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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칼럼] 동중서, 유가 독존의 시대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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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2권 제2호, 2019

동중서, 유가 독존의 시대를 열다

이 상 은 교수 (상지대학교)

동중서(董仲舒, BC.170?-BC.120?)는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로 출생지와 생몰년대가 모두 분명치 않은데, 하북성(河北省) 광천현(廣川縣) 출신이라고 한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할 때에 천인삼책(天人 三策)이라는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인정을 받고, 전한의 새로운 교육문화정책에 참여하게 되었다. 오경박 사(五經博士)를 두게 하고, 과거제를 시행하는 등 한나라 문교의 중심에 여러 학파의 다양한 사상 중에 유가사 상을 최고의 위치에 놓아, 유교(儒敎)를 국교화(國敎化)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저서로는 ≪춘추번로(春秋繁露)≫

가 대표적인 것이다.

주(周)나라가 서쪽 호경(鎬京, 지금의 西安)에서 동쪽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BC.770) 시작된 춘추 시대(春秋時代)가 대략 500여 년이나 지속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열국지≫ 즉, ≪동주열국지(東周列國 志)≫는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춘추시대를 이해하려면 먼저 주나라의 봉건제도(封建制度) 를 알아야 한다. 서양의 봉건제가 영주(領主)와 농노(農奴)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봉건제라 한다면 주나라의 봉 건제는 정치적 봉건제라고 할 수 있다. 주나라는 넓은 영토를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서 사방 4백리 정도의 도성(都城)에 천자(天子) 즉, 중앙정부가 자리 잡고 나머지 영토는 여러 제후국으로 분할하여 천자의 아들(태자 를 제외한)이나 형제 혹은 조카,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땅을 나누어 봉해주고(封土), 임금을 세운다(建侯).”는 봉토건후(封土建侯)의 줄임말이 바로 봉건(封建)인 것이다.

이렇게 봉해진 여러 제후국 120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천자국인 주나라를 받들어, 조공을 바치고 군사 를 동원하는 일종의 지방정부 내지는 연방정부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러한 질서가 잘 지켜졌지만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점점 친소관계가 소원해져 각국이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독립국으로 살기를 원했다. 주나 라의 유왕(幽王)이 정치를 잘못하여 서쪽 오랑캐국에 의해 살해되면서 주나라는 도읍을 동쪽인 낙양으로 옮긴 다. 주나라 천자는 이제는 더 이상 권위를 갖지 못하고, 제후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각 나라들은 강국이 되기 위한 영토합병전쟁에 힘을 기울였다. 이런 와중에서 패권을 잡았던 나라가 춘추오패(春秋五覇)이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 (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句踐) 등이 바로 그들이다. 춘추시대에 기록에 남겨진 전쟁만도 1,200회가 넘으며, 이를 통해 결국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불리는 진(秦), 초(楚), 제(齊), 연(燕), 한 (韓), 위(魏), 조(趙) 등의 일곱 나라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시 150여 년간 지속된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열린 것이다.

이들 전국칠웅 가운데 일찍 법가사상을 받아들여 변법(變法) 즉, 개혁에 성공한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 게 된 것이다. 그 대업을 이룬 이가 바로 진시황(秦始皇)이다. 진시황이라는 칭호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 인물들 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皇)’과 ‘제(帝)’를 따고 맨 처음이라는 의미로 ‘시(始)’를 붙여 자신을 시황(始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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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C News, Volume 22, No. 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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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시황제(始皇帝)로 불렀던 것이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며 붙인 이름이지만 천하를 통일한 지 15년만인 2대인 호해(胡亥) 때 멸망하게 된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주나라의 봉건제를 군현제(郡縣制)로 바꾸었다. 봉건제가 황제의 친인척에게 나라를 나누어 맡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라면, 군현제는 황제 자신이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감독하면서 다스 리는 제도였다. 중국 전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그 각각을 둘로 나누어 72개의 현(縣)으로 만들었다.

진시황은 군현제를 실시하고, 만리장성을 완성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많은 일을 했다.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의 통일을 이루려 하고, 불로초를 얻어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이 50세의 나이로 죽자 진나라는 4년도 안되어 망했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난 후에 천하를 놓고 다툰 것은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었다. 이 당시의 역사를 소설화한 것이 ≪초한지(楚漢志)≫이며, 이들의 싸움을 놀이로 바꾼 것이 장기판이다.

처음에는 항우가 절대 우세였지만, 인재를 얻어 잘 기용한 유방이 장군으로는 훌륭하지만 정치적 감각과 리더 십이 부족했던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우게 된 것이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멸망이 무단과 폭압의 정치에서도 기인하지만, 세세한 것까지 법으로 만들어 규제하려던 진나라의 법가(法家)적 통치방식이 오히려 사회적 위기를 가져왔다는 생각에 억지로 하지 말라는 도가(道家)의 무위정치(無爲政治)를 채택하게 된다. 그 당시 도가에서는 유가(儒家)가 요순(堯舜)을 내세우는 것에 대해 중국 문명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黃帝)를 내세웠으며, 황제와 노자의 첫 글자를 따서 황로사상(黃老思想)이라고 불렀 다. 고조 유방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세 가지 법 즉, ‘법삼장(法三章)’만 있으면 족하다고 이를 공포한 것도 여기서 연유한다. 법삼장은 “살인한 사람은 죽이고, 도둑질한 사람과 남을 상하게 한 사람은 그만큼 벌을 받게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방임에 가까운 통치방식은 왕권의 약화와 귀족세력의 강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한 (漢)나라도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끌 수 있는 이념근거가 필요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7대 황제 무 제(武帝)는 널리 많은 이들에게 국가를 다스리는 현량대책을 물었고, 이때 유가사상을 중심으로 한 통치방법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동중서(董仲舒)였다.

≪전한서(前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 의하자면 동중서가 무제에게 올렸다는 현량대책의 내용은 다음 과 같다. “대의명분을 가지고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 세상의 영원한 법칙이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보편 적인 정의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상한 주장을 펴고 있으며, 제자백가 또한 방법과 의도가 모두 다릅 니다. 그래서 통치자는 통일을 유지할 수가 없으며, 백성들은 법과 제도가 자주 바뀌기 때문에 무엇을 지켜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생각건대 육예(六藝)의 과목과 공자의 사상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없애버려서 함께 행하지 못하게 한다면, 사악하고 치우친 주장들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기강이 하나로 통일되 고 법률제도가 분명해져서 백성들이 좇을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동중서의 건의를 무제가 받아들여 유가를 높이고 다른 학문들을 배제시킨 뒤로는 유가사상은 지배세 력의 지원 아래 정통학문으로서 권위를 얻게 되었다. 청(淸)나라 왕조가 망할 때까지, 유교는 국교의 지위를(왕 조에 따라 불교나 도교를 숭상한 때가 간혹 있었지만) 유지하게 된다. 결국 중국 봉건왕조에서 유가 독존의 시 대를 연 것은 동중서의 역할이 지대하였다고 하겠다.

동중서는 집념이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3년간이나 자기 집 정원도 내다 보지 않았다.(三年不窺園)”고 하며, “발[簾]을 내리고 자기의 학설을 논의하고, 제자들로 하여금 지방으로 전파하게 하였기 때문에 제자들 중에도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한다.(≪전한 서≫ <동중서전>) 동중서가 주도한 정책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유가의 기본 경전인 ≪오경(五經)≫ 즉, ≪시경 (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를 중시하여 오경박사를 두었으며,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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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 인재의 선발을 위하여 과거제도를 처음 시행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새로운 정치적, 사회적 질서에 이론적인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것이 그의 핵심과제였다. 그것 은 그의 저서 ≪춘추번로≫에서 주장한 천인상감설(天人相感說) 혹은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로 불리는 새로운 이론이었다. 인간(人)과 자연(天)은 하나라는 기본적 사고에서 나온 이 이론은 두 가지의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임금이 되는 것은 하늘이 인정한 것이라는 일종의 왕권신수설적인 입장이다. 이는 무제의 통 치를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재이(災異)를 일으켜 벌한다는 재이설(災異說)을 주장해서 왕권을 견제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중서의 주장은 양날의 칼처 럼 통치계급을 지지하는 주장과 절대권력을 견제하는 주장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제의 호감을 사 고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은 무제의 분노를 사서 다른 경쟁하는 신하의 참소로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중국철학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천인관계 즉,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어떻게 보 느냐 하는 것은 중국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대표적인 것이 천인합일내지는 천인상관의 관점으로 하늘과 인간을 하나로 이어진 것으로 보는 학설이다. 중국철학의 주류를 이루는 이론이었지만 특히 맹자에서 강조되었고, 이를 보다 체계화화고 이론화 한 것이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이라고 하겠다. 또 다른 관점은 천인분 리 내지는 천인무관의 관점으로 순자의 사상이 대표적이며 후에 왕충(王充)에 의해서 더욱 심화되었다.

동중서는 음양가의 음양오행설을 끌어들여 유가사상과 결합시켰다. 음양(陰陽)이란 원래 해가 비치는 양달 과, 햇볕이 들지 않는 응달을 표시하는 구체적인 개념이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만물을 형성하고 움직이는 상반 된 그러나 상호보완의 작용을 하는 두 가지 기운 [氣]라는 개념으로 발전된 것이다.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 (五行)도 처음에는 오방(五方), 오성(五星), 오재(五材) 등을 가리키는 구체적인 요소로부터 출발하지만, 점차로 사물의 운동과 변화에 관계하는 다섯 종류의 기운 내지는 속성으로 이해하게 된다. 음양설과 오행설이 따로 생 겨나서 내려오다 어느 시점에 기(氣)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음양오행설이라는 하나의 학설로 성립된 것이다. 그 것이 바로 동중서에 의해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氣)라는 개념은 현대적인 용어로 바꾸기 어려워 그대 로 기라고 쓴다. 굳이 말하자면 에너지, 운동, 힘과 같은 물질성적인 개념이다.

동중서의 천인상감설은 결국 인간이나 자연이 모두 기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인간이 사회현실 속에서 한 행위들은 그것이 쌓여서 결국 자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재이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인간의 잘못한 행위를 하늘이 벌한다는 식의 해석은 다분히 목적론적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오늘날 의 환경문제 등을 통해서 볼 때, 인간들의 행위가 직접적으로 자연에 영향을 미쳐 결국은 재난과 이변으로 이 어진다는 것은 기계론적 해석이 가능하며,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중서의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천인감응설은 그릇된 정치에 대한 자연의 경고라는 사회철학적 의미와 더불어 자연과학적인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음양오행론은 요소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관계론적으로 이해한 그의 학설은 중국의 의학발전에도 크게 공헌한 바가 있다.

하지만 동중서가 건의하여 시작된 유가독존의 현상은 얼마 가지 않아서 공자 신격화오 같은 비이성적인 모 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동중서의 재이설은 신비적인 이론들과 결합되어 술수로 타락하여 하늘에 대한 군주에 사명이라든가 군주에 대한 하늘의 견제라는 본래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중서의 사상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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