술하려 한다. 국제 교류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1980년대에 일어났다. 1980년 대 후반에 할리우드 영화의 국내 직배 이후부터, 한국 영화시장은 ‘국 가 간 공정거래’라는 자유경쟁체제로 변화되었다. 이 차이가 가지고 온 반향은 컸다. 이후 국내 영화정책 변모의 배경은 변화하기 시작했 던 것이다. 따라서 1990년대에는 ‘향후 영화산업이 국제적 경쟁이 가 능한 구조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작용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2000년대 제작된 영화들은 규모 면에서 여러모로 할리우드의 블 록버스터들을 닮아갔다. 거대 배급망의 구축에 따른 배급과 제작의 시 스템 연계로 점차 제작시스템을 굳혀가기 시작한 것은 그러므로 80년 대 후반부터라 할 수 있다. 당시 산업 변화의 흐름은 단지 국내 시장 에만 국한되어있지 않았으며, 국내 영화제작자들은 해외시장에도 눈을 돌렸다. 수출을 목표로 한 대작영화들이 국제적 관객들을 모으기 위해 국외의 관객들을 타겟으로 삼기 시작했고, 그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점 점 더 커져갔다.

본고는 이러한 경향에 기대어 세 가지 방향으로 2000년대 한국영화 의 국제교류에 관해 살피려 한다. 첫째, 국내에서의 국제영화제의 활 성화 경향을 살필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과 더불어 국내 개최 국제 영화제의 수가 이 기간 동안 월등하게 많아졌다는 사실도 함께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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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할 것이다. 둘째, 해외에서 일어난 한국의 작가 영화의 거센 흐름도 관찰하려 한다. 이 시기 해외영화제에서는 연일 한국영화의 승전보가 들려왔는데, 이는 일시적 현상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그 지속적 작가 영화의 승전보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2000년대 한 국의 대중문화를 장악한 ‘한류’의 경향에 관해 특히 ‘영화에서의 한 류’를 살펴볼 것이다. 그 흐름이 거대하지 않더라도 영화 역시 중요한 대중문화 콘텐츠로서 한류의 기류에 편승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러한 한국영화의 선전이 한국영화 세계화에 어떤 지표로 남을 것인지 다른 문화콘텐츠와의 비교를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한국의 국제영화제 활성화 경향

1995년 지방자치제도의 시행 이후,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며 시행된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의 활성을 위해 지방 마케팅이 계기가 된

‘부산국제영화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여파는 공공과 민간의 협 력 사업으로 이어졌으며, 다른 도시에서도 각자 나름의 영화제들을 기 획하기 시작했다. 1995년은 ‘키노’와 ‘씨네21’ 등 국내의 본격적 영화 전문지들이 출현한 시기이자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당시 강단 에서 활동하던 영화이론가들이 비평 활동의 활성화를 전제로 국제영 화제를 만들자고 결의하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1995년 서울국 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의 개막으로 이어진 데에 이어, 1996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그 포문을 열었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예상보 다 더 많은 수의 18만 관객들이 몰리면서 대성공을 거둔 것으로 기록 돼 있다. 당시 영화제에 대한 관심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는데, 그 열광적 호응의 과정을 각종 신생 매체들은 퍼다 나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여러 신생 매체들 역시 영화제 성공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흥행을 도왔으며, 상호작용하며 영화제의 성공을 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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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지금에 이르러 부산국제영화제는 지역의 특성을 극대화시킨 문 화 창조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모티브로 우후 죽순 지방의 여러 국제영화제들이 생겨났다. 이를테면 비슷한 시기인 1996년에는 인권영화제가 시작되었고, 1997년에는 서울여성영화제와 부산아시아나단편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서울국제노동영화 제가 차례로 문을 열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단기간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발돋움하면서, 희소한 영화제 성공의 사례로 꼽히고 있다. 영화제 성공과 더불어 부 산은 ‘기존 항구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영상문화의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1)는 평가를 듣게 됐다. 2007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제공 하는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를 대상으로 영화제들의 비교 평 가’ 결과를 살펴보면,2) 불투명한 성격이나 중복적 성격을 지닌 다수의 국제영화제들에 비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여타의 영화제들보다 탁월한 평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성과는 예산의 증액을 통해 간접적 으로 입증된다. 2009년을 기준으로 부산국제영화제의 사업비총액은 95 억 수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금액은 여타 비슷한 규모의 해외 국 제영화제들과 비교해보면 비슷한 수준의 예산이다. 비록 당시의 영화 제 집행위원장은 비슷한 규모의 북경국제영화제 예산이 900억인 것과 비교해 다소 열악한 환경이라고 소개하지만,3) 엇비슷한 시기의 칸영 화제의 전체 예산이 2000만 유로로 부산국제영화제의 2.5배 정도인 것인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베니스 영화제의 전체 예산이 880만 유 로로 약 1.3배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4) 부산국제영화제의 예산 수준이

1) 박강미, 국제영화제를 통한 지역활성화와 전략에 대한 연구, 󰡔글로벌문화콘텐츠󰡕, 제7호, 2011, 29쪽.

2) 옥성수 외, 󰡔국제영화제 전략적 육성방안 연구󰡕, 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07, 12-16쪽. 본 고는 국제영화제를 ‘주제’에 따른 부산영화제 외의 7개의 영화제들, ‘장르’에 따른 부천 판타스틱영화제 외 9개의 영화제들, ‘기술력’에 따른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 외 3개의 영화제들, ‘관객’에 따른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 외 6개 영화제들, 불투명한 구분의 ‘광 주국제영화제 등 총 26개의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3) 김용언, <한류의 중심지? ‘강남’ 아니라 ‘영화의 도시’ 부산이다!>, 프레시안, 09/1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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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열악한 수준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해 “아시아영화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는 계획은 사실 성공하기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 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가능하리라고 본다. 부산이라는 플랫폼의 성공 요인은 두 가지인데, 정치적인 측면과 한국 관객의 특수성이라는 측면에서 기대 이상의 성공을 이루었다”5)고 자평하는데, 그의 말에 이견은 없어 보인다. 그러니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평가는 일정부분 그 공로를 치하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장르와 지역 영화들을 통해 세계영화의 흐름을 조망하게끔 하는 축제의 장이자, 아시아영화의 새 로운 비전을 제시하여 아시아문화의 미래를 논의하게끔 만든 아시아 최대의 영화제이며, 월드프리미어 상영이 가능한 경쟁력 있는 작품들 을 끌어와서 경쟁부문을 포함한 국제적인 영화제로 발돋움하였다는 정도로 그 의의를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렇지만 부산국제영화제를 제외한 나머지의 국제영화제들은 여전 히 ‘이름에만 국제라는 타이틀을 붙였을 뿐 실제로는 국제영화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영화제들이 다수’6)라는 평가를 듣는 형편이다.

2007년 <한국영화연감>에 의하면, 제7회 광주국제영화제의 경우는 “지 난해에 이어 2007년에도 전국 7개 영화제 중 최하위로 평가 받으면서 퇴출 위기를”7) 맞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후 광주국제영화제 측은 이 를 ‘2006년 외부에서 영화제에 대한 개혁요구가 있었고, 조직내부의 갈등도 존재했지만 개혁특위를 가동하여 개혁안을 마련했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8)고 밝히지만, 여전히 그 노력에 대한 성과는 보이 지 않는 형편이다. 한편 2005년 이후 계속되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

4) 우석봉, 국제영화제와 불꽃축제의 경제적 효과, 󰡔BDI포커스󰡕, 제75호, 부산발전연구 원, 2010, 3쪽.

5) 김용언, 앞의 기사.

6) 옥성수 외, 위의 책, 12쪽.

7)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연감󰡕,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년, 282쪽.

8) 오현진, 조아라, <평화를 향한 날개 짓 ‘광주국제영화제’>, 광주데일리뉴스, 20/0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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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국제영화제 평가>에는 다수의 국내 개최 국제영화제들에 관한 평 가들도 요약돼 담겨 있다. 이 조사가 보여주는 지표 역시 <한국영화 연감>과 비슷한 수준이다. 국제영화제 평가는 세계 각국에는 진행되 는 5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국제영화제들 중 국제영화제작자연맹 (FIAPF)이 공인한 국제영화제의 수가 100개 미만인 상황에 기인하여, 국제영화제 인증 관련 기관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을 충족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 공인된 국제영화제로 국내 국제영화제들을 발전시킬 필요 가 있다는 판단 아래 진행된 사업으로, 국제 표준과 흡사하게 한국의 국제영화제들을 상향화 시키려는 의도로 시행됐다. 2007년 국제영화 제 평가 발표에 따르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특성화되어 있고 관객 층의 충성도가 높은데 반해, 집행조직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제도적으 로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9)있으며, 전주국제영화제는

‘디지털영화제에서 대안영화제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으나, 실질적 리더의 부재로 영화제 사업을 협조해 고민할 통로가 부족한’10) 형편 이고, 부산국제영화제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 화제는 ‘영화제의 성격이 오히려 모호해지고, 경영관리 상의 문제가 있는 것’11)으로 평가받고 있다. 즉, 국내에서 개최되는 다수의 국제영 화제들이 국제영화제작자연맹 등지에서 제시하는 국제영화제로서 갖 추어야 하는 요건에 적합하지 않거나, 혹은 운영 및 경영시스템의 합 리성에서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지적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 지표 지점들을 이 후의 국제영화제들이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통계상으로 1997년 이후 국제영화제의 발생 빈도는 이전보다 급속 하게 증가하였다. 1999년에는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과 서울 국제청소년영화제가, 2000년에는 서울뉴미디어페스티벌과 전주국제영

9) 김도학 외, 2006년 국제영화제 평가, 한국영상산업정책연구소, 2007, 37쪽.

10) 김도학 외, 위의 연구, 50쪽.

11) 김도학 외, 위의 연구,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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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가, 2001년에는 인디다큐페스티벌과 광주국제영화제가, 이어서 2003 년에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2004년에는 서울환경영화제와 서울국 제영화제,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와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그 리고 대한민국국제청소년영화제가 연달아 개막되기 시작했다. 즉, 2004 년에 시작된 국제영화제의 수만 무려 5개에 달한다. 뿐만 아니다. 이 어서 2005년에도 무려 5개의 국제영화제가 첫 발을 딛는다. 고양국제 어린이영화제와 재외동포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와 국제대학생평 화영화제, 그리고 부산국제어린이영화제가 그 목록에 속한다. 따라서 2002년 월드컵이 개최되는 동안 잠시의 휴지기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 면, 지금까지 언급되는 다수의 국제영화제들이 부산영화제 이후의 기 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부산영화제의 성공에 대한 포괄적 지표라 읽어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2007년에 충무로국제영화제와 서울국제 가족영상축제, 시네마디지털서울 등이 첫 발을 내딛은 후로 국제영화 제의 생성은 쇠퇴기에 돌입했다. 이미 국제영화제의 수가 포화된 수준 에 이르렀단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개막했던 충무로국제영 화제 경우는 2010년 4회를 마지막으로 2011년부터 잠정의 휴식 기간 에 돌입했으며,12) 마찬가지로 2010년 4회까지 이어졌던 서울국제가족 영상축제도 “정치적 배려가 있었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다”13)는 평 가와 함께 2011년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시네마디지털서 울의 경우에는 CJ문화재단과 영화제사무국의 다른 방향성 때문에 결 국 갑작스런 폐막을 알려,14) 예상보다 너무 짧은 시간에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시작된 DMZ 다큐 멘터리영화제 경우는 줄곧 경기콘텐츠진흥원 내 경기영상위원회에서

12) 김구철, <충무로영화제 ‘한류스타 축제’로 재탄생한다>, 문화일보, 08/04/2014 “2011 년 중단됐던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가 대중문화 축제로 재탄생한다. (중략) 충무아트홀 은 2016년부터는 행사를 본격적으로 열 예정이라며 (중략) 행사 전담 조직인 콘텐츠사 업부를 신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3) 김형규, <인권노동 영화제 지원금 현 정부 들어 대폭 줄었다>, 경향신문, 06/06/

2011.

14) 전종혁 외, 흔들리는 영화제 이대로 좋은가?, 영화진흥위원회, 201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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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을 집행을 해왔지만, 2014년 6회째를 맞으면서 ‘사단법인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법인’을 설립을 계기로 예산에 대한 편성의 독 립권을 얻게 됐다. 이를 통해 1997년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던 국제영화제들의 사활을 건 승부가 몇 년 동안 더 치열해졌단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얼마간의 경쟁 과정이 지난 후, 아마도 국내의 국 제영화제 활동은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2007년 이후 국내의 국제영화제 활동이 쇠퇴기에 들어선 것 은 정부의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2007년 한국문화관광부이 발간한 국제영화제 육성화 방안 연구에는 국내의 국제영화제 외에도 해외에 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가 담겨 있는데, 이 사 례가 힌트가 되어준다. 국제영화제 육성화 방안 연구는 세계 3대 영 화제라 불리는 ‘칸, 베를린, 베니스’ 외 총 24개의 해외영화제들을 대 상으로 한 결과를 담는 조사이다.15) 해당 영화제들은 영화진흥위원회 에서 분류하고 있는 A급 영화제 및 B급 영화제16)들의 목록과 다수 겹쳐지고, 또한 국제영화제작자연맹 공인 국제영화제의 목록과도 상당 수 겹쳐진다. 다만 문화관광부의 조사는 다큐멘터리 관련 영화제가 대 체로 제외되었으며,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가 단편영화제로서는 이례적으로 포함된 점만이 다르다. 따라서 이 선정 대상은 국제 공인 목록에 더불어, “개최시기와 작품 수, 관람객의 수를 중심으로”17) 해 당 대상을 다시 구분한 결과라 여길 수 있다. 국제영화제 육성화 방 안 연구는 이밖에 해외의 성공적인 국제영화제들이 미국이나 라틴 대 륙보다는 유럽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그리고 “미국 및 유럽에

15) 옥성수 외, 같은 책, 29-30쪽. 칸, 안시애니메이션, 클레르몽페랑단편, 에딘버러, 런던, 베를린, 오버하우젠, 만하임, 선댄스, 뉴요그 로스앤젤레스, 동경, 도쿄 필멕스, 야마가타, 베니스, 로카르노, 산세바스찬, 카를로비 바리, 로테르담, 토론토, 벤쿠버, 모스크바, 상해,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24개.

16) 국제사업부 글로벌마케팅팀, <국제영화제 참가지원 대상 목록>, 영화진흥위원회, 2014.

A급 영화제(베를린, 베니스, 칸), B급 영화제(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다큐멘터리, 로카르 노, 산세바스찬, 시체스, 카를로비 바리, 안시 애니메이션, 선댄스, 토론토, 핫독, 야마가 타 다큐멘터리) 외 나머지 다수의 C급 영화제들 포함.

17) 옥성수 외, 같은 책,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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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영화제에 대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은 극히 예외적”18)이라고 도 명시하고 있는데, 바로 이 부분 ‘영화제 사업 지원’에 대한 지적 역시 살펴보아야 한다. 이 연구는 다만 칸과 베를린이 프랑스와 독일 정부의 지원을 50% 정도 직접 받는 것이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밝히며, 이외 유럽의 다수 영화제들이 ‘지방정부나 영화산업을 대표하 는 기관이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식으로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고 하는 것’과 ‘미국의 경우는 지방정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 지적들은 조금 오용된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 비교를 통해 정부는 국내의 국제영화제 지원에 대한 지표에 조금 수정을 가 했다. 결과적으로 2007년 국제영화제 육성화 방안 연구가 발간된 이 후부터 국내의 국제영화제 지원에 대한 자세가 확연하게 소극적으로 변화했던 것이 그 증거다. 국제영화제에 대한 정부 지원정책과 상황조 사는 당시 문화관광부의 조사와 2005년 이후 이어진 국내의 국제영화 제 평가 시스템이 토대가 되어줬다. 문화관광부는 2007년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에 대한 문화관광부의 지원이 보다 까 다로와진다”19)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2009년에는 전년에 비해 ‘서 울국제영화제’와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등 2군데가 줄어든 지원목록 이 발표되기도 했다. 당시 고정된 영화제 지원 목록은 지금까지 변함 없이 이어지는 형편이다. 2009년 확정된 지원국제영화제의 목록에는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서울국제 여성영화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총 6개의 영화제들이 속해있었으며, 이들 영화제 목록을 결과적으로 국내의 국 제영화제 열기를 이끈 주요한 영화제들이라 판단할 수 있다.

국제영화제의 집행에 있어 가장 큰 장벽은 예산이다. 2007년 한국 문화관광부의 조사 이후 국제영화제 정책은 실질적으로 예산을 중심 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 옥성수 외, 같은 책, 30쪽.

19) 문석, <국제영화제 정부 지원받기 어려워진다>, 씨네21, 03/0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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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나 미국의 경우를 증거로 국제영화제에 대한 국고보조금의 액 수는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제로 2010년을 기점으로 정 부의 국제영화제의 지원액은 2009년의 42억에서 35억으로, 1년 새 17%

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 차감됐다. 물론 국내 영화계는 반발하였다. 2010 년에만 두 차례 ‘국제영화제의 지원 방향에 대한 토론’이 개최되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3월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 주최 의 토론회가 열린 데에 이어서, 4월에 연달아서 최문순 국회의원실과 공공미디어연구소,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가 공동주최한 ‘영화제 지 원 발전방향’에 관한 토론회가 개최됐다.20) 그렇지만 일단 줄어든 예 산의 비중이 다시 늘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 문화관광부의 조사는 해외의 국제영화제들이 예산 확정을 ‘마켓사업의 확대와 자체 의 펀딩 프로그램, 지역의 문화사업 활동, 관계자들이 중심이 된 모임 기구의 보조, 문화 콘텐츠 사업 등으로 유지되고 있다’21)는 점을 지적 했는데, 현재에는 국내 국제영화제들의 조직위원회 역시 줄어든 예산 의 확보를 위해 위의 지적과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부산 영화제의 경우, 2010년 집행위원장 직에서 물러난 김동호 위원장은 자리에서 물러서며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제가 안정적으로 서 기 위해 지방 자치 단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재단법인화가 되어야 한다”22)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중앙정부의 직접적 지원으로부터 독립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이와 더불어 ‘지금껏 위원장 일인 중심의 의사결정 시스템에서 비롯된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23) 역시 부 산국제영화제의 또 다른 해결과제라 할 수 있다. 즉, 시스템의 내부적 혼란을 잠재우는 것이 외부와의 관계보다 중요하며, 이후 외부와의 관 계 문제가 염려되어야 한다는 지적을 부산국제영화제의 경우에서 살 필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비단 부산국제영화제에만 머무르지 않는

20) 김숙현, <문광부의 영화제 평가, 과연 공정하고 합리적인가>, 프레시안, 09/04/2010.

21) 옥성수 외, 같은 책, 3040쪽.

22) 이창수, <김동호 위원장 “PIFF, 제2의 인생 열어줬다”>, 스타뉴스, 15/10/2010.

23) 전종혁 외, 같은 글,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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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래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사례는 더 중요하다. 현재 부산은 독자 적 행보를 위해 ‘케이블 TV를 인수해 그 채널을 통해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는 아시아의 영화를 1년 내내 방영한다’24)는 등의 계획을 수 립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산에 대한 해결과제는 무수한 영화제들 속에 서 자리를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그리고 국제적 경쟁 속에서 자 신만의 색채를 공고히 다지기 위한 전략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따라 서 2000년대에 급격하게 많아진 국내의 국제영화제들의 향후 행보는, 2007년의 조사를 기점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고 정리할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행방은 오히려 2007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국제영 화제의 활성화에 대한 반증이라 여길 수도 있다.

3. 해외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보인 성과들

국내의 국제영화제 증가와 더불어, 국내 작가들의 해외영화제 진출 상황 역시 상향으로 증가되는 그래프를 그린다. 국내 영화연구에서

‘코리안 뉴웨이브’라는 지칭은 대개 1980년대에서 90년대 중후반까지 새롭게 등장한 사회파 한국영화의 기류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는 데, 지금에 이르러 익숙해진 이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처음에 저널리 즘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1996년 제1회 부산영화제에서 제공된 영문 자료집 <코리안 뉴웨이브(Korean New Wave: Retrospective from 1980 to 1995)>의 발간25)이 계기가 되어 줬던 것이다. 이후 학계에서 ‘코리 안 뉴웨이브’ 는 90년대 중후반까지의 영화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정 착된다. 그렇지만 해외는 다르다. 흔히 해외의 국제영화제에서 ‘코리 안 뉴웨이브 필름’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90년대 후반의 작품들을

24) 김용언, 같은 기사.

25) 김소연, 민족영화론의 변이와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담론의 형성, 󰡔대중서사연구󰡕, 제15호, 대중서사학회, 2007,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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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90년대 이후 국내 학계에서 언급되는 ‘포 스트 코리안 뉴웨이브’와 비견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즉, 포스트 코 리안 뉴웨이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70년대 중반에서 시작해 80년대 로 이어지는 영상시대를 지칭하는 단어인 ‘뉴웨이브’에 관한 논의를 우선 거쳐야 할 것이다.

80년대 충무로 영화작업의 경향이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 영상시 대의 경향은 이후 한국영화계에 역사적 자양분이 된다. 따라서 당시 작품들을 바탕으로 이후의 작품들을 언급할 때에만 ‘예술화’에 가미된

‘새로운 물결 만들기’ 의 운동을 언급할 수 있다.26) 다시 말해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박철수, 신승수, 박광수, 장길수, 장선우, 배용균, 정지 영, 하명중, 이명세, 박종원, 김영빈, 장현수, 박종원, 황규덕, 박재호, 이정국, 김진해, 오병철, 이현승, 여균동, 김홍준, 이민용, 홍상수’27)에 이르는 90년대 초반 한국 영화담론을 주도했던 감독들의 호칭에 대한 논의를 거칠 때에야 그 이후의 세대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다. 이 부분에서 해외의 학자들과 국내의 학계가 조금씩 의견을 달리 한다.

어떤 면에서 ‘코리안 뉴웨이브’란 용어는 다른 대안이 없을 만큼 명 확하게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온 용어 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시점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해외 영화계에서 국내의 영화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해외 언론에서 ‘한국영화의 뉴웨이브(the Korean New Wave)’28) 혹은 ‘한국영화의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du cinéma coréen)’29)라는 용어를 언급하는 기사들이 조명하는 작품 리스트는 국내와 다르다. 미국 ‘빌리지 보이즈’지의 경우, 1998년작인

26) 문관규, 한국영화운동사에서 ‘영상시대’의 등장 배경과 영화사적 의의, 󰡔씨네포럼󰡕, 제14호, 동국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2012, 379쪽.

27) 김소연, 앞의 논문, 294쪽.

28) Michael Atkinson, “Don’t Watch That, Watch This: Odd Man Out Blues”, New York Village Voice, 15/10/2014.

29) Yannick Vely, “La nouvelle vague coréenne”, Parismatch, 12/05/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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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강원도의 힘>을 시작으로, <박하사탕>(1999)과 <공동경비 구역 JSA>(2000), 이창동의 2010년작 <시>에 이르기까지의 영화들을

‘뉴웨이브’라 소개하고 있다. 서유럽 역시 마찬가지다. 프랑스 주간지

‘파리마치’는 김기덕의 2000년작 <섬>에서 시작해서 2002년작 <생활 의 발견>과 <올드보이>(2003), <살인의 추억>(2003), <밀양>(2007)과

<시> 등을 언급하며 ‘누벨바그’란 명칭을 사용한다. 이처럼 국내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물결의 경향과 해외에서 언급되는 새로움의 경향 이 다른 것은 이전 80년대 영화들에 대한 시각차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의 영화학자들은 좀 더 세밀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90 년대의 영화를 ‘르네상스 renaissance’라 진단한 반면에, 해외의 영화학 자들은 1990년대 후반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 서 한국의 작가들이 활약하던 시기를 ‘최초의’ 발견으로 언급하였던 것이다.

프랑스 및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진영에서 한국영화는 주로 영화작 품과 영화감독을 연결하는 ‘작가주의의 관점’에서 흥미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해외의 국제영화제에서 언급되었던 한국작가의 정리가 서로간의 퍼스펙티브 차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프랑스의 경우는 대체로 2000년 이후의 한국영화에 포커스를 맞춰 동양의 영화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작가가 바로 1998년 데뷔작 <강원도의 힘>을 시 작으로 국외에 알려지기 시작한 홍상수 감독이다. 2011년 3월 14일에 서 28일까지,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욕망과 시간(Le désir et le temps)’을 테마로 한 홍상수 회고전(rétrospective Hong Sangsoo à la Cinémathèque française)을 개최했다. 당시 초청된 작품은 <돼지가 우물 에 빠진 날>(1996)과 <극장전>(2005)과 <하하하>(2009), 그리고 <옥희 의 영화>(2010)에 이르기까지 홍상수 필모그라피 전부를 아우르는 총 11편의 영화들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램 디렉터 장 프랑 수아 로제는 홍상수를 가리켜 “한국영화 부흥기를 이끈 인물이며, 로 맨틱한 관계에 대한 절망과 해학의 시선을 보여주는 감독”이란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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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더불어 “리얼리즘에 패러독스를 추가하고, 내러티브에 있어서는 복 잡하고도 미묘한 놀이를 즐기는 감독”30)이란 표현으로 그를 소개한다.

이외 평소 홍상수를 좋아한다고 언급하던 끌레어 드니의 경우는 ‘까 이에 뒤 시네마’의 지면을 빌어, 폴 세잔느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감 각의 신체와 같은 동질성의 감상을 그의 영화가 감추고 있단 점을 통 해31) 프랑스의 5,60년대 누벨바그 영화들의 현대화를 그의 작품들이 이루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홍상수라는 영화작가에 대한 실 질적 언급은 국내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해외에서도 동시에 시작됐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른 감독들 역시 ‘한국영화의 뉴웨이브’

라는 명분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는데, 이들은 모두 해외영화제를 중심 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홍상수와 비슷한 시기에 언급된 다른 작가로는 임권택이 있다. 그 가 국외의 시선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영화 <서편제>(1993) 이후부터다.

이전 그의 작품들은 상하이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아시아의 몇몇 영화 제에 머무는 수준이었지만 <서편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을 비 롯한 유럽등지에 소개되기 시작한다. 그 포문되었던 작품이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던 <춘향뎐>(1999)이다. 포 지티브지의 기자이자 한국영화에 대한 저서 <새로운 한국영화 원천, 서울 시네마>를 출간하기도 했던 아드리앙 공보는 임권택에 대한 노 골적 존경을 전하기도 한다. 공보의 경우, 마찬가지로 당대 한국영화 들을 ‘누벨바그’라는 명칭으로 묶는다. 그리고 2000년 이후 쏟아져 나 온 다양한 국제영화제급의 영화들 사이에 임권택을 넣는다. 그의 저서 에서 임권택 감독은 “군국주의가 가져 온 한국 전통영화의 내력 안에 서 새로운 물결을 시도한 장본인”32)이라 소개된다. 또한 그를 포함해

30) Jean-François Rauger, “LE DÉSIR ET LE TEMPS-RÉTROSPECTIVE HONG SANGSOO”, Communiqué de presse, La Cinémathèque Française, 2011.

31) Claire Denis, “La sainte victoire de Hong Sang-soo”, Cahiers du cinéma no. 597, janvier 2005, p.37.

32) Adrien Gombeaud, Seoul cinéma: les origines du nouveau cinéma coréen, L’Harmattan, 2006,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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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비판의 경향을 가진 다양한 작가들을 공보는 ‘한국의 누벨바그 세대’라 칭한다.33) 다만 그의 호칭이 다른 해외 필자들보다 더 세밀하 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 새로운 물결에 속한 작가 리스트에 공보는

‘장선우, 이광모, 임상수, 김기덕,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등 1990년대 후반 다양한 한국의 영화감독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더불어 당대 한국 영화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서울 시네마’라는 명칭으로 좁히는 시도 를 보이기도 한다.

‘서울 시네마’란 독특한 명칭에는 이유가 있다. 아드리앙 공보는 일 단 서울을 ‘공간’이란 특수성으로 인지했고, 그 공간의 정신이 한국의 영화 속에 담겼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 人間’이란 한자를 예로 들 며, 그는 이 글자가 ‘사람(人)과 공간(間)의 합’을 뜻한단 점,34) 그리고 결국 단어들의 결합이 ‘휴머니티’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리며 한국영화 와 기타 다른 나라들의 영화적 차별점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즉, 동양 의 공간과 시간 속에 포함된 ‘간격’의 의미에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 결이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국 영화의 질적 편차가 다소 큰 상황, “어떤 감독이 훌륭한 데 비해, 어떤 감독들이 나쁜”35) 것 또한 이 새로운 흐름의 경향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다양한 차이들이 서울 이란 공간에 대한 내부의 세밀한 변화를 미시적으로 가리키고 있다고 말이다. 예컨대 영화 <나쁜영화>(1997)나 <노랑머리>(1999), <실제상 황>(2000)이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이 그리는 서울이란 도시 의 황폐함은, 이 시기 완성된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번지 점프를 하다>(2000) 혹은 <아름다운 시절>(1998)이 그리는 노스텔지아와 정서 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36) 한국이 겪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반영하는 장소가 ‘서울’이라는 전제 하에, 공보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하더라도 내면적 의미의 연계가 서울을 여전히 ‘고향’ 삼아서 회귀적

33) Adrien Gombeaud, Ibid, p.14.

34) Adrien Gombeaud, Ibid, p.9.

35) Adrien Gombeaud, Ibid, p.13.

36) Adrien Gombeaud, Ibid,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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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영화에서 돌아오고 있다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환경의 동 물인 영화의 캐릭터들은 어쩔 수 없이 90년대 리얼리즘의 색채를 이 어받아 다른 이들과 연관 지어 살고, 이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이들 캐릭터가 속한 풍경(paysage) 역시 무명의 장소(lieu d’anonymat)로서 그 개념을 포함하게 된다.37) 물론 이때 무명의 장소는 ‘서울’이다. 이 런 맥락에서 공보는 20세기 중반 서울이 급격한 성장으로 규모나 경 제적으로 거대해지고, 따라서 이 공간이 정서의 스케치에 적합하지 않 게 되자 한국영화가 이후 지방으로 눈을 돌린다고 지적한다.38) ‘부산’

이나 ‘강원도’ 등 서울의 대체 공간이 영화에 드러난 예로 그가 드는 영화는 <강원도의 힘>(1998), <친구>(2001), <리베라메>(2000), <나 비>(2003)와 같은 작품들이다. 이들이 지방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 하는 것은, 공보에 따르면 서울이 더 이상 ‘인간적인’ 공간일 수 없다 는 판단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영화의 뉴웨이브가 어느 특정 공간을 두고 언급된 것은 그만큼 이 시기 영화들이 지닌 콘텐츠의 내용이 해 외에서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관심’과 함께 뻗어나간 증거 라 볼 수 있다. 장 프랑수아 로제 역시 ‘르몽드’의 지면을 빌어 홍상 수 영화에서 드러나는 서울이란 공간이 과거 누벨바그의 작가였던 에 릭 로메르의 숨결을 이어받아 ‘현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만 들어내는 “조용한 아침의 공간 서울(Matins calmes à Séoul)”로 작용한 다는 점을 지적한다.39) 이러한 해외 연구자들의 언급들은 한국영화의 뉴웨이브가 보여주는 다이나믹한 작업들이 결국 그 공간이 담은 사회 적이고도 문화적인 상황과 맞물려 장소의 내면적 역사를 표현한다는 방증이 되어준다.

37) Adrien Gombeaud, Ibid, p.62.

38) Adrien Gombeaud, Ibid, p.89

39) Jean-François Rauger, “The Day He Arrives. Matins calmes à Séoul : l’héritier d’Eric Rohmer est coréen”, Le Monde, 15/05/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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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영화 제목 (영문 제목) 감독 주요 초청 영화제

1999

쉬리 (Shiri) 강재규 (1999년 일본 개봉)

여고괴담2 (Memento Mori) 김태용,

민규동

판타스포르토 2001 파리영화제 2001 슬램댄스영화제 2001

2000

춘향뎐 (ChunHyang) 임권택 칸영화제 2000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박찬욱 도빌아시아 2001 씨애틀영화제 2001 박하사탕 (Peppermint Candy) 이창동 칸영화제 2000

카를로비바리 2000

섬 (The Isle) 김기덕

베니스영화제 2000 브뤼셀판타스틱 2001 판타스포르트 2001

2001

수취인불명 (Adresse inconnue) 김기덕 베니스영화제 2001

두사부일체 (My Boss) 윤제균 후쿠오카영화제 2005

엽기적인 그녀 (My Sassy Girl) 곽재용 홍콩필름이워드 2003 판타지아영화제 2003 조폭마누라 (My Wife Is a Gangster) 조진규 뉴질랜드한국영화제 2004

화산고 (Volcano High) 김태균 에든버러영화제 2002

파이란 (Failan) 송해성 도빌아시아 2002

오! 수정 (Virgin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홍상수 도쿄영화제 2000

2002

해안선 (The coast guard) 김기덕 도빌아시아 2004

취화선 (Ivre de femmes et de peinture) 임권택

칸영화제 2002 시카고영화제 2002 세자르 최고외화 2003 2009 로스트메모리즈

(2009: Lost Memories) 이시명 판타스포르트 2003 제라르메영화제 2003

마리이야기 (Mari Iyagi) 이성강 안시애니메이션 2002

오아시스 (Oasis) 베니스영화제 2002

생활의 발견 (Turning Gate) 홍상수 뉴욕영화제 2002 아태영화제 202

2003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Spring Summer Fall Winter and Spring) 김기덕 로카르노영화제 2003 산세바스찬 2003

장화홍련 (A Tale Of Two Sisters) 김지운

브뤼셀판타스틱 2004 판타스포르트 2004 제라르메영화제 2004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Woman Is The Future Of Man) 홍상수 칸영화제 2004

<표 1>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해외 국제영화제 진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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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보이 (Old Boy) 박찬욱

칸영화제 2004 브리티쉬영화제 2004 방콕영화제 2005

동승 (A Little Monk) 주경중 파리영화제 2003

살인의 추억 (Memories of Murder) 봉준호 산세바스찬 2003 도쿄영화제 2003 지구를 지켜라 (Save the Green Planet!) 장준환 모스크바영화제 2003

부에노스아이레스 2004 바람난 가족 (A Good Lawyer’s Wife) 임상수 베니스영화제 2003

도빌아시아 2004

2004

아라한장풍작전 (Arahan) 류승완 도빌아시아 2005

사마리아 (Samaria) 김기덕 베를린영화제 2004

송환 (Rapatriement) 김동원 선댄스영화제 2004

태극기 휘날리며 (TaeGukGi: Brotherhood Of War) 강제규 (2004년 유럽 개봉) 내여자친구를소개합니다 (Windstruck) 곽재용 상해영화제 2004 원더풀 데이즈 (Wonderful Days) 김문생,

박선민 제라르메영화제 2004

페이스 (Face) 유상곤 (2005년 DVD 해외출시)

빈집 (Locataires) 김기덕 베니스영화제 2004

2005

왕의 남자 (Le Roi et le Clown) 이준익 오스카 외국영화 후보 극장전 (Tale Of Cinema) 홍상수 칸영화제 2005

활 (Locataires) 김기덕 베니스영화제 2004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 여자 정혜 (This Charming Girl) 이윤기 도빌아시아 2005 그때 그사람들

(The President’s Last Bang) 임상수 칸 감독주간 2005 달콤한 인생 (A Bittersweet Life) 김지운 칸영화제 2005

도빌아시아 2006

2006 괴물 (The Host) 봉준호

아태영화제 2006 하와이영화제 2006 판타스포르트 2007

2007

밀양 (Secret Sunshine) 이창동 칸영화제 2007 해변의 여인 (Woman on the Beach) 홍상수 토론토영화제 2006

베를린영화제 2007

2008

추격자 (The Chaser) 나홍진 칸영화제 2008

도빌아시아 2009 밤과 낮 (Night and Day) 홍상수 베를린영화제 2008 멋진 하루 (My Dear Enemy) 이윤기 베를린영화제 2009

(20)

워낭소리 (Old Partner) 이충렬 선댄스영화제 2009 핫독다큐 2009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The Good, the Bad, the Weird) 김지운 칸영화제(비경쟁) 2008

2009

잘 알지도 못하면서

(Like You Know It All) 홍상수 칸영화제(비경쟁) 2009 토론토영화제 2009 해운대 (The Last Day) 윤제균 (2009년 중국 미국 개봉)

똥파리 (Breathless) 양익준 로테르담영화제 2009

도빌아시아 2010

박쥐 (Thirst) 박찬욱 칸영화제 2009

뉴질랜드영화제 2009

마더 (Mother) 봉준호 칸 주목할만한시선 2009

토론토영화제 2009

2010

시 (Poetry) 이창동 칸영화제 2010

아태영화제 2010 아저씨 (The Man from Nowhere) 이정범 본스릴러영화제 2011 옥희의 영화 (Oki’s movie) 홍상수 베니스영화제 2010

부당거래 (The Unjust) 류승완 본스릴러영화제 2011

하하하 (Hahaha) 홍상수 칸 주목할만한시선 2010

황해 (The Murderer) 나홍진 칸 주목할만한시선 2011

까따로뉴영화제 2011

하녀 (The Housemaid) 임상수 칸영화제 2010

시카고영화제 2010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영화의 해외 국제영화제 진출 상황(표 1. 참고)을 살펴보면,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를 통해 세계적 스타로 부상한 한국의 작가는 홍상수 외에도 더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김기덕 감독이 있다. 그는 1996년의 <악어>부터 2012년작 <피에타>까지, 1990 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모든 필모그라피를 국제영 화제를 통해 해외에 소개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김기덕의 경우, 해외 의 필진들은 그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고교를 떠난 성장기에 대한 기록과 프랑스에서 1년간 체류했던 기록’과 같은 개인 적 히스토리를 중요하게 언급한다.40) 주로 심리학적 관점에서 영화를 관찰할 때에 필요한 지점들이다. 프랑스에서만 무려 20만 명의 관객

40) StudioCineLive, “Kim Ki-Duk, l’insoumis”, L’express, 05/15/2007

(21)

을 동원한 그의 작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은 임권택 의 <취화선>(2002)과 더불어 한국영화 최고의 스코어를 기록한 작품 으로 기록되는데, 이러한 점들을 통해 볼 때 앞서 언급했던 홍상수나 임권택보다 더욱, 해외의 관객들은 김기덕의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고 예측할 수 있다. 더불어 해외 필진들은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정한 사회에 대한 메시지에도 주목한다. 2004년 도빌아시 아영화제에 <사마리아>(2004)가 초청되었을 당시도 마찬가지다. 김기 덕은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를, “캐릭터들이 전적으로 주변에서 벌어지 는 일들에 의존해 사건을 맞는다는 것, 그리고 특정 사회 현상에 대 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를 완성하였다 면”41)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사회를 겨냥하고 있다고 명확하게 설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을 빠트릴 수 없다. 그의 다양한 경력들, 예를 들어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과거에 소설가로 활동하였던 것, 그리 고 시나리오 작가와 프로듀서 경력, 심지어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것까 지 해외의 다수 필진들은 그의 주요 약력으로 영화와 함께 언급하는 경향을 보인다. 2003년 2월부터 2004년 6월까지 제6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경력이 문학에 조예가 깊은 작가적 성향과 더불어 작품 해석 에 대한 빌미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2005년 프랑스 국립 뤼미에르 영 화학교가 그를 초청한 것에 이어, 2006년에는 프랑스 문화부장관 레 노 돈디유의 허락 하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기도 한 것이 이창동의 독특한 경력으로 소개된다. 이는 공공연하게 그의 작가적 위 상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해외의 필진들은 이 창동의 작품 경향을 가리켜 ‘전형적인 한국식 멜로’를 드러내는 완성 도 높은 ‘비극’이라 소개하는데,42) 이러한 작품의 예로 2007년작 <밀 양>이나 2010년작 <시>가 주로 언급된다.

41) Akatomy, “Kim Ki-Duk”, Sancho does Asia, Festival du film asiatique de Deauville, 23/03/

2006.

42) http://www.20minutes.fr/cinema/589457-20100825-cinema-un-poeme-tres-inspire

(22)

한편, 박찬욱은 대학 시절 분석철학을 공부하며 더불어 영화미학이 아닌 ‘순수 미학’에 관심을 가진 것이 해외 보도자료에서 언급하는 그 의 특이점 중 하나다. 그의 영화는 대표적으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 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현기증>(1958)이 가장 큰 영 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소개된다.43) 2009년 <박쥐>의 개봉 당시 감독 은 직접 해외의 언론에서 이 같은 이야기들을 말한 적이 있다. 이러 한 박찬욱의 경향은 가장 최근의 작품들까지도 이어진다. 심지어 그가 2013년에 미국에서 촬영을 진행한 영화 <스토커>의 경우, 이 작품은 멜로와 미스테리, 그리고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44)라는 명백한 언급 으로 소개되고 있다. 박찬욱은 다른 한국영화 작가들과 다르게 프랑스 를 비롯한 유럽권보다 영어권에서 더 선호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일련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절망에 따른 격노(La rage des désespérés)’

와 ‘시적 야만성(Poétique de la sauvagerie)’, 그리고 ‘피로 물든 판타지 (Fantaisies sanglantes)’의 성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된다.

간혹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16) 등 일부 작품에서 드러나는 ‘막간 극(Entracte)’의 형식 역시 특별한 점이다.

1984년 영화진흥위원회가 설립한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 감독들 중에는 봉준호와 임상수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 먼저 11기 졸 업생인 봉준호의 경우, 이 시기 대표 연출작으로 <살인의 추억>(2003) 과 <괴물>(2006), 그리고 <마더>(2009) 등 3편을 소개할 수 있다. 특 히 그의 세 번째 장편영화 <괴물>은 80년대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났 던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뿜어냈다는 측면에서 가장 주요하 게 언급되는 작품이다. 프랑스 영화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는 이 영 화를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만들어진 가장 주목받을 만한 영화’

전 세계 랭킹 4위에 올려놓기도 했다.45) 이밖에 봉준호는 2008년 완

43) http://twitchfilm.com/2009/07/thirst-bak-jwi-2009interview-with-park-chan-wook.html

44) Eric Neuhoff, “Stoker: l’hommage raté de Park Chan-wook à Hitchcock”, Le Figaro, 30/

04/2013.

45) http://www.cineclubdecaen.com/analyse/listesdesmeilleursfilmsannees2000.htm

(23)

성된 옴니버스 영화 <도쿄!>에서 프랑스의 유명감독 ‘레오 까락스, 미 셸 공드리’와 더불어 소개되었다는 이유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영화아카데미 5기 출신인 임상수 감독은 칸영화제 초청기록이 가장 중요한 프로필로 소개되는 작가다. 아드리안 공보는 <처녀들의 저녁식 사>를 비롯한 그의 초기작들에 도전적(provoquer) 경향이 있다고 언급 하였고,46) <그때 그사람들>(2004)이나 <오래된 정원>(2007), <하녀>

(2010)와 같은 작품들은 영화사적 측면에서 ‘역사를 용기 있게 말한다 는 면이 중요하다’47)고 언급하기도 한다. 주로 박정희와 같은 정치적 인 인물들, 혹은 당시의 역사를 그렸다는 점 자체, 그리고 한국의 초 기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 받는 김기영 감독에 대한 오 마주 등을 행했다는 점이 임상수의 특이점인 셈이다.

한편, 해외 영화제의 한국영화 소개란에서 단연 돋보이는 역할은 도빌아시아영화제의 웹진이 맡는다. 도빌아시아영화제는 국외에서 진 행되는 영화제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한국 작가들을 해외에 소개 한 해외영화제다. 따라서 이 영화제에 초청되었거나, 혹은 회고전이 기획된 작가들 위주로 ‘한국영화의 해외영화제 진출 경향’을 살피는 것도 여러 모로 의미 있는 작업이다.(표 2. 참고) 가장 먼저 도빌아시 아영화제의 최대 수혜자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작가로는 김지운이 있다. 유럽권에서 김지운 감독이 이름을 알린 것은 순전히 도빌아시아영화 제의 공로가 크다. 2006년 도빌은 그를 ‘한국 영화계의 젊은 신동’이 라 일컬으며 <달콤한 인생>(2005)을 필두로 한 필모그라피 전체를 언 급하였는데,48) 당시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작품에서 가장 놀라운 점 은 ‘영화를 바라보는 젊은 작가의 넓은 시야’에 있다. 시각적으로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풀어갈 뿐 아니라, ‘복수’라는 테마에 있어 서는 박찬욱 감독과 비슷한 지점에서 언급되는 ‘다채로운’ 인물이라는

46) Adrien Gombeaud, op. cit, p.29.

47) http://www.lexpress.fr/culture/cinema/the-housemaid-de-im-sang-soo_886070.html

48) Akatomy, “Kim Jee-woon”, Sancho does Asia, Festival du film asiatique de Deauville, 18/

03/2004.

(24)

연도 영화 제목 감독 수상 부문

1999 - - -

2000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명세 대상, 최우수감독상, 남우주연상(박중훈)

2001 공동경비구역JSA 박찬욱 대상, 관객상, 남우주연상(송강호)

2002 파이란 송해성 대상, 최우수감독상, 관객상, 남우주연상(최민

식)

2003 - - -

2004 바람난 가족 임상수 최우수영화상

2005 여자, 정혜 이윤기 심사위원상

아라한 장풍대작전 류승완 작품상

2006 피터팬의 공식 조창호 심사위원상

2007 왕의 남자 이준익 심사위원상

아주 특별한 손님 이윤기 국제비평가상

2008 검은 땅의 소녀와 전수일 심사위원상, 국제비평가상

2009 똥파리 양익준 최우수영화상, 국제비평가상

추격자 나홍진 액션아시아영화상

2010 파주 박찬옥 심사위원상

불꽃처럼 나비처럼 김용균 액션아시아영화상

<표 2> 1999년부터 2010년까지,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수상한 한국 영화들

점을 영화제는 꼬집는다. 도빌아시아영화제 이후 김지운의 작품들은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허진호 역시 도빌아시아영화제를 통해 유럽에 소개된 작가 중 하나 이다. 제8회 영화제의 파노라마 섹션에서 그의 <8월의 크리스마스>

(1998)와 <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등 주요 작품들이 동시에 해외에 소개되었다. 당시의 영화제는 심은하와 한석규라는 한국 스타 들의 열연을 언급하며, 이후의 작품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지적해 보인다.49) 이외 가장 최근 도빌

49) Akatomy, “Hur Jin-ho”, Sancho does Asia, Festival du film asiatique de Deauville, 23/03/

2006.

(25)

이 언급한 작가로 ‘사회적인 소재를 스릴러로 풀어내는 감독’50)인 나 홍진을 들 수 있다. 물론 나홍진의 영화들은 칸영화제 등 주요 영화제 의 경로를 통해 해외에 소개되었기에, 도빌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외에 도빌아시아영화제는 1999년의 신상옥 감독, 2002 년에 다시 신상옥 감독, 그리고 2004년의 김기덕, 2007년의 박찬욱, 2008년의 임권택, 2009년의 이창동과 이윤기, 2011년의 홍상수와 김지 운 감독을 각각 ‘오마주 섹션’에 초청해서 특별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2000년 이후 이어진 한국영화들의 해외 국제영화제에서의 선전은 도빌아시아영화제뿐 아니라 ‘칸영화제 경쟁부문’으로의 진출 역시 훌 륭한 통로 역할을 했다. 도빌아시아영화제가 전문가들이나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는 것과 달리, 칸영화제는 국제적 도약 혹은 명성의 바로미 터로 작용하기 때문에 국내 작가 영화 성장에 큰 몫을 했다. 주요한 사건 몇 가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999년 52회 칸영화제에서 송 일곤 감독의 단편영화 <소풍>(1999)이 단편경쟁부문 심사위원상을 수 상한 이후, 53회에 <춘향뎐>이 한국영화 최초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 고, 2002년 <취화선>이 감독상을 수상한 것이 칸영화제와의 인연이 시작된 지점들이다. 그리고 2004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칸영 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2007년에는 이창동의 <밀양>

을 통해 전도연이 여우주연상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9년 박찬 욱의 <박쥐>가 마침내 심사위원상을, 그리고 이창동의 2010년작 <시>

가 각본상을 수상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수상의 영예를 이어갈 수 있 었다. 이외 홍상수 감독은 <강원도의 힘>과 <다른 나라에서>(2012)에 이르기까지 총 8편을 칸영화제에 진입시키며 한국영화의 국제적 인지 도 향상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장선우 나 이명세, 임권택 등 감독들이 아시아태평양영화제나 모스크바국제영 화제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국내의 해외영화제 진출의 전부였던 것을

50) Kizushii, “Na Hong-jin”, Sancho does Asia, Festival du film asiatique de Deauville, 18/03/

2009.

(26)

감안하면 1999년 이후 해외국제영화에서 한국영화의 선전은 커다란 변화였음이 틀림없다.

4. 영화 분야에서의 한류

한국영화는 상업적으로도 해외의 주목을 받았다. 예를 들어 1998년 제작된 <쉬리>는 2000년 일본에서 정식 개봉해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 기록은 기존 <서편제>(1993)의 일본 내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넘어선 것으로, 한국문화 자체에 대한 인식변화의 흐름과 함께 동반된 성과였다. 이처럼 한국 문화의 커다란 해외에서의 흐름을 ‘한류(韓流)’라 통칭한다. 한류는 한국의 대중문화, 즉 ‘영화, 방송, 대중음악, 패션’ 등 해외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로 일본식 용어이지만 한국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근 한류의 물결을 타고 동아시아 시장에서 한국영화의 위상 또한 높아지는 형편이다. 2010년 이후에는 한류의 부진에 의해 ‘제2의 한류’ 또는 ‘신한류(新韓流)’를 일으키자는 언론기사나 보고서가 다수 눈에 띄는데,51)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는 제1의 한류에는 속하지 못하 지만 ‘신한류를 겨냥한 장르’라 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제 는 여러 모로 위태로운 한국영화의 한류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현재 영화는 상업적 측면에서는 해외에서 명확한 성과를 언급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통상적으로 한류 연구가들은 1997년 중국에서 드라마 <사랑이 뭐길 래>가 시작되는 시기를 ‘한류 1기’라 칭한다.52) 당시의 예술 장르에는 드라마와 음악이 속해 있었을 뿐, 영화는 해당 대상이 아니었다. 이후

51) 변미영, K-POP이 주도하는 신한류, 󰡔KOCCA 포커스󰡕, 통권 31호, 한국콘텐츠진흥원, 2011, 1쪽.

52) 변미영, 위의 논문,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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