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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Landscape Change in Nakdong River Delta : The Case of Myeongji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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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동강 삼각주의 경관변화에 관한 연구 -명지동을 사례로-

허민석*·손 일**·탁한명***

A Study on the Landscape Change in Nakdong River Delta The Case of Myeongjidong

Minseok Heo* · ILL SON** · Hanmyeong Tak***

요약 : 본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공간적 변화가 이루어진 명지동을 사례로 낙동강 삼각주의 거시적 공간 변화와 지역주민들의 적응과정을 미시적 관점에서 파악하였다. 명지동의 공간적 변화는 1910년 발행된 구한말 지도집, 지형도, 지지(地誌), 시사(市史) 등에서 지도를 수집하고 GIS 프로그램의 지리참조 기능을 이용해 좌표를 부여한 후, 각 지역의 시계열적 변화를 확인하였다. 조선총독부, 김해수리조 합, 국가의 계획이나 정책에 의해 추진된 공간변화는 이전과 다른 환경적, 인문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지역과 주민들의 토지이용, 주택, 산업 등에 다양한 적응과정을 불러왔다. 이러한 적응과정은 문헌을 수집하고 비교한 후, 현지조사에서 실시한 지역주민들과의 면담을 통해 자료를 보충하였다. 연구지역은 1935년 낙동강제방과 명지방조제 축조를 시작으로 1940년대 후반 김해수리조합의 구역확장공사가 이루어진 이후 형성된 농업적, 전 원적 경관이 1970년대 이후 국가, 지방자치단체의 발전계획에 따라 상업적, 도시적 경관으로 변화하고 있다.

주요어 : 낙동강 삼각주, 경관변화, 공간변화, 산업 전개과정

Abstract : This study has taken the Myeongjidong island, which has experienced spatial change due to vari-

ous reasons ranging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until today, as an instance in order to comprehend mac- roscopic spatial change of the Nakdonggang Delta and the adaptation process of the locals in a microscopic point of view. Spatial change of the Myeongjidong has been confirmed by collecting maps such as the atlas of late period of Chosun published in 1910, topographic map, regional geography, city records, and by apply- ing coordinates with geographic reference function of GIS program, then checking for time sequential space change of individual regions. Space change driven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Gimhae Irrigation Association, and by national policy or planning brought about environmental and humanistic changes unlike ever before, and land usage, housing and industry of the region and the locals experienced various adaptation processes. Such processes were compiled through collection and comparison of literature, and supplementation from interview of the locals during field study. As for the research region, it ranged from the construction of Nakdonggang bank and Myeongji seawall of 1935, agricultural rural landscape formed after the area expansion project by Gimhae Irrigation Association in 1940, to landscape that are be- coming mercantile and urban due to the developmental plans of national and local governments.

Key Words : Nakdonggang delta, landscape change, spatial change, Industrial development process

이 연구는 허민석의 석사학위논문 “낙동강 삼각주의 경관변화에 관한 연구”를 수정, 보완하여 작성하였음.

* 부산대학교 대학원 석사(Master, Graduate School, Pusan National University), [email protected]

** 부산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Professor, Dept. of Geography Education, Pusan National University), [email protected]

*** 전남대학교 지리학과 시간강사(Lecturer. Dept. of Geograph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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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삼각주는 바다나 호소로 유입하는 하천의 유속 감 소로 운반되던 토사가 하구와 그 주변에 집중적으로 쌓여서 만들어지는 하천퇴적지형이다. 삼각주는 주 로 하천에 의해 형성된 하중도와 파랑의 영향으로 삼 각주 전면에 형성된 연안사주로 구성되어 있다. 삼각 주는 범람원의 연장선상에 형성되는 지형으로 침수 피해가 적은 자연제방 이외에는 인간이 살기에 적합 하지 않았다(권혁재, 1999).

낙동강 삼각주의 하중도 중 일부는 1935년 낙동강 제방과 명지방조제 축조 이전부터 자연제방 위에서 산업이 전개되고 있던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저습한 갈대군락지로 남아있었다. 낙동강 삼각주 내부의 각 하중도는 취락의 입지, 개발정도, 토지이용 등에서 개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1935년 낙동강제방과 명지 방조제 축조 이후 대부분 농경지로 탈바꿈하였다(부 산강서구지편찬위원회, 2014). 그러나 이는 매우 단 편적인 시각에서 낙동강 삼각주의 변화를 확인한 것 이다. 각 하중도는 자연재해, 토지이용, 취락, 교통 등 자연적·인문적 조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 문에 개간시기, 경관변화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는 주 민들의 삶은 자연, 인문적 환경요소에 의해 공간적 차 이를 보인다(권혁재, 1974).

낙동강 삼각주에 대한 연구는 지리학 이외에도 민 속학, 사회학, 도시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 었다. 지리학 연구는 주로 지형학에서 이루어졌다.

권혁재(1973)는 시추자료 및 현지답사를 통해 삼각주 지형을 하중도로 구성된 상부삼각주, 사주, 간석지, 해안평야로 구성된 하부삼각주 그리고 삼각주 주변 분지로 구분하고, 삼각주의 발달과정을 정리하였다.

최덕주(1979)는 현지답사를 통해 삼각주를 상위, 하위, 저위 삼각주지대로 구분하였고 삼각주의 개간 시기, 토지이용현황, 촌락의 형태적 특성을 구분하였 다. 반용부(1986)는 시대별 지형도를 비교하고 삼각 주의 주요지형별 퇴적물 분석을 통해 낙동강 삼각주 의 발달과정을 기후 및 해면변동과 관련하여 설명하 였다. 김성환(2005)은 낙동강 하구둑 축조 이후 삼각

주 전면에 위치한 사주섬의 시계열적인 변화와 퇴적 물 분석을 통해 지형변화를 분석하였다.

삼각주와 관련된 자연지리학적 연구는 지형발달과 지형분류가 주로 이루어진 반면, 인문지리학적 연구 는 반용부(1997)와 장보웅(2000) 정도에 불과하다.

반용부(1997)는 낙동강 삼각주의 지형·경관변화와 개간 이후 주민생활의 변화를 추적했으나, 과수 및 화 훼중심인 대저도의 사례를 낙동강 삼각주의 전반적 인 특징으로 일반화한 한계를 보인다. 장보웅(2000) 은 낙동강 삼각주 민가의 특성을 밝히는 동시에 경관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주민 삶의 변화를 설명했다. 그 러나 이 역시 낙동강 삼각주에서 이루어진 경관변화 중 일부이며, 삼각주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갖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명지동은 이전부터 소금을 얻기 위한 염전의 개발 이 진행되었고 갈대가 무성한 저습지였다. 그러나 일 제강점기 때 식량 생산을 목적으로 대부분의 염전 터 와 저습지가 농경지로 바뀌었으며 현재 도시개발 계 획에 따라 농경지가 산업용지와 주택용지로 바뀌고 있다. 또한, 이곳은 삼각주의 공간 변화 속에서 지형 적, 환경적 제약을 극복해 나가는 지역주민들의 적응 과정이 경관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본 연구는 낙동강 삼각주에 속해 있는 명지동을 사 례로 경관변화를 연구하였다. 이를 위해 첫째, 근대 적인 지형도가 발행되는 1910년대부터 현재까지 발 행된 지형도를 비교하여 연구지역의 공간 변화를 추 적하였다. 둘째, 현지조사 및 문헌연구를 통해 연구 지역에서 나타나는 지역주민들의 적응과정을 확인하 였다. 이를 통해 명지동의 정치, 사회, 경제적 조건에 따른 자연, 인문환경적 변화가 주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미시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2. 연구지역 및 방법

1)연구지역

연구지역인 명지동은 행정구역상 부산광역시 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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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에 속하는 곳으로 낙동강 삼각주의 최남단에 위치 하고 있다. 동서의 길이는 약 3㎞, 남북의 길이는 약 6

㎞, 면적은 약 16㎢이고 동쪽은 낙동강 본류, 서쪽은 서낙동강 그리고 남쪽은 남해와 접하고 있다(그림 1).

과거 이곳은 2번국도를 기준으로 북쪽은 순아도 남 쪽은 명지도로 구성된 지역이었다. 1935년 두 섬이 낙동강제방과 명지방조제로 둘러싸이면서 하나의 섬 처럼 변했다. 남쪽은 바다와 접해있어 농업 중심인 삼 각주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농업과 어업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반농반어(半農半漁)지역이다.

명지동은 1978년까지 경상남도 김해군에 속한 명 지면이었고 1978년 이후 부산직할시 북구에 편입되 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개칭되면 서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이 되었다. 현재 명지동 은 자연마을인 순아 1, 2, 3구, 경등, 사취등, 진목, 신 포, 해척, 평성, 조동, 영강, 중리, 동리, 진동, 상신, 중신, 하신, 전등 그리고 최남단 아파트 밀집지역인 명지주거단지가 모여 하나의 법정동을 구성하고 있 다(부산강서구지편찬위원회, 2014).

2) 연구방법

본 연구는 두 가지 하위주제인 공간 변화와 지역주 민들의 적응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실내조사에서 는 낙동강 삼각주의 공간적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지 형도를 비교하고 문헌자료를 수집하였다. 현지조사 에서는 남아있는 경관요소를 확인하고 지역주민들과 의 면담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후 문헌자료와 현지자료를 병합하여 지역주민들의 적응과정을 분석 하였다.

연구지역은 총 2번에 걸쳐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 어졌기 때문에 김해시청, 북구청, 강서구청, 부산시 청의 협조를 얻어 자료를 수집하고 통합했다. 또한, 1910년대부터 현재까지 명지지역 내 대규모 토목공 사, 경지정리사업, 도시개발에 따른 공간적 변화가 나타났거나 현재 진행 중인 것들은 국가기록원, 부산 발전연구원, 각종 개발 사업 주관사의 홈페이지, 문 헌자료, 언론매체 보도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1916년부터 2010년까지 연구지역을 대상으로 제 작된 지형도는 1:5,000(김해(047), 1977, 1983, 1988, 1996, 2005; 김해(057), 1977, 1983, 1988, 1999, 2005; 김해(058), 1977, 1983, 1986, 1988, 1996, 2005; 김해(067), 1977, 1983, 1988, 1996, 2005;

김해(068), 1977, 1983, 1986, 1988, 1996, 2005), 1:12,000(조선총독부, 1926), 1:25,000(중리, 1964;

다대동, 1964; 다대, 1970, 1975, 1983, 1986, 2002, 2004, 2005, 2006, 2008, 2009, 2010; 김해, 1970, 1975, 1984, 1990, 1996, 2002, 2003, 2004, 2006, 2008, 2009, 2010), 1:50,000(조선총독부, 1926; 가 덕도, 1956; 가덕, 1963, 1970; 김해, 1964, 1970, 1974, 1975, 1976, 1984, 1986, 1990, 1996) 등 총 66 장이며 이를 바탕으로 실·내외 조사 자료를 병합하여 공간변화를 설명하는 주제도를 제작하였다. 연구지 역은 지난 100년간 경관의 변화양상에 따라 세시기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 시기는 농업공간의 확보기(1910 년대~1950년대 후반), 경지정리와 새로운 토지이용 기(1960년대~1980년대 후반), 도시개발에 따른 변화 기(1990년대~현재)로 명명하였다(그림 2).

공간적 변화 속에서 지형적, 환경적 제약에 대한 지

그림 1. 연구지역 개관도

(4)

역주민들의 적응과정은 산업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 펴보았다. 이곳의 주된 산업은 염업, 농업, 어업이었 다. 그러나 1935년 낙동강제방과 명지방조제 축조로 인해 염업이 쇠퇴하고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대체재 의 성격을 갖는 두 산업을 하나의 주제로 다루었다.

반면, 현재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어업은 낙동강 하구둑이 건설된 이후 바닷물 유입이 차단됨 에 따라 하구에 서식하는 어·패류의 종 변화가 일어 났다. 이로 인해 어민들의 어업활동이 크게 변화되었 기에 낙동강 하구둑 축조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분 석하였다(그림 3).

3. 연구지역 공간 변화

1) 농업공간의 확보기: 1910~1950년대

첫 번째 시기는 낙동강 삼각주의 저습지가 김해수 리조합1)에 의해 농경지로 탈바꿈하게 되는 농업공간 의 확보기이다. 이 시기는 1910년대부터 시작해서 연 구지역 전역에 양·배수시설체계가 갖추어져 농업활 동이 가능해지는 1950년대 후반까지이다.

(1) 1910~1930년대

명지지역은 낙동강의 범람에 의한 빈번한 수해문 제를 안고 있었으며, 명지도 동쪽과 서쪽의 갯골을 따 라 유입되는 바닷물에 의한 염피해로 인해 농업적 토 지이용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지역주민 들은 이러한 자연적 특성을 이용하여 전통적 자염방 식으로 소금을 생산해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식량 과 교환했다(그림 4).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이 언제부 터 생산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서기 992년경 에도 이곳에서 소금이 생산되었다는 문헌기록이 남 아있다(류승훈, 2006). 명지지역에 분포하던 자연 상 태의 저습지와 염전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조선총 독부의 낙동강 일천식 개수공사2)로 낙동강제방과 명 지방조제가 축조되면서 농경지로 변모하였다(그림 5; 조선총독부, 1926).

조선총독부는 갈대가 무성한 저습지와 염전 터를 농경지로 개간하기 위해 명지도 내부에 7㎞의 명지방 조제를 축조했다. 이후 염전으로 유입되던 바닷물이 차단되어 명지도 동쪽과 섬 내부의 염전이 사라지게 되었고 염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으로 전업하였다(그림 5; 조선총독부, 1926).

명지방조제 축조와 함께 설치된 수로는 명지지역 의 양·배수로 역할을 하였다. 주민들은 대저수문과 녹산수문으로 담수화된 서낙동강 물을 수로와 구거3) 를 통해 농업용수로 사용하였다. 명지도 내부에서 발 생되는 오·폐수는 수로를 통해 서낙동강으로 배수하 거나 감조피해를 막기위해 기존의 갯골에 설치한 명 지수문4)과 중신수문5)을 통해 남해 바다로 직접 배수

그림 2. 연구지역의 공간 변화 시기구분

그림 3. 산업 전개과정 구분

(5)

했다(그림 5; 김해농지개량조합, 1996; 조선총독부 등, 2010a).

낙동강제방과 명지방조제 축조 이후 명지지역 북 단 진목리는 소형 양수기를 통해 서낙동강 물을 관개 할 수 있었지만 양수능력이 부족하여 식량 생산량은 떨어졌다. 명지도는 1935년에 설치된 수로를 따라 농 업활동이 가능했지만 수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관 개용수의 부족으로 인해 농업활동에 어려움을 겪었 다. 이처럼 명지방조제 축조를 통해 감조에 의한 피해 는 차단되었으나 수리시설 미비로 인해 식량 생산의 어려움은 194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2) 1940~1950년대

앞서 기술한 특성으로 상부 삼각주의 가락면과 대 저면에 비해 식량 생산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명지 지역은 1940년대 후반 김해수리조합의 구역확장공 사가 이루어진 이후에 오늘날과 같은 농경지의 모습 을 갖췄다. 김해수리조합은 진목, 중리, 조동, 평성, 신전, 동리지역 약 770만㎡를 관개할 수 있는 경등양 수장6)과 명지양수장7)을 신설하고 용수로를 확장했다 (김해농지개량조합, 1996).

김해수리조합은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명지지역 북단에 경등양수장을 준공하고 최남단 전등지역까지 이어지는 2개의 용수로 간선(약 4.8㎞)과 6개의 지선 (약 2.5㎞)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문헌에는 간선과 지 선의 정확한 위치가 표시되지 않았고 현지조사에서 는 남아있는 간선만 확인할 수 있었다(그림 5).

순아도(A)와 명지도(B) 사이에는 낙동강제방으로 막혀있어 농업용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으나, 제방 남쪽에 명지양수장을 설치하여 경등양수장에서 보낸 농업용수를 재양수해 최남단 전등지역까지 관개하였 다. 김해수리조합은 별도의 배수로를 만들지 않았는 데 이는 낙동강제방과 명지방조제 축조 이후 홍수에 의한 범람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후반 김해수리조합은 신포지역의 부족 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신포양수장8)과 용수로를 추 가로 신설하고 경등양수장에서 양수되는 농업용수의 염피해 방지를 위해 순아수문9)을 축조하였다. 명지지 역의 저습지 및 염전은 김해수리조합의 구역확장공

그림 4. 낙동강제방과 명지방조제 축조이전의 토지이용

(1920년대)(조선총독부(1926)에 수록된 지도를 수정)

그림 5. 김해수리조합에 의한 공간변화와 수리시설

(1940~1950년대)

(6)

사로 구축된 양·배수시설체계가 들어서면서 현재와 같은 수리 안전 농경지로 바뀌게 되었다. 수리시설의 설치와 관개수로 확장에 의해 형성된 농업적 경관은 현재까지도 이 지역을 대표하는 경관으로 남아있다.

2) 경지정리와 새로운 토지이용기:

1960~1980년대

두 번째 시기인 경지정리와 새로운 토지이용기는 1960년대 이후 정부에 의해 진행된 경지정리사업을 시작으로 낙동강 하구둑이 축조되면서 개편된 도로 망을 통해 지역의 기능이 변화되는 1980년대 후반까 지이다.

(1) 1960~1970년대

식량 생산을 목적으로 명지지역 내의 저습지와 염 전 터가 경지화된 이후 정부 주도하에 또 다른 형태의 공간과 경관변화가 시작되었다.

1964년 처음 시작된 경지정리사업은 경제개발 5개 년 계획에서 공업발달 정책에 밀려 지원규모가 미약 했으며, 정부주도사업으로 사업비의 분담비율 조정 등이 이루어진 1972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사업 이 시행되었다.

부산직할시 수영구에 있었던 수영비행장은 1963년 국제공항으로 승격된 후, 늘어나는 화물과 승객을 수 용하기 위해 1976년 8월 공군기지로 사용하던 김해 비행장으로 이전하고, 김해국제공항으로 격상되었다 (부산강서구지편찬위원회, 2014).

정부는 낙동강 삼각주에 국제공항을 이전 시킨 이 후 공항 주변의 전통적인 갈대지붕 민가가 미관상 좋 지 않다는 이유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시켰다(장 보웅, 2000). 강물과 바닷물이 합류하는 낙동강 삼각 주의 저습지는 광활한 면적의 갈대 자생지였다. 갈대 는 주로 바닷물과 강물이 혼합되는 하천의 양안과 하 중도에 자생했다. 일반적으로 민가의 지붕 재료는 주 민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사용 하는 경향이 있는데, 낙동강 삼각주의 민가지붕 재료 는 갈대와 볏짚이 주로 사용되었고 명지 인근에서는 주로 갈대가 사용되고 있었다. 지붕 교체사업은 1973

년부터 진행되었고, 1973년에는 122채, 1974년에는 128채, 1975년에는 141채가 교체되었다(표 1). 부산 국제공항이 낙동강 삼각주로 이전하던 해인 1976년 에는 2,134채의 갈대지붕 민가가 기와 및 슬레이트 지붕으로 급격하게 교체되었고 90년대 초에는 갈대 지붕민가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정부는 지붕 교체사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농 촌근대화촉진법10)에 의거해 공항 주변 경지에 대해 경지정리사업을 시행하였다. 이 사업에는 신전, 평 성, 조동, 진목, 중리, 동리 총 6개 부락 약 30만㎡에 달하는 경지가 포함되었다(그림 6). 사업부지에는 지 역주민들 소유의 묘지 9,000기가 포함되었으며 묘 지 이장 문제로 지역주민들과 사업관계자들 간의 다 툼이 빈번했다(그림 7; 김해군, 1976; 부산직할시, 1982a; 1982b; 장보웅, 2000).

표 1. 지붕 교체현황 자재별 개량현황

연도 계 기와 기와형

슬레이트

골 슬레

이트 기타

1973 122 0 1 121 0

1974 128 0 12 60 56

1975 141 20 5 116 0

1976 2,134 297 66 1,771 0 자료: 김해군( 1974~1977)

그림 6. 경지정리사업의 범위와 공동묘지의 분포

(1960~1970년대)

(7)

(2) 1980년대

명지지역 내부의 묘지가 농경지로 정비되던 시기 에 저습지 또한 새로운 형태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1981년까지 부산시는 매립희망자를 선정해 저습지 에 쓰레기를 매립하였다. 매립을 희망하는 저습지 소 유자들은 부산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로 매립재료를 대체함으로써 매립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부산시에 서는 1963년부터 1981년까지 부산에서 발생하는 쓰 레기를 다대(1977), 신평(1980~1981)에 분포하던 저 습지를 활용하여 매립하였다(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 회, 1989; 부산발전연구원).

그러나 1982년부터는 매립희망자가 없어 부산시 에서 직접 매립지 확보에 나섰고 해척마을 서쪽 바 닷가에 있는 성창임원개발 소유의 저습지 52만㎡

에 21억원의 예산을 들여 쓰레기매립지(명지매립지) 를 조성하였다. 명지지역 내의 매립기간은 1982년 부터 1985년까지이고 1982년 1,314,439t, 1983년에 는 858,900t, 1984년에는 1,180,222t, 1985년에는 1,222,750t으로 총 460만t이 매립되었다(표 2, 그림

8).11)

명지매립지는 매립 당시 주거지와 거리가 멀어 큰 민원이 없었으며, 1986년 이후에는 노지로 방치되어 오다 1995년부터 감천항으로 들어오는 해외 수입원 목의 임시야적장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명지국제 신도시 사업에 포함되어 공원이 조성되고 있다(부산 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89; 부산일보, 2009; 부산발 전연구원).

한편, 1983년 낙동강 하구둑 건설 사업이 시작되면 서 명지지역의 공간 및 주민 삶에 큰 변화가 나타났 다. 하구둑 건설로 낙동강 하구의 감조구간이 사라져 24시간 취수가 가능해졌고 연평균 약 6,500만㎥의 용 수가 추가로 확보되어 부산 및 낙동강 하류지역의 생 활용수와 산업(공업)용수로 이용되었다. 수문의 역할 을 겸하는 교량은 부산 중심지와 김해, 진해 방면의 접근성을 향상시켰다(그림 8; 건설부·한국수자원공 사, 1988;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89).

낙동강 하구둑은 이 지역의 교통체계를 변화시켰 다. 하구둑 축조 이전에는 명지에서 부산 중심지로 이 동할 때 신포나루의 나룻배와 도선이 하단나루와 연 결되었으나, 하구둑 공사가 시작된 이후 주변의 물 살이 빨라져 기존 도선은 기능을 상실하였다(그림 9-①). 도선이 폐지된 이후, 하구둑 축조기간에는 낙 동강제방을 활용하여 건설된 2번국도, 공항로, 서부 산 낙동강교를 잇는 도로를 통해 부산과 연결되었다

그림 8. 매립과 하구둑 건설에 따른 공간변화(1980년대) 그림 7. 1960년대 진목리 청량사 주변의 묘지 경관

(부산강서구지편찬위원회, 2014)

표 2. 연도별 쓰레기 매립양

연도 매립지 매립양( t)

1982 명지, 대저매립지 1,314,439

1983 명지매립지 858,900

1984 명지매립지 1,180,222

1985 명지, 화명매립지 1,222,750

자료: 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89)

(8)

(그림 9-②). 1987년 낙동강 하구둑이 완공된 이후에 는 신포나루와 하단나루 구간이 하구둑과 교량을 통 해 연결되어 2번국도는 현재와 같은 노선을 갖게 되 었다(그림 9-③).

2번국도와 낙동강 하구둑 교량 연결공사에서 나오 는 준설토는 공유수면 매립에 활용되어 낙동강하구 둑매립지가 조성되었고, 이전까지 낙동강제방 밖에 서 거주하던 주민들은 매립지에 조성된 명지새동네 로 이주했다(그림 8, 10). 이곳에 이주단지를 만들기 위해 1966년에 지정된 문화재보호구역12)이 완화되었

고 명지동의 여타 마을들과는 다르게 고층건물(5층) 과 상업시설에 대한 건축이 허가되었다.

3) 도시개발에 따른 변화: 1990~현재

마지막 시기인 도시개발에 따른 변화는 부산시의 부족한 산업용지와 주택용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 명지동 남쪽의 명지주거단지 조성을 시작 으로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 에코델타시티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재까지이다.

(1) 1990~2000년대

1980년대 정부의 ‘동남권 개발계획’13) 수립으로 부 산의 산업기반 강화를 위한 명지·녹산국가산업단지

14)가 조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66년에 문화재보 호구역으로 지정된 명지지역은 산업용지에서 국가 주도의 주택사업단지로 변경되어 녹산국가산업단지 의 배후주거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고 서부산권의 중 심기능을 강화를 위한 대규모 아파트단지(명지주거 단지)가 조성되었다(그림 11).

명지주거단지 조성을 위해 1990년대 초반부터 명 지동 최남단 약 155만㎡의 공유수면을 매립함에 따라 중신수문과 명지방조제의 기능을 대신할 배수펌프장

15)(하신, 명지배수펌프장)과 방조제가 설치되었다.

현재 명지주거단지 진입로가 명지방조제 기능을 하 고 있으며 하신, 명지배수펌프장이 내수를 배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부산광역시 건설본부, 2000b).

명지지역은 199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도로 신 설 및 확·포장 공사를 통해 교통로를 대대적으로 확 충하였다. 명지주거단지와 녹산국가산업단지 조성 과 동시에 녹산국가산업단지와 명지를 잇는 신호대 교(1997)와 신평·장림산업단지와 명지를 잇는 을숙 도대교(2009)를 건설하여 기존 도로의 교통 혼잡을 개선하였다. 이와 더불어 왕복 4차선이었던 2번국 도(2001), 공항로(2001), 녹산교(2004)와 낙동강 하 구둑 도로(2004)가 왕복 8차선으로 확·포장되었고 2번국도와 공항로를 연결하는 명지I.C공사(2000) 가 함께 진행되었다(그림 11; 부산광역시 건설본부, 2000a, 2000b; 부산광역시, 2001; 부산광역시 강서

그림 9. 교통체계의 변화

그림 10. 낙동강 하구둑 축조 당시의 명지 새동네의 모습

(건설부·한국수자원공사, 1988)

(9)

구청, 2002~2016; 한국지반공학회, 2007).

(2) 2010년대

2003년 명지동은 서부산권 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부산·진 해 경제자유구역의 일부지역인 명지국제신도시는 부 산신항만과 첨단산업단지의 배후지역으로 국제 업무 시설, 외국교육기관, 의료기관, 호텔, 컨벤션센터와 생태공원이 조성될 계획이다. 이 사업은 2003년부터 2020년까지 1·2단계로 나누어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2010년부터 1단계 공사가 시작되었다.

2011년 문화재보호구역 4.07㎢를 해제하고 명지매립 지를 제외한 1단계 전 구역의 보상이 완료되었으며, 2016년 현재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부산진해 경제자 유구역청, 2006).

명지국제신도시 계획 당시 명지매립지에 글로벌 캠퍼스타운16)이 들어설 예정이었으나 다른 문화재보 호구역과의 개발형평성을 고려하여 대형구조물 설치 를 지양하고 각종 쓰레기로 인해 오염된 매립지의 자 연환경을 복원하는 공원을 만드는 것으로 계획이 변 경되었다(부산광역시 도시계획실 도시계획과, 2015).

현재 매립물을 꺼내어 친환경자원 순환 복원센터로 옮겨 분류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재처리를 위 해 수개월 동안 여러 단계에 걸쳐 소각용과 재활용으 로 나누는 공정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여 이로 인해 전 체 공사기간이 늦춰지게 되었다(그림 12; 연합뉴스, 2015;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청).

현재 명지국제신도시에서는 개발에 따른 여러 가 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명지국제신도시 1단계 공사로 인해 개발예정지인 해척, 평성마을의 진입로 가 사라져 주민들은 농로를 이용하는 불편을 겪고 있 으며, 기존의 마을버스 노선이 폐지 혹은 변경되어 주 민들의 민원이 제기되기도 했다(강서 마을버스 14번 운전자). 2016년 현재 명지국제신도시 입주민을 위한 도로가 명지양수장에서 명지주거단지까지 구축되어 이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명지국제신도시 공사가 아 직까지 완료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먼저 입주한 주민 들은(2015년 6월 입주) 아파트 주변에서 진행되는 공 사로 인한 소음 및 분진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한편, 명지국제신도시 2단계 지역인 해척, 평성마 을이 2017년부터 택지보상을 받는 것이 알려진 이후, 대파 재배지에는 보다 많은 보상을 노리고 비닐하우 스 시설물이 갑자기 설치되기도 하였다.

국제산업물류도시는 이명박 정부(2008~2012)의 공약 및 국책사업으로 부산 발전에 있어 최대 장애요 인인 산업용지 부족을 해결하고 서부산권 발전 기반 을 조성하는 개발계획이다(부산에코델타시티). 국제 산업물류도시의 핵심지역인 에코델타시티는 강서구 명지동, 강동동, 대저2동 일원으로 부산·진해 경제자 유구역, 김해국제공항, 신항만과의 연계산업중심지 로 자연형 하천을 개발하여 총 33㎢ 면적의 광역산업 단지, 복합물류단지를 조성하고 친수·생태형 수변 자 족도시로 개발할 계획이다. 2014년 에코델타시티 사

그림 11. 동남권 개발계획에 의한 공간의 변화

(1990~2000년대)

그림 12. 서부산권 개발계획에 따른 공간의 변화(2010년대)

(10)

업부지 중 명지지역의 토지보상이 완료되어 현재 공 사가 진행되고 있다(그림 12).

4. 산업의 변화

1) 염업 및 농업

(1) 염업

김호종(1989)은 염전의 다섯가지 입지조건을 정리 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염전 부근에 연료 가 풍부해야 한다. 둘째, 평탄한 간석지와 미세한 토 사가 부근에 구비되어야 한다. 셋째, 굴을 비롯한 패 류가 염전 부근에 많아야 한다. 넷째, 생산된 소금을 운송하기 편리한 곳이어야 한다. 다섯째, 염전 배후 지에 인구가 많아야 한다. 명지지역은 염전에 사용될 질 좋은 토사, 연료로 사용될 갈대 그리고 낙동강 수 운을 이용한 배후시장과의 접근이 용이하여 염전의 입지조건에 부합하는 곳이다(그림 4; 류승훈, 2006).

명지지역에서 생산된 소금은 바닷물을 가마솥에 붓고 끓여서 결정을 얻는 자염식이었다. 이렇게 생산 된 소금은 낙동강 수운을 통해 구포를 거쳐 북으로는 경북 안동, 서로는 경남 단성(진주)까지 운반되었고, 일부는 하단을 거쳐 부산으로 운송되었다. 이처럼 넓 은 배후시장을 가진 명지소금은 영남 제일의 소금으 로 유명세를 떨쳤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35년 명지방조제 축조 이후 해수 유입이 차단되 어 명지도의 동쪽과 내부에 분포하던 많은 수의 염전 이 사라지게 되었다(그림 5). 이로 인해 명지지역 염 전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고 명지방조제 밖 남단에 남 은 적은 수의 염전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보급된 천 일제염방식과 전통적 자염방식을 절충한 형태로 명 지소금의 명맥이 유지되었다. 해방 이후 소금이 수입 이 차단되어 국내 소금 가격이 상승했을 때 소규모로 운영할 수 있는 자염식 민제염전17)이 전국적으로 많 이 생긴 결과 명지염전18)은 염업의 부흥이 일어나 제2 의 전성기를 맞기도 했다(표 3; 류승훈, 2006; 대한염 업조합연합회, 1957).19)

명지염전에서 생산된 자염은 1946년 681t, 1947년 에는 1,038t이었으나 1948년에는 민제염전 전체 생 산량이 감소하였는데, 이는 그해 7월 펄호 태풍으로 인해 염전이 침수되어 소금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 다. 1949년 민제염전의 생산량 급증은 해방 이후에 조사되지 않았던 민제염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명지염전에서 생산된 자염은 해방 이후부터 1949년 까지 민제염전 생산량의 10~20%를 차지하였다(동아 일보, 1947; 1948).

그러나, 1949년 민제염전 진흥정책이 시행된지 6 년이 지난 1955년에는 1954년 82,272t에서 237,066t 으로 천일염이 전체 소금 생산량의 98%를 차지하는 반면에 자염이 차지하는 비율은 1% 미만으로 감소하 였다(표 3; 경향신문, 1949). 이는 자염의 생산비용 중 절반을 차지하는 연료비 상승으로 인해 명지염전 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천일염 방식으로 전환된 결과이다. 1950년대 우리나라 자염 생산량의 대부분 을 차지했던 명지염전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염 전이 모래에 파묻혀 타격을 받은 이후, 1960년 정부 의 염업정비임시조치법20)으로 인해 염전의 복구가 이 루어지지 않은 채 점점 쇠퇴하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대한민국 총무처, 1960).

표 3. 민제염전의 소금 생산 동향(1946~1956년)

(단위: t )

연도 명지염전의

자염 생산량

전국의 자 염 생산량

전국의천일 염 생산량

전체 생산량

1946 681 3,643 40 6,569

1947 1,038 4,360 112 6,248

1948 154 324 197 1,319

1949 4,943 14,901 8,144 25,800

1950 1,537 3,949 11,648 16,727

1951 556 1,786 18,969 22,085

1952 4,358 7,222 54,692 62,045

1953 1,766 2,923 89,881 95,298

1954 1,233 1,390 82,272 84,145

1955 2,227 2,497 237,066 241,456

1956 2,358 2,500 130,412 135,326

자료: 대한염업조합연합회( 1957)

(11)

(2)농업

명지지역에서의 농업은 낙동강제방을 기준으로 북 부지역(A)과 남부지역(B)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그림 5). 북부지역은 1940년대 이후 수리체계 구축 및 경지 정리사업으로 구획정리가 잘 이루어진 논이 주를 이 루고 있는 벼농사 중심지역이다. 남부지역은 기존 염 전 및 주택으로 인해 불규칙한 경지경계를 갖고 내염 성이 강한 대파를 재배하는 지역이다. 본 연구에서는 다양한 경관변화가 나타난 남부지역에서 이루어진 대파 농업의 전개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내염성 작물로 알려져 있는 대파는 생장에 있어 일 정량의 염분이 필요하다. 갯골이 명지도와 순아도 내 부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양에는 염분 함유량 이 높아 대파 생장에 적합했다. 내한성 작물로도 알려 진 대파는 우리나라에서 동계 평균기온이 가장 높은 남해안 기후와 성장조건이 부합한다. 명지에서 생산 된 대파는 출하 전까지 총 3번의 북주기21)를 통해 다 른 지역의 대파보다 줄기의 연백부가 길어 상품가치 가 높았다. 대파의 생장에 적합한 자연적 입지 조건은 1970년대 명지지역이 영남 제일의 소금 생산지에서 전국 최대의 대파 생산지로 변모하는데 기여하였다.

명지지역 대파 재배의 시초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인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있던 ‘황수’라는 농민이 해방 이후 일본인이 남기고 간 대파 종자를 밭에 뿌려 재배 한 것으로 보고있다(주경업·최경헌, 2012). 그러나 현지조사 때 실시한 지역주민과의 면담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대파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증언 들도 있었다(지역주민 정호순).

명지의 대파농업은 낙동강제방과 명지방조제 축 조 공사가 진행 중이던 1933년부터 1943년까지는 수 리체계가 구축되지 않아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적었 으나 김해수리조합의 구역확장공사가 끝난 뒤 증가 하기 시작해 1953년에는 생산량이 1943년에 비해 1,926t이 증가하였다. 1963년 대파 재배면적은 1953 년에 비해 5배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은 1953 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는 그해 6월 셜리 호 태풍과 연이은 집중호우로 명지지역의 농경지가 수해를 입은 결과이다(표 4; 동아일보, 1963).22)

부산직할시로 편입된 1983년에는 1973년에 비해

대파 재배면적은 감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파 생 산량은 늘어났다. 이는 명지지역의 면적 당 대파 생 산량이 높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는 대파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계속해서 증가했으나 2003년부터 진행된 서부산권 개발로 인 해 대파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다.

명지동의 대파 생산량 증감은 우리나라 라면사업 과 관련 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이후 1962년까지 가뭄과 흉작이 발생해 국내 미곡 가격이 상승하자 정 부는 불안정한 미곡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1962년 11월 혼분식 장려운동23)을 시행하고 ‘분식의 날’을 제 정했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로 지정된 분식의 날에 는 일반 음식점에서 분식만을 판매하도록 하였다. 정 부의 혼분식 장려운동으로 인해 대체재인 밀가루 소 비량이 늘어났고 라면, 빵과 과자 등이 많이 생기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국가기록원).

정부의 ‘분식의 날’ 제정으로 인해 인스턴트식품 붐 이 일어났고 라면의 수요가 5년 동안 500% 증가하였 다(매일경제, 1972b). 표 4는 대파와 라면과의 관련 성을 보여준다. 1953년 대파 생산량은 3,306t이었으 나 라면 출시(1963년 삼양의 닭라면) 이후인 1973년 대파 생산량은 21,366t으로 1953년에 비해 18,060t이 증가하였다. 이는 라면 생산량이 증대함에 따라 보완 재인 대파의 수요량도 함께 증가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라면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대파의 수요는 더욱 증가하였고 신안, 진도, 영광을 비롯한

표 4. 명지지역의 대파 재배면적과 생산량 연도 재배면적( ha) 생산량( t)

1933 217 1,601

1943 251 1,380

1953 381 3,306

1963 1,524 1,567

1973 1,412 21,366

1983 666 24,176

1993 1,194 35,760

2003 1,057 33,924

2013 637 17,918

자료: 농림부, 1933~1973; 부산시, 1983~2013

(12)

전라도에서 대규모로 대파를 재배하면서 대파의 주 생산지는 전라도가 되었다(표 5). 1970년에는 명지의 대파 재배면적 1,355ha, 생산량 20,786t으로 우리나 라 전체 대파 재배면적의 22%, 전체 생산량의 30%를 차지했다. 그러나 1980년 이후 전라도의 대파 재배면 적과 생산량이 계속해서 늘어나 2010년에는 재배면 적 6,017ha, 생산량 171,048t으로 우리나라 전체 재 배면적의 36%, 전체 생산량의 40%를 차지한 반면 명 지는 재배면적 685ha, 생산량 22,803t으로 전체 재배 면적의 4%, 전체 생산량의 5%를 차지하였다.

2011년 명지대파는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대파 중 처음으로 정부 품질인증24)을 받았으나, 2014년 신 안군에서 대파에 대한 ‘지리적 표시’ 등록을 마쳐 대 파산지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 재까지 명지대파는 낙동강 하구 지역의 대표특산물 로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대파 재배 지가 명지국제신도시 조성부지에 포함되어 있어 향 후 대파 재배지는 염전과 같이 산업용지와 주택용지 로 대체되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2) 어업

(1) 하구둑 축조 이전의 어업

낙동강 하구는 염수와 담수가 만나는 기수역으로 어자원이 풍부해 다양한 어업활동이 이루어졌다. 낙

동강 하구에서는 감성돔, 잉어, 뱀장어 등의 어류, 재 첩, 백합 등의 패류, 김, 갈게 등의 해조류 및 갑각류 가 주로 잡혔다. 하구둑 축조 이전 어민들은 패류채 취, 어획 등으로 어업활동을 영위하였다(그림 13; 강 서향토지발행추진위원회, 1988).

낙동강 하구에서 채취하던 대표적인 패류는 재첩 이었다. 재첩은 강바닥에 흩어져 있어 배를 타고 다 니면서 기다란 대나무 막대기 끝에 채를 붙인 ‘거랭 이’로 강바닥을 긁어 올려 잡거나 호미와 갈고리로 갯 벌 바닥을 긁거나 뒤집어 채취하였다. 이후 재첩 분 류장에서 분류과정을 거쳐 명지지역 근교의 시장에 판매되었다. 1969, 1970년에 채취된 재첩량은 510t, 300t이고 이후의 수치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와 비슷 한 양이 채취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김해군, 1970~

1971). 재첩국은 숙취 해소를 위한 부산 사람들의 아 침 식탁에 자주 올랐으며, 구포에는 재첩국을 전문으 로 하는 식당이 여럿 있었다(강서향토지발행추진위 원회, 1988;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낙동김은 언제부터 채취했는지 알 수 없으나 김 양 식이 시작된 것은 1910년대이다. 김 양식에 사용되던 어구는 김 포자가 잘 붙도록 7~8개 정도의 갈대를 짚 으로 묶은 것이다. 김 양식은 가덕도 눌차만의 갯벌에 갈대 묶음을 꽂은 뒤 자연 포자가 갈대 묶음에 붙어 생장하기를 기다린 후, 포자가 붙은 갈대 묶음을 명 지 앞바다 갯벌에 줄을 치고 지렛대로 구멍을 뚫은 뒤 45~55도 기울기로 꽂아 김이 생장하면 썰물 때 채취 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34, 35년에 발생한 80년 주기의 대규모 홍수로 김 양식장이 모래로 뒤덮이고 양식 어구가 유실된 후 낙동김 양식업은 한동안 쇠퇴하였다(조선총독부 등, 2010b). 1949년 김해어업조합25)에서는 전남지역 의 홍죽26)20만 본을 사들인 뒤 명지 앞바다에 설치 하여 김 양식 재건을 시도하였다. 이후 1961년 116t, 1964년에는 52t, 1966년에는 174t, 1967년에는 115t, 1969년에는 6t이 생산되었으며 1961년부터 1969년까 지 생산된 김의 95%가 일본으로, 나머지 5%는 미국, 태국 등으로 수출되었다(동아일보, 1939; 매일경제, 1972a; 대한민국수산청, 1961~1970; 부산강서구지 편찬위원회, 2014).

표 5. 명지와 전라도의 대파 생산량 비교

계 명지 전라도

1970 재배면적(ha) 6,006 1,355 710

생산량( t) 70,067 20,786 7,235

1980 재배면적( ha) 16,546 868 4,065

생산량(t) 454,867 27,860 111,999

1990 재배면적( ha) 18,548 946 5,790

생산량( t) 465,510 27,907 159,501

2000 재배면적( ha) 24,316 1,275 8,254

생산량( t) 657,881 28,932 250,633

2010 재배면적( ha) 16,317 685 6,017

생산량(t) 417,229 22,803 171,048

자료: 농림부, 1970; 통계청, 1980~2010

(13)

1970년 일본에서는 부류식 김양식법이 개발되어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김양식업계에 대한 일본정부 의 지원정책으로 한국산 김 수요가 감소하여 수출이 막히게 되었다. 1971년 수산청에서는 녹산동에 위치 한 삼흥수산에 낙동강 하구 400ha의 김 양식면허를 발급해주고, 김 생산에 필요한 채취기, 탈수기, 절단 기와 건조기 등을 일본으로부터 도입하였다. 또한, 일본의 김 종묘 인공배양기술, 부류식 양식법, 연 2모 작이 가능한 냉동망 재배법을 낙동김 양식업계에 전 파하였다(매일경제, 1972a).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김 양식 기술과 기계를 바탕 으로 생산된 낙동김은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는 일본 김 양식기술의 발달 로 먼 바다에서 김 양식이 가능했지만, 바닷물과 강물 이 만나는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고급 김은 생산되지 않아 낙동김의 수입을 재개한 것이다. 그러나 1977년 에서 1978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 발생한 이상고온 현상으로 바닷물 속 김포자가 썩게 되었고 이는 김 생 산량 감소로 이어져 국내 김 가격이 폭등하여 국내 소

비가 시작된 이후 전량 국내에서 소비되었다(매일경 제, 1972a; 경향신문, 1978).

(2) 하구둑 축조 이후의 어업

1987년 하구둑 축조로 인해 낙동강으로 바닷물 유 입이 차단되면서부터 발생한 환경적 변화는 명지지 역 어·패류의 채취와 생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낙동 강을 대표하는 재첩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대안 으로 떠오른 섬진강의 재첩이 부산의 수요를 대신하 게 되었다. 하구둑 축조 이전 명지 앞바다에는 백합과 김의 복합양식장이 조성되어 있었다(그림 13). 백합 과 김은 복합양식면허가 있어야 양식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구둑 축조 이후 생태계 변화로 명지 앞바다 에서 채취되던 백합이 사라진 이후, 주민들은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대체 종을 찾기 시작했다.

백합의 빈자리는 개량조개27)가 대신하게 되었으 나 기존의 복합양식면허로는 채취가 인정되지 않았 다. 1990년대 초반 어민들은 백합의 대체 종으로 개 량조개를 복합양식면허로 인정해 달라고 관할구청에 요구했으나 수용되지 않았고 한동안 개량조개 채취 는 불법어업으로 간주되었다(부산일보, 1997). 1990 년대 후반 부산시의 어장이용개발계획으로 인해 김 과 개량조개의 복합양식이 승인되면서부터 개량조개 채취가 가능해졌다(국제신문, 1997). 현재 개량조개 양식장은 김 양식장과 합께 복합양식을 하는 곳과 별 도로 개량조개만 양식하는 곳으로 나뉘어 있다(그림 13).

개량조개는 1년 내내 채취할 수 있지만 가장 많이 채취하는 시기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이다. 개 량조개 채취방법은 ‘앵커(anker)’를 어선에 연결하여 갯벌에 고정시킨 후, 배를 150~200m 정도 전진시켜 바닥을 뒤집는다. 이어 개량조개 채취기를 투척하여 채취기 입구가 갯벌 바닥을 긁어 조개를 캐낼 수 있는 상태로 만든 뒤에 배를 후진시켜서 조개를 채취한다.

채취기의 그물망에는 갯벌의 뻘과 함께 조개가 담기 나, 뻘은 바닷물에 쓸려 그물망 밖으로 빠져나가고 어 민들은 남은 조개를 골라낸다.

이렇게 채취된 개량조개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국내 판로가 없어 속살을 빼내어

그림 13. 하구둑 축조 이전과 이후의 어업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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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린 뒤 일본으로 전량 수출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국내 판로가 생기면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양이 줄었 으나 수출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명지동 동쪽 의 명지선창회타운에서 갈삼구이, 갈삼샤브샤브 등 의 메뉴를 개발하여 개량조개를 판매하고 있다. 낙동 강 하구둑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명지선창회타운 은 기존의 명지시장과는 달리 지역주민들뿐만 아니 라 외부 관광객들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어 민들의 또 다른 소득 창출원 중 하나이다.

청게는 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기수역 지대에 서식하는 종으로 1960~1970년대 부산시의 해외수입 원목 사업에 의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낙 동강 하구둑 축조이후 청게는 사라지다시피 했으나 1990년 후반부터 다시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 란기에도 계속되는 남획과 치게마저도 잡는 무차별 적인 어획에 따라 어획량은 다시 급감하였다. 다행히 2010년 부산수산자원연구소에서는 청게 인공종묘 생 산에 성공하였고 2011년부터 낙동강 하구에 방생한 결과 개체 수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표 6; 부산일보, 1998; 국제신문, 2006; KNN 뉴스, 2015).

보통 청게 몸통의 길이는 20cm, 집게발은 좌우 각 각 10cm로 꽃게에 비해 3배 정도 크다. 낙동강 하구 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청게 집단 서식처로 알려져 있고 어업 시기는 8월부터 10월까지이다. 현재 낙동 강 하구에서 잡힌 청게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용 원동 의창수협 경매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청게는 어획량이 많지 않아 한 마리당 도매가격 2~

3만원에 이를 정도로 비싸게 거래되어 지역 어민들에 게 중요한 소득 창출원이 되고 있다. 청게의 어획은 2013년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표 7).

2014년에 비해 2015년 어획량이 줄어들었는데 이는 현 재 진행되고 있는 각종 개발 사업으로 인해 서식처가 파괴되어 개체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낙동김의 특징은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김과 달 리 강물로부터 얻는 영양분이 많아 고급 김으로 여겨 졌다. 그러나 1984년 낙동강 하구둑 착공을 시작으로 명지주거단지, 녹산국가산업단지, 장림·신평산업단 지 조성과 하수처리장에서 흘러나오는 오·폐수로 인 해 바닷물이 오염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산량이 감 소하기 시작했다(한겨레, 1990).게다가 1987년 낙동 강 하구둑 완공으로 인해 강물의 유입이 제한되어 낙 동김 양식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 양식 시기인 9~10월에 태풍이나 호우로 인해 하구둑이 개방되면 일시에 흘러나온 담수에 의 해 바닷물의 염도가 떨어져 김 양식장은 큰 피해를 입 었다. 이러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하구둑 축조 이후 기존의 갯벌 양식장으로부터 1~7㎞ 정도 떨어진 먼 바다로 이동하였다(그림 13).

현재 낙동김은 전국 김 재배 면적의 0.7%에 불과하 지만 생산금액은 5%를 차지할 정도로 품질이 좋다.

이곳에서 생산된 김의 90%가 전라도지역으로 팔려나 가고 일부는 신호동이나 용원으로 반출된다. 이에대 해 최병찬(낙동김 가공공장 사장)은 ‘전라도 김은 바 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억센 반면에 명지에서 생산되는 낙동김은 부드러워 완도김과 낙 동김을 혼합해야 김밥용 김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 명지지역에 분포하던 김 가공 공장 기계의 수는 150대였다. 그러나 각종 개발 사업 으로 인해 김 양식장의 면적이 감소하고 낙동김에 대 한 홍보부족으로 판로가 제한되어 수익감소와 설비 감축이 계속되고 있다.

표 6. 매년 생산되는 청게의 종묘 수 품종/연도별 2011 2012 2013 2014

청게(마리) 50,000 50,000 57,000 246,000 자료: 부산수산자원연구소

표 7. 청게의 어획량과 경매금액

연도 상자( 10마리) 경매금액(원)

2013 1,312 87,752,000

2014 4,799 312,297,000

2015 1,710 146,653,000

자료: 의창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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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약 및 결론

본 연구에서는 낙동강 삼각주에 속해있는 명지동 을 사례로 공간과 경관의 변화를 연구하였다. 1910년 대부터 현재까지의 공간 변화를 추적하고 현지조사 및 문헌자료 분석을 통해 지역주민들의 적응과정을 확인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연구지역에서 이루어진 공간 변화는 크게 세 시기 로 구분할 수 있었다. 공간 변화의 첫 번째 시기는 농 업공간의 확보기로 1910년대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이다. 1935년 조선총독부의 일천식 개수공사로 낙동 강제방과 명지방조제가 축조된 직후, 명지도와 순아 도의 저습지와 염전 터는 농경지로 바뀌었으나 수리 시설체계가 미비하여 식량 생산에 문제가 많았다. 이 러한 문제는 1940년대 후반 김해수리조합의 구역확 장공사로 인해 해결되었다.

두 번째 시기는 경지정리와 새로운 토지이용기 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이다. 명지지역 에 분포하던 묘지와 전통적인 갈대지붕 민가 경관은 1970년대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진 경지정리사업과 부산국제공항의 이전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980년 대에는 명지지역 서쪽의 저습지가 명지매립지로, 바 닷물의 역류를 차단하는 낙동강 하구둑 공사에서 나 오는 준설토로 낙동강 하구둑 매립지를 만들고 이주 단지를 조성하였다.

마지막 시기는 도시개발에 따른 변화기로 1990년 대부터 현재까지이다. 이 시기 부산시의 부족한 산업 용지와 주택용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농경 지가 산업용지와 주택용지로 바뀌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공간적 변화와 더불어 명지지역의 산업은 크게 염 업, 농업, 어업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먼저, 염업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진행되었고 1935년 낙동강제방과 명지방조제 축조로 인해 많은 수의 염전이 문을 닫게 되었다. 명지방조제 축조 이후 명지동 남단에서 명맥 을 이어가던 염업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염전 터 가 모래에 파묻힌 이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1935년 명지방조제 축조로 방조제 내부의 염전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자 염전 터에 대파를 심기 시작했다. 이후 이 지역의 대파 농업은 1960년대 ‘혼 분식 장려운동’이 제정되면서부터 라면사업과 동반 성장한 결과 1970년대 우리나라 대파 주생산지가 되 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폭증하는 라면 수요에 따라 신안, 진도, 영광 등에서 대규모로 재배됨에 따 라 전라도지역이 대파의 주생산지가 되었다. 아직까 지 대파산지로서 명맥은 유지하고 있으나 명지국제 신도시 사업이 진행되면서 대파 재배지는 산업용지 와 주택용지로 대체되고 있다.

어업은 낙동강 하구둑 축조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었다. 하구둑 축조 이전에 진행된 대표적인 어업활 동은 재첩 채취와 낙동김 양식이다. 낙동강 하구에서 채취된 재첩은 인근의 부산에서 대부분 소비된 반면, 낙동김은 고급 김으로 일본에 전량 수출되어 어민들 의 소득원이 되었다.

그러나 하구둑 축조 이후 생태계 변화로 인해 포획 되는 어·패류의 변화가 발생하였고 주민들의 어업활 동 역시 바뀌게 되었다. 패류 양식업에서는 하구둑 축 조 이후 백합이 사라지자 대체종인 개량조개를 양식·

채취하였다. 청게는 하구둑 축조와 무분별한 어획으 로 어획량이 감소했으나 2010년 인공종묘 생산방식 이 개발되어 어민들의 소득 창출원이 되고 있다. 낙 동김은 하구둑 축조 이후 각종 개발 사업으로 인해 그 면적이 감소했고 위치도 기존보다 외해로 이동하 였다.

낙동강 삼각주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지형으로 내부의 사회, 문화, 생활 모습은 지역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본 연구는 낙동강 삼각주의 거시적인 지형 변화를 확인한 기존의 논의를 바탕으로 낙동강 삼각 주내 명지지역의 미시적인 변화를 확인하였다. 이 연 구를 통해 명지동의 공간변화와 주민의 삶이 종합적 으로 이해되고, 개발과정에서 사라져가는 낙동강 삼 각주의 경관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연구가 활발해 지 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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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연구에서의 김해수리조합은 1911년에 설립된 김해수리 조합과 1916년에 설립되어 1961년에 김해수리조합으로 병 합된 대저수리조합을 총칭한다. 이 조합의 사업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리를 도모하기 위해 소착, 간척, 식림을 한 다. 둘째, 수해를 예방하기 위한 사방을 축조한다. 셋째, 기타 수리에 필요한 시설을 설치한다(김해농지개량조합, 1996).

2) 조선의 연안평야 대부분은 방제가 없어 홍수마다 범람이 심하고, 호안 수리 시설이 없어 유로변동이 심해 토지가 일 정하지 못하다. 또한, 하천 연안평야의 수리조합 사업 또 는 일반 경지를 시작으로 철도, 도로 등의 각종 시설에 대 한 수해가 매년 현저한 액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치수사업은 국토의 보전, 산업의 개발은 물론 민심의 안정 에 있다(조선총독부, 1926).

3) 구거는 용수 또는 배수를 위하여 일정한 형태를 갖춘 인공 적인 수로·둑 및 그 부속시설물의 부지와 자연의 유수가 있거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소규모 수로부지이다(국가 법령정보센터).

4) 명지수문은 명지지역 내 내수배제를 목적으로 1.85m(B)×

1.25m(H)×2연으로 축조된 수문이다(조선총독부 등, 2010a).

5) 중신수문은 명지지역 내 명지방조제와 명지가방조제 지역 의 배수목적으로 1.5m(B)×1.3m(H)×3연으로 축조된 수 문이다(조선총독부 등, 2010a).

6) 경등양수장은 2001년에 재건축되었다. 현재 명지지역 내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2.71㎥/sec에 달하는 양수능력을 가 지고 있다(한국농어촌공사 김해지사, 2001a).

7) 명지양수장은 2001년에 재건축되었다. 현재 명지지역 내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1.496㎥/sec에 달하는 양수능력을 가지고 있다(한국농어촌공사 김해지사, 2001b).

8) 신포양수장은 신포지역 내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0.15㎥/

sec에 달하는 양수능력을 가지고 있다(한국농어촌공사 김 해지사, 2001c).

9) 순아수문은 2.8m(B)×3.0m(H)×2연, 2.8m(B)×3.4m(H)

×10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문개폐형식은 수동식이고 개폐시간은 2시간씩 총 4시간이 걸린다(부산지방국토관리 청 등, 2001).

10) 농촌근대화촉진법은 1970년에 제정되어 농지의 개량·개 발·보전 및 집단화와 농업의 기계화에 의한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고 농가주택을 개량함으로써 농촌근대화를 촉진 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국가법령정보센터).

11) 연구지역 내의 쓰레기 매립양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어 부신시사에 기재되어 있는 수치 전체를 연구지역에 매립된 양으로 설정하였다(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89).

12) 낙동강 하류 철새도래지는 1966년에 천연기념물 제179호 로 지정되었고 문화재의 원형 유지를 위해 그 주변 지역은 보존·관리를 받는다(국가법령정보센터).

13) 동남권 개발계획은 1982년부터 진행되던 10개년 장기 국 토종합개발계획을 수정한 것이다. 기존의 계획은 전국을 29개 지역생활권으로 구분하여 개발했으나 수정된 계획은 전국을 수도권, 중부권, 동남권, 서남권으로 나누어 개발 하였다. 동남권 개발계획은 부산과 대구를 단일경제권으 로 묶어 수도권에 대응한 광역개발, 무역, 업무, 금융정보 및 교육기능을 부여하여 동남해안 공업지대를 종합적으로 정비하는 것이다(대한민국정부, 1987).

14) 녹산국가산업단지는 약 700만㎡의 면적에 400만㎡의 산 업시설구역을 갖춘 곳으로 2014년 입주기업 1,396채, 종 사자 수 35,129명으로 107천억 원의 생산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한국산업단지공단).

15) 명지주거단지 조성사업 배후지역은 평소 조위에 영향을 받는 저지대 농경지이다. 평상시에는 자연재배가 가능하 나 만조와 홍수가 동시에 발생될 때에는 상습적인 피해 지 역이다. 총 유역 면적은 약 150만㎡의 지형적인 여건을 고 려하여 배수구역을 2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배수펌프장 2 개소를 계획하였다(부산광역시 건설본부, 2000b).

16) 글로벌 캠퍼스타운은 1~3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는 독일 캠퍼스, 2단계는 부산시 유치사업, 마지막 3단계는 기업부 설 연구소 및 연구개발센터 유치이다. 현재 글로벌 캠퍼스 타운에 유치 계약이 체결된 것은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 학, 독일 머크사 기업부설 연구소이다(부산·진해 경제자유 구역청).

17) 민제염전은 민간인이 개발하고 경영하는 염전을 말한다.

해방 이전에는 염전의 개발을 관에서 해결하였으나 해방 이후 민간에 개방하여 민간인이 개발하고 경영하는 염전이 많이 생겼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자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많이 생겼는데, 이는 천일염의 정상적인 생산을 위 해서는 최소 6년의 기간과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지만, 자 염은 손쉽게 소규모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대한염업 조합연합회, 1957).

18) 해방 이후 명지지역의 염전 수와 염전 면적을 정확하게 파 악할 수 없어 염전지에 기재되어 있는 부산시 전체의 염전 수와 염전 면적을 명지지역으로 설정하였다(대한염업조합 연합회, 1957).

19) 염전지에는 해방 이후부터 1956년까지 우리나라 전체 염

전의 생산 동향이 기록되어있다. 이 시기 명지염전에서 생

산된 소금은 민제염전에 포함되어 있어 민제염전을 중점적

으로 파악하였다. 염전지의 소금 생산량 산출은 연도별로

차이가 있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는 그해 4월부터 다

음해 3월까지, 1954년에는 그해 4월부터 12월까지, 1955

년 이후부터는 그해 1월부터 12월까지이다(대한염업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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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회, 1957).

20) 염업정비임시조치법은 염의 공급의 적정을 기하기 위하 여 염 또는 함수의 제조를 조절하며 염의 과잉제조시설을 정비하여 국내 염업의 건전한 발전을 시도함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규정을 위반하여 염 또는 함수를 축조한 자에 대하여는 염 또는 함수의 제조 허가를 취소한다(대한민국 총무처, 1960).

21) 북주기는 대파 생장기에 고랑의 흙을 두둑으로 퍼 올려 대 파가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대파의 길이를 늘려주기 위 한 농업방식이다.

22) 연구지역이 부산시로 편입되기 이전인 1978년 이전 경상 남도 김해군에 속해 있던 명지동은 명지동만의 수치를 확 인할 수 없었다. 1973년 이전의 수치는 경상남도 전체의 대파 생산량과 면적을 명지동으로 설정했다. 1983년 이후 의 수치는 부산시 통계연보 자료를 바탕으로 부산시 전체 의 대파 생산량과 재배면적을 명지동으로 설정했다(농림 부, 1933~1973; 부산시, 1983~2013).

23) 혼분식 장려운동은 1960년대 정부에 의해 시행되었다.

그 주요 내용은 미곡 판매업자는 잡곡을 2할의 비율로 섞 어서 팔고, 음식점에서도 2할 이상 잡곡을 섞는 혼식을 시 행하며, 학교나 관공서의 구내식당에서는 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반가정에서도 잡곡을 섞어 먹도록 적극 권 장한다는 것 등이다(국가기록원).

24) 식품산업진흥법에 의거해 식품의 품질향상·생산장려 및 소비자 보호를 위하여 식품에 대한 품질인증 제도를 운영 하는 것이다(국가법령정보센터).

25) 김해어업조합은 1938년 12월에 창립되었다. 이 조합은 연구지역 주변을 중심으로 한 김 양식업계에 종사하는 어 민들의 조합이다(부산강서구지편찬위원회, 2014).

26) 어민들은 대나무로 만든 김발을 홍죽 또는 죽홍이라고 부 른다. 폭 9mm, 두께 9.5mm 정도의 대나무를 직경 1.5cm 의 새끼줄로 엮어서 만든 발에 김 포차를 부착하여 김을 양 식하는 어구이다(문철남, 1977).

27) 개량조개는 백합과 서식장소가 같은 패류로써 낙동강 하 구둑이 축조되기 이전부터 채취되고 있었으나 국내 판로가 없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하구둑 축조 이후 백합 이 사라지게 되면서 개량조개의 가치가 재조명되기 시작했 다(장창익,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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