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차원적 비판지명학 연구를 위한 과제
주성재*
Towards A Multi-dimensional Critical Toponymic Research
Sungjae Choo*
이 연구는 2016년도 경희대학교 연구년 지원에 의한 결과임.
* 경희대학교 지리학과 교수(Professor, Department of Geography, Kyung Hee University), [email protected].
요약 :지명의 채택과 사용, 그리고 변화에 관여되는 정치성과 권력 관계는 오랜 관심사였다. 그 양상이 각 문화, 언어권, 정치적 단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정리하고 이를 개념화, 범주화하려는 노력은 ‘비판지명학’이라는 이름의 분야가 정착되면서 더욱 확대되어왔다. 이 연구에서는 비판지명학의 등장에 작용했던 배경과 요인을 정 리하고, 이후 이루어진 연구를 이데올로기의 재현과 기념지명의 제정, 경제적 가치 실현을 위한 지명의 상품화 와 자본의 흐름, 문화유산으로서 지명에 관한 비판지명학의 시각 등 핵심주제로 나누어 그 성과를 검토하였다.
이러한 비판지명학 연구의 주제를 공통으로 아우르는 개념의 틀은 ‘다차원적 비판지명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안 된다. 지명 채택과 변화의 동력과 그 과정에 작용하는 가치, 지명 부여의 대상인 장소와 지형물의 성격, 규모 및 장소, 지명을 통한 정체성 표현의 경로, 지명 제안과 채택 과정에 나타나는 의견 표출과 변화, 조정, 결정의 양상, 지명 사용과 전달의 매체 특성과 선택 요인 등이 그 요소를 구성한다. 지명 연구의 범위 설정, 연구방법론의 개발 은 추후 과제로 제안된다.
주요어 : 다차원적 비판지명학, 권력관계, 기념지명 제정, 상품화, 문화유산
Abstract : The political elements and power relations involved in adopting, using and changing geographi- cal names have attracted interests for a long time. The attempts to address how these facets are manifested in each culture, language area and political unit, either similarly or differently, and to make relevant con- ceptualization and categorization have been widely extended as the research field titled ‘critical toponymy’
was formulated. This study summarizes the background and factors which functioned in the emergence of critical toponymy, and reviews research products hereafter in three core subjects; representation of ideolo- gies and commemorative naming; commodification of geographical names intended to realize economic values and flows of capital; and critical perspectives on geographical names as cultural heritage. A conceptual framework commonly accommodating these topics of critical toponymic research is proposed as the title of
‘multi-dimensional critical toponymy.’ This framework is composed of five elements; engines of adopting and changing geographical names and values involved in that process; nature, scale and location of places and features as objects of naming; paths of representing identities through names; expression of views appear- ing in the process of proposing and adopting names, and aspects of changes, coordination and decision; and characteristics of media using and conveying names and the choice of media. Two further items are suggested for future research, including establishing the scope of geographical names and developing research method- ologies.
Key Words : multi-dimensional critical toponymy, power relation, commemorative naming, commodifica- tion, cultural heritage
1. 서론
서울 안암역에서 개운사로 이어지는 개운사길이 한때 ‘인촌로23길’로 불리다가 당초의 이름으로 환원 된 것, 그리고 최근에는 ‘인촌로’가 ‘고려대로’로 바뀌 고 이에 따라 ‘인촌로○길’이 모두 ‘고려대로○길’로 변경된 사실1)은 지명의 제정과 사용, 그리고 변경에 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여러 요소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지명을 붙이는 흔한 방법은 명명의 대상과 관련 있 는 지형물 또는 인물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다(개운 사는 도로의 끝에 있는 사찰, 인촌은 인근 대학 설립 자의 호). 지명 변경의 동기는 여러 측면으로 나타나 는데, 그중의 하나는 행정 시스템의 변화이다(도로명 주소체계의 도입으로 인하여 ‘지선도로’가 된 개운사 길이 ‘간선도로’인 인촌로의 이름을 따라 ‘인촌로23 길’로 변경). 그러나 지명 사용자들에게 기술적, 기계 적인 지명 제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체성 과 공동의 가치와 이념을 담은 지명을 사용하는 것이 며, 이는 강력한 변화의 압력으로 작용한다(일제강점 기 민족주의 사찰이 친일논란이 있는 인물보다 우세 하여 ‘인촌로23길’을 ‘개운사길’로 환원).
피하고 싶어하는 요소를 끌어내리는 역동일시(주 성재, 2018, 35; 김순배, 2012, 69)가 나타나지만(‘인 촌로’를 변경), 새로운 이름의 채택은 더 이상의 논란 을 불식시킬 수 있도록 절충하는 정치성을 발휘한다 (인촌이 설립한 ‘고려대’). 지명 변경의 과정에서 사용 자인 주민뿐 아니라 해당 지방자치단체(여기서는 성 북구)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변화를 주도 하는 주체로서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이것은 지명으로 사용되는 시설의 경제적 가치를 높 이려는 노력과 함께 지명 변경의 과정에서 전반적으 로 나타나는 ‘지명의 상품화’라고 해석된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지 명의 제정과 사용, 그리고 변경에 개입되는 권력 관계 와 정치적 요소, 그리고 경제적 의미를 밝히는 것은 현재 진행되는 지명연구에서 중요한 흐름을 차지한 다. 비판지명학(critical toponymy)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분야의 연구가 기존의 관심과 완전히 차별 화된 형태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지명은 인간의 인식 을 반영한다는 본질적인 특성을 갖는데, 같은 장소나 지형물에 대하여 다른 인식, 다른 정체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지명이 제안, 사용되고 또는 변경의 요청 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명연구 의 고전에서도 이 사실은 중요한 비중의 주목을 받았 다(대표적으로 Kadmon, 1997).
비판지명학의 발전은 2000년대 말 이후 출판된 선 구적 편집서와 리뷰 논문에 의해 큰 전기를 맞았다 (Berg and Vuolteenaho (eds.), 2009; Rose-Red- wood et al., 2010; Rose-Redwood and Alder- man, 2011). 이들은 이전에 이루어진 기념지명 제정,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지명 변화, 지명으로 나타 난 언어경관의 변화 등에 관한 이론적, 경험적 연구를 비판지명학이라는 범주로 묶어 성과를 정리하고 향 후 연구방향을 제시하였다.
이후 10년의 기간 동안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성 과는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고 축적되었다. 앞서 기 대한 대로 “언어로 표현된 지명에 권력 관계가 어 떻게 펼쳐지는지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게 한 (Vuolteenaho and Berg, 2009, 8)” 비판지명학의 관 점은 지극히 평범하고 중립적인, 또는 정치성이 없어 보이는 지명도 불균등한 권력 관계를 전달할 수 있다 는(Rose-Redwood and Alderman, 2011, 3) 호기 심을 유발함으로써 연구의 동기를 풍성하게 확대했 다. 지명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의 재현, 기념지명을 둘 러싼 정치성, 지명 제정과 사용에 있어 나타나는 경 합, 갈등, 분쟁의 문제는 흔히 볼 수 있는 주제가 되었 다. 실무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교량과 터널 과 같은 인공지형물의 명칭을 붙이는 문제에서 이 구 조물이 연결하는 복수의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일어 나는 갈등은 흔히 볼 수 있는 사안이 되었고,2) 이를 이해하고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방안도 관 심을 끌고 있다.
비판지명학의 영역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최근에는 지명이 갖는 경제적 가치에 주목하고 그 가 치를 측정하는 방법, 그 가운데 나타나는 자본의 역 할, 지명권(naming rights)의 문제, 지명을 소유하기
위해 전개되는 사회적 관계와 권력 관계, 그리고 정치 경제적 움직임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Medway and Warnaby, 2014; Light and Young, 2015; 주성재·
김희수, 2015; Karimi, 2016; Rose-Redwood et al., 2018; Medway, et al., 2018). 아울러 유엔지명
전문가그룹(United Nations Group of Experts on Geographical Names, UNGEGN)이 주도한 ‘문화유 산으로서 지명’ 화두는 지명에 녹아 있는 문화적 유 산, 특히 소수민족, 소수언어의 지명에 주목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약자의 지명이 갖는 정체성을 더욱 돋 보이게 하는 중요한 축을 이룬다(Jordan et al.(eds.), 2009; Choo (ed.), 2015).3)
아직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지만, 지명을 이루 는 기본 요소로서 언어의 사용 또한 비판지명학의 중 요한 영역을 구성할 수 있다. 식민지배에서 사용되는 지명 언어의 표기와 발음의 문제, 로마자 표기, 각 언 어에서 사용되는 다른 언어권 지형물에 대한 독특한 형태의 지명인 외래지명(exonym) 등이 중요한 요소 가 된다(Kearns and Berg, 2009; Herman, 2009; 주 성재, 2018, 46-47).
이 연구는 다양한 경로로 발전해온 비판지명학의 연구성과를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검토하고, 각 주제 의 논의를 공통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 항목을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필자 는 이것이 비판지명학의 제 주제를 아우르는 연구의 틀을 설계하는 작업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다차원적 비판지명학(multi-dimensional critical toponymy)’
이라는 이름으로 제안한다.
2. 비판지명학 논의의 발전
1) 비판지명학 분야의 등장
비판지명학이라는 범주를 제안하여 이 분야의 연 구를 처음으로 종합한 편집서 『비판지명학(Criti- cal Toponymies)(Berg and Vuolteenaho (eds.), 2009)』은 훌륭한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편집자들은
이 책의 도입부에서 “뚜렷한 형태로 공간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 정치적 실행”으로서 지명의 문제를 다루 는 논문을 모으려 했다고 밝힌다(Vuolteenaho and Berg, 2009, 1-14). 그 결과로 설정한 것은 다섯 가 지 주제, 즉 ①토착문화를 잠재우기 위한 식민주의하 에서의 지명의 역할, ②도시의 명칭을 통한 민족주의 이상의 부여, ③상업화된 신자유주의 도시경관과 지 명, ④도로명 제정에서 나타나는 정체성과 장소의 갈 등 문제, ⑤탈식민주의 정체성 정립과 지명 복원이었 다. 이 책의 각 장은 뉴질랜드, 하와이, 싱가포르, 아 일랜드, 미국, 핀란드, 노르웨이 등 세계 각 지역의 경 험적 사례를 전달해줌으로써 이러한 주제들이 현실 에 가깝게 다가오도록 하였다.
지명연구를 비판적 관점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주목을 받은 초기 저작은 폴 카터의 저서 『보 타니 만으로 가는 길(The Road to Botany Bay)』
(Carter, 1987)이었다(Vuolteenaho and Berg, 2009;
Rose-Redwood et al., 2010). 영국 출신인 그는 호 주 개척과정에서 펼쳐진 공간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제임스 쿡(James Cook)으로부터 시작한 개척의 역 사에서 지명 부여의 행동이 갖는 의미에 주목한다. 그 는 쿡의 이름 부여 행위가 장소를 ‘문화적 순환(cul- tural circulation)’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이라 보았 고(Carter, 1987, 28), 지명을 구성하는 단어는 ‘공간 적 구두법(spatial punctuation)’의 형태로서 공간을 지식의 대상으로 변환함으로써 탐구하고 읽을 수 있 는 그 무엇으로 만든다고 하였다(Carter, 1987, 67).
Vuolteenaho and Berg(2009, 7)는 카터의 저작을 종합하여, 호주의 ‘빈 땅’으로 여겨졌던 곳(그러나 원 주민이 독특한 삶의 형태를 갖추고 있던, 결코 빈 땅 이 아니었던 곳 - 필자)이 지명 부여의 행동을 통해 독립적인 문화적 상상력을 갖고 “역사를 가진 장소와 공간”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서술함으로써 경관에 나타나는 권력 관계를 민감하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했다고 평가하였다.
Rose-Redwood et al.(2010, 455)은 논문 발표 시 점에서 지명연구가 20년간 공간과 장소에 관한 비판 이론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중 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평가한다. 그 전환은 지
명 제정과 사용의 관례에 나타나는 정치성을 이론화 하는 것으로 발전했고, 비판지명학이라는 지명연구 내의 ‘선별적 계보’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 은 지명의 목록을 만들고 개별 이름의 유래와 의미 를 모으는데 주력했던 초기의 지명연구는, 1980년대 중반부터 도로명을 포함한 도시지명 제정 관례와 기 념지명 제정의 정치성에 대한 비판적 탐문으로 변화 를 맞기 시작하여 1990년대 중반 권력의 연구와 다 시 연결되고, 2000년대 들어와 인종과 젠더가 개입 되고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경관의 생산과 관련된 장 소 이름 탐구의 계보로 이어졌음을 정리하고 있다 (Rose-Redwood et al., 2010, 456-458). 지명의 기 능이 사회적 구분과 지위 창출의 수단으로서 상징적 자본(symbolic capital)에서 경제적 자본(economic capital)으로 전환되어 간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들 은 비판지명학의 영역을 ①기념지명 제정의 정치적 기호학과 문화경제, ②지명 제정과 사용에 있어 공공 의 역할과 통치의 도구로서 지명, ③사회 정의와 상징 적 저항의 수단으로서 지명으로 나누어 연구의 흐름 을 정리하였다.
우리나라 지명연구에서는 비판지명학이라는 용어 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 요소에 대한 관심은 분 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주성재(2011)는 한 국 지리학에서 지명연구의 흐름을 ①지도와 문헌에 수록된 지명의 추출·수집 및 유래와 명명 배경의 유 형화와 변화과정 분석, ②인문, 사회, 자연적 특성이 지명에 반영되어 나타난 사례 분석, ③지명과 사회집 단 간의 관계, 경관 요소, 정치적 의미를 통한 지명 변 화의 해석, ④지명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제도적 기반 을 포함한 지명 관리로 나누어 정리하였는데, 이 중 에서 세 번째 흐름은 비판지명학의 범주에 포함되기 에 마땅하다. 대표적인 사례연구로서 회덕현의 ‘송촌 (宋村),’ 논산의 ‘병사(丙舍),’ ‘유봉(酉峰),’ ‘종학(宗 學)’ 지명의 출현과 관련된 성씨 집단의 역할(권선정, 2004; 권선정, 2008), 공주목 진관 지명의 스케일 상 승과 하강에 나타난 권력 관계(김순배, 2010), 전북 진안군의 지명변화에 나타난 유교적 이념과 영향력 있는 인물의 사회적 영향(조성욱, 2007) 등이 있다.
영미권 비판지명학의 연구 흐름은 김순배(2012)에
의하여 ‘비판적-정치적 지명연구’라는 이름으로 보 고되었으나, 이후 우리나라에서 비판적 관점의 지명 연구는 그리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그나마 지명의 제 정과 변화에 작용하는 정치적 합의의 과정과 사회주 의 이념이 반영된 지명을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게 한 연구로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이슈가 된 통합시 명 칭 결정에 관한 지상현(2012)의 연구, 평양의 도로명 과 지하철역 이름의 목록과 유래를 전달해준 김기혁 (2014)의 연구가 명맥을 이어주었다.
이밖에 지명이 갖는 경제적 가치에 주목하여 지명 을 브랜드로 보고 그 브랜드 가치의 본질과 평가 방 법을 제안한 일련의 이론적, 경험적 연구는(주성재·
김희수, 2015; 김희수, 2016) 지명의 상품화 이슈를 제기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최근에는 근대 이래 서울 의 주소체계 개정이 역사적으로 어떤 틀에 의해 이루 어져 왔는지를 정리한 연구(최유식, 2017)가 비판지 명학이라는 타이틀로 이루어졌으나, 지명 자체에 대 한 비판적 관점의 분석이 부족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 는다.
2010년 전후의 선구적 연구 이후 비판지명학은 다 양한 이론적, 경험적 연구성과를 축적해왔다. 가장 많 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지명이 갖는 이데올로기 재현 의 기능과 이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움직임과 권력 행사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사례연구는 이데올로 기를 대표하는 인물의 이름을 지명으로 사용하는 데 에 작용하는 힘의 논리와 반작용에 집중되었다. 최근 증가하는 지명의 상품화 추세는 단순한 경제적 측면 을 넘어서 자본의 논리에 동반되는 권력의 점유에 대 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소수 언어집단의 지명 을 문화유산으로 보는 관점은 지명 언어의 사용을 둘 러싼 권력 문제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들 세 가지 주제를 대상으로 하여 각 연구성과를 정 리하기로 한다.
2) 이데올로기의 재현과 기념지명 제정
지명은 약속된 기호로서 장소와 지형물을 지칭함 으로써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 즉 ‘표시(de- note)’의 실용적 기능뿐 아니라 파생적으로 형성된
복잡한 ‘함축(connote)’의 상징적 기능을 동시에 수 행한다(Azaryahu, 1996; Eco, 1986). 그 함축은 문 화적 가치, 사회적 규범, 그리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모두 포함하는데, 사상과 이념, 정체성의 함축과 재현 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요소가 드러날 때 갈등이 발 생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 갈등의 과정은 지 명이 집단마다 달리 읽히고 해석되며 다른 사회적 행 위를 유발하는, 더 큰 의미와 담론에 뿌리내리고 있 는 강력한 기호학적 텍스트(semiotic text)이기 때문 에 발생하고 진행해 간다고 해석되기도 한다(Rose- Redwood et al., 2010, 458). 비판지명학의 일차적 관심사는 바로 이념과 정체성의 요구가 어떤 경로로 표출되고 기호학적 텍스트가 어떻게 이해되는가에 주어진다.
체제의 변화는 지명을 부여하고 사용하는 데에 매 우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다. Palonen(2008)은 민주 화를 경험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도로명과 기념시설의 이름을 대상으로 한 사례연구에서, 공산 주의 체제의 지명이 매우 체계적인 재현과 정치적 정 체성 부여의 결과였던 반면에, 탈공산주의 시대에는 국가, 대도시권, 하위 지방정부가 가진 각각의 이념에 따라 다양한 담론을 제시하는 상징적 지명 사용으로 전개되었다고 평가한다. 일제 식민 세력이 우리 민족 에게 그들의 정체성과 영향력을 주입하기 위한 지명 을 사용하게 한 것(김종근, 2010)4)도 체제 변화의 맥 락으로 이해된다.
사회주의 혁명을 찬양하고 그 이념과 체제를 선전 하는 데에 지명을 사용한 사례는 평양의 도로명과 지 하철역 이름에서 잘 드러난다. 김기혁(2014)이 정리 한 바에 의하면, 평양의 거리는 대부분 이러한 목적으 로 이름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은 사회주의 이념(승리거리, 영광거리, 붉은거리, 개선거리, 광복 거리, 봉화거리 등), 인물(금성거리, 문덕거리, 안상택 거리),5) 주변의 지형물(혁신거리, 주체탑거리)6) 등의 방법으로 부여되었다. 대부분의 지명은 지도자의 의 도에 따라 지어진 지명 부여의 스토리가 함께 제공됨 으로써 체제 강화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데올로기를 함축적으로 재현하는 지명을 부여하 는 데 있어 기념지명 제정(commemorative naming)
은 매우 쉽고도 영향력 있는 오래된 관행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기 념의 대상인 인물을 따르는 지명은 역사적 인물을 기 념하고 닮고자 하는 장소 인식과 그 인물을 통해 공 유하는 지역의 정체성이 교차하면서 나타난다(주성 재, 2018, 111). 역사적 사건을 서술함으로써 그 사건 의 정신이나 희생자를 기리는 것도 지명 사용자들에 게 의도된 느낌과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병인박해 때 천주교도들이 목이 잘려 순교 한 사건을 기리는 ‘절두산(切頭山)’ 지명이 사용자들 에게 순교 성지의 정체성을 전달하는 경우가 이에 해 당된다.
기념지명 제정은 공식적인 역사의 담론을 일상생 활로 나타나는 공유된 문화적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는 장점(Rose-Redwood et al., 2010, 459)을 갖는 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장점은 기념지명이 갖는 강력 한 영향력으로 연결되는데, 이것은 인물과 사건이 대 표하는 역사적 상징성과 그 생애와 과정에 대한 기억 이 지명 사용자들이 갖는 공동의 경험으로 체화되면 서 그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동일시(identification) 의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를 대표하는 지도자에게 발생한 사건이 국민의 결속력 을 강력히 이끈 사례는 근대 역사에서 종종 나타난다.
연쇄적 지명 제정의 성향은 한번 정해진 기념지명 의 지속성을 강화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고 려말 선비 이집(李潗) 선생의 호를 따서 정해진 ‘둔촌 동’은 인근의 사거리, 도로, 두 개 지하철역 등의 이름 으로 사용되면서 그 영향력을 확대한다. 지명이 이식 (移植)되어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경우, 원래의 지명 이 변화되더라도 그를 따르는 지명은 그대로 유지되 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소비에트연방 시대에 붙여 진 스탈린그라드(Stalingrad)는 스탈린의 흔적을 제 거하는 과정에서 볼가그라드(Volgagrad)로 환원되었 지만, 스탈린그라드를 이용한 지명,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의 스탈린그라드 가(Stalingrad Avenue)는 여전 히 남아 있다 (Rose-Redwood et al., 2010, 459).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기념지명이 제 정된 이후에는 ‘누구(who)’보다는 ‘어디(where)’가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충무로를
말할 때, 서울 도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로서 그 위치가 중요한 것이지 위대한 명장 이순신의 호를 따 왔다는 것은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있다. 이를 “역사가 지리가 된다(History becomes geography)”라고 표 현한다(Rose-Redwood et al., 2010, 459). 이 길이 일제강점기에는 ‘혼마치(本町)’라 불렸고, 해방 이후 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한국 영화산업과 출 판산업의 중심으로 성장했다는 ‘무엇(what)’이 더해 지면 ‘누구’는 더욱 축소될 수 있다. 이것은 “지리가 스토리텔링이 된다(Geography becomes storytell- ing)”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기념지명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권력 집단에게 매력적 으로 다가간다. 한번 채택이 되면 그 지명에 담긴 인 물과 사건의 정신을 사용자에게 강요할 수 있다. 도 로 표지판을 지배하는 실체로서 사용자의 뇌리에 깊 이 박힐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권력 집단으로 대체될 때 또 다른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시스템과 연동되 면서 기존의 기념지명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변화 와 역사의 담론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Rose- Redwood et al., 2010, 460).
기념지명 제정이 지나칠 때 지명이 갖는 지칭의 실 용적 기능을 손상할 뿐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Azaryahu(2012)가 전해주는 이스 라엘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국무총 리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이 1995년 열린 평 화행진 도중 암살당한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와 화해하고 중동의 평화를 가져온 공로로 노벨평화상 을 받은 그를 기념하는 지명을 제정하는 것은 매우 자 연스러운 과정이었다. Azaryahu가 전하는 바에 의하 면(Azaryahu, 2012, 72), 암살 직후부터 2005년까지 그를 기념하는 공식 지명은 주거지 14곳, 도로, 광장, 다리 36곳, 학교와 교육시설 36곳, 공원 6곳, 병원, 발 전소 각 1곳에 이르렀다.
지명 부여의 대상은 주로 그가 갔던 길과 장소, 그 가 방문했던 학교와 병원, 그가 주도했던 사업 등이었 지만, 그와 거의 무관한 장소도 경쟁적으로 그 이름 을 이용하려 하였다. 심지어 라빈의 평화 정책을 좋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주도하기도 하였고, 이는 국가
적 위기를 모면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읽혔다. 암살로 희생당한 지도자를 기념하는 것은 애국심에 기반을 둔 매우 즉각적인 기호학적 효과와 강력한 상징적 메 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Azaryahu, 2012, 80). 이러한 기념지명 붐은 정치적으로 분할된 국가 를 하나로 묶는 화해의 수단(때로는 죄의식의 치유) 이라는 명목으로 증폭되었지만, 동시에 좌익과 우익 의 투쟁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현장을 보여주기도 하 였다. 기존 이름을 대체하는 경우 갈등을 유발하였고, 지나치게 많은 동일 인물 기념지명은 피로현상을 야 기하였다. 이것은 정치인을 기념하는 지명이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그룹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를 잘 보여준다.
유엔지명전문가그룹은 인물을 기념하는 지명 제정 에 있어 신중을 기할 것을 권고한다. 생존 인물의 이 름 사용을 자제할 것과 인물을 기념하는 지명을 채택 하기 위해 사후 어느 정도의 기간을 유예할 것인지 명 확한 규정을 두라는 것이 기본 내용이다.7) 이 권고에 따라 각국은 인물을 기념하는 지명 표준화의 원칙을 정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지역과 관련된, 주민의 특 별한 반대가 없는 사후 10년 이상이 경과한 인물로 규정하고 있다(국토지리정보원, 2018a, 36).
3) 지명의 경제적 가치를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흐름
최근 비판지명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는 지명의 상품화와 이로부터 발생하는 지명권의 본질 과 형성과정, 그리고 이를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논 리인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연구가 예측했듯이(Rose Rose-Redwood et al., 2010, 466), 지명이 사용가치 (use value)를 뛰어넘는 잠재적 교환가치(exchange value)를 갖는다는 특성을 인정하고 그 본질을 탐구 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Medway and Warnaby, 2014; Light and Young, 2015; Karimi, 2016; Medway et al., 2018; Rose-Redwood et al., 2018). 거래의 대상으로 등장한 도시의 지하철역, 스 포츠시설, 특정 장소의 이름을 차지하기 위한 자본의 흐름과 권력의 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 연구가 함
께 진행되었다.
기존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지명이 하나의 상품 (commodity)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지명의 상품화(toponymic commodification)라는 개념으로 일컫는다. 지명의 상품화는 신자유주의적 도시주의 (neoliberal urbanism)에서 도시 간 경쟁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도시 브랜딩을 통한 마케팅전략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Rose- Redwood et al., 2018, 4). 신자유주의 도시정책의 정신이 ‘지식의 글로벌 순환(McCann, 2011)’을 통해 전달되고, 공공 장소의 지명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 이 점차 많은 도시정부가 고려하는 신자유주의 도시 정책을 실현하는 수단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상품으로서 지명이 갖는 가치에 대한 관심이 증가 하는 배경으로서 주성재·김희수(2015, 434)는 ①독 특한 특성을 가진 장소를 재현하는 지명의 본질과 경 제적 가치 중시와 상품화라는 일반적 추세의 결합, ② 가치 창출의 수단으로서 브랜딩과 이미지메이킹의 개념을 지명에 도입할 가능성 증가, ③지방자치와 지 방경영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지역의 가치 창출에 지 명을 활용하려는 동기의 증대를 들고 있다. 이 연구는 상품으로서 지명의 가치가 어떤 경로로 형성되며 그 측정의 방법은 어떤 요소로써 설정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제안한다.
상품으로서 지명을 바라보는 현실적인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 지명 사용의 권리, 즉 지명권이다. 지 명권은 지명의 소유자가 독자적 권리를 부여받음으 로써 경쟁자는 접근할 수 없는 기대수익을 전유한다 는 점에서 ‘지명지대(naming rent)’라고 할 수도 있 다(Rose Rose-Redwood et al., 2018, 6). 그러나 지 명권 시장은 수요가 제한되어 있고 공급도 적기 때문 에 매우 불완전한 형태로 형성된다는 점이 발견된다.
2016년 시작된 서울 지하철 병기 역명 판매가 유찰되 는 것도 이러한 불완전한 시장의 결과로 볼 수 있다.8) 지명권 거래의 과정과 결과, 그리고 그 의미는 여 러 사례연구가 잘 전달해준다. 그 대상은 지하철 역 명(Rose-Redwood et al., 2018)이나 스포츠 경기장 (Medway, et al., 2018)과 같이 화폐가 이동하는 거 래일 수도 있고, 도로명(Karimi, 2016)이나 일반적인
도시지명(Light and Young, 2015)과 같이 상징성의 거래일 수도 있다. 이들 연구로부터 비판지명학의 시 각에서 주목할만한 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지명권의 판매는 민간기업이 공공의 장소 를 차지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즉 이것은 공적인 영 역이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져가는 과정이며,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Rose- Redwood, 2010, 457; Karimi, 2016, 741). 지명권 을 취득함으로써 기업의 권력이 미치는 영역은 지속 적으로 확대된다.
둘째, 재정후원 기업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비즈 니스의 영역을 초월하여 일반적인 경제적, 정치적 영 향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예를 들어 영국 프리미어리 그 맨체스터시티 구단의 후원기업인 에티하드 항공 사의 이름은 구장의 이름뿐 아니라 주변의 도로나 시 설에 사용됨으로써 전체 도시경관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시의회의 문서와 계획에 폭넓게 인용됨으로 써 행정영역으로까지 확대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 Medway et al.(2018, 4)은 이를 “강탈에 의한 자 본축적의 과정을 상징적, 물질적으로 공고히 하는 특 별한 형태의 지명 제정에 묶여 있는 도시공간의 신자 유주의화”라고 표현한다.
셋째, 지명의 상품화는 그 지명이 사용되는 곳의 지 리적 맥락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 전 쟁에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 원래 지명이 없었 던 곳에 들어온 새로운 지명은 그들의 문화와는 다른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품화가 진행될 소지가 높았다 (Karimi, 2016, 749). 이것은 전쟁, 갈등, 혼란의 사회 가 새로운 세력을 맞이하게 된 상황 때문이었다. 아랍 에미레이트 두바이 지하철 역명와 캐나다 위니펙 스 포츠시설 이름의 상업화를 비교했을 때, 두바이가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글로벌 스케일에서 노출된 곳 이라는 특성 때문이었다는 해석(Rose-Redwood et al., 2018, 18-19)도 이러한 지리적 맥락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넷째, 지명의 상품화 흐름은 지명 사용자인 주민에 게 환영받지 못할 수 있으며,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더 큰 가치에 의하여 반발심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캐나다 위니펙의 경우, 상품화된 새로운 지명은 원래
의 지명에 담겨 있는 진정한 서비스, 희생, 성취, 그 리고 이에 감사하는 주민들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악 영향을 발생시키고 상징적 가치를 싸구려로 만든다 는 주민들의 반론에 직면하였다(Rose-Redwood et al., 2018, 19). 스포츠 구장의 경우, 지역과의 밀착이 강한 팀일수록 새 이름에 대한 반발과 함께 옛 이름에 대한 밀착감이 큰 것으로 나타난다(Medway et al., 2018).
다섯째, 지명 상품화의 실질적인 효과는 아직 충분 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인물을 기념하는 지명이 한번 채택되면 그 인물이 누군지의 문제보다 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지가 더 중요해지는 것과 마 찬가지로, 기업이나 상품을 인용한 지명도 어디에 있 다는 것에만 주목하고 무슨 기업의 어떤 브랜드인지 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피상적인 인식에만 머물 가 능성이 있다. 두바이 주민에 대한 조사에서도 새롭게 도입된 지하철 역명은 일상생활과 크게 관계없는 무 관심의 대상이었음이 나타난다(Rose-Redwood et al., 2018). 지명에 사용된 기업의 명성에 변화가 있을 때, 그 지명은 오히려 악효과의 동기가 될 수 있으며, 그 이름을 가진 역이나, 이름을 허용한 기관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지명 상품화의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그 분석의 방 법론이 충분히 정립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는 각 장소 또는 지형물의 이름이 어느 정도의 주목을 받는지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지명이 대중에게 노출되어 알려 지는 것이 지명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의 문제(주성재·김희수, 2015, 438), 그리 고 지명을 통해 특정 기업이나 브랜드가 알려지는 것 이 어느 정도의 홍보효과를 나타나는지의 문제가 모 두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표기의 방법뿐 아니라 다른 지칭의 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 예를 들어 지하철 내에서의 방송, 문서나 지도에서의 인용, 일상대화에서 사용되는 장소의 지칭 등이 어떻게 차 별화된 효과를 나타내는지도 관심사이다.
지명의 경제적 가치와 관련하여 함께 사용되는 용 어가 지명의 상업화(commercialization)이다. ‘상품 화’가 자본주의 체제에서 지명이 거래의 대상이 되는 추세를 표현한다고 한다면, ‘상업화’는 지명이 상품이
되는 동기와 과정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용어인 것으 로 보인다(Choo, 2018). 유엔지명전문가그룹은 상 업적 목적을 추구하는 지명의 제정(지명의 상업화)을 자제할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9) 우리나라 지명 표준 화 원칙에서도 상업화의 동기에서 비롯된 지명은 원 칙적으로 배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국토지리정보 원, 2018a, 33).
4) 지명 언어의 사용과 문화유산으로서 지명에 대한 비판지명학의 시각
유엔지명전문가그룹은 각국이 지명을 공식화하는 과정인 표준화(standardization)에서 고려해야 할 원 칙과 그 원칙을 적용한 경험을 국가 간에 공유하는 것 을 존립 목적으로 한다(주성재, 2011). 그러나 표준 화 논의는 필연적으로 정체성을 재현하는 지명의 본 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주제가 지명을 문화유산으로 보는 관점과 다른 언어권의 지 명 사용에서 나타나는 외래지명의 본질과 관련된 것 이다. 이 두 가지 주제는 세계 각 민족과 언어권의 지 명이 내포하고 있는, 과거부터 유지해온 문화적 요소 와 관례를 존중한다는 기본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 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 존중의 반대편에는 있는 힘은 소수집단의 지명을 지배하려는 권력 집단의 주도권 과 경제적 논리이다.
문화유산으로서 지명을 존중하자는 시각은 정치 적, 경제적 동기에서 이루어지는 지명 부여의 시도와 종종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양쪽의 힘 겨루기는 한 편에 정치적 권위와 상징적 지배를 공고 히 하는 수단으로 채택되는 지명(Karimi, 2016)이, 반 대편에 전설, 설화, 문화의 역사와 정체성, 언어적 변 천, 그리고 체화된 삶의 방식을 재현하는 지명(Choo, 2015)이 있는 구도로 형성된다. 한 편에는 지명이 하 나의 상품으로서 브랜드 가치를 생산하는 기능이 (Medway and Warnaby, 2014), 다른 한 편에는 공 공장소의 이름이 가져야 할 사회적 포용성(소수민족, 여성, 약자를 포함한)을 가진 경관 창출의 기능(Rose -Redwood et al, 2018, 20)이 있다.
문화유산으로서 지명을 보존하는 것이 인류 보편
의 가치에 부합한다는 점이 인정되면서, 이와 관련된 논의와 사업을 주도함으로써 학술적, 정책적 영역을 선점하려는 추세가 나타나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 다. 유엔지명회의에서 각국이 소수민족 또는 원주민 지명 조사의 결과와 보존 정책의 성과를 보고하는 것 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핀란드, 뉴질랜드, 호주, 중국, 이란, 라트비아, 노르웨이, 스 웨덴 등이다.
한편으로는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는 지명을 평가 하는 기준을 설정하는 연구도 그 주도권 영역 확보 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유엔지명회의는 2012년 결 의 X/3을 채택하여 그 기준으로 지명의 역사, 회복력, 지명 또는 지명 현상의 희소성, 지명의 증거 능력, 호 소력, 상상력의 여섯 가지를 제안하였다. 이것은 앞 서 주성재(2011, 459)가 제안했던 역사성, 지역주민 과 밀착된 유래, 지역 정체성과의 연관, 지역주민의 선호, 결속력 집결에의 역할, 체계적인 기록의 여부 등과 보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Choo(2015, 154-155)는 인류 보편가치에 부합되고 사회에 활력 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긍정적인 성격의 지명, 그리고 지역주민이 합의하는 정체성을 보유한 지명으로서 위치와 규모가 지칭의 대상과 지명에 내포된 정체성 과 부합될 것, 소멸 가능성이 있는 지명은 특별히 고 려할 것을 추가하였다.
문화유산으로서 지명에 대한 관심의 출발점이 소 수 언어권의 지명을 보호하는 것에 집중했던 것인 만 큼, 지명 언어의 사용은 지명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 에 중요한 요소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와이에 서 원주민들이 지향하고 있던 ‘영적 생태계(spiritual ecology)’를 대변하는, 그들의 언어로 된 지명이 정 복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다시 회복된 사례(Herman, 2009, 108)는 다른 어떤 언어로 대체될 수 없는 원주 민 언어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언어는 원 래의 발음이 유지되어야 수용성이 높아진다(Kearns and Berg, 2009). 지명으로 사용된 언어는 그 형태와 사용의 관례, 그리고 각 요소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특정 장소, 대상의 형태와 종류의 개별성 을 알려주는 기능을 갖는다(Vuolteenaho and Berg, 2009, 8).
지형물이 위치한 곳의 언어로 된 지명과 다른 형태 로 사용되는 지명인 외래지명은 정복, 교류, 문화 확 산의 역사를 보여주기 때문에(주성재, 2018, 143), 그 사용이 때로는 국가 간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코트 디부아르(Cote d’Ivoire)가 영어로 된 국가명 아이보 리코스트(Ivory Coast)가 아닌 프랑스어로 된 이름을 사용해 달라고 국제적으로 요청한 사례, 몽골이 1990 년 우리나라와 수교할 때 중국이 “우매하고(蒙) 고리 타분하다(古)”는 뜻으로 비하해 부르던 국명의 한국 어 발음 ‘몽고’를 쓰지 말라고 요청한 사례는 갈등으 로 발전할 수도 있는 언어사용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
조지아(Georgia)가 러시아와의 갈등 때문에 러시아 어 ‘그루지야’에서 국가명을 바꾼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주성재, 2018, 125-126, 137). 유엔 지명전문가그룹은 국제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외 래지명의 사용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10)
외래지명의 발음과 로마자표기 문제도 언어권 간 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한자를 공유하는 한국, 일 본, 중국 사이에서 상대편의 지명을 어떻게 읽고 표기 하느냐에 따라 외래지명이 만들어지는 문제(예를 들 어 도쿄를 ‘동경’으로, 베이징을 ‘북경’으로 표기)에 대 해서는 선행연구가 정리한 바 있으나(Choo, 2014),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로마자 표기에서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된 ‘경성(京城)’을 일본식으로 ‘게이조’
라 읽어 ‘Keijo’ 또는 ‘Keizo’로 표기한 것은 소통의 문 제뿐 아니라 정체성 침해의 문제로도 연결된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지명 데이터는 아직도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11)
이밖에 다언어지역에서 어떤 언어의 지명을 채택 하는가는 언어집단 간 힘겨루기의 결과로서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따르게 되고, 때로는 갈등으로 발전하 는 경우도 간혹 보고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 명 언어 사용에 관한 비판적 시각은 아직은 불모지로 서 추후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3. 다차원적 비판지명학의 구성요소 설계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비판지명학 분야는 지속 적으로 확대되면서 연구의 범위와 깊이를 심화시켜 왔다. 그 연구성과를 살펴보면 각 주제를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관심 항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동력 또는 사건이 지명 채택과 변화의 계기 로 작용하며, 그 과정에 작용한 가치는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 어떤 성격과 규모의 장소 또는 지형 물을 대상으로 하는가?
•지명을 통한 정체성 표현의 경로는 무엇인가?
•지명의 채택과 변화, 조정과 결정은 어떤 양상으 로 전개되는가?
•지명 사용과 전달의 매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 가?
여기서는 이들 항목을 하나씩 발전시켜보고자 한 다. 이것은 ‘다차원적 비판지명학’이라 제안되는 분야 의 구성요소를 설계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1) 지명 채택과 변화의 동력과 가치
지명 채택과 변화의 동력은 기본적으로 공공의 장 소 또는 지역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지배와 권력의 실행이다(Rose-Redwood, 2008a; 2008b; Berg and Vuolteenaho (eds.), 2009; Azaryahu, 2012). 그 실 행이 글로벌 스케일로 나타나는 것이 식민지배로 인 한 변화와 탈식민주의로 인한 이전 정체성으로의 회 복이다. 문명의 발전과 전파라는 흐름에 의해 땅을 정 복한 권력 집단은 이름을 붙이면서 그들의 지배력을 확대해나간다. 제국주의 국가의 지명이 이식되며 그 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인물의 이름이 사용된다.
식민지배로 인한 지명의 부여는 과거 ‘지리적 발 견’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정복의 역사로 시작되었 지만, 2003년 이라크 침공 후 미국이 실행했던 것처 럼 현대에도 나타난다. 공항, 미군 주둔기지, 도로 등
에 미국식 지명이 이식되면서 바그다드의 지명 경관 은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Rose Rose- Redwood et al., 2010). 이것은 기존에 존재했던 사 담 후세인의 유산을 모두 없애려는 의도였으나, 개명 을 찬성하는 반 후세인의 시아파와 반대하는 친 후세 인의 수니파 간 내부적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그 러나 결과적으로는 도로와 주요 랜드마크의 개명이 장소의 사회적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평가된 다(Rose Rose-Redwood et al., 2010, 454).
국가 간 또는 국가 내의 혁명과 전쟁으로 인한 새 로운 이념의 도입, 전환, 확대는 또 다른 중요한 변화 의 동력이다. 쿠데타나 혁명으로 인한 외부 세력의 점 령은 지명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사용하는 계기가 된다. 지명 변경은 정치적 권위와 상징적 지배를 공 고히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며, 국가 만들기(nation- building)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채택된다(Karimi, 2016, 740). 공산화 이후 나타나는 ‘지명 청소(top- onymic cleansing)’(Rose-Redwood et al., 2010, 460)가 대대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일 제강점기인 1914년 겪었던 지명 변화와 같이 대대적 인 행정구역의 개편과 함께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인류 보편가치의 실현은 지명 사용에 있어 중요한 가치로 작용한다. 이것은 권력 집단에 의해 지명이 변 화되고 때로는 왜곡되는 것을 방지하는 가치로 주장 되고 실행된다. 지명 사용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고유한 지명을 사용하는 것을 중요한 인권 보장의 수 단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소수민족이나 소수 언 어집단의 지명을 배려하고 보존하는 것, 사회적 약자 를 폄하하지 않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된다. 지명 사용 에 갈등이 있는 경우에는, 해당 장소나 지형물 인근에 있는 사용자들의 인식과 정체성을 모두 반영하고 평 화와 정의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표기 방법을 추구하 는 것(주성재, 2018, 171)을 의미한다.
사회정의의 실현은 절차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의 측면 모두에서 지명의 제정과 사용이 가져야 할 중요 한 가치로 지적된다(Rose-Redwood et al., 2010, 465). 지명 채택과 사용의 과정에서 각 정체성을 모두 존중하는 것, 예를 들어 소수민족과 소수 언어집단이
사용하는 문화유산으로서 지명을 보존하는 것이 절 차적 정의에 해당한다면, 각 도시, 마을, 도로, 다리, 학교의 명칭에 약자나 소수집단의 정체성을 담아 적 절한 맥락의 장소에 지정하는 것은 배분적 정의의 문 제이다. 마틴루터킹 주니어 기념지명 제정이나 동해 수역에 ‘동해’를 ‘일본해’와 병기하자는 제안은 각각 흑인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사회정의를 실 현하는 문제로 발전해왔다(Alderman, 2000; Stolt- man, 2017).
세계화 시대에 국가 간, 지역 간 경쟁 구도에서 경 제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도 지명의 변화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장소마케팅의 수 단으로서 장소의 가치를 증대시키는 데에 지명을 활 용하는 것, 지명 사용의 권리를 취득하여 기업의 이 름이나 상품 브랜드를 장소 또는 지형물의 명칭에 도 입하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일반적으로 발 견되는 추세이며 향후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명망, 구분, 기념 등과 연관된 합법적 요소로 서 상징적 자본을,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재정 자산으로서 경제적 자본으로 변형시키는 과정(Rose Rose-Redwood et al., 2018, 4)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동참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동기가 작용하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도로명에 링컨이나 괴테 같은 세계적인 인물의 이름이나 ‘표현의 자유’나 ‘민주주 의’ 같은 가치를 표현하는 문구를 도입했던 것은 외부 의 투자자나 후원자들에게 그 사회가 민주적, 진보적, 범세계적(cosmopolitan)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보 여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된다(Karimi, 2016).
위에서 언급한 지명변화의 동력과 가치는 서로 연 결되어, 때로는 상반된 방향으로 작용한다. 2001 년 아프간 전쟁의 결과로 미국 세력이 들어온 이후 의 지명 제정 또는 변경의 과정은 민족주의를 약화시 키려는 외부 세력의 전략으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 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지도자들에 의해 상품으로 변 화하였고 심지어는 뇌물로 사용하는 사례도 나타났 다. 2014년 아프간의 대통령으로 새롭게 당선된 가니 (Ghani)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카불국제공항을 이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카르자이(Karzai) 국제공항 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된다(Karimi, 2016, 745). 탈레반 이후 지명은 상징적 자본과 정치 적 위상을 축적하는 자원으로 변화했지만, 한편으로 는 도시의 공공 공간을 이념의 충돌이 발생하는 장소 로 바꾸었다. 미국 도시의 마틴루터킹 주니어 기념지 명 제정에서 한계 인종집단이 지명을 백인의 문화적 지배에 대한 상징적 저항(symbolic resistance)의 수 단으로 사용하려 하지만, 이 시도는 자산의 시장가치 를 올리려고 하는 부동산 개발업자의 이해에 의해 제 약을 받는다는 사실(Alderman, 2008)은 지명 변화의 동력이 때로는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지명 부여의 대상으로서 장소와 지형물의 성 격, 위치, 지리적 스케일
지명에 관한 갈등과 분쟁은 이름을 갖는 모든 장 소와 지형물에서 발생 가능하다. 인간의 인식에 기 초하여 이름을 부여하는 대상은 산, 강, 호수, 바다 와 같은 자연 지형물로부터 행정구역과 인간 거주공 간, 지속적으로 건설되는 인공 구조물 등을 모두 망 라하기 때문이다. 자연 지형물 중에서, 산 이름 분쟁 으로는 북아메리카 최고봉 ‘디날리(Denali) 산’과 ‘맥 킨리(McKinley) 산’ 분쟁, 우리나라 인제군과 양양군 을 경계하고 있는 ‘한계령’과 ‘오색령’ 분쟁, 호수 이 름으로는 충청북도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에 접해있 는 ‘충주호’와 ‘청풍호’ 분쟁, 바다 이름으로는 ‘동해’와
‘일본해’ 분쟁,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만’ 분쟁이 대 표적이다. 이 중에서 바다 이름 분쟁을 제외하고는 모 두 하나의 국가 내에서 발생하는 분쟁이다.
그러나 자연지명을 사례로 하는 비판적 시각의 연 구는 드물다. 그동안 이루어진 연구는 대부분 도로 와 지하철역, 스포츠시설 등 도시경관을 구성하는 지 형물이나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를 대상으로 하고 있 다. 초기 편집서에서도 사례를 다룬 12편의 논문 중 에서 도로명을 다룬 것이 3편, 인간 거주 장소를 대상 으로 한 것이 6편, 기타 도시지명 2편, 사이버공간 관 련 1편으로 집계된다(Berg and Vuolteenaho (eds.), 2009).
도시경관을 구성하는 도시 각 장소와 시설의 이름 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그 이름이 갖는 영향력으로 설명된다. 지명 부여의 행위를 통해 정치, 경제, 문화 의 엘리트들이 장소의 공간 정체성을 부와 권력의 형 상으로 재구성하고 도시공간을 전유하게 된다는 것 이다(Rose-Redwood et al., 2018, 3). 이것은 쉽게 접하는 접근성 높은 일상의 공간에 의미와 가치를 부 여하는 일이며, 그 자체로서 도시의 문화경관을 형 성한다. 그 대상은 도로, 광장, 역, 교량 등 공공 성격 을 갖는 도시 인프라가 다수를 차지한다. 소유권이 분명한 건물, 스포츠시설, 아파트, 농장, 식당 등 사 적 영역의 도시시설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지만, 지명 권이 소유자에게 있다는 시각이 우세한 상황에서 이 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심도 깊 은 논의가 필요하다. 이들에 대하여 ‘도시지명(urban toponymy)’이라는 별도의 유형으로 구분하자는 논 의가 있다(주성재, 2018, 228).
도시 인프라나 시설에 지명을 부여할 때, 그 대상 이 차지하는 위치와 지명이 대표하는 정체성이 갖 는 관계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기념지명 제정에는 “장소에 대한 지명 부여(naming places)”와 더불어 “이름을 어디에 부여하는가(plac- ing names)”도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Azaryahu, 2012, 74). 공통적으로 강한 권력을 대표하는 지명이 접근성이 좋고 노출이 잘 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토론토 도로명의 경우, 원주 민 국가와 관련된 명칭은 수가 적을 뿐 아니라 그 위 치도 한적한 도로에 국한되는 반면, 제국주의 흔적을 반영하는 이름은 시내 주요 도로를 차지하고 있음이 나타난다(Casagranda, 2013, 297-300). 마틴루터킹 주니어 도로명도 주로 부동산 가치가 낮은 도시 외곽 의 도로에 사용된다(Alderman, 2000).
위치의 문제는 지리적 경계의 문제로 연결된다. 예 를 들어 미국 버지니아에서 한 상원의원을 기념하는 지명을 어떤 경계를 가진 대상에 붙일 것인가의 문제 가 대두된 적이 있다(Hagen, 2011). 그의 정책에 직 접적 혜택을 본 지역의 경계를 고려할 것인가, 아니 면 세금 지출의 결과로 혜택을 본 지역에 붙일 것인가 가 논쟁의 주제였다. 이것은 기념의 위상과 희소성의
문제와도 관련 있다. 2014년 전라남도 신안과 무안을 잇는 다리에 ‘김대중대교’라는 이름이 제안되었을 때, 전 대통령의 출신지역으로서의 적절성은 인정되었으 나 민주화에 기여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위상을 고려할 때 보다 큰 경계를 갖는 장소나 지형물을 위해 남겨두자는 유보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12) 이스라엘 의 전 총리 라빈(Rabin)의 이름이 과다하게 기념지명 으로 채택되어 대표성을 잃게 된 것에 대한 부정적 평 가(Azaryahu, 2012)는 기념의 빈도 또는 희소성 문 제를 그 위상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시사점을 준다.
지명의 위치적 위상과 경계의 문제는 지명의 정체성 이 지향하는 장소성의 문제와 연결하여 더 깊은 논의 가 필요하다.
지명의 위치는 그 정체성의 대상에 따라 구별되어 거래의 기능을 충족하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카불 의 경우, 각 민족 거주지역에 그 민족을 대표하는 인 물이나 문화를 대변하여 부여된 지명은 그곳이 누구 의 영역인지 명확하게 알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였고, 따라서 각 민족에게는 그들의 몫을 부여하는 거래의 기능을 충족하였다(Karimi, 2016, 745). 이것은 지명 이 거래의 대상이 되는 상품화와의 과정과 연결된다.
지명 표지판이 의도치 않게 철거되는 것은 상품의 도 난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에 대응하여 더 크고 뚜 렷한 디자인의 표지판을 가시성이 높은 위치에 설치 하는 것은 새롭고 업그레이드된 상품을 내놓은 것으 로 볼 수 있다.
기존에 존재하는 지명이나 인명을 새로운 지명에 사용할 때, 양쪽의 지리적 스케일을 어떻게 적합화 할 것인지가 또 하나의 이슈를 제기한다. 지명의 상 품화 과정 또는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시도에서 어디에 있는, 어떤 크기의 스케일로 사용되는 기업명 또는 인명을 가져오는지가 문제가 된다. Medway et al.(2018)은 글로벌 수준의 항공사 이름(에티하드)을 로컬에 기반을 둔 축구팀(맨체스터시티)의 경기장 이 름으로 채택한 것이 사용자들의 불편함과 낯섬, 불만 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스케일의 갈등(scalar tension)’이라 일컬었다. 로컬의 지역공 동체는 지역팀과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관계이고 경기 당일에 이루어지는 일상에는 각각의 공간 및 이
름과 맞물려 있는 장소 밀착이 존재하는데, 그 이름이 바뀌는 것은 맥락적 불일치(contextual mismatch)를 가중시키는 상당한 충격으로 작용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명 부여의 글로벌-로컬 문제는 유연 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 다. 우선 두 규모의 지명은 상호보완적으로 사용된 다. 헝가리 사례를 보면 인근의 쇼핑몰 이름을 따온 로컬 형태의 도로명도 발견되지만, 점차 글로벌 브 랜드를 사용하는 명칭(예를 들어 Mercedes Street, Nokia Street, Samsung Square)이 증가함이 발견된 다(Light and Young, 2015, 442). 또한 각국 프로팀 의 팬 구성에서 보듯이 소비자는 이미 글로벌 수준에 서 형성되고 있다. 로컬 팬보다 오히려 글로벌 공간에 서의 팬, 또는 관광객 팬이 더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 다(Medway et al., 2018).
정치적 힘에 의한 지명의 부여와 지명의 상품화 와 관련된 글로벌-로컬 스케일의 유연한 관점에 대 해서는 향후 다양한 정치, 사회, 경제의 맥락에서 이 론적, 경험적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여기에 는 로컬을 더 넓은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입 포인 트로서 보면서 규모를 밑에서부터 보아야 한다는 관 점(Marston et al., 2005, 419), Cox(1998, 3)가 말한 의존의 공간(space of dependence)과 참여의 공간 (space of engagement)의 구분을 이용하여 전자는 로컬화된 사회적 관계를 대변하는 국지적 이름을 선 호하는 사용자들의 갈망, 후자는 국제적 장식과 포장 을 지향하는 글로벌 맥락의 지명 사용 지향성으로 보 는 관점(Medway et al., 2018, 5) 등을 모두 포함할 수 있다. “지명 경관에 있어 규모와 규모 간 상호작용 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사회-경제적, 사회- 정치적 과정의 측면으로 이해해야 한다 Medway et al., 2018, 16)”는 주장은 이러한 연구의 전개에 유용
한 시각을 제공한다.
3) 지명을 통한 정체성 표현의 경로
지명의 제정, 사용, 변경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권 력 관계와 정치적 요소는 인물을 기념하는 지명에서
많이 발견되며, 비판지명학의 사례도 여기에 집중해 있다. 지명 부여자 또는 사용자의 정체성을 표현할 때, 다른 선택이 없는 경우 그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 물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쉽고도 합리적인 방법이 기 때문이다. 인물을 이용한 기념지명은 특정 지명(또 는 인물)에 대한 지지와 반대의 두 가지 방향으로 진 행된다. 흑인 인권 보호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마 틴루터킹 주니어 도로명, 평화주의의 실현을 대표하 는 이스라엘 전 총리 라빈의 이름을 딴 각종 도시지 명은 이를 지지하는 주민 또는 이해집단에 의해 주도 되었다. 그러나 기존 지명을 이 이름으로 변경하는 과 정에서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Alderman, 2000;
Azaryuhu, 2012).
인물에 대한 새로운 평가, 또는 합의되지 않았던 인물 관련 논란의 재등장은 기존 이름에 대한 반대 와 개명 요구로 나타난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흑 인 노예 또는 인종 차별과 관련된 인물이 주를 이룬 다. 노예제도를 주장했던 미국 남부의 지도자 리 장군 (Rober E. Lee)의 이름을 딴 학교명(Tucker, 2019), 흑인 노예 소유자 맥레이(Hugh MacRae)의 이름을 이용한 공원 이름(Thornton, 2019), 노예운영 가구 자비스(Jarvis) 가의 이름으로 지어진 도로명(Smith, 2018), 기타 인종차별주의자의 이름이 사용된 도로명 (Rose-Redwood et al., 2010, 464) 등이 대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친일과 독재 또는 반민주주의가 주요한 반대의 담론으로 등장한다. 도입에서 사례를 들었던 ‘인촌로’는 친일 논란으로 결국 사라지게 되었 고, 경기도 성남시에 건설 예정인 ‘우남역’은 독재 논 란(‘우남’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호)으로 강한 반대 에 직면해 있다. 우남역 명칭은 기존에 존재했던 도로 명을 다시 살린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우남이 지나 간 길에서 유래하여 ‘우남로’로 불리다가 현재는 ‘헌 릉로’로 사용)(주성재, 2018, 111-112), 그 역사성이 반대의 담론을 이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서울의 여의 도광장이 ‘516광장’에서 명칭이 바뀐 것도 같은 배경 이다.
인물 이름을 사용하는 데에는 찬성과 반대의 논리 가 집단적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캐나다 토 론토의 도로명 Jarvis Street에 대한 반대는 “흑인의
삶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했지만, 반대편에서는 “모든 삶은 중요하다(All lives matter)”라는 논리로 대응하였다. 이러한 논쟁 은 인물 이름을 사용할 때 그 인물의 무엇을 고려해 야 하는지, 즉 좋은 측면만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 른 측면도 인정할 수 있는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는 점을 지적한다. 유엔지명전문가그룹이 인명을 이 용한 지명은 충분한 유예기간(waiting period)을 두 라고 권고하고 있지만,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해 결해주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 를 보는 것은 역사적, 정치적으로 지명을 무기력하게 만들 소지가 있기(Smith, 2018, 114) 때문이다.
인물명 사용에서 나타나는 찬성과 반대의 논리와 그 전개 양상을 조사하는 것은 흥미로운 사례연구 를 구성할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기념(commemo- ration)’의 본질과 기념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맥락 (Schwartz, 1982)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기념의 대 상이 세대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개 인이냐 집단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분쟁 의 소지가 다분히 존재한다.
이념을 재현하는 지명은 주로 강력한 통치와 지배 의 시스템이 구축된 사회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지명학의 관심은 체제 변화 이후 발생한 지 명의 변화(Palonen, 2008)와 그 과정에 개입된 정치 적 요소 또는 상품화의 흐름에 국한되어 있다. 굳건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평양의 지명은 혁명 의 수단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보여주는 스토리텔링 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김기혁, 2014;
주성재, 2018, 161). 공산주의 체제에서 지명은 사회 주의 혁명의 도구이자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수 단으로서 그 지명을 사용하는 주민들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엄격한 규율을 중요하게 여기는 상황에서 지명에 그 규율과 가치를 나타내는 요소를 포함함으로써 의미를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주성재, 2018, 35). 유교 강목을 대표하는 인(仁), 의(義), 예 (禮), 지(智), 신(信), 충(忠)은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 되는 대표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들어 간 지명에 대한 갈등이나 분쟁 또는 그 기저에 작용하
는 권력의 문제를 다룬 연구는 많지 않다. 현재 지명 에 포함된 이념의 요소들은 이미 오랜 기간 검증되어 사용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념과 관련된 권력 관 계에 대한 관심은 유교적 전통에 기반한 성씨 집단을 나타내는 지명 채택(권선정, 2004; 2008), 더 큰 스케 일의 대상을 지향하는 지명 위상 확보(김순배, 2010) 등의 연구로 이어졌다. 최근 종교집단 간 지명 갈등의 요소가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학술적 관심도 가능하리라 본다. 서울 지하철 봉은사역 명칭, 예산수 덕사 나들목 명칭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장소나 지형물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역사와 유래, 지역 주민의 인식 등이 경합하여 발생하는 지명 갈 등과 대안으로부터의 선택과 해결 과정에 관한 연구 는 또 다른 영역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행정 구역 개편에 따른 경합지명의 등장과 결정 과정에 작 용한 정치적 결정에 관한 연구(지상현, 2012)는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연구는 지방자치단체 행정구역 경 계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자연지형(산, 호수)이나 인 공 구조물(교량, 터널)로 영역을 확대할 수 있으리라 본다.
지방자치단체 간 지명분쟁은 갈등조정의 주제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 간 갈등조정은 누가 주 도해야 하며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상위 조직과 전문가의 역할은 무엇인지, 지역 의견을 종합하는 거 버넌스 구조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등이 핵심 관심 사이다. 현재 우리나라 지명 표준화의 원칙에는 주민 과 전문가의 의견을 균형 있게 고려하여 지명을 제안 할 것이며, 복수의 지자체에 걸치는 지형물의 이름은 합의에 의해 결정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국토지리정 보원, 2018a, 26-37).
4) 지명의 채택과 변화의 양상
지명이 제안되고 채택되어 사용되기까지 진행되는 의견의 표출과 변화의 양상, 그리고 조정과 결정의 과 정은 비판지명학에서 별도로 주목하여 다룰 주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여기에는 복수의 지명이 제안되어 발생하는 갈등과 기존에 존재하는 지명을 대체하려 는 움직임이 모두 포함된다.
소외되고 혜택을 받지 못했던 집단이 그들의 정체 성을 표현하는 지명을 제안하는 것을 상징적 저항의 관점으로 보는 시각(Reuben Rose-Redwood et al., 2010, 462-464)은 흥미롭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 이 공유하는 감정과 생각이 담긴 지명이 다른 권력 집 단이 지배하고 있는 체제에 저항하는 충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은 지명이 가진 힘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동기를 제공한다. 지명을 통한 상징적 저항은 백인의 문화적 지배에 대한 유색 인종의 반응뿐 아니라, 남성 (masculine) 지배 사회에 대하여 여성(feminine)의 요소를 포함하려는 균형 추구의 움직임, 원주민의 문 화가 반영된 지명의 채택 또는 적어도 비하의 요소가 담긴 지명 요소의 제거, 소수민족과 소수 언어권 지명 의 재생 등으로도 나타난다. 마틴루터킹 주니어 기념 지명 제정 사례에서 보듯이 상징적 저항에 대한 기득 권 집단의 반발이 어떤 경로로 나타나는지 분석하는 것도 의미 있다.
지명에 대한 다른 생각이 발전해가는 과정이 경 합, 갈등, 분쟁의 단계를 거친다는 모델(Choo et al., 2014; 주성재, 2018, 184-185)은 변화의 양상을 이 해하는 데에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하나의 지형물 이 두 개 이상의 지명으로 지칭되는 경합(contest)의 단계는 단일 지명을 채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각 집 단의 이해를 반영하는 지명으로 공식화하려는 시도 로 인해 갈등(conflict)으로 발전하고, 이후 대립의 행
동으로 가시화되어 외부에 표출되는 분쟁(dispute)에 까지 이른다(그림 1).
그러나 현실에서는 경합과 갈등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강력한 분쟁으로 진입한 사례가 종종 발견 된다. 특히 국가 간 지명 분쟁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 것은 초기에 우위를 점하는 권력 집단의 정체성을 반 영하는 지명이 보편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의 지명이 그 역사성과 상관없이 이후에 알려져 대립의 구도를 만들기 때문이다(주성 재, 2018, 186). 따라서 이 모델은 국가 내, 국가 간 스케일로 차별화하여 복수의 경로를 설정하는 것으 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지방자치단체 간에 발생하는 지명 분쟁 사례의 목 록을 만들고 유형화한 연구보고서는 유용한 자료를 제공한다(국토지리정보원, 2018b, 66-81). 이 보고 서는 2000년 이후 발생한 175건의 지명 분쟁 사례를 대상으로, 분쟁지명의 대안, 분쟁의 대상, 주체, 주요 내용을 정리한 목록집을 제작하고 그 유형을 네 가지 로 구분하였다. 명명의 대상이 두 지자체 사이에 또는 걸쳐서 위치하는 경우 발생하는 경계형, 대상물이 하 나의 지자체에 속하지만 행정지명과 다른 지명을 일 치시키려는 시도에서 발생하는 행정구역 연동형, 장 소를 대표하는 의미를 둘러싸고 이견이 대립하는 장 소 의미형, 그리고 장소가 상표권과 밀접하게 연관되 어 발생하는 지명권형이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추후
(a) 경합 (b) 갈등 (C) 분쟁
그림 1. 지명 분쟁의 발전 단계 모델 출처: Choo et al., 2014; 주성재, 2018, 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