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1. 서론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1. 서론"

Copied!
22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반세기 한-콜롬비아 관계의 변화와 발전 :

전통적 우호협력관계에서 실질적 협력관계로

1)

추 종 연*

1. 서론

1962년 시작된 한국과 콜롬비아 간 외교관계는 이미 반세기를 넘었다. 그리고 2013년 2월 한-콜롬 비아 FTA 협정이 정식 서명되었으며, 이 협정이 발효되면 한-콜롬비아 관계는 상전벽해(桑田碧海) 와 같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은 한-콜롬비아 관계를 뒤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한국과 콜롬비아 관계를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라고 지칭해왔다. 한국과 여타 중남미 라틴문화권 국가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 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한국은 이들과 매우 유사한 관계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본고를 통해 독 자들이 한-콜롬비아 관계를 살펴보면서, 전통적 우호협력관계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지에 관해서 윤곽을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 논문의 제목을 “한-콜롬비아 관계의 변화와 발전”으로 정했지만 이는 주로 한쪽에서 바라본 즉, 한국적인 시각에서 기술한 것이다. 물론 본고에서 부분적으로 콜롬비아의 대한국정책 또는 대아시아 정책에 관해서 언급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콜롬비아 시각에서 바라본 양국관계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많은 콜롬비아자료 수집과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 주 콜롬비아 대사

(2)

또한 필자는 본고에서 ‘전통적 우호협력관계에서 실질적 협력관계로’라는 소제목을 사용하였으며, 이 두 단계를 구분한 시기를 2006-2008년으로 설정하였다. 이 시기를 양국관계 변화의 분기점으로 정 한 실증적인 근거가 확고하지는 않다. 그러나 2006년은 한-콜롬비아 교역 및 투자규모가 대폭 확대된 해이고, 2008년은 양국 간에 국제회의 참석이나, 의례적인 인사교류를 넘어서 양자관계 증진을 목적 으로 한 고위인사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또한 한국기업들의 콜롬비아 진출도 2008년부터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콜롬비아 사정을 보면 2006년은 우리베(Uribe) 대통령 정부 1기가 마무리되고 2기로 넘어가는 시점이고, 무장 게릴라 세력이 위축됨에 따라 콜롬비아의 치 안이 현저하게 안정 국면을 찾아가는 시기였다.

한-콜롬비아 관계 전반에 관해 한국에서 발표된 논문이나 공개된 자료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따라서 양국 외교관계가 50년을 넘긴 시점에서 한-콜롬비아 관계를 누군가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평 가해볼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본고는 한국 외교부에서 발행된 제한된 기초자료와 필자 가 한국 외교부 중남미국 및 중남미지역 공관에서 근무하면서 접했던 자료 및 경험을 토대로 작성되 었다.

2.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

1950-53년 간 치러진 6.25전쟁(한국전쟁)에 콜롬비아의 전투병력 파견은 한국과 콜롬비아 관계를 결속시키는,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외교적 자산이 되었다. 콜롬비아는 중남미 33개국 중 유일하게 한국전쟁에 5,314명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며 그 중 213명이 전사,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1). 한국전에 참전한 콜롬비아 대대(Batallón Colombia)는 용감했으며 혁혁한 전과를 거두어 유엔군 모두에게 귀 감이 되었다. 따라서 콜롬비아 군은 지금도 그 부대이름을 시나이반도 파견 콜롬비아 평화유지군 부 대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그 이름을 가진 부대가 톨리마(Tolima) 주에 주둔하고 있 다.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 이유로는 국제공산주의 팽창저지, 콜롬비아 내 보수당세력과 자유당세력 의 갈등으로 인한 사회불안 문제 해결, 당시 국제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떠오르는 미국과의 우호관계

1) 6.25전쟁 참전 콜롬비아 병력 연인원 및 사망자(killed in action) 통계숫자는 자료마다 상이하므로, 한국전쟁 기념관(War Memorial) 참전비 동판에 새겨진 통계를 사용함(Valencia Tovar 외, 595).

(3)

유지, 신흥국제기구인 유엔에서의 입지 구축 등으로 분석된다. 당시 미국은 콜롬비아산 커피와 바나 나를 각각 80% 및 50% 수입하는 최대 통상파트너였던 만큼(차경미 2006, 32-86), 미국의 한국전 참 전 요청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으로 국내 정치상황은 나아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국전 종전 직전인 1953년 6월에 콜롬비아 역사상 유일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구스타보 로하스 삐니야 (Gustavo Rojas Pinilla) 장군이 무력을 동원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이후 1958년까지 군사정부가 이어 졌다. 그러나 한국전 참전으로 콜롬비아 군사전략 면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고 군장비의 현대화 가 이루어졌다(차경미 2006, 87-100).

콜롬비아에는 현재 한국전참전과 관련하여 3개의 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이 단체들은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양국 국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킴으로써, 양국관계 증진에 중 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전 참전용사회(ASCOVE)2)는 1958년에 설립되었으며, 한국전 참전장교 회(ASOVECOR)3)는 1989년에 한국전 참전용사회에서 분리되어 창설되었다. 한국전참전용사 후손회 (ADEVECO)4)는 2011년 9월에 창설되어 현재 350여명의 회원들이 유료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 재 참전용사 후손으로 콜롬비아 해군참모총장 및 부총장, 나리뇨(Nariño) 주지사 등을 포함 많은 저 명인사들이 콜롬비아 사회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콜롬비아를 26개 ODA 중점협력대상국에 포함시켰다5). 콜롬비아 국민소득수준이 유 엔기준으로 중·고소득국(upper middle income country)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중점협력대상국에 포함

2) 한국전 참전용사회(ASCOVE: Asociacion Colombiana de Veteranos de Guerra de Corea)는 1958년에 창설 되었다. 현재 약 700명 정도의 참전용사들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콜롬비아 국방부에서 제공한 건물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매년 한국전 기념 헌화, 대사관저 리셉션, 송년회 등 행사를 갖고 있다.

3) 한국전 참전장교회(ASOVECOR: Asociacion Colombiana de Oficiales Veteranos de Corea)는 1989년 한국전 참전용사회(ASCOVE)에서 분리되어 창설되었다. 장교출신으로만 구성되었으며 30명 정도가 회원으로 등록 되어 있다.

4) 주 콜롬비아 대사관은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 사실을 콜롬비아 국민들이 계속 기억하도록 하고 또 참전용 사 후손들을 친한단체로 육성하기 위해 2011년 9월 23일 한국전참전용사 후손회(ADEVECO: Asociacion de Descendientes de Veteranos de la Guerra de Corea)를 설립하였다. 한편, 주 콜롬비아대사관의 주도하에 참 전용사 및 한인 가족 한마당체육대회가 창설되었으며 2012년부터 매년 콜롬비아 한인회 및 상사지사회 지 원으로 이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5) 한국정부가 지정한 ODA 중점협력대상국은 총 26개국으로 아시아 11개국(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필 리핀, 방글라데시, 몽골, 라오스, 스리랑카, 네팔, 파키스탄, 동티모르), 아프리카 8개국(가나, DR콩고, 나이 지리아,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카메룬, 르완다, 우간다), 중동 및 CIS 2개국(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중남미 4개국(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오세아니아 1개국(솔로몬군도)이다.

(4)

되기 어려운 여건이었으나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사실이 그러한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이 자명하다. 한국정부는 현재 보고타시에 상이군경으로 대상으로 한-콜롬비아 우호재활센터(CRI:

Centro de Rehabilitación Integral)6)를 건립중이다. 이는 KOICA7)에서 추진하는 중남미지역 최대 ODA 프로젝트로 여기에는 한국민들의 보은(報恩)의 의미가 담겨있다.

한국민들에게 콜롬비아는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주고 구해준 고마운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 래서 한국민들은 콜롬비아를 '혈맹(alianza de sangre)' 또는 ‘친구의 나라(país de amigo)'라고 부른 다.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은 양국관계를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로 만들어준 가장 핵심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사실은 한-콜롬비아 정부 간 외교관계 뿐만 아니라 양국 국민 간 정 서적 유대관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한 영향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3. 전통적인 우호협력관계

가. 한-콜롬비아 외교관계 수립

(1) 외교관계 수립

1948년 한국정부가 수립된 이후, 유엔에서는 미국과 다수의 중남미국가들 지지 하에 한국을 한반 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유엔총회결의안 제195호(Ⅲ)가 통과되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이 발발하자 콜롬비아는 중남미 지역에서 유일하게 대대규모의 전투 병력을 파견하였고, 여타 멕시 코 등 중남미국들도 의약품, 식량 등을 제공하였다. 중남미국가들과의 관계는 브라질과 처음으로 1959년 10월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을 시작으로 공식화되었으며, 1960년대 20여개의 중남미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이 지역과의 유대관계 강화를 위한 기반이 구축되었다.

한국전을 계기로 시작된 콜롬비아와의 관계는 1962년 3월10일 국교가 수립됨으로써 공식화 되었 다. 정일권 주 미국 대사가 그 해 7월 10일 초대 주 콜롬비아 겸임대사로 신임장을 제정하였으며, 콜

6) 한-콜롬비아 우호재활협력센터(CRI)는 한국정부가 중남미에서 시행하는 최대규모 ODA사업(2007-2015)으 로 한국정부는 1,150만불을 지원하여 콜롬비아 국방부와 함께 연면적 12,487 m2 규모의 재활센터를 설립한 다. 포르투갈 기업인 Mota사가 보고타시에 해당 건물을 건축중이다.

7) KOICA(Korea International Coperation Agency)는 한국정부의 ODA 전담기관으로 외교부 산하기관이다.

(5)

롬비아 측에서도 동경 주재 엔리께 몰라노 깜푸사노(Enrique Molana Campuzano) 대사가 1964년 7 월 9일 초대 주한 콜롬비아 겸임대사로 신임장을 제정하였다(외교통상부 2004, 105).

(2) 상주공관 설립

콜롬비아는 주 미국대사관 관할 하에 있다가 1969년 윤주영 칠레상주 대사가 제3대 주 콜롬비아 겸임대사(3대)로 신임장을 제정함으로써, 주 칠레대사관 관할로 바뀌었다. 이후 1971년 6월 10일 주 콜롬비아 상주대사관이 창설되었으며 2년 후인 안진생 초대 콜롬비아 상주대사(5대)가 부임하여 1974년 8월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한국정부는 콜롬비아 상주공관 설립에 앞서 1967년 10월 보고타에 명예총영사관을 설립하고 비르힐리오 올라노(Virgilio Olano) 명예총영사를 임명하였으며, 동인은 1978년까지 명예총영사로 재직하였다.

콜롬비아 정부도 1978년 7월 베르나르도 에체베리 오싸(Bernardo Echeverri Ossa) 주한 콜롬비아 대사대리를 파견하여 서울에 상주공관을 설립하였으며, 그 해 12월 11일 비르힐리오 올라노 부스토스 (Virgilio Olano Bustos) 초대 한국 상주대사(5대)가 신임장을 제정하였다(외교통상부 2004, 105-106).

나. 한국 외교의 주요 관심사

(1)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의 남북문제 토의

2차 대전 후 1945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소련군이 북한지역에 진주하였으며, 이들의 비호 하 에 북한에서는 1948년 9월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한 반도는 사실상 2개의 국가로 분열되었으며, 분단 상황은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범세계적인 냉전체제가 강화되면서 남한과 북한은 각각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 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에 편입되어 양측 진영 간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또한 남북한은 살 아남기 위해 체제경쟁에 진력하게 되었다.

1960년대 한국정부는 유엔에서의 남북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였다. 유엔에서의 남북 대결외교는 1975년 제3차 유엔총회에서 내용이 상반되는 두개의 결의안, 즉 한국 측 결의안(제3390A 호)과 북한 측 결의안(제3390B호)이 동시에 통과되고 이에 따라 한국문제토의가 중단되면서 수그러 드는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 간 체제경쟁은 지속되었으며 북한은 지금도 남한을 대상으로

(6)

한 각종 테러, 무력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외교의 최우선 어젠다가 남북대결에서의 승리였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대콜롬비아 및 대중남미 외교도 한국문제 관련 지지확보에 중점이 두어졌다. 중남미 지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콜롬비아는 한국전 참전국이라 유 엔 등 국제무대에서의 한국지지는 매우 확고했다.

(2) 경제발전을 위한 재원확보 및 수출증진

1960년대 및 1970년대 한국외교의 주요과제는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의 대북한우위확보와 더불어 경제발전을 위한 재원확보, 수출시장 확대 등이었다. 재원확보를 위해서 한국정부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일본으로부터의 전쟁배상금 그리고 독일로부터의 상업차관 확보에 주력하였다.

수출증진을 위해서 한국정부는 각종 금융 및 행정제도를 수출에 초점을 맞추어 개편 또는 신설하 였으며 기업들의 수출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주요 수출대상 지역은 북미와 유럽이 었으며 중남미에 대한 수출은 전체 수출에서 4-5%를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우리 기업들도 이 지역에 대한 전략적 플랜이 없이 경기가 좋을 때는 지사를 설치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다가 지역경기가 하락 할 때는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은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1964년 1억불 수출을 달성하였고, 7년 후인 1971년에 10억불, 6년 후인 1977년 100억불, 그리고 18년 후인 1995년 1,000억불 수출을 이루었다. 콜롬비아와 교역규모도 1981년 1,200만 불 규모였으며 그 이후 1984년 한 해(1억 3,200만 불)를 제외하고 1992년 까지 매년 1억불에 미치지 못했다.8)

8) 1978년부터 2013년까지 한-콜롬비아 교역통계는 권기수(1996), 외교통상부(2004; 2012), 중남미 자원·인프라 협력센터(2014) 내 교역통계 현황을 종합하여 작성하였다.

(7)

연도 수출 수입 무역수지 총교역규모 (수출+수입)

1978 6 4 1 11

1979 9 3 6 12

1980 21 5 16 26

1981 9 2 6 12

1982 14 3 11 17

1983 29 25 3 55

1984 62 69 -6 132

1985 5 12 -7 18

1986 11 11 0 23

1987 20 11 8 32

1988 29 6 22 35

1989 47 14 32 62

1990 57 12 44 70

1991 53 20 33 73

1992 75 24 50 99

1993 161 28 132 190

1994 233 34 199 267

1995 217 56 160 274

1996 193 56 136 250

1997 324 76 247 401

1998 271 52 219 324

1999 152 47 105 200

2000 201 52 148 254

2001 226 42 183 268

2002 272 48 223 321

2003 296 76 220 372

2004 240 60 179 301

2005 624 137 487 761

2006 913 206 707 1,119

2007 1,121 116 1,005 1,237

2008 1,091 143 948 1,234

2009 797 125 672 922

2010 1,388 432 956 1,820

2011 1,615 381 1,234 1,996

2012 1,468 415 1,053 1,883

2013 1,342 206 1,136 1,548

<표 1> 한국의 대콜롬비아 수출입 현황(1978-2013)

(단위 : 백만 불)

※ 백만불 미만을 절삭하여 무역수지 및 총 교역규모 통계에 오차발생

(8)

(3) 대중남미 이민 진출

중남미 지역은 한국과의 전통적 우호협력관계, 넓은 토지, 좋은 기후 등으로 인하여 한국민들의 주 요 이민대상지가 되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은 관대한 미개척지를 개간할 인력이 필요하여 이 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한국정부는 1962년 해외이주법을 제정하여 잉여인구를 해외로 송 출하고자 남미지역으로 기획이민을 추진하였다.

1962년 12월 18세대 92명의 브라질 이민단이 출발한 이래 1960년대 아르헨티나 및 파라과이로도 이민단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농업경험이 없어 상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아순시온 등 대도시로 이주하여 봉제 및 의류업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에는 신규 이민자들이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진출하여 이민사회의 의류업에 질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2011년말 현재 브라질에 50,000명, 아 르헨티나 22,000명, 과테말라 13,000명, 멕시코 12,000명, 파라과이에 5,000명의 한인들이 거주한다(국 가기록원).

콜롬비아에는 국가 규모에 비해 한인사회가 작은 편이다. 아마도 콜롬비아가 50년 이상 내전에 시 달리다 보니 치안이 불안하여 다른 남미국가처럼 한국이민이 이루어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콜롬비아 한인사회 규모는 900명 정도로 대부분 보고타에 거주한다.

다. 주요인사 교류(1970-2007)9)

(1) 한국➡콜롬비아

(가) 정부 고위인사

1970년부터 2007년 까지 38년 간 한국에서 콜롬비아를 방문한 최고위급 인사는 김상협 국무총리로 김 총리는 1982년 콜롬비아와 더불어 페루, 칠레 및 멕시코를 방문하였다. 그 이외에 이상옥 외교장관 이 제8차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총회 참석차 까르타헤나(Cartagena) 시를 방문하였다. 그러 나 이는 국제회의 참석을 위한 것이었지 콜롬비아를 공식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기타 부총리, 각료, 감사원장 등 고위인사의 방문도 7회 이루어졌으나 대부분 콜롬비아 대통령 취임식 특사, 국제회의 참 석을 위한 방문이었다.

9) 1970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과 콜롬비아간 주요 인사교류 통계는 권기수(1996), 외교통상부(2004; 2012) 내 주요 인사교류 현황을 종합하여 작성하였다.

(9)

김상협 국무총리의 중남미 순방은 당초 미겔 데 라 마드리드(Miguel de la Madrid) 멕시코 대통령 의 취임식(1982.12.1.)에 참석하기 위해 추진되었으나, 다른 순방대상국과의 일정조율이 어려워 멕시 코 방문이 멕시코대통령 취임식이 지난 후인 12.18-21간 이루어졌다. 김상협 국무총리의 중남미 방문 은 대한민국 국무총리로서는 최초로 이루어졌으며, 제5공화국정부의 한반도통일방안에 대한 지지확 보, 중남미 주요국가와의 우호협력관계 강화, 우리 기업 및 인력의 중남미 진출 강화 차원에서 이루 어졌다. 콜롬비아 경우는 1982년 8월 취임한 벨리사리오 베탕쿠르(Belisario Betancur) 대통령의 취임 을 축하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을 통해 형성된 양국 간 우의를 확인한다는 목적이 있었다(외교부 내부자료).

(나) 특사

1970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정부는 총 20회의 특사를 콜롬비아에 파견하였다. 특사 파견은 콜롬비 아 대통령 취임식 참석, 한반도 문제관련 지지확보, 비동맹에서의 협력, 안보리 이사국 선출 지지교 섭, 여수세계박람회 유치 활동 등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한국정부는 특히 중남미 국가들에 많이 보냈 으며,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다만, 지금은 특사파견이 대부분 중남미국가 대통령 취 임식 참석에 한정되고 있다.

(다) 국회인사

한국정부는 같은 기간 동안 국회의장, 부의장, 친선협회 회장 등 국회의원단을 22회 콜롬비아에 파 견하였다. 국회의원이 외국을 방문할 경우 통상 외교부에서 방문자료를 제공하고 일정을 주선해온 만큼, 동 방문이 양국관계증진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나, 이들의 주요 면담대상이 콜롬비아 의회관 계자들이었고 또 콜롬비아 국회의원들의 비교적 낮은 사회적 위상에 비추어 한국 국회의원 방문의 외교적 효과는 제한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라) 국제회의 참석 및 선거지지교섭

한국정부는 1970년부터 2007년까지 콜롬비아 개최 국제회의 참석 그리고 국제기구 지지교섭차원 에서 총 10회의 대표단을 콜롬비아에 파견하였으며, 그 중 3회는 특사 형식을 취했다. 유엔안보리 이 사국 선출지지교섭을 위한 방문이 2회 그리고 여수세계박람회 유치 활동을 위한 방문이 5회였다. 나 머지 3회는 국제회의 참석을 위한 것이었다.

(마) 군 관계자

콜롬비아가 중남미에서 한국전에 병력을 파견한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양국 간 군관계인사의 교

(10)

류가 비교적 많았다. 한국 고위 국방관계자들이 1970년부터 2007년까지 총 6회 콜롬비아를 방문하였 다. 1973년에는 한국전참전비 준공식 참석차 주멕시코 대사를 역임한 배의환 특사가 방문하였다.

(바) 현직 차관급이상

특사, 국회 관계자 및 군 관계자들의 콜롬비아 방문은 주로 의전적 성격이고, 또 국제회의 참석이 나 국제기구지지교섭을 위한 방문도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인 만큼, 이를 근거로 양국관계를 평가하 기는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실질적인 양자협력관계를 평가하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현직 고위관계자 들의 비의전적인 방문 횟수가 중요하다. 1970년부터 2007년까지 순수한 양자협력을 위한 현직 차관급 이상 한국인사의 콜롬비아 방문은 총 7회로, 그 중 동력자원부 차관이 1980년과 1983년 2회에 걸쳐 콜 롬비아를 방문한 것이 주목된다. 그러나 38년 간 현직 차관급 인사의 방문이 6회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어떠한 이유가 있었던 간에-한국정부의 대콜롬비아 관계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 로 해석할 수 있다.

(2) 콜롬비아➡한국

(가) 정부 고위인사

콜롬비아 측으로부터는 1970년부터 2007년까지 대통령 2회, 부통령 2회 및 외교장관 2회의 방한이 이루어졌다.

콜롬비아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비르힐리오 바르꼬(Birgilio Barco) 대통령이 1987년 9월 8일에 서 18일까지 방한하였다. 당초 9월 8일에서 10일간 방한예정이었으나, 서울 도착 전 경유지인 앵커리 지에서 발생한 복통이 서울도착 후 장 천공에 의한 복막염으로 판명되어 서울대 병원에서 봉합수술 을 함에 따라 요양을 위해 서울체류기간이 늘어났다. 한국정부는 귀국하는 항공편에 외교부 의전장 과 서울대병원 의사 및 간호사를 동행토록 하였다.

동 방한 시 한국으로서는 평화통일 정책에 대한 지지확보,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의 우리입장 지지,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지지, 비동맹에서의 지지기반 확보 그리고 우리기업의 콜롬비아 진출여건 조성에 관심을 가졌다. 콜롬비아로서는 한국의 콜롬비아 제품 수입 확대, 한국기업의 투자유치, 양국 간 경제협력 증진에 관심을 보였다. 방한기간 동안 양측 간에는 과학협력, 콜롬비아 잠업개발, 연초재 배협력에 관한 합의가 있었다(외교부 내부자료).

(11)

에르네스토 삼페르(Ernesto Samper) 대통령은 1996년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국빈 방한하였다.

콜롬비아측은 양국 간 무역불균형 해소를 위한 한국 측의 커피, 꽃 등 수입확대, 콜롬비아 인프라 건 설 및 유전개발에 한국기업의 참여, 경제협력 제공, 콜롬비아의 APEC 가입에 대한 지지 등을 요청하 였으며, 양측은 이중과세방지협정 및 투자보장협정을 조속체결하기로 하였다(외교부 내부자료).

(나) 상·하원의원

1970년부터 2007년까지 콜롬비아 상·하원으로부터 총 38회의 방한이 이루어졌으며, 그 중 하원의장 6회 및 상원의장 5회의 방한이 이루어졌다. 한국과 더불어 콜롬비아 측에서도 의회인사 교류가 가장 활발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콜롬비아 인사들의 방한이 많았던 것은 한국 국회가 초청프로그램을 잘 운영했기 때문이다.

(다) 국제회의 참석, 언론인 및 군 관계자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행사에 콜롬비아 측에서 6회 참석하였으며, 콜롬비아 주요언론의 편집국장 등 언론인들의 방한도 5회 이루어졌다. 콜롬비아 군 관계자들의 방한도 7회 이루어졌는데 이는 콜롬 비아의 한국전참전에 따른 유대관계 형성과 한국정부의 국군의 날 행사 초청 때문이었다.

(라) 현직 차관급이상

한-콜롬비아 양자협력을 위한 콜롬비아 차관급 이상의 방문은 18회 이루어져 한국 측의 7회 방문 보다는 2배 이상 된다. 이는 대부분 한국정부의 여행경비 부담에 의한 방한초청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우리베 대통령 집권기간(2002-08) 11회(2007년까지는 4회)의 각료이상 고위인 사 방한이 주목되는데, 이 시점이 한-콜롬비아관계의 변환기였기 때문이다.

라. 무역 및 투자

한국과 콜롬비아 간 교역량은 서서히 증가되어왔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1984년을 제외하고는- 양국교역량이 대체로 1천만 불에서 3천만 불 대를 유지하였으며, 1992년 약 1억불 가까이 도달 하였 다.

한국은 1984년부터 1986년 까지 3년간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매년 흑자 기조를 유지하였으며, 콜 롬비아의 대한국 수출 규모는 2003년까지도 1억불을 넘지 못하였다(<표 1> 참조).

(12)

한국의 대콜롬비아 투자는 매년 수백만 불 정도이거나 아예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은 해도 있는 등 미미한 수준을 보였다. 콜롬비아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숫자도 2006년 까지 5개(현대종합상사, 삼성전 자, LG전자, 레오콘 및 세라젬) 정도였다.

마. 주요협정

1962년 수교이후 2007년까지 정부 간 협정으로는 문화협정(1967), 사증면제협정(1981), 과학기술협 력협정(1981) 및 무역협정(1985)이 있다. 이 중 비자면제협정은 콜롬비아의 마약문제로 인하여 콜롬 비아 국민들에게 비자면제를 부여하는 나라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일찍이 체결되었는바, 이는 지금 까지도 콜롬비아 국민들이 한국에 대해 우호적 감정을 갖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바. 대콜롬비아 무상원조

한국의 대콜롬비아 무상원조는 자연재해 구호금 지원, 국산기자재(경운기, 순찰차, 앰뷸런스, 컴퓨 터 등) 제공, 연수생 초청, 전문가 파견 형식으로 추진되어 왔다. 지원 금액은 2007년까지 매년 10-30 만 불선에서 이루어졌다.

4. 전통적 우호협력관계 평가 및 관계제약 요인

콜롬비아는 중남미국가들 중에서 제5위 영토면적, 제3위 인구규모, 제3위 GDP 규모, 원유, 석탄, 니켈, 금 등 풍부한 광물자원 그리고 중남미에서 유일한 한국전 참전국이라는 지위 등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콜롬비아 관계는 2000년대 중반까지는 답보상태 즉,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정부는 197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이 남한에 비해 경제적 및 군사적 우위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는 생존을 위한 북한과 정통성 대결을 벌일 수 밖에 없었고 또 안보외교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한국외교는 미국 등 서방국가에 편중되었

(13)

으며, 여타 국가들은 남북대결외교에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중남미국가 들과도 실질적인 협력외교를 적극 추진할 여력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1962년부터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에 힘입어 1970년대 중반부터 경제적으로 북 한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유엔에서도 남북대결이 소강국면을 맞자 한국의 외교는 4강 외교를 축으로 하면서도 다변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정부의 중남미 지역에 대한 관심은 1991년 노태우 대 통령의 멕시코 방문 그리고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과테말라,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및 페루 5개 국 방문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 결과로 한국 외교부에 중남미국 이 설립됨으로써 대중남미외교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외교통상부 2009, 87). 그 때까지는 대중남미 외교업무를 미주국(American Affairs Bureau)에서 미국 및 캐나다 외교업무와 같이 관장해 온지라 중남미지역은 대미국 외교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한국의 대중남미외교가 활성화 국면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는 그 혜택 을 향유하지 못하였다. 내전으로 인한 치안문제가 한국 고위인사 및 기업인들의 콜롬비아 방문에 큰 제약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콜롬비아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파라과이, 과테말라 등과 같이 우 리 동포들의 중점거주지역도 아니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주요 관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콜롬비아는 중남미에서 유일한 한국전 참전국임으로 인해 의회 및 국방 분야 인사교류가 제 한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한국정부의 초청케이스에 의한 콜롬비아 고위인사들의 방한이 지속되었 으나 이는 실질적인 양자현안 협의보다는 전통적인 협력관계를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외교행위로 보 는 게 보다 적절할 것이다.

5. 실질적인 협력관계로의 변화

가. 한-콜롬비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설정

2011년 9월 콜롬비아 산토스 대통령의 국빈방한을 계기로 한-콜롬비아 관계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Asociación Estratégica de Cooperación)로 격상되었다.

(14)

한국정부는 주요국가와의 양자관계를 규정하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는 전략동맹(Strategic Alliance)(미국)에 이어 두 번째 카테고리에 들어가며 2010년 1월 현재 한 국은 단지 3개국(중국, 러시아 및 베트남)과만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설정하였다. 현재 중남미국 가 중에서는 멕시코와 2005년 전략적 동반자관계(Strategic Partnership)를 설정하였으며, 2004년 브 라질, 아르헨티나 및 칠레와는 21세기 공동번영을 위한 포괄적 협력관계(Comprehensive Cooperative Partnership for Common Prosperity in the 21st Century)를 설정하였다(외교통상부 2010). 페루와도 2012년 포괄적 전략동반자관계(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ship)를 수립하였다.

나. 대콜롬비아 관계변화 지표

(1) 교역 및 투자규모

2000년부터 중남미 경제가 안정적인 성장을 보임에 따라 한국의 대중남미 교역액도 2002년 120억 불 수준에서 2008년 470억불을 넘어섰으며 2011년에는 603억불을 기록했다. 그 이후 세계경제의 침체 로 주춤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2013년에는 546억불을 기록하였다. 중남미와의 교역액은 한국 전체 교역액의 5-6%를 점유한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한-콜롬비아 교역량은 1992년까지 1억불에 못 미쳤으며 1993년부터 2003 년까지는 2-4억불 수준을 유지하였다. 2004년부터 교역량이 대폭 증가하여 같은 해 565백만 불 그 이 듬해인 2005년에는 761백만 불을 기록하였다. 이어 2006부터 3년간은 매년 11-12억불 선을 유지하였 다. 2011년 약 20억불로 상승하였다가 2013년에는 세계경제침체 현상으로 15억불 수준으로 하락하였 다. 한-콜롬비아 교역액은 최근 20년 간 15-20배 증가했다.

수백만 불 이하였던 한국의 대콜롬비아 투자규모는 2005년 2,000만 불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굴곡을 보이다가 2010년 3,800만 불로 증대되었으며 2011년부터 1억불대로 진입하였다. 이와 같은 한 국의 대콜롬비아 투자 확대에는 2009년 12월 시작한 한-콜롬비아 FTA 협상이 영향을 미쳤을 것임에 틀림없다. 콜롬비아의 대한국투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미미한 수준이다(<표 1> 참조).

(2) 인적교류 및 기업진출 규모

한국정부 고위급인사의 콜롬비아 방문은 2009년부터 두드러지게 확대되었다. 2009년 한 해에만 지 식경제부, 재정기획부 및 외교부 차관이 콜롬비아를 방문하였다. 2011년에도 지식경제부, 국방부, 국

(15)

토해양부 차관이 방문하였으며, 차관급 관료인 관세청장도 방문하여 콜롬비아 관세시스템 현대화 문 제를 논의하였다. 2012년도에는 수교 50년 만에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콜롬비아 를 국빈 방문하였고, 김성환 외교장관도 최초로 콜롬비아를 공식 방문하여 콜롬비아가 한국의 대중 남미외교에 중심축으로 부상하였다.

콜롬비아 측으로부터도 2008년 이후 정부 고위인사의 한국방문이 확대되었다. 2008년에 외교장관, 광물에너지장관 및 통신장관이 방한했으며, 2009년 및 2010년에도 각각 2명 및 3명의 각료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2011년은 콜롬비아 산토스 대통령이 국빈 방한하였고 대통령 국빈방한단과 별개로 7명 의 장관 및 차관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와 같이 콜롬비아 각료들의 한국방문이 빈번하게 이루어지 자 각료들 사이에서 한국을 방문하지 않으며 각료회의에서 소외된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2012년 도에도 앙헬리노 가르손(Angelino Garzón) 부통령과 5명의 장·차관급인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와 같이 양국관계가 급속히 발전됨에 따라, 콜롬비아 마리아 앙헬라 올긴(María Ángela Holguín) 외교장관은 2012년 콜롬비아 외교활동을 결산하는 부내 회의에서 한국을 콜롬비아와 양자관계가 가 장 활발했던 국가로 지명하였다(<표 1> 참조).10)

2011년부터 정부 고위급인사들 뿐만 아니라 실무선에서의 민간 및 정부대표단의 방문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주 콜롬비아 대사관에서 콜롬비아 방문활동을 지원한 한국대표 단은 매년 각각 53회, 64회 및 86회였다. 콜롬비아 정부대표단의 한국방문도 2012년 26회 그리고 2013 년에 29회 성사되었다(주 콜롬비아 한국대사관 내부자료).

특히, 양국 대통령의 교환방문이 이루어지고 2013년 2월 서울에서 양국 통상장관 간에 한-콜롬비 아 FTA 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한국기업들의 콜롬비아 진출 붐이 조성되었다. 2010년 말까지 14개 한 국기업이 콜롬비아에 현지법인 또는 지사 형태로 진출하였으나 2013년 말 36개로 확대되었다(주 콜 롬비아 한국대사관 내부자료). 특히 한국의 대형건설기업들(현대건설, 대우건설, GS건설, 포스코건 설, 현대엔지니어링, 삼성C&C)이 모두 보고타에 지사를 설치하여 공공사업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3) 정부간 협정 및 기관 간 MOU

2007년 이후 양국 정부 간에 체결된 협정으로는 투자보장협정(2010), 이중과세방지협정(2010),

10) 콜롬비아 외교부 Sandra Salamanca 아태국장이 언급하였다.

(16)

EDCF 차관협정(2010) 그리고 한-콜롬비아 FTA 협정(2013)이 있다. 이중 투자보장협정은 한-콜롬 비아 FTA에 그 내용이 편입되어 별도로 발효시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중과세방지협정은 현재 동 협정 발효를 위한 한국 측의 국내조치는 종료된 상태이며, 2014년 6월 현재 콜롬비아 의회 및 헌법재 판소의 승인절차가 종료되어 콜롬비아 정부가 조만간 한국정부에 국내조치 종료를 통보해 오면 발효 될 것으로 본다.

한-콜롬비아 관계가 실질적인 협력관계로 발전함에 따라 많은 협정 및 MOU가 체결되었다. 주 콜 롬비아 대사관 통계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3년 까지 양국 간에는 36개의 기관 간 약정 또는 협정이 체결되었다(주 콜롬비아 한국대사관 내부자료). 특히 2011년 9월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 국빈방한 시 양국 간 고위정책협의회 설립 MOU 등 공공 및 민간분야에서 10개의 MOU가 체결되었다(주 콜롬 비아 한국대사관 내부자료). 그 이외에도 2014년 6월 현재, 양국 간에는 검찰협력 MOU, 치안협력 MOU, 수산생물검역약정, 보건의료협력 MOU, 한국산업인력공단과 콜롬비아 국립직업훈련원 (SENA) 간 협력 MOU, 운전면허상호인정협정 등이 추진 중이다.

(4) 한-콜롬비아 FTA

한-콜롬비아 FTA 체결은 양국관계를 명실상부한 실질적 협력관계로 격상시키는 전략적 의미를 지닌다. 동 협정은 2009년 12월 협상을 개시한 이래 7회의 공식협상 끝에 3년여 만에 2013년 2월 서명 되었다. 이 협정이 발효되면 현재 15-20억불대의 양국 교역량은 수년 내 한-칠레 또는 한-멕시코 수 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현재 1억5천만 불 내외의 대콜롬비아 직접투자도 대폭 확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협정이 발효되기 위해서는 양국의 국내절차가 필요하며 한국 국회에서는 2014년 4월 29일 동 협정 비준동의안이 통과되어 한국정부가 국내절차 종료를 콜롬비아에 통보한 상태다. 그러나 콜롬비 아 측에서는 2014년 국회의원 선거 및 대통령선거 일정으로 말미암아 의회비준이 지연되고 있으며11) 헌법재판소의 헌법합치심의도 남겨두고 있다.

11) 콜롬비아 상원 2위원회는 한-콜롬비아 FTA 비준동의안을 2013년 6월 19일, 그리고 상원 본회의는 2013년 11월 12일 통과시켰다. 그러나 콜롬비아 농민들의 FTA 반대 데모, 콜롬비아 대통령선거 등으로 말미암아 2014년 6월 20일 의회회기 종료 시까지 하원통과가 무산되었다. 따라서 콜롬비아 정부는 한-콜롬비아 비준 동의안을 2014년 7월 20일 새로 시작되는 의회에 다시 제출할 예정이며 콜롬비아 의회는 상원2위원회-상 원전체회의-하원2위원회-하원전체회의 심의절차를 시작할 예정이다.

(17)

(5) KOICA 사무소 설립 및 무상원조

콜롬비아에 대한 한국의 무상원조규모는 2008년에 처음으로 100만불을 넘어섰으며, 2009년 보고타 에 KOICA 사무소가 설립되고 콜롬비아가 한국정부의 26개 ODA 중점협력대상국에 포함되면서 원 조규모가 대폭 확대되었다. 2010년 대콜롬비아 무상원조액은 640만 불 규모였으며, 2011년부터 2014 년까지 매년 400만 불-700만 불 수준의 무상원조가 지원되고 있다.

2014년에는 6개의 프로젝트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 중 지뢰피해 등으로 인한 콜롬비아 군인 및 경찰 부상자 재활을 위한 한-콜롬비아 우호재활센터(CRI)건립 사업은 한국정부가 중남미지역에서 추진하는 최대 규모 ODA사업이다. 양자차원의 지원이외에도 한국정부는 UNDP 및 UNHCR과도 각 각 국내 피난민재정착지원 사업 및 저소득층 대상 취업 및 창업지원 사업을 시행 중이며, 국립도서관 역사자료 디지털 사업을 민관협력 사업으로 진행 중이다.

(6) 수출입은행 사무소 설립 및 유상원조

2011년 12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사업을 관장하던 한국수출입은행 사무소가 파나마에서 콜 롬비아로 이전되었다. 수출입은행 보고타사무소는 중미 및 남미지역을 모두 관장하며, 사무소 보고타 이전은 한국의 대중남미 유상원조사업에서 콜롬비아의 중요성과 콜롬비아의 전략적 위치를 감안한 결정이었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은 콜롬비아 교육부에 EDCF 기금에서 3천만 불 양허성 차관을 제공하여 ICT 교육역량강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LG CNS가 동 사업을 수주하여 콜롬비아 5개 지역에서 지역혁신센터(Regional Innovation Center) 설립 작업을 진행 중이다. 콜롬비아 정부는 이 센터에서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대상으로 ICT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다. 아울러 한국수출입은행은 Bancolombia 은행에 5천만 불 규모의 전대차관을 설립하여 한국 상품을 수입하는 기업들에게 융자를 제공하고 있다.

(18)

6. 협력관계 변화 요인

가 한국 측 요인

(1) 한국외교에서 중남미 지역의 부상

2000년대 들어서 대중남미 정상외교가 강화되고 이 지역과의 경제, 통상, 문화 교류가 강화되기 시 작하였다. 2004년 11월 노무현 대통령의 아르헨티나, 브라질 및 칠레 방문으로 한국의 대중남미 관계 가 전통적이 우호협력관계를 넘어서 자원협력 등 실질적인 분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노 무현 대통령의 2005년 9월 멕시코 및 코스타리카 방문, 2008년 11월 이명박 대통령의 페루 및 브라질 방문과 2010년 6월말 7월초 파나마 및 멕시코 방문 그리고 2012년 6월 멕시코 로스 까보스(Los Cabos) G-20 정상회의 및 리우 데 자네이루 리우+20 환경정상회의 참석 계기 칠레 및 콜롬비아 방 문으로 가속화되었으며, 중남미 대륙이 한국국민들의 주요 관심대상으로 부각되었다. 필자가 외교부 중남미국장으로 재직한 2010년 한해에만 한국과 중남미·카리브지역 간에 총 16회의 양자 및 다자정 상회담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대중남미 투자 및 교역량은 과거 총 투자 및 교역량의 3% 미만이었으나 2011년 경우, 한국 총 교역량의 5.6%(603억불) 그리고 총 해외누적투자량(1968-2011)의 7.8%(66억 불)를 차지하였다.

2011년 한국의 중남미지역 건설수주량도 전체 수주량의 11%(66억 불)를 차지하여 한국 외교에서 중 남미 지역의 비중이 현저하게 높아졌다.

(2) 콜롬비아의 전략적 중요성 재인식

콜롬비아는 중남미에서 유일한 한국전 참전국으로 한국정부나 한국국민들의 주요 관심대상국 자 격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으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정부가 남북대결에서의 우위확보 그 리고 한반도 주변 4강외교에 중점을 둠에 따라, 콜롬비아는 다른 중남미 지역국가들과 함께 오랜 기 간 동안 한국의 중점외교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통해 국가의 위 상이 증대되고 이에 따라 외교활동의 외연을 넓혀가면서 중남미 지역이 자원보유국인 브라질, 아르 헨티나, 멕시코 등을 중심으로 한국의 주요 진출대상으로 부각되었다.

한편, 한국은 최초로 중남미국가인 칠레와 FTA를 체결, 동 FTA가 2004년 4월 발효되었으며, 이어

(19)

2011년 8월 한-페루 FTA가 발효됨에 따라, 칠레와 페루가 중남미 지역에서 전략적 중심국가가 되었 다. 2009년 12월 한-콜롬비아 FTA협상이 시작되면서 콜롬비아에 대한 한국정부와 민간업계의 관심 이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콜롬비아가 중남미 유일의 한국전참전국이라는 사실은 경제적 및 정치적 측면에서 콜롬비아가 한국국민들에게 매력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한편, 콜롬비아는 내수시장규모, 지정학적 위치, 풍부한 자원, 우파정부의 전통 등 매력적인 요인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남미지역 중견국으로 국제무대에서 아시아의 중견국인 한국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은 점도 양국관계 발전에 우호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 콜롬비아 측 요인

(1) 내전종식 및 치안안정

콜롬비아가 한국의 대중남미 외교에 중심축으로 부상하게 된 이유로, 위에서 살펴본 한국 측 요인 도 중요하지만 콜롬비아 측 요인이 더 크다고 본다. 콜롬비아는 지금까지 50년 이상 내전에 시달려왔 고, 현재 쿠바 아바나에서 콜롬비아 정부와 최대 무장세력인 FARC12)와 평화협상을 진행 중에 있지 만 지금도 내전상태에 있다. 이에 따라 치안문제로 외국정부 고위인사들의 콜롬비아, 특히 보고타 방 문은 제한적이었으며 대외관계도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그러나 콜롬비아 무장 게릴라 세력은 현재 현저히 위축된 상태다. 이들의 근거지도 에콰도르 및 베 네수엘라 국경 그리고 태평양 연안 지역으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이제는 국토의 대부분이 접근이 가 능해졌으며 과거에 불가능했던 일부 지역에서의 경제활동도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외국 인 투자(FDI)가 콜롬비아에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최근 3년 간 매년 150억불 내외를 기록하였다. 세 계 신용평가 기관들도 콜롬비아의 국가신용도를 투자적격으로 상향조정하였다.

(2) 아시아중시 정책

아시아가 세계경제의 기관차로 부상하자 2010년 8월 출범한 산토스 대통령정부는 아시아 중시정책

12)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de Colombia)은 1964년 좌익사상을 기반으 로 조직되었으며 2000년을 전후로 조직원 수가 2만여 명 정도까지 확대되었다가 우리베(Uribe) 대통령 (2002-2008) 민주안보정책 및 산토스 현 대통령의 적극적인 게릴라진압작전으로 현재 조직원 수가 7-8천 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현재 FARC 조직은 콜롬비아 남부 및 동부 밀림 및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테러, 마약거래 등으로 일반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20)

을 중점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콜롬비아 외교부는 자체보고서에 2010년 4월 기준, 콜롬비아는 아시아 에 7개 외교망(presencia diplomática)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브라질 13개, 멕시코 11, 아르헨티나 10, 칠레는 9개를 가지고 있으며, 칠레, 페루 및 아르헨티나는 자국 수출의 10%이상을 아시아에 수출하 고 있는 반면, 콜롬비아는 단지 3%만을 아시아에 수출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콜롬비아의 대외정책에 서 아시아지역을 중요시해야한다고 적시하였다(Ministerio de Relaciones Exteriores 2012).

2014년 6월 현재 콜롬비아는 콜롬비아 기준 아시아 지역 내에 10개국(한국, 아랍에미리트, 인도, 인 도네시아, 이스라엘, 일본, 레바논, 말레이시아, 중국 및 태국)에 대사관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지역 파견외교관 수를 줄여 이를 아시아 지역으로 돌리고 있다. 콜롬비아는 2014년 6월 현재 한국과는 FTA를 공식서명하였고 일본과는 협상중이며 중국과는 타당성조사를 끝내고 숨을 고르는 중에 있다.

아울러 APEC 가입을 통해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3) 한국의 발전모델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 중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유일한 국가로 일컬어지 고 있다. 물론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 과 같은 정치체제도 경제발전에 성공을 거두기는 했으나 이들 은 도시국가 규모로 일반적인 규모 국가로는 한국의 유일한 사례다. 따라서 한국을 배우고자 하는 콜 롬비아 정부나 국민들의 열망이 매우 크다. 콜롬비아 국민들은 한국전쟁 당시 자기들이 도운 병력을 가난한 작은 나라가 세계에서 발전의 모델로 평가되고 있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콜롬비아 산토스 대통령은 자국의 교육제도 개혁을 언급할 때마다 한국의 교육 성공사례를 즐겨 언급한다. 콜롬비아는 한국을 아시아국가 중 처음으로 FTA 상대국으로 정하였다.

7. 결론

한-콜롬비아 관계는 1962년 수교 이전인 한국전 당시 콜롬비아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은 지금까지 양국 국민 간 유대관계를 강화하 고 한-콜롬비아 정부 관계를 공고하게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왔다.

(21)

그러나 수교 시부터 2006-08년까지 양국관계는 통상 및 투자 규모, 인사교류 현황 및 성격 등에 비 추어, 일부 실질적인 협력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찾아볼 수는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선, 즉 현상을 유지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같이 양국관계가 현상유지 형태를 보인 것은 한국이나 콜롬비아 모두 자국 내부의 핵심현안 에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으로서는 북한과의 대결에서 우위확보 및 4강 중심 안보외교에 치중했고, 콜롬비아로서도 무장게릴라와의 내전에 따른 국가안보 및 주권수호 에 온 국력을 집중했다.

이러한 양국의 현상유지 상황은 2006-08년 교역 및 투자 확대, 활발한 고위인사교류로 변화되기 시 작하였으며, 2009년 한-콜롬비아 FTA 협상이 개시되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나아가 2011 년 산토스 대통령의 국빈방한을 계기로 양국관계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되고, 2012년 이 명박 대통령의 최초 콜롬비아 국빈방문으로 양국관계는 1962년 수교 이래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양국협력 어젠다도 과거 교역 및 투자 중심에서 지금은 환경, 도시인프라, 방산, 문화, 학술, 경찰, 검찰, 금융, 과학기술 분야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최근 2-3년 간 한국기업이 3억불 규모의 콜롬 비아 3개 공공사업을 수주하였다. 2015년 경 한-콜롬비아 FTA가 발효되면 한-콜롬비아 관계는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콜롬비아는 한국보다 10-20년 정도 발전이 느리게 진행되고 있어 한국이 콜롬비아의 발전에 기여 할 수 있고 또 협력할 분야가 많다. 특히, 환경, 도시 인프라, 전자정부, 보건, 식품가공, 방위산업 등 분야에서의 협력이 유망하다. 또한 콜롬비아의 한국전 참전으로 형성된 양국 국민 간 유대감은 미래 의 양국관계를 밝게 해주는 가 장 큰 자산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러한 무형의 외교자산을 잘 관리하고 더욱 확대해나갈 필요가 있다.

(22)

《참 고 문 헌》

권기수. 1996. 『콜롬비아 편람』. 서울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외교통상부. 2004. 『콜롬비아 개황』.

외교통상부. 2009. 『한국외교 60년』.

외교통상부. 2010. 『우리나라의 주요국과의 양자관계규정』. (내부문서) 외교통상부. 2012. 『콜롬비아 개황』.

중남미 자원·인프라 협력센터. 2014. 『한-중남미 교역 현황』.

차경미. 2006. 『콜롬비아 그리고 한국전쟁』. 고양 : 한국학술정보.

Ministerio de Relaciones Exreriores. 2010. Implementación de la Estrategia de Inserción de Colombia en Asia-Pacífico 2011-2014.

Valencia Tovar, Álvaro., Puyana García, Gabriel. 2003. En Corea por la Libertad y por la Gloria.

Bogotá : Imprenta y Publicaciones de las Fuerzas Militares.

국가기록원. “재외한인의 역사.” http://theme.archives.go.kr/next/immigration/viewMain.do

■ 추종연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 스페인 마드리드 외교관학교 졸 주멕시코대사관 2등서기관 주스웨덴대사관 1등서기관

외교부 특수정책과 차석/외교정책실장 보좌관 주구주연합(EU)대표부 1등서기관

외교부 중미과장

주국제연합(UN)대표부 참사관 주아르헨티나대사관 공사참사관 남미자원협력센터 소장

국회사무처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파견국장 외교부 중남미국장

주 콜롬비아 대사(2011년 3월 – 현재)

참조

관련 문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방조의 수단, 방법은 원칙적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 에 방조행위는 그 인정범위가 매우 넓다. 따라서 방조범의 처벌범위가 확장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본 연구는 대학생의 대인간 외상경험이 가해염려 사회불안에 영향을 미치는 변인으로 거부 민감성과 분노억제에 초점을 두었 는데,

따라서 지방자치단체 특성에 맞는 기후변화대응 매뉴얼 개발 사업을 통한 지방자치단체의 기후변 화 대응 기본방침 마련이 필요함. 지역적

제1장에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산업안전보건에 있어서 국내와 주요 선진국의 노사참여시스템을 비교· 분석해 보는 본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에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적자원정책 범위의 불명확, 부처별 업무의 독자적 추진, 부처 간 중첩업무 조정상의 마찰,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실질적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7 차 문법 교과서의 겹문장 체계에서 대등하게 이어 진 문장과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은 서로 구별되며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을 , 부사절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유구는 서양화와 서양화법에 대해 알고 《화전 》의 사법,인물,계화 조에 인용하고 있다.이것은 단순히 알고 있는 것에 그치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신지체 학생의 주의집중 행동은 그들의 열악한 시 지각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이와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