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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적선인(天上謫仙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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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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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李白; 701~762)은 자가 태백(太白), 그의 출생에 대해서 는 이설이 분분하여 정론이 없다. 곧 금릉(金陵) · 산동(山東)

· 농서(隴西) · 사천(四川) ·서역(西域) 등 여러 설이 있다. 유 대걸(劉大杰)은,

이백의 조적(祖籍)은 감숙, 출생지는 서역, 자라난 곳은 사 천, 그리고 오랑캐와 한족의 혼혈아다. ……산동과 금릉은 모두 그가 중년에 기우(寄寓)하던 곳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먼 조 상의 관적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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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초년 시대는 사천에서 책을 읽고, 검술을 배우며 협객 · 도사들과 어울려 지냈다. 오랫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는 사이, 운몽에서 결혼도 했고 병주(幷州)에서는 곽자의(郭子儀)를 알 게 되었다. 10여 년 동안 그는 많은 명승지를 돌아다녔고, 또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으며 또 거액의 금액을 썼 다. 이러는 동안 그의 시명은 나날이 높아져갔고, 드디어 장안 으로 올라가 현종을 만나보게 되었다. 이때 하지장(賀知章)은 그의 시를 보고 ‘천상적선인(天上謫仙人)’이라 했다. 현종은 그를 아주 우대했고 한림(翰林)을 시켰다. 더 높은 벼슬을 주 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번번히 환관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 했다. 그가 장안에 머무른 3년 동안도 역시 낭만적인 풍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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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보냈다. 그 당시 그는 고역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다느니 또는 양귀비에게 먹을 갈아 벼루를 받들게 했다느니 하는 일화를 남기면서 아름답고 훌륭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 중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역시 침향정(沈香亭)에 서 작약을 읊은 <청평조(淸平調)〉 3수이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이미 55세였고 그 이듬 해에 여산(廬山)에 은거하여 훌륭한 시를 많이 썼다.

이때 영왕(永王) 이인(李璘)이 군사를 일으키매 여기에 가담했 다. 그러나 영왕이 실패하자 그도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곽자의(郭子儀)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면하고, 야랑(夜郞)으로 유배 되었다. 무산(巫山)에 이르렀을 때 사면되어 풀려나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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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때가 59세의 고령이었다. 그의 나이 62세 되던 해에 당 도(當塗)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의 최대의 특색은 곧 웅방(雄放)한 기상에 있다. 시 를 씀에 있어서 어떠한 체재, 어떠한 격률도 그의 용감하고 천재적인 창조성 앞에서는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일찍이 두보 (杜甫)는 〈음중팔선가(飲中八仙歌)〉 시에서 “이백은 술 한 말 에 시 백 수, 장안 술집에서 잠자네. 천자가 부르는데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일컬어 주중선이라네.(李白一斗詩百篇, 長安市上酒家眠, 天子呼來不上船, 自稱臣是酒中仙)” 라고 읊 었는데, 우리는 이백의 능수능란한 시 솜씨, 낭만적인 일상생 활, 그리고 그의 오만한 본성 등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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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포가(秋浦歌)

白髮三千丈하니 흰 머리카락 삼천 길 緣愁似箇長이라

카락마다 시름 따라 자라났나.

不知明鏡裏에

거울에 비친 백발은 何處得秋霜고

어디서 얻은 가을 서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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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杜甫; 712~770)는 자가 자미(子美), 호북(湖北) 양양(襄 陽) 사람이다. 그의 조부는 초당 시인 두심언(杜審言)이고, 그 의 부친은 두한(杜閑)으로 역시 낮은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당대에 와서는 이미 가세가 기울어져 가난했다. 어릴 때 는 병이 잦았고 집안이 나난했지만 학문은 무척 좋아하여 나 이 20세 전에 벌써 학문의 기초는 닦아져 있었다. 24세 때에 과거를 보았지만 낙방하고 실망하여, 산동(山東)·산서(山西)·하 남(河南) 등지로 유랑하면서 이백·고적(高適) 등과 왕래하며 시로써 화창하였는데, 이때 그의 생활은 방탕 속에 빠져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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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34~35세 되었을 때 다시장안으로 들어가 약 8~9 년을 살았는데, 비록 생활은 가난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 었지나, 당시 사회상을 빈틈없이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그의 작풍에 변화를 가져다주게 된 중요한 전환기가 되었다.

양귀비(楊貴妃) 일족의 위세와 횡포는 국정을 어지럽히고 백 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현종은 궁중에서 연락(宴樂)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어지럽고 부폐한 광경과 도 탄에서 헤매는 민중의 고통은 하나하나 절실하게 두보의 시상 (詩想)을 자극하고 압박하고 또 그로 하여금 분노에 떨게 했 다. 그의 작품 내용의 전환은 그로 하여금 사실주의(寫實主義) 적인 사회파(社會派) 시인들 가운데서 확고하고도 가장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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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를 차지하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 44세 되던 해에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났는데, 그는 약8년 간을 이끌어온 난리 속에서 전란 중의 모든 참상과 역 경을 세밀히 목격하고 체험할 수가 있었으니 그의 사회시의 제재(題材)는 더욱 풍부해졌고 사실적인 기교도 더 진보되었 다.

그 뒤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할 때, 그는 영무로 가다가 도중에서 뜻밖에 적도(賊徒)들에게 갇히어 하는 수 없 이 홀로 장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의〈애왕손(哀王孫)〉·〈애강 두(哀江頭)〉·〈춘망(春望)〉 등은 이때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이 다. 그 이듬해 그가 46세 때 그는 봉상(鳳翔)으로 달아나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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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배알하고 좌습유(左拾遺)의 벼슬을 얻었다.

그 후 두보는 성도(成都)에 이르러 친구의 도움으로 완화계(浣 花溪)에다 초당을 짓고 잠시 안정된 생활은 유지했다. 그러다 가 엄무(嚴武)가 검남(劍南)의 절도사가 되어 그의 추천으로 절도참모(節度參謀)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의 벼슬을 얻었다. 그 뒤 서천(西川) 병마사 서지도(徐知道)의 반란을 당 하여 피난 길에 올라 사방을 유랑하다가 엄무가 다시 난을 진 압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성도로 다시 돌아왔다.

나이 54세 되던 해인 대종(代宗) 영태(永泰) 원년 엄무의 죽 음으로, 그는 생활근거를 잃고 성도를 떠나 기주(冀州)에 이르 렀다. 이후 뇌양(耒陽)에서 59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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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정의 전통과 그가 겪은 빈곤을 거울삼아 사실적인 인생관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 가운데는 불도·신선(佛道神仙) 의 색체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으며 때때로 요·순(堯舜)의 성 세를 동경하고 공자의 우민구세(憂民救世)의 정신을 추앙하고 있어 진정 유교도(儒敎徒)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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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망(春望)

國破山河在하고

나라는 망하였어도 산하는 그대로 있고 城春草木深이라

성 안에 봄은 와 초목만이 무성하다.

感時花濺淚오

전시를 생각하면 꽃도 눈물 흘리게 하고 恨別鳥驚心이라

이별을 한탄하면 새도 마음놀라게 한다.

烽火連三月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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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는 석달이나 연이었고 家書抵萬金이라

집에서 온 편지 만금이나 값나간다.

白頭搔更短하니

흰 머리는 긁어서 더욱 짧아졌으니 渾欲不勝簪이라

비녀조차 온통 가누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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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당시(中唐詩)

왕유, 맹호연 일파의 산수시의 영향을 유장경(劉長卿)·위응물 (韋應物)·유종원(柳宗元) 등이 계승하였고, 사회파 두보 시의 영향은 백거이(白居易)·원진(元稹) 등이 받아서 이를 통속화시 키기에 노력하였으며, 또 한유(韓愈)가 이백의 기질로 시를 썼 으며 이밖에도 유우석(劉禹錫)·장계(張繼)·고황(顧況) 등과 이 른바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 및 장적(張籍)의 시는 각각 이 백 내

지는 두보의 영향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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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경(劉長卿:710-780)은 자가 문방(文房), 하간(河間) 사람 이다. 보통 중당 시인으로 지목되고 있으나 실은 개원·천보 연 간에 이미 그의 이름이 났었다. 특히 그의 5언 절구는 그 작 의가 심원하고 표현이 섬세하여 왕유의 시와 비견할 만하다.

유종원(柳宗元:773-819)은 자가 자후(子厚), 산서(山西) 하동 (河東) 사람이다. 그는 한유(韓愈)와 더불어 산문대가로 ‘당송 팔가(唐宋八家)’의 한 사람이지만 시에 있어서도 한유와 어깨 를 나란히 한다. 그의 산수시는 결코 그 내용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힘들여 새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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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설(江雪)

千山鳥飛絶이오

온 산에 나는 새들 안보이고 萬徑人蹤滅이라

길마다 인적도 끊어졌네.

孤舟蓑笠翁이

외로운 배엔 도롱이 입고 삿갓 쓴 노인 獨釣寒江雪이라

눈 오는 추운 강에서 홀로 낚시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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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張繼:?)는 자가 의손(懿孫), 호북(湖北) 양양(襄陽) 사 람이다. 생졸 연대가 분명하지 않고, 천보 연간에 진사로 급제 하여 후에 검교원외랑(檢校員外郞)까지 지냈다. 〈풍교야박(楓 橋夜泊)〉 시는 유명하다.

풍교야박(楓橋夜泊)

月落烏啼霜滿天한데

달 지고 까마귀 우는 밤 찬서리 천지에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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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 단풍과 고기잡이 불 향수와 더불어 타고 있네.

姑蘇城外寒山寺의 고소성 밖 한산사의 夜半鐘聲到客船이라

밤의 종소리 나그네의 배에까지 들려오네.

이하(李賀790-816)는 자가 장길(長吉), 하남(河南) 창곡(昌 谷)에서 태어났다. 27세에 요절하고 만 아까운 사람이다. 귀 족 출신의 귀공자였으므로 세상 물정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모르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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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賈島:779-843)는 자가 낭선(浪仙), 하북(河北) 범양 (范陽) 사람이다. 처음에는 승려였으나 한유의 권유로 속세로 나왔다. 문종(文宗) 때 장강(長江)의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이 로 인해서 세인들은 그를 ‘가장강(賈長江)’이라고 한다. 그는 한유를 알게 됨으로써 유명해졌는데 그는 “조숙지변수, 승고 월하문(鳥宿池邊樹, 僧鼓月下門)” 이라는 자작 시구에서 ‘고 (敲)’자를 쓰는 게 좋은지 ‘퇴(推)’자를 쓰는 게 좋은지를 몰라 이를 한유에게 물어서 비로소 ‘고(敲)’자를 택했다는 ‘퇴고(推 敲)’에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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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문답(松下問答)

※원제: 尋隱者不遇 松下問童子하니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라

스승은 약초캐러 갔다 하네.

只在此山中이나

다만 이 산중에 있으나 雲深不知處라

구름이 깊어 계신 곳을 알지 못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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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만당시(晩唐詩)

당대의 문학사조는 만당에 이르러 다시 한번 바뀐다. 곧, 성·중당의 두보·장적·원진·백거이를 연결하는 사실주의의 사회 시는 만당 시인들에 의하여 여지없이 비판을 받는다.

글의 최고 성취는 곧 아름다움이며 이 아름다움의 가치는 곧 예술의 가치라는 것이다. 작자는 작품의 형식과 문자의 수식, 그리고 음률의 조화에 힘써야 하며, 그 내용이나 효용에 관심 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당의 시가는 더욱 화려해 져서 나타나고 맹·한(孟韓)의 기교주의가 더욱 세밀해졌으며 여기에 유미주의가 첨가됨으로써 상징적이고 신비한 정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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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일어나게 되었다.

두목(杜牧)을 비롯하여 이상은(李商隱)·이군옥(李群玉)·온정균 (溫庭筠)·단성식(段成式) 그리고 한악(韓偓) 같은 시인들이다.

두목(杜牧:803-852)은 자가 목지(牧之), 경조(京兆) 만년(萬 年)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그를 두보와 구별하여 ‘소두(小杜)’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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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는 그의 풍류 호색적인 성격에 따라 화려하고 염정 적인 색채로 가득차 있다. 이런 시의 예술적 성취는 오히려 독 자로 하여금 무언가 좋아하고 심취해서 읽도록 하고, 드디어 는 일대 유행을 가져오게 한다. 그런가 하면 화류계의 정경을 너무나도 자세하게 묘사하여 중국 문학사상 흥미있는 화류문 학을 이루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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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회(泊秦淮)

烟籠寒水月籠沙오

찬 강물 위엔 저녁 연기 모래밭엔 달빛 夜泊秦淮近酒家라

밤 들어 진회에 정박하니 술집이 가까이 있네.

商女不知亡國恨하고

가희(歌姬)는 망국의 한을 알지 못하고 隔江猶唱後庭花라

강 건너 술집에서 〈후정화〉를 부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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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淸明)

淸明時節雨紛紛하니

청명 시절 보슬비는 보슬보슬 路上行人欲斷魂이라

길 가는 사람 마음 상하게 하네요.

借問酒家何處有오

묻노니 술집은 어디에 있나?

牧童遙指杏花村이라

목동은 저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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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李商隱:813-858)은 자가 의산(義山), 회주(懷州) 하내 (河內) 사람이다. 초년에 부친을 잃고 영호초(令狐楚)에 의지 하다가 영호초가 죽고는 그 아들 영호도(令狐綯)에 의지하였 다. 그러나 진사 급제 후에 경원(涇原) 절도사 왕무원(王茂元) 의 사위가 되었는데 왕무원은 귀족파인 이덕유(李德裕)의 일파 였고 영호도는 진사파인 우승유(牛僧孺) 일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영호도에게 배은 망덕한 놈이라고 욕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영호도는 그 후 10년 간을 재상직에 있으면서도 그를 돌봐 주지 않고 멀리 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관운은 평생 불우했고 여기에서 오는 불만을 그는 시에다 터뜨리기도 했 다. 속관 생활을 한 뒤에 정주(鄭州)로 가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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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목과 함께 만당 유미 문학(唯美文學)의 쌍벽이었다.

※시를 통해 본 당대의 문학사조는 초당의 격률시(格律詩)가 왕유·이백을 대표로 하는 낭만시(浪漫詩)와 두보·백거이를 대 표로 하는 사회시(社會詩)를 거쳐 마침내 이하와 이상은을 대 표로 하는 유미주의적인 시에 이르러 그 막을 내린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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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설(小說)

※6조시대의 소설-지괴(志怪)

※6조 : 삼국의 吳, 동진과 남조의 宋 齊 梁 陳 6개 나라. 남 경이 수도였고, 정치는 양자강 하류의 揚州가 중심이며, 군사 는 양자강 중류의 荊州가 중심, 곧 漢 이후 隋 나라까지 長江 중심의 漢族 문화 시대.

기이(奇異)한 것을 기록(記錄)한다는 의미로, 대체로 작가가 없는 神話, 傳說, 民譚의 이야기, 일반적으로 작가는 없고 기 록성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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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자(列子) 탕문편(蕩問篇)의 여왜보천지설(女媧補天之說)이 나, 회남자(淮南子) 본경훈(本經訓)의 예사십일지성설(羿射十日 之說)

※산해경(山海經)--곤륜산과 서왕모 이야기 목천자전(穆天子傳)--후세 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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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張華:232-300)의 박물지(博物志), 간보(干寶:약317전 후)의 수신기(搜神記)

육조시대의 지괴(志怪)가 唐代로 내려와 전기(傳奇)로 바뀌면 서 그 내용과 체재가 일신되고 작가들의 의식 또한 일변되었 다. 논자들은 당대의 소설이 전대에 비해서 문사가 화려했졌 을 뿐만 아니라, 중국 소설사에 있어서 그 기초를 확립했다는 데에 의의와 가치를 찾고 있다.

變怪스럽고 奇異한 이야기는 六朝時代에 성행하였지만 어긋난 것을 전해 기록한 것이 많았고 아직도 상상에 의해 창작해내는 것을 다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唐代에 이르러서는 곧 意識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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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奇異한 것을 좋아하여 小說 곧 虛構的인 이야기를 빌어 여 기에 그들의 붓끝을 기탁하였다.

주목해야 할 점은 唐代小說 작가들의 意識的인 창작행위이 다. 육조의 귀신 지괴적(鬼神志怪的)이었던 내용을 인간 사회 적인 내용으로 차츰 변화시켜나가게 하였다.

전기(傳奇)가 어째서 唐代에 와서 盛行하게 되었을까? 대체 로 육조시대의 지괴소설의 영향, 불경 번역작품의 전파, 문체 의 해방, 전기작품의 승관(昇官) 도구화, 사회 및 시대에 따른 관념적인 진보 등의 몇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唐代 傳奇는 내용에 따라 대체로 신괴류(神怪類)·애정류(愛 情類)·풍자류(諷刺類), 그리고 호협류(豪俠類) 등 크게 4종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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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있다.

첫째, 神怪類에 속하는 傳奇는 직접 육조시대의 지괴(志怪)로 부터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산생시기가 비교적 빠르며, 내용 또한 우언(寓言)에 가까운 것이 많다. 그리고 또 한편으 로 그 당시는 도·불(道佛)사상의 세력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 어 귀신과 사람이 상통하는 줄 알고, 따라서 유혼보응(幽魂報 應)의 설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서 이와 같은 소 설이 많이 나왔다.

둘째, 愛情類에 속하는 傳奇 작품은 당대 전체의 전기 가운 데서 문학적인 가치로 보아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봉건제도 아래서는 이성간의 자유로운 결합이란 상상조차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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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당대에 이르러서는 환경이 일변되었다. 낭만사상이 盛 行하여 個性을 존중하고 애정이 분방해짐으로써 봉건예교의 굴레를 박차고 나오려 노력했다.

셋째, 풍자류(諷刺類)에 속하는 전기들은 시대상을 반영한 점 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당대에 있어서 시인 재자(詩人才子)나 일반 서민들의 사상은 부귀 공명이나 출장입상(出將入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조정은 부패되었 고 변방은 소란했으며 정객들은 무리를 지어 싸움에 바빴고, 법조계(法曹界)도 공명정대함을 잃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 사회상은 모두 심기제(沈旣濟)의〈침중기(枕中記)〉· 이공좌(李公 佐)의〈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 등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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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제(沈旣濟)의 자는 알 길이 없고, 소주(蘇州) 오(吳) 땅 사람이다. 경학에 밝고 대력(大曆) 연중에 양염(楊炎)의 추천 으로 좌습유(左拾遺)·사관수찬(史館修撰)에 임명되었고, 정원 (貞元) 연중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까지 올랐다. 대표작 은〈침중기(枕中記)〉이다.

이공좌(李公佐; 약 770~850)는 자가 전몽(顓蒙), 농서(隴西) 사람이다. 그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에는 순우분(淳于棼) 이란 자가 꿈 속에서 대괴안국(大槐安國)의 국왕의 부름을 받 고 나아가 부마가 되고, 또 남가(南柯)의 태수로 30년을 지내 는 동안 혁혁한 치적을 쌓고 5남 2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다가 후에 외적의 침입을 받아 패전하고 공주마저 죽어 결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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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를 믿지 못하고 돌려 보내고 만다. 이와 동시에 그는 꿈 에서 깨어나는데 모든 환경은 꿈꾸기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 런데, 괴나무 밑을 파보았더니 개미의 굴이 있었는데 그 구조 가 자기가 꿈에서 겪고 본 것과 똑같았다. 그래서 그는 인생 무상(人生無常)을 느끼고 ‘부귀공명이란 한 바탕의 꿈과 같은 것’임을 깨닫고 드디어 도문(道門)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이야 기를 서술했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이란 말은 곧 여기에서 나왔으며, 작자 의 의도는〈침중기〉와 거의 흡사하여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도·불 사상을 이용하여 모순된 사회 심리를 바로잡으려 한 작 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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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호협류(豪俠類)에 속하는 전기들은 주로 영웅·협객들의 의거(義擧)를 주제로 하고 여기에다 정치와 애정을 곁들여 그 구성이 다양하다. 당대는 안사(安史)의 난 이후로 사회가 어지 럽고 번진(藩鎭)이 발호(跋扈)하고 검객이나 협사들이 도처에 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공좌(李公佐)의〈사소아전(謝小娥傳)〉은 사소아가 그의 시아 버지와 남편을 살해한 도적을 찾아내어 끝내 원수를 갚고 만 다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특히 소아의 꿈에 죽은 시아 버지와 남편이 각각 일러주고 간 수수께끼를 풀어서 도적을 잡게 된다는 이야기가 좀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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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아지(沈亞之; 약 823 전후)의 〈풍연전(馮燕傳)〉에는 풍연이 자기와의 사련(邪戀)에 빠져서 본 남편을 살해하려 하는 여자 를 도리어 죽이고 달아났다가 후에 자수하여 사죄(死罪)를 면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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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문(變文)

唐代는 도교(道敎)와 불교가 다 융성하던 때였다. 특히 불교 는 일생을 포교에 헌신한 현장(玄奘)과 같은 대법사(大法師)가 나와서 인도(印度)로부터 직접 불경을 구해 와서 무려 1,330 권을 번역해냈다고 한다.

번역된 불경 내용 내지 석가모니의 사상을 일반 백성들이 쉽 게 볼 수 있는 구어체(口語體)로 만들어 포교에 이용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변문(變文)’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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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문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07년 5월부터였다. 헝가리의 지리학자 슈타인(A.Steine)이 돈황(敦煌) 천불동(千佛洞)의 석 실에 많은 서적과 그림, 그리고 보물이 있음을 발견하고 24 상자의 필사본과 5상자의 그림 및 골동을 사 갔고, 이어서 프 랑스의 학자 뽈 뻴리오(Paul Pelliot)도 이 소식을 듣고 달려 와 적지 않은 양을 사 갔다.

돈황에서 나온 옛 문물은 세계 각처로 퍼지게 되어 영국 런던 에 있는 박물관에 6천 권의 필사본이 갔고 파리 국가 도서관 에 1,500 권의 필사본이 갔으며 북경 도서관에 6천여 권이 남 았고 약간은 개인의 소유가 되기도 했다.

돈황에서 발견된 필사본 가운데 약 9할은 불교 경전이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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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도교의 경전과 실전되었던 문학 작품들이었다. 그러 므로 이 가운데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변문이다. 변문이란 참신한 운문(韻文)과 산문(散文)을 겸한 일종의 강창 문학(講 唱文學)으로 불사(佛寺)에서 나왔다. 승려들이 불경의 진의를 선양하기 위하여 불경을 쉬운 말로 고쳐서 이를 일반에게 강 술하였기 때문에 ‘변문(變文)’이라고 한다.

변문의 형태는 이것이 일종의 講唱 文學이기 때문에 강(講) 하는 부분은 散文으로 되어 있고, 창(唱)하는 부분은 韻文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학형식은 중국 고대 정통파의 문 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참신한 것이다. 또 문체는 문언(文 言)과 병려(騈儷), 그리고 생동하는 백화(白話)를 섞어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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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고, 운문으로 된 부분은 7언이 가장 많고 여기에 3언을 섞었으며 4 · 6문의 조직도 있다.

변문의 종류는 그 내용에 따라 불사(佛寺)를 서술한 것과 사 사(史事) 및 잡사(雜事)를 서술한 것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불사를 서술한 것으로는〈유마힐경(維摩詰經)〉·〈항마 (降魔)〉·<대목건련명간구모(大目乾連冥間救母)〉·〈지옥(地獄)〉·

〈부모은중(父母恩重)〉·<팔상성도(八相成道)〉·〈아미타경(阿彌陀 經)〉·〈불본행집경(佛本行集俓)〉• <추녀연기(醜女緣起)〉 등의 변문이 있으나 앞의 세 변문을 제외하고는 별로 알려지지 않 고 완전히 남아 있지도 않다.

〈대목건련명간구모변문(大目乾連冥間救母變文)〉은 불제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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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건련이 지옥으로부터 그의 어머니를 구출해낸다는 이야기 를 서술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경률이상(經律異相)〉경에 보 이며, 당대에 이미 대단히 유행하던 것이다. 작품 중에 지옥의 참상을 잘 묘사하여 인생의 인과윤회(因果輪廻)에 따른 응보 (應報)를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지옥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은 후세 문학작품에 끼친 영향이 대단히 크다.

이상과 같은 불사(佛寺)를 서술한 변문이 민간에 널리 유행하 자 사사(史事)나 잡사(雜事)를 내용으로 하는 변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변문은 그 자체의 문학적인 가치는 그렇게 높이 평가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문학 발전상에 끼친 공헌은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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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하다. 바꾸어 말하면 당대의 변문이 특히 그 형식이나 체 재면에서 후세 문학 작품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좀더 구체 적으로 말하면,

첫째, 변문은 송대의 화본(話本)에 영향을 미쳤다. 변문은 불 사(佛寺)로부터 차츰 시정(市井)으로 유입됨과 동시에 그 내용 도 불경 고사로부터 역사 고사 및 민간 전설 등으로 발전하였 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일반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설화 (說話)의 좋은 자료가 되었다.

둘째, 원곡(元曲)에 영향을 미쳤다. 곧 원대 잡극의 강창 방 식은 변문에 그 기원을 둔다.

셋째, 송·원·명·청에 이르는 모든 강창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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