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제 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자료집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제 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자료집"

Copied!
146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백제의 해양교류와 거점 제 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백제학회·국립해양박물관 공동학술회의. 2016년. 8월 26일(금) 13:00~17:50. 일. 시. 국립해양박물관 제1강의실. 장. 소. 백제학회·국립해양박물관. 주. 최.

(2)

(3) 제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식. 등. 순. 록 . 13:00~13:10. 1 부 개 회 식 . 사회 서 현 주(한국전통문화대학교). 개 회 사 : 정 재 윤(백제학회 회장) . 13:10~13:15. 환 영 사 : 김 주 식(국립해양박물관 운영본부장) . 13:15~13:20. 2부 주제발표. 제 1발표 :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기사를 중심으로. . 휴. •발 표 : 하 승 철(경남발전연구원). •발 표 : 오 동 선(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14:50~15:00 15:00~15:30. •토 론 : 이 정 호(동신대학교). 제 5발표 : 부안 죽막동 유적의 새로운 검토 - 출토 토기를 중심으로 •발 표 : 이 나 경(국립전주박물관). 14:20~14:50. •토 론 : 김 낙 중(전북대학교). 제 4발표 : 삼국시대 전남 서남부지역 왜계고분의 확산 과정과 의미. . 13:50~14:20. •토 론 : 이 근 우(부경대학교). 식 . . •발 표 : 박 재 용(충남역사문화원). 제 3발표 : 남해 남치리 백제고분의 출현과 그 배경 . . •토 론 : 정 진 술(해군사관학교). 제 2발표 : 백제의 대왜교섭과 항로 - 5~6세기를 중심으로. . •발 표 : 박 종 욱(고려대학교). 13:20~13:50. 15:30~16:00. •토 론 : 김 주 성(전주교육대학교). 휴식 및 장내정리 . 16:00~16:10. 3부 종합토론 . 16:10~17:50. 폐. 좌. 장 : 백 승 옥(국립해양박물관), 발표자 및 토론자 전원. 회 . 17:50.

(4)

(5) 목. 차. 제 1발표 :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기사를 중심으로. . •발 표 : 박 종 욱(고려대학교). . 007. . •토 론 : 정 진 술(해군사관학교) . 025. 제 2발표 : 백제의 대왜교섭과 항로 - 5~6세기를 중심으로. . •발 표 : 박 재 용(충남역사문화원). . 027. . •토 론 : 이 근 우(부경대학교) . 047. 제 3발표 : 남해 남치리 백제고분의 출현과 그 배경. . •발 표 : 하 승 철(경남발전연구원). . 049. . •토 론 : 김 낙 중(전북대학교) . 069. 제 4발표 : 삼국시대 전남 서남부지역 왜계고분의 확산 과정과 의미. . •발 표 : 오 동 선(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071. . •토 론 : 이 정 호(동신대학교) . 097. 제 5발표 : 부안 죽막동 유적의 새로운 검토 - 출토 토기를 중심으로. . •발 표 : 이 나 경(국립전주박물관) . 099. . •토 론 : 김 주 성(전주교육대학교) . 143.

(6)

(7)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박종욱 (고려대학교). 목 차 Ⅰ. 머리말. Ⅲ. 고구려의 해상 차단을 통해 본 백제의 항로. Ⅱ. 고구려의 서해 해상교통로 차단에 대한 검토. Ⅳ. 맺음말. Ⅰ. 머리말 百濟는 3세기 후반에 馬韓의 대표세력으로서 지위를 확립하고 馬韓主의 이름으로 西晉과 交涉하였. 다1). 그 후 4세기 후반에 처음으로 백제라는 국명을 가지고 東晉과 교섭을 진행한 이래로, 중국의 여 러 왕조들과 정치·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사실은『 三國史記』에 기록된 66번의 사신파견 기사2) 뿐 아니라 錢文陶器·중국 청자·중국 동전 등 백제 각지의 유물 출토 양상에서도 여 실히 증명되고 있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위치했던 지정학적 조건 상 백제와 중국 왕조의 교섭은 서해 바다를 통해서 이 루어졌다. 그러나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의 대립으로 인해 한반도 서북부와 요동 일대를 경유하는 해상교통로 활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백제는 중국과 계속해서 활발한 교섭을 벌이 고 있었던 바, 당시 어떠한 경로로 서해를 건너갔는지의 문제는 교섭의 목적과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교섭과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하는 작업인 동시에 당시 역사상을 이해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한반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항로는 크게 서해북부연안항로, 서해중부횡단항로, 서해남부사단항로 3 가지로 구분된다3). 그러나 각 항로의 개척 및 활용 시기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는 데,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양각색의 주장이 제기되었다4). 그러한 이해의 간극은 소략하고 한정된 내용의 사료, 항해술 등 해양기술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 박대재, 2006,『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景仁文化社, 149~152쪽. 2) ‌徐榮洙, 1981,「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 東洋學』11,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61쪽 및 신형식, 2007,「제2절 수·당과의 관계」,『百濟의 對外交涉』, 충청남도역사문화구원, 253쪽 참조. 3) ‌서해 항로에 대한 구분과 명칭은 논자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항로 명칭에 대한 검토와 정리는 정진술, 2009,『한국의 고대 해상교통로』, 韓國海洋戰略硏究所, 191~196쪽 및 고경석, 2011,「신라의 對中 해상교통로 연구 -중부횡단항로와 남부사단항로 개설 시기를 중심으로-」,『新羅史學報』21, 新羅史學會, 103~108쪽에서 충분하게 다루어졌다고 본다. 본고에서는 이에 따라 서해북부연안항로, 서해중부횡단항로, 서해남부사단항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4)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사는 정진술, 2009, 위의 책, 196~208쪽, 252~254쪽, 282~286쪽 참조.. 발표 01.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007.

(8) 그 중 선박의 구조, 항해법 등 해양기술과 관련된 문제는 해양사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필자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이며, 이에 관한 의미 있는 연구 성과도 이미 충분히 제시되었다고 본다5). 이에 본고에서는 항로 문제와 관련한 문헌 기록, 그중에서도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에 주목하여 논의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물론 기존 연구에서도 해상 차단 문제는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관련 연구의 경향을 살펴보면, 대체로 고구려의 영역 확장 및 해상교통로 차단을 항로 개척의 주요한 변수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의 한반도 서북부 및 요동반도 장악으로 인해 백제가 서해중부횡단항로6) 혹은 서해남 부사단항로를7) 새롭게 활용하기 시작했다고 보거나, 5세기 후반 고구려의 해상 차단을 계기로 서해중 부횡단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8). 또한 고구려의 영역 확장과 5세기 후반의 차단 사례 2 가지 모두를 변수로 상정하고, 서해중부횡단항로를 사용하다가 서해남부사단항로를 사용했다고 보기 도 한다9). 반면 고구려의 해상 차단 이후에도 해당 항로는 일정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즉 7세기 전반 고구려의 해상 차단 기사를 백제와 신라가 계속해서 서해북부연안항로를 사용했던 증거로 파악할 뿐, 시기적으로 바로 항로 개척과 연결시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10). 이와 같이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을 항로 개척의 기점으로 이해하거나, 반대로 지속적인 항로 사 용의 증거로 파악하는 등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은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의 차단 기사 및 해상교통로 차단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해보려는 시도는 백제의 항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유의미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에 고구려의 해상 차단이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 졌는지, 그 차단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차단을 항로 개척의 기점으로 볼 수 있는지 등을 검 토해보고자 한다. 한편 항로에 관한 다양한 관점은 관련 사료의 소략한 내용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몇몇 사료를 제. 5) ‌연안항해의 경우 육지나 섬을 눈으로 보면서 항해하는 視認距離 항해술을 기본으로 하며, 대양으로 나갔 을 경우에는 태양과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아 동·서·남·북의 正方向 항해술을 이용했던 것으로 이해된 다.(정진술, 2009, 위의 책, 139~147쪽) 선박의 구조와 관련해서는『宋書』倭國傳에 보이는 ‘舫’에 주목하여 두 척의 배를 橫梁으로 연결하고 그 위에 목판을 덧대어 하나의 배처럼 만든 것으로 파악한 후, 많은 양의 식량과 식수를 적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서해 횡단이 가능했다고 보는 견해가 최근 제출된 바 있다.(박순발, 2016,「백제의 해상교통과 기항지 -對 中國 航路를 중심으로-」,『百濟學報』16, 百濟學會, 18~19쪽) 6) ‌周裕興, 2008,「해상 교류로 본 중국과 백제의 관계」,『百濟文化』39,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54~56 쪽; 朴淳發, 2013,「連雲港 封土石室墓의 史的 性格」,『百濟硏究』57,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91~92쪽; 孫 光圻, 2013,「한당시기 중국과 한반도의 해상항로」,『百濟硏究』57, 9쪽; 박순발, 2016, 위의 논문, 10~11쪽; 임동민, 2016,「백제와 동진의 교섭 항로」,『百濟學報』17, 百濟學會, 99~106쪽. 7) 무함마드 깐수, 1996,「남해로의 동단 - 고대 한·중해로」,『장보고와 청해진』, 혜안, 252쪽. 8) ‌정진술, 2009, 앞의 책, 269~276쪽; 전덕재, 2013,「新羅의 對中·日 交通路와 그 變遷」,『역사와 담론』65, 湖西史學會, 164쪽. 9) ‌신형식, 2005,『백제의 대외관계』, 주류성, 105쪽 및 133쪽; 김인홍, 2011,「4~5세기 한·중 간 항로변화에 대한 검토 -교섭기사를 중심으로」,『문명교류연구』2, 한국문명교류연구소, 88~94쪽; 문안식, 2015,「백제 의 동아시아 해상교통로와 기항지」,『사학연구』119, 한국사학회, 122쪽 및 132~134쪽. 10) ‌權悳永, 1997,『古代韓中外交史』, 一潮閣, 200쪽; 강봉룡, 2009,「고대 한·중항로와 흑산도」,『東아시아 古代學』20, 東아시아古代學會, 8~9쪽; 고경석, 2011, 앞의 논문, 113~119쪽. 이 중 고경석은 7세기 전반의 해상 차단을 기점으로 신라가 서해중부횡단항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언급하기도 했지만, 백제의 항로 에 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또한 새로운 항로의 모색 시기와 일상적인 사용 시기를 구분하여 7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신라가 본격적으로 사용했다고 하였다.. 008. 제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9) 외하면, 대체로 출발지·경유지·도착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항로 관련 사료의 속성을 감안할 때, 해상교통로 차단기사는 항로의 경로를 그나마 가장 객관적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된다. 구체적인 차단 지점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경로가 고구려의 領海 혹은 그 인접한 곳을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통해. 먼저 해당 시기 항로의 경유지를 파악한 후, 그를 중심으로 전후 시기의 항로를 분석한다면, 백제가 활 용했던 항로의 모습을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에 Ⅱ장에서는 먼저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의 특징을 분석해보고, 그 배경과 성격을 살펴볼 것이 다. 이를 바탕으로 Ⅲ장에서는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에 놓고 백제의 대중국교섭 양 상을 검토한 후, 기존 연구 성과를 토대로 각 항로의 사용 가능성을 타진해봄으로써 백제의 항로를 대 략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한다.. Ⅱ. 고구려의 서해 해상교통로 차단에 대한 검토 서해를 횡단해야 하는 對中國交通路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해양기술적인 측면이다. 난파 와 표류 등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선박의 구조적인 안정성과 항해술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백제의 선박과 항해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百濟舶’의 존재11)와 백제를 경유하여 중국으로 향했던 倭 사신단의 항로12) 등으로 볼 때 당시 백제는 일정한 수준의 해양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기술적인 측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인문지리적인 환경, 즉 사행의 출발 당시 주변국과의 관 계이다. 주지하듯 백제는 故國原王을 전사시킨 371년 평양성 전투 이후 고구려와 극한 대립관계를 형 성하였으며, 554년 聖王의 전사 이후부터는 신라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된다. 寄港地의 확보는 원 거리 항해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데, 백제로서는 4세기 후반 이후부터 고구려와 신라에 의해 서해 의 북부 연안을 寄港地로써 쉽게 이용할 수 없었던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고구려와 신 라의 해상교통로 차단 또한 使行의 출발 단계부터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사안이었다. 실제로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는『 三國史記』에서 몇 차례 확인되고 있는데,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A-1. 文周王 2년(476) 3월 宋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되. 돌아왔다.13). A-2. 東城王 6년(484) 가을 7월 内法佐平 思若思를 南齊에 보내 조공하려 했으나, 약사가 西海에. 서 고구려 군사와 만나서 가지 못하였다14).. 11) ‌왜 조정은 652년에 安藝國에게 선박 2척을 건조하게 하였는데, 그 선박을 百濟舶이라 칭한 바 있다.(『日本書 紀』卷25, 孝德天皇 白雉 元年 是歲) 이를 통해 백제 특유의 형식을 갖춘 선박이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12)『宋書』卷97, 列傳57 夷蠻 東夷 倭國, “封國偏遠 作藩于外 …(중략)… 道逕百濟 裝治船舫” 13)『三國史記』卷26, 百濟本紀4 文周王 2年, “三月 遣使朝宋 髙句麗塞路 不逹而還” 14)『三國史記』 ‌ 卷26, 百濟本紀4 東城王 6年, “秋七月 遣内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遇髙句麗兵 不進”. 발표 01.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009.

(10) B-1. 眞平王 47년(625) 겨울 11월 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아울러 고구려가 길을 막고 조 공을 하지 못하게 하며, 또 자주 침입한다고 호소하였다15). B-2. 武王 27년(626) 唐에 사신을 보내 明光鎧를 바치고,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上國에 조공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호소하였다. (唐) 高祖는 散騎常侍 朱子奢를 보내와서 조서를 내려 우리와 고구려가 그 원한을 풀도록 달랬다16). B-3. 榮留王 9년(626)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당에 보내 황제에게 글을 올리기를“고구려가 길 을 막아 조공하지 못하게 하고 또 자주 침략합니다.” 라고 하였다. 황제가 산기시랑 주자사를 보 내 지절을 가지고 화친을 권하게 하였다. 왕은 표를 받들어 사죄하고 두 나라와 화평할 것을 청 하였다17). B-4. 眞德王 2년(648) 春秋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巡邏兵을 만났다. 춘추를 따 라간 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는데, 순라병이 보고 그를 춘추로 여기고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18).. 위의 A·B군 사료에서 주목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로 해상교통로 차단의 주체가 모두 고 구려라는 점이다. 백제는 물론 신라(B-1)까지도 해상교통로 상에서 고구려의 방해를 받고 있다. 이것 은 곧 해당시기에 백제, 신라의 항로가 어느 특정지점에서 고구려 수군의 활동 범위를 지나가고 있음 을 잘 보여준다. 항로 추정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고구려가 삼국의 각축전 속에서 백제와 신라의 사행을 차단하는 모습은 일 견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6세기 중엽 이후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백제와 신라 또한 서해안 일대에 서 경계를 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상 차단과 관련하여 양국 간의 마찰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 다. 유독 고구려의 차단 사례만이 남아있는데, 사행로 차단과 관련한 백제와 신라의 입장이 고구려와 달랐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해상 교통로 차단 사료가 크게 두 개의 시점으로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즉 A군 사료는 476년부터 484년까지 5세기 후반에 해당되며, B군 사료는 625년부터 648년까지 7세기 전반으로 집약 된다19). 그 외의 시기에도 백제의 대중국교섭이 활발했던 점을 고려해본다면, 고구려의 해상 교통로. 15)『三國史記』 ‌ 卷4, 新羅本紀4 眞平王 47年, “四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因訟高句麗塞路 使不得朝 且 數侵入” 16)『三國史記』 ‌ 卷27, 百濟本紀5 武王 27年, “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髙句麗梗道路 不許來朝 上國髙 祖遣散騎常侍朱子奢 來詔諭我及髙句麗 平其怨” 17)『三國史記』 ‌ 卷20, 高句麗本紀8 營留王 9年, “九年 新羅百濟遣使於唐 上言 髙句䴡閉道 使不得朝 又屡相侵 掠 帝遣散騎侍郎未子奢 持節諭和 王奉表謝罪 請與二國平” 18)『三國史記』 ‌ 卷5, 新羅本紀5 眞德王 2年, “春秋還至海上 遇高句麗邏兵 春秋從者溫君解 高冠大衣坐於船上 邏兵見以爲春秋 捉殺之 春秋乘小船至國” 19) ‌다만 사료 B-4의 경우, 되돌아오는 길에 고구려의 순라병을 만났다는 점에서 출발 단계에서 차단당했던. 010. 제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11) 차단 시기는 비교적 한정적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물론 사료 상에 기록되지 않은 해상교통로 차단 사실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해상 차단 사실이 특정한 두 시점에서만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점은 오히려 당시 특수했던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 는 것이 아닐까 의심케 한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두 시기에 고구려가 해상교통로를 차단했던 배 경과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당시 고구려의 국제정세 및 백제의 외교정책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는데, 시기별로 나누어 각각의 내용을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5세기 후반의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고구려와 北魏는 430년대에 北燕을 둘러싼 갈등을 겪은 이 후 약 20여년 이상 긴장국면을 맞고 있었다20). 그 후 고구려는 462년 3월에 북위와의 교섭을 재개하였 는데, 465년부터 523년까지 거의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밀도 높은 관계를 형성하였다. 표면적으로 볼 때 당시 양국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전개된 듯하나, 갈등과 충돌을 겪는 등 양국 간의 긴장이 높아지는 경우도 많았다21). 각자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병존하는 것에 주력함으로써 양국 간의 군사적 충돌은 일 어나지 않았지만, 고구려와 북위는 서로를 잠재적인 적대세력으로 여기고 긴장과 경계를 놓지 못했던 것이다22). 한편 백제는 일찍부터 東晋·송 등 南朝와 교섭을 해왔지만, 북조와의 교섭은 이루어진 바 없다. 그 런데 472년에 백제는 북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관련 사료는 다음과 같다. C. 蓋鹵王 18년(472) 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藩屛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중략)… 지금 璉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 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馮族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 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략)…”23). 앞서의 사료와 다른 성격을 보인다. 또한 정상적인 항로를 벗어나 고구려 領海의 깊숙한 곳으로 표류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사행로를 차단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이 경우, B-1·B2·B-3 사료는 같은 내용을 다룬 것으로서 625~626년 시점으로 한정된다. 20) ‌고구려는 439년부터 462년까지 약 20여년간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는데, 당시 北燕 문제로 인해 갈 등을 겪었던 양국의 관계는 그 이후 상당 기간 경색되었다.(김철민, 2016,「고구려 長壽王代의 對宋外交와 그 背景」,『韓國史學報』63, 高麗史學會, 183쪽) 또한 이 시기 고구려는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宋과의 교섭 을 추진한 바 있다.(임기환, 2002,「南北朝期 韓中 冊封·朝貢 관계의 성격」,『韓國古代史硏究』, 한국고대 사학회, 20쪽) 21) ‌472년 백제의 청병 요청과 관련한 사신 통행 문제, 475년 혼인문제로 인한 사신억류, 492년 북위의 고구려 세자 입조 요구, 479년 柔然과의 地豆于 분할로 인한 문제, 480년 고구려와 남제의 통교 및 사신단 압송 문 제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임기환, 2002, 위의 논문, 23~24쪽 참조. 22) ‌노태돈, 2006,「고구려와 북위 간의 조공·책봉관계에 대한 연구」,『한국고대국가와 중국왕조의 조공·책 봉관계』, 고구려연구재단, 65~79쪽. 23)『三國史記』 ‌ 卷25, 百濟本紀3 蓋鹵王 18年,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犲狼隔路 雖世承靈化 莫 由奉藩 …(중략)…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之期 假手之秋也 且馬士 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懐首丘之心 天威一舉 有征無戰 …(하략)…”. 발표 01.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011.

(12) 사료 C에 보이는 백제와 북위의 교섭은 이 시기에 들어와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큰 의미를 가 진다24). 표문의 내용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바로 백제가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는 점이다. 광개토왕·장수왕대의 적극적인 南進 정책으로 守勢에 몰렸던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請兵使 를 파견하여 적극적인 군사외교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북위와 대치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제와 북위의 교섭에 크게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에 더하여 백제가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기까지 하였는데, 백제의 군사요청은 비록 북위의 정중한 거절로 실패하였지만 고구려에게 큰 자극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일단 그 대응으로 북위에 사신을 거듭 파견하여 북방의 안전을 도모하였다25). 특히 북위에 보내는 조공품의 양을 이전에 비해 2배로 늘리기도 하였는데26), 이는 북위와의 갈등요소를 없애는 동 시에 백제의 대북위외교에 대응하는 정책이었다27). 결국 고구려는 475년에 백제의 수도인 漢城을 전 격적으로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그 결과 백제와 고구려의 남방 경계는 한강 이남에서 형성되었다. A군 사료에 보이는 고구려의 해상 교통로 차단은 이와 같은 역사적 전개과정 직후에 벌어진 일로, 백제 외교정책과 해상 차단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즉 백제가 수세에 몰린 상황을 타개하기 위 해 북위에 접근하여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자, 고구려가 이에 강력하게 군사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백 제의 사행로 차단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이해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해상 차단(A-1)이 있었던 476년 직전에는, 고구려가 북위와의 婚事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 에 북위 조정이 사신 程駿을 파견하여 이에 강력히 항의하자 고구려 조정을 정준을 억류·핍박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28). 또한 사료 A-3 이전에도 고구려가 479년 柔然과 함께 地豆于 분할을 시도하 여 내몽고지역에 대한 북위의 권위를 실추시킨 바 있으며29), 480년에는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가 산동 지역의 光州에서 북위군에게 붙잡혀 수도로 압송된 사건도 있었다30). 이렇듯 해상교통로 차단 사 건은 고구려와 북위 간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던 때에 발생하였는데, 472년 군사청병과 같은 백제의 대 중국교섭을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31). 7세기 전반의 상황을 보여주는 B군 사료의 맥락도 앞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中原을 통일하고 일원 적인 제국을 형성한 隋의 출현은 고구려에게 큰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수가 612년부터 몇 차. 24)『魏書』 ‌ 卷100, 列傳88 百濟에 따르면 472년 백제의 견사에 대해 “始遣使上表云云”이라 하고 있는데, 이로 볼 때 당시 처음으로 백제와 북위 간의 교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노태돈, 2006, 앞의 논문, 69쪽) 이와 달리 상표문 분석을 통해 472년 이전, 구체적으로 毗有王代에 백제와 북위가 이미 교섭을 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노중국, 2012,『백제의 대외 교섭과 교류』, 지식산업사, 164쪽) 25)『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는 472년 2월부터 475년 8월까지 총 8차례에 걸쳐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26)『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60年,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自此已後 貢獻倍前 其報賜亦稍加焉” 27) 노태돈, 2006, 앞의 논문, 69쪽. 28)『魏書』卷60, 列傳48 程駿 및 卷100, 列傳88 高句麗. 29)『魏書』卷100, 列傳88 契丹 및 庫莫奚. 30)『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68年, “王遣使餘奴等 朝聘南齊 魏光州人 於海中得餘奴等 送闕” 31) ‌물론 당시 백제와 왜의 교섭대상은 송·남제 등의 남조 정권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남조 정권에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사청병과 같은 외교정책을 추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입장에 서 볼 때, 백제의 사행 대상이 북위인지 남조 정권인지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행선지와 관계없이 백제의 대중국교섭을 방해하기 위해 해상교통로 차단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012. 제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13) 례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는 등 양국의 대립관계는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는데, 수의 공격을 막아냈으 나 대규모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는 피할 수 없었다. 당시 백제의 대수외교를 살펴보면, 이는 기본적으로 고구려를 견제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32). 특 히 백제는 598년에 수의 고구려 공격을 알고 軍道를 자청하였으며33), 607년과 611년에는 각각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거나34) 軍期를 요청하는35) 등 고구려 견제를 위한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여기에 신라 까지 가세하여 608년과 611년에 고구려 원정을 위한 군사를 요청하기도 했다36). 이와 같은 백제·신 라의 적극적인 외교는 고구려 정벌을 앞둔 수의 이해관계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반면 고구려에게는 수와의 국제관계에서 상당한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교섭 직후에 단행되었던 고구려의 공격은37) 백제와 신라의 청병외교에 대한 군사적 응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군사적 대응과 아울러 이 시기에도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이 추진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나, 관련 사료는 보이지 않는다38). 다만 B군 사료와 같이 618년 唐의 건국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이 남아있을 뿐 이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대당외교는 기본적으로 대수외교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갔다고 이해되는 바39), 고구려 견제를 기본노선으로 하는 양국의 대당교섭은 고구려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문 제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가 양국의 사행로를 차단하는 일종의 무력시위를 벌였던 것이 B군 사료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40).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앞서 제시한 A·B군 사료의 배경은 대체로 비슷한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가 중국왕조와의 교섭을 통해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을 때, 그 해당시기 에 고구려의 군사적인 대응과 아울러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료에 남아있는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만을 놓고 볼 때, 그 차단의 배경과 목적이 비교적 선명하게. 32) ‌盧重國, 1981,「高句麗·百濟·新羅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誌』28, 연세대학교 국학 연구원, 98쪽. 33)『三國史記』卷27, 百濟本紀5 威德王 45年, “王聞隋興遼東之役 遣使奉表 請爲軍道” 34)『三國史記』 ‌ 卷27, 百濟本紀5 武王 8年, “八年 春三月 遣杵率燕文進 入隋朝貢 又遣佐平王孝隣 入貢兼請討 髙句麗 煬帝許之 令覘髙句麗動靜” 35)『三國史記』 ‌ 卷27, 百濟本紀5 武王 12年, “隋煬帝將征髙句麗, 王使國智牟入請軍期, 帝恱厚加賞錫, 遣尚書 起部郎席律, 來與王相謀” 36)『三國史記』 ‌ 券4, 新羅本紀4 眞平王 30年, “三十年 王患高句麗屢侵封埸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 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 乃述以聞” 및 眞平王 33年, “三十三年 王遣使隋 奉表請師 隋煬帝許之 行兵事在高句麗紀” 37)『三國史記』 ‌ 에 의하면, 598년 9월에 백제의 대수 교섭 사실을 듣게 된 고구려가 변경을 침략하였으며, 607 년 교섭 직후에도 고구려가 백제의 松山城과 石頭城을 습격한 바 있다. 신라의 경우에도 乞師表를 올린 608년 그 해에 북쪽 변경 및 牛鳴山城을 침략 당했다. 신라와 백제 양국이 정벌을 요청했던 611년의 경우, 고구려는 곧 벌어질 수와의 전쟁에 대비하느라 대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8) ‌직접적인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598년과 607년에 단행된 고구려 공격(위의 각주 참조)은 서해를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영역적으로 볼 때, 당시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신라가 한강유역 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의 공격은 서해 해상교통로 차단과 관련 있는 행위로 생 각해볼 여지도 있다. 39) ‌盧重國, 1981, 앞의 논문, 98쪽; 박윤선, 2006,「백제와 중국왕조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 현황과 과제」,『百 濟文化』45,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85~86쪽. 40) ‌앞서 각주 18번에서 사료 B-4의 성격이 B군의 다른 사료와 차이를 보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같은 관점에 서 사료 B-4를 고구려의 적극적인 해상교통로 차단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보기 어려울 듯싶다.. 발표 01.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013.

(14) 드러나며, 고구려 정벌을 요청했던 백제의 외교정책 기조가 해상교통로 차단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 였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백제의 대중국교섭에서 고구려 정벌을 운운하는 외교정책의 기조가 노 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 고구려가 군사적인 대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평소 활동범위를 넘어서 백제 의 항로를 적극적으로 차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항로 차단 지점이 고구려 수군의 일반적인 활 동 범위에 속한다고 한다면, 사료 상에서 ‘路’·‘道路’·‘道’라고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해상교통로 차단은 고구려가 얼마나 적극적인 해상 정책을 수립했는지의 문제와 직결되며, 그 이면에는 당시 백제와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각국의 외교정책이 중요한 문제로서 작용하였다 고 여겨진다. 다른 사례이나, 그 이전 시기와는 다르게 백제와 고구려가 643년에 화친을 맺은 후 신라 의 사행로 차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41)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해상교통로 차 단 기사에 내포되어 있는 국제정세와 관련한 특수성을 감안해야 하며, 몇 차례의 차단 사건을 일반화 하여 전 시기에 걸친 일반적인 양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좀 더 신중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42). 한편 사료 A·B군의 사례와 같이 고구려가 특정 시기에 해상교통로 차단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경 우, 그에 대한 백제의 대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항로를 모색·개척하는 방법이다. 차단의 위험 자체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이라 할 수 있는데, 다만 해당경로의 지형지물에 대한 정보·해로 관련 지식 등 항해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 한 다양한 해양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 반면 기존 항로를 그대로 이용했을 가능성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해상교통로 차단을 적극적으로 시 도하더라도, 해당 항로를 완벽하게 봉쇄하기에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백 제의 교섭 시도가 언제 이루어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백제의 교섭 양상을 보면, 사신 파견이 매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출발시기도 4월과 5월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고르게 나타나는 편 이다43). 따라서 언제 출현할지 모르는 백제의 使臣船을 막기 위해서는 강화된 경계 태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데, 예측불가능한 작전 속에서 소모되는 군사력과 비용 문제도 고려되어야 한다.. 41)『三國史記』 ‌ 卷28, 百濟本紀6 義慈王 3年, “冬十一月 王與髙句麗和親 謀欲取新羅党項城 以塞入朝之路 遂 發兵攻之 羅王德曼遣使 請救於唐 王聞之 罷兵” 42) ‌A·B군 사료 이외의 시기에 백제는 주로 남조와의 교섭에 주력하였는데, 남조와의 교섭은 고구려에게 큰 변수가 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남조의 유용한 외교 파트너는 고구려였기 때문에, 백제로서는 고구 려 견제를 외교의 주목적으로 삼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박윤선, 2006, 앞의 논문, 76~80쪽) 또한 威德王 代에 北齊·北周 등 북조 정권과의 교섭을 시도한 것도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지만, 陳·북제·북주가 각 축을 벌이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큰 실효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A·B군 사료 이외의 시 기에서는 백제의 대중국 교섭이 고구려의 국제정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 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 고구려의 해상 차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일정 부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사행로 차단’이 중국과의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와 중국은 조공책봉관계를 맺으면서 표면적으로나마 우호·대립을 반복하였다. 사료 A·B군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 백제의 사행이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고구려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굳이 중국과 의 외교적 분쟁거리를 조장하려 했을까 의문이 든다. 6세기 중엽 이후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백제와 신 라임에도 불구하고, 서해 해상에서 해상 차단과 관련한 양국 간의 마찰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 또한 사행로 차단이 외교문제와 얽혀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43) ‌백제의 구체적인 교섭양상에 대해서는 임기환, 2002, 앞의 논문, 44~50쪽 <표 1>과 신형식, 2007, 앞의 논 문, 255~256쪽 <표 2>를 참고하였다.. 014. 제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15) 두 번째로는 해상 교통을 통제하는 작업의 어려움을 들 수 있다44). 기존 연구에서 지적하였듯이, 고 대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국 연안에서도 적국의 사신선에 대한 요격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 다45). 또한 해당 경로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시인거리를 유지하면서 원거리에서 이동하 는 선박을 완벽하게 차단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구려의 차단 위협에 대한 백제의 대응도 있다. 孫吳의 경우이기는 하나, 해상 차단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사신선을 호위하는 군선을 함께 대동시켰던 사례가 참고된다46). 고구려의 해상교 통로 차단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출발 단계부터 그 위협을 벗어날 때까지 군선 파 견을 통한 호위 혹은 군사적인 맞대응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해상교통로 차단의 어려움과 不可測性을 고려하면, 백제가 해상 차단의 위험에도 불구하 고 기존의 항로를 고수했을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실제로 문헌 기록에서는 해상 차단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같은 항로를 이용했던 모습이 확인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신선을 호위했던 손오의 군선은 그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손오의 사신선이 232 년에 요동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成山에서 曹魏의 군사에게 요격된 바 있는데47), 그 이듬해인 233년 48). 公孫氏 정권과의 교섭에서는 사신단과 함께 1만 명의 군사를 함께 파견하였다 . 당시 손오는 조위의. 해상 요격에 대한 대응으로 항로 변경이 아닌 군사력 강화를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산동반도에 위치 한 적대적 세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산동반도를 경유하는 연안항로가 계속 이용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후 동진과 慕容氏의 교섭에서도 같은 양상이 확인된다49). 고구려의 경우에도 480년에 남제로 파견된 사신이 해상에서 북위의 光州人에게 붙잡혀 북위의 대궐 로 압송되었고50), 494~498년 사이에 파견되었던 사신은 북위의 영역이었던 산동반도에서 東萊太守에 게 잡혔다가 남제의 지원군에 의해 풀려난 바 있으며51), 520년에도 梁에 조공한 후 회사품을 받아 되 돌아오다가 산동반도 光州의 해상에서 북위군에게 붙잡힌 사례가 있다52).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산동 반도 일대에서 한 차례 차단당했던 경험을 그 후에도 비슷한 지점에서 20년 간격으로 2차례나 겪었다 는 점이다. 이는 곧 몇 차례의 해상 차단에도 불구하고, 산동반도 일대를 경유하는 항로가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44) 윤명철, 2003,『고구려 해양사 연구』, 사계절, 227쪽. 45) ‌정진술, 2009, 앞의 책, 264~266쪽. 이 연구에서는『三國志』卷26, 魏書26 田豫列傳을 사례로 들면서 해안 에서 적선을 요격하는 행위의 성공여부에 대한 不可測性을 설명한 바 있다. 46)『三國志』 ‌ 卷47, 吳書2 吳主傳 嘉禾二年, “三月 遣舒 綜還 使太常張彌 執金吾許晏 將軍賀達等將兵萬人 金 寶珍貨 九錫備物 乘海授淵” 47)『三國志』 ‌ 卷47, 吳書2 吳主傳 嘉禾元年, “三月 遣將軍周賀 校尉裴潛乘海之遼東 秋九月 魏將田豫要擊 斬賀 于成山” 48) 위의 각주 45번 참조. 49) 정진술, 2009, 앞의 책, 265~267쪽. 50)『三國史記』卷18, 高句麗本紀6 長壽王 68年, “王遣使餘奴等 朝聘南齊 魏光州人 於海中得餘奴等 送闕” 51)『南齊書』 ‌ 卷27, 列傳8 劉懷珍, “僞東萊太守鞠延僧數百人據城 劫留高麗獻使 懷珍又遣甯朔將軍明慶符與廣 之擊降延僧 遣高麗使詣京師” 52)『三國史記』 ‌ 卷19, 高句麗本紀7 安臧王 2年, “二年 春正月 遣使入梁朝貢 二月 梁髙祖封王爲寧東將軍都督營 平二州諸軍事髙句麗王 遣使者江注盛 賜王衣冠劒佩 魏兵就海中執之 送洛陽”. 발표 01.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015.

(16) 관련하여 倭王 武의 478년 上表文도 주목되는 기록이다. 상표문의 특성 상 어느 정도 과장된 修辭가 많기 때문에, 사건의 정확한 시점과 진실성을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다만 사건의 정합성 여부 를 떠나 항로 사용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 보이는데, 고구려의 방해를 언급하면서 “비록 사행길을 나선다고 하더라도,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한다”라고 한 내용이53) 바로 그것이다. 고구려의 사행 로 차단이 매번 성공하지 못하는 모습, 고구려의 방해에 관계없이 해당 항로의 지속적인 사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해상교통로 차단의 한계와 그 성격, 해상 차단과 항로 사용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해상교통로 차단은 의례 새로운 항로의 모색과 개척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오히려 기존 항 로를 계속 고수했던 상황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물론 적대국의 해상 차단 및 요격은 새로 운 항로의 모색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해상 차단에 따른 항로의 세부적인 변경 은 상정해볼 수 있어도, 서해북부연안항로·서해중부횡단항로·서해남부사단항로와 같은 큰 틀에서 의 변화까지 이루어진다고 쉽사리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또한 새로운 항로에 대한 모색이 곧바 로 안정적인 항로의 개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해상 차단을 항로 개척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 는 것은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앞서 살펴본 사례와 같이 해상교통로 차단 사건이 보이더라도, 해당 항로의 지속적인 사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해상교통로 차단기사의 배경과 특징, 해상 차단의 성격 및 그와 관련된 항로 사용 문제 등 을 검토해보았다. 정리하자면『삼국사기』에 남아있는 해상 차단 기사가 특정한 두 시기에 집중된다는 점으로 볼 때, 각 시기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했던 백제의 외교정책 기조가 해상교통로 차단의 주요한 動因이었으며, 차단 사례는 고구려가 군사적인 대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평소 활동범위를 넘어서 백. 제의 항로를 적극적으로 차단했던 특수한 경우로 이해된다. 아울러 해상 통제의 어려움과 不可測性 등을 고려할 때, 해상 차단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없고, 나 아가 해상 차단을 곧바로 새로운 항로의 개척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라는 점을 검토해보았다. 특히 각종 기록에 보이듯이 오히려 해상 차단 이후에도 해당 항로를 지속적으로 사용 했을 가능성이 좀 더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Ⅲ. 고구려의 해상 차단을 통해 본 백제의 항로 백제의 대중국교섭 기록을 살펴보면, 대체로 遣使 사실과 교섭대상국이 확인될 뿐 그 항로를 추적해 볼 수 있는 내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고대사 전체로 넓혀보아도 항로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賈耽의『 道里記』54)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출발지점이나 도착지점을 전하는 기록도 남아 있긴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그 구체적인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보기 어렵다. 그 중. 53)『宋書』卷97, 列傳57 夷蠻 東夷 倭國, “雖曰進路 或通或不” 54)『道里記』 ‌ 는 현전하지 않으며,『新唐書』地理志에 그 逸文이 남아있다. 貞元 연간(785~805)에 唐의 재상을 지냈던 가탐은 당의 邊州에서 四夷로 들어가는 경로를 7개로 구분하여『도리기』를 서술하였다. 그 내용 중「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에는 산동반도 登州에서 발해 및 신라 왕성까지의 항로와 소요기일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도리기』에 기록된 항로의 구체적인 비정에 대해서는 정진술, 2009, 앞의 책, 240~251쪽 참조.. 016. 제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17) 간 경로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의 문제, 즉 연안을 따라 항해했다고 볼 수도 있고 대양을 가로질러 항해 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서해북부연안항로·서해중부횡단항로·서해남 부사단항로의 사용시점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항로 관련 기록 가운데 필자가 주목해보고자 하는 것은 앞서 2장에서 살펴본 해상 차단 기사 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구체적인 차단 지점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백제의 대중국교섭 항로가 고구려 의 領海 혹은 그 인접한 곳을 경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해상 차단 기사는 여러 문헌 기록 가운데 항로의 경유지를 비교적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서해북부연안항로·서해중부횡단항로·서해남부사단항로와 같은 큰 틀에서의 항로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 그나마 가장 객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바, 해상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항로 문제 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앞서 살펴본 A·B군 사료의 내용을 되짚어보면, 고구려의 해상 차단은 각각 5세기 후반과 7세기 전 반에 발생하였다. 그 사이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차단 지점을 다 르게 볼 여지가 있다. 5세기 후반 한강유역 점유국가에 대한 최근의 논란을 감안할 때 고구려와 백제 의 국경은 대체로 경기 남부~경기 북부지역 사이에서 형성되었고55), 7세기 전반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은 대체로 임진강 일대로 이해되고 있다56). 따라서 서해에서 해상 차단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 최대 남쪽지역은 대략적으로 경기만 일대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해상 차단 지점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문제는 서해남부사단항로(이하 사단항로)의 활용 가능 성 여부이다. 사단항로는 서남해안에서 흑산도를 경유하여 중국의 양자강 하구를 향해 직선으로 사행 하는 노선을 말한다57). 그 개설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된 바 있으나, 대체로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백제에 의해 사단항로가 개설·활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적 지 않은데, 4세기 후반58) 혹은 5세기 후반59)부터 남조와의 교섭에 활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4세기 후반부터 서남해안에서 출발하는 사단항로를 활용했다고 한다면, 476년·484년에 벌 어진 고구려의 해상 차단 사건(사료 A-1·A-2)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사단항로의 출발지점과 해상 차단 지점이 거리상으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에서 출발하는 백제의 사신선이 경기도 일대에 위치한 고구려 수군의 방해를 받는다는 점에서, 4세기 후반에 사단항로를 사용했다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오히려 476년·484년 해상 차단 사례는 5세기 후반까지. 55) ‌5세기 후반 한강유역 점유국가에 대한 논란은『三國史記』지리지와 백제본기의 내용 차이에서 비롯되었 다. 즉『삼국사기』지리지에는 지금의 경기도 남부지역을 고구려의 군현으로 기록한 반면, 백제본기에서 는 475년 한성 함락 이후에도 한강유역을 경영했던 기사가 보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대략적인 국경선을 파악하고자 하는 바, 두 가지 경향을 모두 반영하여 경기 남부~경기 북부 지역으로 서술하였다. 56) 장창은, 2014,『고구려 남방 진출사』, 景仁文化社, 311~312쪽. 57) 신형식, 2005, 앞의 책, 105쪽; 정진술, 2009, 앞의 책, 282쪽. 58) ‌김정호, 1996,「신라시대 한·중항로」,『장보고와 청해진』, 혜안, 159~160쪽; 무함마드 깐수, 1996, 앞의 논문, 252쪽. 59) ‌崔槿黙, 1971,「百濟의 對中關係 小考 -朝貢關係를 中心으로-」,『百濟硏究』2, 180쪽; 신형식, 2005, 앞의 책, 105쪽; 서영수, 2007,「남북조와의 관계」,『백제의 대외교섭』, 충청남도 역사문화원, 212~213쪽; 김인 홍, 2011, 앞의 논문, 93쪽; 문안식, 2015, 앞의 논문, 132~134쪽.. 발표 01.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017.

(18) 고구려의 영해 혹은 그 인접지역을 거쳐 가는 항로를 이용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며60), 그 이전시기에 도 비슷한 경로로 항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5세기 후반을 사단항로의 개척시기로 파악하는 연구 경향을 살펴보면, 백제가 5세기 후반 까지 서해중부횡단항로를 사용하다가 476년·484년의 해상 차단을 계기로 사단항로를 개척했다고 보 고 있다. 아마도 남조와의 교섭에서 고구려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았다는 점, 남조의 수도인 建康에 이 르는 최단거리 직항로라는 점이 사단항로 개척을 설정했던 주요 요인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5세기 후반부터 사단항로가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와 관 련하여 당시의 대중국교섭 양상을 살펴보면, 해상 차단 이후에도 백제의 사행이 비교적 짧은 간격으 로 이루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D-1. 冊府元龜에 이르기를, 남제 高祖 建元 2년(480)에 백제왕 牟都가 사신을 보내 공물 을 전하였다61). D-2. 동성왕 6년(484) 봄 2월에 왕은 남제 太祖 蕭道成이 고구려왕 巨璉을 책봉하여 驃騎大將軍 으로 삼았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表文을 올리고 內屬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62). D-3. 동성왕 8년(486) 3월에 사신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63). D-4. 책부원구에 이르기를, …(중략)… 또한 武帝 永明 8년(490)에 백제왕 牟大가 사신을 보내 어 표문을 올렸다64). D-5. 建武 2년(495)에 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65).. 위에서 제시한 사료는 476년·484년 고구려의 해상 차단 전후로 확인되는 기사이다. D-4와 D-5의 牟大는 시기적으로 볼 때 동성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D-1의 牟都는 대체로 문주왕으로 보고 있. 으나, 시기적으로 동성왕 2년에 해당되므로 당시의 遣使는 동성왕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이해된다66).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사건의 맥락을 살펴보면, 476년 3월에 송으로 파견된 사신이 고구려의 방해로 되돌아온(A-1) 이후 백제 동성왕은 480년·484년에 남제와 총 2차례 교섭을 진행하는데 성공하였다.. 60) 임동민, 2016, 앞의 논문, 99쪽. 61)『三國史記』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23年, “冊府元龜云 南濟<建>元二年 百濟王牟都 遣使貢献” 62)『三國史記』 ‌ 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6年, “六年 春二月 王聞南齊祖道成冊髙勾麗巨璉爲驃騎大將軍 遣使上 表請内屬 許之” 63)『三國史記』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8年, “三月 遣使南齊朝貢” 64)『三國史記』卷26, 百濟本紀 4 東城王 23年, “冊府元龜云 …(중략)… 又永明八年 百濟王牟大遣使上表” 65)『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39 百濟國,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66) 朴眞淑, 2000,「百濟 東城王代 對外政策의 變化」,『百濟硏究』32, 85쪽.. 018. 제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19) 그리고 484년 7월에 內法佐平 沙若思가 남제에 조공하러 가다가 서해 해상에서 다시 고구려 군사를 만 나서 가지 못하였으며(A-2), 그 이후로는 486년·490년·495년에 다시 남제와의 교섭에 성공하였다. 그 중 476년 3월부터 484년 7월까지 이루어진 총 4차례의 사행에서는 고구려의 영해 혹은 그 인접한 곳을 거쳐 가는 항로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476년 3월의 해상 차단 이후 새로운 항 로를 이용하여 교섭에 3차례 성공하였다면, 484년 7월의 경우와 같이 고구려의 방해를 받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중국교섭의 양상은 앞서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상 차단의 경험에도 불구하 고 해당 항로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484년 7월 해상 차단 이후에는 486년 3월 교섭을 시작으로 동성왕 말년까지 4년, 5년 간격으로 남제와의 교섭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7년 후인 502년에는 양으로부터 征東將軍을 제수 받은 기록이 확인되는데67), 동성왕의 사망과 武寧王의 즉위 사실을 전하기 위한 사신 파견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68). 이렇듯 486년 이후 재개된 백제의 대중국교섭 양상은 그 이전의 遣使 빈도 및 시간적 간격과 큰 차이 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484년 해상 차단으로부터 2년도 되지 않는 시점에 다시 遣使했다는 점이 주목 되는데, 짧은 시간 간격 상 새로운 항로의 개척보다는 기존 항로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69). 대체로 사단항로의 개척시점을 웅진천도 이후70) 혹은 동성왕대로71) 지목하고는 있으나, 위와 같은 교 섭 양상으로 볼 때 실제로 그 개척을 어느 시점에 위치시켜야 할지 의문이 든다. 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사단항로 사용의 지속성 문제를 거론할 수 있다. 만약 사단항로가 5세기 후반에 개척되어 사행로로서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사용된 항로였다면, 7세기 이후에도 계속해 서 대중국교섭의 경로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세기 전반 고구려의 해상 차단 사례 (B군 사료)가 보이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항로는 사단항로가 아니라 여전히 고구려의 영해 인근을 거 치는 경로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사단항로는 6세기 말까지 사용되었고, 수당 성립 이후에는 태안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서해중부횡단항로(이하 횡단항로)가 주로 활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72). 이에 따르면 6세기 중엽 이후 신라와의 대치 상황을 근거로, 태안반도 서쪽의 극렬비열도를 경유하는 횡단항로가 이용되 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뿐 아니라 신라의 차단 위험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사단 항로가 이미 사용되었다고 전제했음에도 불구하고, 6세기 말에 이르러 굳이 신라의 국경과 인접한 태 안반도에서 출발하여 횡단항로를 사용한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67)『梁書』卷54, 列傳48 東夷 百濟, “天監元年 進太號征東將軍” 68)『梁書』에 기록된 天監 원년(502)은 무령왕의 재위 2년에 해당된다. 69) ‌항로 개척의 시초는 예상하지 못한 표류 이동이나 모험적 항해에서 비롯되는 것이 일반적이다.(권덕영, 2010,「신라의 黃海 개척과 바다 경영」,『대외문물교류연구』9, 해상왕장보고연구회, 35쪽) 특히 그것이 ‘항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수많은 시행착오가 전제되어야 한다.(고경석, 2011, 앞의 논문, 111쪽) 70) 崔槿黙, 1971, 앞의 논문, 180쪽; 문안식, 2015, 앞의 논문, 132~134쪽. 71) 신형식, 2005, 앞의 책, 105쪽; 김인홍, 2011, 앞의 논문, 93쪽 72) 문안식, 2015, 앞의 논문, 132~134쪽 및 142쪽.. 발표 01.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019.

(20) 이처럼 고구려의 해상 차단 기사로 볼 때, 백제가 사단항로를 개척하고 활용했다고 이해하기는 어려 울 듯하다. 그 뿐 아니라 항해술의 관점에서도 백제의 사단항로 사용에 관하여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 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73). 따라서 백제의 사단항로 개척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고려가 있어야 하며, 해상 차단 이후에도 고구려의 영해 인근을 지나가는 기존의 항로는 그 대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해상 차단의 지점을 어느 곳으로 파악하느냐의 문제로, 이는 서해북부연안항 로(이하 연안항로)와 횡단항로의 사용 가능성을 타진하는 문제와 밀접히 연관된다. 앞서 해상 차단을 상정할 수 있는 최대 남쪽지역을 대략적으로 경기만 일대로 추정해보았다. 그러나 A·B군 사료에서 는 구체적인 지점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경기만 일대부터 그 북부지역인 한반도 서북부 일대 전체까지 그 범위에 해당된다. 이에 관한 연구 경향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첫째로 연안항로를 사용했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이들 연구에서는 B군 사료를 중심으로 신라사의 입장에서 백제의 항로를 함께 언급하였다. 구체적인 차단 지점을 명시하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해상 차단 자체를 7세기 전반까지 백제와 신라가 연안항로를 활용하고 있었던 증거로 파악하고 있다74). 두 번째로는 횡단항로의 관점으로 검토한 것이 다. 고구려 영해의 깊숙한 지점이 아니라 항로 가운데 일부 지점이 고구려의 영해와 맞물린다고 보았 으며, 구체적인 경유지로 황해도 연안과 대청도 혹은 백령도를 지목하기도 했다75). 일단 고구려의 해상 차단은 백제의 연안 항로 활용으로 인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또한 백제의 횡단항로가 경기만 북부에 해당하는 황해도 연안이나 백령도를 경유하는 노선이라면76), 그 일 대를 점유하고 있던 고구려에게 해상에서 차단당할 수 있다. 따라서 해상 차단만을 놓고 볼 때, 연안 항로와 횡단항로 모두 그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다만 7세기 전반까지 백제가 연안항로를 통해 고구려의 영해를 지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검 토의 여지가 있다. 백제와 고구려는 개로왕과 고국원왕의 죽음을 서로 겪으면서 오랜 원한을 품어왔 고, 치열하게 전쟁을 펼치면서 대립하였다. 7세기 중반에 들어와 양국은 羅唐에 대항하기 위해 화친을 맺기도 했으나77), 그 이전시기에는 줄곧 적대적인 관계였다.. 73) ‌사단항로는 한반도 서남해안으로부터 양자강 하구까지 약 600km가 넘는 장거리 원양항해이므로, 항해술 과 조선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대의 기본적인 항해술이 시인거리 연안항해와 정방향 대양항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항해용 나침반 등장하는 11세기 이전에 사단항로의 사용은 이루어지지 않 았다는 견해가 있다.(정진술, 2009, 앞의 책, 291~292쪽 및 325~326쪽) 반면 나침반 없이도 사단항해가 가 능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 역시 사단항로의 개설시점에 대해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보 고 있다.(고경석, 2011, 앞의 논문 122~124쪽) 74) 權悳永, 1997, 앞의 책, 200쪽; 강봉룡, 2009, 앞의 논문, 6~8쪽; 고경석, 2011, 앞의 논문, 113~114쪽. 75) 정진술, 2009, 앞의 책, 270쪽; 전덕재, 2013, 앞의 논문, 163쪽. 76) ‌신라 中下代의 入唐使行路는 대체로 唐恩浦에서 출항하여 횡단항로를 활용해 산동반도에 이르는 노선이 었다.(정진술, 2009, 위의 책, 332~333쪽) 관련하여 주목되는 기록은『三國遺事』卷2, 紀異2 眞聖女大王居 陀知條로, 良貝가 당에 사신으로 갈 때 鵠島를 지나갔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곡도는 지금의 백령도에 해당 된다.(『三國史記』卷37, 雜志6 地理4) 비록 시기적으로 떨어지지만, 곡도가 횡단항로의 중간 경유지였음 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참고가 된다. 77)『三國史記』卷28, 百濟本紀6 義慈王 3年, “冬十一月 王與髙句麗和親”. 020. 제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21) 그런 상황에서 백제가 황해도와 요동반도 등의 고구려 연안을 따라 장거리 연안항로 항해를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78). 연안항로는 기상 악화나 조난을 피하고 기항지에서 식량과 식수 등을 공급받을 수 있는 안전한 항로이지만, 운항 시일이 지나치게 많이 걸리는 단점이 있다79). 특히 장거리 연안항로 항해에 있어서 기항지의 확보는 필수적인데, 기항지의 활용은 물론 그 연안을 항해하는 것조차 어려 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B군 사료는 백제와 신라가 연안항로를 활용하다가 고구려 영해 깊숙한 곳에서 차단당한 것이라기보다는, 횡단항로를 사용하는 가운데 그 경유지 일부가 고구려의 영해 혹은 그 인 접한 곳에 포함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로부터 차단당했던 사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백제의 항로가 7세기 전반까지도 반드시 고구려의 영해 혹은 그 인접한 곳, 즉 황해도 연안 혹은 백령도 일대를 경유했다는 지적이다80). 당시 백제의 사신선은 태안반도 일대에서 출 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81), 격렬비열도나 덕적군도에서 산동반도로 바로 서해 횡단하지 않고 황해 도 연안이나 백령도 일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횡단했다는 점이 의미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백제와 신라 모두 이 경로를 거쳤던 것으로 이해되는데(B군 사료),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대중국교섭과 관련 해서는 큰 분쟁 없이 함께 사행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어찌되었건 7세기 전반까지도 고구려 영해 인근 을 거쳐 가는 경로를 이용했다는 점으로 볼 때, 이보다 앞선 시기부터 이 항로가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5세기 후반의 상황을 보여주는 A군 사료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보았듯 475 년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은 대략적으로 경기 남부~경기 북부지역 사이에서 형성된 것 으로 이해된다. 이 중 경기 북부지역을 당시의 국경선으로 파악한다면, 7세기 전반의 해상 차단 상황 과 유사하게 황해도 연안이나 백령도 일대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고구려의 한강이남 영역화를 인정하여 경기 남부지역을 국경선으로 파악할 경우, 고구려의 해상 차단은 덕적군도 일대에 서 시도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듯 5세기 후반 해상 차단의 구체적인 상황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이 시기의 항로는 7 세기 전반의 그것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 함락을 전후로 백제와 고구려는 잦은 전쟁을 하 는 등 극한 대립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당시에도 고구려의 연안을 통과하는 연안항로는 사용되기 어 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횡단항로의 사용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경유지 또한 7세기 전 반의 상황과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5세기 후반부터 격렬비열도나 덕적군도 일대에서 바로 산동반도 로 서해 횡단을 했다면82), 7세기 전반에 굳이 고구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황해도 연안을 경유하지 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78) 정진술, 2009, 앞의 책, 274쪽; 전덕재, 2013, 앞의 논문, 163쪽. 79) ‌고경석, 2011, 앞의 논문, 109쪽. 이에 따르면, 연안항로의 경우 백령도에서 산동반도까지의 거리가 약 800km에 이르지만, 횡단항로의 경우 그 거리는 약 180~190km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80) ‌정진술, 2009, 앞의 책, 270쪽. 당시 고구려의 영역과 신라와의 국경선을 감안할 때,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해상 차단을 시도하여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은 황해도 연안·옹진반도 남부지역·연평도·대청 도 일대로 파악된다. 81) 문안식, 2015, 앞의 논문, 140~142쪽. 82) 문안식, 2015, 위의 논문, 132쪽.. 발표 01.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021.

(22)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고구려의 해상 차단 기사는 백제의 항로가 고구려의 영해 인근을 지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다만 A·B군 사료만을 놓고 볼 때, 연안항로와 횡단항로의 가능 성을 모두 상정할 수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관계를 고려할 때 연안항로는 사용되기 어려운 상 황이었다. 따라서 5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사용된 백제의 항로는 횡단항로로 이해된다. 또한 A·B 군 사료에 보이듯 그 항로는 고구려의 영해 혹은 인근 지역을 경유하였는데, 대체로 황해도 연안 혹은 백령도 일대로 파악해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횡단항로의 개설 시점이다. 앞서 3세기 후반에 마한은 서진 과 교섭을 진행한 바 있는데, 이는 백제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83). 당시 백제는 樂浪郡 과 帶方郡을 경유하여 연안항로를 통해 서진과의 교섭을 진행한 것으로 이해된다84). 문제는 그 이후 백제의 대중국교섭이 기존의 연안항로를 계속 활용했는지 아니면 횡단항로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것 인데, 주지하듯 이에 대한 많은 연구가 제출되었다85). 백제사로 좁혀서 그 연구 경향을 살펴보면, 4세기 말 동진과의 교섭86)·5세기 초 남조와의 교섭 87). ·472년 백제와 북위와의 교섭88)·웅진 천도 이전89)·5세기 후반90) 등 횡단항로 사용 시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확인되며, 원인과 배경 등 세부적인 내용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사료 상에서는 472년 개로왕의 상표문과 관련된『삼국사기』백제본기 기록이91) 횡단항로 사용의 개연성을 어느 정도 드러 내고 있지만92), 백제의 횡단항로 사용을 확실하게 보여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횡단항로 사용과 관련하여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과 요동반도 일대에 대한 고구려의 영역화 정도가 아닐까 한다. 앞서 2장에서 몇몇 사례를 통해 해상교통로 차단에도 불구하고 해당 항로가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살펴본 바 있다. 이를 통해 해상 차단이나 해상 요격이 항로 변경에 있어서 절대적인 변수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83) 박대재, 2006, 앞의 책, 138~153쪽. 84) ‌이현혜, 1994,「삼한의 대외교역체계」,『韓國史論叢 : 李基白先生古稀紀念』上, 一潮閣, 43~55쪽; 임동민, 2016, 앞의 논문, 87쪽. 85) 횡단항로에 관한 연구사 정리는 정진술, 2009, 앞의 책, 252~254쪽 참조. 86) 신형식, 2005, 앞의 책, 133쪽; 孫光圻, 2013, 앞의 논문, 9쪽; 임동민, 2016, 앞의 논문, 99~106쪽. 87) 周裕興, 2008, 앞의 논문, 54~56쪽; 박순발, 2016, 앞의 논문, 10~11쪽. 88) 무함마드 깐수, 1996, 앞의 논문, 250쪽. 89) 崔槿黙, 1971, 앞의 논문, 180쪽. 90) 정진술, 2009, 앞의 책, 271~276쪽; 전덕재, 2013, 앞의 논문, 164쪽; 문안식, 2015, 앞의 논문, 124~125쪽. 91)『三國史記』 ‌ 卷25, 百濟本紀3 蓋鹵王 18年, “또한 고구려왕 璉에게 조서를 보내 安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餘慶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고 하여, 그들을 동쪽 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안 등이 모두 돌아가니, 위나라에서는 곧 고구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안 등으로 하여금 東萊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 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 등이 海濱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92) ‌정진술, 2009, 앞의 책, 275~276쪽. 이 연구에서는 海濱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여 요동반도 연안을 항해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북위의 사신이 東萊에서 서해를 횡단하여 백제로 가려고 했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고 하였다. 그리고 북위의 횡단항로 사용의 배경으로 백제가 먼저 횡단항로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언급하 기도 했으나, 문헌 상 북위의 횡단항로 사용을 최초의 기록으로 파악하였다.. 022. 제24회 백제학회 정기학술회의.

(23) 그러나 고구려의 영역화로 인한 차단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된다. 앞서 언 급했듯이 연안항로가 황해도와 요동반도를 경유하는 장거리 항해인데, 백제로서는 기항지를 이용하 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 연안을 항해하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371년 평양 성 전투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대립관계는 연안항로에서 횡단항로로 넘어가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와의 대립이 격화된 4세기 후반에 들어와 대방재지세력의 항해기술 유입을 근 간으로 동진과의 교섭에서 횡단항로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나93) 5세기 초 고구려의 요동 점유로 인해 횡단항로가 개척·활용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주목된다94). 이중 어느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데, 대체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이르러 백제가 횡단항로를 개척·사용하여 대중국교섭을 진행하 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5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해상 차 단의 배경과 성격, 항로 문제를 살펴보았다. 본장에서는 앞서 검토한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맺음말 을 갈음하고자 한다. 먼저 Ⅱ장에서는 해상 교통로 차단 사료가 크게 5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으로 나누어진다는 점에 주 목하여, 해상 차단 사건이 기록된 배경과 목적을 살펴보았다. 5세기 후반의 경우, 백제가 북위에 접근 하여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자 고구려가 이에 강력하게 군사적으로 대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해상 차단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7세기 전반에도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 견제를 목적 으로 고구려 정벌을 요청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에 따라 고구려가 양국의 사행로를 차단하는 일종 의 무력시위를 벌였던 것으로 파악해보았다. 따라서 백제가 중국과의 교섭에서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을 때, 고구려의 군 사적인 대응과 아울러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가 확인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고구려 정벌 을 요청했던 백제의 외교정책 기조가 해상교통로 차단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고구려가 군사 적인 대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평소 활동범위를 넘어서 백제의 항로를 적극적으로 차단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해상교통로 차단과 관련된 사료를 검토해봄으로써, 해상 차단 이후에도 해당 항로를 지속적으 로 사용했던 사례를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해상 차단을 항로 개척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은 신 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으며, 해상 차단 이후에도 해당 항로를 지속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좀 더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93) 임동민, 2016, 앞의 논문, 106~107쪽. 94) ‌박순발, 2016, 앞의 논문, 10~11쪽. 이와 같은 관점에서 횡단항로의 사용을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5세기 초 고구려의 요동반도 장악 이후 백제가 횡단항로를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한 연구도 있다.(정진술, 2009, 앞 의 책, 274쪽). 발표 01. 백제의 서해 횡단과 항로 - 고구려의 해상교통로 차단 기사를 중심으로. 023.

수치

그림 12의 3과 4&gt;는 동체부 및 저부에 평행+격자타날 또는 격자+평행타날이 이루어져 기본적인 시문  방법은 백제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lt;그림 12의 6&gt;은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에도 전체적으로 자연유가 형성된 회청색 경질 토기로, 경부 와 동체부에 밀집 파상선문이 시문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돌대 광구장경호들과 차이가 있다

참조

관련 문서

제 10조 (수상대상자 선정) 심사위원회는 포상부문별로 적격후보자를 심사 선정하여 별지 제 2호 서식의 세종문화상 수상대상자 추천서를 문화체육 관광부장관에게

=&gt;

다양핚 예제와 연습문 제를 통하여 전공과정에서 사용될 기본적인 물리개념들 을 확실히 이해시키는 것이 본 강의의 목표이다.. 시갂이 허락하면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 일반적으로 10년간 정액법으로 상각.. 2) 프랜차이즈(franchises): 제품이나 서비스의 판매권 및 상표나 상호명의 사용권을

Mànmān xué, zhǐyào duō kàn duō xiě, jiù yídìng néng xué

알짜 전지반응식을 쓰고, 그것이 정방향 혹은 역방 향으로 자발적인지 답하시오... 알짜 전지반응식을 쓰고, 그것이 정방향 혹은

-조직체 형성의 구성단위들과 이들의 관계. 제 3절 조직문화의 구성요소와 영향.. 제 3절 조직문화의 구성요소와 영향.. 제 3절 조직문화의 구성요소와 영향..

제품의 소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심리적 편익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