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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요리옥의 탄생:안순환과 명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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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요리옥의 탄생:안순환과 명월관*

40) 주 영 하**

❙국문초록❙

본 연구는 20세기 전반부에 서울을 중심으로 영업을 한 조선요리옥에 대해 그 역사를 밝히는 데 목적 을 두고 마련되었다. 종래 최초의 조선요리옥인 명월관은 1909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의 신문·잡지 자료 등을 조사한 결과, 명월관은 1903년 9월 17일에 문을 연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조선 통감부 시기에 이미 조성되어 있던 서울의 일본요리옥을 모방하여 조선요리옥 명월관이 설립되었음도 확 인하였다. 아울러 설립자 안순환은 대한제국의 왕실음식을 담당했던 요리사 출신이 아니었음도 밝혔다.

본래 안순환은 전통적인 한문 교육과 함께 근대교육 기관에서 수학한 인물이다. 골동품 판매상도 하였던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능력으로 인해서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일을 하였다. 명월관의 업주라 는 경험으로 인해서 1909년 1월 21일부터 1910년 8월 29일 사이에 대한제국의 왕실음식 부분 책임자가 되었다.

동시에 본 연구는 식민지시기 조선요리옥이 지닌 문화적 성격에 대해서도 밝혔다. 식민지시기 조선요 리옥은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었다. 음식점이면서 각종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모임이 열렸던 곳이었다. 여 기에 근대적으로 바뀐 기생들이 드나들면서 접대를 하기도 했다. 조선요리옥은 천 가지의 얼굴을 가진 연회의 장소였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이나 관청에서 행하는 공식적인 연회를 제외하면, 사적공간에 서 대부분의 연회가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서 식민지시기 조선요리옥은 사적공간에서 행해지던 연회를 공적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이 공적영역에서는 공적인 모임뿐만 아니라, 사적인 식욕과 성욕까지도 공적 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근대’라는 시각에서 보면, 식민지시기 서울의 조선요리옥에서 소비되었던 조선음식과 그 연회 는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공공적이라는 성격을 확보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정한 서비스료를 지 급하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사적 모임을 조선요리옥에서 펼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조선음식이 지닌 사 적인 이미지도 공적영역으로 옮겨갔다. 이와 같이 근대적인 조선요리옥의 등장은 ‘조선음식’이라는 표준 화된 이미지를 공적으로 소비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서 소비하던 음식과 다른 차원의 조선요리옥 음식을 조선음식의 대표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식민지시기 조선요리옥에서 판매했던 조선음식이 지금까지도 ‘한정식’이란 이름으로 그 대표성을 유지되고 있는 이유이다.

[주제어] 조선요리옥, 안순환, 명월관, 조선음식, 근대적개량, 정치집회

* 동 연구결과는 2010년 아모레퍼시픽재단의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수행되었음.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 duruju@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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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들어가는 글

Ⅱ. 안순환의 명월관의 설립

Ⅲ. 안순환과 그의 명월관 경영

Ⅳ. 조선요리옥-근대적 식사와 연회, 그리고 집회의 장소

Ⅴ. 명월관의 메뉴와 조선음식의 근대적 개량

Ⅵ. 나가는 글

Ⅰ. 들어가는 글

오늘날 한국인이 소비하는 음식에는 매우 복잡한 다국적(多國籍) 요소가 존재한다. 나는 이러한 결과가 식민지시기로부터 출발했다고 본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라는 정치·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었 던 한반도·타이완(臺灣)·만주국(滿洲國), 그리고 반식민지였던 중국대륙에서 전개된 근대적 식품산 업과 음식점의 유행은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만들어냈다. 그 중 대표적인 사 례가 바로 1890년대 이후 서울에 등장한 일본요리옥·조선요리옥·청요리옥 등의 요리옥이었다. 처 음에 ‘일본요리옥’이란 공간은 재조일본인의 음식소비와 유흥을 위해서 마련되었다. 적어도 식민통치 가 진행된 1945년까지 서울의 일본요리옥은 조선인 중 일부가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식민지시기 ‘명월관(明月館)’으로 대표되는 ‘조선요리옥’은 조선인을 주된 고객으로 하는 근대적 식당이었다. 사민평등(四民平等)이라는 근대적 논리는 식민지시기 누구나 돈만 있으면 조선요리옥에서 ‘임금이 잡수셨다고 여겨지는 음식’을 먹고 기생의 연주와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더욱이 화려한 실내 장식과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음식과 술은 조선요리옥을 근대적 장소로 만들었 다. 심지어 조선요리옥은 근대적 집회가 열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가령 조선공산당 창립 집회를 비 롯하여, 정치인과 종교인의 집회도 조선요리옥에서 열렸다.

식민지시기의 경성은 식민지라는 정치경제적 조건 아래에서도 근대화와 도시화, 그리고 산업화가 진행된 장소였다.1) 비록 농촌은 식민지적 피폐가 극단에 이르렀지만, 경성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중심이 된 음식 소비는 새로운 양상이었다. 따라 서 조선요리옥은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음식의 근대성을 드러내는 상징체가 되었다. 식민지시기 조선 에서 살면서 각종 풍속에 대한 글을 썼던 일본인 이마무라 도모에(今村鞆, 1870~1943)는 조선요리옥 의 전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옛날에 조선인 사이에는 요리옥이라고 부르는 것은 없었다. 양반 의 연회는 자기 집에서 하든지, 아니면 관청 소유 건물인 누정(樓亭)에서 기생을 명령으로 불러서 오 게 하여 술을 따르게 하였다. 거기에서는 돈을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요리옥의 필요가 없었다.

아울러 돈을 가지고 있든지 젊은이들이 뻔질나게 다니는 곳으로는 기생의 집이 있으며, 여기에서 노 는 경우도 있었다.”2)

1) 신명직,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서울: 현실문화연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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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글에서 이마무라 도모에는 조선요리옥이 일본요리옥의 조선 진출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3) 그에 의하면, 서울의 일본요리옥에 게이샤(藝者)가 등장한 때는 1888년이었다. 요리옥 화월의 주인인 마츠이(松井)가 손님들의 불평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심 끝에 오사카(大阪)로부터 후쿠스케(福助)라는 게이샤를 데리고 왔다. 청일전쟁(1894~1895)이 시작되면서 요리옥도 10여 집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일본인의 집은 모두 병사들의 숙소로 징발되었고, 요리옥도 모두 군용으로 차출되었다.

요리옥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시락을 만들었다. 그 이전까지 게이샤는 합법적인 허가를 얻지 못했지만, 1895년 이후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하여 일본의 진짜 게이샤 3-4명이 서울로 들어왔다.

일본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의 일본요리옥은 더욱 번창하였다. 서울에 들어온 일본인의 숫자가 늘어났고, 그들을 접대하는 요리옥이 여기저기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 발전과정을 이마무라 도모에는 청일전쟁 전후를 1기, 러일전쟁(1904~1905) 이후를 2기, 조선통감부 설치(1906) 이후를 3기 로 잡았다.4) 특히 1906년경 서울에 있던 일본요리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급수를 나누어 분류하 였다. 즉 일류로는 화월루(花月樓)·국취루(菊翠樓)·청화정(淸華亭) 등이 있었고, 이류로는 송엽(松 葉)·명월(明月)·광승(光昇) 등 4-5집이 있었다. 이 중에서 화월루에는 30여 명의 게이샤가 있을 정 도로 그 규모가 컸다. 특히 이마무라 도모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풍류통감(風流 統監)’이라고 불렀다.5) 그만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부의 통감이었던 시절에 그 자신이 요리옥을 즐겨 찾았고, 이로 인해서 통감부 시기 서울에서는 일본요리옥이 더욱 번창했다.

본 연구는 20세기 전반부에 경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조선요리옥에 주목한다. 하지만 결코 식민지 시기에 존재했던 이른바 조선음식의 미식(美食) 경향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마련되지는 않는다.

그 보다는 근대적 도시가 만들어지면서 새롭게 재편되기 시작한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음식의 문화적 생산과 소비 장소로서 조선요리옥의 각종 현상에 주목한다. 특히 1920~1930년대는 식민지의 정치경 제적 시스템은 더욱 탄탄해졌고, 조선의 모던보이와 모던걸 중 다수는 근대적 생활방식에 젖어들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각종 도시적 모습의 음식소비가 서울을 비롯한 각 도시에서 진 행되었다. 본 연구의 주제인 조선요리옥에 대한 통시적 접근은 식민지의 근대적 양상과 함께 식민지 의 주변부적 상황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도 식민지시기 조선요리옥의 탄생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연구사적 의의를 지 닌다고 본다. 더욱이 안순환(安淳煥, 1871~1942)은 최초의 조선요리옥인 명월관을 설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명월관 설립에 대한 논의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따 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조선요리옥 명월관의 탄생 과정에 대해 살핀다. 특히 명월관의 설립 시기와

2) 今村鞆, 「京城花柳界の變遷」, 󰡔朝鮮及滿洲󰡕 354, 1937年5月, 125~127쪽.

3) 今村鞆, 앞의 글.

4) 今村鞆, 앞의 글.

5) 今村鞆, 「二十年前の京城の花柳界, 仲居-藝妓-娼妓-妓生-其他」, 󰡔朝鮮及滿洲󰡕 233, 1927年4月,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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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안순환에 대해서 보다 상세한 자료로 논증을 할 생각이다. 이를 바탕으로 식민지시기 조선요 리옥에서 행해진 각종 활동을 당시의 신문·잡지 자료를 통해서 살피려 한다. 조선요리옥의 실체는 손님에게 제공된 메뉴를 통해서 더욱 분명해진다. 하지만 완벽한 메뉴 자료를 아직 찾지 못했다. 다 만 신문·잡지 자료와 사진 자료를 통해서 그 대강을 소개하려 한다.

최근 식민지시기의 음식생활에 대한 논저와 자료집이 다수 출판되었다.6) 다만 식민지시기를 어떻 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인문학적 시각에서 음식생활을 다룬 연구가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은 이 분야의 연구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특히 식민지시기라는 시간이 막연히 조선후기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전통’을 단절시킨 때라고 보거나, 제국일본의 침탈과 착취만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을 조망하는 거울이라고 보는 시각은 한국음식의 역사를 살필 때 극복해야만 하는 점이다.

Ⅱ. 안순환의 명월관 설립

이마무라 도모에는 “근대에 들어와서 화류계도 점차 사회의 요구에 따라서 현대화하여 먼저 명월 관이 현재의 동아일보사 장소에 세워진 조선 최초의 요리옥으로 개업하였다. 당시 한국의 대신이나 일본의 차관(次官)들, 혹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까지도 출입을 하였다.”7)고 했다. 이와 같이 명월관 은 조선 최초의 요리옥이었다. 비록 일본요리옥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전문점이었지만, 개업 초기에 는 주로 조선음식이 주된 메뉴였고, 게이샤 대신에 조선기생이 접대를 했다. 사실 이 ‘명월관’이란 요리옥은 최초의 조선요리옥이란 명성보다는 1919년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이 기미독립선언문을 낭 독한 태화관의 본점이었기 때문에 요사이 한국인들도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름이다.

이재곤(李在崑)이 집필자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명월관 항목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명월관(明月館):한말의 유흥음식점. 1909년경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동아일보 광화문 사옥 일민문화관 자리)에서, 한말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궁중 요리를 하던 안순환이 개점하였다. 1909년 관기제도(官妓制度)가 폐지되자 당시 어전 (御前)에서 가무를 하던 궁중 기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영업이 점차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건물은 2 층 양옥으로 1층은 일반석, 2층은 귀빈석이었으며, 매실이라는 특실도 마련하였다. 주로 고관이나 친 일계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문인과 언론인들도 출입하였다.”

6) 식민지시기 음식과 관련된 논저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鄭惠京, 「韓國의 社會·經濟的 變動에 따른 食生活 變 遷: 朝鮮末期부터 1980年代까지」, 이화여자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88; 한복진, 󰡔우리생활100년·음식󰡕, 서울: 현암사, 2001; 정근식, 「맛의 제국, 광고, 식민지적 유산」, 󰡔사회와 역사󰡕 66, 2004; 주영하, 「‘內鮮融化’와 조선인의 식사풍 속-󰡔日常生活上より見 たる內鮮融化の要諦󰡕(1928년)를 대상으로」, 󰡔日本思想󰡕 9, 전주: 일본사상사학회, 2005; 김상 보,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서울: 가람기획, 2006; 단국대학교부설동양학연구소, 󰡔음식 문화 관련 자료집󰡕, 서울: 민 속원, 2010; 주영하, 󰡔음식인문학󰡕, 서울: 휴머니스트, 2011.

7) 今村鞆, 「京城花柳界の變遷」, 󰡔朝鮮及滿洲󰡕 354, 1937年5月,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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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글은 사실 여부에서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점은 명월관이 과연 1909년에 문을 열었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앞선 글의 필자인 이재곤이나 그가 참고한 이향란(李蘭香)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8)이란 책에서 명월관의 개업시기를 1909년으 로 잡은 이유는, 관기제도의 폐지시기에 명월관이 생겼다는 추론을 했기 때문이다. 즉 조선왕실의 기생과 궁중 요리사가 단합하여 명월관을 개업했다는 가설을 설정한 결과, 이와 같은 연대 추정이 나왔다고 보인다. 그러나 명월관은 당시 서울에 문을 열고 성업을 하던 일본요리옥을 흉내 내서 생 긴 신종 사업이었다.

나는 1908년 9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서 명월관의 개업연도를 밝힐 수 있는 귀 중한 기사를 찾았다. “명월관기념:명월관에서는 작일(昨日)은 해관(該館) 설시(設始)하던 제5 기념일 인 고로 국기(國旗)를 고양(高揚)하고 기념식을 설행(設行)하였다더라.” 즉 명월관에서 5주년을 맞이 하여 기념식을 했다는 기사이다. 그렇다면 조선 최초의 요리옥 명월관은 1903년 9월 17일에 문을 열 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확인되었다. 원래 서예가 강무9)와 이용식10)의 글에서도 나온다. 다만 그 출처 를 밝히지 않아서 확증을 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기록은 그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최초의 조선요리옥 명월관은 1919년 5월 23일 오전 6시경에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대한매일신보󰡕

1919년 5월 24일자 기사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명월관 소실됨」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공해준다. 명월관은 1906년 10월 2층 양옥으로 확장한 후, 다시 1912년에 아 예 다시 지어졌다. 아울러 안순환이 광화문 황토현에 세운 명월관의 원래 이름은 ‘명월루’였다. 개인 집을 빌려서 시작한 명월루는 1906년에 2층 양옥으로 확장을 하였고, 다시 1912년에 3층 양옥으로 새로 지었다. 그러나 안순환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광화문 명월관의 규모가 작다고 판단하여 인사동 194번지에 명월관 지점으로 태화관을 세웠다. 원래 태화관은 이완용의 개인 집인 순화궁(順 和宮)으로 안순환이 1918년에 이 집을 사들여 조선요리옥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월관 지 점을 태화관이라 불렀다.

명월관의 실제 주인은 안순환이었지만, 민봉호에게 팔기 전까지만 해도 경영 사장은 매번 따로 있 었다. 1906년에는 김인식이 주인이라고 했다. 1915년 4월 27일 󰡔매일신보󰡕의 기사에는 진경석(陳慶 錫)이 점주로 나온다. 명월관에서 기자단을 초대했는데, 그 점주인 진경호가 매우 극진하게 대접을 했다는 것이 그 기사의 내용이다. 그러나 적어도 1919년 3·1운동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19년 가 을에 안순환은 민봉호에게 명월관 광화문 본점과 인사동 지점 태화관을 약 5만원을 받고 팔았다.11) 민봉호라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흥업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사

8) 李蘭香, 「明月館」,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서울: 중앙일보사, 1973.

9) 강무, 「한글+한자문화 칼럼:명월관(6)」, 󰡔한글한자문화󰡕 93, 서울: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2007, 55쪽.

10) 이용식, 󰡔조선의 큰부자(Ⅱ)󰡕, 서울: 하늘출판사, 1997, 154쪽.

11) 「명월관 소실됨」, 󰡔대한매일신보󰡕 1919년 5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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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었다는 점은 잡지 󰡔삼천리󰡕 제4권 제4호(1932년 4월 1일자) 기사를 통해서 확인한다. 동시에 이 기사에 의하면 이종구가 1920년에 민봉호에게 3만 원을 주고 명월관의 기구와 상호만 사서 새로운 장소에 명월관을 운영하였음도 알 수 있다. 명월관 화재와 관련된 기사에서 기자는 민봉호가 다시 양옥으로 지을 재산이 있다고 했지만, 민봉호는 그것을 김성수에게 팔았고, 그래서 광화문 명월관 본점에 동아일보가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도 그 자리에 동아일보가 있으니, 1919년 5월 23일 새벽의 화재는 명월관의 1세대를 마감하게 만든 큰 사건이었다.

Ⅲ. 안순환과 그의 명월관 경영

안순환에 대한 연구는 2004년 황영례의 박사논문인 「안순환의 유교 종교화 운동과 녹동서원과,12) 2006년 서예가인 강무(姜無)의 「명월관」13)이란 글이 대표적이다. 황영례의 글에는 비교적 정리된 안 순환의 생애가 소개되었다. 이에 비해 강무의 글에는 안순환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가 적혔다. 사 실 1997년에 출판된 󰡔조선의 큰부자(Ⅱ)󰡕에도 안순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14) 그러나 이 책의 자료 역시 일부 내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구체적인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아래에서 황영례가 정리한 안순환의 생애를 소개한다. 안순환은 참봉을 지낸 아버지 안순식(安舜 植)과 청주 한씨(韓氏) 사이에서 1871년 음력 2월 8일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2살 때 친 모가 갑자기 세상을 떴고, 안순환은 이웃마을에 전씨(全氏) 부인의 수양아들로 갔지만, 그녀 역시 9 세 때 별세를 하여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 부친은 이미 노쇠하여 심각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16세 때 서당에 들어갔다. 17세가 되는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1890년에 혼인을 하고 1891년에 자립을 하기 위해 서화상(書畵商)이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대에 ‘서화가’라는 칭호가 안순환에게 붙 었다.

1895년에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고 이어서 무관학교에 들어갔으나 생활의 어려움으로 사퇴하였다.

하지만 안순환의 실력과 성실함을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이 천거를 하여 1898년에 탁지부(度支部) 전환국(典圜局)의 건축 감독이 되었다. 그 후 판임관(判任官) 육등(六等), 전환국 기수를 거쳐서 1909 년 1월 21일에서 1911년 2월 1일 사이에 전선사 장선을 맡았다. 그런데 기왕의 글과 마찬가지로 황 영례의 글에서도 1909년에 명월관이 개업되었다고 전제하여, 1907년 이후 안순환의 이력에 대해서는

12) 황영례, 「安淳煥의 儒敎 宗敎化 運動과 鹿洞書院」,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35~47쪽. 황영례는 안순환이 집필한 󰡔家庭整理錄󰡕, 󰡔鹿洞書院誌󰡕 등의 문헌자료를 참고하였다. 아래에 나오는 내용은 황영례의 글을 정리한 것 이다.

13) 강무는 아래의 글을 출발로 하여 6회에 걸쳐 명월관 관련 연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자료는 사실 여부를 확 인하기가 어렵다. 강무, 「한글+한자문화 칼럼:명월관(1)」, 󰡔한글한자문화󰡕 87, 서울: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2006.

14) 이용식, 앞의 책, 143~159쪽.

(7)

<그림 1> 鹿洞書院(編),

󰡔曲阜聖廟慰安事實記󰡕, 1931, 147쪽에 실린 안순환의 사진이다. 녹동서원의 도감으로서 조선시대 관복을 입고 있다.

추측을 하여 서술하고 있다. 즉 1907년 조선통감부에서 궁내부를 없애자 대궐을 나온 안순환이 그를 따랐던 궁중의 남자 조리사인 대령숙수들과 함께 명월관을 차렸다고 하였다.15) 하지만 이미 확인했 듯이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1912년에 출판된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는 안순 환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안순환:경성 서부 여경방(餘慶坊) 송교동(松橋洞) 43에 거주한다. 당년 42세 (1871년생), 영어학교 출신, 선원전(璿源殿) 참봉(參奉), 전환 국(典圜局) 기수(技手), 궁내부 전선사 장선(掌膳), 일진회 평의원 역임, 현직 이왕직(李王職) 사무관(事務官), 적십자사 정사원(正社員)”16) 이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911년 이전에 안순환은 이왕직 사무관이면서 적십자사 정회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안순환과 관련된 기록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17) 이 자료로 미루어 보아, 안순환은 적어도 1909년 1월 21일에서 1910년 8월 29일 사이에 전선사 장선 을 맡았고, 1911년 2월 1일부터 1911년 6월 8일 사이에 이 왕직 사무관을 역임했다. 191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완전히 병합된 날이니, 그 이후 안순환은 단지 이 왕직 사무관으로서 그 이전의 업무를 명목상 유지했을 가 능성이 많다. 1905년 3월 4일에 있었던 궁내부 관제 개정 때, 전선사(典膳司)는 “임금의 음식상과 연회를 맡아본다.

15) 황영례, 앞의 글 38~40쪽.

16) 田中鴻城(編), 󰡔朝鮮紳士寶鑑󰡕, 京城: 朝鮮出版會, 1912.

17) ○ 순종 3권, 2년(1909 기유 / 대한 융희(隆熙) 3년) 1월 21일 양력 1번째 기사:서쪽 지방을 순행할 때 수원과 호 위관들을 임명하다. 전선사 장선(典膳司掌膳) 안순환(安淳煥) (중략)을 임명하였다. ○ 순종 3권, 2년(1909 기유 / 대 한 융희(隆熙) 3년) 2월 8일 양력 5번째 기사:김동완, 다다 칸, 고희성 등을 일본 사절 송병준의 수원에 임명하다.

전선사 장선(典膳司掌膳) 안순환(安淳煥)을 내부 대신 송병준(宋秉畯)이 일본국에 갈 때의 수원에 임명하였다. ○ 순 종 3권, 2년(1909 기유 / 대한 융희(隆熙) 3년) 5월 25일 양력 1번째 기사:황후가 권업 모범장 순행시 호위할 수원 을 임명하다. 전선사 장선(典膳司掌膳) 안순환(安淳煥), 궁내부 대신 관방 사무 촉탁(宮內府大臣官房事務囑託) 사에 키 다쓰[佐伯達]를 황후가 수원 권업모범장(水原勸業模範場)으로 행행(幸行)할 때 호종(扈從)하라고 명하였다. ○ 순 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19일 양력 2번째 기사:박제빈, 민상호, 윤우선 등에게 가자하 도록 하다. 전선사 장선(典膳司掌膳) 안순환(安淳煥), 시종원 시종 이성묵(李聖默), 수학원 교관 윤돈구(尹敦求), 장 례원 예식관 고희동(高羲東), 장례원 전사(掌禮院典祀) 유해종(劉海鍾), 육군 부윤(陸軍副領) 전영헌(全永憲), 시종 무 관(侍從武官) 강필우(康弼祐), 시종 무관 이병규(李秉規), 육군 참령(陸軍參領) 박두영(朴斗榮)을 정3품으로 승품(陞 品)하라고 명하였다. ○ 순부 2권, 4년(1911 신해 / 일 명치(明治) 44년) 2월 1일 양력 1번째 기사:민병석, 고희경, 이겸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안순환(安淳煥)·이용문(李容汶) 등을 모두 이왕직 사무관(李王職事務官)에 임용하 였으며, 고희경(高羲敬)부터 쓰가루 히데마로[津輕英麽]까지는 고등관 3등에, (중략) 서임하였다. ○ 순부 2권, 4년 (1911 신해 / 일 명치(明治) 44년) 6월 8일 양력 1번째 기사:전 사무관 안순환에게 단, 초 각 1필을 하사하다. 전 사무관(前事務官) 안순환(安淳煥)에게 단(緞), 초(綃) 각 1필(疋)을 특별히 내렸다. 관직에 있을 때 근로(勤勞)하였기 때문이다.

(8)

제조, 부제조, 장이 각각 1인인데 칙임관이고, 장선(掌膳)이 1인인데 주임관이며, 주사가 4인인데 판 임관이다.”고 했다.

전선사 장선이란 직책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였는가? 전선사에 속하여 왕가(王家)의 연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우두머리 벼슬이었다. 이 자리에서 종3품까지 했으니, 그는 전선사의 책임자였다. 안 순환은 1933년에 나온 󰡔조선유교회선언서급헌장(朝鮮儒敎會宣言書及憲章)󰡕이란 책의 제9장에서 “탁지 부 전환국 기수와 궁내부 전선사 장선과 주선과장 겸무라는 실직을 가지고 황실을 근시(近侍)하여 여러 해 있었더니 홀연히 궁내부가 변한 뒤에 사무관이 되매 수개월 후 퇴직하고”18)라고 밝혔다.

그런데 1900년부터 1909년까지 작성된 4000명이 넘는 전현직 관원들의 이력서인 󰡔대한제국관원리 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에서 장선을 검색한 결과 전선사 장선을 맡았던 인물들은 안순환 외에도 여러 명이 나온다.19) 이 자료에 의하면, 안순환은 적어도 1909년 1월 21일 이전에는 전선사 장선을 맡지 않았다. 전선사 장선의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은 수시로 그 직을 바꾸는 명령을 받는다. 그만큼 이 직책이 전문성을 담보하는 업무가 아님도 확인한다. 안순환 역시 장선을 맡기 전에 전환국의 기 수(技手)를 맡았다. 안순환 이외에 장선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도 경리원이나 전기사무와 관련된 일을 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명월관은 1903년 9월 17일에 문을 열었다. 앞에서 소개한 강무와 이용식은 황 영례와 달리 이러한 사실을 이미 밝혔다. 특히 강무와 이용식은 정확한 서지 내용을 밝히지는 않았 지만, 1912년의 자료라고 하는 글을 인용하면서 안순환이 명월관의 개업자임이 틀림없다고 했다. 즉

“현금(現今)은 경성에 유수한 실업가로 굴지(屈指)함에 지(至)하얏으니 안씨를 위(謂)하야 가히 성공하 얏다 할지라. 안씨의 창립한 조선요리점 명월관은 구한국 광무 7년(1903)경에 창설한 것인데 경성 요 리점의 효시요 대왕이며 괘관(掛冠:벼슬을 내어 놓고 물러남) 후는 동부 낙산(駱山) 신대상(新代上) 의 자저(自邸)에 한와(閑臥)하여 한운송풍(寒雲松風)으로 건려(件侶)를 작(作)하고”.20)

󰡔조선유교회선언서급헌장󰡕의 제9장에서 안순환은 그가 요리옥을 경영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 다. “삼사십여년 과거지사나 그때에 우리 조선은 그윽히 적막하야 인정(人定)을 진후면 사람의 왕래 가 끊어지고 국도(國都)에 내외국인간(內外國人間) 여인교제(與人交際)할 자리가 없었으니 이천만 민 중지국(民衆之國)으로서 이러한즉 한심한 생각을 하고 보니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외국인이 다녀갈 적엔 그 나라 정도(定度)를 알고자 할진대 요리점과 병원과 공원을 한 두 번식 본 후라야 그 나라

18) 朝鮮儒敎會總部, 앞의 책, 136쪽.

19) ○ 강경희(姜敬煕) 1858년생, 1907년 2월 27일 任典膳司掌膳 奏任四等, 3월 10일 依免 ○ 박용규 (朴容圭) 1883년 생, 1905년 11월 11일 典膳司掌膳 奏任三等, 1906년 2월 8일 經理院技師 奏任三等, ○ 윤용식(尹龍植) 1868년생, 1905년 3월 23일 任典膳司掌膳六等, 10월 24일 轉任主殿院電務課技師, 1907년 1월 31일 依願免本官, 동일 任典膳司 掌膳, 2월 1일 給乙號八級俸, 현재 從二品宮內府典膳司掌膳 ○ 이의덕(李義悳) 1860년생, 1907년 3월 10일 典膳司掌 膳 敍奏任四等, 동11일 陞從二品 冠禮時酌醴官 ○ 정용환(鄭龍瑍) 1843년생, 1905년 1월 19일 陞奏任官五等, 3월 23 일 任典膳司掌膳. 8월 陞從二品 樂器還成時別單, 3월 12일 轉任典膳司掌膳, 동일 給乙號八級俸, 현재 從二品宮內府 典膳司掌膳勳四等.

20) 이용식, 앞의 책, 154쪽.

(9)

진중함이 어느 정도에 이른 것을 알지니 이러함에 이르러서는 그 수치(羞恥)를 면코자 우리나라에서 남의 나라 사람에게 자랑꺼리 될 만한 조선요리를 발명하야 관민상하(官民上下) 없이 혼례피로(婚禮 披露)와 각항(各項) 연회며 내외국인 교제하는 데와 모든 사업 기초상 의논하는 자리를 만들고 우리 나라도 이런 것이 있다는 표시가 되게 타인을 사용(使用)하야 영업기관을 설비한 바 매삭(每朔) 수백 호주(數百戶主)가 고용(雇傭)함에 생활자료가 근어삼십년간(近於三十間)이나 되얏는지라.”21)

이 글은 1933년에 안순환이 직접 쓴 것이다. 자신이 요리점을 운영한 지 30년이 되었다고 하니, 스스로도 1903년에 명월관을 처음 시작했음을 밝혔다고 하겠다. 특히 요리옥 운영을 직접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고 했다. 안순환이 직접 쓴 다른 글에서 그의 대리인으로 김동식(金東 植)과 정원인(鄭元益), 그리고 정춘근(鄭春根)이라는 사람이 거론되었다.22) 여기에서 1903년 당시 대 한제국 왕실에서 겸직이 가능했으며, 그것을 표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대리인을 내세웠다는 추측 이 가능하다. 기록에 의하면 안순환은 근대적 극장인 원각사(圓覺社)의 사장도 1908년 7월에 맡았 다.23) “본사장 안순환 씨는 사퇴하고 최영목(崔榮穆) 씨가 해사무(該事務)를 임시 대변함”(󰡔대한매일 신보󰡕, 1908년 12월 19일)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안순환은 같은 해 12월에 원각사 사장을 그만 두었 다. 󰡔황성신문󰡕 1909년 4월 14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도 실렸다. “전내대(前內大) 송병준(宋秉畯) 씨가 도일할 시에 김시현(金時絃) 씨에게 위탁하기를 원각사를 영구유지케 하라 함으로 경비 900여 환을 담당지급(擔當支給)하였다는데, 안순환 씨가 김씨를 청요(請邀)하여 왈(曰) 여(余, 내)가 금번 귀 국시에 송병준 씨가 부탁하되 원각사를 담임(擔任)유지케 하라 하였슨즉 차후(此後)로는 물위상관(勿 爲相關)하라 하메 김씨가 반대하여 왈(曰) 송씨가 전하처후(前何處後) 하심으로 차후부탁(此後付託)이 유(有)하겠느냐 하고 안순환 씨의 친근한 인(人)으로 해사임원(該社任員)을 피(被)한 자는 일체 개차 (改差)함으로 안씨는 현금 협감(挾感)이 된 모양이라더라.”24)

이 기사는 안순환과 김시현이 서로 송병준이 자신에게 원각사 경영을 맡겼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김시현이 안순환의 주장을 듣지 않고 그와 관련된 원각사의 직원들을 해임하였고, 이로 인해서 안순 환이 아주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밝힌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11월 8일자의 기사에 의하면, 이에 격분한 안순환은 “안씨극장계획(安氏劇場計劃), 전궁내부전선과장(前宮內府典膳科長) 안 순환 씨는 불소(不少)한 자금을 구취(鳩聚)하여 종로등지에 일대(一大) 연극장(演劇場)을 설치하기로 현금 계획하는 중이더라.”고 했다. 이와 같은 기사를 통해서도 당시 안순환이 대단한 사업가였음을 확인한다.

특히 명월관의 운영을 통해서 궁내부의 관료가 되었고, 그것이 명월관의 영업에도 이익이 되었다.

21) 朝鮮儒敎會總部, 󰡔朝鮮儒敎會宣言書及憲章󰡕, 京城:朝鮮儒敎會總部, 1933, 135쪽.

22) 安淳煥, 󰡔家庭整理錄󰡕, 石版本, 1936, 16쪽(이 책은 동국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나 열람이 되지 않아 황영 례의 앞의 논문 40쪽에 재인용하였다).

23) 강무, 「한글+한자문화 칼럼:명월관(5)」, 󰡔한글한자문화󰡕 91, 서울: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2006, 46쪽.

24) 원각사와 안순환의 관계에 대해서는 백현미, 「원각사의 설립과정과 연극사적 성격」, 󰡔판소리연구󰡕 6, 서울: 판소리 학회, 1995를 참조할 것.

(10)

관료들과 외교관들이 명월관을 이용하도록 했고, 궁중연회에 반드시 참석하는 기생들을 보다 효과적 으로 명월관에 모이게 하였다. 이로 인해서 근대적 극장인 원각사의 사장도 함께 맡았다. 안순환은 그야말로 1900년대 초반 경성의 유흥업계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꾀했다. 1909년 2월에는 내부대신 송 병준이 일본에 갈 때 수행을 하여 원각사 운영도 맡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비록 “어렸을 때에 극히 궁곤하여 세상에 고생이라는 것은 아니 겪은 것이 없이 별별 일을 많이 실험한 바 농사·장사·공장 각 방면 천집사(千執事)를 다 투철히 안다할 수는 없으나 대개는 양해(諒解)하게는 되었으니”25) 안순 환이야 말로 갖은 고생을 하여 나이 40에 이르러 서울의 부호가 되었다.

따라서 안순환은 조선요리옥의 시초인 명월관을 개업한 이후, 그 인연으로 인해서 대한제국의 연 회와 음식을 주관하는 부서의 최고 책임자 자리도 맡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조리사 출신이 아니었 다. 비록 갖은 고생을 다 했지만, 영어학교에서 근대 문물을 익히고 그것을 계기로 대한제국의 관료 가 되어 종3품에 이르는 고위직까지 이른 인물이었다. 그는 적어도 1929년까지 조선요리옥 사업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개인적으로 서화를 즐겼다. 그러나 선친의 성리학에 대한 가르침을 놓치지 않고 있다가, 1930년 봄에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지금의 시흥시에 건립하고, 명교학원(明敎學院)을 설립하 여 유학 교육에도 참여하였다. 1935년 4월 28일에는 도쿄에서 개최된 동양유도대회(東洋儒道大會)에 다른 유림대표들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하는 등 공자교 운동에 투신했다.26) 그리고 안순환은 1942 년 8월 20일 72세로 사망하였다.

Ⅳ. 조선요리옥-근대적 식사와 연회, 그리고 집회의 장소

1917년 2월에 발간된 󰡔신문계(新文界)󰡕27) 5호에는 「경성유람기」라는 글이 실렸다. 함경남도 금성 (金城)에 사는 이승지가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가면서 문명개화의 현실을 감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 었다. 이승지는 기차 안에서 안변에서 경성으로 가는 학생 어성룡과 함흥의 금융조합 지배인 김종성 과 같은 자리에 앉는다. 문명 도래의 신기함을 기차 안에서 논하던 이들은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조 선요리옥을 찾는다. 그 내용을 요사이 말로 옮겨보자.

“때는 열한시 반이라, 사진관이 파하여, 모든 관람객은 각자 귀가를 하였는데, 이때 인력거 두 차 가 황토현을 향해 몰아가니, 이는 김종성이 이승지를 연회 대접을 하려고 명월관 요리점으로 가는 것이라, 명월관은 조선요리의 원조로 화려한 누대와 성대한 설비가 진선진미함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이승지는 아무 까닭 모르고 인력거에 내려 김종성을 따라 들어가는데, 조란화동(彫欄畵棟)

25) 朝鮮儒敎會總部, 앞의 책, 135쪽.

26) 이에 대해서는 황영례의 앞의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27) 󰡔신문계󰡕란 잡지는 1913년 4월에 창간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선전하는 의도를 지닌 글들이 주류를 이룬다.

자세한 내용은 권보드래해설, 「경성유람기(京城遊覽記)」, 󰡔민족문학사연구󰡕 16, 2000을 참조할 것.

(11)

과 분벽사창(粉壁紗窓)이 황황한 전기 광선에 비치여 영롱찬란한 광경이 그릇, 수정궁궐에 들어감을 깨닫지 못할지라 이승지 심중에 하도 이상하야 ‘여보게 이 집이 누구집인가’, ‘이 집은 요리점올시 다. 시장하실 듯하기에 술이라도 한 잔이라도 권하고자 하나이다’ ‘요리점, 협중 늙은이가 너무 과하 지 아니한가’ 두 사람은 보이의 안내를 따라 3층루 한편 처소에 좌정하였는데, 이승지는 소소견이다 소괴(少所見而多所怪)로, 보이는 것마다 괴이하고 괴이하게 여김을 따라 묻는 것이 많다”

이승지는 전기등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수돗물에 대해서도 논한다. 술을 몇 잔씩 마시다보니, 문 이 열리면서 “종용히 들어와 날아가는 듯이 앉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두 사람을 향하여 인사하는 여자는 곧 광고 조합에 유명한 기생 춘외춘(春外春)과 매홍(梅紅)이니, 이는 김종성이 이승지를 접대 하기 위하여 청한 것”이었다. 손님과 기생이 서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매홍은 거문고, 춘외춘은 양금(洋琴)을 연주하였다. 결국 이들은 기생의 소리를 들으면서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

광화문 명월관의 시설이 3층에 20호가 넘는 방이 있었다고 하니, 앞의 글을 통해서도 당시의 휘황 찬란한 실내 모습을 짐작하고 남는다. 더욱이 기생들이 조합을 만들어 요리옥과 유곽 등을 전전할 때이니 명월관에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 일 자체가 이제 더 이상 양반 관료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돈만 있으면 명월관에서 호화로운 조선요리에 기생의 노래와 악기 연주까지 경험할 수 있었다. 사실 명월관은 비록 조선식이었지만, 그 음식의 구성은 결코 조선왕실 음식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았 다. 하지만 조선식을 기본으로 하여 당시의 일본과 서구의 음식들이 망라되어 제공되었다. 20세기 한국음식이 겪은 정치적 휘둘림이 명월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 5월에 출간된 󰡔조선의 도시:경성-인천󰡕28)이란 책에는 당시 경성에서 이름난 요정(料亭)을 일본요리와 조선요리로 나누어 소개했다. 일본요리로 유명한 요정은 34곳이 나오는데, 요리조합에 가 입한 곳을 중심으로 적었다. 조선요리로 유명한 요정으로는 7곳의 조선요리옥이 나온다. 그리고 중 국요리[支那料理]로 유명한 요정은 3곳이 소개되었다. 이 중에서 조선요리옥은 다음과 같다.

<표 1> 󰡔조선의 도시:경성-인천󰡕에 실린 경성의 조선요리옥

상호 위치 전화번호

식도원(食道園) 삼각정(三角町) 78 광화문 1517, 441

명월관(明月館) 돈의동(敦義洞) 145 광화문 64, 862

명월지점(明月支店) 서린동(瑞麟洞) 137 광화문 725, 1778

국일관(國一館) 관수동(觀水洞) 21 광화문 365, 668

장춘원(長春園) 황금정(黃金町) 1-146 본국 1100, 2058

고려관(高麗館) 황금정(黃金町) 2-18 본국 4331

태서관(太西館) 공평동(公平洞) 78 광화문 134, 2056

28) 萩森茂編著, 󰡔朝鮮の都市: 京城…仁川󰡕, 京城: 大陸情報社, 1930, 191~192쪽.

(12)

<표 1>의 순서는 다분히 그 매출이나 유명세와 관련하여 잡힌 듯하다. 잡지 󰡔삼천리󰡕 제4권 제4 호(1932년 4월 1일자)에는 당시 경성에서 가장 최고의 수준에 있었던 조선요리옥으로 식도원과 명월 관을 꼽았다. 두 곳의 조선요리옥이 1930년대 경성에서 가장 쟁패를 다루는 음식점이라고도 했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2년 당시 명월관(明月館)의 위치는 지금의 창덕궁 남쪽 종로3가 돈의동(敦義洞)에 있었다. 자본금이 30만원이고 1년 매출이 20만원이었다. 본점은 대지가 600평이고, 건평이 1,200여 평에 이르는 양옥 2층 집이다. 손님방에는 비단방석과 자수병풍과 장구·가야금·거 문고·단소·피리 등 악기를 갖추고 있었다. 영업 실적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본점과 지점을 합하 여 하루에 평균 5백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다. 본점과 지점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120여명을 헤아린 다. 이 120명에는 손님을 안내하는 젊은이와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 그리고 손님과 기생을 이동시키 는 인력거의 차부까지 모두 포함하였다.

이에 비해 식도원(食道園)은 지금의 서울 남대문로 3가 한국은행 소공별관의 길 건너편에 있었다.

자본금은 20만원이다. 식도원도 투자자본이 수십만 원을 넘고, 일 년 매출도 명월관에 버금간다고 했지만 정확한 금액을 밝히지 않았다. 현재의 건물은 백여 칸의 큰집이요 그 토지도 수백 평이라고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한다. 식도원에 근무하는 종업원은 약 50명으로 명월관보다는 규모 가 작다. 식도원의 자랑은 건물이 조선식이라는 점과 음식도 조선식을 위주로 한다는 데 있다. 그래 서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조선정조(朝鮮情調)’를 맛보려고 식도원을 찾는다고 했다. 특히 방에는 주 단으로 만든 방석이 깔려 있고, 매란국죽(梅蘭菊竹)을 그린 병풍이 둘러쳤다. 여기에서 장구와 춤을 추는 기생이 있는 모습이 특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명월관과 식도원 중에서 어느 쪽이 이길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기사는 마무리된다. 두 조선요리옥의 주인이 지닌 경영수완과 음식의 맛, 그리고 손님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로 판단될 것이 라고 했다. 1927년 12월 20일자 잡지 󰡔별건곤󰡕 제10호에 식도원 주인 안순환의 이름으로 「요리집에 서 본 돈 시세, 금년 일 년 조선사람의 생활은 어떠하였나, 여러 방면으로 모아 본 작년과 금년의 비교」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

“큰 바람이 불면 어느 나무든지 다 흔들리는 격으로 일반의 경제가 공황하게 된 이때에 요리업계 인들 어찌 그 영향을 받지 아니 하겠습니까. 우리 식도원(食道園)은 원래에 고객이 대부분은 은행 회 사 등 실업가와 관리계급의 사람이 많은 까닭에 다른 요리집보다는 그다지 큰 영향은 받지 않습니 다. 그러나 내빈이 작년에 비하야 약 삼 활은 감소되고 따라서 수입도 삼 활은 감한 것 같습니다.

내빈으로 말씀하면 전부가 서울사람이요 시골사람이 별로 없고 또 연전 모양으로 유흥하기 위하야 오는 부랑청년이 없고 모두 일을 위하야 모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내빈 중에는 외국인이 해 마다 늘어가는 모양인데 내빈 전체의 비례로 따지면 외국인이 약 십분지삼(3/10)을 점령하고 그 십분 지삼 중에는 일본인이 십분지이(2/10)를 점령하였습니다. 그것은 물론 교통이 점점 편리하고 외국인 이 조선에 많이 오는 동시에 조선 사람의 경제력은 해마다 줄어가고 외국인의 경제력은 해마다 늘어 가는 까닭이겠습니다.”

(13)

특히 이 기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조선요리옥을 찾는 외국인이 날로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1936년에 출간된 󰡔신판대경성안내(新版大京城案內)󰡕29)라는 책에서는 “경성을 구경하면서 하룻밤은 조 선요리에 빠져서 기생의 장구에 흘러나오는 애수어린 ‘수심가(愁心歌)’를 듣는 것이다.”30)고 적었다.

특히 조선요리옥에서 조선요리와 기생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한 경험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 명월관(明月館)·천향원(天香園)·국일관(國一館)·조선관(朝鮮館)·태서관(太西館)·송죽관(松 竹館) 등이 당시 경성에서 이름이 난 조선요리옥이라고 소개했다. “그 중에서도 명월관·식도원·천 향원은 내지인의 연회도 가능하다.”고 적었다.

하지만 주의할 점도 밝혀두었다. 조선요리옥에서 조선요리를 먹고 나면 몸에서 마늘 냄새가 난다 는 것이다. 즉 “마늘을 먹고 여관에 돌아오면 다음 날까지 방 안에 냄새가 자욱하기 때문에 함께 밤 을 사용하는 동료의 머리 아프게 하는 일이 생긴다.”31)고 하면서 주의를 하라고 적었다. 이 모든 정 보가 경성에 온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1934년 경성관광협회에서 나온 󰡔조선 요리연회안내서󰡕라는 작은 책에는, 조선요리 한 상에 6인분을 기준으로 6엔·9엔·12엔이 있다고 적 혀 있다. 하루 택시를 빌려 다섯 군데를 돌 경우 4엔이었던 당시 물가와 비교하면, 그 값이 얼마나 비쌌는지를 짐작하고 남는다. 여기에 기생의 화대까지 보탤 양이면 조선요리옥에서 쓰야 하는 비용 은 대단한 금액이었다.

따라서 일본인에게는 조선요리옥이 신선로를 대표적인 음식으로 하여 조선요리와 기생으로 상징되 는 관광 상품으로 소비되었다. 이렇게 일본인들에게 조선요리옥이 인기를 끌자 아예 도쿄에도 ‘명월 관’이란 이름의 조선요리옥이 등장했다.32) 여기에 서울의 부자들도 조선요리옥에서 온갖 모임과 유흥 을 즐겼다. 이런 면에서 당시의 조선요리옥은 서울의 명소였다. 그래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어 닥친 세계적인 대공황에도 조선요리옥은 흔들림도 없이 그 영업이 더욱 잘 되었다. 이미 1920년대 서울은 식민지 조선의 자본이 집중된 중심지였다. 이 점이 조선요리옥의 전성시대를 가져온 결정적 인 이유였다. 조선요리옥뿐만 아니라, 일본요리옥과 중국요리옥도 번창일로에 있었다. 보수적이든지 진보적이든지 상관없이, 혹은 모던보이든지 전통적인 면모를 갖춘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조선요리옥 을 비롯한 여러 요리옥은 근대적 유흥의 중심지로 그 불빛을 휘황찬란하게 밝히고 있었다.

조선요리옥은 근대적 공적 영역으로도 이용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모여서 독립선언을 한 곳은 명월관 지점이라고도 전해지는 태화관이다. 1918년 12월 28일, 손병희를 비롯한 각 종교의 지도자들은 마침 고종 황제의 국장(國葬)이 있기로 한 다음해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 모여서 독립선언 발표를 감행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그런데 3월 1일 바로 전날 밤 서울 재동에 있던 손병희의 집에 모인 중심인물들은 일본총독부의 감시가 그 어느 때보다

29) 矢野干城·森川淸人, 󰡔新版大京城案內󰡕, 京城:京城都市文化硏究所, 1936, 473쪽.

30) 矢野干城·森川淸人, 앞의 책, 433쪽.

31) 矢野干城·森川淸人, 앞의 책, 436쪽.

32) 이에 대해서는 外村大, 「戰前日本における朝鮮料理業の展開」, (財)味の素食の文化センタ硏究造成金報告書, 2003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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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엄한 사정을 감안하여 독립선언의 장소를 인사동의 태화관으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다.

미처 그 사정을 몰랐던 학생대표들이 당일 2시가 가까이 되어도 어른들이 나타나지 않자, 그들이 변절한 줄로만 알고 태화관으로 쳐들어 왔다. 그런데 태화관에서 행해진 독립선언은 비록 비장하기 는 했지만, 진수성찬의 요리를 먹으면서 축배를 들며 이루어졌다. 즉 민족대표 33인은 4시간이 넘게 태화관에서 주연(酒宴)을 벌리고 있었다.33) 그 탓에 그들을 잡으려 왔던 조선인 경찰마저도 주연이 곧 끝나 가는지를 물었을 정도였다.

인터넷 홈페이지인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의 ‘국사편찬위원회’ 사이트에서 명월관과 식도원을 키 워드로 쳐 보면, 식민지시기에 얼마나 다양한 모임이 조선요리옥에서 개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주 로 󰡔동아일보󰡕에 실린 이와 관련된 기사들에는 결혼식을 비롯하여 각종 정치조직의 모임, 출판기념 회, 외국의 유명인사 환영회와 환송회, 그리고 교회의 모임도 조선요리옥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관 례는 이미 1903년 9월 17일에 최초의 조선요리옥인 명월관에서부터 행해졌다. 가령 1908년 2월 8일 토요일에 당시 유명인사였던 김윤식과 윤치호 등이 강구회(講舊會)를 결성한 장소도 명월관이었다.

<그림 2> 명월관에서 개최된 장로교 기념축하 만찬회 장면(󰡔동아일보󰡕 1934년 7월 4일자)

33) “3월 1일은 유달리 청명한 날씨였다. 33인은 단정히 옷을 갈아입고 속속 뒤이어 명월관 지점(현 종로보안서)으로 모여 들었다. 그 전날 손병희 선생의 지시로 김종규 씨가 특별히 진수성찬을 준비할 것을 명월관 주인한테 주문하 여 두었다. 33인은 차례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중앙식탁에는 흰 보에 싼 독립선언서를 올려놓았다. (중략) 이윽고 정각 12시가 되자 만해 한용운 선생이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에 의하여 여기에 독립을 선언한다고 선창하고 저 유 명한 독립선언서를 힘 있게 낭독한 후 일동이 같이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중략) 무장한 헌병과 경관들이 오기는 그 후 한 시간만이었다. 문 복도 할 것 없이 앞뒤를 이중삼충으로 겹겹이 경관과 헌벙 기마병이 물샐틈없이 둘러쌌다. 그때까지 옆방에서 흥탕거리며 질탕이 놀든 노름꾼과 명월관주 안씨 등은 어느 센가 모두 어디로 도망을 치어 벌 둥지를 건들인 것처럼 소란스럽든 노름장소는 갑자기 심산유곡처럼 삼엄한 고요로 뒤 쌓여 지고 말았다.” 全洪俊, 「己未運動과 明月館事件」, 󰡔開闢󰡕 74,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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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국립민속박물관의 손진태 사진 아카이브에 소장된 사진이다.

1938년 3월 5일 경성의 조선요리옥 태서관(太西館)에서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아카마쓰 지조와 아키바 다카시가 공동으로 출판한 󰡔조선무속의

연구󰡕 출판을 기념 연회자리이다.

조선요리옥에서의 모임은 그 규모도 다양했다. 가령 100명이 넘는 인사들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도 1920년대 이후의 명월관이나 식도원에서 열릴 수 있었다. 1934년 7월 3일에는 장로교 기념 축하연이 명월관에서 열렸다. 긴 식탁에 흰 종이를 깔고 각종 음식을 올린 모습은 영락없이 1980년대에도 행 해졌던 연회장과 닮았다. 일본식 여닫이문을 설치해 두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별도의 방이었다가, 손 님이 많으면 이렇게 문을 없애고 대형 연회를 개최하였다. 아울러 모임의 중심이 되는 좌석 뒤에는 매란국죽의 그림이 그려진 병풍이 쳐졌다. 1933년 10월 16일에 명월관에서 열린 백남운의 󰡔조선경제 사󰡕 출판기념회를 소개한 그 다음날의 󰡔동아일보󰡕에는 모임이 열리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간단한 인사를 하는 백남운의 모습과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앉은 식탁, 그리고 음식을 나르는 종업 원이 모습이 나온다.

심지어 일본인들과 조선 인의 모임도 조선요리옥에 서 열렸다. 현재 국립민속 박물관의 손진태 사진 아 카이브에 소장된 사진 중 에서도 조선요리옥에서의 모임 모습이 나온다. 특히 이 사진의 오른쪽 아래에 는 모임에 대한 기록을 남 겨 두었다. 즉 1938년(戊 寅) 3월 5일(토요일) 당시 서울인 경성의 조선요리옥 태서관(太西館)에서 아카마 쓰 지조(赤松智城, 1886~

1960), 아키바 다카시(秋葉 隆, 1888~1954), 이마무라

도모에(今村鞆, 1870~1943),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 등 여러 명이 모여서 출판기념회 및 민속담화회(民俗談話會)를 기념하여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는 이들 이외에 조선인 지식인 손진태(孫晉泰, 1900~1950 ?), 송석하(宋錫夏, 1904~1948), 정 인섭(鄭寅燮, 1905~1983)이 보인다. 이들은 1932년 4월에 결성된 조선민속학회의 주요 멤버이기도 했 다. 관련 자료를 참고해 보면,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아카마츠와 아키바가 공동으로 출판 한 󰡔조선무속의 연구(朝鮮巫俗の硏究)󰡕 출판을 기념하여 모인 자리로 여겨진다. 이 책의 상(上)은 1937년 6월 20일에 오사카(大阪, 屋號書店)에서 출판되었고, 하(下)는 1938년 10월 30일에 같은 출판 사에서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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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연장자인 이마무라가 병풍을 등진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마무라의 위치에서 오른쪽에는 아카마츠, 무라야마, 송석하가 앉았고, 그 왼쪽에는 아키바, 손진태, 정인섭이 앉았다. 모임의 주인공 인 아카마츠와 아키바가 상석을 차지한 이마무라의 좌우에 자리를 잡은 배치는 결코 조선적인 좌석 배치는 아니다. 조선시대 연회에서 북벽이 상석이고, 그로부터 동벽과 서벽이 차례대로 차석이 되었 던 것과 이 모임의 좌석배치는 다르다. 아울러 상에 올라간 음식들 역시 반드시 조선적이라고 보기 는 어렵다.

식민지시기 명월관이나 식도원과 같은 조선요리옥은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모습으 로 비추어졌다. 아예 방 한 칸을 전세내고, 매일같이 기생을 불러서 유흥을 즐기는 한량도 있었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조선요리옥이 이용되기도 했다. 보통의 음식점이다. 혼례식과 그 피로연도 조선요리옥에서 열렸다. 지금의 전문적인 피로연장의 역할을 조선요리옥이 했다. 아울러 각종 모임도 조선요리옥에서 열렸다. 지금의 개념으로 따지면 호텔 연회장이나 서울 프레스센터의 레스토랑이 하 는 역할을 조선요리옥이 한 셈이다.

Ⅴ. 명월관의 메뉴와 조선음식의 근대적 개량

󰡔만세보(萬歲報)󰡕 1906년 7월 14일자에는 명월관 광고가 다음과 같이 실렸다. “국내외의 각종 술 과 엄선한 국내외 각종 요리를 새롭게 준비하고 주야로 손님을 맞으려 합니다. 각 단체의 회식이나 시내외(市內外) 관광, 회갑연과 관혼례연 등에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보내어 음식을 배달하기도 하는데, 진찬합(眞饌盒)과 건찬합(乾饌盒), 그리고 교자음식(校子飮食)을 화 려하고 정교하게 마련해 두었습니다. 필요한 분량을 요청하면 가깝고 먼 곳을 가리지 않고 특별히 싼 가격으로 모시겠습니다. 군자의 후의를 표하오니 여러분께서는 많이 이용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주요 음식물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새롭게 개량하여 만든 각종 교자음식, 각국의 맥주, 각종 서양 술, 각종 일본 술, 각종 대한(大韓) 술, 각종 차와 음료, 각종 양과자(洋菓子), 각종 담배, 각종 시가, 각국 과일, 각종 소라, 전복, 모과” 비록 조선음식이 주된 메뉴였지만, 그렇다고 오롯이 조선음식만을 내놓지는 않았다. 외국음식과 술, 심지어 담배도 명월관에서 다루었던 메뉴 중의 하나 였다.

1908년 1월 10일자 󰡔황성신문󰡕에는 「명월관확장광고」라는 것이 실렸다. 여기에서 명월관은 바로 1903년 9월 17일에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 문을 연 조선 최초의 조선요리옥을 가리킨다. 새로 확장 을 하여 수천 명이라도 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준비가 되었다는 광고문에는 명월관에서 판매하는 요 리로 한요리특별개량교자(韓料理特別改良交子), 동보통교자(仝普通交子), 얼교자, 주효상(酒肴床), 식교 자(食交子) 대소(大小), 각종서양요리 등이 적혀 있다. 다음으로 명월관에서 판매하는 술 종류가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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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약주(藥酒)·소주(燒酒)·구(俱)화주(和酒), 국정종주(菊正宗酒), 각종맥주, 삼편주(三鞭酒), 후이식 기주(酒), 뿌란디주(酒), 포도주 등이다. 또한 각국경편식물(各國輕便食物) 용숙(甬熟), 진찬합건찬합(眞 饌盒乾饌盒), 권연여송연애급연(卷烟呂松烟埃及烟), 그리고 기타 미색(美色)·가동(歌童)·창부(唱夫)·

장고(長鼓)·대고(大鼓)에 대해서는 청구하면 즉시 응공(應供) 한다고도 적었다.

여기에서 ‘한요리특별개량교자’는 한국요리를 새롭게 개량한 교자상을 가리킨다. ‘동보통교자’는 한 국요리의 보통교자이다. 얼교자는 밥이 되는 교자와 마른 반찬 교자를 한데 섞어서 차려 놓은 교자 상이다. 주효상은 술안주상을 말한다. 약주와 소주는 전래의 조선술이고 그 다음 문구는 일본술인 화주를 갖추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 중에서도 일본 청주인 키쿠마사무네(菊正宗)를 제공한다는 뜻이 다. 삼편주는 삼페인, 후이식기주는 위스키, 뿌란디주는 브랜디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각국의 간단한 식사와 함께 찬합과 담배와 여송담배, 그리고 이집트 담배 등도 제공한다고 적었다. 특히 기생과 노 래 부르는 아이, 그리고 창부와 장고·대고와 같은 악기도 요청만 하면 바로 제공한다고 했다. 이것 이 바로 1908년의 조선요리옥 명월관에서 제공받을 수 있었던 서비스였다.

시조시인 김상용(金尙鎔, 1902~1951)은 1935년 2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수필에서 다음과 같 이 밝혔다. “마침 명월관 앞을 지나면, 이때 임비(痳痺, 마비)돼가는 뇌신경(腦神經)이 현기(眩氣, 어 지러움)에 가까운 상상의 반역을 진압할 수가 있겠는가? 없을걸세. 두어 고팽이 복도를 지나, 으슥한 뒷방으로 들어서거든, 썩 들어서자, 첫눈에 뜨인 것이 신선로(神仙爐). 신선로에서 김이 무엿무엿 나 는데 신선로를 둘러 접시·쟁반·탕기 등 대소기명(大小器皿)이 각기 진미(珍味)를 받들고 옹위(擁衛) 해 선 것이 아니라, 앉았단 말일세. 차(此) 소위 교자시라. 애헴 ‘안석’을 지고 ‘방침’을 괴고, 무엇을 먹을고 위선(爲先) 총검열을 하것다. 다 그럴듯한데, 욕속수완(欲速須緩, 성급하게 서둘지 않고)이라, 서서히 차려보자. ‘닭알저냐’를 하나 초고초장에 찍어먹고, 댐으로 어회(魚膾), 또 댐으로 김치, 이러 다보니, ‘게장’과 ‘어리굴젓’이 빠졌구나. 이런 몰상식한 놈을 봤나. ‘여봐 뽀이 게장과 어리굴젓 가 져오구. 인력거 보내서 광충교 밑 사시는 서생원 좀 뫼서와”

앞에서 소개했던 1938년 3월 5일 경성의 태서관에서 있었던 연회의 사진을 보면 당시의 조선요리 옥 메뉴를 짐작할 수 있다. 상의 한가운데는 신선로가 놓였고 그 옆으로 각종 과일이 고임음식으로 놓여서 축하연의 상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술은 오늘날 ‘니혼슈(日本酒)’라고 불리는 청주를 담은 도쿠리이다. 하얀 접시에 담긴 음식들이 과연 어떤 종류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조선음 식과 일본음식 등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많다. 이미 1921년 4월 4일자의 󰡔동아일보󰡕에서 조동원은

“한갓 이익에만 눈을 뜨고 영원히 조선요리의 맛깔 좋은 지위를 지속할 생각을 못한 결과 서양 그 릇에 아무렇게나 담고, 신선로 그릇에 얼토당토않은 일본 요리 재료가 오르는 등 가석한 지경에 이 르렀다.”는 비판을 했다. 조선요리옥의 음식들은 더 이상 조선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다만 신 선로만이 조선요리옥의 상징으로 부각되었을 뿐이다.34)

34)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주영하, 󰡔음식인문학󰡕, 254~260쪽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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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나가는 글

식민지시기 조선요리옥은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었다. 음식점이면서 각종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모 임이 열렸던 곳이었다. 여기에 근대적으로 바뀐 기생들이 드나들면서 접대를 하기도 했기 때문에 천 가지의 얼굴을 가진 연회의 장소였다고 해야 옳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이나 관청에서 행하는 공 식적인 연회를 제외하면, 사적공간에서 대부분의 연회가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서 식민지시기 조선요 리옥은 사적공간에서 행해지던 연회를 공적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이 공적영역에서는 공적인 모임뿐 만 아니라, 사적인 식욕과 성욕까지도 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포스트 식민주의(post-colonialism)’를 주장한 호미 바바(Homi K. Bhabha)는 서유럽의 근대성이 지 닌 장점이라고 말해지는 ‘보편적인 이성’도 알고 보면 허구라고 주장했다.35) 그는 프랑스대혁명 시기 의 파리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샌 도밍고를 비교하면서 억압받은 식민지에서는 발전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을 뿐 볼 수는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혔다. 그렇다면 식민지시기 경성에서의 조선요리옥 의 유행은 과연 ‘식민지 수탈론’36)과 ‘식민지 근대화론’37)의 어느 선상 위에 놓여 있던 것이었을까?

나는 식민지시기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대한 앞의 두 가지 이항대립적 논의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이 문제에 놓여 있다고 본다. 곧 경성의 조선요리옥은 식민지 상황에서 경성의 도시인들이 한반도의

‘근대’라는 시스템 내에서 소비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조선요리옥의 식탁 위에서는 오래된 것도 존 재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것과 근대적 개량이 가해진 것도 존재했다. 이것을 소비했던 일 부 조선인과 일본인은 조선요리옥에서 조선적인 음식을 즐기면서 동시에 근대가 만들어낸 자본주의 적 유흥을 즐겼다.

이러한 조선요리옥의 대표적인 경영자 안순환은 결코 조선음식을 지키려는 선각자로 볼 수 없다.

그는 근대적 시설인 조선요리옥을 통해서 새로운 자본을 축적해간 사업가였다. 비록 그가 1920년대 이후 조선음식의 전문가로 대접받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경영의 경험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 다.38) 그래서 안순환은 조선음식을 개량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안순환은 결코 대한제국 의 궁중음식을 유지시킨 인물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대한제국의 궁중음식을 근대적 상업공간인 조 선요리옥에서 메뉴로 변모시킨 인물이라고 보아야 옳다.

‘근대’라는 시각에서 보면, 경성의 조선요리옥에서 소비되었던 조선음식과 그 연회는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공공적이라는 성격을 전근대시기와 달리 확보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정한 서비스료

35) 호미 바바, 나병철 옮김, 󰡔문화의 위치󰡕, 서울: 소명출판, 2002.

36) 이에 대한 국내의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경제사학자 이영훈이 있다.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 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를 볼 것.

37) 이에 대한 구미학계의 논의로는 신기욱·마이클로빈슨 편저, 도면회 역,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서-󰡕, 서울: 삼인, 2006이 있다.

38) 주영하, 앞의 책 2011, 283~28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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