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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東北地域의 靑銅器文化와 古朝鮮의 位置 變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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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中國 東北地域의 靑銅器文化와 古朝鮮의 位置 變動

118)

趙 鎭 先*

❙국문초록❙

고고학적으로 보는 古朝鮮에 대한 논의는 기원전

1000

년기에 중국 동북지역부터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琵琶形銅劍文化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기원전

1000

년기 전

·

중엽의 비파형동검문화는 대능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十二臺營子文化

,

요동반도의 崗上類型

,

요동 북부

~

길림성 중남부의 二道河子類型으로 구분된다

.

이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기원전

9

세기경 대능하 중류지역에서 발생한 十二臺營子文化인데

,

기원전

8~7

세기경에는 대능하 상류지역으로 확산하며

,

기원전

6~4

세기에는 요동의 심양

·

요양지역까지 파급 된다

.

이 시기의 비파형동검문화를 典型琵琶形銅劍文化로 부를 수 있다

.

필자는 이 중 대

·

소능하유역의 十二 臺營子文化와 여기에서 분지된 심양

·

요양지역의 鄭家窪子類型을 古朝鮮과 관련될 것으로 보았다

.

그리고 요 동반도의 崗上類型을

로 비정하였다

.

기원전

1000

년기 후엽에 이르면

,

중국 동북지역의 琵琶形銅劍文化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

가장 큰 변화는 中原文化의 확장과 琵琶形銅劍文化의 급격한 쇠퇴 및 變形琵琶形銅劍文化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

요동지역의 變形琵琶形銅劍文化는 요동반도 ‒ 심양지역의 尹家村類型

,

요동 북부 ‒ 서북한지역의 上堡類型

,

길 림성 중부의 西荒山屯類型으로 구분된다

.

尹家村類型은 중원문화적 성격이 강하게 가미된 점을 감안하면

,

戰 國

~

·

漢代의 遼東郡과 관련될 것이다

.

그리고 재지적 성격이 강한 上堡類型과 西荒山屯類型은 각각 秦開 침 입 이후의 古朝鮮 및 衛滿朝鮮

,

그리고 扶餘와 관련될 것이다

.

[

주제어

]

古朝鮮

,

琵琶形銅劍文化

,

變形琵琶形銅劍文化

,

十二臺營子文化

,

上堡類型

❙목 차❙

.

머리말

.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

.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편년과 전개과정

.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

맺음말

* 전남대학교 부교수 / jojs@jnu.ac.kr

(2)

Ⅰ. 머리말

고조선은 한국사상 최초의 국가이지만 강역이나 중심지가 어디인지조차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논의는 대동강중심설

,

요동중심설

,

이동설로 구분할 수 있는데

,

지금까지의 연구들 이 고조선의 강역과 중심지에 대한 궁금증을 모두 풀어주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

1) 역사학계에서 고조선의 중 심지 문제를 논의할 때 주요 근거로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가 평양 일대이므로 위만조선 때의 王險城도 현 재의 평양 일대라는 것

,

왕검성을 險瀆으로 보고 遼河 이동

~

千山 이서의 어느 지역

,

2) 또는 좀더 구체적으로 蓋平 일대3)로 비정한 것을 들 수 있다

.

따라서 후대의 역사적 사실이나 전승을 토대로 지명을 비정하는 방법 이 주를 이루고 있다

.

하지만 왕검성을 險瀆으로 보는 계기를 마련한 應劭는 후한 말의 사람이어서 위만조선이 멸망한지도

300

년가량 흐른 뒤이며

,

그 이전의 고조선은 이보다 몇백년 전에 해당한다

.

지명 비정에 의한 고조선의 중심지 연구가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백년

~

천여년이 흐른 뒤에 채록된 전승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지

?

험독에 대한 위치 비정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지

?

천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의 고조선 중심지 변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

?

등의 문제에 대하여 타당성을 확보했을 때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

본고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

,

특히 비파형동검문화와 변형비파형동검문화를 통해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대하여 접근해 보고자 한다

.

고고학 자료는 당대의 물질자료이기 때문에 지명비정과 같이 후 대에 왜곡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

특히 청동기는 당시 사회의 기술적 수준은 물론

,

다른 유물보다 정치적 색채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물질자료여서 고고학적 측면에서 고조선을 논의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

4) 본고는 기원전

1000

년기의 청동기문화

,

즉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분포양상과 변천과정을 토대로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을 추정해 볼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고고학 자료를 신빙성이 비교적 높다고 여겨지는 몇몇 문헌자료들과 비교하여 시기별로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의 변천 양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

1) 서영수,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한국사시민강좌󰡕 2, 1988, 20쪽. 2) 위의 글, 45~49쪽.

3) 리지린, 󰡔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3; 盧泰敦, 「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韓國史論󰡕 23, 1990, 49~54쪽. 4)金廷鶴, 「考古學上으로 본 古朝鮮」, 󰡔韓國上古史의 諸問題󰡕,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李淸圭, 「청동기를 통해 본 고조선」,

󰡔國史館論叢󰡕 42, 國史編纂委員會, 1993; 이청규, 「靑銅器를 통해 본 古朝鮮과 주변사회」, 󰡔북방사논총󰡕 6, 2005; 송호정,

󰡔한국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푸른역사, 2003; 조진선,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의 발전과정과 성격」, 󰡔요하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10; 박준형,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2; 吳江原, 「청동기~철기시대 요령·서북한 지역 물질문화의 전개와 고조선」, 󰡔東洋學󰡕 53, 2013.

(3)

<그림 1> 동아시아 청동기문화와 비파형 ‒ 세형동검문화권(바탕사진은 구글어스)

Ⅱ.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

1. 기원전 1000년기의 동아시아 청동기문화

고조선이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7

세기경부터 기원전

2

세기까지이므로 고고학적 측면에서 고조 선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기원전

1000

년기의 자료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동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크게

3

개의 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

북방초원지역의 북방식청동기문화

,

중원지역의 중원식청동기문화와 함께 중 국 동북지역부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는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가 분포하고 있다

.

5) 비파형동검문화 는 중국 동북지역부터 한반도 남부지역까지 분포하고 있으며

,

세형동검문화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면서 동 북쪽으로는 러시아 연해주까지

,

동남쪽으로는 일본열도의 서부지역까지 분포하고 있다

.

따라서 동북아식청동 기문화는 동서 약

1200

,

남북 약

1500

㎞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

물론 내몽고 동남부의 하가점상층문화

,

하북성6)이나 산동성7) 일대

,

내몽고 呼倫貝爾市

,

8) 흑룡강성 雙城市9) 등에서도 비파형동검 이 출토되고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은 비파형

동검문화가 중원지역이나 북방초원지역과 직간접 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 된다

.

이상과 같이 동북아식청동기문화는 중국 동북지 역과 러시아 연해주부터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서부 지역에 걸쳐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

그중 중국 동 북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문화만 확인되며

,

한반도 에서는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가 모두 확 인되고 있다

.

그리고 한반도 동북부

~

연해주와 일본 열도의 서부지역에는 세형동검문화만 확인되고 있 다

.

따라서 고조선의 위치는 동북아식청동기문화권 중에서도 비파형동검문화권

(

변형비파형동검문화권 포함

)

을 중심으로 찾아져야 할 것이다

.

5)필자는 양 문화를 통칭하여 동북아식청동기문화로 명명하였다. 또한 필자는 결입부가 특징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동검만을 세 형동검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세형동검문화 역시 이와 관련된 청동기문화로 규정한다. 그리고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직인화·세신화된 일군의 동검은 변형비파형동검으로 부르도록 한다.

6) 鄭紹宗, 「河北省發現的靑銅短劍」, 󰡔考古󰡕 4, 1975, 226~227쪽.

7)吳江原, 「春秋末 東夷系 萊族 木槨墓 출토 琵琶形銅劍」, 󰡔韓國古代史硏究󰡕 23, 2001, 200~204쪽; 王靑, 「山東發現的幾把東 北系靑銅短劍及相關問題」, 󰡔考古󰡕 8, 2007, 57~61쪽.

8) 王成, 「內蒙古伊敏河煤礦出土曲刃靑銅短劍」, 󰡔考古󰡕 9, 1996, 94쪽.

9) 陳家本·范淑賢, 「黑龍江省雙城市出土曲刃靑銅短劍」, 󰡔北方文物󰡕 1, 1991, 25쪽.

(4)

2.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의 형성과 변천

요서지역은 기원전

2000

년기 전반에 해당하는 하가점하층문화부터 청동기시대로 들어선다

.

이 시기 유적 들은 老哈河유역과 大凌河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

청동기는 귀걸이

,

반지와 같은 소형 장식품 위주이다

.

하지만 鎘

,

,

鼎과 같은 삼족기가 발달하였고 채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고대문화와 얼마 나 관련되는지는 불분명하다

.

醫巫閭山과 遼河 사이에는 高臺山文化가 자리하고 있는데

,

그 시기는 대체로 하가점하층문화 후기와 평행한다

.

청동귀걸이와 청동소도 등이 출토되었다

.

기원전

2000

년기 후엽에 이르면 魏營子文化가 등장한다

.

和尙溝

A

점의 무덤에서 출토된 銅壺와 銅卣 등으로 보아 요서지역에서 확인된 商周 交替期의 청동기매납유적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

이 청동기들에는 匽侯

,

㠱侯

,

苦竹

,

伯矩

,

成周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기도 해서 이 지역이 孤竹國이나 箕侯 또는 燕侯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 을 것으로 보인다

.

10)

기원전

1000

년기에 들어서면 비파형동검문화가 시작된다

.

요서지역에서 비파형동검은 노합하유역의 하가 점상층문화와 대

·

소능하유역의 십이대영자문화에서 출토된다

.

11) 십이대영자문화를 하가점상층문화의 한 유형으로 보기도 하지만12) 하가점상층문화와는 달리 북방초원문화의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하가점상 층문화는 서랍목륜하와 노합하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

연대는 기원전

12~5

세기경으로 추정된다

.

무덤은 토광묘와 석곽묘이며

,

林西縣 大井에서는 동광유적이 조사되었다

.

13)북방식청동기만 출토되는 龍頭山類型과 북방식청동기를 토대로 하면서 중원문화계와 십이대영자문화계 청동기들이 함께 출토되는 南山根類型으로 구분된다

.

용두산유형은 서랍목륜하유역을 중심으로

,

남산근유형은 노합하 상류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 다

.

기원전

1000

년기 후엽에 이르면

,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

남산근유형을 계승하는 청동기문화는 불분명하지만 小黑石溝유적을 보면

,

14) 전국시대 燕文化가 이를 대신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

하 지만 서랍목륜하유역에서는 井溝子유적이 발굴되어15)비중원계 토착문화가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十二臺營子文化는 大凌河와 小凌河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

십이대영자문화는 석곽묘와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는 점에서는 하가점상층문화와 비슷하지만 북방계 청동기 대신 비파형동검과 다뉴조문경이 중심

10) 李亨求, 「大凌河流域의 殷末周初 靑銅器文化와 箕子 및 箕子朝鮮」, 󰡔韓國上古史學報󰡕 5, 1991, 7~54쪽; 宋鎬晸, 「大凌河流 域 殷周 靑銅禮器 사용 집단과 箕子朝鮮」, 󰡔韓國古代史硏究󰡕 38, 2005, 5~36쪽; 김정열, 「요서지역 출토 상·주 청동예기 의 성격에 대하여」, 󰡔요하유역의 초기 청동기문화󰡕, 2009, 71~122쪽; 박대재, 「箕子 관련 商周靑銅器 銘文과 箕子東來說」,

󰡔先史와 古代󰡕 32, 2010, 111~148쪽.

11) 중국 동북지역부터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지역문화 혹은 지역유형에 대한 명칭은 연구자마다 다양하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대표적인 유적 명칭에 문화 혹은 유형을 붙여 명명하기 때문에 명칭들이 서로 비슷하다. 그 래서 동일한 명칭이라도 범위와 성격이 다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는 비파형동검문화에 대한 연구가 아직 충분하지 않 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 사용하는 비파형동검문화의 지역문화 혹은 지역유형의 명칭과 성격 및 범위는 본고에서 제시하는 내용과 지도를 참고해서 이해하길 바란다.

12) 靳楓毅, 「論中國東北地區含曲刃靑銅短劍的文化遺存(上)」, 󰡔考古學報󰡕 4, 1982, 386~426쪽; 靳楓毅, 「論中國東北地區含曲 刃靑銅短劍的文化遺存(下)」, 󰡔考古學報󰡕 1, 1983, 39~54쪽.

13) 王剛, 「林西縣大井古銅鑛遺址」, 󰡔內蒙古文物考古󰡕 1, 1994, 45~50쪽.

14) 內蒙古自治區文物考古硏究所·寧城縣遼中京博物館, 󰡔小黑石溝 ‒ 夏家店上層文化遺址發掘報告󰡕, 科學出版社, 2009.

15) 王立新·塔拉·朱永剛, 󰡔林西井溝子 ‒ 晩期靑銅時代墓地的發掘與綜合硏究󰡕, 科學出版社, 2010.

(5)

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분된다

.

십이대영자문화에서는 비파형동검을 비롯한 청동기들이 다량으 로 출토되었지만 대부분 정식 발굴조사를 거친 것이 아니어서 무덤의 구조나 유물 공반관계를 제대로 파악하 기 어렵다

.

하지만 기원전

1000

년기 전

·

중엽에 걸쳐 십이대영자문화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

다만 요서지역에서도 좀더 서남쪽에 위치한 능원

,

객좌

,

건창 등 대능하 상류지역에서는 중원계 유물들이 공반되 는 사례들이 있다

.

이는 중원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과 더불어 魏營子文化 이래로 이어지는 이 지역 의 문화적 전통과 관련될 것이다

.

기원전

1000

년기 후엽에 이르면 대능하 중류지역에서 비파형동검문화는 급격하게 쇠퇴하며

,

이를 전국시 대 燕文化가 대신하고 있다

.

하지만 십이대영자문화의 변두리에 해당하는 요령성 建昌縣과 喀左縣

,

내몽고 敖漢旗 일대에는 여전히 비파형동검문화의 요소들이 남아있다

.

이 시기에 이르면 비파형동검은 돌기부와 융 기부가 미약해지거나 사라져서 검신이 세신화

·

직인화 된 변형비파형동검으로 변화된다

.

동대장자유형은 대능하 상류의 객좌

,

능원

,

건창 일대에서 확인된다

.

이 지역은 기원전

1000

년기 전

·

중 엽부터 십이대영자문화가 번성하였던 곳이지만 중원계 유물들이 자주 공반되어 십이대영자문화 속에서도 나 름대로의 지역색을 갖고 있다

.

이러한 양상은 기원전

1000

년기 후엽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

동대장자유 적에서는 토광목관

(

)

묘가 발굴되었는데

,

무덤들은 대부분

2

(

生土二層臺

)

토광을 파고

1

단부에 강자갈을

0.6~0.8m

두께로 깔았다

.

출토유물로는 청동기가 가장 많으며

,

철기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

청동기로는 돌기부와 융기부가 미약해진 비파형동검과 함께 중원식동검

,

중원식동과

,

중원계 청동예기

,

當壚

·

재갈

·

절 약 등의 車馬具가 확인된다

.

16) 거마구는 전국시대 거마구들과 동일한 것들이다

.

17) 또한 한국식동과의 발생 단서가 되는 遼寧式銅戈도18) 출토되었다

.

水泉유형은 대능하의 지류인 老虎山河 상류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

무덤은 주로 장방형 토광묘이며 소

,

돼 지

,

,

말을 순장하였다

.

부장품은 토기가 중심을 이루며 비파형동검

,

중원식동과 등의 청동기도 확인된다

.

철기로는 철도

,

철곽

,

철대구 등이 있다

.

19)

3. 요동지역 청동기문화의 형성과 변천

요동지역의 기원전

2000

년기 청동기문화로는 太子河 상류지역의 馬城子文化와 요동반도의 雙砣子文化를 들 수 있다

.

마성자문화는 석부

,

석착 등의 석기들이 발달하였지만 張家堡

A

동의 무덤에서 銅環

,

銅飾

,

銅耳 環이 출토되었다

.

쌍타자하층문화는 기원전

2000

년을 전후한 시기이며

,

쌍타자상층문화는 기원전

2000

년기 후엽에 해당한다

.

쌍타자하층문화에 속하는 大嘴子유적 하층에서 銅戈로 추정되는 청동기편이 출토되었으며

,

상층에서는 동촉이 확인되었다

.

20) 따라서 요동반도에서는 기원전

2000

년기 초부터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 16) 方殿春, 「遼寧建昌東大杖子戰國墓地的勘探與試掘」, 󰡔2000年中國考古重要發現󰡕, 文物出版社, 2001, 57~61쪽; 華玉冰·徐韶

鋼·孫建軍·萬欣·高振海, 「遼寧建昌東大杖子墓地M40」, 󰡔211年中國重要考古發現󰡕, 文物出版社, 2012, 72~78쪽. 17) 孫璐, 「中國 東北地域 先秦時代 車馬具의 登場과 變遷」, 󰡔韓國考古學報󰡕 81, 2011, 5~37쪽.

18) 趙鎭先, 「韓國式銅戈의 登場背景과 辛庄頭 30號墓」, 󰡔湖南考古學報󰡕 32, 2009, 11~14쪽.

19) 郭治中, 「水泉墓地及相關問題之探索」, 󰡔中國考古學跨世紀的回顧與前瞻󰡕, 科學出版社, 2000, 297~309쪽.

(6)

하였으며

,

기원전

2000

년기 후엽에는 좀더 보편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

이 지역의 초기 청동기문화는 산동반 도와 관계가 깊은데

,

신석기시대부터 이어지는 문화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

기원전

1000

년기에 들어서면 요동지역에도 비파형동검문화가 등장하는데

,

비파형동검과 동부가 주로 출 토된다

.

요동반도의 비파형동검문화는 積石墓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

요동반도 남단부터 압록강 하구 쪽으로 이어지며 분포하고 있다

.

적석묘에는 여러 기의 무덤들이 함께 조영되어 있으며 대부분 多葬을 한 火 葬墓이다

.

그래서

23

기의 무덤이 조사된 崗上 적석묘는 한 무덤당 피장자가

2~18

인에 이르며

,

21)

10

기의 무 덤이 발굴된 樓上 적석묘도 한 무덤당 피장자가

2~15

인이다

.

22) 청동기로는 비파형동검

·

동모

·

동촉 등의 무기류

,

동부

·

동착 등의 공구류가 중심을 이루며

,

장식품과 거마구가 출토되기도 한다

.

필자는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崗上類型으로 명명하였다

.

요동 북부부터 길림성 중남부지역은 千山과 吉林哈達嶺이 이어지는 산악지역으로 비파형동검문화는 석관 묘

,

지석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

本溪 梁家村처럼 비파형동검과 다뉴조문경이 공반되기도 하지만 주 로 비파형동검

,

비파형동모

,

동촉 등의 무기류와 동부

,

동착 등의 공구류만 출토되고 있다

.

비파형동검은 검 신이 짧은 것이 특징인데

,

이는 주조 당시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사용과정에서 봉부 쪽이 닳아져서 짧아졌기 때문이다

.

필자는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二道河子類型으로 명명하였다

.

23)

기원전

1000

년기 중엽에 이르면

,

검신 상부와 하부의 비율이 비슷하면서 좀더 세신화된 비파형동검들이 遼陽

,

瀋陽

,

撫順

,

東遼와 같이 요동평야가 시작되는 지역들에서 출토되고 있다

.

이러한 형식의 비파형동검은 요서지역의 십이대영자문화에서 확인되는 것이며

,

黑龍江省 雙城市 吳家村이나 內蒙古 呼倫貝爾市에서도 출 토되었다

.

심양 정가와자

6512

호는 토광목관묘로 두향을 서쪽으로 향한 인골

1

구가 확인되었고

42

797

점 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

유물은 주로 청동기로 비파형동검

·

동촉 등의 무기류

,

동부

·

동착

·

동도

·

동추 등의 공구류

,

경형식

·

동포 등의 장신구와 다뉴조문경이 있다

.

재갈

·

절약

·

나팔형동기와 같은 거마구도 출토되 었다

.

24) 따라서 이러한 양상은 십이대영자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필자는 이를 鄭家窪子類型 으로 명명하였다

.

기원전

1000

년기 후엽의 요동지역 청동기문화는

3

개의 유형으로 세분할 수 있다

.

尹家村類型은 요동반도 남단부터 심양지역에서 주로 확인된다

.

검신이 세신화되고 돌기부가 미약한 윤가 촌식 변형비파형동검이 특징적이며

,

중원계 유물들이 빈번하게 공반되고 있다

.

윤가촌식 변형비파형동검은 하북성의 涿縣

,

高碑店

,

望都에서도 출토되었고 산동성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들도 이 형식에 가깝다

.

윤가 촌

12

호묘는 단인 신전장의 토광석곽묘로 상부에 부석을 깔고 있어 적석목관묘의 형태를 띠고 있다

.

25) 따라

20) 郭大順·張星德, 󰡔東北文化與幽燕文明󰡕, 江蘇敎育出版社, 2005, 342~361쪽.

21)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雙砣子與崗上 ‒ 遼東史前文化的發現與硏究󰡕, 科學出版社, 1996, 72~75쪽. 22) 위의 책, 101~103쪽.

23) 雙房類型이라고도 하지만 쌍방유적이 요동반도 남단 가까이에 위치할 뿐 아니라 늦은 시기의 유적이어서 대표성을 갖는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遼陽 二道河子 석관묘가 이 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특색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4) 瀋陽市故宮博物館·瀋陽市文物管理辦公室, 「瀋陽鄭家窪子的兩座靑銅時代墓葬」, 󰡔考古學報󰡕 1, 1975, 141~156쪽. 25)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앞의 책, 1996, 119~140쪽.

(7)

서 이전의 적석묘와는 전혀 다른 구조이며

,

오히려 동대장자유형에서 확인되는 봉석묘와 유사하다

.

무기류로 는 윤가촌식 변형비파형동검이 대표적이며 중원식 동검

·

동과

·

동모가 자주 출토되지만 다뉴경이나 거마구 는 확인되지 않는다

.

上堡類型은 요령성 본계

,

단동

,

무순

,

철령 지역과 길림성 일부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

상보유형의 유물 공반관계는 本溪 上堡 유적과 昌圖 翟家村 유적이 잘 보여준다

.

상보

M1

호에서는 대청산식 변형비파형동검 과 함께 철착

,

승문호

,

점토대토기 저부편 등이 출토되었다

.

26) 적가촌 유적에서는 대청산식 변형비파형동검 과 함께 중원식동검

,

유공삼익동촉

,

철곽 등이 출토되었다

.

27)

,

상보유형에서는 대청산식 변형비파형동검

,

다뉴조문경

,

점토대토기와 같은 재지계와 중원식동검

,

철곽

,

승문호와 같은 중원계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고 있다

.

무덤은 석관묘 위주이지만 토광묘와 적석묘도 조사된다

.

청동무기류로는 동검

,

동모

,

동과

,

동촉 등이 있다

.

동검은 대청산식 변형비파형동검과 중원식동검으로 구분된다

.

변형비파형동검은 청동제

T

자형 검병이 나 검파두식

,

또는 검초금구 등을 공반하기도 한다

.

觸角式銅劍이나 觸角式銅柄鐵劍도 출토된다

.

동모는 葉 脈文이 있는 柳葉形銅矛가 특징적이며

,

요서지역의 요령식동과와 한국식동과의 중간 형태를 띠는 요령식동과 가 丹東市 望江村과 寬甸縣 雙山子에서 출토되었다

.

28) 공구류로는 선형동부가 있으며

,

의기류로는 다뉴조문 경이 있다

.

철기로는 철곽

,

철부

,

철서

,

철겸

,

철착

,

철도

,

철추와 같은 공구류가 주로 출토된다

.

명도전도 출 토되고 있다

.

西荒山屯類型은 길림성 중부의 제

2

송화강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

이 지역의 청동기는 대청산식 변형비파형동검과 촉각식동검이 특징적이다

.

대청산식 변형비파형동검은 대부분 검신 하부나 검신 기부 쪽 에 구멍이

2

개 혹은

4

개 뚫려 있다

.

청동무기류로는 대청산식 변형비파형동검

,

촉각식동검

,

동촉 등이 있으 며

,

공구류로는 병부에 엽맥문이 주조된 동도가 있다

.

의기류로는 다뉴경이 있다

.

철부

,

철겸

,

철도를 비롯한 철기들이 출토되며

,

재지계 토기들과 함께 중원계 승문토기도 출토된다

.

마지막으로 서북한지역에서도 비파형동검문화 관련 유물들이 적지 않게 출토되었는데

,

주로 석관묘와 지 석묘에서 확인되고 있다

.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비파형동검은 주로 곡인이 미약해진 변형비파형동검이다

.

곡인이 뚜렷한 전형비파형동검이 연안 금곡동유적에서 출토되었지만29) 해서정맥 이남

,

즉 중부지역에 가까 운 지역이다

.

따라서 대동강유역에서는 아직까지 전형비파형동검이 출토되지 않았다

.

그래서 전체적인 양상 을 보면 서북한지역의 기원전

3~2

세기 청동기문화는 상보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26) 魏海波·梁志龍, 「遼寧本溪縣上堡靑銅短劍墓」, 󰡔文物󰡕 6, 1998, 18~22쪽. 27) 李矛利, 「昌圖發現靑銅短劍墓」, 󰡔遼海文物學刊󰡕 1, 1993, 16~18쪽.

28) 이후석, 「세형동검 단계 중국 동북지역의 동과와 동모 ‒ 遼寧式銅戈와 柳葉形銅矛·細身形銅鉾를 중심으로 ‒」, 󰡔韓國考古學 報󰡕 87, 2013, 18~25쪽.

29) 황기덕, 「최근에 새로 알려진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 관계의 유적유물」, 󰡔고고학자료집 4󰡕, 사회과학출판사, 1974, 157~

158쪽.

(8)

Ⅲ.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편년과 전개과정

1.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의 형식분류와 편년

(1) 비파형동검의 형식분류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 자료들은 채집되거나 간단하게 조사된 것이 많으며

,

그나마 보고서의 내용이 간 략해서 정보를 충분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

따라서 유구의 구조와 유물의 공반관계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는 비파형동검을 중심으로 논의하면서 다뉴경과 거마구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에 대한 형식분류는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

林澐의 연구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비 파형동검의 전체적인 형식변천의 맥락을

,

30) 靳楓毅의 연구는 종합적이고 세밀한 형식변천안을 제시하였 다

.

31) 지금까지 연구들을 종합해보면

,

첫째

,

비파형동검은 곡인의 형태가 뚜렷한 것에서 세신화

·

직인화된 다

.

둘째

,

요동지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은 검신이 짧은 것이 많다는 것이다

.

필자 역시 이러한 점들은 고 려하면서 십이대영자문화를 중심으로 비파형동검을 형식분류한 바 있다

.

32) 본고에서는 이를 토대로 중국 동 북지역의 비파형동검을 형식분류하였다

.

중국 동북지역의 비파형동검은 공개된 자료의 특성상 주형속성과 연마속성을 모두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 문에 본고에서는 주형속성을 중심으로 형식분류하였다

.

비파형동검의 주형속성으로는 봉부의 장단

,

검신 기 부의 형태

,

돌기부와 융기부의 형성 정도 등을 들 수 있다

.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속성은 봉부의 장단으로

3

㎝ 이하의 단봉형

, 4

㎝ 내외의 중봉형

, 5

㎝ 이상의 장봉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

검신 기부 형태는 검엽이 등대로 마무리되는 형태를 의미하는데

,

호상으로 마무리되는 弧形

,

호상으로 내려오다 사선으로 꺾여 마무리 되는 斜折形

,

호상으로 내려오다 거의 직각에 가깝게 마무리되는 直折形으로 구분할 수 있다

.

돌기부는 비파 형동검의 특징인 곡인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

따라서 비파형동검은 돌기부가 뚜렷해서 곡인이 뚜렷한 것

,

돌기부가 미약해져 곡인이 미약해진 것

,

돌기부가 사실상 사라져 검신 상부가 직인화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 다

.

융기부는 돌기부에 대응되는 등대에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뚜렷한 것

,

미약해진 것

,

사라진 것으로 구분 할 수 있다

.

그러나 본고에서는 관련 정보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융기부의 유무만을 기준으로 삼았다

.

이상과 같은 제속성을 토대로 필자는 비파형동검을

6

개 형식으로 구분하였다

(

1,

그림

2).

30) 林澐, 「中國東北系銅劍初論」, 󰡔考古學報󰡕 2, 1980, 139~161.

31) 靳楓毅, 앞의 글, 1982, 386~426쪽; 靳楓毅, 앞의 글, 1983, 39~54쪽.

32) 조진선, 「요서지역 청동기문화의 발전과정과 성격」, 󰡔요하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10, 169~172쪽.

(9)

속성

봉부 길이 단봉형 단봉

or

중봉형

중봉

or

장봉형 장봉형

기부 형태 호형 사절형 사절

or

직절형 직절형

돌기부 유무 뚜렷 미약 없음

융기부 유무 있음 없음

형식

형식

A

B

C

D

E

F

대표유적 十二臺營子

2

十二臺營子

1

鄭家窪子

6512

호 南洞溝 果木樹營子

Fa

식:大靑山式

Fb

식:尹家村式

편년

BC9~8 BC8~7 BC6~5 BC5~4 BC4~3 BC3~1

분기

전기 중기 후기

(

전형

)

비파형동검문화 변형비파형동검문화

<표 1>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의 형식과 편년 및 분기 설정

A

식 비파형동검은 봉부는 단봉형이며

,

기부는 호형이고

,

돌기부와 융기부가 뚜렷해서 비파형동검의 모든 특징을 갖추고 있다

.

십이대영자

2

호묘 출토 비파형동검을 표지유물로 한다

.

敖漢旗 山灣子 거푸집과 같은 형식에서 생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

B

식 비파형동검은

A

식과 비슷하지만 검신 기부가 사절하는 것이 특징이다

.

십이대영자

1

호묘와 영성 남 산근

101

호묘 출토품이 대표적이다

.

朝陽 黃花溝 거푸집과 같은 형식에서 생산된 것으로 판단된다

.

C

식 비파형동검은 봉부는 중봉형이 많으며

,

기부형태는 사절형과 직절형이 모두 확인된다

.

곡인의 형태는 여전하지만 돌기부가 밋밋해지고 결입부가 넓어지면서 전체적으로 검신이 좁아들었다

.

등대의 융기부는 뚜 렷하지만

A

식과

B

식 비파형동검보다는 미약해졌다

.

정가와자

6512

호묘 출토품을 표지유물로 한다

.

D

식 비파형동검은

C

식과 유사하지만 좀더 세신화되었다

.

가장 큰 차이는 봉부가 중봉형이나 장봉형으로 길어진 것이다

.

돌기부와 융기부는 미약하지만 여전히 곡인의 형태를 띠고 있다

.

喀左 南洞溝나 北票 何家溝 출토품이 대표적이다

.

遼陽 塔灣村 거푸집과 같은 형식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

E

식 비파형동검은 외형상

D

식과 유사하지만 돌기부가 거의 사라져서 곡인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

등대의 융기부도 사라졌다

.

봉부는 장봉형이며

,

기부도 대부분 직절형이다

.

따라서

E

식에 이르면 비파형동검 의 특징적인 속성들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이 형식부터 변형비파형동검으로 분류할 수 있다

.

喀左 果木 樹營子나 建昌 東大杖子 출토품이 대표적이다

.

F

식 비파형동검은 大靑山式이나 尹家村式으로 불리는 변형비파형동검이다

.

곡인의 형태를 벗어나 직인화 되었으며

,

등대에서 융기부도 찾아볼 수 없다

.

대청산식을

Fa

,

윤가촌식을

Fb

식으로 명명하였다

.

(10)

<그림 2>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의 형식분류

(11)

다음으로 이도하자유형에서 출토되는 검신이 짧은 비파형동검에 대하여 살펴보자

.

이도하자식 비파형동검 은 봉부가

1

㎝ 내외인 단봉형이며

,

기부는 호형이다

.

그래서

A

식 비파형동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이러한 현상은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요동 북부와 한반도의 비파형동검은 요서지역과 구분되는 자 체적인 변천과정을 걷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

이도하자식 비파형동검은

A

식 비파형동검을 조형으로 등장 한 것으로 보인다

.

본계 양가촌유적은 요동지역에 위치하지만 비파형동검과 검파두식 모두 십이대영자

2

호 묘 출토품과 유사하며

,

다뉴조문경은 십이대영자

3

호묘 출토품과 동일한 문양구성을 가지고 있다

.

필자는 이 도하자식 비파형동검의 검신이 짧아지게 된 것은 동검의 연마와 사용방법 때문으로 본다

.

즉 이도하자식 비 파형동검은 봉부를 중심으로 연마되기 때문에 검신 상부가 닳아져 짧아지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요서지역의 십이대영자문화에서도 검신 상부가 짧은 비파형동검들이 확인된다

(

그림

3

참고

).

이러한 동검들 역시 봉부는

1

㎝ 내외로 아주 짧은 단경식이다

.

비파형동검은 속성상 봉부 쪽이 일정 이상으로 연마되면 봉부가

1

㎝ 내외 로 아주 짧아지게 되는데

,

33) 요동과 요서를 막론하고 검신 상부가 짧은 비파형동검들은 봉부가

1

㎝ 내외에 불과하다

.

<그림 3> 십이대영자문화와 이도하자유형의 비파형동검 비교

33) 비파형동검이나 세형동검 모두 등대는 봉부로 가면서 점차 얇아지고 검엽은 반대로 두꺼워진다. 봉부는 반비례하는 등대와 검엽이 연마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趙鎭先 2001). 최근 세형동검에 대한 실험고고학에서도 봉부가 검신의 일 정 부분 이하로 내려오면 아주 짧게 형성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吉田廣 외 2013).

(12)

普蘭店 雙房유적이나 鐵岭 大山嘴子유적의 비파형동검은 검신 하부가 좁아들어 상당히 세신화되었으며 西 豊 誠信村유적 출토품은 더욱 세신화되었다

.

따라서 이도하자유형에서는

A

식 비파형동검이 보급된 이후 자 체적인 변천과정을 거치지만 요서지역에 비해 청동기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상한연대 는 본계 양가촌유적으로 보아 요서지역 십이대영자문화의

A

식 비파형동검과 크게 차이나지 않을 것으로 추 정된다

.

또한 하한연대는 이도하자유형에서

B

식 비파형동검이 전혀 확인되지 않은 대신 雙房이나 大山嘴子 비파형동검과 같이 검신폭이 좁아든 동검들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B

식이나

C

식 비파형동검 단계까지 지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

주지하다시피 비파형동검의 가장 큰 특징은 돌기부가 형성되어 곡인이 뚜렷하고 등대에 융기부가 형성되 어 있는 점이다

.

필자는 돌기부와 융기부가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는

A~D

식을 전형비파형동검으로

,

돌기부와 융기부가 미약해지거나 사라진

E

식과

F

식을 변형비파형동검으로 분류하였다

.

34)

이러한 비파형동검 형식분류는 공반유물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

비파형동검과 자주 공반되는 유물로는 다뉴조문경과 거마구를 들 수 있다

.

전형비파형동검과 공반되는 다뉴조문경은 경판 이 두툼하고 배면에는 뇌문이 베풀어져 있으며 주연부는 평연이나 방연이다

.

배면의 뇌문은

3

형식을 구분할 수 있는데

, a

식 뇌문은 직각변이 길고 예각변이 짧은 것이며

, b

식은 반대로 직각변이 짧고 예각변이 긴 것이 고

, c

식은 예각변이 연속된 변형 뇌문이다

(

그림

4).

35)

<그림 4> 뇌문의 형식분류

A

식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조양 십이대영자와 본계 양가촌유적에서

a

식 뇌문의 다뉴조문경이 출토되고 있 어 서로 밀접한 관계임을 보여준다

. B

식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大拉罕溝

851

호묘와 炮手營子

881

호묘

, C

식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鄭家窪子

6512

호묘에서는 모두

b

식 뇌문의 다뉴조문경이 출토되었다

.

다만

,

大拉罕溝

851

호묘와 炮手營子

881

호묘의 다뉴조문경은 뇌문이

3

조 이상이지만 정가와자

6512

호묘의 다뉴조문경은

2

조이다

.

평양 신성동에서는

E

식 또는

F

식 변형비파형동검과

b

식 뇌문의 다뉴조문경이 공반되었는데 뇌문은

34) 필자의 C식 비파형동검을 변형비파형동검으로, E식과 F식을 초기세형동검으로 분류한 연구자도 있다(박준형 2012). 그러나 모든 E식과 F식이 한반도 세형동검의 조형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초기세형동검이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C식과 D식은 비파형동검의 특징적인 속성들이 뚜렷하기 때문에 전형비파형동검으로 분류해야 한다.

35) 趙鎭先, 「多鈕粗文鏡의 形式變遷과 地域的 發展過程」, 󰡔韓國上古史學報󰡕 62, 2008, 36~39쪽.

(13)

1

조뿐이다

.

또한 주연부가 삼각연이고 경판이 얇아져서 이전의 다뉴조문경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

주연부 가 삼각연이고 경판이 얇으며 배면에 태양문이나 엽맥문이 베풀어진 다뉴조문경은

Fa

(

대청산식

)

변형비파 형동검들과 자주 공반되고 있다

.

36) 따라서 중국 동북지역에서 다뉴조문경은 순차적으로 형식변천을 하고 있 으며

,

그것이 비파형동검의 형식변천과 궤를 같이한다

.

이러한 변천양상은 거마구에서도 확인된다

.

거마구는 하가점상층문화 남산근 유형의 여러 유적들에서 많 이 출토되며

,

십이대영자문화에서도 적지 않게 출토되었다

.

중국 동북지역 거마구의 변천양상에 대해서는 이 미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

37)

A

식과

B

식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十二臺營子

1

호묘와

2

호묘

,

袁臺子

122

호 묘

,

大拉罕溝

851

호묘

,

烏金塘 유적에서는 청동제

,

또는 골제 鑣만 출토되고 銜이 확인되지 않은데

,

함은 가 죽과 같은 유기물을 사용한 것으로 보았다

.

청동제 함은

C

식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정가와자

6512

호묘에서 확인되기 시작하는데

,

組合式 直杆銜과 組合式 二節銜이 공반된다

.

또한 뱀모양 鑣는 앞선 시기의 십이대영 자문화 유적들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해서 정가와자

6512

호묘가 요서지역 십이대영자문화에서 기원한 것을 알 수 있다

. D

식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三官甸유적에서도 조합식 직간함과 조합식 이절함이 출토되어 鄭家窪 子

6512

호묘를 계승하며 동물형 절약과 표도 그러한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

그러나

D

식 비파형동검이 출토 된 南洞溝유적에서는 이절함만 출토되었다

.

중심연대가

E

식 변형비파형동검의 시기로 추정되는 東大杖子유적 에서도 이절함만 출토되고 있어 비파형동검의 형식과 거마구의 변천양상이 서로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따라서 거마구를 보면

A

식과

B

식 비파형동검 단계에서는 재지적인 특징이 우선시되며

, C

식 비파형동검 단계에서는 재지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하면서 중원문화적 요소가 도입되기 시작한다

. D

식 비파형동검 단계 에는 앞 단계의 양상이 이어지지만 중원적인 색채가 좀더 강해졌으며

, E

식 변형비파형동검 단계에 이르면 중 원문화적 색채가 더욱 강해진 것을 알 수 있다

.

(2) 비파형동검의 편년과 분기 설정

전형비파형동검 가운데

B

식 비파형동검의 연대는 비교적 확실하다

.

그 이유는 하가점상층문화의 유적들에 서

B

식 비파형동검이 중원계 청동예기와 공반되고 있기 때문인데

,

이 유적들은 대체로 기원전

8~7

세기로 편 년되고 있다

.

38) 따라서

B

식 비파형동검의 연대는 기원전

8~7

세기로 볼 수 있으며

,

이보다 이른

A

식 비파형 동검은 기원전

9~8

세기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 C

식 비파형동검은 공반된 거마구로 보아 기원전

6~5

세기 로 편년할 수 있으며

,

39)이보다 후행하는

D

식 비파형동검은 기원전

5~4

세기로 볼 수 있는데

,

공반된 중원식 동과의 연대와도 부합된다

.

40) 그리고

E

식 변형비파형동검의 연대는 공반된 중원계 거마구와 중원식동과로 보아 기원전

4~3

세기로 편년되며

, F

식 변형비파형동검은 기원전

3~2

세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일부는 기원전

36) 앞의 글, 2008, 27~54쪽. 37) 孫璐, 앞의 글, 2011, 5~38쪽.

38) 김정열, 「하가점상층문화에 보이는 중원식 청동예기의 연대와 유입 경위」, 󰡔韓國上古史學報󰡕 72, 2011, 61~85쪽. 39) 孫璐, 앞의 글, 2011, 5~38쪽.

40) 趙鎭先·成璟瑭, 「關于中國東北地區和朝鮮半島銅戈的考察 ‒ 以中原式銅戈爲中心 ‒」, 󰡔內蒙古文物考古󰡕 37, 內蒙古自治區文 化廳·內蒙古考古博物館學會, 2007, 53~71쪽.

(14)

1

세기까지도 내려올 것이다

.

41)이를 토대로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발전과정은 크게

3

단계로 구분 할 수 있다

.

전기는

A

식과

B

식 비파형동검이 유행하는 시기이다

.

비파형동검과 다뉴조문경은 형식이 달라지지만 거마 구가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한 시기로 묶을 수 있다

.

연대는 기원전

9~7

세기경으로 편년된다

.

중기는

C

식과

D

식 비파형동검이 유행하는 시기이다

.

비파형동검은 검신이 좁아들면서 세신화되기 시작하 며 봉부도 길어진다

.

뇌문의 다뉴조문경이 여전히 유행하고 있지만

b

식 뇌문만 남아있으며 그나마도

2

조 이 하로 간략화되었다

.

중기에는 재지계 청동기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중원계 문물들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

연대는 기원전

6~4

세기로 편년된다

.

후기는 변형비파형동검이 등장해서 유행하는 시기이다

. E

식 변형비파형동검은 중원계 유물과 빈번하게 공 반되는데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 F

식 변형비파형동검은 다뉴조문경이나 점토대토기와 같은 재지적인 유물들이 많이 공반되는

Fa

(

대청산식

)

과 중원계 유물이 빈번하게 공반되는

Fb

(

윤가촌식

)

으로 구분할 수 있다

. F

식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세부적인 형식분류도 가능하다

.

42)후기 의 연대는 기원전

3~2

세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E

식 일부는 기원전

4

세기 후반까지 올라갈 수도 있으며

, F

식 일부는 기원전

1

세기까지도 내려올 것으로 생각된다

.

이상을 정리하면

,

기원전

9~7

세기의 전기에는 재지계 문화가 중심으로 이루고 있으며

,

기원전

6~4

세기의 중기에는 여전히 재지계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중원계 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한다

.

기원전

3~2

세기의 후기에는 재지계 문화가 급격하게 축소되면서 지역에 따라 중원계 문화가 대세를 이루기도 한다

.

2.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전개과정

(1) 전기와 중기의 비파형동검문화(전형비파형동검문화)

중국 동북지역에서 비파형동검문화의 전기와 중기 유적들은 요서지역부터 요동의 천산 이서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

그림

5).

현재까지 확인된 유적들을 보면

,

요서지역

,

요동반도

,

요동 북부

~

길림성 중남부지역 의

3

개 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요서지역은 노합하유역에 분포하는 하가점상층문화 남산근유형을 제외하 면 대부분 십이대영자문화에 해당한다

.

요동반도에는 다장의 화장 적석묘를 중심으로 하는 강상유형이 분포 하며

,

요동 북부

~

길림성 중남부지역에는 석관묘와 적석묘를 중심으로 하는 이도하자유형이 분포하고 있다

.

이와 같이 비파형동검문화는 전기부터 요서와 요동지역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

다만

A

식 비파형동검이 라도 요서의 십이대영자문화 비파형동검은

30

㎝ 내외인 것이 많지만 요동의 이도하자유형 비파형동검은

25

㎝ 내외로 짧다

.

이 때문에 비파형동검의 기원을 요동지역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경우 십이대영자문화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종류의 청동기들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

또한 비파형동검의 검신이 짧은 것은 주조 당

41) 이후석, 「中國 東北地域 細形銅劍文化 硏究 ‒ 遼寧式細形銅劍을 中心으로 ‒」, 󰡔崇實史學󰡕 21, 2008, 5~135쪽. 42) 위의 글, 5~135쪽.

(15)

시부터 짧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용과 연마가 반복되면서 봉부 쪽이 닳아졌기 때문이다

.

따라서 이도하자유형 에서 청동기는 기종이 단순하고 비파형동검도 상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요서지 역에 비해 청동기의 보급이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요동반도의 강상유형에서는

A

식에 이어

B

식 비 파형동검들이 출토되며

,

실제 사용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거마구도 확인된다

.

이러한 차이는 강상유형 이 묘제와 출토유물에서 모두 이도하자유형과 구분되는 것을 나타낸다

.

따라서 비파형동검문화는 기원전

1000

년기 초에 대능하유역을 중심으로 등장

·

발전하였으며

,

이른 시기 부터 요동지역으로 파급되어 이도하자유형과 강상유형의 형성계기가 되었다

.

강상유형은 묘제와 장제에서는 십이대영자문화와 뚜렷하게 구분되는지만

A

식에 이어

B

식 비파형동검이 등장하고 있어서 초기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하지만 이도하자유형에서는

B

식 비파형동검 대신에 자체적으로 변천 하는 쌍방이나 대산취자 출토품과 같은 동검들이 확인되고 있어서 발전과정이 서로 구분된다

.

<그림 5>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전기·중기 문화권(바탕사진은 구글어스)

(16)

<그림 6>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후기 문화권(바탕사진은 구글어스)

비파형동검문화는 중기에 들어서도 기본적으로 전기의 양상을 유지하고 있다

.

,

·

소능하유역에서는 십이대영자문화가 지속되며

,

요동반도의 강상유형에서도 臥龍泉유적에서 보는 것처럼

C

식 비파형동검이 이 어지고 있다

.

하지만 이도하자유형이 분포하는 요동 북부지역에서는 큰 변화가 확인된다

.

가장 큰 변화는 심 양 정가와자

6512

호묘와 같은 토광

(

목곽

)

묘가 확인되고 있는 점인데

,

이를 정가와자유형으로 부르기로 한다

.

정가와자유형은 묘제뿐 아니라 비파형동검과 다뉴조문경

,

다양한 종류의 거마구 등이 모두 요서의 십이대영 자문화를 계승하고 있어서 일찍이 지적된 것처럼43) 십이대영자문화의 연장선상으로 이해된다

.

더구나 이러 한 비파형동검이 이도하자유형의 범위를 벗어난 흑룡강성 남부의 雙城市나 내몽고 呼倫貝爾市에서도 출토되 는 점을 생각하면 그 성격이 더욱 분명해진다

.

,

십이대영자문화는 중기에 들어서 요동지역으로 보다 적극 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물론

,

북방초원지역과도 교류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

(2) 후기의 비파형동검문화(변형비파형동검문화)

비파형동검문화는 후기에 이르러 큰 변화를 보이는데

,

비파형동검의 특징들이 모두 사라진 변형비파형동 검을 표지로 하는 점에서 변형비파형동검문화로 부를 수 있다

.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요서지역에서 십이 대영자문화가 급격하게 쇠퇴하는 것이다

.

물론 대능하 상류지역에서 東大杖子類型이

,

노호산하 상류지역에서

43) 靳楓毅, 앞의 글, 1982, 386~426쪽; 靳楓毅, 앞의 글, 1983, 39~54쪽.

(17)

水泉類型이 확인되고 있지만 이미 중원문화가 깊숙하게 침투해 있으며

,

그나마

E

식 변형비파형동검을 끝으 로 더 이상 비파형동검문화가 발전하고 못하고 있다

.

하지만 요동지역에서는

E

식에 이어

F

식 변형비파형동검이 확인되고 있다

. F

식 변형비파형동검은 요동 북 부

~

길림성 중부지역에 걸쳐 분포하는

Fa

(

대청산식

)

과 요동반도

~

심양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Fb

(

윤가 촌식

)

으로 구분된다

. Fa

식 변형비파형동검은 다뉴조문경과 점토대토기 등이 공반되는 등 재지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Fb

식은 재지계 유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대신 중원식 동검

·

동과와 중원계 도기가 자주 공반된 다

.

44)

Fb

식이 출토되는 지역은 비파형동검문화 전

·

중기에 강상유형과 정가와자유형이 집중 분포하는 지역 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또한 요서지역은 물론 하북성과 산동성에서

E

식이나

Fb

식 변형비파형동 검이 출토되고 있는 점도

Fb

식 변형비파형동검문화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

Fa

식 변형비파형동검은 요동 북부

~

길림성 중부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

따라서 이전 시기의 이도하자 유형 분포권을 포괄하면서 동남쪽으로는 천산을 넘어 압록강유역은 물론 서북한지역까지

,

북쪽으로는 흑룡강 성 남부까지 파급되고 있어 주변지역으로 훨씬 넓게 확대되었다

. Fa

식 변형비파형동검권은 요동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上堡類型과 길림성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西荒山屯類型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서황산둔유 형에서 출토되는

Fa

식 변형비파형동검은 검신 기부 쪽에 구멍이

2~4

개가 뚫려 있어서 그렇지 않은 상보유형 의

Fa

식 변형비파형동검들과 차이를 보인다

.

상보유형은 다뉴조문경이나 점토대토기와 같은 재지적인 문화 가 유지되면서도 토광묘와 같은 새로운 묘제가 유입되고 중원계 유물들도 출토된다

.

그러나 서황산둔유형은 지석묘나 석관묘 계통의 묘제에서 다장의 화장 전통이 유지되는 등 재지적인 문화전통이 훨씬 강하다

.

늦은 시기에 이르면 중원계 유물들이 유입되며

,

촉각식동검이 서황산둔유형의 특징적인 유물로 등장하고 있다

.

이상과 같이

,

기원전

1000

년기 후엽의 변형비파형동검문화는 크게

3

개의 유형으로 구분된다

.

첫째

,

윤가촌 유형은 요동반도

~

심양 일대를 중심으로 하면서 요서지역으로 이어진다

. E

식과

Fb

(

윤가촌식

)

변형비파형동검 이 특징적이다

.

둘째

,

상보유형은

Fa

(

대청산식

)

변형비파형동검

,

다뉴조문경

,

점토대토기와 같은 재지 문화가 중심을 이루지만 중원계 유물들도 공반된다

.

서북한지역에서도

E

식과

Fa

식 변형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어서 상보유형은 요동 북부지역부터 서북한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

셋째

,

서황산둔유형은

Fa

(

대청산식

)

변형비파형동검

,

다뉴조문경이 확인되며

,

묘제와 유물이 좀더 재지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

Ⅳ.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1. 기원전 1000년기 전엽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중국 동북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전기

,

중기

,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전기에는 요서지역의 십이대영자

44) 趙鎭先, 앞의 글, 2008, 27~54쪽.

(18)

문화

,

요동지역의 강상유형과 이도하자유형으로 구분되는데

,

이 중 십이대영자문화가 가장 중심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다

.

중기에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십이대영자문화가 심양과 요양 일대까지 깊숙하 게 침투한다

.

또한 전기에는 서북쪽의 하가점상층문화와의 교류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중기에는 동북쪽의 북방초원지역과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

이와 같은 양상의 변하는 중기에 이르러 하가점상층문화가 쇠퇴하 였기 때문일 것이다

.

비파형동검문화는 후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보이게 된다

.

요서지역에서 십이대영자 문화가 급속하게 쇠퇴하지만 요동지역에서는 변형비파형동검문화가 윤가촌유형

,

상보유형

,

서황산둔유형으로 분리되면서 지속되고 있다

.

고조선의 강역

,

또는 중심지는 이러한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전개과정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 다

.

중국에서는 기원전

7

세기경에 이미 고조선의 실체를 인식하고 있으며

,

기원전

4~2

세기에는 서로 갈등하 며 충돌하기도 한다

.

문헌에서 확인되는 고조선의 시기는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연대와 대체로 부 합된다

.

그러나 대동강유역은 대부분

E

식이나

F

식 변형비파형동검만 출토되고 있어서 고조선의 전 기간을 포괄하기 어렵다

.

연안 금곡동유적 출토품을 이 지역을 대표하는 비파형동검으로 언급하기도 하지만 연안 금 곡동은 대동강유역보다는 중부지역에 가까운 지역이다

.

또한 한반도의 세형동검문화를 고조선과 연결시키기 에는 분포지역과 연대에서 차이가 있다

.

45)

지금까지 중국 문헌에 남아있는 고조선 관련 기록들은 많지 않다

.

필자는 이 중 반영시기가 비교적 분명 한 기록들과 중국 동북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전개과정을 비교하여 대체적인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을 파악 해 보고자 한다

.

우선 비파형동검문화의 전기에 해당하는 기록으로는 󰡔管子󰡕에서 확인되는 齊桓公

(

기원전

685~643

)

과 管仲의 대화를 들 수 있다

.

󰡔管子󰡕가 성책된 시기가 늦기 때문에 그 당시를 반영하는지 의문이 없지는 않지 만

,

46)제나라 환공 때라는 시대적인 배경

,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청동기시대까지 지속된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교류관계

,

47) 기원후

3

세기에 요동반도에 있던 縣이 산동반도로 이치되고 있는 점48) 등을 고려하면

,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면 산동에 있던 제나라는 일찍부터 요동반도 지역에 대한 정보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

따라서 󰡔管子󰡕의 기록이 기원전

7

세기경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

○ 󰡔管子󰡕 「揆度」

桓公問管子曰 吾聞海內玉幣七筴 可得而聞乎 管子對曰 …… 燕山之紫山白金一筴 也 發朝鮮之文皮一筴也

○ 󰡔管子󰡕 「輕重甲」

管子對曰 …… 發朝鮮不朝 請文皮 毤服而以爲幣乎 …… 豹之皮容金而金也 然 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45) 趙鎭先, 「北韓地域 細形銅劍文化의 發展과 性格」, 󰡔韓國上古史學報󰡕 47, 2005, 59~87쪽. 46) 盧泰敦, 앞의 글, 1990, 31~32쪽.

47) 郭大順·張星德, 앞의 책, 2005, 224~233·350~361쪽. 48) 盧泰敦, 앞의 글, 1990, 49~50쪽.

(19)

<그림 7> 기원전 1000년기 전엽의 고조선 위치 비정(바탕사진은 구글어스)

위의 기록을 통해 기원전

7

세기경 산동반도에 있는 제나라의 인식 범위 안에

發朝鮮

’,

또는 고조선이 있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또한 발과 조선이 연칭되어 있어서

2

개의 집단이 서로 관련되는 지역에 있었을 것으 로 생각된다

.

필자는 전기의 비파형동검문화를 대

·

소능하유역의 십이대영자문화

,

요동반도의 강상유형

,

요 동 북부

~

길림성 중남부의 이도하자유형으로 세분하였다

.

그러므로

發朝鮮

은 이 중

2

개를 지칭한 것으로 추 정해 볼 수 있다

.

發朝鮮

의 순서에는 제나라와의 지리적인 遠近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제나라와 가까운 지역 집단이

’,

그 배후에 있는 집단이

朝鮮

으로 지칭되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는 신석 기

~

초기청동기시대는 물론 역사시대에도 교류가 활발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

요동반도에 위치한 강상유형 이 󰡔管子󰡕에 언급된

,

그 배후에 있는 이도하자유형이나 십이대영자문화가

朝鮮

으로 인식되었을 가능 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강상유형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것은 이도하자유형이지만 필자는 강상유형의 비파형 동검이 십이대영자문화의 비파형동검과 형식변천의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점을 중시해서 󰡔管子󰡕에 언급된 고 조선은 십이대영자문화를 지칭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상황은 기원전

1000

년기 중엽의 문헌기 록들과 고고학 자료들을 살펴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

(20)

2. 기원전 1000년기 중엽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기원전

1000

년기 중엽의 문헌기록으로는 蘇秦과 관련된 󰡔戰國策󰡕과 󰡔史記󰡕의 기록을 들 수 있다

.

소진이 연나라의 文侯

(

또는 昭王

)

에게 연나라의 사방과 국력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배경이 되는 시기는 기원전

4

세기 후반일 것이므로 비파형동검문화의 중기와 관련된 문헌기록으로 생각된다

.

○ 󰡔戰國策󰡕 「燕策」

蘇秦將爲從 北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嘑沱 易水地方二千餘里

○ 󰡔史記󰡕 「蘇秦列傳」

去遊燕

,

歲余而後得見

.

說燕文候曰

燕東有朝鮮遼東

,

北有林胡樓煩

,

西有雲 中九原

,

南有滹沱易水

,

地方二千余里

,

帶甲數十萬

,

車六百乘

,

騎六千匹

,

粟支數年

.

南有碣石

,

雁 門之饒

,

北有棗栗之利

,

民雖不佃作而足于棗栗矣

.

此所謂天府者也

.”

위의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기원전

4

세기경에 연나라의 동쪽에는

朝鮮遼東

이 있었다는 것이다

.

또한 연나라의 강역이 방

2000

여리라 하였으므로 고조선의 강역도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49) 소진은 연의 동쪽에

朝鮮遼東

이 있다했으므로

朝鮮

遼東

보다 연나라에 가까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이 대부분이다

.

50) 그 이유는 남쪽에 있는

嘑沱易水

가 연의 도읍이었던 북경지역을 기준으로 보면 역순이 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 말을 한 주체는 蘇秦이고

,

그는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낙양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

소진은 중원을 기준으로 연의 사방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

.

이 러한 가능성은 다음 기록으로도 그 타당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

○ 󰡔史記󰡕 「匈奴列傳」

以晉北有林胡樓煩之戎 燕北有東胡山戎

○ 󰡔史記󰡕 「匈奴列傳」

而趙武靈王亦變俗胡服 習騎射 北破林胡樓煩 築長城 自帶幷陰山下 至高闕爲 塞而置雲中雁門代郡

.”

○ 󰡔史記󰡕 「趙世家」

攘地北至燕代

,

西至雲中九原

.”

첫 번째 기록은 기원전

7

세기 후엽의 상황을 기록한 것인데

,

晉나라 북쪽에 林胡樓煩이 있다는 것이다

.

두 번째와 세 번째 기록은 趙나라 武靈王과 관련된 기록으로 조나라의 북쪽에

林胡樓煩

이 있고 서쪽에

雲中九 原

이 있다는 것이다

.

춘추시대 晉이나 전국시대 趙는 모두 중원에 있는 나라인데

,

이 기록들의 순서가 蘇秦 이 연나라의 북쪽과 서쪽을 언급했을 때와 동일하다

.

따라서 蘇秦이 언급한 연나라의 사방 나열 순서는 춘추 전국시대에 중원지역에서 관용적으로 행해진 표현일 가능성이 크다

.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 ‘

嘑沱易水

는 중 원지역

(

낙양

)

을 기준으로 하는 지리적인 순서이며

, ‘

朝鮮遼東

역시 중원지역을 기준으로 하는 지리적인 遠近 의 순서일 것이다

.

그래서 낙양을 기준으로 하면

,

서남쪽에서 동북쪽 순으로 嘑沱 ‒ 易水 ‒ 燕 ‒ 朝鮮 ‒ 遼東이 있게 되므로

朝鮮

遼東

보다 燕나라 가까이에 있는 것이 하등의 문제가 없게 된다

.

49) 조진선, 앞의 글, 2010, 185쪽.

50) 서영수, 「요동군의 설치와 전개」,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20~21쪽.

(21)

<그림 8> 기원전 1000년기 중엽의 고조선 위치 비정(바탕사진은 구글어스)

그러므로 기원전

1000

년기 중엽의 비파형동검문화 전개양상과 비교해보면

,

고조선은 요서지역의 십이대 영자문화와 심양

·

요양지역에 새로 형성된 정가와자유형을 포괄하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 다

.

또한 요동반도의 강상유형은 적석묘가 지속되면서도 십이대영자문화나 정가와자유형에서 새로 등장하는 형식의 비파형동검이 확인되고 있어서 긴밀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

따라서 강상유형 역시 기원전

1000

년기 전엽 이래로 고조선의 영향권 안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3. 기원전 1000년기 후엽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기원전

1000

년기 후엽의 기록으로는 우선

,

󰡔三國志󰡕에 인용된 󰡔魏略󰡕과 󰡔史記󰡕 「匈奴列傳」의 기록이 있 는데

,

기원전

4

세기 후엽부터 기원전

3

세기 전엽까지의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

따라서 이 기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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