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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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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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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전차

(순수한 스포츠맨십과 아마추어리즘)

1. 줄거리 요약

불의 전차는 1924년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두 영국 육상선수 에릭 리들과 해럴 드 아브라함이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순수한 스포츠정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사람은 절 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심으로 최선을 다하며, 다른 이는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을 연마해서 최상의 자리에 도달 하고자는 마음으로 올림픽에 도전한다. 순수한 승부욕과 페어 플레이정신, 그리고 한 남자의 종교적 양심에 의거한 불굴의 의지를 담아낸 것이다. 의외로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유태인으로 태어나 인종적 콤플렉스를 지닌 헤럴드 아브라함과 선 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성장한 에릭 리들의 이야기를 교차편집으로 보 여주면서 이들이 1924년 파리 올림픽의 육상 국가대표 선수로 만나 각자의 꿈을 이루는 과 정으로 이어진다. 고전적이고 직설적인 표현방법으로 감동을 유도함으로서 우직함과 시대정 신을 담아낸 단순명료함이 시선을 끈다.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스포츠 경기 그 자 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선수들, 선수를 지도하는 사람들, 선수들의 경기를 지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언지를 깨닫게 해준다.

2. 영화 속 이야기

1978년 영국 런던 외곽지역의 어느 마을의 추모식장에서 교회의 사람들이 전설적인 인물 인 해럴드 아브라함을 추모하기 위해 모여 있다. 2012 영국 올림픽의 오프닝 영상에서 사 용된, 많은 젊은이들이 해안가를 달리는 장면으로 회상은 시작한다.

1919년 케임브리지 카이스칼리지에 입학한 해럴드는 학기 초부터 학교 전통 달리기에 도 전한다. 비교적 간단한 규칙으로 도전자가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끝나기 전에 교정을 한 바퀴 돌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700년 동안 성공한 사람이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관 심을 가지고 그를 주시한다. 원래 혼자 달리기로 되었으나 친구인 린지가 함께 달린다. 많 은 이들의 관심 속에 둘은 교정을 달리고, 해럴드는 12번이 울리기 전에 교정을 도는데 성 공하였다. 그리고 린지는 간발의 차이로 그에게 패하고 만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환호와 축하를 받는다. 한편 1920년 스코틀랜드 고지대, 에릭과 그의 여동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이자 선교사이다. 그는 성실하고 선한 인물이었지만 안식일에는 아동이라도 축구를 하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종교적 신념과 동생의 반대로, 그는 달리기와 선교 활동 사이에서 고민을 하지만 아버지와 친구는 육상을 포기 말라며 독려한다. 특히 아버지 는 주님의 이름으로 달리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조언한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에릭은 육상과 강연을 겸하며 자신의 인생을 의미 있고 보람차게 살아간다.

신념을 지키며 보람된 삶을 사는 에릭과 달리, 해럴드는 친구에게 가정사를 밝히며 자신 의 고통과 분노⋅좌절에 대해 괴로워한다. 요컨대 그의 아버지는 유태계 리투아니아 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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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취급을 받지만 조국을 사랑하며 아들들을 진짜 영국인으로 키우려고 했으며, 해럴드 는 이런 아버지를 존경, 사랑한다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그는 영국 최고의 명문 대에 다니고, 그의 형은 의사로서 분야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지만 표면적 성공과는 달리 유 태인은 영국에서 떳떳한 대우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이다. 그는 이런 이유로 법학을 선택했으 며, 편견을 극복하고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겠다고 의지를 불태운다.

시간이 흘러 1923년 6월 2일, 스코틀랜드 VS 프랑스 아마추어 경기에 유명한 코치인 머 사비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보러온다. 경기 도중에 에릭은 그만 실수로 넘어지고 그리 하여 다른 선수들과 점점 격차가 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경기에서만큼은 에릭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상과 달리 1등으로 골인한다. 그를 눈여겨본 머사비니 코치는 공개적으로 칭찬한다. 해럴드 또한 에릭을 보러왔고, 그가 강하다고 칭찬하며 머사비니에게 이길 수 있게 도움을 청한다. 해럴드는 머사비니의 도움만 있다면 올림픽에서 우승할 수 있 다고 자신하지만 코치는 확답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이 충분하다면 돕겠다고 약속할 뿐이 다. 이후 케임브리지의 육상 4인방은 뮤지컬을 보러간다. 그곳에서 해럴드는 운명적인 여자 를 만났고, 이내 데이트 승낙을 받아냈다. 공연이 끝난 후 둘은 함께 레스토랑에 간다. 이후 해럴드는 고든 양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1932년 마침내 런던의 육상 경기장에서 해럴드와 에릭은 처음 만나게 된다. 둘은 최선을 다하자며 악수를 나눈다. 그러나 경기에서 진 해럴드는 패배에 괴로워한다. 이를 고든양이 위로 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때 머사비니가 찾아와서 조언을 한다. 해럴드는 단거리 주자에 적합하며 패배의 원인은 초반의 부담감이라 며 코치직을 수락한다. 그리고 그들은 맹훈련에 돌입한다.

해럴드는 머사비니에게 기술을 전수받으며 훌륭한 선수로 성장한다. 연습에만 집중하는 해럴드와 달리 에릭은 어려움을 겪는다. 여동생은 오빠가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온통 육 상과 올림픽이라며 화내고 걱정한다. 에릭은 육상을 하는 이유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 한 것이며, 올림픽이 끝나면 중국으로 선교활동을 가겠으니 당분간만 이해해 달라고 양해를 구한다. 한편 해럴드는 연습에만 몰두하는데 고든은 해럴드의 친구 몬태나의 조언으로 이해 하려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해럴드는 학장과 면담을 한다. 학장과 교수는 개인코치 영 입은 아마추어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한다. 요컨대 직업코치에게 기술을 전수받으며 명예를 얻는 일에만 급급했다고 비난한다. 해럴드는 가족과 학교, 조국을 위한 일들이라 반박한다.

물론 교수들은 그의 말을 용납하지 않고, 해럴드는 교수들의 낡은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그 가 나가고 난 이후 총장과 교수는 유태인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다.

얼마 후 해럴드는 친구들과 함께 올림픽에 나가며 에릭도 선발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는 지난 패배의 설욕을 다짐하며 전의를 불태운다. 그러나 에릭은 승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바로 100m예선전이 일요일에 개최된다는 것. 강한 종교적 신념으로 생활하던 그는 안식일과 조국을 위한 경기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에 자신 의 신앙심을 단장에게 밝히고, 주최측과 논의한다. 한편 해럴드는 가장 빠른 미국의 두 선 수를 보며 잔뜩 긴장하는 가운데 제8회 파리 올림픽,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첫 경기는 허들 넘기. 앤디 선수가 2위로 들어오며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다. 에릭은 올림 픽 조직위원회 의원들과 만나지만, 경기날짜는 바뀌지 않고 외려 출전을 종용 당한다. 완강 히 거부하는 에릭에게 친구인 앤디가 해결책을 제안한다. 다른 날, 다른 경기에 출전하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출전할 목요일 400m경기에 나서라는 것이었다. 모두 이에 찬성을 하고, 에릭은 친구의 도움으로 400m 경기에 출전한다. 하지만 해럴드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는 앞선 200m에서 1등을 못하며 자신감을 상실했다. 패배를 맛본 후 승부자체가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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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는 말을 들은 머사비니 코치는 자신감을 주기위해 편지를 남긴다. 경기를 못 봐서 미안 하지만 그가 우승할 것을 믿으며,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목걸이를 선물한다. 결국 해 럴드는 100m 경기에서 우승을 거머쥔다. 이후 시작된 400m 결승. 모두 하루에 2번 출전하 는 에릭의 체력이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숄츠만 유일하게 우승을 예상한다. 에릭은 강한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숄츠의 예상대로 에릭은 악조건을 딛고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한다. 그리고 올림픽에 참가했던 영국 선수들은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금의환향한다.

찬송가가 연주되고 그들은 다시 한 번 해럴드를 기린다. 해럴드는 시빌과 결혼, 영국 체 육회의 원로로 활동하다 1978년 1월에 사망. 에릭은 선교사로 일하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중국에서 사망하였고 스코틀랜드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자막이 나온다. 그리고 처음 에 선수들이 진흙투성이가 된 채 달리던 해안가의 모습이 나오며 영화는 엔딩을 맞는다.

3. 해석적 이해

불의 전차는 인종차별과 올림픽에서의 아마추어리즘,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관한 이야기를 청년들의 꿈과 희망으로서 잘 그려낸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에릭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경기를 포기하고자 했을 때 그 투철한 신앙심에 응원을 보내면서도 또한 답답 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한 두 선수의 금 메달 획득에 환호도 했을 것이다. 또한 해럴드가 사회적 편견에 맞서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포츠 영웅를 통한 인종차별의 극복'과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에 관해서 좀 더 자 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종차별은 유색인종간의 차별만을 생각한다. 그 러나 해럴드의 경우처럼 보이지 않는 편견과 차별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는 점을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또한 올림픽의 의미와 기원적 특성에 대해 알아보고, 현대사회에서 올림픽이 가지는 상업주의⋅성적 지상주의에 대해서도 비교해볼 필요성이 제기되는 바이다.

예컨대 해럴드가 코치를 영입한 문제가 과연 올바른 행동인가 등이다. 더불어 사회활동을 함에 있어 종교적 신념 혹은 개인적 가치관에 충돌되는 경우 어떤 행동을 해야 마땅한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문제이다.

4. 윤리적 탐구

1.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에릭’과 ‘해럴드’ 는 어떠한 공통된 면과 다른 점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두 선수의 공통점은 재능과 노력, 그리고 좋은 친구가 있다는 점이다. 에릭은 안식일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경기출전을 포기하는 앤디가, 해럴드에게는 언제나 옆을 지켜주는 친 구 몬태규가 있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공통점 외에도 각자 자신만의 신념을 위해 달린다 는 점 또한 유사하다. 세부적으로는 두 사람의 신념이 상이하다. 예컨대 에릭의 신념은 종 교에 바탕을 두기에 주님이 내려준 재능을 살려서 그 영광을 돌리려고 한다. 반면 해럴드는 명예를 얻음으로 핍박받는 유태인들을 차별⋅멸시받지 않게 하려는 의도이다. 또한 에릭은 자신과 그 주위를 사랑하며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반면 해럴드는 자신의 환경에 힘들어한 다. 그러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에릭의 달리기가 자신과의 싸움인 반면 해럴드의 달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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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과의 싸움이었다는 점이다. 처음 두 선수가 시합에서 경쟁했을 때, 에릭은 상대를 의 식하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달렸지만 해럴드는 그를 의식하면서 달리다가 2등을 하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에릭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경기에 임하는 것 을 동생에게 말로써 이해시키고 설득시키지만 해럴드는 마음과는 달리 그녀를 더 이상 사랑 할 수 없다는 말로서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도 차이라고 할 수 있다.

2. 해럴드가 올림픽 경기에서의 승리를 위해 육상선수 출신인 우사비나를 개인 코치로 두어 캠브리지 대학의 규정을 어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신의 실력향상과 목표달성을 위해 개인 코치를 찾아가 지도를 받았다는 사실은 비난할 여지가 없다. 보이지 않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 극복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금메달을 따야 만 하는 상황이었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입장에서이다. 물론 학장과 교수가 이야기 했던 말처럼 승리에 집착치 않는 지성인의 자세 때문에 개인코치 섭외를 비난하는 것은 아 니다.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진정한 지식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다만 해럴드 문제의 핵심은 집단에서 정한 규정을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것이다. 비록 규정 을 어기는 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거나, 불합리한 규정이었다 해도 규정은 지켜지 라고 있는 것이다. 악법도 법이듯이. 캠브리지 대학의 학생 선수 모두는 이 규정을 준수하 였다. 그가 캠브리지 대학에 학생이라면 규정을 지켜야만 했다. 또한 이러한 행동은 스포츠 의 페어플레이정신과도 맞지 않는다. 비록 그가 민족적 차별을 극복하기위해 승리가 절실히 필요했더라도 이는 합리화 될 수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기에 우승하는 것보다 는 정당하게 규칙을 지켜가며 경기에 임하는 것이 더욱 값지고 보람찬 일이기 때문이다.

3. 1924년도의 파리 올림픽과 오늘날을 올림픽을 비교해 보았을 때 바뀐 점은 무엇이고, 계승되고 있는 점은 무엇인지 검토해 보자.

우선 참가국의 수이다.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에서 44개국이었던 참가국은 2012년 제30회 올림픽에서는 203개국으로 증가했다. 기간은 1924.05.05(월)~07.27(일) 84일간 올 림픽을 치렀으나 2012년에는 17일간 경기가 진행된다. 종목의 수는 17개에서 126경기만 열렸지만 2012년 기준 26개 종목, 302개의 세부 경기가 운영된다. 이후 채택된 경기종목으 로는 양궁의 라운드 방식(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단체경기(1988년 서울 올림픽), 남자 유도⋅배구(1964년 동경 올림픽), 여자유도⋅배드민턴(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카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태권도⋅철인3종 경기⋅여자수구⋅싱크로나이지드 다이빙(2000년 시드니 올림픽), 핸드볼⋅싱크로 나이즈드(1984년 LA올림픽), 육상 경기에 여성의 참가가 허용(100m, 800m, 100m계투, 높이뛰기, 원반던지기,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등이 있 다. 더불어 올림픽기가 1928년 대회 때 처음 계양되었다. 1924년까지는 직접 관람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현재는 전 세계인들이 TV 및 컴퓨터 등 영상매체들로 실시간 관람할 수 있 다. 하지만 파리올림픽과 지금의 공통점도 있다. 개최기간은 4년에 한번, 수영이 50m 수영 장에서 열리기 시작한 것. 1924년에 시작된 동계올림픽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점이다.

4. 오늘날의 올림픽에서 일부 종목에 프로 선수들이 참가하는 점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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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올림픽은 아마추어 정신에 입각한 아마추어 선수들의 장이었다. 이런 이유로 1992 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프로선수들, 즉 운동을 해서 돈을 버는 선수들의 참가를 금지하 는 조항이 있었다. 이는 근대 올림픽을 주도한 쿠베르탱 남작의 뜻이었다. 쿠베르탱 남작은 프로선수들은 상금을 받는데 목적이 있기에 참가 자체에 의의를 둘 수 없으며 신성한 육체 활동이 아니게 된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현재는 올림픽은 상업성을 이용한 수익창출에도 심혈을 기울이기에 쿠베르탱의 정신과는 조금 다른 맥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본인은 프로선수의 참가를 허용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은 그 종목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기 위함이며, 수준 높은 코칭을 통한 경기력의 질적 향 상이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프로로 전향한 선수가 아마추어가 아니 라는 이유로 선수로서 가장 영예로운 장소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불합리하다. 물론 경쟁에 있어 아마선수들이 분명 불리하겠지만, 프로로 가는 것 역시 하나의 실력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현대사회에서 프로선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살린 자랑스러 운 직업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올림픽 일부종목에 프로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은 시대의 변 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를 막는 것이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5.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에릭이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일요일에 거행되는 시합에 단호하게 불참을 결정하였는데 내가 에릭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한 행동을 취했었겠는가?

만약 본인이 에릭의 입장이었어도 신념을 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 부터는 쉽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일이든 한 번의 금기를 깨긴 어렵지만 그 후엔 더 이상 망설임이 없다는 뜻이다. 조국 혹은 우리 민족을 위해서라는 명목 하에 자신과의 약속인 안 식일을 어긴다면 추후에도 이는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도 '이건 어쩔 수 없어'라는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겠지만 본인에게 는 조국이 종교보다는 먼저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다. 비록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 꼭 필요한 상황이어도 말이다.

만약 스스로의 신념을 굽히고 금메달을 땄다면 국민적 영웅일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패 배자이며, 후회와 안타까움이 남는 금메달일 것이기 때문이다.

6.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인 쿠베르탱이 추구하였던 진정한 올림픽 정신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쿠베르탱은 파리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870년 보불(普佛)전쟁(프로이 젠⋅프랑스 전쟁) 후에 프랑스 청소년의 교육개선에 뜻을 두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식교육 중심의 중등교육 제도를 비판, 영국에 있어서의 스포츠 교육의 실제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 다. 그는 스포츠를 학교교육의 일환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선 교육을 전적으로 지적 교양이나 문화적 도약만으로 국한하려는 대학교수 집단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데 주력 했다. 또한 그는 고대 올림픽경기의 이상을 스포츠 실천의 지도이념으로 삼고, 국제경기협 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고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가 된다. 하지만 이런 밑바탕에는 어린 시절 조국 프랑스가 프러시아 군에 맥없이 지는 것을 목격한 이후이다. 이런 기억이 바탕이 되어 그는 영국과 미국, 캐나다 등 전 세계 각지를 돌며 강인한 조국의 건설을 위한 체육에 크나큰 관심을 보인다. 또한 쿠베르탱은 신사들은 특정한 분야에서만 우수함이 아니라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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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에서 고르게 잘해야 하고, 공정한 결과에는 승복해야 하며, 연습이나 훈련은 속이는 것 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전문적으로 스포츠를 연습한 사람은 취미로 연습한 사람에 비해 공 평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근대올림픽의 이상은 스포츠에 의한 인간의 완성과 경기를 통한 국제평화의 증진에 있다. 따라서 올림픽의 표어도 라틴어인 “보다 빠르게, 보다 높게, 보다 강하게(Citius, Altius, Fortius)”라고 하였다. 또한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 다”라는 쿠베르탱이 말한 올림픽 강령 속에서 올림픽의 이상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7. ‘해럴드’가 유대인의 민족적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올림픽에서 승리를 열망했던 것도 순수한 스포츠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스포츠 정신'이란 '스포츠맨십'과 동의어이다. 하지만 아마추어와 프로패셔널 사이에는 ' 스포츠 정신'에 있어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스포츠 정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경기규칙을 준수하며 부정과 완력, 허위 등의 과오를 범하지 않으며 타인이 범하는 것도 묵과하지도 않는다. 또한 타인의 방해가 되는 일이나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도 하 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하면 해럴드가 유대인의 민족적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올림 픽 승리를 열망했던 것은 단순한 개인의 열망일 뿐이다. 또한 그는 대학내부의 규정까지 어 겼다. 아무리 정치사회적 관계에 기대어 스포츠가 확대되기는 하지만 올림픽의 지향점이 정 치⋅사회⋅종교 기타 사상과 스포츠의 결합은 아니다. 오히려 올림픽은 순수한 스포츠 정신 을 내세워 이 반대의 행위를 주장한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유대인 민족 차별극복이라는 목적을 내세운 해럴드는 순수한 스포츠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또한 '경기자체를 즐겨 라'는 부분에서 순수한 스포츠 정신이라고 말하기에 껄끄러움이 남는다. 그러나 그의 열망 이 타인에 피해를 끼쳤거나 혹은 그가 반칙을 저지른 것은 아니라는 점은 고려해봐야 한다.

자기 자신의 열망을 과연 비순수라는 엄격한 잣대에 놓고 봐야 할까 생각해봄직하다.

5. 스포츠의 이해: 올림픽에 관하여

1) 올림픽의 개요

올림픽(영어: Olympic Games, 프랑스어: Jeux olympiques, 올림픽 경기 대회)은 각 대 륙에서 선수들이 참가해 여름과 겨울스포츠 경기를 하는 국제적인 대회이다. 2년마다 하계 올림픽과 동계올림픽이 번갈아 열리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가 감독한다. 오늘날의 올 림픽은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5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열렸던 고대 올림피아 경기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말에 쿠베르탱이 고대 올림피아 제전에서 영감을 얻 어, 근대 올림픽을 부활시켰다. 이를 위해서 쿠베르탱은 1894년에 IOC를 창설했으며, 2년 뒤인 1896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열렸다. 이때부터 IOC는 올림픽 운동의 감독 기구가 되었으며, 조직과 활동은 올림픽 헌장을 따른다. 20세기에 올림픽 운동이 발전 함에 따라, IOC는 변화하는 세계의 사회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이러한 변화의 예로는 얼음 과 눈을 이용한 경기 종목을 다루는 동계 올림픽, 신체 부자유자를 위한 패럴림픽, 10대 선 수들을 위한 유스 올림픽 등을 들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IOC는 20세기의 변화하는 경 제, 정치, 기술 환경에도 적응해야 했다. 그리하여 올림픽은 쿠베르텡이 기대했던 순수한 아 마추어 정신에서 벗어나서, 프로 선수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올림픽은 점차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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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올림픽의 상업화와 기업 후원을 놓고도 논란이 생겨났다. 또한 올 림픽을 치르며 발생한 보이콧, 도핑, 심판 매수, 테러와 같은 수많은 일들은 올림픽이 더욱 굳건히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올림픽은 국제경기연맹(IF), 국가 올림픽 위원회 (NOC), 각 올림픽의 위원회(예-밴쿠버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로 구성된다. 의사 결정 기구인 IOC는 올림픽 개최 도시를 선정하며, 각 올림픽 대회마다 열리는 올림픽 종목도 IOC에서 결정한다. 올림픽 경기 개최 도시는 경기 축하 의식이 올림픽 헌장에 부합하도록 조직하고 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올림픽 축하행사로는 여러 의식과 상징을 들 수 있는데 올림픽기나 성화가 그 예이다. 올림픽은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33개의 종목 과 약 400개의 세부종목에서 13,000명이 넘는 선수들이 겨루고 그중 각 종목별 1, 2, 3위 는 각각 금/은/동메달을 수여받는다. 세계 언론에서 각각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경기를 중 계하기 때문에 이름 없는 선수가 개인적, 국가적,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와 더불어 올림픽 경기는 개최지와 개최국에게도 이름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된다.

2) 근대 올림픽

① 최초의 근대올림픽 : 자파스 올림픽

에방겔리스 자파스(Evangelis Zappas, 1800~1865)는 그리스 독립전쟁 참전용사이자 박 애주의자, 그리고 사업가였다. 생애 대부분을 루마니아에서 보낸 그는 동부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 중 한사람으로 성공했는데, 수초스가 주장해온 고대올림픽의 부활에 대한 생 각을 접하고는 1856년 그리스 정부에 강력하게 이를 탄원했다. 마침내 그리스는 1858년 아테네에서 최초의 근대올림픽을 1년 뒤인 1859년에 개최하기로 공식선언을 하게 된다. 하 지만 정부로서는 국가부흥의 과제를 실현해야 했기에 농업올림픽과 산업올림픽을 함께 열기 로 했다. 근대올림픽 출범을 위한 자파스의 노력의 결과로 제1회 아테네올림픽이 열리기로 한 소식은 유럽 전역으로 타전됐지만 많은 관심을 끌진 못했다. 허나 영국 웬록(Wenlock) 지방에 있는 W.P. 부룩스(Brookes) 박사에겐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이 모든 소식을 꼼꼼히 챙긴 그의 상세한 기록들은 근대올림픽이 어떻게 출현하게 됐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 는 역사적인 자료이다. 웬록에서 연례적으로 소박한 수준의 운동경기를 개최했던 브룩스 박 사는 아테네에서 최초의 올림픽이 열리기 두 달 전인 1859년 7월에 열린 웬록 올림픽대회 를 후원했다. 그는 또 아테네올림픽위원회에 대회 우승자에게 줄 10파운드의 은화를 상금으 로 보냈는데, 당시 위원회는 자파스의 상금 외에 영국의 웬록 올림픽 위원회의 추가 상금도 있다고 발표했다. 자파스는 고대올림픽이 열렸던 파나시나이코스 경기장에서 올림픽을 열 수 있도록 막대한 발굴비용을 제공했지만, 1859년의 올림픽은 아테네 북쪽 지역에서 개최 됐다. 1회 대회는 숙련된 선수들이 부족한데다, 종목도 매우 적어서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② 브룩스 박사와 영국 올림픽운동

1860년대 브룩스 박사는 올림픽운동을 영국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수행했고, 1859년 아 테네올림픽에서 자신이 보낸 웬록상을 수상한 그리스의 페트로 벨리사리오우를 웬록 올림픽 의 최초의 명예회원으로 위촉하며 그리스와 국제교류를 진행시켰다. 이 명예회원 리스트의 맨 마지막 줄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등재됐는데, 이로부터 30년 뒤의 일이다. 어쨌든 웬 록 올림픽 위원회와 그리스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이라는 같은 이름을 쓰고, 같은 목표를 향 해 나아가기로 하는 자매결연을 맺어 1860년대 올림픽 국제운동의 효시를 보여주었다.

이런 국제운동의 여파에 힘입어 마침내 1866년 영국 런던에서 국내올림픽대회가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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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열리게 됐다. 하지만 귀족 중심으로 꾸려진 아마추어운동클럽(Amateur Athletic Club) 은 노동자나 기계공, 공예가들이 돈을 받고 뛰는, 브룩스가 추진하는 올림픽을 반대하며 대 부분 참가하지 않았다. 오토 1세에 이어 1862년 왕위에 오른 덴마크 출신의 게오르게 1세 는 1865년 세상을 떠나며 올림픽에 막대한 재산을 기증한 자파스의 후원을 바탕으로 1870 년 제2회 아테네올림픽을 개최했다. 3만 명이 경기를 관람했고, 1회 대회에 비해 많은 종목 이 채택됐으며, 그리스 전역에서 참가자들이 몰리며 성황을 이뤘다. 크레타 섬에서 온 노동 자가 레슬링을 우승했고, 아테네의 한 도축업자가 200m 달리기에서 1위를 하는 등 당시 참 가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대학교수들이 차기 대회에서 노동자계층 은 참가제한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5년 뒤에 열린 1875년 올림픽은 경기내용과 참가규모 에서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올림픽위원회는 1888년 초 자피온(Zappeion) 올림픽 빌딩(2004년 아테네올림픽 미디어센터)을 준공한 뒤 가을에 1888년 올림픽을 열겠 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아무런 조직도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스포츠를 반대하 는 사람들이 중심이 된 올림픽위원회는 고대올림픽 부활의 꿈을 살려내지 못했다.

③ 쿠베르탱 남작의 등장

이렇게 그리스에서 올림픽 부활의 노력이 무산될 당시, 영국의 브룩스 박사는 아테네에서 국제올림픽대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거듭 시도했다. 그는 런던에 있던 그리스 대사 존 게 나디우스 설득에 나섰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러는 사이 새롭게 올림픽의 부활을 꿈꾸는 프 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이 나타났다. 그는 어릴 적 조국 프랑스가 프러시아 군에 맥없이 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영국과 미국, 캐나다 등 세계각지를 돌며 강인한 조국건설을 위한 체육에 크나큰 관심을 보이다, 마침내 스포츠교육의 내용이 잘 담긴 웬록의 프로젝트를 발견하게 된다. 이게 결국 브룩스 박사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쿠베르탱은 자신의 연설에 브룩스 박 사의 글들을 인용하기 시작했고, 브룩스 박사와의 서신교환을 통해 결국 1890년 웬록을 방 문했다. 브룩스 박사는 근대올림픽 부활을 기리는 기념식수를 쿠베르탱에게 권했고, 자신의 올림픽에 대한 구상을 설명했으며, 1859년 자파스 올림픽의 우승자 리스트까지 보여주었다.

1866년 런던에서 열린 국가올림픽대회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한 것은 물론이다.

3) 올림픽 심벌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헌장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이상이나 철학을 표현하는 심벌을 사용한 다. 오륜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올림픽 심벌은 5개의 둥근 고리가 얽혀있으며 각 원마다 5대 륙을 상징한다.(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는 아메리카로 합쳐 있다.) 파랑, 노랑, 검정, 초록, 빨간 고리에 흰색 바탕은 올림픽기를 나타낸다. 이 색들이 선택된 이유는 모든 국기에서 적 어도 이 5개의 색 중 하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 표어는 라틴어로 Citius, Altius, Fortius이며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라는 뜻이다. 쿠베르탱의 이상은 올림픽 선서에 더 잘 나타나 있다. 매 올림픽이 시작되기 몇 개월 전에 고대 그리스에서 제사를 지냈던 그 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올림픽 성화가 채화된다. 여자배우가 마치 여자사제인 것처럼 연기해 서 태양광선을 포물면 거울(오목 거울의 하나)의 안쪽에 집중시켜서 점화한다. 그 후에 여 자는 첫 번째 성화 봉송주자에게 성화를 넘기고 개최도시의 개막식이 열리는 올림픽 경기장 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올림픽 성화는 전달된다. 올림픽 심벌로서의 올림픽 성화는 1928년 하계올림픽 때 이미 있었지만, 성화 봉송은 1936년 하계올림픽 때 독일정부의 나 치즘 선전의 일환으로 처음 시행된 것이 그 유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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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올림픽 종목

올림픽 종목은 총 33개 부문 52개 종목에서 약 400개의 경기로 이루어져있다. 예로서 하 계올림픽 레슬링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의 두 종목으로 나뉜다. 여기서 10경기는 남자부, 4경기는 여자부로 열리며 분류기준은 체중이다. 하계올림픽은 26개, 동계올림픽은 7개 부문 으로 이뤄져있다. 하계올림픽에서는 육상, 수영, 펜싱, 체조가 1회 대회부터 빠짐없이 정식 종목이었으며, 동계올림픽에서는 크로스컨트리,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노르딕 복합, 스 키 점프, 스피드 스케이팅이 1924년 동계 올림픽부터 지속된 정식종목이었다. 배드민턴, 농 구, 배구와 같은 정식종목들은 처음에는 시범종목이었으며 그 후에 정식종목으로 승인 되었 다. 2012년 올림픽 때는 야구와 소프트볼을 제외한 26개 부문에서 경기가 열린다. 2016년 과 2020년 올림픽 때는 럭비와 골프가 추가되어 다시 28개 부문에서 경기가 열린다.

5) 아마추어 정신과 프로들의 참가

영국 명문 공립학교의 이념은 쿠베르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영국 공립학교는 스포츠를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해서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mens sana in corpore sano를 표어로 삼았다. 이념에 의하면 신사들은 특정 분야에서만 우수해서는 안 되고, 고르게 잘해야 하며 공정한 결과에는 승복해야 하고 연습이나 훈련은 속이는 것으로 여겼다. 전문적으로 스포츠를 연습한 사람은 취미로 연습한 사람에 비해 공 평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대 올림픽에서는 프로선수의 참가불허가 많은 분쟁을 가져 왔다. 1912년 하계올림픽의 근대 5종 경기와 10종 경기에서 우승한 짐 토프(Jim Thorpe) 는 올림픽에 나가기 전에 준 프로야구선수로 활동했다는 게 나중에 밝혀져 메달이 박탈되었 다. 짐 토프는 후에 동정적 여론의 힘을 업고 1983년에 메달을 돌려받게 된다. 1936년 동 계 올림픽 때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스키선수들은 돈을 위해 스포츠를 했는데 이러한 행동이 아마추어 정신에 위배된다고 결정되어 그들은 스키종목에 참가할 수 없었다. 20세기에 이르 러서 계급구조가 붕괴되면서 이른바 귀족적인 신사라는 아마추어 선수에 대한 정의는 시대 에 뒤처지는 말이 되게 된다. 일부 국가들은 '정식 아마추어 선수'를 '키워서' 순수한 아마추 어 정신을 벗어나고 있었고, 자신이 내는 비용으로 연습하는 선수들의 불리함에 대한 목소 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IOC는 아마추어 정신에 관한 입장을 고수했다. 1970년대 초 에는 아마추어 정신이 올림픽헌장에서 폐지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프로 선수들의 출전은 국제경기연맹(IF)에서 결정짓도록 되었다. 2008년 현재 아마추어 선수만 출전하고 있는 올림픽 종목은 복싱이 유일하며 남자 축구에서는 나이가 23세 이상인 선수 를 세 명까지만 선발할 수 있다. 이는 아마추어 정신을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http://ko.wikipedia.org/wiki/%EC%98%AC%EB%A6%BC%ED%94%BD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295&mobile&categoryId=16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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