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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7차시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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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7차시 강의록

담당교수: 윤 휘 탁(교양학부)

후기(통일)신라

 통일신라의 지방제도:

 삼국통일로 영토가 확대, 이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주(州)-군(郡)-현(縣)의 제도를 정비

 9주(州): 685년 신문왕(神文王) 때 9주 설치 - 신라·가야 땅에 사벌주·삽량주·청주

- 백제의 옛 땅에 웅천주·완산주·무진주 - 고구려의 옛 땅에 한산주·수약주·하서주

 주 장관: 군주(軍主)→ 총관(摠管, 문무왕)→ 도독(都督, 원성왕) → 주 장관의 군사기능을 약화시키고, 행정 기능을 강화

 군(郡, 太守)-현(縣, 縣令)-촌(村): 117개 군, 293개 현 설치 - 중앙귀족은 주-군-현의 지방장관에 임명

- 토착 세력가들은 촌주(村主)나 주-군-현의 말단조직에 임명

-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실시, 그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복무하 게 하고 감시

 5소경(小京) 설치:

 중원경(충주)·북원경(원주)·금관경(김해)·서원경(청주)·남원경(남원)

 고구려, 백제 출신 귀족들, 신라의 중앙 귀족 일부를 5소경에 강제로 이주

 피정복민을 회유 통제하고 수도가 동쪽에 치우쳐 있는 약점 보완

통일신라는 왜 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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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귀족들의 반란과 국왕의 권위 하락과 무력화:

 혜공왕(惠恭王, 765-780) 때 귀족인 대공(大恭)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반 란이 전국적으로 확산

 귀족인 양상(良相)이 정권을 탈취, 혜공왕 살해하고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

 785년 원성왕(元聖王) 즉위 후, 귀족간의 타협 속에 원성왕(내물왕 계통)계통이 왕위를 독점

※ 삼국통일 후 방계로 밀려났던 과거의 귀족(내물왕계)들이 반란 통해 귀족 연립정권 수립→ 국왕의 권위는 하락, 귀족들의 독무대

2) 귀족 상호간의 대결과 충돌:

 태종무열왕 계통 귀족과 내물왕 계통 귀족의 대립

 김헌창(金憲昌)의 반란:

- 내물왕 계통의 구 귀족들이 사회를 좌지우지

- 822년(헌덕왕) 태종무열왕 계통의 김헌창이 옹주(공주)를 근거로 국호를 [장안(長安)]

이라 하고 반란을 일으킴

- 반란군은 내물왕 계통 귀족 연합세력에게 패배

-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한산(漢山, 서울)에 도읍 정하고 반란 계속 → 실패

 연합정권을 구성한 귀족들 간의 대립 항쟁:

- 귀족들 간의 대립 속에 신라 말 150년간 왕이 20명이나 바뀌고 많은 왕이 내란으로 희생

 귀족들 간의 사적 권력 강화와 경쟁:

- 귀족들은 재산과 정치권력을 증대하기 위해 참모들을 모으고 그들 소유의 노비나 유 민을 모집하여 사병을 양성

※ 왕위는 혈통이 아니라 정치적 실력과 무장력의 우열로 결정

3) 호족(豪族)의 대두:

 당시 골품제 때문에 출세할 수 없던 사람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대토지를 소유, 지방의 실력자로 성장, 해상 사(私)무역에 주력

 해상무역의 대표자:

- 장보고(張保皐, 청해진淸海鎭= 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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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왕봉규(王逢規, 강주=진주)

- 작제건(作帝建, 왕건의 조부, 송악=개성)

 해상무역의 실력자들은 공식무역인 조공(朝貢)무역 이외에, 민간무역이나 사무역 에 종사, 막대한 재산을 축적, 실력자로 등장

 장보고는 중국 산동성 문등현(文登縣)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워 무사 항 해를 빌었고, 이곳에 모여든 신라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 행사

4) 군진(軍鎭)세력(군사 실력자)의 등장:

 신라에서는 변경 수비 위해 북진(北鎭, 삼척), 패강진(浿江鎭, 황해도 平山)에 군 진을 설치

- 패강진: 선덕왕(782) 때 설치, 신라의 서북 변경지대 국방을 담당, 군사기지이자 독 립된 행정구역 역할

 해적의 약탈이 심해지자, 청해진(淸海鎭, 완도), 당성진(唐城鎭, 남양), 혈구진(穴 口鎭,강화) 등 해안 요지에도 차례로 군진이 설치

 군진은 점차 군사 실력자의 군사 거점으로 변질되면서 신라 왕실의 중앙 집권력 과 통치력을 잠식, 약화시킴

→ 군진은 점차 중앙권력의 통제로부터 이탈, 사적 권력으로 변질 5) 지방 성주(城主)의 자립화:

 신라 말 지방에서는 친족을 중심으로 사병을 양성, 군진을 설치, 대를 이어 지배 권을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많이 출현

 이들은 성을 쌓고 성주(城主) 혹은 장군이라 불림

 성주들 중에는, 몰락해서 지방으로 내려간 중앙귀족의 진골이나 육두품 출신 혹 은 토착의 촌주(村主)들도 있었음

 이들은 군진을 설치해서 여러 지역을 지배하는 세력가로 성장하면서 군현(郡縣)의 장관을 대신하는 지방 실력자의 지위를 차지

 성주들은 자기 세력 안의 촌락들에 대해 경제적으로 지배

- 독자적인 농법을 개량해서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촌락민에게 일정한 조세와 노역을 부과

 촌락민에 대한 성주의 경제적 지배는 중앙정부의 경제기반을 잠식

→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력 저해, 신라의 존망에 부정적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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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 통일신라 말의 농민반란:

 9세기 후반 신라 왕정은 더욱 부패, 농민들에 대한 수탈 가중

 헌강왕, 진성여왕 때는 궁정의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함 7) 신라의 분열과 후삼국의 등장:

 통일신라에서 <후백제>, <후고구려(고려)>가 등장 → 신라의 멸망

 사회 전반에 만연한 사치 향락 풍조로 재정 지출 수요가 증폭

 성주나 지방호족이 등장, 지방민에 대한 수탈과 지배권을 강화 → 중앙정부의 징세권 잠식 → 국가재정 감소

 신라 중앙정부는 부족한 세금을 농민에게 부과, 농민들은 성주와 중앙정부 모두 에게 세금 납부 →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궁핍화

 농민들은 조세와 노역의 과중한 부담 때문에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거나 무리 지어 도적질, 호족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

 통일신라 사회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농민들이 봉기

 889년(진성여왕) 상주지방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봉기

해상왕 장보고의 유산:

 장보고: 신라의 골품제와 신분제의 한계를 느껴 당에 가서 군인으로 출세(연대장 급)

 소금 거래, 해운업으로 재산 축적

 해적들이 신라인 잡아다가 노비로 매매하는 일에 분개, 귀국

 흥덕왕(828)에게 청하여 남해의 완도에 청해진(淸海鎭) 설치

 대사(大使) 직함 가지고 사병 성격의 해군 1만 명 거느리고 해안 경비, 해적 제압, 당 및 일본과 활발한 무역 통해 해상왕이 됨

 청해진에서는 중국, 일본, 이슬람, 동남아 상인들과도 교역

 인근에서 도자기, 차 등을 생산해서 판매

 차 문화, 도자기 기술을 주변에 보급

 장보고의 정치적 야심과 몰락:

- 장보고는 왕위 쟁탈전에 패해 보호를 요청한 우징(祐徵)에게 군대 제공, 민애왕 축출 하고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함(神武王)

- 문성왕(文聖王) 때(846) 딸을 왕비로 들이려다 귀족들에게 암살

- 851년 청해진 폐지됨. 그의 군대는 김제로 옮겨져 재기가 불가능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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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신라 해군력의 약화를 초래

 청해진: 전남 완도 옆에 조그만 섬인 장도에 본진이 설치

- 청해진을 방어하기 위해 남서쪽 해안선을 따라 나무 울타리를 300미터 정도 만들었 음

 중국 내 장보고의 흔적:

 법화원(法華院): 산동성 용성시(龍城市) 적산(赤山)에 위치. 장보고가 세운 절로서 산동지역의 신라인들을 결집시킨 곳. 장보고의 중국 전진기지로 역할. 법화원 밑 에 신라촌 존재

 신라방(新羅坊), 신라관, 신라촌의 유적: 산동성 봉래시(逢萊市), 절강성 영파(寧波) 및 샹산현, 복건성 천주(泉州)

후삼국의 출현

 <후백제>:

 892년 견훤(甄萱)은 무진주(광주)에서 농민반란군을 끌어들여 세력을 형성

 900년 완산주(전주)로 도읍을 옮겨 <후백제>를 건국

 <후백제>는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백제 지역을 차지하여, 한때는 궁예의 <후고구려>를 능가

 <후고구려>:

 901년 궁예(弓裔)는 송악(개성)에 도읍 정한 후 <후고구려> 건국

 905년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함

 911년 국호를 다시 <태봉(泰封)>으로 바꿈

 궁예의 성공: ① 신라에 대한 반감을 자극, 옛 고구려 호족들의 호응을 얻고 약탈 한 물건들을 부하에게 분배해서 환심을 얻음

 ② 자신이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미륵불을 자처, 미륵신앙에 빠진 민중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지지를 유도

 궁예는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난폭하게 행동, 민심을 상실

 918년 홍유, 배현경, 신승겸 등이 철원에서 궁예를 내쫓음

 궁예는 쫓겨나 도망치다가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살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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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918년 홍유 등은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성을 표방

 919년 도읍을 송악(개성)으로 천도

후삼국과 왕건:

 왕건의 등장과 대외관계:

 왕건은 할아버지(작제건) 때부터 호족적 기반 위에서 서해의 해상세력 및 혈구진, 패강진 등의 군진(軍鎭)세력(군벌세력)과 연계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서 군공을 세워 시중(侍中) 자리에 오름

 신라에 대해 우호적, 후백제 견훤과도 초기에는 우호적 관계 유지

 920년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신라를 도움으로써 후백제와 관계 악화, 925년 후백제와 전투

 927년 견훤이 신라를 침입, 고려와 우호적인 경애왕을 살해

 왕건은 이를 구원하러 갔다가 견훤에게 참패

 928년 견훤과 왕건은 신라 외곽인 강주(진주)에서 전투, 왕건이 수세에 몰림

 930년 왕건은 고창(안동)전투에서 승리, 견훤의 주력부대를 격파

 30여 군현과 동해안의 강릉~울산에 이르는 성을 차지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왕건은 군사적으로 견훤보다 우위를 확보, 통일기반을 마련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