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일_2019.10.10 심사기간_2019.11.01-14 게재확정일_2019.12.03
1950년대 후반 북한 그라휘크 미술의 쟁점들
- 『조선미술』에 실린 해외 포스터 전시들과 포스터 담론들을 중심으로
Issues in North Korean Graphic Art in the Late 1950s - focusing on foreign poster exhibitions and discourse on domestic posters by articles in
Joseon Misul김소연_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Kim, So Youn_Graduate School of Techno Design / Kookmin University
차례 1. 들어가며 : 1950년대 후반 활발한 대외문화교류
2. 용어의 정리 2.1. 그라휘크 2.2. 쁠라까트
3. 1950년대 후반 북한에서 열린 해외 포스터 전시와 분위기 3.1. <파란 쁠라까트 전람회> 의 전시 배경과 전시평
3.2. <조선인민군 창설 10주년 쏘련 및 인민 민주주의 국가 포스타 전람회> 의 특징
4. 1950년대 후반 북한 포스터가 직면한 문제들 4.1. 그라휘크에 대한 사회적 인식
4.2. 내용과 형식을 둘러싼 논쟁들
5. 맺음말
참고문헌
1950년대 후반 북한 그라휘크 미술의 쟁점들
- 『조선미술』에 실린 해외 포스터 전시들과 포스터 담론들을 중심으로
Issues in North Korean Graphic Art in the Late 1950s - focusing on foreign poster exhibitions and discourse on domestic posters by articles in
Joseon Misul김소연_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Kim, So Youn_Graduate School of Techno Design / Kookmin University
요약 본 연구의 목적은 북한에서 열린 국제 포스터 전시와 당시 논의되었던 담론들을 통하여 1950년대 후반 그라휘크 미술(Graphic Art)의 대표적 분야였던 포스터에 관한 이슈들을 살펴보는 것에 있다. 1950년대 후반 북한의 예술계는 1960년대 주체미술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으로, 그 어떤 시기보다 역동성을 지닌 시대 였다. 본 연구는 당시 북한의 대표적 미술 잡지였던 『조선미술』에 실린 북한에서 열린 해외 포스터 전시들에 관 한 문헌들과 같은 시기 북한 내에서 논의되었던 포스터 관련 담론들을 주목하였다. 구체적으로는 1957년에 평 양에서 폴란드 포스터 70여 점이 소개된 <파란 쁠라까트 전람회> 와 이듬해 소련, 중국, 몽골, 베트남, 불가리 아, 루마니아, 헝가리, 독일 등에서 355점의 포스터가 전시된 <조선인민군 창설 10주년 쏘련 및 인민 민주주의 국가 포스타 전람회>의 전시평을 연구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 『조선미술』에 실린 정현웅과 엄도만의 포스터 담 론을 통하여 이 시기의 북한 내 포스터가 어떠한 이슈들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연구 결과 북한의 작가들 은 당시 전시된 포스터의 주제보다는 포스터의 다양한 기법들을 주목하였으며, 국가별로 포스터의 특징을 설명 하며 북한 포스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나타냈으며, 질 좋은 포스터를 만들기 위한 인쇄술 향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포스터 담론들은 그라휘크 분야에 대한 사회적으로 낮은 인식과 낙후된 인쇄술의 발전 필요성, 그리고 획일화된 포스터 구성 방식을 문제 제기하였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1) 포스터 작가의 전문적 육성, 2) 정치적 이념을 초월한 포스터의 장르적 특수성 파악, 3) 지도자들의 포스터 전문 지식 쌓기, 4) 포스터 평가 절차의 간소화를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초기 자료의 분석은 주체미술이 확립되기 이전 주요 쟁점들과 그에 대한 배경을 파악함으로써, 북한 포스터의 통시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단초를 제 공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search North Korean exhibitions exhibiting foreign posters, which represent the concurrent trend of Graphic art, and to examine the relevant issues through the discourse in the late 1950s. North Korean artistic circles in the late 1950s were more dynamic than ever, in that the Juche (self-reliance) art movement started to prevail in the 1960s.
This study covers the literature about overseas poster exhibitions in North Korea, such as articles in the iconic art journal Joseon Misul, and the controversies regarding the themes and methods of the posters in the North. In detail, the study focuses on reviews of the <Poland Plakat Exhibition>, which featured about 70 Polish posters in Pyongyang in 1957 and the <10th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the Korean People's Army>, which featured 355 posters from the Soviet Union, China, Mongolia, Vietnam, Bulgaria, Romania, Hungary and Germany in 1958. Also, this study analyzes the context of discussions between Artist Jeong Hyun-woong and Um Do-man, through the articles in the magazine Joseon Misul.
According to the research, North Korean artists paid more attention to various techniques of posters than to the subjects of foreign posters displayed. They illustrated the characteristics of posters from different countries, which led to deliberation over the identity of North Korean posters. Finally, they emphasized a necessity to improve printing techniques to make quality posters. In addition, concerns were raised about the low levels of social awareness regarding the graphics, the underdevelopment of printing technologies, and the uniformity in compositions of posters. Consequently, the following solutions were recommended: 1) fostering poster writers' expertise; 2) identifying common characteristics of posters transcending political ideologies; 3) enhancing the expertise of society leaders on posters; and 4) simplifying procedures of the poster assessment. The analysis of these early North Korean poster materials provides a clue to understanding the usual flow of North Korean posters by identifying key issues before the establishment of Juche (self-reliance) art and its background.
중심어
북한 포스터 그라휘크 1950년대 포스터 전시 포스터 담론
ABSTRACT Keyword
North Korean Poster Graphic Art
1950s
Poster Exhibition Poster Discourse
1. 들어가며 - 1950년대 후반 활발한 대외문화교류1)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포스터 수요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포스터의 양과 질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전자가 포스터 제작 기관의 확충으로 이어졌다면, 후자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선진 예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분위기에 따른 해외 전시의 확대와 각종 예술 문헌의 번역으로 이어졌다. 특히 1950년대 후반, 북한의 미술계는 이후의 그 어떤 시기보다 역동성을 지닌 시대였다. 이러한 요인에는 스탈린 이후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외의 분위기와 더불 어 북한 내/외의 흐름들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던 『조선미술』이라는 전문적 미술 매체의 등장을 주목할 수 있다. 『조선미술』은 북한 미술계 소통의 장(場) 역할 뿐 아니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1950년대 후반의 국제적 예술 흐름을 알리는데 있어서 적극적인 촉매제 역할 을 하였다.
1950년대 후반의 북한은 대외문화교류 사업에 열의를 지니고 있었다. 정관철에 따르면, 1956 년부터 1959년까지 외국에서 열린 전람회는 폴란드(파란), 체코, 루마니아 등에서 7회에 걸쳐 1,000여점의 북한 미술 작품을 소개하였으며 북한에서는 같은 시기 18회에 걸쳐 2,625점의 외국의 미술 작품들이 소개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2)
이는 그라휘크 분야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여서, 판화와 쁠라까트를 비롯한 200여점의 소련 그라휘크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전시였던 <쏘련 그라휘크 전람회>를 시작으로, 이듬해 봄에 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와르샤바 세계 청년 축전>에 참가했던 림홍은과 불가리아를 다녀온 정현웅의 <그라휘크 2인 전람회> 가 신의주에서 열리는 등 1950년대 후반의 북한 미술계는 국제적 예술 흐름을 파악하는데 상당한 열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국제 교류를 통하여 이들이 추진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예술 교류를 통해 선진 기법과 흐름을 배우는 것을 넘어, 예술 분야에서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것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1950년대 후반, 구체적으로 1957년부터 1958년까지 진행되었던 대규모의 해 외 포스터 전시를 살펴보는 한편, 1950년대 후반 『조선미술』에 실린 포스터와 관련한 이슈 들을 살펴보았다. 이는 본격적으로 주체미술이 확립되기 이전인 초기 북한 그라휘크의 흐름과 쟁점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그 의의가 있다.
2. 용어의 정리 2.1. 그라휘크
1950년대 북한의 미술계는 소련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시기로, 1957년 창간된 『조선 미술』 또한 초기에는 소련의 예술 관련 문헌을 번역하는데 적극적인 양상을 보였다.
그래픽(Graphic) 에 대한 소련식 발음인 그라휘크(гра́фик)는, 희랍어의 “쓰다, 그리다”라는 뜻의 “grapho”가 그 어원이다.3) 당시 소련에서는 회화, 조각과 같이 그라휘크를 하나의 미술 장르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북한에서도 그라휘크 관련 작가들의 작품들과 문헌들에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라휘크의 정의와 분류 방식에 대해서는 소련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북한에서도 이 에 대해 조금씩 다른 관점으로 정의한다. 가령 김창석은 그라휘크의 파급력에 주목하여 “광 범한 대중적 보급성을 가지는 비교적 용적이 적은 기동적이며 전투적인 예술 쟌르” 로 설명 하는가 하면4), 정현웅은 매체적 성격에 집중하여 “그라휘크란 간단히 말하자면 인쇄를 통해 서 재현되는 미술을 총괄해서 부르는 말”로 정의한다.5) 그라휘크라는 새로운 용어는 곧 당
1) 이 논문은 저자의 2018년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북한 포스터 연구 : 인물 표상의 시각기호와 전형성을 중심으로」) 제 4장의 1-2절. “사회주의 포스터의 영향”에서 다룬 포스터 전시의 설명 일부를 확대하고 이에 대한 담론을 추가적으 로 분석한 연구로, <2019년 여름 남북문학예술연구회 학술대회> 발표 내용을 정리한 것임을 미리 밝힙니다.
2) 정관철, 「조선로동당 제 3차 대회 결정 실행을 우한 미술가 동맹 사업 정형에 대하여」, 『조선미술』, 1959년 9호, p. 3 3) 「술어해설 - 그라휘크」, 『조선미술』, 1960년 7호, p. 40
4) 김창석, 「미술가 친우에게 보내는 서한 - 쏘련 그라휘크 미술 전람회를 보고 -」, 『조선미술』, 1957년 1호, p. 20 5) 정현웅, 「그라휘크의 발전을 위하여 –포스터를 중심으로 - 」, 『조선미술』, 1957년 4호, p. 17
시 대중들에게까지 빠르게 확산되게 되었는데, 이러한 요인 중 하나로는 1950년대 후반 북 한에서 열린 각종 그라휘크 전시와 소련 예술 서적들의 번역 및 출판이 활발히 이루어진 점을 들 수 있다.
2.2, 쁠라까트
폴란드어로 쁠라까트(플라카트/Plakat)6) 는 벽보, 포스터, 현수막 등을 의미한다. 폴란드 뿐 아니라 당시 동독/Plakat 과 소련/плака́т 등에서도 쁠라까트는 포스터의 의미를 담고 있다.
때문에 소련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던 1950년대 북한의 예술 서적에서는 외국 포스터에 대한 내용을 설명할 때 쁠라까트와 포스터를 혼용해서 표기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파란 쁠라까트 전람회>에 대한 기사나 전시평에서는 “파란의 포스터”라고 쓰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전시명과 같은 고유 명칭은 그대로 쓰되, 연구에서는 포스터로 용어를 통일하였다.
3. 1950년대 후반 북한에서 열린 해외 포스터 전시와 분위기 3.1. <파란 쁠라까트 전람회> 의 전시 배경과 전시평
북한에서 파란 포스터가 단독 전시를 열 정도로 주목을 받게 되는 배경에 대해 1957년 2월 28일에 열린 <제 1차 전련맹 쏘베트 미술가 대회>에서 발표된 B. 이와노브7)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8) 이 글은 1957년 『조선미술』을 통해 부분적으로 번역본이 실렸으며, 이듬해인 1958년에 조선미술사 발행으로 『제1차 전련맹 쏘베트미술가대회 문헌집』 이라는 단행본으 로 번역되었다. 문헌집에는 요간손의 「쏘베트 조형 예술의 상태와 과업에 대한 보고」를 비롯 하여 회화, 미술평론, 그라휘크, 정치 포스터, 조각, 무대 장치 예술, 장식 미술등의 다양한 분야를 다룬 글들이 실렸으며 이 중에서 이와노브는 포스터에 대한 쟁점들을 다룬 「정치 포스 타에 대한 보충 보고」를 맡았다.9) 여기에서 그는 포스터계에 불고 있는 새로운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포스타 분야에서 리론적 과학적 일반화의 결여는 회화주의의 경향과 <회화성>을 비난하 면서 일부 사람들이 ..(중략)... 혹은 선택함이 없이 현대 파란의 포스타를 본받으라고 권고 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중략)... 성공적인 파란 포스타들의 례에서 우리는 거대한 정치적 쩨마들을 그러한 방법을 리용함으로써도 인간의 형상을 말하면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10)
6) 여기에 나오는 ‘쁠라까뜨’ 는 plakat 에 대한 북한식 표기로, 본 연구에서는 원문과의 통일성을 고려해 그대로 옮겨 표기하였음을 밝힌다.
7) 번역된 책에는 “B. 이와노브”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이 책의 “B” 는 러시아식 표기를 따른 것으로 추정되며, 영문 명칭은 Viktor Semenovich Ivanov (Russian: Виктор Семёнович Ивано́в) 이다.
8) 이 대회에는 조선 대표로 조선미술가동맹중앙위원회의 정관철 위원장과 국립 미술박물관의 선우담 관장이 참석하였다.
9) 이 책에 실린 글은 총 8편으로, 각각의 글쓴이와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Б. В. 요간손, 최철준 역, 「쏘베트 조형 예술의 상태와 과업에 대한 보고」
2. И. A. 쎄레브랸늬, 최철준 역, 「회화에 대한 보충보고」
3. M. B. 알빠또브, 김창석 역, 「미술학과 미술 평론에 대한 관한 보충 보고」
4. H. 쥬꼬브, 송고천, 최철준 역, 「그라휘크에 대한 보충 보고」
5. В. 이와노브, 김하 역, 「정치 포스타에 대한 보충 보고」
6. H. B. 똠쓰끼, 지청룡 역, 「조각에 대한 보충 보고」
7. Н. П. 아끼모브, 김덕인 역, 「무대 장치 예술에 대한 보충 보고」
8. A. Б. 쌀띄꼬브, 장병기 역, 「장식 미술에 대한 보충 보고」 / 각각의 글은 각기 다른 번역자들에 의해 번역되었는데, 이와노브 글의 경우 김하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10) 이와노브,「정치 포스타에 대한 보충 보고」, 『제1차 전련맹 쏘베트미술가대회 문헌집』, 조선미술사 발행, 1958, pp. 139- 140 / 참고로, 이 글에서 이와노브는 파란 포스터에 대해 소비에트 포스터가 본받아야 한다거나 파란 포스터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 여기는 분위기를 소개하지만 자신은 이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힌다.
이러한 대목을 통하여 당시 파란의 포스터가 회화주의 경향과는 다른,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 으키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외국의,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인민 민주주의 국가의 포스타를 너무나 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라며 자국 (소련) 외의 외국의 포스터들을 알아가는 일은 화가들 뿐 아니라 관람자들에게도 유익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11) 이러한 분위기는 소련 미술계의 동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북한의 미술계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또한 이 시기 폴란드와 북한간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들 수 있다. 전시의 개관식에 참석한 정 관철 역시 “파란과 조선간의 1957년도 문호 교 류 협정에 의해 진행되는 이 전람회”12) 라고 표 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북한과 폴란 드의 문화 교류, 특히 미술 분야의 교류가 활발 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최은석이 쓴 글, 「파란 포스터를 본 나의 소견」 에서도 드러난다.
최은석은 “나는 전람회장에서 예친구를 만난 듯 고(故) 뜨레푸꼬우스키- 따레우스 동지의 작품 <안된다!>를 보았다. ...(중략)... 작품 <안된다!> 외에도 그의 유작으로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와르샤와> 와 <5.1절> 이다.”13)라고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언급은 당시 북한 작가들이 소련은 물론 폴란드 포스터들을 익숙하게 접하는 환경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파란 쁠라까트 전람회>는 1957년 12월 27일부터 이듬해 1월 6일까지 평양 모란봉 극장 갤러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여기에는 폴란드 포스터 70여 점이 전시되었다. 최은석은 이 전시회에 대하여 “파란 미술가들이 이번 년말 년시를 통해서 조선 미술가들에게 보내 준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전체적인 전시평에 대해 “현 대적 파란 화가들의 창작 생활 체험의 깊이에서 나오는 기지있는 이메지, 예술적 치밀성에서 설계된 구도, 매혹적인 색감, 미적 감성과 훈련의 축적에서 나오는 다양한 기법의 구사, 자신 만만한 필치, 이 모든 것이 현대적 감각으로 세련된 –압축되고 간결 명료한 대화술을 체득한 사람들만이 가지는 – 설득력을 가지고 설복한다.”14)라는 표현으로 현대적 포스터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고귀한 선물”, “세련”, “현대적 감각” 이라는 표현 들은 당시 북한에서 파란의 포스터에 대해 전체적으로 어떤 인식을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 암시한다.
<그림 2> 트레푸꼬우스키- 따레우스(Tadeusz Trepkowski), 안된다! (Nie!)
<그림 3> 스비에르지 - 왈데마르, 장난을 했지요
<그림 4> 트레푸꼬우스키- 따레우스, 나의 대학
11) 앞의 책, p. 140
12) 「파란 쁠라까트 전람회 개관」, 『조선미술』, 1958년 2호
13) 최은석, 「파란 포스터를 본 나의 소견」, 『조선미술』, 1958년 3호, p. 45 14) 최은석, 앞의 글, p. 45
<그림 1> 『조선미술』에 소개된 파란 쁠라까트 전람회
또한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전시에는 당시 북한 포스터와 상당히 다른 기법과 구성을 취하는 포스터들 또한 전시에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작품 <장난을 했지요> 의 경우 성냥개 비로 사람을 의인화했는데, 이에 대한 최은석의 평은 아래와 같이 긍정적이다.
“나는 보는 사람의 심리는 어지없이 잡아 끄는 재치있는 화가 스비에르지 왈데마르의 <장난을 했지요>를 잊어버릴 수 없다. 검은 바탕에 성냥가치 8개를 사람 형태로 배렬하고 오른 손에 쥔 것처럼 세운 성냥에서 불이나는 불조심을 호소하는 포스타가 그것이다. 성냥 가치로 된 사람의 형태가 마치도 장난꾸러기 아이를 방불케 하며 이렇게 단순한 화면에서 미소를 머금으 면서 그 의도를 납득하게 한다.”15)
『조선미술』에 실린 최은석의 전시평은 대부분의 작품들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열린 태도를 지니면서도, 포스터의 분위기나 주제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거나, “애매한 결론”을 주는 포스터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가령 그는 뜨레푸꼬우스키- 따레우스의 또 다른 출품작인 <나의 대학> 과 같은 영화 포스터에 대해서는 앞의 찬사와는 다르게 “작가 의 주관주의가 작용하고 있는 낡은 수법”, “현저한 질적 차이를 느낀다.” 는 식으로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16) 이렇듯 포스터의 기법에 대해서는 의인화를 비롯한 다양한 표현 방식에 긍정적 인 자세를 가지면서도, 추상적 주제의 작품들 앞에서 배격하는 모습은 당시 북한 포스터의 화두가 주제의 다양성보다는 기법의 다양성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3.2. <조선 인민군 창건 10주년 쏘련 및 인민 민주주의 국가 포스타 전람회> 의 특징
<조선 인민군 창건 10주년 쏘련 및 인민 민주주의 국가 포스타 전람회>는 1958년 평양 국립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4월부터 11월 말까지 신의주, 미술대학, 사리원, 해주, 혜 산, 함흥, 원산, 강계에서 주요 지방 순회 전시를 가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전국 규모의 큰 전시 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17) 1958년 『조선미술』 4호에는 이 전시에 출품된 포스터 도판 이미 지 24점이 실리게 되는데, 여기에는 소련, 중국, 몽골, 베트남, 체코, 독일,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등의 포스터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 호인 『조선미술』 5호에서는 포스터 작가 홍성철의 전시평이 게재되었다. 이에 따르면 전시회에는 소련 80점, 중국 75점을 비롯한 총 355점의 포스터가 전시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서 홍성철은 최은석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포스터의 구성과 기법에 주목하고 있는데 가령, 중국 의 만화적 기법을 사용한 포스터에 대해서는 북한에도 예전에는 있었으나 종적을 감춘 기법이 라 평하며 이러한 기법 역시 발전시켜야 함을 지적한다. 또한 소련 포스터 작품에 대해서는 북한 포스터 또한 규격의 다양성을 통해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함을 주장하는가 하면, 독일 포스터에 대해서는 목판화의 효과를 잘 살려 박력있게 묘사되어 있다고 평하면서도, 민족 적 형식이라는 측면을 생각했을 때 북한은 목판화보다 조선화 형식의 포스터를 연구해야 한다 고 역설한다. 그는 특히 중국관에 걸린 포스터들을 인상 깊게 보고 평을 남겼는데, 무엇보다 중국 포스터만이 지닌 정체성이 잘 살아있음을 강조하며 북한에서도 이러한 점을 배워야 할 것을 주장한다.
“중국관은 쏘련관에 걸린 포스타와 비슷한 수법의 작품들이 많이 있으나 민족적인 향기가 풍 부한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전통적인 <국화>18) 수법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색채 도안 수법을 리용하여 형상화된 그림에 그 색감들에서까지도 중국 포스타라는
15) 최은석, 앞의 글, p. 47 16) 앞의 글, p. 46
17) 『조선미술』 , 1958년 5호, p. 21
18) 여기서의 국화란 中国国画, 즉 전통적인 중국화 기법을 의미한다.
특성이 잘 살려지고 있는 점이다. 나는 조선 포스타 발전을 위하여 민족적 특성 문제를 생각할 때 연구할 점이 많다고 느끼게 된다.”19)
<그림 5> 이 또이제, 안심하고 자라라 (소련)
<그림 6> 장조화(Jiang Zhaohe),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중국)
<그림 7> 엔.와들리나, 어린이들이 자라나는 것은 전쟁을 위해서가 아니다 (소련)
<그림 8> 노부뜨나. 꾸뚜프로인드와, 국제 부녀절 (체코)
<그림 9> 때쁘째, 국제 아동절 (헝가리)
<그림 10> 샌 도하, 루마니야 해군 무력 만세 (루마니아)
<그림 11> 알렉산드로 쓰다메노브, 9월 9일 해방자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불가리아)
또한 그는 그동안 북한에서 포스터 수법(기법)의 다양성 문제를 경시해왔음을 지적하는데, 이는 소련관에서 출품된 사진과 도안을 배합한 포스터, 이른바 구성주의 포스터의 대표적 양식 인 포토몽타주 포스터에 대한 감상평에서 두드러진다. 주지하듯 북한의 포스터는 구성주의 이후 스탈린 시대 포스터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이전의 포토 몽타주 기법이 아닌 그려 진 포스터들이 주를 이루어왔다.
하지만 홍성철의 전시평에 따르면, 이 전시회에서는 사진과 도안을 합성한 수법의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포스터들에 대해 “조국해방전쟁시기”(한국 전쟁시기, 1950-1953) 에 소련화가가 한국전쟁을 주제로 사진과 도안을 합성한 것을 본 적이 있다고 기억하며, 그 이후에는 사진을 이용한 포스터를 본 적이 없다고 회상한다.20) 그는 이 문제가 인쇄술과도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글 말미에서 “전시된 작품들을 보며 더욱 절실하게 느낀 것은 포스터의 질 제고 문제는 인쇄 기술”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다른 출판물도 물론 그러하지만은 포스타 출판물은 특히 인쇄기술에 절대적으로 좌우된다.”21)라는 그의 문 제 제기는 당시 북한 포스터계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담론들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 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포토몽타주 기법을 실현하기에 당시 북한의 인쇄 기술의 한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소련에서 기존 구성주의 양식인 포토몽타주 기법의 포스터가 스탈
19) 홍성철,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경축 쏘련 및 인민 민주주의 제 국가 포스타 전람회를 보고」, 『조선미술』, 1958년 5호, p.
20
20) 앞의 글, p. 20 21) 앞의 글, p. 21
린 시대 그려진 포스터로 대체되어진 것은 단순한 기법상의 차이를 넘어 예술을 ‘생산’과 ‘사 상’ 이라는 두 축 중에서 어떤 면으로 강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그려진 포스터는 인쇄 기술적인 면을 고려했을 때, 1950년대 북한이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포스터 기법이었다.
4. 1950년대 후반 북한 포스터가 직면한 문제들
이러한 다양한 국가들의 포스터를 보며 북한의 출판 미술 작가들은 어떠한 생각과 의견을 나누 었을까. 이 시기 『조선미술』에 실린 북한 내 포스터 관련 문헌을 정리하면 [표 1] 과 같다.22) [표 1] 에 실린 1950년대 후반 포스터 관련 글은 총 12건으로 외국 포스터 전시 관람평이 2건(최은석, 홍성철), 북한 포스터 전시의 심사평이 4건(정현웅, 민병제, 최은석, 엄도만), 포 스터 작가의 창작 후기가 2건(김리영, 박상락), 포스터 작가의 앞으로의 목표에 대한 글이 2건(엄도만, 한원식), 그리고 포스터에 대한 주요 쟁점을 다룬 글을 2건(엄도만, 정현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외국 포스터 전시의 관람평은 부분적으로 본 연구의 앞 부분에서 다루었으며, 포스터 작가의 창작 후기는 개별 작품에 집중되어 있는 성격의 글이다. 또한 포스 터 작가의 목표를 다룬 글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는데 목적을 둔 것으로 정치적 배경과 관련하여 참고적으로 작용할 수 는 있지만 본 연구 주제인 포스터에 대한 구체적인 쟁점들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이 중에서 포스터에 대한 주요 쟁점들을 다루 며 문제와 해결책을 제시한 엄도만과 정현웅의 글을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년호 제목 저자
1957 창간호 그라휘크에 대한 옳지 못한 견해를 시정하라! 엄도만
1957 4호 그라휘크의 발전을 위하여
- 포스터를 중심으로 - 정현웅
1957 5호 전국 미술 전람회 그라휘크에 대한 소감 정현웅
1957 6호 그라휘크 미술의 발전을 위하여 민병제
1958 4호 파란 포스타를 본 나의 소견 최은석
1958 5호 1957년도 우리 포스타 창작에서 얻은 경험 최은석
1958 5호 조선 인민군 창건 10주년 경축 쏘련 및 인민 민주주의 제 국가
포스타 전람회를 보고 홍성철
1958 5호 그라휘크 미술의 발전을 위하여
– 포스타를 중심으로 - 엄도만
1958 9호 그라휘크 발전에 헌신하겠다 엄도만
1958 9호 조국의 평화통일 위업에 이바지하고저 한원식
1958 10호 훌륭한 그라휘크 화가가 되기 위하여 김리영
1958 10호 나의 창작 후기 박상락
<표 1> 1957년-1959년『조선미술』에 실린 포스터에 관한 글
22) 이 표는 1950년대 후반 북한 내 포스터에 대한 동향과 인식을 아보기 위한 것으로, 단순 알림 기사나 외국 문 헌을 번역한 것은 제외하였으며, 그라휘크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글이라 하더라도 내용 상 포스터에 관한 내용이 실리지 않은 글(예를 들어 1957년 5호 김창석의 글 「미술가 친우에게 보내는 서한 : 쏘련 그라휘크 미술 전람회를 보고」)등은 제외하였다. 『조선미술』 창 간호부터 1959년까지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부분적 결호가 있음을 밝힌다.
이 표에 실린 『조선미술』 범위는 다음과 같다. 1957년 1-6호, 1958년 1-12호, 1959년 1-3호, 5-12호
4.1. 그라휘크에 대한 사회적 인식
당시 북한 포스터가 지닌 문제점에 관해서는 엄도만과 정현웅의 글을 주목할수 있다. 엄도만의 경우 1957년부터 1958년까지 세 편의 그라휘크 관련 글을 『조선미술』에 게재하는 등 그라 휘크, 세부 분야로는 포스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23) 특히 『조선미술』 창간호에 실린 엄도만의 「그라휘크에 대한 옳지 못한 견해를 시정하라!」 는 그 제목이 암시하듯, 유화 중심의 미술계에서 그라휘크 미술이 홀대를 받고 있는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글이 다. 그는 그라휘크 분과에 소속되어 있는 작가들 이 전람회에는 유화 작품만을 내놓는 현실을 문제 제기하며 “이러한 편견은 일제 시대에 소위 <순수미술>이 뿌려놓은 관념의 잔재일 것 이다.”라고 지적한다.24) 더 나아가 그는 “유화는 유화, 그라휘크는 그라휘크로서의 자기의 특수성이 있는 것이며 이 특수성은 각자가 서로 깊이 연구하고 호상(상호)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임을 주장한다.25) 창간호에 실린 엄도만의 이 글은 유화에 대한 주류적 분위기를 전달하는 가운데 각 분야의 고유성을 인정해 달라는 것으로, 이는 아직 1960년대 주체미술의 형식으로써 조선화가 본격적으로 모든 미술의 중심이 되기 전의 시기적 상황을 반영한다.
또한 유화를 다른 장르보다 더 우수하게 판단하는 것은 “일제시대의 잔재”라 지적하는 표현을 통하여 유화로 미술계에 발을 들인 엄도만 또한 유화 중심의 현실을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57년부터 그라휘크분과위원장을 맡은 정현웅의 「그라휘크의 발전을 위하여- 포스 터를 중심으로-」 글은 그라휘크 분야 가운데에서도 이 시기 포스터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것으로, 여기에서 정현웅은 엄도만의 1957년 글과 상당 부분 같은 문제 를 인식하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가령, 그는 유화와 포스터와의 관계에 있어서 포스터가
“유화의 뒤꼬리를 따르려고 했다.”며 비판하면서 포스터가 지닌 고유의 독특한 성격을 잃지 않아야 함을 지적한다.26) 또한 그는 엄도만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그라휘크의 발전이 저조한 까닭에 대하여 첫째로는 출판과 인쇄술의 낙후된 상황을, 둘째로는 화가들이 그라휘크를 홀시 하는 태도를 언급한다.27) 그는 이것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하여 각각 “일제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와 민족문화 말살정책”,“일제의 잔재”라 꼬집어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엄도만과 같은 관 점이다.28) 덧붙이자면, 이는 곧 일제 강점기에 인쇄소에서 출판되는 출판물들에 대한 일본의 검열과 압력 등으로 인한 출판물의 전반적인 부진과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인쇄 기술이 향상 될 수 없는 환경적 요인을 지적한 것이다. 정현웅의 글 - 「그라휘크의 발전을 위하여 -포스 터를 중심으로-」 에 같이 등장하는 오노레 도미에(Honoré Victorin Daumier) 의 석판화 작품 <출판의 자유> 도 역사적으로 출판물의 부진했던 상황을 암시하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2. 내용과 형식을 둘러싼 논쟁들
정현웅은 앞서 언급한 문제에 공감하면서도 그라휘크 분야 중 특히 포스터의 가장 큰 문제는 도식주의라 지적하였다. 당시 도식주의에 대한 비판은 스탈린 사후의 소련의 정세와 맞물려
23) 엄도만은 1957년부터 1958년에 걸쳐 꾸준히 포스터 화가로서 그라휘크 발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957년의 글이 그라 휘크에 대한 위상을 강조하고,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면, 1958년에 쓴 글들은 당의 문예정책을 충실하게 반영해야 함을 강조하고 이에 반하는 이들을 공격하고 비판하는 기조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1958년에는 그라 휘크 위원장을 맡았던 장진광과 김강에 대해서 장진광의 경우 깜빠니야 (캠페인) 적인 것에만 국한시켜 그라휘크 발전에 해독을 주었다고 평하는가 하면, 김강은 외국 것의 모방을 통해 당의 문예정책을 왜곡했다고 비판한다. (엄도만, 「그라휘크 미술의 발전 을 위하여 – 포스타를 중심으로-」, 『조선미술』 , 1958 5호) 이러한 그의 글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비평이 아닌 1958년의 사 회적, 정치적 흐름을 반영한다.
24) 엄도만, 「그라휘크에 대한 옳지 못한 견해를 시정하라!」, 『조선미술』, 1957, 창간호, p. 56 25) 앞의 글, p. 56
26) 정현웅, 「그라휘크의 발전을 위하여 – 포스터를 중심으로 - 」, 『조선미술』, 1957년 4호 , p. 19 27) 정현웅, 「그라휘크의 발전을 위하여 – 포스터를 중심으로 - 」, 『조선미술』, 1957년 4호 , p. 17
28) 앞의 글, pp. 17-18. 엄도만 역시 화가들이 그라휘크를 홀시하는 태도가 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일제의 잔재로 설명한 바 있다.
이미 문학 분야에서 논의되었던 바, 이전 해인 1956년 <제 2차 조선작가대회>에서 “도식주의 비판과 극복”을 내세워 그해 12월 『문학신문』을 창간하게 된다.29) 정현웅은 포스터의 도식 주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에서 기인한다고 밝힌다.
가. 포스터의 특수성에 대한 무지
정현웅의 설명에 따르면, “화가 자신의 무자각”이란 포스터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비단 북한 내의 문제만이 아닌 소련 포스터의 결함으로 지적된 것이기도 했다.30) 그는 포스터는 “포스터 카라” 라는 포스터 재료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직관성을 특징으로 하며, 선명하고 강한 색감을 강조하는 포스터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포스터를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포스터 분야의 성격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 첫째, 포스터 분야의 전문가를 급속히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유화가들이 포스터를 그려온 기존 방식으로는 포스터 특유의 성질을 표현하지 못하고, 회화적인 포스터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둘째 로는 이러한 포스터 장르적인 특수성은 자본주의 / 사회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념을 떠나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자본주의 포스터에서도 배워야 할 점은 배우고, 유익한 것은 흡수해야 함을 강조한다.31)
나. 합평회의 검열과 경직성
다음으로 정현웅은 특히 국내에서 제작되는 포스터의 구성과 형식의 경직성과 획일화에 대하 여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어떠한 인물이 한명 내지 둘이 서서 한팔을 높이 치켜 들었거나 무엇을 가리키거나 또는 들고 있거나, 뒤에 기발이 날리고 공장 지대가 있고 뜨락또르가 밭갈이 하고 구호는 반드시 밑에 쓴다는 등등의 형식이 마치도 철칙 같이 되어 있다.”32)
그는 이렇듯 포스터가 “어디서나 반드시 사회주의화한 농촌”이 들어가야 하는 등의 획일적인 구성을 갖추게 된 원인으로 합평회의 지나친 간섭을 지목한다. 즉, 합평회의 검열로 인하여 포스터 작가들은 “다양하고 참신한 포스터를 그리고 싶어” 하지만, “합평회 등에서 서로 말들 이 많으니까 아예 처음부터 통과하기 쉬웁게 종전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33)
그는 이러한 북한 내 포스터 제도와 인식의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구체적인 해결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데 이를테면 “합평회 절차를 단일화하여 미술가들에게 불필요 한 시간과 정력의 랑비와 고통을 주지말며 창발성을 저해하지 말 것”, 그리고 “포스터 지도 일군들이 미술 소양을 높이도록 해야 함”을 대안으로 삼는다.34) 이 글에서 정현웅은 합평회의
29) 당시 『문학신문』은 도식주의 극복을 위한 목적으로 창간되었으며, 이 매체는 시, 소설, 음악, 영화, 미술, 무용과 같은 북한 내 문 학 및 예술 분야는 물론 외국 및 남한의 문예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다. 김성수, 「사실주의 문예비평의 전개와 문학신문 : 1950-60년대 북한 문학의 동향 」, 『아시아문화』,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2년 8호, pp. 270- 271 참고
30) 소련 포스터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정현웅은 “제 1차 전련맹 쏘베트 미술가 대회에서도 쏘련의 포스터의 중요한 결함으로 론의” 되었음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이에 따라 1958년 『제1차 전련맹 쏘베트미술가대회 문헌집』 이 단행본으로 나오기 이전인 1957년 쏘베트 미술가 대회에서 다룬 쟁점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1) 정현웅, p. 20 / 이는 1950년대 후반의 대내외 정치적 상황 속에서 도식주의 극복을 위한 『문학신문』의 발행과 함께 박영근과 같은 당대 번역가들이 미국, 프랑스,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온 출판물들도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 맥락을 같이 하 는 것으로 여겨진다. 박영근에 대한 내용은 김태경, 「북한‘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조선화(Koreanization)’: 문학에서의 당의 유일사 상체계의 역사적 형성」, 서울대학교 정치학 박사논문, 2018, pp. 85-88 참고
32) 정현웅, 주 26)의 글, p. 19 33) 앞의 글, p. 19
34) 앞의 글, p. 20
검열을 문제 제기하며 화가들의 자율적 구상을 장려해야 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다음 호에 게재된 글에서는 그라휘크 작가들이 합평회의 참여도가 낮은 현상을 비판하며 적극적으로 합 평회에 나와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35) 이를 종합해보자면, 그는 합평회 그 자체를 비판하 는 것이 아니라 합평회의 불필요한 과정들을 개선하여 그라휘크 작가와 지도자간의 소통의 장이 되기를 바랬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엄도만과 정현웅은 그라휘크에 대한 비평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방안을 촉구 하였다. 엄도만은 창작가들이 그라휘크를 홀대하는 현상을 지적하며 그라휘크는 그라휘크 대로, 유화는 유화대로의 분야에 대해 서로 존중하는 태도를 강조하였다면, 정현웅은 더 나아가 포스터 작가들의 문제 뿐 아니라 지도자들의 미술 소양 및 합평회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 제기와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좀 더 제도적 차원으로 접근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국 포스터에 대한 동경과 이를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당의 문예정책이 강화되고 집체 창작과 ‘우리식의 포스터’를 강조하면서 사그라들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1950년대 후반의 글에서도 감지되는데, 가령 『조선미술』 4호는 다국적 사회주의 포스 터 작품들이 실린 가운데 서두는 김창석의 글에서 시작한다. 그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서 수정주의적 편향들이 일부 예술가들에게 “전염”되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현상을 강하 게 비판한다. “국제적 범위에서 대두한 수정주의의 바람이 우리 문학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으며”36) 라고 단언하며 수정주의 흐름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은 이후 본격적인 주체미술이 진행되면서 경직화되는 북한 예술계의 상황을 암시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5. 맺음말
이상으로 1950년대 후반의 북한에서 열린 외국의 포스터 전시들과 당시 포스터를 다룬 담론 들을 살펴보며 이 시기 북한 출판미술의 쟁점들을 다루어 보았다. 이 기간동안 북한에서 열린 포스터 전시에서는 소련 뿐 아니라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독일, 베트남 등의 다양 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작품들이 출품되었다. 북한은 포스터 전시에서 특히 다양한 기법에 주목 하며 관심을 나타냈는데 사물에 대한 의인화를 적용한 포스터, 만화적 수법의 포스터, 사진을 이용한 포스터 등에 대한 관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당시 『조선미술』에 실린 문헌들을 기반으로 1950년대 후반 북한 포스터에 대한 여러 가지 이슈들을 살펴보았다. 홍성철은 전시평을 통하여 북한의 포스터가 국제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낙후된 인쇄 기술을 지적했다고 한다면, 엄도만은 포스터에 대한 사회적 홀대, 다시 말해서 유화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포스터는 물론 그라휘크 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 하였다. 마지막으로 정현웅은 포스터가 도식주의에 빠진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의 포스터에서도 좋은 점은 받아들일 것, 합평회 절차를 단일화 할 것, 지도자들의 미술 소양을 높이고 포스터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할 것을 구체적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외국 포스터 전시평과 당시 포스터에 대한 논의들을 정리 및 분석함으로써 미약하게 나마 ‘담론’ 이라는 키워드로 북한 포스터를 살펴봤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시도가 북한 포스터에 대한 연구를 보다 다각적인 면에서 살펴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35) 정현웅, 「전국 미술 전람회 그라휘크에 대한 소감」, 『조선미술』, 1957, 5호, p. 41 36) 김창석, 「미학상에서의 수정주의적 편향을 반대하며」, 『조선미술』, 1958, 4호, p. 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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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석, 「파란 포스터를 본 나의 소견」, 『조선미술』, 1958년 3호
홍성철,「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경축 쏘련 및 인민 민주주의 제 국가 포스타 전람회를 보고」, 『조선미술』, 1958년 5호
「파란 쁠라카트 전람회 개관」, 『조선미술』, 1958년 2호
「술어해설 - 그라휘크」, 『조선미술』, 1960년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