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 선생님이 들려주는 ‘벽 (癖)’에 걸린 조선예술가들
2.
-시인, 이단전-, -탈춤꾼, 탁문한 -』1
시인 , 이단전
- “ 그래 , 나는 종놈이다” 외친 천재 시인
STORY 1 : 178년 어느봄날, 못난 청년 대작가 이용휴를 찾아왔다.
소맷자락에 넣어 온 시집을 노인에게 건넸다.
말없이 벽도화(碧挑花) 가지 하나를 꺽어 청년에게 준다.
- 이단전(李亶佃, 1755-1790) : 진실로’단’, 소작인 ‘전’
호- ‘필한’ 필(疋)은 하(下)+인(人), 한은 천한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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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이단전
- “애꾸에 곰보, 어버버한 말씨 “
: 왜소한 체구, 곰보, 조리없는 말투, 인간적불행을 골고루 갖춘 사람 : 시를 짓겠다고 문사들을 찾아다니며 배운다.
: ‘시’ – 신분이 높고 지식이 많은 선비들의 전유물 : 노비출신의 시인 몇 명 – ‘어무적’, ‘전함노’,’홍세태’
: 이단전에 대한 주인 유씨집안의 대우
“ 어렸을 때 유씨 집 소년들이 글을 읽을 때 그 곁에서 숨어 듣고서 몰래 외웠는 데 대강의 뜻을 알았다. 주인이 기특하게 여겨 나무하고 소 치는 일을 맡기지 않 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드디어 문자를 다루는 일 에 종사하게 되었고, 예술적 재능이 크게 발전하였다”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그 스승에그 제자”
: 시를 짓는 재능 하나는 하늘이 흔쾌히 허락했다
: 밋밋한 인생을 버리고 시에 도취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열정 : 그런 그를 보고 윤기란 시인은 이런 시로 답했다.
“ 술 한잔에 시 한편, 기세도 드높아라!
길게 읊고 무릎장단 치며 호기를 누리지 못하네.
취한 눈으로 건곤을 보면 뵈는 것 하나 없건만
세상 사람 너를 무시하지. 구우일모(九牛一毛)쯤으로”
응답하라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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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이단전
-남공철이 쓴 이단전의 시집 서문에는
“ 이단전은 밤마다 기름을 사서 등불을 밝히고 꼿꼿히 앉아 시를 썼다. 시를 짓 고 나면 또 직접 깨끗이 베껴 썼다. 북학파 학자에게 보여줄 때는 분전태사지에 쓰고, 그들을 배척하는 학자에게 보여줄 때는 보통 종이에 썼다. 날이 밝기를 기 다려 문밖으로 나가 많은 문인과 명사들을 두루 찾아보고 비평을 받았다. 그러 기를 십여년동안 게을리한 적이 없다. 그로 인해 이군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 려졌다”- 실천하는 집념, 그것은 무엇보다도 강하다.
-이단전은 참신한 시풍을 추구했다.
“ 시는 당시(唐詩)가 가장 뛰어나다. 그러나 진실한 감정과 경물을 그려낼 수 없 다면 모의작이 되어 음식을 죽 늘어놓고 옷감을 덕지덕지 쌓아놓은 것과 같아, 붓과 벼루에서 손을 떼자마자 벌써 진부한 말,죽은 시구가 되어버린다. 차라리 명(明)이후의 작가를 스승으로 삼아서 가슴속에 쌓인 울분과 기굴(奇堀)한 기상 을 쏟아내는 것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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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이단전
- “기발한 착상, 비유의 명수”
<관왕묘에서 (關王廟)>
낡은 묘는 으슥하여 대낮에도 스산하고
의젓한 관우(關羽) 상은 한(漢)나라 의관 걸쳤네.
중원을 평정하려는 사업을 마치지 못해선가 천년토록 적토마는 안장을 풀지 않네
: 당시 서울에는 관왕묘가 두 군데 있었다. 삼국시대의 명장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관우는 중국인에게 전쟁신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명나라 장 군의 부탁으로 선조가 명령하여 관우를 제사 지내게 한 곳이 바로 관왕묘이다. 그 사 당에는 적토마를 탄 관우의 소상( 塑像)을 안치했는데, 이단전이 이를 소재로 시를 썼다.
1,2구는 대낮에도 으스스한 옛 사당을 제시하여 살기 띤 전쟁영웅의 분위기
3,4, 관우를 태운 적토마의 모습착안, 안장을 풀지 않는 이유가 중원을 차지하지 못 한 영웅의 한 때문이라 해석했다.
- 바위틈 샘물은 지혜롭게 울고 나뭇 등걸의 새는 천치인 양 앉아있다.
: 샘물소리는 인간에 대한 평
-새벽녁 빈 다락에는 외로운 달이 나오고, 두산 사이 흐르는 물에 일만 솔은 시리다.
-: 고독한 시인의 쓸쓸한 풍경을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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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이단전
- 우수한 실력, 하지만 냉담한 현실 - 싸늘한 시선 속 우직한 행보
- 윤기, 이덕무, 남공철, 최북의 친분 -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
- 기구한 운명을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고 의문을 남김
-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기인, 노비, 그러나 행동하는 성격의 소유자 - 예술가의 광적행위의 일종
- 그는 갔지만, 그의 예술은 영원하다.
- 고급문화에 참여하려 했던 한 종의 처절한 삶, 군더더기 하나없는 고고
한 심상의 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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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꾼 , 탁문한
-전통사회 속 예술가
: 익명의 인간으로 존재 ( 저평가 되는 분위기 & 지위가 낮은 현실
예 ) 탈춤 : 상류층 감상자로부터 적절한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한 대표적인 종목 - “민간에서 행해지는 공연을 흔히 사치스럽고 방탕하며, 천박하고 외설스럽다고 평가, 점잖은 선비의 기록에 올라 그 존재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
단, 卓文漢은 특별한 경우에 해당
-趙秀三의 秋齋紀異 - 卓 班頭의 이름은 文煥으로 儺禮局의 邊首이다. 젊어서부 터 황진이 춤과 만석중의 노래 및 우스개몸짓을 잘하여 班中의 자제 가운데 그를 따 라잡을 자가 없었다. 늙어서 청나라 사신을 영접한 노고를 인정받아 嘉善大夫의 품 계를 하사받았다.
- 양인 출신의 무인집안 사람으로서 賤人들의 役으로 여김 - 자유분방한 성격 & 주체하지 못하는 끼, 연희패로 이끔 - 자타가 공인한 검무와 탈춤의 춤꾼
역사 속 탈춤, 탈춤 속 역사
참고1)
개념 : 민속 집단 생활의 전반에 걸친 민족의 기반적 생활 양태를 연극적으로 표현, 형상화한 것.
사적조망 :
원시부족 동물의 탈<<백제 ‘기악무’<<통일신라 ‘향악오기’ <<고려 ‘산대잡극’<조선‘산대놀이’ 외
- 7세기 초‘미마지(味摩之)’의 활동 :
‘백제인 미마지가 귀북하여 ‘오나라에서 배웠다’하고 기악무에 ‘능’(能)한지라,
곧 앵정촌에 두고 소년을 모아 기악무를 가르치게 하니, 때에 ‘진야’( 眞野)의 수제자 신한, 제문 2인이 그 악무를 전하여 받았다’
- 일본 고모의 저술‘교훈초’ : 기악의 불교적 의미(부처님을 공양하는 가무)
종류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
내용
몸돌려 팔휘둘러 금 환재주 부리니 눈앞 에 별뜨고 달빛이 가 득하네 의료가 있은 들 이보다 나을까 바 다고래 이 소리 듣고 귀기울임을 알린다.
자라목에 높은 어깨 상투 는 뾰족한데 뭇선비 팔비 비며 술잔 부딪는다. 노 랫소리 듣고 나서 웃음소 리 요란한데 저녁에 단 깃발은 새벽을 재촉하네
황금색 탈을 쓴 바로 그 사람 방울채찍 휘드려며 귀신을 쫓네 자신모리 느 린가락 우아한 저 춤 태 평 봄을 즐기는 듯 봉황나 는 모습일세
고수머리 파란 얼굴 못 보던 사람들이 떼 지어 뜰에 나와 난새 처럼 춤을 추네 북소 리 두둥둥둥 바람소 리 살랑살랑 남북으 로 뛰어다니며 멋진 춤을 끝없어라
일만리 유사에서 건 너왔기로 군데 군데 털빠지고 먼지까지 들썼구나 머리, 꼬 리 흔들면서 어진 덕 펼쳐노니 온갖 짐승 재주좋다 사자 같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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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기악과 산대놀이의 비교
기악 양주별산산대놀이 봉산탈춤
1 치 도(治 道) 고사, 상좌춤 사상좌춤
2 오 공(吳 公) 옴중, 연잎과 눈끔적이 X
3 사 자 춤(獅 子舞) X 사자춤
4 가루라(迎樓羅), 금강(金剛) 팔먹중, 침놀이(완보) X
5 파루문(婆羅門) 사당놀이(관쓴중) 사당춤
불교가면무용 ‘기악무(伎樂舞)’
- 기악무와 산대놀이의 비교
학자들의 다양한 학설 : 이혜구, 이두희, 일본가와다케 교수
기악은 양주산대놀이와 봉산탈춤의 내용과 같이 기악무극으로 불사여세 연행되던 불교의 포교을 위한 일종 임.
기악 VS산대놀이
참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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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기악과 산대놀이 비교
<표1>기악과 산대놀아의 비교
기악 양주별산산대놀이 봉산탈춤
6 곤 륜 (菎崙) 노장 노장춤
7 역 사(力 士) 취발이 취발이
8 대 고(大 孤) 미얄할미 미얄춤
9 취 호(醉 胡) 양반 양반춤
10 무 덕 악(武德樂) 무당넑두리 다리굿
탈 춤
가면극
산대놀이
: 양주별산대놀이,송파산대놀이,퇴 계원산대원놀이, 북청사자놀이,봉 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등 오광대놀이
: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가산오광 대, 진주오광대 등
야류
: 수영야류, 동래야류
인형극 굿놀이
:하회별신굿,강릉관노가면극, 자인팔광 대, 예천청단놀음, 진도다시래기 오늘날 탈춤의 분류 체계
참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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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꾼 , 탁문한
- 20대 젊은 시절, 나례청 소속의 공연도구 만드는 장인
그림1-1776년 영조국장도감의궤의 班
次圖에 보이는 방상시 2座 중 하나. 그림2-1800년 정조국장도감의궤
에 실린 죽산마 모형
→ 탁문한은 유달리 임금으로부터 恩賜를 받아 資憲大夫에 올랐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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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문한의 재조명
- 정조와 순조 연간의 나례청과 나례에서 막중한 책임을 진 위치
- 문헌의 단편적 기록으로 그의 삶과 예술활동의 정확한 재구에서 한계
탈춤꾼 , 탁문한
訓局謄錄과 승정원일기
- 11월 4일 나례청, 연습 중의 총성소리
- 6년 간의 유배생활 / 나례의 폐단으로 정조 때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