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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단 중국고대사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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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단은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서 창업기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무왕이 동정(東征)한 지 2년 뒤에 죽었을 때 조카 성왕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삼감(三監)’은 형님인 주공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주는 이때 은을 멸망시켰지만, 완전 장악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주왕의 아들 녹보를 세워 은의 유민 을 통치케 하고 관숙 선, 채숙 도, 곽숙(霍叔)의 세 감독관을 두어 이것을 감독케 했다. 이것이 삼감이다.

이 삼감이 어느덧 중앙에 반감을 품고 녹보와 손을 잡고서 난을 일으켰다. 주공 단은 이때 여러 가지 어려움 이 있었고 반대도 있었지만 단호히 군을 일으켜 이들을 토벌했다. 이 내란 평정은 3년이나 걸렸고, 녹보와 관 숙 선만이 주살되었다. 나머지 채숙과 곽숙은 추방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멸망한 은의 제사는 끊길 수가 없는 것이라 주왕의 또 다른 아들인 미자개(微子開)가 옹립되어 송(宋)에 봉해졌다.

이런 이야기는 『상서(尙書)』로써 알 수 있다. 본디 『상서』는 주나라 사관의 기록이었는데, 옛날엔 그저

‘서(書)’라고만 불렸다. 당시에 있어선 씌어지는 것, 즉 기록은 왕의 말뿐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후대에 이르 러 갖가지 기록이 세상에 나타났으므로 한나라 때 다른 것과 구별하여, ‘숭상한다’는 뜻의 상(尙)자를 붙여 ‘상 서’라고 불리게 된 것이었다.

또 주나라 시대는 유가로서 이상의 시대로 받들어졌기 때문에 그 시대의 기록은 ‘경전’으로 여겨졌고 이윽고

『서경』이라 불렸다. 이것은 남송(南宋) 이후의 일이다.

주나라 역사는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으로도 알 수 있다. 『시경』도 『서경』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한낱 ‘시’라고 불렸을 뿐이다. 『논어』에 있는 유명한 말로 ‘시 3백, 일언이 폐지하여 생각에 사(邪)가 없다’고 공자는 평했다. 감정이 순수하다는 뜻으로 『시경』엔 무두 305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경』은 국풍(國風), 아(雅), 송(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국풍은 주나라 시대 각지의 민요로 160편이고, 전체의 과반수에 이른다. 이는 주 왕조의 노래로 다시 ‘대아’

와 ‘소아’가 있다. 대아는 조정의 공식행사 때 연주된 음악에 붙여진 가사인 듯싶고, 소아는 연회(宴會)때의 그 것이었다. 송은 종묘의 악가(樂歌)였다. 그러므로 이 무렵의 사람들 생활을 알 수 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국 풍이다.

주공 단은 7년이 지나자 성장한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세를 생각할 때 아무래도 나 라를 동서로 나누어 성왕과 주공이 각각 분할 통치를 했던 것 같다.

낙읍(洛邑)에 성벽을 쌓고 은의 유민을 수용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섬서성의 호경(鎬京)에 있었던 옛날부 터의 주나라 도읍은 너무나 서쪽이라, 위치적으로 대제국을 통치하기에 불편했던 것이다.

낙읍 주변은 뒷날 낙양(洛陽)이라 불렸지만, 주는 이곳을 성주(成周)라고 이름짓고 본디의 호경은 종주(宗 周)라 불렸다.

무왕의 창업에서 성왕, 강왕(康王) 무렵까지가 주의 황금시대였다. 유가의 이상적인 사회가 그때 있었던 것 이다. 주는 농업국가였다. 주가 은을 정복했을 때 놀란 것은 은인들의 사치와 음주하는 습관이었다. 은허에서 많은 청동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갖가지 주기(酒器)였던 것이다.

『상서』에 주고(酒誥)라는 문장이 있다. 이것은 주공 단이 은의 옛 땅에 위(衛)나라를 세우고 막내아우 강숙 (康叔)을 봉하면서 경고의 뜻으로 준 글이었다. 주에서는 제사에만 술을 쓸 뿐 평소엔 마시지 않았다. 제사 때 의 술도 예의를 지키고 덕으로써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되었다.

“크고 작은 나라에 있어 소비하여 망함은 술로서, 이 또한 죄가 아닌 게 없었다.”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술만이 원인은 아니겠지만, 술이 반드시 어딘가에 얽혀 있다고 본 것이었다. 그래서 주공은 강숙에게 엄명했다.

“저 고하여, 모여서 술 마시는 자 있거든 너는 용서치 말라. 남김없이 잡아 이를 주로 보내라. 내 그를 죽이리 라.”

관리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어가며 술을 마신다면 질서는 엉망이 된다. 그런 자들은 엄벌에 처하겠다는 것 이다.

“그러나 은의 유신 및 공장(工匠)으로서 술에 빠진 자는 이를 죽이지 말고 잠시 동안 가르쳐라. 또한 이미 은 의 풍습에 오래 젖은 자로 술을 마시는 자가 있다면 이를 죽이지 말라. 이는 습관이 되어 있으므로 갑자기 금 지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잠시 설득의 기간을 두라는 것이다.”

주공은 이렇듯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주공은 또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번잡한 제사의 제도를 개혁 했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을 폐지하고, 제물은 일우(一牛)‧일양(一羊)‧일돈(一豚)으로 정했다.

아마도 주공의 최대 업적은 ‘하늘’이란 이념을 만든 일일 것이다.

그때까지는 자연신도 조상신도 인간의 바로 옆에 있다고 믿었으므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신의 노여 움이라고 겁을 냈다. 특히 이것이 왕이나 귀족의 경우라면 더욱 요란하게 의식을 올리든가 제사를 지냈었다.

주공은 그와 같은 신들을 되도록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이 유가의 정신이기도한 ‘경원 (敬遠)’이다.

우러르며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멀리한다. 이것이 경원이다. 경원은 여기서 출전되어 오늘날에

주공 단 중국고대사 이해 2008/08/1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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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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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많이 쓰이고 있다.

주공은 신들을 인간으로부터 멀리했으나,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늘을 만들었다. 하늘이라면 아득한 높은 곳에 있어 온갖 인간에게 평등하다. 또 경원의 정신에도 꼭 알맞은 추상적인 존재였다. 천명‧천 리 같은 사상도 이런 데서 연유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주공을 성인으로 받든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공자는 주공을 통해 하나의 질서 체계를 발견하고 이를 인간의 거울로 삼았던 것이다.

주공이 보좌한 성왕은 비교적 일찍 죽었지만, 그 아들 강왕은 재위 40여 년에 이르렀고 그동안 형벌이 사용 되지 않을 만큼 평화스런 시대였다. 주공의 유풍(遺風)이 사람들 마음에 뿌리 깊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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