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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토 시 론
산을 더 산답게, 강을 더 강답게
최정호 | 전 한국미래학회장
내가 한국미래학회에서 ‘산과 한국인의 삶’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착수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2년 여름의 일이다. 한 세기가 저물어가 고 새로운 세기의 먼동은 아직 트지 않은 땅거미 속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봤다.
‘백년기가 바뀌고, 천년기가 바뀌는 세기 말에 즈음해서 변화를 준비하고 변화의 흐름을 읽고 그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는 일은 중요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빨리 변하는 것 과 더디 변하는 것이 있다. 변화에도 시차가 있다. 심지어 단기적인 전망에서 는 다른 것들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우리들의 삶을 크게 규정하는 공간적, 물리적 환경이 대부분 그렇다. 세상이 아무리 덧없이 변해도 자연은 그리 쉬이 변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산과 한국인의 삶’이라는 주제를 먼저 생각해본 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에서였다. 산이란 한국에, 한국의 자연에, 한국인의 심상에, 한국인의 자연체험과 세계체험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이란 언제 어디서나 한국의 자연에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언제 어느 곳에서 누가 이 땅에 살든 한국인의 자연체험·세 계체험에서는 필연적·운명적으로 만나는 것이 산의 존재다.
산이 있는 곳에는 물이 있다. 개천이 있고, 강이 있다. 서양어의 ‘풍경 (Landscape, Landschaft)’이란 말은 ‘토지’나 ‘경지’와 같은 평면적인 ‘땅 (Land)’에서 나오고, 거기에서 ‘풍경화’란 말도 나왔다. 그러나 한국의 풍경 은 평면적인 땅이 아니라 입체적인 고향 ‘산천(山川)’이요, 고국(故國) ‘강산 (江山)’이다. 그걸 그린 그림도 ‘산수화’라 일컫는다. 산과 강이 있다는 것이 한국적인 자연 공간의 본질이요, 그것이 도망칠 수 없는 이 땅의 자연이 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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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인 구성 요인인 것이다.
왜 산과 강을 생각해 보는 것일까? 왜 21세기의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새롭게 생각한다는 것일까?
그 발상의 바탕에는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두어서 는 안 되겠다는 인식이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 땅 에 있는 그대로의 산과 강에서 유유자적하고자 하 는 것이 아니오, 그래서도 안되겠다는 자각이었다.
산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잘 다스려왔 기 때문에 우리는 지난 세기 후반, 벌거벗은 이 땅 의 민둥산을 푸르게 물들이며 20세기 유일의, 제3세 계 유일의 조림 녹화 성공국이라는 기적을 이루었다 (UN FAO 발표).
산을 다스린다, 물을 다스린다는 것이 도대체 무 엇일까?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다 해서 산 과 강을 산이나 강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는 새로운 ‘치산 치수’란 오히려 산을 더욱 산답게, 강을 더욱 강답게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산은 단순히 땅이 솟아 있는 고지(高地)가 아니 다. 그와 마찬가지로 강도 땅이 꺼져 파인 긴 골짜기 가 아니다. 산은 나무가 우거져야 비로소 산답고, 강 은 물이 흘러야 비로소 강답다. 그럼에도 나라가 망 하고 둘로 갈라지고 전쟁터가 되면서, 우리나라의 산 에는 나무가 없어지고 도처에 민둥산만 있었다. 그러 던 산이 산림녹화라는 반세기에 걸친 치산사업의 대 역사를 통해 마침내 다시 산다워지면서 ‘푸르러진 한 국(Greening of Korea)’의 기적을 낳은 것이다.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의 한강은 홍수 가 나지 않은 평상시에는 실개천처럼 가느다랗게 흘 렀고 강의 대부분은 물이 아니라 모래사장이었다.
산에 나무 대신 모래만 있었던 것처럼 강에도 물 대
신 모래만 있었다. 산이 산답지 않았던 것처럼 강도 강답지가 않았던 것이다. 한강이 오늘날처럼 물이 풍부하고 배가 떠다니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 다. 그것은 오랜 치수사업 끝에 겨우 지난 세기 말에 야 이뤄진 대역사다.
강에는 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훨씬 많은 물을, 엄청 많은 물을 담고 있어야 한다. 예전 에는 상당량의 저수기능을 담당했던 무논(水田)이 이제는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의 진행으로 상당 부 분 사라졌다. 게다가 공업용수와 생활용수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는 이 땅의 미래 전망에서 물의 수급 상황에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 이는 물의 저장 및 공급 능력을 제고시키는 강의 치수사업이 긴요함을 경고하는 배경 요인이다.
산은 한 곳에 우뚝 서 있으나 강은 흐른다. 그래 서 강에는 길, 즉 물길이 있다. 물길도 길인 이상 고 속도로처럼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길은 사람이 걷고 노닐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물만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물 위나 물가 에서 사람들이 거닐고 노닐 수 있는 물길을 만들어 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앞으로 이 땅의 치수사업 은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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