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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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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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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교건축 I

한국건축사

제09주

(2)
(3)

유교(건축)의 개념

• 유교儒敎 /선비유/ 의 개념과 의식

• 공자 이전에도 종교가 있었다. 하지만 체계가 있는 사상으로 정립된 유교는 공자로부터 시작되었고, 공자(BC 551-479)를 유교 의 종주로 여긴다.

• 유교는 공자를 시조로 한 교(敎)로써 인(仁)으로 모든 도덕을 일관하게 하고 명덕 친민 지선은 유교의 삼강령이며 (明德-덕을 밝게 드러내야한다 新民/親民 덕으로 백성을 새롭게 해야한다/친하게 된다 至善-최선을 다해 합당하게 행동한다)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는 팔조목이 된다 (格物 세상의 모든 이치를 찬찬히 따져본다 致知 지식과 지혜를 극치에 이 르게 한다 誠意 의지를 성실히 다진다 正心 마음을 바로 잡는다 修身 자신을 수양한다 齊家 집안을 화목하게 이끈다 治國 나 라를 잘 다스린다 平天下 세상을 화평하게 한다). – 대학.

유고의 경전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역경,易經))-여기까지 삼경-, 예기(禮記), 춘추(春秋)의 오경(五經)과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四書)였다.

원유시대에는 유교에 종교성과 예교성이 서로 밀착해 있는 반면, 원시유가시대의 경우 종교성과 예교성이 갈리면서, 예교성이 한층 위로 올라가게 된다. 즉, 공자는 예교성을 중시하는 군자유(君子儒) 가 되기를 바랐다. 한편 예교성 위에 형이상학과 우주 론 등까지 논하게 되는 철학성 등도 등장하는데, 이를 성리학(性理學)이라 하며, 시기적으로는 12세기에 나타난다.

• 이 12세기는 여말선초, 즉 고려=불교, 조선=유교라는 등식이 생겨나는 경계시점이다.

예교성 종교성

철학성 예교성 종교성

원유시대

(밀착)

원시유가시대

(분리, 예교성 상우) 공자의 시대

성리학 시기

(철학성 등장)

(4)

• 성리학은 조선조의 사상계를 지배했다. 신유교라고 하는 이 학문은 인생을 논하고, 우주의 본체까지 살펴보는 차 원 높은 학문이었다. 당시 사회 지도층은 성리학자였고, 그들은 이 학문의 실천방안을 논하였다. 유교건축은 바로 그러한 배경하에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끊임없이 건립된다.

• 유교의 개념의 개략에 대한 다이어그램

현세에서의

쾌락과

감상

죽음

대한 공포와

불안

생명 孝효 ( 죽음과

사후에

대한 설명

)

효를 기초 로한 가족론

가족론

기초 로한 정치

형이상학 우주론

종교성 예교성 철학성

유교의 개념 변천 도표

인생 우주

유교의 정수: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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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의 정신과 유교건축

• 유교의 정수는 효(孝)이다. 효 개념은 ‘조상 – 나 – 후손’이 일족이 되어 계속 연속성을 갖고 생명의 영원함을 믿는다. 결국 여 기에서 조상숭배, 성현숭배를 위한 건축적 공간이 필요하게 되고, 그곳이 바로 묘(廟) /사당묘/, (가묘, 사묘, 문묘, 종묘 등)인 것이다. 따라서 유교건축의 연구는 묘(廟-사당)의 개념설정부터 시작된다.

유교건축은 제향과 강학의 두 기능을 갖추고 있는데 제향은 문묘나 향교의 대성전에서, 강학은 명륜당에서 하게 되어 있다. 문 묘는 중앙의 국학으로 서울에, 향교는 지방에 두었으며, 서원은 사학으로 지방에서 발생되었다. 이들 유교건축은 불교사원건 축에 비해 유교의 검소, 소박한 기풍에 따라 화려하거나 장엄하지 않다. 건축양식도 간결명료하다. 일반적으로 문묘의 배치는 초기에는 전묘후학이었던 것이 후대에는 전학후묘로 바뀌었다. 문묘와 향교의 배향은 공자와 그 제자 사성과 우리 나라의 선 현이며, 서원은 우리 나라의 선현만을 배향한다는 점이 다르다.

• 향교건축에서의 일반적인 흐름도 (문묘의 형성)

유교사상 정신적 지주

위폐안치

의식공간 대성전

동, 서무

문묘

기타 성현

유교적

, 건축적 질서

(6)

상주향교의 석전의식

Vid001-성균관의 춘기석전대제

Vid002-이천향교 춘기석전대제

(7)

석전(釋奠)의식과 유교건축

• 유교에서 선성(先聖),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석채전폐(釋菜奠幣, 해석할석, 나물채, 제시지낼전, 비 단폐)라 하는데 줄임말로 석전(釋奠)이라 한다. (석채전폐 :: 나물을 놓고, 폐백을 드림의 뜻) 석전을 올린다.

• 중국에서 한나라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이자, 공자를 선성, 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文廟)의 주향(主享, 주 인주, 누릴향)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르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 석전, ‘석채전폐(釋菜奠幣)는 또한 대체로 공자를 중심으로 4성(四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을 모신 문묘를 중설위(中設位)라 하였다. 여기에 공자의 72제자와 한·당·송·원의 선유(先儒)까지 합 하여 모신 곳을 대설위(大設位)라 하였다.

현재는 1949년 6월에 전국유림대회를 개최하여 공자(孔子)와 안연(顔淵),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정 자(程子), 주자(朱子),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을 모시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이 소설위(小設位)이다.

전국 향교가 이에 준하여 문묘제례 즉 석전(釋奠)을 올리고 있다.

당태종때 각 주의 현마다 공자묘를 세웠다. 명에 와선 태학의 문묘를 대성전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 로 확립된다.

• 우리나라는 최초로 태학을 설립한 것이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으로 석전도 함께 봉행했을 것이다. 고려에 선 국자감에서 석전례를 행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선 태조 7년 숭교방에 성균관을 설치해 국립 최고학부의 기 능을 다하게 했다.

• 석전의식은 유교에 있어 핵심이며, 그 의식공간의 주 건물이 바로 대성전이다. 따라서 성균관향교는 유교건 축의 중심이 된다.

(8)

• 한편 유교에 있어 효를 기초로한 가족론, 생명론으로서의 효도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와 관련된 유적이 가묘(家廟)/

집안사당, 서원(書院)/ 글집, 사우(祠宇)/사당집, 재각(齋閣)/재계할 재, 누각각, 정려(旌閭)/기정, 이문려 등이다. 이들은 사회적인 연관성이 강한 유적으로서 이들의 유형적인 체계는 고건축 특유의 전통을 갖고 있어 한국건축사 내에서 유 교건축의 범주로 분류되고 있다.

• 유교건축은 수가 매우 많다. 오직 향교건축만 전국에 230여 곳이 파악된다. 유교건축의 대표적인 곳으로는 서울의 문 묘와 지방의 향교가운데 강릉향교, 장수향교, 나주향교, 영천향교 등이 있으며, 서원은 소수서원, 도산서원, 무성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등으로 각 지방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 불교건축 vs. 유교건축

• 불교건축의 중심성 (방향성)과 유교건축의 위계성 : 0의 중심성과 1/一의 위계성

• 0과 1: 이진법을 이루는 두개의 숫자 0과 1은 현대사회의 근간이 되는 디지털 세계의 구성요소이다. 0은 500년경 인 도의 수학자가 발견한다. 0은 중심의 한 점에 모이는 중심성을 가진 수이다.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건축에서의 중심성 이라는 가람배치의 큰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반면에 1은 모든 수의 으뜸이고 시작을 의미한다. 위계에 있어서 최고이 다. 스승과 제자의 위계관계처럼 1의 위계성은 유교건축 강학공간의 공간배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9)

불교계 사찰 배치형식 (중심성)과 유교건축 배치형식 (위계성)

≪ 부석사 가람배치의 중심성과

도동서원 배치의 위계성/ 축성 ≫

만다라의 중심성

불교건축 vs 유교건축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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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건축은 중심성이 가장 큰 개념으로 나타난다. 만다라나 불화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도상을 접해보면, 모든 도상의 중심에 붓타가 있으며, 그 주위에는 보살과 제사, 그리고 마지막에는 천왕과 인왕 등의 신중들이 둘러싸고 있다. 불교의 우주관을 보 더라도 불교의 세계는 중심의 한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의 배치를 따라가면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 긴 누각이 나오고, 누각의 정면으로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이 마주하고 서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의 좌우는 보 살전과 요사채가 감싸고 있다. 대웅전 뒤의 산에는 산신각과 조사당, 그리고 암자 등 작은 규모의 건축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여러 건축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대웅전 등의 주불 전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이 가장 높은 위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외곽으로 갈수록 그 위계가 점차 낮아지게 된다.

• 반면에, 유교건축의 경우는 이와 다르게 마치 군대에서 상급자에서 하급자에 이르기까지 계급별로 죽 늘어선 모습을 보인다.

일렬로 된 계급이 명확하다.

전후의 위계: 전후(前後)의 공간에서는 전(前)의 공간이 위계가 높다. 평지에서 맨 앞에 가장 높은 위계의 공간이 위치하고, 뒤로 갈수록 낮은 위계의 공간이 이어진다. 평지에 자리 잡은 향교의 배치에서는 맨 앞의 공간에 대성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 성전은 공자와 유교를 빛낸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 스승의 공간이 가장 먼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대성전 뒤로 이어 지는 공간이 명륜당의 공간이다. 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강의하고, 교육을 하는 공간이다. 마치 선생이 앞에서 걷고 제자 가 뒤에서 따라 걷는 듯한 위계가 건축에서도 보인다.

상하의 위계: 그런데 향교가 산비탈의 경사지에 위치하면 배치가 180도 달라진다. 제자들의 공간인 명륜당이 전면에 위치하 고, 스승들의 공간인 대성전이 그 후면에 위치하게 된다. 제자가 위에서 스승의 머리를 쳐다보면 안되는 것과 같이, 높낮이가 생길 때는 높은 곳의 위계가 상위공간이 되는 것이다. 즉 상하(上下)의 관계에서는 상(上)의공간이 위계가 높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좌우의 위계: 대성전 앞의 공간에는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동무와 서무가 있으며, 명륜당 앞에는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기 숙사인 동재와 서재의 공간이 자리한다. 한자로 일(一)이 가로로 놓인 것처럼 여기서도 위계가 나타난다. 동무는 중국의 유학 자들의 위패를, 서무는 한국의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신다. 그리고 동재는 상급생들의 기숙사이며, 서재는 초급생들의 기숙사 이다. 동과 서에도 위계가 확실히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좌우를 말할 때 좌(左)는 동(東), 우(右)는 서(西)를 의미한 다. 즉 좌(左)의공간이 우보다 상위의 위계임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재상들 중에서는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상급자였다.

불교건축 vs 유교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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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유교건축의 조성

[장구한 역사]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수나라로부터 승려 순도를 통해 불교를 전수받는다. 소수림왕은 불교 를 공인함과 동시에 유교교육의 최고기관인 태학을 설치한다. 태학은 귀족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서민자제의 교육기관인 당(堂)과 구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태학의 교과목은 유가경전이었고, 경당에서의 교육도 유교적 도덕이 주였다. 유교교육의 최고기관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유교문화의 풍토가 조성되고 있었음을 시사 한다. 태학의 설치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1600여년의 역사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에 있어서 유교는 치도(治道)/다스릴치, 길도/의 근간이었으며, 가정 및 사회에 있 어서 도덕규범의 준거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불교와 더불어 유교는 경세지도로, 불교는 심령구제지도로 각각 기능을 발휘한다. 조선시대의 유교는 이전시대와 크게 구별되어 전시대에 걸쳐 국교로 숭봉된다. 조선사회에서 의 유교는 봉건사회의 계급을 바탕으로 한 질서유지와 국가적인 통일성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 고려의 500년이 불교의 세상이었다면, 조선의 500년은 유교의 세상이었다. 조선은 나라의 시작과 더불어 나라 의 끝도 유교와 함께 하였다. 궁궐과 관아,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 사당건축과 별서건축인 정자, 주거건축 그 리고 사찰건축까지도 모든 분야의 건축에서 유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만큼 유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15세기와 16세기가 유교의 극성기의 시기라면, 17세기와 18세기의 유교는 경직 되고 폐쇄적인 자기방어의 시기였다. 19세기의 유교는 조선의 패망을 예상하듯 사회의 정신적인 지주역할을 상 실하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 매우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유교건축이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자 했던 우리 민족의 지혜를 엿보고자 한다.

(12)

향교와 서원건축은 유교건축에서 매우 주목을 받고 있다. 지방 향교의 문묘는 당시 유교적 신앙대상의 기본 유 형을 이루고 있었고, 이는 조선후기의 서원과 더불어 선사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유교조직의 기본단위를 이 루었던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사회체제 속에서 설립된 유교건축은 현재 전국의 아주 작은 마을 단위에까지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다.

• 종묘 창건(1395), 성균관 (1398) 이후, 충남의 오천향교(1905)를 마지막으로 관제성격의 조선 유교건축은 그 막 을 내린다. 나라가 어지러운 때, 지방유림 자체로 건립을 본 오천향교의 의미는 조선 유교의 강인함과 권위를 보 여준다.

성균관 스캔들 (드라마)와 촬영지인 전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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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별 유교건축 개요/ 성균관

• 성균관(成均館)/이룰성 고를균 집관

• 성균관은 태조 7년 (1398)에 창건된 조선시대 최고의 학문기관이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내에 있다. 임진란때 소실 이후 선조때 중 건된 것이지만, 배치, 기본 구조 등은 거의 똑같다.

평탄한 지형에 전묘후학의 배치로 꾸며진 성균관은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등 당시 문묘로서, 그리고 고등 교육기 관으로서 현재까지도 많은 건물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 공자의 사상이 가장 충실하게 전달되었던 이곳은 한국유교건축의 메카로써 그 상징성이 매우 크다. 아울러 공간성이나 조형미 등 건축적으로도 한국 유교건축의 규범이 되고 있다.

성균관과 과거시험: 조선시대 사대부의 자제들은 (1)7∼8세가 되면 사설 서당에 들어가 초보적인 학문과 습자를 배운 후,

(2)15∼16세가 되면 서울에서는 사학(四學)에, 지방에서는 향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3)소과(小科)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생원(生員) 이나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4)대과(大科)에 합격하여야 비로소 관직에 나아 갈 수 있다.

• 성균관은 조선시대에 인재 양성을 위하여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인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3가 53 성균관대학교 구내 에 설치한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國子監), 국학(國學), 태학(太學), 반궁(泮宮)으로도 불렸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주례(周禮)』에 나오는 '대사악은 나라를 세우는 학문과 정치를 닦는 일을 하기 위한 성균의 법전을 관장하 는 일을 한다(大司樂掌成均之法典 以治建國之學政)'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균'은 원래 음악을 조율한다는 말로, 어그러짐을 바 로잡고[整成] 과불급을 고르게[均平]한다는 뜻이다. 이에 근거하여 성균관은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유학을 천명하고 인재의 양성 과 풍속의 교화를 본연의 임무로 삼았다.

• 조선시대의 성균관·문묘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가 1394년(태조 3) 10월 한양으로 천도한 후 도성 건설에 착수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그리고 궁궐을 1395년 9월에 완공하고, 다음 달인 10월 25일에 문묘를 경영하도록 명하여 건 립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문묘는 무슨 사정인지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다가 태조 7년인 1398년 7월에 준공되었다.

이후 1400년(정종 2)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07년(태종 7)에 다시 지었다.

(14)

성균관, 문묘의 배치현황

조선시대 성균관은 국가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에 입각하여 통치체제에 필요한 고급 관리를 양성하는 교육기능과 성인이나 현인에 대한 제향을 하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공자가 문선왕으로 추봉됨에 따라 문선왕묘라 부르다가 원대 이후로 문묘라 한다.

vid003-서울 문묘 및 성균관 영상 콘텐츠.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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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향공간

• 성균관·문묘 입구에는 원래 반수(泮水)인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시내를 건너 들어오는 다리인 반교(泮橋)가 있었 다. 반교를 지나 신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 동무, 서무가 있고, 대성전 뒤에는 명륜당, 동재, 서재가 있다.

이와 같이 성균관·문묘의 중심부는 남쪽의 대성전 일곽의 문묘시설을 구성하는 제향(祭享)공간과 그 뒤편 명륜 당 일곽의 교학 시설을 구성하는 강학(講學)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 대성전이 있는 제향공간은 남향한 삼문(신문)을 들어서면 신로가 대성전 앞 기단 서쪽 아래까지 이어지고, 기단 위에는 대성전이 있으며, 대성전 앞 좌우에는 동무와 서무가 길게 남북 방향으로 배치되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무 북쪽으로 제기고 등이, 동무 북쪽으로는 동삼문이 있어 외부로 통하게 되어 있다.

말문

동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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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전은 남향을 하였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인 대성전 건물은 묘당건축의 특성에 따라 전면에 퇴칸이 나 있고, 나머지 세 면은 벽체로 감싸 내부를 어둠의 공간으로 만들어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퇴칸은 앞쪽으로 벽체 없이 기둥으로만 구성되 어 묘정으로 트여 있고, 뒤쪽으로는 벽체에 난 문을 통하여 신위가 모셔진 내부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문은 홀수 칸마다 3 곳에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한쪽 문짝이 약간 뒤틀려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위엄 있고 소박하게 처 리되어 유교의 성전(聖殿)임을 나타낸다.

대성전 기단 앞 동쪽과 서쪽에는 측백나무가 각각 한 그루씩 심 어져 있는데, 동쪽의 것은 가지가 셋으로, 세 가지 벼리[三綱]를 상징하는 삼강목이며, 서쪽의 가지는 다섯으로, 사람이 좇아야 할 다섯 가지 도리[五倫]를 상징하는 오륜목이다. 그리고 대성전 기단 아래에는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다.

• 대성전 정면 앞마당 좌우에 배치된 정면 11칸, 측면 1칸 반 규모 의 동무와 서무는 앞의 퇴칸이 개방되었고, 내부는 전체가 트인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칸 및 양 협칸에 두 짝의 판 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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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문묘 향사와 관련되는 건물로 제기고, 수복청, 전사청, 숙수청, 향관청, 감찰제집사방 등이 있다. 제기 고는 문묘 향사에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는 건물로 서무의 뒤쪽 별도의 마당에 북향하고 있다. 수복청은 제기고 를 마주보는 북쪽에서 남향하고 있다. 전사청은 제수용품을 장만하고 보관하는 건물로 대성전의 서쪽, 서무의 서북쪽에 별도의 일곽을 형성하고 있다.

서무와 쪽문, 수복청 (문묘를 관리하는 남자 하인들의 거처), 제기고 (문묘 향사에 필요한 제기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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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학공간

명륜당 구역은 대성전 일곽과 담으로 분리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명륜당은 남향을 하고, 남쪽 앞마당 좌우로는 동재와 서재가 길게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명륜당 중앙 3칸은(맞배지붕) 성균관의 정당(正堂)인데, 국학의 강당으로 사용되었 다.

정당 좌우에 연결된 익당(翼堂)은(팔작지붕) 각각 정면 3칸인데, 정당보다 지붕이 낮다. 본당인 정당 바닥은 대청마루를 깔았고, 협실인 동·서 익당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은 임금이 문묘에 헌작한 후 유생들을 대상으로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이자 문묘 배향시 재실로 사용되었다. 건물의 규모와 구조 면에서 명륜당은 대성전보다 격을 낮추어 지었다.

명륜당 앞뜰 가운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학 문을 강의하였음을 상징한다. (400년, H 26m, W12.09m) 임진왜란때 문묘가 불탄 후 다시 새울 때 함께 심어졌다. (천연 기념물)

명륜당은 유학을 강학하던 강당이며, 좌우에 동서 두재가 있는데, 동재에는 생원, 서재에는 진사를 기숙시켰다. 명륜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것으로 맹자의 동문공편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든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에서 유 래한다.

(19)

• 동서양재는 흔히 동재에는 양반자제, 서재에는 서민자제를 두고, 다시 내외양사생으로 갈라져 내사생(內舍生)은 정규학생이 며, 외사(外舍)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광생(增廣生)이 대기하였다.

• 성균관 유생(儒生)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서양재는 명륜당과 동시에 건축하였는데, 명륜당 앞마당 쪽이 아닌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동재는 동향이며 18칸이고, 서재는 서향이며 18칸인데, 각각 건물의 앞뒤에 반 칸 퇴를 덧단 구조이며 단청을 생략하였다.

• 대문은 동재의 남쪽에 있는데, 동향이며 2칸이다. 대문은 남쪽으로 동삼문에 연결되어 있다.

• 정조 때 윤기(尹愭)가 지은 「반중잡영(泮中雜詠)」에는 성균관에 출입하면서 몸소 경험한 것과 들은 이야기들을 장편시로 엮 어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 동재와 서재의 건축 내용 및 공간 이용을 짐작케 하는 글귀가 나온다. "성균관의 유생은 기숙사 인 재에 들어갔다. 재는 동재와 서재가 있어 모두 28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동재의 첫째 방은 약방이고, 그 다음은 우제일 방·장의방·진사칸·하일방·하종방의 순서로 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끝 방을 하재라 하였다. 그리고 서재의 첫째 방은 서일방이 되고 그 이하는 동재의 순서와 같았다. 재생 중에서 환자가 생기면 약방에서 투약하였으며,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원(活人院) 의 의원이 와서 진찰도 하였다.“

•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세종 11) 200명으로 증원되었다. 후에 경비가 부족하여 75명으로 감축하였다가 영조 때 증원하여 100명을 두도록 하였다. 생원·진사로서 입학한 정규생은 상재생(上齋生) 또는 상사생(上舍生) 이라 하였으며, 나머지 반은 기재생(寄齋生) 또는 하재생(下齋生)이라 하였다.

• 정원이 모자랄 경우에는 사학당 유생 중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나 지방에서 온 유학생 중에서 보충하였다. 입학 연령에 는 제한이 없었으며, 대개 생원·진사에 급제하면 대과인 문과(文科)에 급제하기 위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성균관 유생들 은 통학하는 것이 아니라 동재, 서재에 기숙했고, 식사도 양현고에서 제공하였다.

(20)

명륜당, 동재, 서재

(21)

명륜당 앞 회초리 맞는 돌, 대학도서관인 존경각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육일관, 유생들의 식사를 만드는 여인들의 거처인 비복정, 유생들의 식당인 진서식당

(22)

유생들의 학습장소이자 시험장소인 비천당, 성균관에 속한 관원의 사무실인 정록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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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록청 뒤의 향관청 (문묘 향사때 헌관 및 제집사들의 거처), 동월랑 및 서월랑 제사시에 감찰집사, 유사등이 사용했지만, 평소에 동서재가 좁은 탓에 학생들의 또다른 기숙사로도 사용된 곳. 향관청이 배향공간인 탓에 동월랑, 서월랑도 뒤돌아 있다. 동재와 서재도 배향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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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별 유교건축 – 향교(鄕校 )/ 시골향, 학교교

향교는 인재를 양성하고 유교이념을 보급하여 민중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전국의 크고 작은 모든 고을에 세운 관학으로서 최초의 설립은 12세기 중엽으로 본다.

• 조선 초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한 지방관제의 개편과 함께 지방의 목민관으로써 수령의 역할을 향교의 설립과 흥학(興學)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조는 즉위 원년에 모든 도의 안찰사에게 학교의 흥폐로서 수령을 고과하 라고 하여, 향교에 대한 수령의 관심을 높게 한다. 이어서 수령의 직무로서 제시되는 ‘수령칠사(守令七事)’에 ‘학 교흥(學校興)’이 추가된다. (대한민국의 유난한 교육열의 근원이 된 듯)

• 동국여지승람이 나온 성종17년(1488)까지는 전국에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체제를 갖춘다. 당시의 동국여지승 람에 의하면 8개도의 329개소의 향교가 존재하는데, 지방관제와 비교할때 거의 모든 읍에 향교가 설립된 것이 다. (유교의 최전성기인 15세기)

• 향교는 조선말기까지 행정구역의 변화가 있을 때 반드시 새롭게 향교가 설치된다. 향교는 한국의 대표적인 유 교건축으로서 내적으로도 풍부한 역사와 사회성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이다. 또한 관학으로서의 권위와 상징성 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현존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학교건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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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향교

전재후당형 전 동재/서재, 후 명륜당, 울산향교

입구의

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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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향교

전당후재형

,

명륜 ,

동재 고흥향교 / 서재

외삼문

내삼문과 명륜 대성전

동재 ,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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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별 유교건축 – 서원 (書院) /글서 집원

• 16세기 조선사회는 재야에 은거해 있던 사람들이 이때에 이르러 세력집단을 형성하면서 정권참여를 모색하고,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게 된다. 한편 성리학이 그들 사림을 중심으로 근원적으로 연구되면서 철학적 발판을 마 련하고, 그러한 발판을 디딤돌로 하여 사림정치가 굳어지는 계기가 바로 16세기에 이루어져 간다. 서원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사림들이 향촌기지로서 그 구실을 하면서 발전하여 갔다.

• 이러한 시대적 산물인 서원은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16세기가 효시이며, 건립의 초창기라 할 수 있는 명종대 에 만해도 20여개소의 서원건축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후 선조대를 거쳐 17세기에도 계속적인 증가일로에 있다 가 숙종 연간에는 그 건립이 최고조에 달해 무려 전국에 300개소의 서원건축이 이루어지게 된다.

• 현재에는 그 수가 수백에 달하지만, 사실상 가치를 크게 부여할 수 있는 건축은 대원군의 서원철폐에서 제외된 47개소의 서원과 사우 중 주로 도학서원(道學書院)으로 분류되는 – 예를 들어 영남의 도산, 도동, 옥산, 병산, 소 수, 남계서원, 그리고 호남의 필암, 무성서원 등 – 전국적으로 약 15개소 유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은 짧은 역사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한국건축 연구에 있어 배치나 공간론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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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 필암서원

전당 ( 청절당

명륜

), 후재형

( 진덕재 , 숭의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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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루 곽연 명륜당인 청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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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 - 청절당

동재인

진덕재와

서재인

숭의재

, 그리고 경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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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청과 외삼문, 그리고 뒤쪽의 대성전

대성전 동쪽의 장판각과 내부

곽연루 서편의 행랑채 유생들의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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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 서애 류성룡과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1542 ~ 1607)을 기념하기 위 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의 성격은 매우 복합적이어서 고등 사립학교이자, 유교의 종교시설이며, 지역사회의 사설 행정기구이기도 하다. 또한 류성룡은 하회마을 충효당의 주인이기도 하고, 풍산 류씨의 중흥조이기도 하다. 그는 학봉 김성일과 더불어 퇴계 이황

(1501~1570)의 수제자로 수학하였고, 요직을 역임하 였다. 선조때 비서실장(도승지), 부총리(우의정), 내무 장관(이조판서)를 겸임한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권율 과 이순신 장군을 발탁하여 요직에 앉힌다. 임란발발 이후 병조판서까지 겸하고, 이후 영의정에 올라 군사 와 정치를 총지휘한다. 임란말미에 정적들의 탄핵으로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 하회에 은거한다.

서애는 당시 학봉파와 더불어 퇴계학파의 쌍벽이 되 지만, 학봉은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퇴계학파의 정통 을 이은 반면, 서애는 관직생활로 후학이 적다.

• 터는 서애 자신이 생전에 정한다. 현 위치로 이건하는 사당에 그 이유로 읍내 도로변은 공부하기에 적당하 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혀 교육장소에 대한 이상적인 조건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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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인 입지/ 터잡기

• 한국건축을 감상하는 첫단계는 건축과 지형 환경 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는 설계과정의 첫 단계이기도 했다. 서원의 입지는 배후마을인 하회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다.

• (병산서원 풍수형국도) 밀개형의 형국. 학가산을 뿌리로 보고, 풍천면을 줄기로 보고, 화산에서 꽃 을 피우고, 꽃의 수술에 해당하는 정혈, 화혈이 바로 서원이 된다. 서원 동쪽의 너들대벽은 서쪽 에 비해 산세가 높고 강하다. 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데, 입수한 물을 동쪽의 강한 산세가 급히 떠미는 이른바 ‘밀개형’ 형국을 이룬다. 즉 강물 에 실려오는 땅의 기운이 쌓일 틈이 없어서 이곳 은 양반 지주들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다. 또한 서원 앞에 명당자리가 좁아서 논밭으로 부적당하 다.

• 그러나 밀개형의 형국은 서원의 입지로는 최상이 다. 한적한 분위기가 교육환경에 적합함과 동시 에, 안동부 행정권으로 부터의 격리를 꾀할 수 있 는 곳이다. 유급하지 않고 빨리 졸업해서 빠져나 가야 할 학생들에게는 최선의 지리적 풍수적 이 점이 된다.

vid004-병산서원-KBS-Korean Heritage vid005-안동의 경치 by 한울

vid006-1분부터-자연을 담은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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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심적인 건축의 경관구조]

• 병산서원은 뒤쪽 완만한 화산과 앞 절벽 병산 사이에 중간에 자리 하여 강변으로도, 산으로도 근접하지 않은 매우 중간적인 위치를 점한다

• 병산서원의 외관은 뒤쪽 배경없이 건축 단독의 외관을 갖는다. 불 교사찰이 이곳에 자리잡았다면 뒷산과의 관계가 달라졌을 것이다.

사찰의 경우 중요한 불전들은 뒷산과 중첩되어 일체화된 경관을 나타낸다. 즉 불교건축의 외형은 암시적이고 자연과의 일체를 꾀하 는 반면, 병산서원에서 보이는 유교건축은 폐쇄적이고 인위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의 경관구조는 역전된다. 병산서원 내부에서 바라 보면 외부의 자연환경은 앞의 건물들과 중첩되면서 일체화된 경관 으로 등장하지만, 사찰의 경우 내부에 조성된 마당과 앞의 건물이 부각되는 반대의 구조를 갖는다.

• 이러한 차이는 자연환경과 건축물의 위치를 설정하는 차이에서 발 생하며, 근본적으로 유교와 불교라는 거대한 세계관과 자연관의 차 이에서 기인한다.

• 보통의 경우 서원과 같은 유교건축은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원 심적 경관구조를 지니는 반면, 불교건축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구심적 경관구조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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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역성과 대칭성 : 전체적 비대칭과 부분적 대칭성]

• 병산서원은 강당군 – 사당군 – 주소廚所(부엌주, 서원 하인 들의 거처 및 서비스 공간)의 세 영역으로 구성된다.

• 성리학의 성전인 서원들은 엄격한 좌우대칭과 중심축을 고 수하는 건축 유형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병산서원은 판이 하다. 주요 특징은 강당군과 주소영역을 나란히 두고, 그 사 이 높은 위치에 사당군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강당 의 중심축과 사당의 중심축이 일치하지 않는 예로는 퇴계의 도산서원이 있다. 그 자유로운 구성은 얼른 납득되지 않지 만, 서애학파의 학문적 정신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또 한 재건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서애 사망 직후 강당 군과 주소만 서당으로 건립되고, 사당군은 7년 후에 건립된 다.

• 이미 강당군-주소 사이에 긴밀한 기능적, 공간적 관계가 형 성된 후에 새롭게 가장 높은 위계의 사당영역을 삽입하기 위해서는 기존 영역들을 통합하고, 새로운 질서체계를 재편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평면적으로는 기존 영역 사이의 중심이 되지만, 단면적으로는 가장 높은 위치인 현재의 지 점에 사당군을 세운다. 즉,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으면 서도, 새롭게 통합, 확장된 집합체계를 이룬 묘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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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군 앞마당의 중의적 통합성

• 강당군 – 주소의 관계와 사당군의 영역적 관계는 강당 동쪽과 사당군 앞에 위치한 마당에서 절묘하게 맺어진다. 즉 수직적으 로는 기존 영역의 레벨에 속하면서도, 평면적 위치는 사당군에 속하여, 신구영역의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 마당은 평소에는 강당군과 주소 사이의 서비스 동선으로 사용되지만, 제사 때에는 제례를 위한 참가자들이 도열하는 의 례용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 공간은 장소 뿐만 아니라 기능 으로도 통합성을 띠고 있다.

• 체험적으로는 거의 느낄 수 없지만, 세 영역의 중심축은 완전 한 평행을 이루지 않는다. 정밀하게 측량하면, 3개의 중심축은 뒤쪽으로 갈수록 오므려지고, 최종 지향점은 뒤쪽 멀리있는 화 산의 정상부가 된다. ‘미묘한 어긋남’이 있다. 하지만 그 어긋남 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그것은 건축이 자연과 집합되는 방 법론의 출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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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영역군은 비대칭의 형상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세 영역은 모두 개별적으로 거의 완벽 한 대칭이다. 전체의 구성은 건축가의 관심사이며 숨겨져있는 집합체계이지만, 일반 사용자 들에게 각 영역의 구성은 체험적인 공간이된다. 엄격한 예학자들에게 비대칭의 일상공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좌우, 상하의 위계가 뚜렷한 강당군이나, 신성한 영역인 사당군은 말할 것 도 없이, 하인들의 공간인 주소마저도 사대부 살림집인 뜰집(용마루가 네모꼴을 그리고 가운 데 좁은 안마당이 있는 ㅁ자 집) 유형을 차용해 좌우대칭을 구성한다.

영역군으로서 병산서원이 갖는 가장 뛰어난 점은 바로 대칭적인 부분들을 비대칭적으로 합시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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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군의 만대루와 공간형성

• 병산서원은 강의장인 입교당을 중심으로 좌우 에 동재와 서재를, 그리고 전면에 기다란 만대 루를 배치하였다. 위상관계만으로 보면 서원건 축의 보편적인 강당군 구성유형이다. 긴장된 수양생활의 피로를 풀기 위해 마련된 곳이 전 면 누각인 만대루이다. 앞산과 강물을 바라보 며 지친 몸과 산만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구성이다. 마당을 감싸고 있는 1차적인 요소들은 강당과 동,서재의 툇마 루, 완벽하게 뚤려있는 만대루의 누각이다. 선 형적인 이들 공간은 공간적 띠(layer)를 형성하 며 마당을 감싼다. 경건한 공간을 구성하기에 매우 적절한 요소들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고 인위적인 회랑이나 열주를 사용하지는 않 는다. 기능적으로도 극히 필요한 요소들을 공 간적인 장치로 활용했을 뿐이다. 마당의 3면을 감싸다가 전면 만대루를 통해 완전히 개방하 는 수법은 하나의 공간에 긴장과 이완을 함께 불어넣는다. 팽팽히 조여진 공간적 긴장감은 만대루의 프레임 안으로 빠져나가면서 발산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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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과 동재는 직각배치가 아니고 어긋나 있다. 이 벌어짐은 다음에 나타날 사당마당을 암시하는 유인장치가 된다.

• 동재와 서재는 기하학적 대칭은 아니다. 강당과 서재는 직각관계이지만, 동재는 안으로 벌어진 채 놓여있다. 또한 서재와 강당은 모서리가 물려있지만 (닫힌 관계), 동재는 강당 모서리와 떨어져 있다(열린 관계). 사람들을 강당 동쪽, 사당 앞마당 으로 유인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이러한 비틀림에는 명확한 이유와 의도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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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산된 사당군

• 사당군의 구성 역시 다른 서원과는 차별적이 다. 사당군은 사당 건물의 독립적 영역, 전사 청 영역, 그리고 이를 통합하는 앞마당으로 이루어진다. 전사청과 사당이 왜 독립된 영역 으로 분리되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전 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사상을 준비하는 곳으 로 기능적 관계를 가지며, 보통 사당과 한 울 타리에 배치된다. 병산서원의 경우는 비기능 적이 된다. 전사청을 반면에 주소의 중심축에 맞추어 배치했다. 즉 전사청에 올라올 음식은 주소에서 마련하기 때문에 기능적 관계가 밀 접하다. 여기서의 관계는 주소의 하인들 작업 의 감독과 지휘를 위한 수직적 관계의 중시이 다.

• 사당군은 유교의 종교적 의례 기능을 위한 곳 이다. 물리적 편리함이 종교적 기능을 충족하 는 것은 아니다. 종교성의 핵심은 종교적 의 례를 신성하게 행할 수 있는 건축적 무대를 구성하는 것이다. 동선의 경제성이나, 효율적 배열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 전사청 문앞에 서서 장판각 쪽을 바라보는 경 관이 멋지다. 사당 앞의 경사진 축대가 꺽어 지면서 장판각 쪽으로의 공간의 흐름을 유도 한다. 그 가운데 백일홍이 서 있다. 서원의 후 원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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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청에서 장판각으로의 후원, 배롱나무(백일홍나무)와 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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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서비스군

• 주소는 ㅁ자형의 건물군인 동시에 건물이다. 안동 지방 고유의 뜰집 형식을 사용하면서 서원의 서비 스에 적합하게 계획된다. 3칸 대청이 마당의 전면 과 맞닿아있고, 양쪽에 방을 들였다. 여기에 관리인 들인 묘지기(사당관리), 장무서원 총무인 유사를 보 좌), 정지지기 (유생들 식사담당) – 노비신분이지만, 유생들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 – 들이 거주하였고, 봄가을의 향사때는 인근 참여자를 위한 숙소가 된 다. 거주인의 낮은 신분탓에 서원 담 밖에 내놓은 배치이지만, 마을 쪽에서 바라보면 서원과 대등한 모습으로 보인다.

• 이런 용도의 건물을 서원에서는 고직사, 교직사, 주 사 등으로 불린다. 외형과 형식은 사대부의 살림집 과 닮았지만, 기능적인 구성은 전혀 다르다. 사랑채 가 없고, 안마당은 부엌을 위한 작업마당과 같다.

장독대까지 안마당으로 들어와 있다. 방은 3개이며 2개의 커다란 부엌, 창고, 헛간 등 작업과 저장공간 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vid004-해리티지 채널 - 병산서원-풍경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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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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