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건원릉(健元陵)과 영조 원릉(元陵)
장경희(한서대 교수)
목차
I. 머리말
II. 건원릉(健元陵), 원릉(元陵)의 조성배경 III. 건원릉, 원릉의 건조물 비교
IV. 건원릉, 원릉의 석물 비교 V. 맺음말
참고문헌
조선왕릉은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 적으로, 519년간 유지된 조선의 27대 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 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부르며 42기(북한 2기 소재)가 현존하고 왕을 낳 아준 후궁이나 왕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은 원이라 하고 13기가 현존하며, 대군 이나 공주와 왕의 후궁 및 폐위왕의 무덤은 묘라 부르며 52기가 현존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도성이 있던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분포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에 위치한 동구릉 중 태조이성계의 건원릉(健 元陵)과 영조, 정순왕후의 원릉(元陵)을 중심으로 능의 조성배경과, 석물의 구조 와 배치, 양식을 비교하고자 한다.
I. 머리말
I. 머리말
조선왕릉은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으로, 519년간 유지된 조선의 27대 왕과 왕 비 및 사후 추존 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 부르며 42기(북한 2기 소재)가 현 존하고 왕을 낳아준 후궁이나 왕세자와 세자빈의 무덤은 원이라 하고 13기가 현존하며, 대군이나 공주와 왕의 후궁 및 폐위왕 의 무덤은 묘라 부르며 52기가 현존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도성이 있던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 분포하고 있다.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
로 지정되었다.
[동구릉]
• 왕ㆍ왕후 능호 무덤형식
1대 태조 건원릉(建元陵) 단릉
5대 문종, 현덕왕후 현릉(顯陵) 쌍릉(동역이강) 14대 선조, 의인ㆍ인목왕후 목릉(穆陵) 쌍릉(동역이강)
장렬왕후 휘릉(徽陵) 단릉
18대 현종, 명성왕후 숭릉(崇陵) 쌍릉
단의왕후 혜릉(惠陵) 단릉
21대 영조, 정순왕후 원릉(元陵) 쌍릉
문조(추존왕), 신정익황후 수릉(綏陵) 합장릉
24대 헌종, 효헌ㆍ효정성황후 경릉(景陵) 삼연릉
건원릉은 동구릉 내 9개 능 중 하나로, 조선왕조를 세운 제1대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능이다. 태종 8년(1408년)에 조영되었다.
원릉은 제21대 영조(1694~1776)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1745-1805) 의 능으로 쌍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조선시대를 통하여 9릉(陵) 17위(位)의 왕과 후비의 능이 쓰여져 일 대 족분(族墳)을 이루었다.
이 시간에는 건원릉과 원릉의 조성배경을 살펴보고 각 능의 구조와
배치, 건축물과 석물의 양식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II. 건원릉과 원릉의 조성 배경
왕조실록 조선왕조 실록 내용
태종 15권, 8년(1408 무
자) 5월24일(임신) 태상왕(太上王)이 창덕궁 광연루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였다.
태종 15권, 8년(1408 무
자) 6월12일(기축)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등을 보내어 산릉(山陵) 자리를 보게 하였다.
태종 16권, 8년(1408 무
자) 9월9일(갑인) 임금이 영구를 받들어 건원릉(健元陵)에 장사하였다.
태종 17권, 9년(1409 기
축) 4월13일(을묘) 건원릉(健元陵)에 비를 세웠다. 비문은 권근이 지었다.
세종 96권, 24년(1442 임
술) 5월21일(경진) 산릉 수리 도감을 설치하여 건원릉(健元陵)을 수리하게 하다.
1. 건원릉
• 건원릉(健元陵)은 조선 1대 태조 이성계의 능이다.
• 1408년(태종 8년) 5월에 태 조가 승하하자, 6월 한양과 가까운 파주.고양 등지에서 능 자리를 찾던 중 좌의정 하륜(河崙)의 천거로 이 곳 이 능지로 정해졌다.
• 그해 7월 5일 충청도와 황 해도, 강원도에서 6천명을 징발해 조성하였다.
• 9월 9일 건원릉이 봉릉(奉 陵)되었다. 11월 지석을 묻 고 이듬해 신도비를 세웠다.
• 원래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
덕왕후 강씨와 합장되기를 바
라고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조영했다. 하지만 신덕왕후
강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2. 원릉
왕조실록 조선왕조 실록 내용
영조 127권, 52년(1776
병신) 3월5일(병자) 묘시에 임금이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승하하다.
정조 1권, 즉위년(1776
병신) 4월11일(임자) 대행 대왕의 산릉을 정하고 능 이름을 원릉(元陵)으로 정하다.
정조 3권, 1년(1777 정유)
4월3일(무술) 좌의정 김상철이 원릉 수개할 때 동구에 있는 연못을 개착할 것을 건의하다.
정조 9권, 4년(1780 경자)
6월1일(무신) 원릉의 사초가 비로 인해 사태가 나서 위안제를 지내라고 명한다.
정조 16권, 7년(1783 계
묘) 8월6일(을축) 원릉의 무너진 사초를 수개하라 명한다.
•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 순왕후 김씨의 쌍릉이다.
• 영조는 1694 숙종의 4째 아들로 숙빈 최씨에게 태 어나 경종 원년(1721) 왕세제, 1727년 즉위했다.
• 영조는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52년) 왕으로 탕평책 을 써서 당쟁의 근절에 힘썼고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 1776년 3월 5일 경희궁 집경당에서 2남 12녀를 남기고 춘추 83세로 승하 하여 같은 해 7월 27일 에 모셨다.
• 원릉은 원래 효종 영릉
자리였으나 1673년 효종
이 여주로 천릉한 곳에
세워진 것이다.
• 계비 정순왕후 김씨는 오 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영조 21년(1745) 11월 10일 탄생하여 영조 35년 (1759) 왕비에 책봉되었 고 순조 5년(1805) 정월 12일 춘추 61세로 소생없 이 창덕궁 경복전에서 승 하하여 같은 해 6월 20일 에 모셔졌다.
• 원릉은 동원쌍릉 양식의
형식으로 호석이 없이 난
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문
인석과 무인석 사이의 계
단을 없애고 동일 평면에
배치하였으며 이 후 조성
되는 왕릉은 이 제도에 따
랐다.
•
•
• 배위 : 홍살문 동쪽에 한평정도 돌을 깔아 놓았다. 임금이 능행 때 절을 먼저 하고 홍살문을 통과하였다. 망료위 라고도 한다.
• 왼쪽 15세기 건원릉의 배위는 49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오른
쪽 18세기 원릉의 배위는 81개로 건원릉 보다 넓은 편이다.
원릉
• 신도 : 신성한 신이 다니는 길로 좌측에 있으며 어도 보다 한 단 을 높게 만들었다.
• 어도 : 신도와 달리 사람이 걸어 다니는 오른쪽 길은 신도 보다 한단 낮게 만들었다.
• 건원릉은 2단 원릉은 3단 으로 되어있는걸 알 수 있다.
• 신계 : 혼령이 오르내리는 계단.
• 동계 : 왕, 제관등이 오르내리는 계단. 오른발을 먼저 내딛음.
• 비각 : 비석을 보호하는 건조물로서 비석을 글씨를 새긴 부분이 비신이라 하며 정면 글씨를 표제라 하고, 뒷면 글을 음기라 하며, 받침돌은 농대, 머리에 집처럼 얹은 돌은 흔히 이르는 갓석이라 한다. 비갈에는 왕또는 왕비의 일대기를 기록한다.
• 건원릉 의 비각에는 2개의 비석이 있고 원릉의 비각에는 3개의 비
석이 있다.
• 건원릉 : 양손으로 홀을 쥐고 서있으며, 복두공복을 쓰고 있고, 정상적인 육체가 특징이다. 얼굴은 신체 비례가 맞고 옷주름이 원릉에 있는 무인 석 보다는 선명하게 나와있으며 발은 옷속에 들어가 앞꿈치만 보인다.
• 원릉 : 마친가지로 양손으로 홀을 쥐고 서있으며, 복두공복을 쓰고 있고, 무인석과 마찬가지로 어깨가 좁은게 특징이다. 건원릉의 문인석보다는 옷 주름이 자연스럽고 건원릉의 문인석과는 다르게 발이 옷에 덮혀있지 않 다.
건원릉 원릉
그림 7 건원릉 문인석건원릉 문인석 그림 8 원릉 문인석원릉 문인석 복두 공복, 손을 감춤, 얼굴 근엄 복두 단령, 손이 노출, 얼굴 온화
엄지손가락 엄지손가락이 홀의 뒤에 가려지면서 왼손이 오른
손을 덮고 있다.
. .
• 건원릉 : 건원릉의 무인석은 몸이 바르며, 얼굴이 크고 우락부락한 코가 유난히 크게 표현 되 있으며, 귀 또한 얼굴의 거의 비례하게 크게 표현 되어있다.
• 원릉 : 원릉의 무인석은 어깨가 좁으며 건원릉의 무인석에 비해 얼굴이
작으며 얼굴 이목구비가 선명하며 입은 웃고 있다. 몸에 새겨진 문양은
건원릉의 무인석 보다 선명하다.
건원릉 무인석 원릉 무인석
조선시대 전기(태종) 조선시대 후기(정조)
투구 상모의 모양은 단순하며 길이는 길지 않다. 투구에 작은 이마가리개가 달려 있고 그 위에 여의두문 장식이 있다.
칼을 잡고 있는 두 팔이 자연스러우며 팔꿈치가
아래로 향하고 있다. 동구릉 무인석 가운데 유일하게 칼에 귀면문이 없다.
두 단의 층을 갖는 하반신의 갑옷은 윗옷을 더 두텁게 조각하여 아래옷과의 차이를 입체적으로 처리하였다.
칼집은 왼쪽 옆에 거의 수직이 되게 부착되어 있고, 왼 쪽 허리춤에서 고리에 달린 끈이 두 줄 내려와 칼집의 고리와 연결되어 있다.
• 건원릉의 것은 팔각 지붕으로 사각형 지붕으로 변화하기 전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화대가 하대석보다 좁아지고 대석 허리가 길어진 양식 으로 건국 초에 보여준 복고풍의 장명등의 모습이다.
• 장명등은 정면 복판에 불을 켜놓을 수 있게 만들어 세운 석등으로,
후손에게 빛을 밝게 비춘다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
건원릉 장명등 원릉 장명등
시대
조선시대 전기(태종) 조선시대 후기(정조)표현방법 비교
건원릉의 장명등은 조선 초기에만 보 이는 팔각형 형태의 구조를 취하고 있 으며 하단의 문양이 조각 되어있다.
원릉의 장명등은 사각옥형의 지붕으로 이루어 져 있고 공간은 화문(花文)으로 장식하였다. 또 한 다리가 4개 달린 조선후기의 양식을 하고 있 고 지붕이 화려하며 몸통을 이루는 상,중,하대 석 부분은 모두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 혼이 나와서 노닌다고 하여 혼유석이라 부르며, 가장 만들 기 힘든 석물이다.
• 혼유석을 고이고 있는 받침돌은
북모양으로 되어 고석이라 부르며, 나어두라 부르는 도깨비 형상 을 새긴다.
• 건원릉은 5개의 고석이, 원릉 은 4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
• 고석은 태조의 건원릉에서 5개, 세종의 영릉에서 4개로 줄었다가 휘릉에서 다시 5개 로 늘어났다.
건원릉
원릉
4. 혼유석
•
혼유석은 능원 앞에 놓아 혼이 노닐 수 있도록 베푼 장방형 상석으로서, 받침돌은 북 모양으로 둥 글게 만들어져 고석이라고 부르며 나어두라 부르는 도깨비 형상을 새겨두었다.건원릉 혼유석 원릉 혼유석
시대
조선시대 전기(태종) 조선시대 후기(정조)표현방법 비교
단릉인 건원릉은 혼유석이 1개이며, 쌍 릉인 원릉은 왕과 왕후릉 앞에 각각 한 개씩 혼유석이 2개 있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건원릉은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5개의 고석이며, 반면 원릉은 4개의 고석이 있다. 고석에는 나어두라 부르는 도 깨비 형상을 새긴다.
•
건원릉과 원릉의 망주석은 한눈에 봐도 다른 모양으로 조각되었으며 세호의 모양도 서로 다르다.
건원릉은 둥근 망주석 위에 연꽃문양이 장식되어 있고 원릉은 팔각의
망주석 위에 구름문양이 선명하게 장식되어져 있다.
건원릉 망주석 원릉 망주석
시대
조선시대 전기(태종) 조선시대 후기(정조)표현방법 비교
건원릉 봉분 좌우로 망주석이 세워 져 있는데 기둥에는 세호가 새겨져 있는데 정확한 모양이 없고 귀 모양 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 초 기에는 애매한 모습을 새겼으나 후대 로 내려가면서 구체적인 모습이 나타 나 보인다.
원릉 한 쌍의 망주석 몸통 부분에는 등뼈 와 갈비뼈가 도드라진 세호가 조각되어 있 으며 세호는 중국의 망주에는 볼 수 없으 며, 아직 새기는 목적과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