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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초기교회의 부흥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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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읽는 현재..한국교회사 강의2.

한국초기교회의 부흥과 성장

시대적 배경..

1910년에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다.

이 상황을 전후 해서 일어난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것인가?

특히 대부흥이라고 말할 정도인 1907년의 평양 대부흥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교회 부흥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환경과 영적, 도덕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1900년대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침략의 야욕이 구체화되어 갔고

민족적 절망감이 심화된 시기였다…1901년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아픔은 조선인들의 가슴에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생명의 양식.2007) 이 상황을 바라보는 선교사들의 시각을 어땠을까?

베어드 선교사의 평가 (1906년 선교보고.) ‘조선인들은 수치감, 분노, 그리고 증오에 내몰려 그들은 무언가 영웅적인 일을 해내고야 만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고 해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신자의 책임의식이 고조되었고,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와 함께 암울한 현실로부터 탈출 욕구가 심화된 시기였다.

‘1907년 전후 부흥에서 이런 정치적 상황보다 더 중요한 배경은

이 당시의 도덕적 영적상황이었다. 이교적 관습, 우상숭배, 축첩과 중혼, 도덕적 무질서, 비윤리적 생활등은 회개와 자성을 불러일으키는 보다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

(이상규. 위의 책. 64)

이 강의에서는 세가지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평북에 있는 선천지역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이 부분은 옥성득의 <다시 쓰는 한국교회사>를 중심으로 정리) 2) 19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

(이상규. 한국기독교 역사와 신학.생명의 양식)

3) 1909-1910년에 전개된 백만인 구령운동(한국기독교의 역사 1 을 중심으로 정리) 기본적인 내용들을 정리하고, 의미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참고한 책들은

류대영. 한국근현대사와 기독교. 푸른역사

(이 중에 3장에서 20세기초 한국교회 부흥현상에 대한 재검토를 참고) 김영재. 뒤돌아보는 한국 기독교. 합신대학교 출판부

(이 중에서 2장에 있는 부흥이라는 부분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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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천 기독교의 성장과 부흥

평안북도 선천 선교지부의 경우 1901년에 75명이던 세례교인이 5년만에 1,435명으로 늘어나 해마다 배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1903년에 선천읍 주민 5000명 가운데 10%인 500명이 벌써 교회에 나오고 있었고 3년후에는 교인 수가 주민의 20%에 가까운 1400명을 넘었다.

이 무렵 주일과 장날이 겹치면 장날이 서지 못했던 곳이 바로 선천이었다.

1905-10년 기간의 1차 대부흥에 이어 1920년대 초에 제2차 대부흥을 이루면서

선천읍 주민 절반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선천은 ‘한국의 에딘버러’나 ‘한국의 시온’ 혹은 ‘기독교 왕국’으로 불렸다.

1) 선천 기독교의 시작

1901년 선천의 지리적 중요성을 간파한 장로회 선교사들이 의주대신 선천에 이주하고 선천지부를 개설하면서 선천은 한국교회사적으로 중요해졌다.

선천 지녁 전도를 시작한 이는 선천의 첫 교인인 양전백 (1870-1933)과 조규찬이었다.

의주 출신의 한학자인 양전백은 선천에서 가까운 구성읍으로 이사하여 서당 훈장을 하던 자였다.

1892년 김관근의 전도와 권유로 서울에서 열린 조사 사경회에 참석하고 개종하였다.

1894년 마페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1896년 위트모어의 조사가 되었으며, 1902년 2월 남자 사경회 때 장로로 장립되었다.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첫 목사 7인의 한명으로 장립을 받고, 1908년 여름 선천읍교회 동사목사로 임명되었다가 1909년 3월 담임목사가 되었다.

조규찬. 양반 가문의 선비 출신.

이 둘의 영향으로 의주와 선천 지역에서 초기에 입교한 자들 가운데 양반층 관리나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던 것도 이들의 지도력과 관련있다.

선천교회는 1897년 시작되었다.

평안북도 지역에 첫 선교사로 임명받은 위트모어 목사가 가을에 양전백과 조규찬의 도움을 받아 집 한 채를 매입하고 선교를 시작했다.

1901년 한국장로회 선교회는 교인이 많은 의주 대신 선천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함 그것은 의주가 국경에서 가까운 반면 선천은 많은 지역을 쉽게 관리할 수 있단느 전략적 판단 때문이었다.

10월에 위트모어 묵사와 샤록스 의사 부부가 선천으로 이주하면서 선교지부가 정식 개설됨 1901년 샤록스 의사가 대한제국의 내부 고문이 된 샌즈의 장티푸스를 치료하자 선천현감이 친기독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1902년 여름에는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선천에는 사망자가 전혀 없었다.

샤록스 의사가 지시한대로 집 안팎의 위생과 청결을 철저히 실시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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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장과정

1902년 7개의 순회 구역이 정해졌다.

선천 구성 중앙 지역은 양전백 조사 선천 동부는 강재근 조사

용천, 철산은 정기정 조사 의주서부는 김창근 조사 의주 동부는 김관근 조사 삭주 창성 벽동은 한덕룡 조사 이외에 강계 구역이 있었다.

전도부인 김기반은 주로 불신자를 전도함.

1902년 7월 3,429명 1903년 7월 4,537명 1904년 7월 5,119명 1905년 6,507명 1906년 11,943명

1905년 한 해동안 선천 지부의 교인이 폭발적으로 성장함 이런 성장에 대해서 집단 개종의 거품성장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두 가지를 통해서 이런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

-샤록스 의사는 선교보고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자전한다고 볼 수 있다…처음부터 한국인들은 복음 전파와 교회 성장이 우리 선교사 의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이라고 믿도록 배웠다…어느 누구도 돈을 동기로 교회에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신자로서 삶을 강조했다. 거품이 아니라 내실이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였다.

‘초신자는 학습반에 들어가 1년 이상 성경, 기독교 기본 교리, 세례 신청자를 위한 요리문답을 배웠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다음과 같은 증거가 있어야 했다.

한글해독 : 성경을 읽기 위해서 / 주일 성수 : 추수기에도 주일예배에 참석해야 함 / 금지사항 : 제사, 굿, 축첩, 술취함, 담배 피우기, 노름, / 매일 가정 기도 / 청년의 경우 자립을 위한 노동 / 전도 : 최소한 한 두 명을 전도해서 교회에 인도해야 함..동시에 입교인이 된 경우에도 2,3항을 어길 경우 책벌을 내렸다.’

3) 급성장의 엔진 : 날 연보와 성미

선천지역 기독교가 폭발적인 성장을 한데는 선교사나 조사의 지도력도 중요했지만 교회 성장의 핵심 동력은 일반 교인들의 자원과 헌신 및 희생 정신이었다.

일반교인들의 자원과 헌신 및 희생 정신을 보여주는 두가지 대표적인 것이 “날 연보와 성미”이다.

“날연보(day-offering)”

날 연보는 1904년 11월 평북 철산에서 열린 사경회 때 처음 선보였다.

선천에서 활동했던 위트모어 선교사의 보고다

‘교인들은 이웃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고 멀리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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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한 전도회를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개인적으로 좀더 주님을 위해 헌신하려는 열정이 솟구쳤습니다.

이런 열정은 돈이 아닌 시간을 바치는 것으로 표현되어 구체적으로 바칠 수 있는 날 수를 적어내고는 개인적으로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물질 대신 시간을 바치는 날연보는 농경사회에서 흔히 보는 날 품앗이 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선교사들이 생각해 내지 못했던, 한국교회 특유의 토착적 헌신 제도였다.’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이야기. 홍성사)

노일 전쟁의 공포가 지나간 1904년 후반부터 전도 열기가 타올라 1904년 사경회에서는 350일을 날 연보로 드렸다. 곧 가난한 형편으로 전도인을 위한 연보를 할 수 없는 자들이 농한기를 이용해 집을 떠나 기독교인이 없는 마을에 가서 5-10일간 전도하겠다고 서약했다. 자비량 전도의 서약 은 6개월 안에 시행하는 조건이었다. 1904년에는 8000일, 1905년 봄에는 선천에서 625일, 의주에서 524일 초산과 강계에서 720일을

교인들이 날 연보로 헌신했다.

1906년 1월 사경회에 1050명이 참석하였다.

1906년 선천 지부는 78개 교회에 11,943명의 교인이 있었다.

성미(誠⽶)는 장기간 매일 실천한 작은 희생이었다. 성미를 모아 고용한 전도인의 생활비로 사용했다.일반 교인들이 방문할 수 없는 산간 오지나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파송할 전도인을 위해서 여자 교인들은 아침이나 저녁에 밥을 할 때마다 적은 쌀에서나마 한 숟가락씩 떠서 작은 ‘예수자루’에 모았고 그 봉지가 차면 교회가 가져가서 헌물했다.

1905년 개성지방 선교사 크램의 보고.

‘우리 구역 전도사들과 매서인들이 사업 보고를 하는 가운데 한 매서인이 보고하기를 어떤 교회 부인들이 목회자 새활비로 3달러 50센트를 헌금했다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의 힘으로 그만한 돈을 모았다는 것이 예외적인 일이기에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 교회 부인들이 전에 귀신을 섬길 때 식구를 위해 밥을 지을 때마다 쌀을 가족수대로 한 줌씩 따로 떼어 두었다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곤 했는데,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그 같은 정성을 주님께 바치기로 하고 역시 끼니때마다 쌀을 떼어 두었다가 그것을 모아 구역 전도사 생활비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홍성사 중에서)

..가난했지만 넉넉하게 연보할 줄 아는 초대교인들로 인해 한국교회는 일찍이 자원 전도, 자립 교회 전통을 수립하였다.

—> 이 둘은 모두 전도와 전도자들을 위한 것이다.

4) 성장과 자치를 교인 훈련의 장이 된 사경회 공동체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대부흥에 대한 다른 비판은 선교사가 교회를 지배하고 한국인의 자치가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목회자나 교인들이 교양이 부족하고 교육 수준이 낮다는 비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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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사경회를 통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1-2주일간의 사경회 기간 동안 오후에 토론회를 마련해서 교회 정치와 조직,

교회 부동산 관리, 재정 모금과 관리, 학교 운동, 행정, 영수의 의무 등을 익히도록 했다.

또한 토론회에서는 교회와 정부의 관계, 학교와 여자 교육, 혼인과 조혼, 제사, 가정 경제, 묏자리와 풍수등 다양한 문제들을 토론함으로써 많은 곤란한 현안들을 스스로 해결하는 힘을 기르도록 했다. 이렇듯 전 교인의 전도인화와 전 교인의 교회 참여를 위한 방법이 사경회 훈련이 었다.

쌀자루와 이부자리를 이고 지고 수백 리 길을 걸어와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배운 사경회는 완전한 자급의 공간이었고, 여러 지방에서 모인 교인끼리 함께 숙식을 나누고 교제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이 자라는 공간이었다.

특히 여자들은 가부장제에서의 집안일에서 벗어나 일주일간 자유로운 공간에서 말씀의 잔치, 교제와 전도 훈련의 잔치를 맛봄으로써 한 개인,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 정체성을 확인하는 환희의 시간을 가졌다.

5) 평안북도 선천 지역 교회가 급성장한 또 다른 이유는 ‘신흥 중산층’인 상인들의 합류였다.

개신교는 그들의 부 축적을 노동의 존업성, 세속적 직업 소명 의식, 근검절약의 윤리, 합리적 금욕주의 사상으로 축복했다. 상인을 중심으로 한 신흥 중산층의 반부정부패 반봉건의식.

이 의식은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 상인 세력에 대한 저항과 항일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2. 1907년 평양 부흥 1) 전개과정

<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을 중심으로 정리>

1907년 1월부터 시작된 대부흥운동.

1월 6일부터 10여일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있었던 사경회 기간 중 절정에 이르렀다.

도화선.. 1903년 원산에서 열린 기도회.

감리교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화이트 여선교사의 내한을 계기로 기도회를 가짐.

남감리교회의 화이트와 캐나다 장로교회의 매컬리는 한국인 가운데 부흥이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 왔다.

그러다 8월 24일 1주일간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 기도모임은 곧 장로교 선교사 및 일부 한국 교인 그리고 침례교 인사들까지 참석한 연합기도 회 모임으로 발전. 캐나다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하디는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세차례 강의를 하게 되었다.

이 강연을 하면서 자신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 결여 되었던 점과 그리스도안에 온전히 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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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적으로 고백했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만, 백인이라는 우월주의, 비록 말은 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에 대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통회했다.

‘이 1903년 8월의 기도회와 하디의 공적 고백은 한국교회 부흥역사의 기원이었다.’

(이상규. 위의 책)

하디의 회개는 그에게 큰 변화를 주어 그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청중들은 감동을 받았고 회중 가운데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하디의 죄의 고백은 한국인들의 회개운동은 이어져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발전..1904년 1월 원산에서의 성령체험

1904년 봄에도 원산에서는 장로교,감리교,침례교 등 초교파적인 사경회가 열렸다.

장로교 선교사 롭, 전계은 목사, 감리교의 정춘수 목사도 성령의 충만히 받고 거리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였다. 한국인과 선교사들은 이 땅에도 부흥을 주시도록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26부터 10일간 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도 참석자들은 각자의 죄를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개성에서의 집회는 전도운동으로 발전하여 감방,삽다리, 술은리 등에 새로운 교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해 3월에는 서울에서도 하디의 집회가 개최되었고, 여기서도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배화학당 학생들 사이에서도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한 선교사의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죄에 대한 참회가 너무 분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수치를 무릅쓰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했으며 훔친 물건들을 배상하였다. 많은 한국사람들은 처음으로 죄가 무엇이며,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영적 변화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가운데 1904년 6월에 와서 처음으로 부흥회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1905년 9월 한국에서 활동하던 4게 장로교 선교부와 2개의 감리교 선교부 선교사들은 ‘한국 복음 주의 선교공의회’를 조직하였다. 이 공의회의 주요 목적은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1906년 또 한 차례의 부흥을 경험함. 개성 송도에서 큰 부흥이 일어남. 회개와 죄고백이 일어남.

‘돈을 훔친자는 돌려주고 형제 자매를 미워한 자는 용서를 빌었고, 다른 이유로 예수를 믿었던 이들은 참으로 주님을 섬기겠노라 고백하였고, 양반이라고 하여 천민을 멸시하던 사람이 이제부터는 그 사람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요 형제로 대하겠노라.’ 다짐하였다.

서울과 개성 뿐 아니라 목포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

이때쯤 평양에서는 한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 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였던 길선주는 동료 장로인 박치록과 함께

평양의 그리스도인 사이에 영적 뜨거움이 없음을 보고 새벽마다 기도하기로 작정하였다.

이 두 사람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약 두달동안 새벽 4시경에 교회가 가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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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알려지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게 됨으로 1907년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회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점화..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대부흥 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1907년의 대 부흥은 큰 강물이 모여 대하를 이루듯이 1907년의 평양에서의 부흥은 그 동안 전개되어 왔던 성령의 특별한 역사였다.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사경회가 개최되었다.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선교사들이 주로 설교를 했고, 길선주 장로 또한 강사로서 이 때의 부흥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낮에는 주로 성경을 공부하고 저녁에는 대중 집회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저녁집회는 1월 6일부터 시작했는데 1500여명이 참석해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창밖에 멍석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당시 평양의 겨울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엄동설한이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집회에 참석하였다.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때로 분위기는 냉담했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방위량 선교사의 설교가 통회와 회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길선주 전도사의 설교에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길선주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이렇게 사경회를 마감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4일 정도기도회를 열고 간절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했다.

오늘 우리가 평양 대부흥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는 사경회 마지막날인 14일과 15일 에 일어났다.

14일 저녁 길선주는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이 길선주의 회개는 1907년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만들었던 위대한 부흥의 시작이었 다. 이 때부터 수많은 이들은 자신의 가슴을 열어 제치고 자신의 숨겨진 죄악을 고백하기 시작하 였다. 회개하는 소리가 바다의 파도 소리 같았고, 그 회개가 이 강산을 부흥의 물결로 파도치게 하 는 동력이었다.

김양선은 이렇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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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이길함 선교사의 짧은 설교 후 두 세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했는데

그 기도는 계속적인 통회로 이어졌다. 이 기도회는 새벽 두시까지 자백과 눈물로 계속되었다.

15일 저녁에도 성령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였다. 이날 설교한 길선주에 대해서 동료장로였던 정익노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교인들은 밤 세워 기도했고 온갖 죄악들이 숨김없이 고백되었다.

눈물은 가슴을 적셨고, 애통하는 회개는 격류를 이루며 평양의 거리를 파도치고 있었다.

확산되어 나감.

장대현교회에서 나타난 부흥의 역사는 순식간에 평양 전역으로 알려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교회에로 확산되었다. 또 평양시내의 선교학교에로 번져갔다.

부흥운동의 열기가 여성과 학생들에게 전이 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사경회와 기도회에 참석하였으며

매주 일요일은 그룹을 지어 평양시내와 인근 촌락을 다니면서 전도운동에 나섬

여성들 역시 여자신도들만 위한 특별 여자사경회를 통해 받은 은사와 기쁨을 가정으로 연결시켜 기독교가정으로 변화시키는 예가 적지 않게 나타나기도 했다.

다른 지방으로도 번져갔다. 이길함에 의해 선천으로, 소안론에 의해 광주로,

한위렴에 의해 대구로 전파되었고,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갔다. 또 평양신학교 학생들에 의해 이 부흥의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래서 신의주, 선천등 북한 지역과 대전,공주,대구,목포등 남한의 다른 지역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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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어갔다. 성경연구와 기도, 전도, 봉사,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고 영적 변화가 일어났다.

1907년 1월에 시작된 부흥의 역사는 약6개월간 계속된 것으로 보지만.

장로교의 경우 1907년 3월 청주집회, 감리교의 경우 1907년 4월 공주집회를 고비로 현저히 약화되었다.

3. 백만인 구령운동

(한국기독교의 역사1 과 다시쓰는 초대한국교회사를 중심으로 정리)

1) 배경과 전개과정..

1909-1910년 일제에 의해 강토가 병탄되었다. 한일합방.

이런 시기를 배경으로 전개된 ‘백만명구령운동’

표어 : 백만인을 그리스도에게..대규모 신자화 운동.

1907년 평양에서 치솟았던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해를 넘기면서 급속히 식어가자 일군의 선교사 들에 의해 쇄잔해 가는 부흥운동의 열기를 되살려 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09년 개성. 스톡스 목사와 남감리교 소속 선교사 3인이 1주일간의 산상기도회를 마치고 지방 전도여행에 나선다. 이 전도여행에 앞서 자신이 시무하던 교회의 교인들에게 1년안에 5만명의 새 신자가 늘어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것이 바로 백만명구령운동의 발단이다.

이후 5만명이라는 목표는 곧 20만명으로 늘어났다. 1909년 9월 남감리회 13차 선교연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스톡스 목사 등 3인은 이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해의 대회 표어가 “20만명 의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이런 운동이 이후에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공의회 에서 마침내 “백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1907-8년 대부흥 운동 의 불길을 이어간 첫 전국 전도 운동, 첫 민족 복음화 운동, 고난의 일제강점기를 대비해 영적 능력을 준비한 성령 운동이었다. 당시 한국 인구 약1300만, 개신교 선교사 300명, 한국교인 20만 명일 때 전개한 전국 복음화 운동이었다.

2) 왜? 선교사들이 백만명구령운동을 추진하려 한 의도는?

‘선교사들은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당시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전도운동을 전개하기에 절호의 기회로 파악했던 것이다.’

“백만 명의 구령이라는 소리는 민족의 실망이 절정에 다다른 이때에 널리 울려 퍼지고 있다.

자기의 잘못으로 파멸과 굴욕의 구덩이에 빠져 자기방위와 자기정치의 능력을 상실한 이 나라 사람들은 만국 백성의 능멸을 받는 처지로 전락되고 국가의 주권은 빼앗겼으며 재정권은 남의 손에 넘어가고 관습되어 오던 사기와 기만의 생활이 끝났다.

오늘날에 와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만국민의 판정을 받고 할 나위없에 된 이 나라는

한 구세주를 찾고 있다. 오늘은 절정의 날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릴 수 없고 예언할 수도 없다.”

(게일 선교사. The missionary v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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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 주권과 강토를 강점당할 위기를 목전에 두고 있던 한국인들은 구한말 포악한 관리들 의 가렴주구를 피하여 교회로 몰려 들었다. 남은 것은 절망과 비통뿐이었으므로 무엇이든지 손길이 닿기만 하면 그것을 붙잡아야만 했던 절박한 상황이 이들을 교회로 이끌게 하였던 것이다. (김양선)

3) 전도방식.날연보와 문서전도

한국에는 20만명의 출석교인이 있었으므로, 한 사람이 네 명에게 전도하면 백만 명 신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등록교인은 8-9만 명 정도였으므로, 실제로 한 살마이 매달 한 명을 개종시켜야 하는 쉽지 않은 목표였다.

구령 운동의 수단은 기도와 성경과 날연보를 통한 개인전도였다.

대규모의 문서전도가 행해졌다. 영국성서공회는 마가복음 특별판 70만부를 출판해서 전도용을 제공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마태복음 16장26절, 로마서 10장13절을 붉은 글씨로 크게 인쇄한 후 아랫부분에 “이길을 더 밝히 알고자 하면 마가복음을 보시오”라고 쓰여진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다. 대규모의 전도지와 쪽복음을 배포하였다.

날연보란 말 그대로 전도운동을 위하여 물질적인 연보와는 별개로 자신의 시간을 연보하는것.

즉 헌일하도록 한 방법을 말한다. 사실상 당시 한국교회의 재정구조나 구성원의 사회 경제적 성격으로 보아 대규모의 전도운동을 위한 물질적 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자신의 몸과 시간을 헌납하는 날연보 방법이 현실적으로 가장 효과적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날연보 방법은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평양에서는 1천명의 신자가 연 22,000일을.

재령에서는 10,000일을 ..이렇게 하여 전도운동기간에 전국에서 바쳐진 날연보 일은 무려 10만일이 넘었다.

4) 결과..신통치 못하였다.

이 운동은 1911년 초까지 계속되었지만 목표로 한 백만명의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할말큼 저조하였다.

4. 성장과 부흥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시기에 일어난 부흥과 성장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를 한다.

<한국기독교의 역사>의 평가. 특히 1907년 평양 대부흥이 끼친 영향을 이렇게 말합니다.

1) 이 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과 정신이 한국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즉 성령 임재에 대한 확신과 죄에 대한 고백, 그리고 장래 있을 심판 및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 한국교회가 체험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

2)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간의 이해 증진에 크게 기여했다.

3) 부흥운동이 끼친 또 하나의 영향은 한국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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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초기 교회와 교인의 사회 도덕적인 취약점이 부흥운동을 통해서 크게 불식되었고, 그 후 한국교회의 경건성을 구현하는 기틀이 되었다.

4) 성경공부와 기도의 열심이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더욱 고양되었다는 점이다.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사경회, 합심기도와 새벽기도에 힘썼다.

5) 역기능적인 부정적 평가는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내지 몰역사성의 문제다.

1905년 을사5조약의 체결을 전후해서, 한국교인들은 ‘십자군병을 일으켜 일본을 축출해야 한다’

는 입장인 데 반하여 선교사들은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은 1907년을 전후한 시기의 시대적인 한국민족의 아픔과 분노를 성령운동 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를 통해 희석시킨 몰역사적 성격을 전혀 갖지 않다고 부인할 수는 없다.

<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에서 1907년 부흥의 역사적 의의 1907년 전후의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은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

1)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과 내적인 신앙의 성숙을 가져왔다.

2) 선교사들과 한국인간의 상호 이해와 공동체적 일체감 형성에 기여하였다.

3) 한국기독교의 성격을 구형하였다.

신학적으로 개인적인 신앙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성격을 구체화했다 그 시대적 상황 때문에 신령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교회를 중시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견적 교회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사회적 책임이나 문화적 소명에 대한 관심이 없다.

이런 점들이 한국교회에 탈 역사적인 내세지향적 교회관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전도운동과 선교운동으로 발전하였다.

5. 강의를 마치면서

1) 세 가지를 중심으로 한국교회 초기의 부흥과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을 했다. 이런 경험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많은 사람들의 대답이 “부흥주의”였다. 부흥을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 부흥을 통해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 좀 더 나가면 성장에 대한 강박이 우리 속에 자리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2) 그럼에도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통해 한국교회를 빚어주셨다는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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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남아 있는 유산들. 날연보와 성미,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 사경회와 성경암송. 이런 유산들을 창조적인 계승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3) 역사를 살펴가면서 우리가 흔히 쓰는 용어를 좀 더 잘 정의할 필요를 느낀다.

흔히 부흥이라는 말은 성장과 연결해서 쓴다. 영적인 체험, 그 체험으로 인한 증거, 성장..

이런 과정을 상정한 것이겠지만 급격한 양적인 성장을 흔히 부흥이라고 말하곤 한다.

‘한국교회가 경험했던 부흥은 단순히 수적 성장이나 발전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와 각성이었다.’

‘부흥이란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근본적으로 생명과 각성, 곧 살아나고 깨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규.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

류대영은 이것을 좀 더 세분화해서 설명한다.

‘부흥(현상)에 참여한 사람들은 감성적으로 고양된 부흥회적 분위기 속에서 죄의식과 회개, 신과 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교제, 그리고 확실하고 격렬한 회심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흥현선이 광범위하게 일정한 기간동안에 거쳐서 연속적으로 발생했다면 그것을 ‘부흥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부흥 현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면 ‘대부흥’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한편 대각성이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대부흥의 결과로 나타난 종교적-사회적 현상을 전체 적으로 말하는 용어로서, 특히 대규모 부흥 현상이 역사상 주기적으로 나타났을 대 사용된다.’

(류대영.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푸른역사)

제대로 된 언어를 가질 때 제대로 된 기도와 추구가 가능하지 않을까?

4)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책 <잊혀진 제자도>에서 불이 소멸되고 난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질문한다. 이 질문은 역사에서 부흥을 불을 경험한 후를 살고 있는 우리의 질문이다.

부흥의 불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종교 분야의 운동들은 인간의 마음에 아주 깊이 가닿고, 인간의 절실한 필요들을 채워 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운동들은 창시자의 불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금방 많이 끌어들인다.

그들은 그 불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 불이 주는 빛과 온기가 필요하고 그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의로 그러려는 뜻이 없이도 결국 빛과 온기를 주는 그 불을 꺼 버린다.’

‘내적인 불은 잃어버리고 직무 내지 사역이라는 외적인 부가물만 남은 이 근원적인 변화의 미세 구조는 무엇인가? 헨리 나우웬이 지적한 사실에 핵심 요지가 들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만큰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충돌하는 것은 없다.”’

‘내면 생활에 있어서 목표가 하나님을 보는 비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우리는 비전도 없이 이런저런 목표의 추구에 갇히고 만다. 단조롭게 그 일만 되풀이한다.’

혹시 우리의 상황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한국교회와 많은 선교단체들이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는 것 이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함께 품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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