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우주의학회지 제29권 제1호 특별호
The KJAsEM Vol.29(1), Special Issue, Apri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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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 창립초기의 발자취
이 용 호
전 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 상근부회장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오묘한 이치인 가 보다. 벌써 강산이 세 번 정도 바뀔 정도의 30년 세월이 흘러갔나 보다. 1989년 4월 20일에 한국항공의학협회가 창립 되어 오늘날까지 장대한 발전을 이룩한 것을 목도하게 되니 단순히 감개무량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은 필자 만의 소회가 아닐 것이다. 그동안 항공의학과 협회관련 업무와 잠시 결별하고 지내온 시간도 적지 않아 이 글을 쓰는 것이 적절한 지 잘 판단이 안서지만 金誠圭 전회장님과 金湀聖 편 집위원장의 권유를 겸허하게 받아 새롭게 자료 및 기억을 되살 려 우리 협회 창립초기의 발자취를 간략히 조명해 보고자 한 다. 필자는 1989년부터 한국항공의학협회 이사를 시작으로, 항의협소식 편집인, 1991년 한국항공우주의학회 평의원, 협회 기획이사, 기획 및 총무이사, 1993년 협회 상근부회장, 한국항 공우의학회 부회장을, 1999년 한국항공인적요인학회 부회장 을 2001년까지 역임해 왔다.
한국항공의학협회(Aeromedical Association of Korea:
AmAK)의 창립 당시 필자는 1987년 6월부터 ㈜대한항공 민항 공의료센터(원장: 계원철 상무) 의료담당 차장으로 근무하다 1년 후인 1988년 6월에 미국 오하이오(Ohio)주 데이튼 (Dayton)시에 있는 라이트주립대학교(Wright State Univer- sity)의 대학원에 입학하여 항공우주의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89년 7월에 귀국하였다. 협회 창립 일년 전부터 전임으로 항공의학 분야에 뛰어들어 桂元喆 박사님의 지도아래 초보적 인 항공의학의 입문부터 공부하면서 특히 민항공의료의 업무 (Civil Airline Medical Support)를 현장에서 훈련과 수련을 받으면서 종종 우리나라 항공의학의 뿌리는 군 항공의료에서 시작되었음을 누누이 설명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엊그제 일 로 기억이 생생하다. 아울러 필자는 공교롭게도 1985년 육군 군의관으로 만기 전역하였기에 공군 의무감실의 역사에는 생 소하였지만 다행히도 공군 항공의료원에서 항공의학초급과정 (Primary Course Of Aviation Medicine:PCAM)을 이수하여 비행군의관(Flight Surgeon)의 업무를 육군 의무감실에서 약 1년 정도 담당한 것이 항공의학과 관계된 부분이 있어서 그나 마 군항공의학(Military Aviation Medicine)의 역사에 대해 설
명들을 때 다소 이해할 수 있는 행운이 따르기도 했다.
따라서 桂元喆 박사님으로부터 이제는 우리나라도 항공의 학에 관하여 체계를 잡을 수 있는 기초 작업을 하시기를 여러 차례 피력하셨다. 우리나라에서 최초 군항공의 역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3년간의 미군정이 만료되고 1948년 8월 정 부수립과 함께 동년 9월 15일에 창설된 육군항공사령부 항공 의무처(초대처장 張德昇 대위)설치로 움트기 시작하여 1949년 10월1일 공군 독립과 함께 공군병원(초대원장: 張德昇 중령) 이 창설됨으로 희망찬 도약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한편 1962 년 2월에 설립한 대한항공공사가 1969년 3월에 민영화로 ㈜ 대한항공의 창립과 더불어 항공보건관리실(초대실장: 桂元喆 박사)이 존속되어 민항공의무 지원이 20여년간 이루어지고 1974년 5월17일에 김포국제공항의무실(초대실장: 文榮漢 장 군)이 개설되면서 “이목회”(二木會)(공군 의무감을 역임하셨던 분들의 친목모임으로 현의무감이 주간사역할을 함. 주요 참석 하신 분들: 桂元喆, 金義湜, 李光鏞, 崔龍國, 文榮漢, 朴景華, 朴正國, 金秉洙, 李甲祥, 韓光秀, 具本述, 朴弘鎭, 朴秉鈺 등으 로 기억됨)는 군, 민항공의무에 종사했던 선배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실이 축적되어 현역과 예비역의 인재들을 한데 어울 려 항공의학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1987년까지 여러 번 시도 되었다고 한다. 필자도 이목회 모임에 옵저버 자격으로 여러 번 참석하여 귀한 말씀과 전략들을 들을 수 있었다.
옛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예 비역들의 군항공의무에 관한 향수와 관심이 미약하기 전에 30 년 이상 숙성기간을 보냈기에 더 늦기 전에 발동을 걸어보기로 하고 기초 작업에 착수하던 중 필자는 도미하고 그 후임으로 당시 공군의무감실에 근무하던 李元根 대위가 파견되어 필자의 자리를 대신하여 桂元喆 박사의 지도아래 실무 작업을 충실하 게 진행시켜 드디어 1989년 3월 16일에 (가칭)한국항공의학협 회 발기인대회(준비위원장: 金義湜 장군)를 공군회관에서 112 명의 발기인으로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1989년 4월 20일에 공군회관에서 대망의 한국항공의학협회 창립총회가 177명의 참석한 가운데 원안대로 모두 통과되어 힘차게 출발하였다. 초 대회장에는 만장일치로 桂元喆 장군(5대 공군 의무감 역임)이
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 창립초기의 발자취
11 추대되었고 2명의 감사에 金秉洙 장군, 李甲祥 대령, 그리고 河 栽寅 원장과 朴恒培 교수를 각각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날 기념세미나에서 부산 일신기독병원 朴景華 원장(11대 공군 의 무감 역임)의 “군항공의학 40년 회고”와 한양대 朴恒培 교수의
“민항공의학 20년 회고”를 각각 발표하여 많은 호응과 만감이 교차되는 선후배들과의 재상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1989년 말 에는 (주)아시아나 항공이 설립되어 항공의무실(초대 고문 金正 鉉 교수)이 개설되어 협회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필자는 이 당시에는 오늘 날과 같은 SNS 통신이 없었기에 아쉽게도 현장감 있는 역사적 쾌거를 한 달 후 1989년 5월에 미국 워싱톤 디시(Washington D.C.)에서 개최된 항공우주의 학협회 연차총회(Annual Meeting of Aerospace Medical Association:AsMA)에 참석한 桂元喆 박사님 일행과 합류하여 자세한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난다. 큰 파도를 하나 넘으니 호사 다마라 할까 초대회장이신 桂元喆 박사가 학회일정을 모두 소 화하시고 귀국 길에 로스엔젤레스(Los Angeles)에서 갑작스럽 게 신체의 마비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니 십여년 전에 앓았던 길렝-바레증후군(Guillian-Baree Syndreome)의 재발 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질환을 같은 병원 에서 진단받고 치료받은 기록이 있기에 순조롭게 병마와 싸울 수가 있었으며 치료 및 회복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의 손길 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필자는 7월에 학위과정을 마치고 로스 엔젤레스 병원으로 가서 입원하신 桂元喆 박사님을 병문안하 고 귀국하였다. 말씀은 하지 못하시고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간 단히 하였는데 협회 걱정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계속 진행하라 는 싸인만 강하게 받고 온 기억이 새롭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막 창립한 협회는 비상체제를 가동할 수 밖에 없어 선임 부회장인 河栽寅 원장이 회장 직무대행으로 하여 1989년 7월 6일 공군화관에서 첫 번째 임시 대책회의를 한 결과 고문 17명 및 이사 30명을 위촉하여 의사결정에 필요 한 절차를 밟아가기 시작하였고 한 달 후인 8월 11일 동일한 장소에서 제1차 이사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30명의 이사 중에서 8명의 실행이사를 선출하였고 협회 조직 및 마크 그리 고 1989년 사업계획을 확정하였다. 1989년 9월 20일 연세대 영빈관에서 제1차 실행이사회를 개최하여 회원의 자격 심의기 준, 회원증, 이사위촉장, 고문 추대패 등 제작하기로 하였다.
기적적으로 桂元喆 회장의 병세가 호전되어 국내로 호송한 후 연세의료원에서 재활을 위한 집중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1990년 새해 들어서 거동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시어 1990년 1월 19일 고문들로 이루어진 제1차 자문위원회를 연세대 영빈 관에서 열어 10명의 고문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장의 협회 업 무 복귀를 선포하고 신년교례 및 협회 운영에 협조를 요망하는 여러 고문들의 애정어린(?) 조언들이 쏟아졌다.
이와 같이 큰 파도에 휩쓸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 정신은 살아있어 명실상부한 살아있는 협회가 되기 위해서 1990년 1월 24일 공군회관에서 제2차 이사회 및 실행이사회에 23명이 참석 하여 항공의학 입문서의 집필을 위한 7명의 편집위원회(위원장:
河栽寅, 朴恒培, 池堤根, 具本述, 白光世, 李庸昊, 李寅基)를 구성
하기로 하였고 1990년 3월 20일에 협회 창립 1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를 준비하는 계획을 검토하였다. 1990년 2월 8일 제2차 자문위원회 및 동년 2월 21일 제3차 실행이사회의를 개최하여 창립기념 학술세미나에 해외 저명 인사를 초청하는 등 세부계획 을 심도있게 검토하여 진행하기로 했다. 1990년 3월 7일에 서울 연희동 성산회관에서 개최된 제4차 실행이사회에서는 회무 및 재무감사를 받았으며, 협회 소식지 및 학회지 발간 계획에 관하 여 검토하였고 동년 3월 20일 공군회관에서 25명이 참석한 제3 차 이사회를 개최하고 이어서 제1차 정기총회 및 학술세미나에 120명의 회원들이 참석하였다. 첫 해외 초청 인사로는 국제민간 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의 의무책임자인 핀켈스타인 박사(Dr. Silvio Finkelstein)가 “항공 기승무원의 항공신체적성 국제기준”에 대하여 특강을 하였으며 제1호로 명예회원으로 추대하여 회원증을 수여하였다. 또한 협 회에서는 창립 월인 4월에는 서울에서, 9월 가을에는 공군 항공 의료원에서 학술대회 및 정기총회를 개최하는 야심찬 계획과 가 능하면 해외 저명한 인사를 초청하여 항공의학의 최신지견을 청 취할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하고 국내 양 항공사와 찬조할 기관 을 섭외하여 차질 없도록 진행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1990년 6월 25일에 계간으로 “航醫協消息”지를 창간 하여 회무소식과 회원들의 동정들과 항공의료 분야의 최신지견 등을 실어서 항공의학 분야의 관심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당 시 필자가 편집인으로 항의협 소식 창간에 참여했을 때 에피소 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 경험이 전혀 없었던 지라 의욕 은 강하였기에 A4 크기로 총 8면을 편집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어떤 내용을 채우느냐가 관건인데 첫 호 발간사부터 난관에 부 딪치게 되었다. 이제 겨우 창립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어 서 미리 계획된 청탁원고는 하나도 없고 편집인만의 걱정이 슬 슬 생겨나면서 스트레스 상황까지 갔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짐도 정리되지 않은 채 1년 동안은 창립 1주년 기념 연차 총회 준비에 온 힘을 쏟아 에너지가 거의 소진되어 휴식을 가져 야 할 시기에 항의협소식지를 창간해야 한다는 압력(?)을 온 심 신에 받고 있었다. 첫 1~2면을 협회장이신 桂元喆 박사께서 써 주시는 것이 당연한 순리라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늑장(?)을 부 리시더니 급기야는 마감 날이 다가왔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 가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지난 1990년 3월 20일 창립 1주 년 연차총회에서 회장님의 인사말이 녹음되어 있어서 이것을 녹취해서 발간사로 대치하는 게 어떨는지 조심스레 여쭈어보니 필자얼굴을 쳐다보시더니 엷은 미소로 허락을 해 주신 것이 기 억이 새롭다. 당시 귀국할 때 가져온 매킨토시 컴퓨터로 필자가 직접 원고를 입력하여 한자를 병용하면서 디자인 개념도 없이 편집한 바, 제3면에는 항공우주의학의 메카로 불리는 미국의 항 공우주의학협회(Aerospace Medical Association:AsMA)에 대 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선배들이 이곳에 참여한 내용까지 간략하게 보고하는 소개의 란으로 꾸몄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AsMA는 1929년에 항공의학협회로 설립되어 1959 년부터 항공우주의학협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당시 83개국 약 4,0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매년 5월에 연차총회가 5일 간
이용호
12 의 일정으로 정기총회, 학술 연구발표, 세미나, 심포지엄, 보수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 등 다양하게 국제적 규모의 군, 관, 민 합동으로 미국의 각 주를 돌면서 개최하고 있는 글로벌한 단체 이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는 1954년에 워싱톤 디시 (Washington D.C.)에서 열린 25차 AsMA 연차총회에 초대 공 군 의무감이셨던 張德昇 대령이 한국대표로 처음 참석하기 시 작하여 역대 공군 의무감, 항의원장, 비행군의관, 민간 항공의학 전문가 등이 매년 또는 격년으로 참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AsMA에 전체회원의 10%가 AsMA에 회원일 경 우 결연단체(Affiliated Organization)로 승인 받을수 있는데 본 협회가 1990년부터 추진해 온 결과 승인 받았으며, 또한 桂元 喆 회장은 1991년 5월 62차 AsMA 연차총회에서 4명의 부회장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항공의학 개론서의 집필 계획까지 세우 고 협회의 회원을 평생회원(161명), 정회원(330명), 학생회원 (4명) 등으로 분류하여 1990년 8월 31일 현재 총 495명에 이 르렀다. 1990년 9월 28일 제7차 실행이사회가 서울 강남 반포 동 삼풍백화점 5층 금정에서 열렸는데 추계 학술집담회의 구체 적인 진행사항 및 특강자에게 명예회원증과 감사패를 증정하 기로 하고 다음 해인 1991년 4월 정기총회시 (가칭)한국항공우 주의학회를 협회내 분과학회로서 발족하는 안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1990년 추계 학술집담회가 10월 13일 서울 동작구 대 방동에 위치한 공군 항공의학적성훈련원에서 공군본부 의무감 실과 한국항공의학협회가 공동 주관으로 개최되었으며 해외 초청 연자로 항공사의무원장협의회(Airline Medical Direc- tors Association:AMDA) 부회장인 이스라엘 글레져 박사(Dr.
Israel Glazer)를 모셨다. 1990년 10월 13일 제4차 이사회가 서울 반포동 반포회관에서 열렸는데 협회내 8개의 전문상임위 원회(회원자격, 교육훈련, 기획, 학술연구, 정관심사, 비행안전, 항공의료정책, 편집홍보)를 구성하는 것과 의사들로만 구성되 는 분과학회로 (가칭)한국항공우주의학회 발족하는 것이 승인 되었고 춘계 학술대회 및 정기총회의 안이 승인되었다. 아울러 공동학회지인 (가칭)항공우주의학(Korean Journal of Aero- space and Environmental Medicine)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려 는 계획도 추진하게 되었다. 마침내 계획대로 1991년 4월 20 일 서울 공군대학에서 협회 연차총회 및 학술세미나가 개최되 었고 한국항공우주의학회(Korean Academy of Aerospace Medicine)가 발족되었다. 초청된 해외 연사는 미국 라이트주 립대학교의 스탠리 몰러교수(Dr. & Prof. Stanley R. Mohler) 에게 “Aerospace Medicine in the 21st Century"라는 특강을 해 주셨고 명예회원증과 감사패를 수여한 바 있다. 1991년 4월 20일에 발 맞추어 학술지인 “항공우주의학”지 창간호가 발간 되어 참석한 회원들에게 배부하였으며. 1991년 9월29일 발간 된 항의협소식 제6호에는 매월 AsMA Journal에 실리는
“You’re the Flight Surgeon” 중에서 회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주제만을 선정하여 공군 항의원에 근무하는 郭仁鎬 대위 의 도움으로 ‘Aeromedical Quiz’란을 만들기도 하였다. 1992 년 3월 31일 航醫協消息 제8호부터는 체계적인 편집의 형태로
메킨토시 시대를 마무리하고 외부로 인쇄를 맡겨 깨끗한 서체 와 사진 등을 함께 발간하였는데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의 협조 와 협동이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1989년 창립 당시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바로잡고 1990년부터는 천우신조(?)로 회복된 桂元喆 회장님의 지휘 아 래 일사분란하게 일사천리로 회무를 운영하여 춘계, 추계 학술 대회 및 연차 총회, “航醫協消息”지 발간, 국외 저명인사 초청과 협회 조직 강화를 위한 정비 등 숨 쉴 수 있는 틈도 주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다. 이는 협회 구성원의 특성 상 여타 다른 단체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분야든 항공의학과 관련 있어 남다른 관심 있는 사람을 다 포용하고자 문호를 개방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들은 분과학회 로 발족시켜 연구 발표 및 최신 지견을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주도록 했고 아울러서 국제적인 교류 사업을 지속적으로 유지 해야 하는 점도 강조하였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게 된 것은 양 항공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국외 학회참석을 가능하게 되었다.
초기에 계획했던 항공의학 입문서인 ‘비행과 인체’는 1992년에 발간하여 비매품으로 분배하였으며 ‘航醫協消息’는 연 4회, 학 술잡지인 ‘항공우주의학’은 연 2회 발간이 지속되었다.
협회와 분과 학회는 상호 협력정신으로 조직을 운영하였고 1992년 4월 봄, 가을학회에는 국내에 계신 洪英植 박사(인하대 교수)와 항공우주연구소 소장 洪在鶴 박사를 각각 초청하여 귀 중한 특강을 들었다. 1993년 춘계 학회에는 일본의 구로다 박 사(전일본 항공의학실험대장)를 초청하였고 1993년 10월 13 일 추계 학술대회부터 ‘張德昇 장군 기념강연(General Chang’s Memorial Lecture)’을 개설하여 제1회 초청자로 미 연방항공청 항공의학연구소의 데이비스 박사(Dr. Audie Davis, CAMA, FAA, USA)로부터 “미국의 항공의무관 제도 및 민항공조종사의 의학적 기준에 대한 전망”이라는 특강과 李培 石 박사(재미 전 공군대령)의 특강도 들을 수 있었다. 1994년 4월 2일 춘계학술대회에 제2회 張德昇 장군 기념강연자로 일 본의 오시마 박사를 초청하였고 우리나라 항공의학의 아버지 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초대 공군 의무감을 역임하신 張德昇 장군을 기념하기 위하여 ‘張德昇 항공우주의학賞(General Chang’s Award)’을 제정하여 공로부문에는 金義湜 장군, 朴弘 鎭 고문, 학술부문에는 蔡義業 교수(계명의대)가 각각 선정되어 수상하였다. 1994년 4월 2일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춘계 항공 의학 학술대회 및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는데 특강 연자는 일본 의 오시마 마사미스 박사로부터 “일본 우주의학의 발자취-과 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제목으로 귀중한 일본의 초창기 우 주의학의 발자취를 청취하였다. 이 당시 정기총회에서 1989년 부터 3대까지 회장직을 수행하시던 桂元喆 박사님이 잔여 임기 1년을 남기시고 일신상의 이유로 회장직 사임을 강력하게 시사 한 바 부회장으로 함께 출범했던 한양의대 朴恒培 교수를 제 4대 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임하였다. 동년 10월 21일 청주에 소재한 공군 항공의학적성훈련원에서 개최된 추계 학회에서는 제3회 張德昇 장군 기념강연자로 미항공우주국의 니고고시안 박사(Dr. Arnold Nicogossian)를 초청하여 “우주생명공학과
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 창립초기의 발자취
13 의학의 최신지견”을 들었고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우주사업개발 단장이신 류장수 박사로부터 “우리니라 우주신업의 개발과 전 망”이란 특강도 있었다. 그리고 1995년 춘계 학회는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4월 15일에 개최하였는데 제4회 張德昇 장 군 기념강연은 일본의 여류우주비행사 지아끼 무까이 박사(Dr.
Chiaki Mukai, Astronaut, National Space Development Agency of Japan)를 초청하여 “미세중력하에서의 국제생명과 학 실험 및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우주비행 체험”이라는 제목 으로 우주왕복선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제2회 張德 昇 항공우주의학상 공로부분에 전미국공군의무감 Oliver Niess 장군과 朴景華 장군, 曺圭常 박사, 학술부문에는 尹德老 교수(서울의대)가 선정되어 수상한 바 있다. 이는 1994년 10월 창립총회의 의결을 거쳐 한국항공의학협회의 명칭도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사단법인 항공우주의학협회(Aerospace Medical Association of Korea:ASMAK)로 변경하고 1995년 2월 17일 교통부장관의 허가를 받은 뒤 처음으로 개최되는 뜻 깊은 행사였다. 그 뒤 1997년 2월 28일에 드디어 교과서 형태 의 “항공우주의학개론”(공동저자: 金正鉉, 白光世, 朴恒培, 李 庸昊)이 발간되었고 1999년에는 분과학회의 하나로 한국항공 인적요인학회(초대회장: 文昌洙 상무)이 발족되었다. 아울러 제 3회 아태 항공우주의학 국제 학술대회를 1999년 10월 6~8일 청주 공군대학에서 주최하여 3일간의 국제 행사를 훌륭히 치루 어 낸 것도 기억이 새롭고 다음 해에는 한국항공간호학회(초대 회장 金鍾一 수간호사)가 3번째 분과학회로 발족했다.
마침 1991~1994년 당시 자료를 찾아보니 본 한국항공의학 협회 및 항공우우주의학회의 이사 및 실행이사와 평의원 임원 진 구성이 다음과 같았다. 여기에 존함을 기록해 두는 이유는 이 분들의 헌신적인 지원과 애정어린 충고, 끊임없는 섬김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3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경사를 맞이하 게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1) 고문: 강두희(姜斗熙), 김규택(金圭擇), 김의식(金義湜), 김재윤(金在倫), 문영한(文永漢), 박경화(朴景華), 박소회(朴素 會), 박정국(朴正國), 박찬무(朴贊武), 서순규(徐舜揆), 손영인 (孫永寅), 이광용(李光鏞), 이동기(李東沂), 이배석(李培錫), 이 영호(李永好), 장병건(張炳鍵), 조규상(曺圭常), 조승현(趙昇 鉉), 주근원(朱槿源), 최용국(崔龍國), 한광수(韓光秀). 박홍진 (朴弘鎭), 박병옥(朴秉鈺)
2) 회장: 계원철(桂元喆),
3) 부회장: 하재인(河栽寅), 박항배(朴恒培).
4) 감사: 김병수(金秉洙), 이갑상(李甲祥). 정호근(鄭鎬根) 5) 실행이사 겸 학회 평의원에는 강진경(康珍敬), 곽동일(郭 東日), 구본술(具本述)(홍보), 류재만(柳在萬), 백광세(白光世) (학술), 이원창(李元暢), 이용로(李用魯), 이용호(李庸昊)(기획), 이원근(李元根), 이인기(李寅基), 홍재웅(洪在雄).
6) 이사 겸 학회 평의원에는 강진경(康珍敬), 김병길(金炳
吉), 김성규(金誠圭), 김신곤(金信坤), 김영명(金永明), 김정현 (金正鉉), 김택일(金택一), 김해준(金海俊), 류재만(柳在萬), 심 동원(沈東源), 윤덕로(尹德老), 전세일(全世一), 조승연(趙勝 衍), 지제근(池堤根), 채의업(蔡義業), 한용표(韓勇彪).
7) 이사진은 권 박(權 博), 김봉겸(金鳳謙), 김석대(金碩大), 김오현(金午鉉), 김옥재(金玉在), 김용무(金容武), 김정묵(金正 默), 김종일(金鍾一), 김철수(金喆洙), 문헌영(文憲永), 박헌엽 (朴憲曄), 빈남수(賓南洙), 선호영(宣鎬榮), 양원식(梁源植), 유 용근(兪溶根), 윤영길(尹榮佶), 이남수(李南秀), 이병훈(李炳 勳), 이 웅(李 雄), 이인영(李寅永), 장길덕(張吉德), 주양로(朱 羊魯), 차태수(車泰樹), 한철길(韓喆吉), 홍진표(洪晋杓), 황성 균(黃性均), 황진숙(黃眞淑).
8) 학회 평의원으로는 김경환(金景煥), 김로경(金潞經), 김승 욱(金勝煜), 김진복(金眞福), 김홍복(金洪福), 노재훈(盧在勳), 명호진(明好鎭), 박인서(朴寅瑞), 서정수(徐廷守), 서창국(徐昌 國), 송찬호(宋燦浩), 안철민(安哲民), 원치규(元致奎), 유승흠 (柳承欽), 윤덕로(尹德老), 윤임중(尹任重), 이경식(李景植), 이 무훈(李武勳), 이민재(李憫載), 이성준(李聲俊), 이웅구(李雄 求), 이창홍(李昌洪), 이태용(李泰龍), 이한식(李韓植), 조범구 (趙範九), 차봉석(車奉錫), 차영남(車英男).
끝으로 1995년 9월 20일 현재 협회 회원이 학생회원 13명, 정회원 696명, 평생회원 233명, 명예회원 14명 등 총 956명 으로 1989년 창립당시 177명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 져온 것은 지금 생각해 보니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독립된 협회 사무실의 공간과 전담 인력도 없이 그 많은 협회 및 학회의 일들을 어떻게 다 감당해 왔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지면의 제한 때문에 창립 초기에 생생한 정보를 다 담기에는 필자의 역량이 부족함으로 빠진 부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필자 의 좁은 소견으로 넓은 아량으로 양해하여 주시기를 기대해 본다. 정상적인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협회 및 학회의 운 영은 물론 국제적인 교류 협력까지 일들을 찾아서 솔선수범한 저력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특별히 이목회 회원님 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주)대한항공 및 아시아나 항공사의 민 항공의무요원 들을 위시하여 공군 의무감실 및 항공의료원 산 하 전 장병들과 역대 임원진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묵묵하게 자신들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한 덕분이 아닌 가 생각한다.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고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하여 알게 모르게 마음에 상처를 준 일들에 대하여 이 자리 를 빌어서 송구한 마음을 전하며, 협회 및 학회의 창립시기에 서부터 실무적인 회무를 맡아 온 필자로서 30주년을 훌륭하게 성장 발전된 모습을 보니 정열을 쏟았던 지난 일들과 동지들의 모습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이미 소천하신 많은 선, 후배님들도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향후 30년을 더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변모할 것을 기대하시 며 흐뭇한 미소와 찬사를 보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