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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 年 8月 碩士學位論文

朝鮮時代 版畵, 板刻 硏究

- 서책목판화를 중심으로 -

朝鮮大學校 大學院

純粹美術學科

文 仁 貞

(2)

朝鮮時代 版畵, 板刻 硏究

-서책목판화를 중심으로-

A Study on Woodcuts and Engraving Skills in the Joseon Dynasty

2005년 8月 日

朝鮮大學校 大學院

純粹美術學科

文 仁 貞

(3)

朝鮮時代 版畵, 板刻 硏究

指導敎授 金 益 摸

이 論文을 美術學 碩士 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5年 4月 日

朝鮮大學校 大學院

純粹美術學科

文 仁 貞

(4)

文仁貞 의 碩士學位論文을 認准함

委員長 朝鮮大學校 敎授 인 委 員 朝鮮大學校 敎授 인 委 員 朝鮮大學校 敎授 인

2005年 5月 日

朝鮮大學校 大學院

(5)

目 次

[ ABSTRACT]

제 1 장. 서 론 --- 1

제1절.연구의 목적 ---1

제2절.연구 방법 및 범위 ---2

제 2장. 조선시대 이전의 판화 --- 4

제1절.선사시대 --- 6

제2절.삼국시대 --- 7

제3절.고려시대 --- 10

제 3장. 조선시대의 목판화 --- 14

제1절.조선시대의 목판화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 14

제2절.조선시대 서책목판화의 분류 ---18

제3절.조선시대의 전통목판화 기법 ---19

제 4장. 조선시대 목판화에 나타난 조형성분석 ---26

제1절.조선시대의 전적판화 --- 26

제2절 전적판화에 나타나는 조형미 --- 34

제 5장. 결 론 ---37

참 고 문 헌 --- 40

도 판 --- 42

(6)

도 판 목 차

圖 1.금강반야밀경,27c m × 18c m,순황석굴사원에서 발굴,1907년.

圖 2. 백만탑다리니경,일본,771년.

圖 3.성크리스토포스,목판채색화.

圖 4. 성모,1418년 간행.

圖 5.유키요에 풍속화.

圖 6.반구대 암각화,선사시대.

圖 7.양전동 암각화,선사시대.

圖 8.천전리 암각화,선사시대.

圖 9.금동명문판탑지,23. 5c m × 22. 5c m,황용사 9층목탑내 발견,872년.

圖 10.금제금강판,14. 8c m × 13. 7c m,익산군 왕궁리 오층석탑내 발견.

圖 11.어제비장전,27c m × 18c m,성암고서 박물관 소장,고려현종2년.

圖 12.팔만대장경,吳國鎭( 중요무형 문화재) 복원,1296년~1251년.

圖 13.무구정광대다라니,경주불국사석가탑2층 탑신부에서 발견,신라경덕왕10년, 세계최초의 목판인쇄물.

圖 14. 보협인다라니경,7. 8c m × 240c m,이화균장,1007년.

圖 15.화엄경.

圖 16.고려보탑,고려,1320년.

圖 17.십육관경도,20c m × 15c m,1453년.

圖 18.묘법연화경,9. 1c m × 28. 8c m,보물 제 918호,개인소장.

圖 19.법화경,1463년.

圖 20.석씨원류,27c m × 17c m,1673년.

圖 21.능판화.

圖 22.금박판.

圖 23.동물판.

圖 24.부적.

24-1.첩을 떼내는 부적.

(7)

24-2.호랑이,60c m × 45c m.

圖 25.시전판.

圖 26.일월판.

圖 27.떡살.

圖 28.속삼강행실도.

圖 29.동국신속삼강행실도.

圖 30.이륜행실도.

圖 31.삼강행실도.

31-1.왕상부빙,26. 5c m × 16. 5c m.

31-2.안처구사,세종 초간본.

31-3.충신도,26. 5c m × 16. 5c m.

31-4.효제도,26. 5c m × 16. 5c m,1434년.

圖 32.오륜행실도.

32-1.왕상부빙.

32-2.처백포호,22cm × 14c m,정리자본,정조20년,1797년.

32-3.제상충렬.

32-4.주운소란.

圖 33.부모은중경.

圖 34.불설대목련경.

34-1.살충지옥도,19. 5cm × 14c m,원본은 소실됨,개인소장,1539년.

34-2.18cm × 14c m,1520년.

圖 35.점에 의한 표현.

圖 36.선에 의한 표현.

圖 37.공간처리를 위한 표현.

圖 38.인물에 대한표현.

圖 39.동물에 대한 표현.

(8)

ABSTRACT

A Study on Woodcuts and Engraving Skills in the Joseon Dynasty

Moon, In-Joung

Advisor : Prof. Kim, Ik-Mo Department of Art Education,

Graduate School of Chosun University.

Woodcuts in the Goryo Dynasty demonstrated elaborate and high-spirited styles mainly through Buddhist scriptures. This tradition developedwell into the Joseon Dynasty in diverse art forms. This study examines historical changes and implied meanings, and the engraving skills and beauty in the expression of woodcuts in the Joseon Dynasty. Furthermore, the characteristics of drawings in woodcuts and the other features mentioned above will be explained with displays of specific woodcut works. Futhermore, these characteristicsand features will be analyzed and classified.

Woodcuts in the Goryo Dynasty influenced those in the Joseon

Dynasty in terms of their realistic and delicate expressions, which

(9)

developed into more sophisticated forms by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Lines became thicker and details were omitted, signs that can be regarded as a retreat from the technical aspect. However, from the modernistic perspective, the controlled expression in touches is rather praised for their amplifying effect of the beauty of engraving.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he expressionistic and realistic trends were presented in more complicated forms. As a result, the combination of these trends were placed as a main trend, along with the perspective, and considered to be a major cause of a new transformation in Korea's art history.

These features were all demonstrated in "Haengsildo" -- a book on basic manners of Confucius society -- where illustrations were added to facilitate readers'understanding of the message. Woodcuts were generally developed as a supplement. Woodcuts in this period were mainly used for Buddhist scriptures or for the delivery of Confuciusteachings, but later they came to contain various subjects of lay people other than proper manners and moral teachings, and this diversification of themes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woodcuts in the Joseon Dynasty.

Woodcuts in the Joseon Dynasty were produced to satisfy individual needs and uses, and became popular among the grass roots unlike those of the Goryo Dynasty when they had been largely manufactured for patriotic purposes on a large scale.

Two main characteristics defined woodcuts in the Joseon Dynasty,

unlike the Goryo Dynasty, they were not produced as an individual piece for

artistic appreciation, instead manufacturedin a series for the purpose of

illustrations for books, which showed that the uses of woodcuts changed

along with the advances of society. Woodcuts were also mainly produced for

(10)

illustrations to help readers learn the text easily. These illustrations were later used as a teaching tool to help lead lay people to enlightenment in Buddhism.

Recently, as more attention is paid to woodcuts in the Joseon Dynasty, furtherstudy is being conducted. As a result, the transformation in concepts of the beauty expressed in woodcuts has been studiedand identified.

In this process, our perception of woodcuts has received new meanings and

the extent of our understanding is widening. Accordingly, it is important to

treat the woodcuts in the Joseon Dynasty as an individual artistic genre. In

that light, this study generally illuminates the history of Korean

traditional woodcuts, and the artistic expressions and engraving skills

expressed in them.

(11)

제 1장. 서 론

제1절.연구 목적

인류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발명해 낸 인쇄술은 인류 문명사에 있어서 중대한 발명중의 하나로 인류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왔다.이 러한 인쇄술의 발달은 우리나라의 경우 종교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 히 고려시대의 불교와 조선시대의 유교의 성행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판화는 인쇄술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동기에 비롯하여 사회적,정신적,문화 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 속에 이루어 졌음을 인지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인쇄술은 종교의 전파와 이에 따른 경전의 보급수단으로 시작되고 경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판화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또한 판화는 경전 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도울 뿐만 아니라 문맹자들에게 경전의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나타나게 되었다.이처럼 인쇄술은 정보전달의 수단 으로 많은 발전을 했으며 판화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인쇄술의 발달은 도서의 대량생산과 유통이 가능하게 되어 정보사회와 매체 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그리하여 현대사회는 매체와 수단에 따라 신문,잡 지,도서 등 누구나 손쉽게 접근 할 수 있었고,정보의 원활과 유통을 가능하였다.

이러한 기술적인 발달은 대중사회를 형성시키고 매스미디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었다.

이처럼 판화의 발전은 문명사회의 변화로 경제성,편리성에 힘입어 독자적 매체로서 널리 이용되어 대중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갈 수 있는 장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는 판화작품들의 국제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여 대학에 전공학 과 설립과 함께 국제전,개인전,단체전 등 판화전이 빈번하게 열리고 판화에 대한 인 식이 세계적인 판화의 추세 속에 하나의 예술로써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나라의 고판화에 대한 인식은 고미술의 회화,조소, 건축,공예의 영역에 견주어 볼 때 가장 미흡하고 외면되어 왔다.간단히 말해 전통 목

(12)

판화에 대한 자료와 연구가 많이 소장되어있지만 창작적인 판화가 아닌 인쇄 문화 발 달사 속에서 부수적인 역할에 한정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흐름 속에 현대판화는 앞으로 더욱 발전 할 수 있기에 독립된 장 르로서 가치를 부여 받을 수 있는지 또한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지니고 있 는지 인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우리나라 목판 인쇄술의 형성과 전개되어가는 배경을 살펴보았 다.그리고 종교에서부터 민예적인 것까지 다양한 유형 중에 조선시대 목판화의 대부 부을 차지하는 불교판화와 유교판화를 중심으로 대표적인 삽화본을 골라 판각미,표현 미 등 기법적인 양식변화에 의한 표현방법을 시대적인 상황아래 도판과 함께 살피는데 중심을 두었다.이렇게 본고가 조선시대 서책 목판화를 중심으로 범위를 한정한 까닭 은 조선시대에 서민들의 실생활에 밀접하게 응용되는 판화가 많이 제작된 시기이며, 목판화에서 나타나는 차분함과 기교를 부리지 않는 섬세함,그리고 투박하게 사물을 형성화한 것에서 오히려 현대적 감각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앞서 밝혔듯이 한국정통목판화의 흐름을 살펴봄으로 우리문화 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역사 속에 나타난 훌륭한 표현 세계를 연구할 가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제2절.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 방법은 참고한 목판화의 대부분은 한국정신문화원에 소장된 목판화,청주고 인쇄 박물관에 전시된 자료,그리고 참고문헌을 통해 미비한 점을 보안하고자한다.

연구와 조사 대상의 범위는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 서책목판을 중심으로 판화의 역사 적 흐름과 양식의 변천 및 표현미를 도판과 함께 5개의 장르로 구성하여 정리 분석하 였다.

먼저 1장은 서론 부분으로 연구 목적 및 방법과 범위를 제시하였으며,제2장은 목판 화의 역사적인 배경을 선사시대,삼국시대,고려시대로 구분하여 인쇄기술사와 관련지

(13)

어 불교,유교등 종교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풀어보았다.제3장은 조선시대의 목판화 중심으로 사회적,문화적 배경에서 나타난 목판화의 양식적 관계를 분류하였다.그리고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전통 목판화의 기법을 살펴보았다.제4장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삽화본을 골라 목판화의 기능 및 판각에 의한 조형미를 살펴보았다.마지막 5장 결론 부분에서는 본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를 정리하여 조선시대 서책 목판화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우리 역사 속에 목판화가 갖는 문화적 정신적인 표현세계를 이 해하는데 의의를 두고자 하였다.

(14)

제 2장.조선시대 이전의 판화

문명사에서 인쇄의 발달은 사상의 진보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까지도 지속 되고 있다.인쇄술과 판화가 인쇄 과정에서 “찍는다”는 개념이 판화의 개념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만큼 인쇄술의 발달은 곧,판화의 발달로도 볼 수 있다.

동양에서 유교,불교,도교의 사상 체계가 동양 문화의 정신적 배경으로 작용하며 불 교문화의 중심으로 인쇄술이 발달하고,서양에서도 역시 종교적인 차원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된다.

최초 인쇄는 볼록판에 의한 것인데 나무에 새기는 것이 가장 오래된 방법이었다.대 표적으로 이집트의 나무 도장,바빌로니아의 벽돌봉인,로마의 진흙 봉인들이 판화이전 의 볼록판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그리고 나무판에 새긴 그림을 채색한 천이나 종이에 옮겨 찍는 기법이 있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화는 당나라 때 간행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 般若波羅密經)>의 변상도(變相圖)이다.(圖 1)이는 종이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이 앞 서있던 중국에서 목판화 기법이 유럽에 비해 앞서 발달했음을 의미한다.그리고 770년 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2)은(圖 2)일본 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전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14세기 초부터 직물에 목판화를 찍는 방법이 알려졌다.하지만 14세기 말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종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까지는 이 기법이 거의 발전하지 못하였고 15세기에는 서양화풍을 가미한 풍경판화가 전개되었다.

명치시대에는 유럽문화의 급격한 이입으로 손으로 제작하는 목판화의 기술이 기계의 힘에 의해 밀려왔다.하지만 일본 고미술을 다색판화의 복제판화로 제작하는 작업으로 나마 강호시대로부터 이어온 직인들의 기술과 전통을 고수했다.3)

1)장화진,『판화감상법』,서울 :대원사,1997,p.29.

2)다라니(陀羅尼)란 지혜나 삼매 (평온한 마을을 견지 하는 것 ),또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가르침.

지혜와 삼매를 성취시켜 주는 힘을 지니고 있는 비밀스런 진실어(眞實語)이다.

(15)

서양에서의 판화는 수도원 중심으로 일어났다.이것은 종교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음 을 의미한다.서양에서의 판화는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가 판화 역사의 시초로 1418 년에 간행된 <성모>(圖 4)와 1423년에 간행된 <성 크리스토포루스> 목판채색화(圖 3) 등이 있다.이 작품들은 성화(聖畵)를 대량 보급하기 위한 수단으로 목판화가 쓰여 졌 음을 의미한다.

종교는 15세기 사람들의 삶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그리고 그 대부분은 상징과 미 신으로 특정 지어진다.이것은 기도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상(Icon)으로 제공되거나 부 적(符籍)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이러한 목판은 정신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세속 적 목적으로 놀이용 카드그림에 널리 이용되기도 했다.4)

특히 목판5)이 응용된 분야는 15세기 초 활판의 발명이전 모든 책이다.그리고 15세 기 중엽 활자의 발달과 더불어 책의 삽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삽화 이미지는 텍스트와의 연관성을 벗어나 새로운 판형을 갖추게 된다.또한 1499년 베니스에서는 종교적,세속적인 주제의 소책자 인쇄에 목판 기법이 널리 이용되었는데 대중들의 대 본에서 자주 발견되었다.6)

15~16세기에 걸친 교회와 사회동란에 즈음해서는 정치비판의 삽화로도 이용되었으 며 이것과 때를 같이해 새로운 예술로서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즉 예술가가 자기작품에 싸인 함으로서 새로운 예술형식을 갖게 되며 퍼지게 되었으나 19세기말 사진 제판술의 발견으로 목판화는 수공성을 아쉬워하며 후퇴하게 된다.7)

목판화는 일본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특히 16~17세기에 일본에서는 <우 키요에>8)(圖 5)풍속화 양식이 부각되었다.

3)진홍섭,『일본미술사』,서울 :열화당,1978,p.39.

4)장화진,前揭書,p.31.

5)목판(木板)은 나무에 조각한 인쇄용 판이다.

6)장화진,前揭書,p.32.

7)劉義娘,“朝鮮王朝 書冊 木版畵 硏究”,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1979,p.23.

8)우키요에 (浮世繪)는 일반적으로 목판화를 뜻하며 그림내용은 풍속화이다.그러나 우키요에 라는 말은 일본 의 역사적인 고유 명사로 풍속화와는 구별된다.전국시대를 지나 평화가 정착되면서 신흥세력인 무사,벼락

(16)

18세기에는 후쿠사이 히로시게 의 풍경화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며,19세기 말에는 많 은 <우키요에> 목판화가 서양으로 전해져 현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중국이나 일본 서양화의 목판화가 서로 양식과 기원을 달리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목판화의 원리가 도입된 것은 7세기 후반 불인(佛印)등이 사용되면서부터였다.이 기법이 종교화에 도입되면서 판화의 시초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 종교적 목판화가 도입된 것은 1007년 (고려 목종10)에 제작된 <보협인다라니 경(寶篋印陀羅尼經)>이 있다.(圖 14)이후 고려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의 불화가 목 판화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종교화는 조선시대의 목판화에서도 주종을 이루었는데,불경의 변상도나 탱화 외에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유교판화가 그의 예다.이 밖에 『일성록(日省錄)』,『진찬의궤(進饌儀軌)』등의 도서에도 목판화 기법을 이용한 많은 삽화가 실려 있다.

제1절.선사시대

문자가 생기기 전에는 의사소통을 위해 여러 기호를 썼다.그 흔적은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와 반구대 암각화(圖 6)등이 남아있다.

이러한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미술 중 회화표현으로써 주목되는 것으로 바위의 표면 에 새겨서 나타낸 화각화,즉 바위위의 그림이라 하겠다.

시베리아서쪽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동쪽으로 츄크치해 베링해협까지 주술(呪術)미술 의 선사시대 바위그림을 퍼져있고,중국 쪽에서 몽고에서 흑룡강 유역에도 바위그림이 있어 같은 북방문화권인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그 전통이 들어 왔을 것으로 생각되어 오던 중 사례들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9)

부자,상인,일반대중들을 배경으로 한 왕성한 사회풍속,인간묘사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18세기 중엽부터 말 기에 성행하여 스즈키 하루노부,가쓰가와 슌쇼,도리이 기요나가,기타가와 우타마로 등 많은 천재 화가를 배출시켰다.

9)김원용,안휘준,『한국미술의 역사』,서울 :시공사,2004,p.31.

(17)

우리나라 바위그림은 주제로 보아 동물화와 기하학적 도안화로 나누어 졌다.

동물화는 1970년에서 1972년에 걸쳐 경남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와 언양면 대곡리반 구대의 태화천의 냇가 두 군데 암벽에서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바위그림이 발견 되 었다.이 바위그림(圖 7)에서는 각종 동물,사람,배 등이 새겨져 있는 곳으로 사냥과 연관된 장이었다는 것이 분명 하다.또한 성격은 시베리안에서 발견되는 바위그림과 같다.

기하학적 도안화는 반구대동물 동물그림 유적에서 상류 쪽인 울주군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선각으로 된 바위그림(圖 8)들은 동심원문(同心圓文),와문(渦文),능형문(菱形文) 등 기하학적 무늬들이며,부적과 같은 주술적 뜻을 가진 기호나 무늬로 여겨진다.

이와 비슷한 도안화는 1971년에 경북고령군 개진면 양전동에서 동심원 방원문등의 바위그림이 발견된바있다.10)

이들의 세 암각화는 천변의 수직암벽을 이용하였는데 그림이 새겨진 암면은 마치 인 공이 가해진 것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다.

암각화에 표현되었던 암각법(岩刻法)은 크게 선각(線刻)과 면각(面刻)으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로 선각화는 윤곽선을 돌린 후 그 안에서 여러 형태의 곡선이나 직선을 새기거나,점을 찍어 묘사한 것이며,두 번째 면각화는 윤곽선을 돌린 후 그 내부 전면 을 쪼아 내는 방법인데 이 기법은 대상의 특징을 잘 표현하기 위한 기법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암각화와 암각기법은 삼국시대에 와서 금석류(金石類)의 표면에 문자나 그림을 각하는 기법과 그것을 탁인(拓印)11)해내는 기술을 낳게 하는 작용을 하였다.12)

제2절.삼국시대

우리나라의 목판인쇄술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라고 추정되며

10)김원용,안휘준,前揭書,p.33.

11)한국도서관학연구회,『韓國古印刷史』,서울 :한국 도서관학연구회,1976,p.35.

12)金元龍,『한국미술소사』,서울 :삼성문고,1985,p.67.

(18)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사원의 건립과 함께 목판인쇄술도 불상조각의 불교예술이 활발하 게 발달했다.

불교는 종교의 구실과 더불어 서역과 중국문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고,삼국은 종 교 관계 등 서적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였는데 여기에는 불경도 포함되었다.

삼국시대는 불교경전을 보급하는 과정에서 일반 서민이나 대중이 시각적으로 알기 쉽게 하도록 불인13)(佛印)과 탑인14)(塔印)이 고안되어 신앙심과 종교의식을 고취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이는 불경을 사경(寫經)하는 번거로움에서 목판 인쇄술이 고안되었 던 직접적인 동기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인쇄술은 불교가 전래되었던 신라시대에 발생하였다.그 당시 신라는 불교 를 국가의 이상으로 하여 불교문화를 이루었다.또한 동양에 있어서의 문명국의 척도 가 불교문화의 깊이에 따라 좌우되었기 때문에 국제적인 여세에 호응하여 신라는 불교 문화의 기반위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초기 인쇄에 관한 지식과 기술이 기초가 되었 다.

삼국시대의 판각 기술은 불교문화의 기반위에서 문자나 도형을 금석류의 표면에 각 하는 기법과 그것을 탑인해내는 기술15)에서 시작되어 목판의 판위에 글자의 획과 그림 을 형상과 반대로 새기는 기술을 낳게 하였다.또한 이러한 기술은 석판에 장문의 불 경을 정사(淨寫),정각(精刻)하는 단계로 발전하였으며 <금동판탑지(金銅版塔誌)>(圖 9)와 익산군 오층석탑에서 나온 <금판경(金版經)>(圖 10)과 같이 금동판각술(金銅板刻 術)을 거쳐 마침내 목판 기술을 낳게 하는 온상적인 작용을 하였다.16)그리고 인장 류17)나 불상과 탑을 새긴 불인과 탑인에 착색하여 지편 또는 견지에 날인하는 방법 역 시 목판인쇄술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13)불인(佛印)은 불상을 새긴 도장을 말한다.

14)탑인(塔印)은 탑을 새긴 도장을 말한다.

15)한국도서관학연구회,前揭書,p.37.

16)千惠鳳,『羅儷時代의 印刷術硏究』,서울:경인문화사 ,1980p.8.

17)인장(印章)의 기원은 어느 때인지 자세치 않으나 人名,官名등을 새겨 문서 등에 찍으므로 信을 표시하는 위주였으나.우리나 에서는 고려 숙종때 경적(經籍)을 소장하고 그 도서에 장서인(藏書印)을 찍었음이 所有 임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

(19)

우리나라는 인장류의 사용이 일찍부터 행해졌는데 삼국통일 초기 신라 문무왕 5년 (675)에 동(銅)으로 백사(白司)와 주군(州郡)의 인장을 주조하여 나누어 주었음이 기록 에 나타나 있다.18)이러한 기법과 날인방법은 목판인쇄술을 낳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 였다.이와 함께 양질 좋은 한지 생산과 다량 공급 먹의 생산 역시 삼국시대 인쇄발달 에 크게 기여하였다.또한 인쇄에 필요한 먹은 일찍이 생산해냈지만 생산의 연대는 알 수 없다.하지만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된 묵서(墨書)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먹의 생 산이 되었음을19)추측 할 수 있으며,중국으로 공출되어 널리 알려진바 있다.

우리나라 최초목판본은 서기 751년 이전의 간행으로 보고 있는 경주 불국사석가탑에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坵淨光大陀羅尼經)>(圖 13)이다.

이 목판은 서역의 스님 미타산이 704년 무렵에 중국에 와서 한자로 번역한 불경의 하나로서 탑 건립에 따른 공덕을 강조한 경전이며,현존하는 세계최초 목판본20)이 다.21)비록 소형이긴 하나 판문에 진언의 경문을 완전하게 새겨서 자면(字面)을 향상 시켜 평면으로 놓고 그 지면에 먹물을 입힌 다음 그 위에 종이를 놓고 털 또는 부드러 운 물질로 구위를 가볍게 문질러서 인출했다.다시 말해 목판 인쇄술의 성격을 완전하 게 갖춘 최초의 것에 해당이 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인쇄본으로 알려졌던 일본 법륭사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圖 2)보다 시대가 앞설 뿐 아니라 글씨체가 빼어나 고 균형이 잡혀 있으며 종이 질도 비할 때 없이 훌륭하여 세계최고의 목판인쇄본으로 서 손색이 없다.

또한 <백만탑다라니경>은 일본 인쇄학계의 과학적인 실험 결과 본격적인 인쇄물이 라기보다는 금속판을 도장처럼 눌러 찍어낸 것으로 밝혀졌다.22)

18)李瑄根,『大韓國史』,서울 :신태양사,1973,p.112.

19)한국도서관학연구회,前揭書,p.37. 20)목판본(木版本)은 목판인쇄를 만든 책이다.

21)김상현,김동현,곽동석 ,『불국사』,서울:대원사,2000,p.102.

22)김상현,김동현,곽동석,上揭書,p.104~ 105.

(20)

그리고 대영 박물관소장의 간기가 중국 당 함통(咸通)9년인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불경의 내용을 그린 변상도23)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제까지 알려진 간본의 변상 도로서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의 변상도가 가장 정밀한 고판화가 될 것이다.24)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간행된 이후의 신라시대의 경전으로 추정되는 목판본이 발 견된 것은 없으나 문헌상으로 신라 원장왕(800~808)때의 해인사 대장경과 신라 말의 신라시 인출(新羅詩 印出)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2종의 인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25) 이러한 인쇄술은 다음 시대인 고려 인쇄 문화를 꽃피우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 다.

제3절.고려시대

신라 말기 인쇄 문화는 고려로 접어들자 사찰에 의하여 계승,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신라시대 인쇄의 발상 보급에 큰 영향을 끼쳤던 불교가 고려로 넘어와 국가적 종교로 승격하자 그 진흥책이 더 강구되어 사찰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그리고 종파는 이 에 따라 점차 확장되었으며,국민 전체의 신앙심은 날로 높아져 사찰의 불경간행이 활 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실정을 생각해보면 사찰에 의한 불경간행이 끼기 시작한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고려시대는 고려청자,불교문화,금속공예 등 정교하고 호화로운 귀족문화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석불이나 소박한 토기,둔마리고분벽화 등 지방문화와 함께 성장 하였다.

23)변상도(變相圖)는 경전의 그림으로 수많은 기공이 모여 형성되는 경전의 내용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나타내 어 시각적인 방법으로 경전의 깊은 뜻을 표현한 것이다.또한 변상도는 불경의 세 가지 형식을 나눈다.첫 째,분량이 많은 것은 경전을 여러 권으로 쪼개어 편집하면서 각원의 첫머리에 한 장의 변상도를 첨부하는 형식이며,둘째는 첫 번째 경우보다 더 세분화하여 모든 장마다 뜻하는 내용을 묘사한 변상도를 첨부하는 형식이다.마지막 셋째는 경 첫머리에 몇 장의 변상도를 첨부하는 형식이다.

24)千惠鳳,前揭書,p.8.

25)한국도서과학년구회,前揭書,p.47.

(21)

이렇듯 수많은 간행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는 국초부터 거란,여진,몽고의 잇따른 외침 그리고 잦은 내란을 겪는 사이에 그간 강행되었던 귀중한 전적을 비롯한 많은 문화유산들이 손실되었다.다행이도 탑 속에 간직하였던 각본들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을 뿐이며 고려의 문화유산 중 가장 오래된 유물로는 1007년 개성 총치사에서 찍은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있 다.26)

<보협인다라니경>(圖 14)판화는 경(經)의 내용을 생생하게 묘사 하였고 동적인 표현 과 치밀하면서도 능숙한 필치로 인물,집,탑 등을 정성들여 판각한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수법은 1977년 1월 중순부터 공개한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의(圖 11)장 폭판화에서도 나타났으며,이와 같은 작품들은 전체 구도의 완벽함과 판각기법의 정교 함은 975년 간행된 중국의 <오월판(吳越板)>의 것보다 훨씬 묘사가 풍부하고,각법이 정교하여 판화 기법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음도 엿 볼 수 있다.또한 우리나라 판 각미술에 있어서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고려는 1011년(현종2)에 거란이 침입하자 대장경27)판각에 의한 불력(佛力)으로 국란 을 타개 하고 거국적으로 발원하여 그 판각에 착수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조대장경이다.이후 고려는 계속하여 재조대장경을 판각하게 된다.재 조대장경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부인사(符仁寺)에 소장되었던 초조대장경이 1232년(고 종19)에 소실되자 다시 이를 새겨서 불력의 수호로 몽고의 외침을 물리치고자 2차로 판각한 한역정장(漢譯正蘠)있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시킨 것이 통칭 <팔만대장경(八萬大藏 經)>28)으로 불리며 81,258장의 경판이 지금까지 손실 없이 보관되어있고,오자(誤字) 탈자(脫字)없이 모든 글자가 고르고 정밀하다.또한 해인사 장경판전은 <팔만대장

26)任昌淳,『고려시대 인쇄술』,서울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1976,p.280.

27)대장경은 불교 경전들을 한데 모은 것으로 1011년 거란의 침입의 계기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087년 까지 7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이 거대한 사업은 불교를 일으키려는 목적도 있지만 문화국으로서 위력을 이웃나라 에 내보이고,불력(彿力)으로 국난을 극복함으로서 호국(護國)하겠다는 염원에서 이룩된 것이다.

28)팔만대장경은 고려에 침입한 몽고권의 격퇴를 염원하여 만든 것으로 국보 32호로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 만 1258판,8만여 판에 8만 4천번 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여있다하여 팔만대장경 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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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圖 12)과 더불어 1985년에 세계문화 유산29)으로 등록되어 있으며,국보 32호로 지 정되어있다.

이 대장경은 전란 속에서 만들어졌는데 천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방대한 팔만대장 경이 원형 그대로 분실 없이 과학적 보존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우리민족의 우수한 인쇄문화의 유산인 것이다.

제조장경은 초조장경을 비롯한 송본,거란본과의 대교는 물론 각종의 불경목록까지 두루 참고,본문 오탈(誤脫),착사(錯寫),이역(異繹)들을 논정하여 교정 또는 보수한 다 음 목각한 것이다.

따라서 판각의 정도는 초조대장경보다 훨씬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본문만은 동 양의 어느 한역대장경보다 우수함이 국내외 학계의 정평이다.30)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 끊임없이 수입하겠다고 하였으며 불교 전파의 초전으로 삼 아왔다.그리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기까지의 사이에 간행한 축쇄대장경이라든지, 신수대장경이 등이 모두 재조대장경을 정본(定本)으로 삼고,송본,원본,명본 등으로 교합하였다.

고려시대 목판인쇄술은 많은 국내외적인 침략을 겪으면서도 우수한 대장경을 남겨 놓았다.이는 고려인의 종교적인 힘과 애국심으로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판화는31)대체로 스케일이 장엄(莊嚴)하고 화려하며 판각 기법 또한 정 교하고 힘차다.그리고 판각 기술의 우아함은 당시 인쇄 문화를 잘 뒷받침 해준다.

특히 경변상에서 <화엄경(華嚴經)>(圖 15)주본이 변형된 인물표현과 판각기법,재질 표현은 고려시대 판각기법으로서 조선시대 판화 초기의 부드러움 뒤에 나타난 조선중 기의 표현 중기적 경향의 시초라 본다.32)

이외 고려 판화는 1378년 제작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圖 33)과 탑 속에 안치

29)세계문화유산이란 유네스코에서 지정하여 가치 있는 문화 유적 보존 및 지원이 이루어진다.우리나라 세계 문화유산으로는 창덕궁,수원성 등이 지정 되어있다.

30)『http://history.wonkwang.ac.kr』,http://mahan.wonkwang.ac.kr/2002-2/p7.3tm.

31)현존하는 고려판화는 보협다라니경 변상도,금강경변상도,부모은중경 변상도,화엄경변상도,예수십왕생칠 경 변상도 등이 있다.

32)劉義娘,前揭書,p.27.

(23)

되었던 부처님을 하나하나 새겨 표현한 탑을 이루게 한 <보탑(寶塔)>(圖 16)과 같이 안치되었던 고려 다라니판도 전해지고 있다.

(24)

제3장.조선시대의 목판화

제1절.조선시대 목판화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조선시대는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그를 뒷받침 해주는 사 대부들은 유교적인 이상을 표방하여 고려 불교의 선양과 다른 승유억불(崇儒抑佛)정 책을 취했다.33)이러한 영향을 받은 미술은 조선시대미술사상 가장 발전했던 때이며 유교문화가 꽃핀시기이기이기도 하다.하지만 꾸준히 발전되어 오던 불교문화가 점점 쇠퇴하면서 유교문화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대이다.

불교는 여전히 지배적 신앙의 대상으로 왕실과 민간 부녀자 계층에 유포되었고,그 명맥을 유지하였다.지배 계급인 소수의 양반들에게 분화가 독점됨으로써 서민문화의 창조나 보급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하지만 서민예술의 가장 손쉬운 목판화 는 삽화 형식으로 맥을 이루었으며,판화는 예술분야의 냉대와 과소평가를 면치 못한 상황에서 회화 속에서 존재하여 우리민족의 생활에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훌륭한 예술 이 피어난 시기이다.

조선후기의 회화를 보면 그동안 억압되었던 민중의 창조적인 충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또한 화가들은 수련(修練)의 미(美)만 고집하지 않았고 개성(個性)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분방한 전진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이것은 유교사상이 안일한 이상향으 로 이끌어 보이려는 생활이념의 발로(發露)와 종교라기보다는 민간신앙에 속하는 도교 적 사상의 영향으로 인간의 예법(禮法)과 불교적인 미술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조선 시대 미술은 유교 정책으로 인하여 고려시대처럼 섬세하고 유려함은 없으나 은은한 멋 이 있어 정다운 일면이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불교는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 지위를 잃었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왕실과 민간 층에 유포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33)http://www.art.zzang-com/ch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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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세종(世宗)에서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문화는 황금시기로 활판인쇄의 대발 전과 훈민정음,측우기 발명 등 중요한 전적(典籍)의 간행이 각 방면으로 눈부신 발달 을 하였다.그러나 연산군의 학정(虐政)과 여러 차례의 재앙과 초기에 잘 발달된 유학 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게 되고 선조(宣祖)에 이르러 당론(黨論)이 생기며 국가 의 기강이 문란해져 문화는 퇴색하기 시작한다.또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우리문화 미 술의 자취가 많이 파손되고 패쇠 하다시피 되었다.그러나 영조,정조 때 문화적으로 복고운동이 일어나 각 방면으로 활발하게 움직여 문화의 중흥을 이루었으나 격렬해진 당쟁으로 인하여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 졌다.34)

조선시대 목판화는 이러한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비해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왜냐하면 고려 시대와 같이 국가나 불가(佛家)에서처럼 거국적이며,대규모 의 사업보다 대부분 단편적인 소규모의 판각 사업에 의해 이루어졌고,국가 기강의 불 안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미술은35)국가의 유교정책으로 인하여 유교적인 색채가 농후하며 고려시대처럼 섬세하게 유려함은 보이지 않았으나 은은하고 점잖은 멋과 생활과의 직 접적인 관계를 통해 정다운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세종 10년(1428)에 진주인(晋州人)모(某)가 부친을 살해한 친족살해 사건에 자극되 어 서적원에 <삼강행실도>의 간행을 명하여 세종16년(1434)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 提學)설순(楔循)이 편찬하였다.또한 원문 뒤에 실은 언해는 성종 때 시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 <삼강행실도>는 그 후 여러 왕조에 걸쳐 개판되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圖 31)는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圖 30),<속삼강행실 도>(續三綱行實圖)(圖 28),<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圖 29),<오륜 행실도>(五倫行實圖)(圖 32)등과 함께 민(民)을 대상으로 한 조선시대 윤리(倫理),도 덕(道德)교과서로 대중화된 책이며,유려한 선이나 안정된 화면의 균형을 취하려는 의

34) http://www.art.zzang-com/cho.htm.

35)시대에 따라 판화가 어떻게 변화 되었는가를 야식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시대구분이 필요 하 다.그래서 한국회화사의 시대 편년에 의존하였다.

조선 초기(1392년 ~ 1550년),조선 중기(1551년 ~ 1700년),조선 후기(1701년 ~ 1910년) 安煇濬,『韓國繒畵의 傅統 』,한국정신문화연구원:民俗文化,1979,p.223~ 238.

(26)

도는 고려 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다만 여러 왕도에 걸쳐 개판 간행될 때마다 원 화(原畵)를 그린 화사(畵師)나 판각한 각공(刻工)의 숙련도에 따라 기법상의 차이와 수 준을 비교할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 목각법(木刻法)은 고려의 정교한 기술을 이어 받아 우수한 판화들이 보인다.대표적으로 고려시대부터 계속 이어온 선묘불화 제작 중에 1453년에 간행된

<십육관경도(十六觀經圖)>가 있다.

<십육관경도>(圖 17)는 홍희원년(1425)에 간행된 것으로 천상의 환상적인 인물을 각 한 것이다.<십육관경도>는 고려시대의 선묘불화의 흐름을 이어받아 조선 초기의 정 교한 각법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불교의 극락세계에 달하는 16가지의 수행방법을 나타 내고 있다.그리고 인물의 인자한 모습과 생동감 있는 몸체의 표현이 사실적인 선들로 인하여 표현에 있어 조선시대를 통하여 판화제작으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세밀한 판각 이며 정교한 판화이다.

세조8년(1463)간경도감(刊經都監)36)간행의 <법화경(法華經)>(圖19)은 조선시대 가장 많이 유포된 경으로 변상도가 많이 들어 있으며 1536년에 간행된 <묘법연화경(妙法蓮 華經>변상도(圖 18)는 불교의 참세를 말해주듯이 석가모니의 얼굴에서 존엄함과 정신 의 의미가 결여된 듯 보인다.

조선초기의 이러한 작품은 사실적이고 정교한 각법이 초기말엽에까지 이루지만 조선 중기에는 형체가 단순화되어 내용이 쉽게 표현된다.이러한 표현법은 <불설대목련경 (佛說大目璉經)>(圖34),<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圖 28),<부모은중경(父母恩重 經)>(圖 33)에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불설대목련경>은 섬세한 선이 사실적이며,정교한 표현이 차츰 세부가 대담해지고 굵고 모난 새김질에 의한 강한 표현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생략된 각법을 볼 수 있다.

<불설대목련경>은 1536년(중종),1546년(명종),1584년(선조),1654년(효종),1735년 (영조),1862년(대원군)에 이르는 간본(刊本)이 있는데 책장의 수나 그림의 모양이 틀

36)간경도감(刊經都監)은 불교와 유교의 책을 한글로 번역 출판하던 관립기관으로 1457년(세조2년)설치,1471 년(성종2년)패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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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개판된 것도 다르다.37)

조선중기에 이르면 국가재정이 빈약해져 문화정책이나 서적의 간행이 활발치 못하였 다.하지만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법화경(法華經)>,<석씨원류(釋氏原流)>(圖 20)등과 같은 불서(佛書)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같은 일부 유가서의 간행은 비교 적 활발하였다.특히 <부모은중경>은 조선중기의 유행한 것으로 종류만도 40여종이 있다.또한 판화부분 역시 초기의 유려하고 섬세한 기법이 점차적으로 퇴조되고 조선 민화의 경향인 어중간한 색채방법,존재감의 희박성,완성도의 빈약함 등으로 무엇인가 어설프지만 그 안에 치기(稚氣)만만함이 두드러지는 경향의 판화가 나타난다.38)

17세기 중엽에 불교문화는 쇠퇴를 가져오게 된다.초기의 섬세하고 정교하던 것이 차츰 산만하여지고 부처나 천인(天人)의 경건하고 위풍 있던 필치는 점차 사라지면서 전반적으로 쇠퇴해져갔다.이렇게 됨에 따라 부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닌 그림을 그리 기 위한 대상으로 전각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출판술은 한층 더 퇴화되어 판화는 보잘 것 없고 전기 출판서의 복각 (復刻)은 성행하지만 정조시대 출판된 관판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圖 32)는 원화 가 정밀한데다 판각이 세밀해져 기교면에서 조선 최고의 삽화 본을 만들어 냈다.또한 당시 서원과 각공들 사이에 훌륭한 협동작업을 보여주고 있는 자료이다.

한편 <행실도>를 중심으로 한 판화의 양식 변천을 살펴보면 17세기 초에 주제인 인 물이 강조되고 산수는 화면 주변에 약간 나타냈으나 중엽에 이르러서 산수화가 중심이 되고 주제는 산수화 내에 위치하고 있다.다시 말해 등장인물이 크게 대두시키는 것에 서 인물과 배경이 화면에 같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며 점차 화면 속에 판화를 끌어들여 그들 나름대로 예술적인 구성을 하게 되었다.39)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중기의 표현적 경향은 차츰 사라지면서 다시 초기의 사실적 기법으로 복귀하는 경향을 이룬다.

이러한 특징을 잘 반영해주는 것으로 1730년의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圖 30)와 1797년 <오륜행실도>,1796년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등이 있다.

37)劉義娘,前揭書,p.37.

38)金相九,“朝鮮時代 木版畵에 관한 硏究』,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86,p38.

39)金賢實,“李朝版畵 硏究”,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71,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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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륜행실도>는 중기에 <행실도> 종류와 다르게 사실적인 실경이나 세부적인 사건 전개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간기가 분명치 않은 조선후기의 작품 <부모은중경>은 초 기의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선을 볼 수 있다.또한 사실성과 구도에 충실히 묘사하였고 원근법이 잘 표현되었다.

조선시대 목판화는 조선 초기 말엽 1550년경을 경계로 해서 초기 당시에는 웅장하고 정교한 각법을 이어받아 목판화가 제작되었으며 고려의 흐름이 계속되었다.그 이후 중기에는 불교를 배타함으로서 표현적 경향이 주된 흐름을 이루고 판각의 기술적인 면 은 퇴양한 듯 하나 단순화된 선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내용을 쉽게 이해하게 하였다.후 기에 이르러 표현주의적 상실과 사실주의적 경향이 함께 복합되는 양식이 주된 흐름을 이룬다.또한 선과 면으로 인한 원근법은 조선시대의 판화에 새로운 전환기로 접어드 는 과정을 나타냄을 볼 수 있다.

제2절.조선시대 목판화 분류

조선시대 목판화는 당시 사회가 유교와 불교의 종교적 이념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또한 종교적 차원보다는 유교를 바탕으로 한 윤리적 사상 및 민간신앙 에 속하는 도교적(道敎的)사상의 영향 등으로 서민 생활 속에서 생활예술로서 민속판 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유교관계 판화로는 <행실도> 계통의 삼강과 오륜의 내용을 다룬 것으로 인간생활의 도덕적 윤리적 질서를 보여준다.또한 국가이념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판화가 주를 이 루며 도해(圖解)로 초상화나 궁중의식과 왕실행사를 그린 의궤도,예(禮)에 관한 것,전 쟁도,무예도 등 판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불교관계의 판화로는 관념의 세계를 주제로 한 <십육관경도(十六觀經圖)>(圖 17)등 이 있고 현실의 세계를 주제로 한 <불설대목련경(佛說大目璉經)>(圖 34)등이 있으며, 현실세계가 동시에 등장하는 <석씨원류(釋氏原流)>(圖 20)등이 있다.

민예적 판화로는 종교적인 필요성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직접 이용되는 것이다.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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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예술성과 민족의 생활감정을 보다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능판화(圖 21)봉투나 편지지에 구획을 그어 놓은 <시전판>(圖 25),매나 해태를 각한 <동물 판>(圖 23),해와 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일월판>(圖 26),옷에 금박을 입혀 무늬를 생산하던 <금박판>(圖 22)이 있다.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것 외에도 민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지도(地圖),깃발,문자 도,평안기성도,떡살(圖 27),화조,보판(保版)등 여러 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또한 민간 신앙에 관한 부적(圖 24)도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목판화는 전적 판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양적(量的)인 면에 서는 오히려 민속 판화가 훨씬 많다고 느껴진다.

제3절.전통목판화 기법

‘판화’를 ‘복제’<Reproduction>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복제란 원하는 작품을 기계적 인 수단에 의해 그대로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그러나 이와 달리 판화는 하나의 창의 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으며 판화의 작품성은 제작에 임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숙련된 판화 기술자들에게 의뢰하여 제작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한다.

목판화는 목판으로 찍어낸 그림이며 영어로는 “Wood engravings”,“Wood cut”로 표기하며 붓이나 어떤 도구에 의해서 그려진 것이 아닌 그려서 새긴 뒤에 다시 간접적 으로 그려진 것을 말한다.또한 조선시대 한자표기에서는 “木版”과 “木板”의 두 가지로 사용되어 왔다.40)

목판화는 찍는 과정은 비교적 단순해 보이지만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면 그 과정은 힘들고 까다로움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전통 판화의 방식에서는 원화를 그리는 과정과 나무를 재단하고 손질한 과정 은 동시에 필요하다.먼저 목판화를 찍는데 필요한 첫 번째 과정은 판목에서 시작된다.

40)劉義娘,前揭書,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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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재료

① 판목41)

*판목의 재료

배나무 :목질이 연하고 매끈할 뿐만 아니라 칼질을 하면 잘 깎이는 장점이 있다.

감 :탄탄하고 강해서 판목으로 좋다.

거제수 :질기고 잘 벌어지지 않아 뒤틀리지 않고 편형이 오래간다.

*판목의 처리 과정

먼저 나무가 한참 물이 배어 오르는 봄을 피하며 가을이나 겨울에 벤 건조한 목재가 좋다.왜냐하면 물이 오를 때 벤 목제는 충해를 입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벤 나무는 필요한 크기로 제재(製材)하여 나뭇결을 삭히기 위해 웅덩이나 시 궁창에 2~3개 오랫동안 넣어둔 다음 꺼내어 큰 가마솥에 넣고 소금과 함께 펄펄 끓이 도록 삶는데 이는 결코 완전히 삵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방충도 되고 나무의 뒤틀림과 단단하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그리고 요즘은 증기로 나무를 찌는 방법으로 손쉽게 양 질의 판목을 구할 수 있다.이렇게 준비한 판재는 대패나 사포로 나무 표면이 반듯하 게 정리한다.

목재가 틀어질 염려가 있는 경우는 판재의 종단면에 창호지를 발라 놓으면 틀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또한 병충해를 막기 위해서는 완성된 판목에 옻칠을 해 놓아도 효과가 있다.

그밖에도 판목의 재료로는 대나무,박달나무,벚나무 등의 결이 없는 판재나 배나무 같은 목질이 연하고 매끈한 나무가 좋으며,나무 틈이 잘 벌어지는 후막나무,백화나무 등이 좋다.

② 종이

後漢 元興 元年(105)에 채륜(蔡倫)이 종이 제조법을 발명하게 되었다.이에 따라 우 리는 삼국시대부터 우리의 고유한 재료인 저(楮)또는 마(痲)등으로 한지를 다량 생

41)판목(版木)은 목판을 인쇄하기위한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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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여 썼는데 이것이 목판인쇄술의 발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장지(壯紙)는 희고 두껍고 질겨서 오래 쓸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이 종이 를 중국에서는 계림지(鷄林紙)또는 백추지(白硾紙)42)라고 일컬어 왔다.

백추지(白硾紙)는 저피(楮皮)를 원료로 하여 만들어지며 제일 처음 삶아 끓여서 잘게 다듬질하고 표백해서 점즙(粘汁)을 섞여진 액을 두껍게 떠서 풀을 먹이면 종이가 질기 고 빳빳하여 윤기가 나 보존하는 데도 오래 두고 쓸 수 있다.

이러한 양질의 좋은 장지는 오래 전부터 생산되어 삼국시대 이래 국내의 다량 공급 은 물론 중국에까지 널리 퍼져 애용되어 왔다.

③ 칼

칼의 종류는 평도(平刀),삼각도(三角刀),환도(丸刀),창도(槍刀)등이 있으며 조각도 는 제작자가 직접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평도는 대나무와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 졌으며 손잡이는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서 잡 는다.이 도구는 각재의 불필요한 부분을 밀어 내는데 쓰인다.

평칼은 끌처럼 생겼으며 날 면이 약간 둥글게 생긴 도구로 넓고 편편한 끌이다.

창도는 한쪽 끝으로 가면서 직경이 점점 작아진다.칼날은 45도 각도로 갈며 무쇠 면에서 강철로 된 절단 부분으로 경사져 있다.

환도는 칼로 자른 흠을 다듬는데 사용한다.

④ 먹

우리나라의 목판인쇄술의 발전에 또 다른 계기가 먹의 생산이었다.일찍부터 우리는 인쇄에 필요한 먹이나 묵즙(墨汁)을 생산하게 되었다.

동양에서는 언제부터 생간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우리는 삼국시대에 벌써 생산 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면 분내(墳內)의 전실 정면 위에 벽에는 종횡으로 그 려진 계선(界線)에 매형 10자 총 81행의 사경체 묵화(寫經體 墨畵)43)가 있다.이는 이

42)三流 軒雜識 사본(寫本)에 고려지(高麗紙)결백견강(潔白堅强)이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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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삼국시대부터 먹이 널리 생산되고 사용되었음을 말한다.

먹의 생산지로는 중국에서 비교적 가까운 지역인 맹천(猛千),44)순주(順州)45)에서 주로 생산되었는데 맹주(猛州)의 먹이 최고로 품질로 꼽혔고 순천(順川)먹이 다음으로 꼽혔다.

조선조 먹으로는 송연 먹과 유연먹이 있었는데 유연먹은 책을 집필하는 것으로 부적 당했으며 필사하는 곳에 주로 쓰였다.그리고 책을 인쇄해 내는 데는 송연 먹이 주로 쓰였다.이는 고려 말 이전에 간행된 책을 볼 때 먹색이 순연(純然)하고 선명한 것은 송연 먹을 사용해서 인쇄했기 때문이다.송연 먹은 주로 삼국 초기에 사용되었고 유연 먹은 그 후에 사용되었으며,그 조묵법(造墨法)이 『빙사신서』(放事新書)46)에 전하고 있다.

송연 먹은 송연을 자루에 넣어 다리고 말린 것 1.8ℓ와 아교(阿膠)0.64ℓ를 배합하 여 만든다.유연 먹은 유연을 재료로 한 것으로 등유(桐油),차자유(茶子油),두유(豆油) 등의 저유(楮油)가 사용되었으며 이를 참먹이라 부르기도 한다.유연 먹은 번지고 그 원색이 송연먹보다 희미한 성질을 갖고 있다.

목판용으로 쓰이는 먹은 한약재인 천궁(川芎)을 물에 넣어 적당히 다린 후 그 액으 로 먹을 갈아 사용하게 된다.이때의 먹물은 쉽게 번지지 않으며 인쇄가 잘되고 먹색 이 광택이 난다.47)또한 탁본을 할 때도 주로 이 방법을 택한다.

⑤ 숫돌

숫돌은 날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다.먼저 날을 세우기 전에 숫돌에 물을 묻 혀야 하며,칼날을 세우기 위해 날을 먼저 거친 숫돌에 갈고 다듬은 후 중간형에 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극히 매끄러운 숫돌에 간다.

다음으로 날의 자르는 면도 같은 방식으로 간다.날의 평평한 면이 매끄럽게 갈려졌

43)池內宏, 『通滿』, 東京 : 日滿文花協會. 昭和3年, 472, p.110~112.

44)평안남도(平安南道)맹산(孟山)의 고칭(古稱),맹주(孟州),맹덕(孟德)이라고도 한다.

45)평안남도(平安南道)순천(順川)의 고칭(古稱)이다.

46)徐命,妨事新書 券14,造墨法.

47)炳震,『拓本의 世界』,서울 :일지사,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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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때 가장 매끄러운 숫돌에 갈아서 윤을 낸다.최종적으로 자르는 날은 보다 낮은 각 도로 몇 번 밀어주면서 날 끝을 강화시키며 이 빠짐을 방지해 준다.굽은 둥근 꼴을 각각 다른 크기의 홈이 파인 특수 숫돌에 갈아 날을 세운다.숫돌을 물에 적신 다음 둥근 끌의 외부는 홈에 대고 앞뒤로 문질러 세우며 내부는 작은 동그란 막대기 같이 생긴 숫돌 부위에 문질러 세운다.

모든 도구는 사용치 않을 때는 기름을 발라 건조한 곳에 보관하여 녹을 방지한다.

또한 잘 보관하면 몇 번이고 사용 될 수 있다.

⑥ 문지르게

효과적인 인쇄를 하기위해선 반듯이 문지르게로 문질러서 찍어야한다.문지르게로는 말총 브러시 또는 일본식인 바렌48)등이 있다.

문지르게는 죽순 껍질로 만든49)머리카락이나 말층을 밀납과 섞어 만든 밀납브러시 등이 있다.이것은 말총을 밀납과 섞어 벽돌 반장 크기로 만들어 초지(初紙)(창호지, 사호지)와 함께 싸서 따뜻하게 약간 가열하게 되면 밀납의 기름성분이 배어서 표면이 매끄러워 문지르는데 아주 용이하다.그 밖에도 톱이나 나무망치,아교풀,백반 등이 필요하다.

2.제작과정

목판화의 제작과정은 비교적 단순해 보이지만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면 그 과정이 까다롭고 힘듦을 알 수 있다.

우리 전통 목판화 작업 방식에서는 원화로 그린 과정과 나무을 재단하고 손질하는 과정이 동시에 필요하다.기본 목판을 자르는데 있어서도 목판을 자르는 작업은 고도

48)바렌은 인화시 종이 뒷면에 압력을 줄 수 있는 조그마한 원형을 말한다.

49)德九富吉郞,『판화입문』,일본:보육사,p.62.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발의 갈기를 둥글게 밀납으로 굳히게 했는데 조선의 판목은 닦는 방법이 평면이 아 니고 물결치게 닦는 점을 감안할 때 합당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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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술을 요구한다.기본 그림은 각필치는 우아하고 완전에 가깝도록 다듬어져야 하 며,모든 불규칙한 곳이나 거칠게 되어 있는 곳은 자르는 과정에서 아주 매끈하게 마 무리 되어야 한다.

우선 판각하고자 하는 저작(著作)을 그린 원화를 판자에 붙인다.하지만 원화는 풀을 발랐을 경우 종이가 풀과 닿으면 구겨지거나 주름이 잡히기 쉬우므로 이를 막기 위해 서 10초 내에 목판에 붙여야한다.그리고 풀은 쌀가루와 물을 반죽하여 만든 것으로 물의 양을 1/3로 한다.이때 풀이 매끄러워지기 위해 반듯이 물을 서서히 넣어야 한다.

풀은 꼭 매끄러워야 하기 때문에 너무 되게 반죽하거나 흐를 정도로 끈기가 없어도 안 된다.또한 다른 재료로 밀가루 풀이나 벽지 바르는 풀도 괜찮다.

소량의 풀을 목판에 바르고 손바닥으로 표면에 고르게 발라준 다음 약간 거친 표면 이 되게 하기 위해 가볍게 두드려 줘야 한다.일단 원화를 목판의 일정한 위치에 대고 나면 중앙에서 출발해서 바깥쪽 가장자리까지 손으로 가볍게 문질러 준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면 판지 섬유질이 판판하게 펴지게 되어 그림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대개 원화는 벽지에 그리며 복각본(覆刻本)인 경우에는 기간본(旣刊本)을 판 목뒤에 뒤집어 붙였다.처음에 판지는 코너를 기점으로,다음에는 측면을 기준으로 하 여 즉시 목판위에 고르게 일치시켜야 한다.그리고 손으로 종이를 얇게 벗겨 내어 그 림이 잘 비치게 한 다음 조각도로 각한다.50)각할 때는 반드시 판목을 책상위에 놓고 앉은 자세로 한다.연판(鉛版)하는 과정에는 경우에 따라 옻칠을 하기도 하며,찍을 때 편리하기 위해 손잡이를 붙이기도 한다.

각하는 법에 따라 대상물의 각선을 남기고 바탕이 희게 남는 양각판화와 바탕이 되 는 부분을 검게 남기는 음각판화가 있다.또 찍었을 때 한가지 색으로만 된 것은 단색 판화라고 하며,여러 가지 색으로 된 것을 다색 판화라고 한다.

다음과정은 판에 먹칠을 해서 한 장씩 찍어 내어 제본(製本)한다.판지가 목판 일치 점에 나란히 일직선이 되게 한 뒤에 종이가 목판을 닿으면 바렌을 이용하여 문지른다.

또한 판에 먹칠을 하는데도 조상(彫像)을 가상하여 붓을 둥글게 원형으로 움직여 칠한 다.그리고 나뭇결에 따라 붓을 움직이면 대부분의 먹의 입자에 씻겨 내려가기 쉬우므

50)千惠鳳,前揭書,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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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나뭇결을 가로 질러 마지막 손질을 해야만 고르게 칠해질 것이다.51)

마지막으로 인쇄가 끝나면 판목을 깨끗하게 닦아 말린 다음 목궤(木櫃)에 넣어 고각 (高閣)에 두거나 나무선반 같은 통풍이 잘되는 곳에 보관한다.52)

51)千惠鳳,前揭書,p.240.

52)千惠鳳,前揭書,p.240.

(36)

Ⅳ.조선시대 목판화에 나타난 조형성분석

제1절.조선시대의 전적판화

전적 판화란 이미 주지하고 있듯이 경전이나 서적의 그림을 말한다.우리나라의 전 적 판화는 불교나 유교관계의 내용을 한 장 또는 여러 장의 그림 속에 요약해 놓은 것 이다.또한 삽화형식에 의한 화집의 성격을 나타낸 것은 조선 후기에 오면 한글의 보 급에 의한 서민 소설 및 그에 따른 삽화로서 판화가 소설 속에 등장 된다.

이러한 삽화들에 의해 원화가 그려진 것을 일반 각공이 조각한 것이며 특히 그 미술 적 가치 때문에 일찍부터 쿠랑이나 에카르트 등의 외국인들에 의해 주목되고 있다.53) 현존하는 조선시대 삽화 본으로서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1.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세종이 명간(命刊)한 <삼강행실도>는 <이륜행실도>,<속삼강행실도>,<동국신속삼 강행실도>,<오륜행실도>등 당시 국민교육(國民敎育)을 위한 일련의 조선시대 윤리도 덕 교과서 중 가장 먼저 나왔다.또한 제일 많이 읽힌 책으로서 기념물적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충(忠),효(孝),정(貞)의 삼강이 조선 시대 사회,나아가서 나라존립(存立)의 정신적 기반으로 되어있던 만큼 사회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 다.54)

또한 서지학적(書誌學的)으로도 삼강행실도는 조선 삽화본의 대표적 예로 감상행실 도 간본(刊本)의 변천은 곧 조선 삽화본의 변천이 될 수 있어 문화사 자료로서의 가치

53)안휘준,김원용,前揭書 p.554~ 555.

54)金永晩,“韓國傳統 木版畵 硏究”,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1986,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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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더욱 높이고 있다.

세종10년(1428)에 진주(晉州)의 김화(金禾)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 한 사건이 일 어나 세종에게까지 상문된 일이 있다.세종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고 또한 책임 을 느낀 나머지 10월에 경연(經筵)에 나와 군신(群臣)에 효제(孝悌)의 마음을 돋우고 풍속을 두텁게 하는 방안을 찾아 만든 것 이였다.

그 후 <삼강행실도>는 초기,중기,후기에 걸쳐 여러 왕조에 의해 개판되었다.이에 대해서 변계량(卞季良)은 효행록(孝行錄)같은 서적을 널리 간포해서 국민들이 항상 읽 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납하였으며,이 의견에 따라 세종은 직제학(直提學)설순(楔 循)이 책임자가 되어 집현전에서 새로운 국민교화서적을 편찬하도록 명하였다.55)

조선 초기의 판화의 양상은 1434년 처음 간행된 후 중간된 <삼강행실도>(圖 31)판화 에서 엿볼 수 있다.56)효자,충신,열녀 등 등장인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전 개하고 보는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화면을 건물,산,구름 등을 활용하여 재치 있게 구획하는 등 구도와 구성이 매우 짜임새가 있다.(圖 31-3~4)

그리고 인물들은 대체로 4등신 정도의 작고 아담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각법 은 다듬어져있다.하지만 이야기와 전개의 화면구성 방법이 다양하기에 여기 도판에 속해 있는 작품으로는 삼강행실도 판화의 모든 것을 드러내기는 어렵다.

편의상 晋나라 때의 효자였던 왕상(王相)의 고사인 <왕상부빙>(王祥剖氷)을 새긴 장 면을 살펴보기로 하겠다.57)(圖 31-1)

먼저 고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상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계모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①그래서 매일 소 외양간을 청소하거나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다.②어느 날 계모가 병들어 눕게 되었는데 추운 겨울에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여 얼음이 언 강물을 깨고 그 속에 뛰어들 참이었는데 얼음이 저절로 깨지면서 잉어 두마리가 뛰어올랐다.

55)弘文閣,『三綱行實圖 』,京畿道 :弘文閣,1990,p.3~5.

56)李洛京,“朝鮮時代 孝子圖 硏究”,서울대학교 미술사학 석사학위 논문,2001,p.10~51.

鄭炳模,『삼강행실도 판화에 대한 고찰』,震壇學報 85호,1998,6p.185~245. 57)세종대왕기념사업회,『三綱行實圖 』,세종대왕기념사업회,1975,p.41.

李洛京,前揭書,p.1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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