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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 1 제5강 : 무성영화 제작 시기의 도래
상업 극영화의 제작
1. 조선총독부의 활동사진 통제정책
- 일제의, 조선에서의 활동사진 통제정책이 처음으로 체계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1907년의 일이었다. 통감부 시기 이사청에서 ‘흥행취체규칙’ 및 ‘보안법’을 통해 영화 및 공연예술에 대해 통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찰부는 흥행 인가, 정지, 검열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 지만, 영사 시설의 미비로 당시에는 필름이 아닌 영화설명서 및 임석에 의한 검열이 이루어 졌다.
- 그러다가 1922년 경기도 훈령 제11호로 전문 38조의 흥행 및 흥행장 취체규칙’이 발표 되었다.(1923년 흥행시간 단축 내용을 첨가하여 개정) 이는 기존의 규칙에 각본, 필름 검열 과 변사 검정에 대한 규칙을 추가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23년 필름검열소가 설립되었으 며 1924년부터 여기에서 필름 검열이 이루어졌다. 1925년부터는 검열세 징수가 실시되기 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영화에 대한 통제는 ‘상영장소’에서 ‘작품’ 자체로 옮겨지게 되었 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전국적인 활동사진 검열 체제는 구축되지 못하였다.
2. 조선에서의 최초의 극영화 <국경>
(1) <국경>의 제작
- 《매일신보》 1923년 1월 5일자 기사
활동영화계 신기록으로 조선서도 서양 활동사진처럼 박은 사진이 이제로부터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래 소위 연쇄 활동사진을 유감으로 여겨 모 문학사의 걸작인 <국경>이란 소설을 각색하여 신의주 일대를 배경으로 순전히 조선인 지나인을 배우로 사용하여 최장척 열 권의 대활극 조선 활동사진을 만들어 지금 현중 중인즉 본원 십오일 경이면 단성사 무대에 처음으로 봉절 상연할 예정이라는 바 그때는 조 선인 애활가가 환영할 것은 물론하고 조선인 활동사진으로 열 권짜리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 이어 1월 11일부터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에는 “조선 초유의 대영화”, “사 계최선(斯界最先)”, “조선영화 대활극” 등의 문구가 삽입되었다.
(2) <국경>의 제작주체
- 《조선일보》 1923년 1월 14일자 별지 전면광고 내용
제작사 : 송죽키노드라마주식회사 제작 : 토야마 미쓰루(遠山滿) 원작, 각본, 감독 : 원산만
- 2 - 촬영 : 미야시타 요시카쓰(宮下吉藤)
출연 : 데라오 아키라(寺尾瑛), 유금수, 박순일, 김영덕, 변기종 등 개봉관 : 단성사
(3) <국경>의 상영 및 중단
- 《조선일보》 1923년 1월 13일자 기사
우리 조선 안에 활동사진 상설관이 많으나 오늘까지 이르도록 우리 조선의 사정을 표본으로 삼아가지 고 우리 조선사람들의 배우로서 활동사진을 박아 일반 관람자에게 보이게 된 것은 없었으므로 금번에 처음으로 오만 원이란 큰 돈을 들여 두 달 동안을 허비하여 20여 인의 조선배우가 활동하여서 <국 경>이라는 활동사진을 송죽회사에서 박이게 되었다는데 이 사진으로 말하면 중국과 조선 간에 있는 안동현에서 생긴 사실을 박은 것이라 하며 이 속에 중요 배우로 활약을 한 박순일 군은 서양 활동사 진에서 역사로 자칭하는 ‘로로’ 이상의 강력자라 하며 이 사진은 오늘부터 시내 단성사에서 영사한다 더라.
- 《매일신보》 1923년 1월 15일자 기사
조선영화라는 <국경> 전 열 권은 13일 밤에 상장하였으나 부득이한 경위로 하루만 하게 되고 중지한 대신에 너무 유감이라 하여 일간 문예영화 대회를 열고 고급 봉절인 서양 문예영화를 상장코자 지금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
(4) 평양에서의 <국경>의 상영 중단 - 《매일신보》 1923년 3월 17일자 기사
평양부 구시가에 있는 상설 활동사진관 제일관에서는 일선(日鮮)영화회사에서 촬영한 내선융화(內鮮融 和) 국경사정을 영사한 국경이라는 사진을 시대에 제일 적당한 사진이라고 선택하여 12일, 13일의 양 일간에 특별 흥행을 하게 되어 제1일 되는 12일에는 천 명에 가까운 근래에 보기 드문 관람객이 집 중하였던 바 필경 그 사진은 조선인을 모욕하는 것이라 하여 상하층 관중이 일시에 일어나고 변사를 매도하며 살기가 장내에 충일하여 일시는 형세가 자못 불온하였으나 경관의 진력으로 별반 소동은 일 으키지 아니하고 진정하였는데 이 사진관원들은 너무도 혼이 나서 다시 흥행할 기력이 없든지 그 사 진을 시 본처로 환부하였다더라 (평양)
(5) <국경>의 재상영
- 《조선일보》 1923년 7월 25일 기사
총독부에서는 지난 2일 오후 3시부터 제1회의실에서 <국경> 활동사진을 시사하고 총독부 출입기자 청구구락부원 일동을 초대하였다더라
(6) <국경>의 영화사적 의의 - 생각해보기.
- 3 - 3. 최초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극영화 <춘향전>
(1) <춘향전>의 제작
- <춘향전>은 흥행계에서 15년간 종사해오던 조선극장 사장 일본인 하야가와 고슈(早川孤 舟)가 결성한 동아문화협회에서 2만 3천원의 제작비를 들여 전 9권 1,146피트로 만든 작품 이었다. 하야가와 고슈가 각색 및 감독을, <의리적 구토>를 찍은 미야가와 소우노스케(宮川 早之助)가 촬영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당시 조선극장 주임변사 김조성과 개성 명기(名妓) 한 룡이 이도령과 춘향 역을 맡았다.
(2) <춘향전>의 상영
- <춘향전>은 1923년 10월 18일 전북 군산좌에서 개봉된 후, 서울에서는 12월 5일 황금 좌에서 상영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1924년 9월 5일이었다. 단성사 활동사진촬영부의 <장화홍련전> 개봉일에 발맞추어 조선극장에서도 이 영화가 상영되어 경 쟁구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3) <춘향전>의 흥행
- 황금좌에서의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매주 7회 상영에 고정 관객 2천여 명이던 평균치를 훌쩍 뛰어넘어 7일간 1만여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였다.
(4) 이후 활동
- 하야가와 고슈의 동아문화협회는 이후에도 명기 강명화를 모델로 한 <비련의 곡>(1924),
<토끼와 거북>(1925), <흥부놀부전>(김조성 감독, 1925) 등을 제작하였다.
4. 순수 조선인 제작영화 <장화홍련전>
(1) <장화홍련전>의 제작
- <춘향전>의 흥행 성공에 자극을 받은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은 단성사활동사진촬영부를 조직하고 순수하게 조선인만으로 <장화홍련전>(1924)을 제작하였다.
(2) <장화홍련전>의 제작주체
제작 : 박승필
기획, 각색 : 김영환, 이구영 감독 : 박정현
촬영, 편집 : 이필우
출연 : 김옥희, 김설자, 최병룡, 우정식
- 이 영화는 광무대 변사 김영환이 기획을, 영사기사 출신 단성사 지배인 박정현이 감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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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주최 ‘전선(全鮮)여자정구대회’의 기록영화를 찍은 이필우가 촬영을 담당하였다.
또한 장화, 홍련 역은 각각 기생 김옥희와 김설자가, 원님 역은 인기변사 우정식이 맡았다.
(3) <장화홍련전>의 촬영 및 상영
- <장화홍련전>은 1924년 여름 서울 근교의 전간 방에서 3주간 촬영되어 전 8권으로 만들 어졌다. 그리고 9월 5일부터 1주일의 예정으로 단성사에서 개봉되었으나, 연일 만원을 이루 는 바람에 이틀이 연장되어 13일까지 상영되었다. 동원관객은 총 1만 3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는 “조선에 활동사진이 생긴 이래 초유의 상황”1)이었다. 이에 9월 15일부터는 대구, 부 산, 마산, 통영, 목포 등에서 지방순회 상영이 이루어졌다.
(4) <장화홍련전>의 영화사적 의의 - 생각해보기.
5.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 (1)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설립
- 1924년 7월 11일에 설립된 조선키네마는 부산 거주 일본인 의사 가토(加藤), 실업인 와 타나베(渡邊), 다카사(高佐) 등이 뜻을 모아 20만원을 출자하여 세운 회사이다. 이들 가운데 총포화약상 나데 오토가즈(茗出音一)가 대표를, 다카사 간초(高佐貫長, 조선명 王必烈)가 전 무 겸 촬영소장을 맡았다.
- 이들은 일본에서 기술자를 초빙하여 입사하도록 하였다. 또한 당시 부산 국제관에서 신극
<부활>, <월광곡>, <아 무정> 등을 공연을 통해 눈여겨보던 안종화, 이경손, 유수준 등의 무대예술연구회 소속의 조선인 배우들 전원을 영입하였다.
(2) 창립 작품 <해의 비곡>(1924)
- 8권 1,180피트의 <해의 비곡>은 연기진을 제외한 제작주체 모두가 일본인이었다. 각본 및 감독은 왕필렬이, 촬영 및 편집은 오사카 출신 신인 사이토(齊藤)과 교토(京都)파인 스도 (須藤)가 담당하였다. 배역은 대부분 극예술연구회 출신 조선인 배우에게 돌아갔으나, 주삼 손(朱三孫)으로 알려진 일본인 배우 오오자와(大澤)가 기용되기도 하였다. 주인공 여자역은
<월하의 맹세>의 이월하가 맡았다.
- 한라산에 등반했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도시 청년이 섬처녀와 사랑에 빠지면서 겪게 되 는 2대에 걸친 비련의 통속극 <해의 비곡>2)은 부산 보래관의 첫 개봉을 거쳐, 1924년 11 월 12일부터 5일간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다. 이후 일본 도쿄(東京)에서 상영되기도 하고 닛 카쓰(日活)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조선키네마 1) 《매일신보》, 1924.9.13.
2) 자세한 내용은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현대미학사, 1962, 63~66쪽 참고.
- 5 - 는 3,000원의 흑자를 내었다.
(3) 2회 작품 <운영전>(1925)
- 조선키네마의 제2회 작품은 <운영전>이었다. 각본 및 감독은 당시 김해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윤백남으로 정해졌다.3) 이 작품에서는 당대 최고 여배우 이월하가 아닌 신인배우 김 우연이 주연을 맡았고, 나운규가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 안평대군의 비화를 소재로 한 <운영전>4)은 1925년 1월 17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윤백남은 회사 내의 일본인 간부들과의 불화를 겪었고, 일본인 간부 다카사의 조선인 여배우 희롱 사건을 계기로 여타 조선인들을 데리고 회사를 나왔다.
- 이후 조선키네마는 <암광>(1925), <신의 장(神의 粧)>(1925), <촌의 영웅>(1925) 등의 작품을 제작한 뒤 해산되었다.
6. 조선인 영화사의 설립 및 작품의 제작 (1) 윤백남프로덕션
- 1925년 1월 윤백남은 “순 조선영화의 제작과 외국사진의 수입”을 취지로 하는 윤백남프 로덕션을 설립하였다. 여기에는 이경손, 나운규, 주인규, 주삼손, 남궁운, 김우연 등이 합세 하였고, 신인으로 정기탁, 전창근, 김정숙 등이 등용되었다.
- 윤백남프로덕션은 제1회 작품으로 <심청전>을 제작하였는데, 이 작품은 1925년 3월 조 선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감독은 조선 최초의 조감독 출신 이경손이, 촬영은 일본인 니시가 와(西川)가 담당하였다. 한편, 심봉사 역은 나운규가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2) 고려키네마
- 제2회 작품으로 이광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개척자>를 준비하던 중에 윤백남은 도일 (渡日)하였고 결국 윤백남프로덕션은 해체되었다. 이때 이경손은 고려키네마를 설립하고, 윤 백남의 동의를 얻어 <개척자>를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1925년 7월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는 데, 여기에는 김정숙, 주인규, 남궁운 등이 출연하였다.
- <개척자>는 새로운 지식으로 민족을 깨우쳐야 한다는 젊은이(주인규 분)와 과학기술로 계몽해야 한다는 젊은이(남궁운 분)와의 사이에서 사랑의 고민을 겪는 젊은 여성 성순(김정 숙 분)을 그린 영화였다.
3) 윤백남의 월급은 150원이었다. 이는 당시 도지사 월급과 맞먹는 일본인 기사 월급 120원을 뛰어넘는 거액이었 다.
4) 자세한 내용은 안종화, 앞의 책, 69~70쪽 참고.
- 6 - (3) 고려영화제작소
- 이구영과 이필우는 고려영화제작소를 설립하고 <쌍옥루>를 제작하였다. 이 영화는15권이 라는 초장편으로 만들어져 1925년 9월 상, 하편으로 나뉘어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감독 은 이구영, 촬영은 이필우가 담당하였고, 김택윤, 김소진이라는 두 명의 신인이 주연을 맡았 다.
- <쌍옥루>는 기생 자매의 애화(哀話)를 다룬 통속신파극으로서 흥행에 성공하였다. 이후 이구영은 단성사에 입사하여 촬영을 담당하였고, 이필우는 기록영화 제작 활동을 한 후 독 자적으로 영화사를 설립하였다.
(4) 반도키네마
- 이필우가 설립한 회사의 이름은 반도키네마였다. 반도키네마는 《조선일보》의 연재만화
<멍텅구리>를 영화화하여, 1926년 1월 조선극장과 우미관에서 개봉하였다. 남녀 주연은 각 각 이원규와 김소진이 맡았다.
(5) 계림영화협회
- 조일제가 세운 계림영화협회에는 윤백남프로덕션 및 고려키네마의 일원들이 대거 영입되 었다. 계림영화협회는 제1회 작품으로 3천원을 들여 <장한몽>을 제작하여 1926년 5월 단 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조일제와 이경손이 각색을, 이경손이 감독을 담당하였다. 이수일 역은 주삼손과 심훈, 심순애 역은 김정숙, 김중배 역은 강홍식이 맡았다.
- <장한몽>은 일본소설 <금색야차>를 각색한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학생 이수일은 가난하였다. 이수일과의 사랑이 난관에 빠지자 모리배 김중배가 돈의 힘으로 심순애 를 꺾고 그녀와 결혼해버린다. 이수일은 대동강변에 그녀를 불러내 원한에 사무친 절연의 말을 던지 고 고리대금업자가 되어 기어히 원한을 갚는다.5)
- 계림영화협회는 <산채왕>을 제작하여 1926년 5월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이것은 홍포 적의 횡포를 그린 작품으로, 조일제의 원안을 이경손이 감독하였다. 이백수, 정기탁, 김정숙 등이 출연하였고, 최초의 활극영화라는 화제를 남겼지만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계림영 화협회의 일원들은 일본인 상인 요도 도라조(淀虎藏)가 설립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으로 대 거 이동한다.
7. 무성영화 제작 시기 조선영화의 특징 - 생각해보기.
5) 이영일, 『한국영화전사』, 소도, 2004, 86~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