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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로널드 레이건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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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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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81.1~1989.1)은 국무회의 도중 코를 골면서 잠을 잔 대통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그는 최근에 들어 와 부동의 인기 1위인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다음으로 인기가 치솟고 있다.

그가 ‘미국 국민 모두가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나라 미국’을 만들었고, ‘세계 사람들 모두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1)

그런데 미국은 ‘잘못된 금융제도에다 이에 대한 관리 잘못’으로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일으켜 세계경제를 하루아침에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미 국은 또 2011년 8월 막대한 재정적자로 디폴트 상태에 몰리게 되자 빚내서 빚갚기 로 하고 가까스로 디폴트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신용등급 강등으로 이번에는 세계 주식시장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타임지는 표지에서 이를 “The Great American Downgrade”라고 표현했다.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 미국이 방만한 재정운용, 민주당 주도의 복지정책 확대, 정 치적 포퓰리즘이 바탕이 된 확대 재정정책 등으로 인해 국위가 추락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 미국에 로널드 레이건은 없는가?

레이건의 삶 - 스포츠 해설가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먼저 레이건의 삶을 정리한다. 레이건은 1911년 2월 6일 일리노이주 탐피코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리노이주의 한 라디오 방 송국 스포츠 해설가로 취직했다. 그는 경기장에서 실제로 경기를 보는 것처럼 분위 기를 살려 방송하는 바람에 인기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영화배우가 되었다. 그는 영화 “사랑은 방송 중”을 시작으로 1964년 배우생활을 마칠 때까지 53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진 레이건은 영화배우조합 회장으로 일하면서 일류 배 우들이 수입의 80% 이상을 세금으로 빼앗기는 것을 보고 분개했고, 조합원들의 단 체교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조합내 공산주의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1) 김형곤, 『로널드 레이건 가장 미국적인 대통령』, 살림, 2007.

한국에 로널드 레이건은 없는가?

박동운 단국대 명예교수ㆍ경제학

201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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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20년 이상 루스벨트를 선전하고 다녔고, 루스벨트가 4선을 하는 데도 일 조했다. 그는 1948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트루먼을 지지했고, 1950년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 닉슨의 반대편에 섰다. 그 후 그는 제너럴일렉트릭 대 변인으로 일하면서 진보성향의 민주당을 버리고 전통적 가치관을 수호하는 보수성 향의 공화당으로 돌아섰다.

레이건은 1962년 공화당원으로 등록하여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을 지지했다. 그는 1964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 설을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커져만 가는 미국 정부의 규모와 간섭을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또 미국인과 미국기업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줄여 미국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했다. 나아가 제국주의적 공산주의는 반드시 해체 되어야 하고, 자신이 그 일을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 연설 덕분에 레이건은 하루 아침에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1966년 정치 신인인 레이건은 3선 경력의 민주당 에드먼트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도전하여 압승을 거둔 후 주지사에 연임되었다. 이어 대통령에 도전했 지만 닉슨과 포드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1980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레 이건은 보통 사람들이 은퇴 생활을 하는 70세의 나이에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도전 했다. 권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16년 전 자신이 국민에게 약속한 정책을 실천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현직 대통령 지미 카터를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40대 대통령 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모두 지켰다.

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많은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되어(69년 349일) 가 장 오래 살다가(93년 119일) 2004년 6월 5일 알츠하이머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은 정부를 만들고자 했던 레이건의 경제철학,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레이건은 1981년 1월 21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미국이 당면한 문제를 다음과 같 이 진단했다. - “정부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정부 자체가 문제 입니다.”

뉴딜정책 이후 존슨 정부의 ‘풍요한 사회(Affluent Society)’를 거쳐 팽창일로를 걸어온 거대한 미국정부가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레이건의 진단이었다. 의존하는 국민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국가는 더 많은 예 산을 쓰게 되고, 늘어난 예산을 맞추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되어 궁극적으 로 거대한 정부가 개인의 자유와 기업 활동을 방해한다고 레이건은 믿었다. 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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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정부는 거대한 재정적자를 낳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뿐만 아니라 늘어난 통 화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와 물가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그는 믿었다. 결국 거대한 미 국정부는 미국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그는 믿은 것이다.

레이건은 거대한 미국정부를 작은 정부로 만들려고 했다. 그는 간섭보다는 자유, 집단보다는 개인, 분배보다는 성장, 의존보다는 자치를 강조했다. 레이건은 이것이 바로 미국과 미국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라고 믿었다. 그는 미국이 이 길을 가 게 되면 미국 국민 모두의 자유가 보장되고, 미국이 또다시 번영하는 나라가 되리 라고 확신했다. 이러한 미국이 바로 레이건이 제시한 비전이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81년 2월 18일 상하원 합 동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첫째, 1982년도 연방예산 414억 달러 삭감을 요구했는데, 삭감의 주 대상은 뉴딜 정책과 민주당 정부가 추진했던 ‘풍요한 사회’ 건설로 인해 지나치게 확대된 사회복 지 프로그램이었다.

둘째, 소득세를 3년 동안 해마다 10%씩 삭감하여 모두 30%를 삭감하고, 기업에 투자공제와 감가상각비용을 허용하여 투자 활성화를 요구했다.

셋째, 기업이윤을 축소시키고 경제성장을 둔화시키는 각종 정부규제를 완화하거 나 철폐하여 기업 활동 활성화를 요구했다.

넷째,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금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통화공급 증가 완화를 요 구했다.

레이건은 자신이 제시한 이와 같은 경제개혁 프로그램 ― 정부지출 삭감, 감세, 규제 완화ㆍ철폐, 통화 긴축 ― 을 ‘미국의 새로운 시작: 경기회복을 위한 프로그램’

이라고 불렀다. 이 같은 경제철학은 곧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는 말로 불 리게 되었다. (이를 본 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도 ‘노믹스’ 시리즈를 내놓았 다.) 레이건의 경제정책은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확실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 만 세계평화 구축을 위한 국방비 지출 증가가 예산적자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동서냉전을 종식시켜 세계 평화를 실현한 레이건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1979.5~1990.11)은 2002년에 출간된 저서 『국가경 영(Statecraft)』의 표지 다음 쪽에서 이렇게 썼다. - “이 책을 로널드 레이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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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친다. 세계는 그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이는 레이건 대통령이 냉전을 종식시켜 세계를 핵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낸 것에 대한 감사를 나타낸 말이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도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정치 세계에 뛰어들면서부터 레이건은 공산주의는 없어져야 할 세력이라고 믿었 다. 대통령이 된 후 레이건은 1979년 12월에 벌어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강하게 비판한 후 아프가니스탄을 원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이 ‘악의 제국을 유 지하는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려는 정책을 면밀히 검토했다. 그는 공산주의 세력 을 꺾기 위해 유럽에 중성자 핵무기를 설치했다. 레이건이 취한 핵심조치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전략방어계획(SDI: Strategic Defence Initiative; 날아오는 적의 미 사일을 우주공간에서 낚아채는 방어시스템 구축)으로 알려진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 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명칭은 공상과학영화 가운데 하나인 스타워즈(Star Wars)에 서 따 온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소련의 장군들과 지도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미국 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결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련 지도자들의 분노와 불안이 폭발 했지만 소련 지도부는 분명히 변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레이건의 구상대로 그들 은 미국과의 경쟁을 포기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레이건은 처음에는 소련과의 정상 회담을 거절하다가 곧 능숙한 외교관으로 변신하여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 프와 만났다. 이 회담은 공산주의 붕괴의 서막으로 입증되었다. 레이건이 1987년 베를린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이 장벽을 허물어 버리시오(Tear down this wall)” 하 고 놀랄만한 요구를 했을 때 사람들은 이를 공허한 희망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 렇지 않았다.

목표를 향한 레이건의 전략은 적중했다. 동서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드디 어 1990년 10월 3일 무너졌고, 이어 자유세계의 적인 소련도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결과 마거릿 대처가 쓴 대로, 세계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어 로널드 레 이건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세계가 작은 정부를 만들고자 노력하게 된 것은 레이건의 기여

작은 정부 실현을 위해서는 재정지출과 조세를 삭감해야 한다. 레이건은 대통령 에 취임하자마자 그렇게 했다. 그 결과를 미국의 정부규모(GDP)에 대한 일반정부 총지출 비율 변화가 보여준다.

미국의 정부규모는 1978년 30.0%로 일본과 함께 OECD 국가 가운데서 가장 작 았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아일랜드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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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정부를 유지해 왔다. 미국의 정부규모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36.8%, 2010년 42.2%로 증가했지만 30여 년 동안 사실상 35% 안팎을 유지했다.

이는 1981년에 정권을 잡은 레이건 대통령의 작은 정부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가져 온 결과다. 앞선 정부가 작은 정부 실현에 성공했는데 뒤에 오는 정부가 이를 깨뜨 리기란 쉽지 않는 법이다. 관련된 예로 마거릿 대처가 1979년 정권을 잡고 영국을 시장경제로 살려내자 뒤이어 뉴질랜드가 1984년에, 아일랜드가 1987년에, 독일이 2000년대 초에, 스웨덴이 2007년에, 프랑스가 2007년에 시장경제를 표방하고 나선 것 등을 들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OECD 국가들의 정부규모 변화를 보자. 세계경제가 호황에 접어 든 1992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 전 해인 2007년까지의 16년을 대상으로 한다.

1992년 정부규모 OECD 평균치는 42.4%였는데 2007년에는 39.9%로 2.5%포인트 감소했다. 같은 기간 OECD 30개국 가운데 정부규모가 증가한 나라는 한국을 비롯 하여 일본,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스위스 다섯 나라뿐이고, 한국 외에는 증가폭이 작다. 나머지 25개국은 정부규모가 모두 감소했다. 특히 세계에서 정부규모가 가장 큰 나라 스웨덴은 1992년 69.4%에서 2007년 51.4%로 15년 동안 무려 18.0%포 인트 감소했다.

이 같은 추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세계는 그동안 작은 정부를 만들고자 경쟁적 으로 노력해 왔다. 이는 분명히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의 기여다.

방만한 재정운용을 한 미국, 복지천국을 만들려는 한국, 이 시대의 레이건이 필요

지금 레이건은 죽고 없지만 그의 영향력은 미국과 미국인의 마음에 뚜렷이 남아 있다. 레이건이 살아 있을 때인 1998년 미국 사람들은 워싱턴국립공항을 레이건 워 싱턴국립공항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1년 미 해군은 새로 진수한 항공모함의 이름 을 ‘USS 로널드 레이건 호’로 명명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에 이와 같은 영광을 준 것은 해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걸쳐 많은 연방 빌딩이 레이건과 레이건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레이건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1년 유럽에서는 여러 나라가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을 전후해 기념행사를 열어 레이건의 업적을 기렸다.

헝가리 의회는 레이건을 추모하기 위해 2011년 6월 28일 특별회의를 열어 다음날 수도 부다페스트의 미국 대사관 앞 자유의 광장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체코는 수 도 프라하에서 6월 30일 미 대사관 앞거리를 ‘로널드 레이건 거리’로 개명하는 행 사를 벌였다. 영국은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맞춰 런던 그로브너 광장에서 레 이건의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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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은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디폴트 직전에서 가까스로 기사회생 한 상태다. 그러한 미국은 세계 주식시장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은 지 금 로널드 레이건이 필요하다. 미국에 로널드 레이건은 없는가?

물론 정치가들이 앞장서서 복지천국을 만들려는 한국도 로날드 레이건이 필요하 다. 그래서 묻는다. - ‘한국에 로널드 레이건은 없는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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