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노선과 義勇團의 성격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노선과 義勇團의 성격"

Copied!
22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노선과 義勇團의 성격

54)

박 성 순*

❙국문초록❙

1920년에 접어들면서 임시정부가 종래의 외교론에서 벗어나 독립전쟁론을 야심차게 주장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서 군무부에서 籌備團을 조직했고, 또 임정 내 일부 인사들이 주비단과 성격이 비슷한 義勇團을 조직하였 다. 당시 임정의 군사정책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安昌浩는 서간도 독립운동세력을 모아 광복군사령부 조직을 계획했고, 의용단을 여기에 흡수시키려고 하였다. 이는 안창호가 군무부 산하 광복군사령부를 임시정부 군사 력의 총지휘부로 운영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1920년 8월 초 평양부 내 일제기관 폭파사 건으로 의용단원들이 검거되면서 의용단의 광복군사령부로의 편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비록 당초의 계획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의용단의 존재는 1920년 임시정부의 대일본 무장투쟁 사실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였다.

본고에서는 의용단에 관한 선행 연구에서 미진했던 몇 가지 문제들을 보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첫째 의 용단을 설립한 주도자는 안창호가 아니라 손정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북세력 일부였다. 안창호는 이들과의 연 관관계와 임정 군사정책을 총괄하는 차원에서 의용단을 관리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밝혔다. 둘째 안창호가 의 용단을 수용케 했던 기관은 광복군총영이 아니라 광복군사령부라는 점을 설명하였다. 셋째 의용단은 임시정부 연통제 하에서 활동한 국내 기관 중 하나라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920년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하 고 이를 추진해 나간 임시정부의 군사정책 과정에서 출현했던 사설 조직이었다는 점, 안창호가 이를 광복군사 령부에 흡수코자 했던 주요 대상 조직이었다는 점을 추가로 설명하였다.

[주제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1920년의 독립전쟁론, 의용단, 안창호, 광복군총영, 광복군사령부

❘목 차❘

Ⅰ. 머리말

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

Ⅲ. 의용단과 광복군사령부의 위상

Ⅳ. 맺음말

* 단국대학교 사학과 부교수 / ttiger97@dankook.ac.kr

(2)

Ⅰ. 머리말

설립 당시부터 외교론을 우선적으로 표방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

년 벽두부터 본격적으로 당해 연 도가

독립전쟁의 원년

임을 강조하고 나섰다

.

파리강화회의에서 외교력의 한계를 절감한 임시정부는 일제와 의 한판 대결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이에 따라 종래의 외교노선에서 준비론에 입각한 무장투쟁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

국민개병제에 의거한 병력확보를 위해서 임시정부는 우선 상해 거주

18

세 이상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군적등록 사업과 예비군 성격의 國民軍 편성을 완료하였다

.

그리고 임시정부는 상해뿐만이 아니라 국내에서 도 일단 유사시에 봉기할 수 있는 예비 군사조직인 籌備團을 만들었다

.

그 결과

1920

1

월과

6

월에 임시정 부 군무부 주관으로 황해도와 서울에 두 개의 주비단이 조직되었다

.

그리고 군무부에 의해서 주비단이 조직 될 때 비슷한 시기에 임정 내 일부 인사들에 의해서 義勇團이 별도로 조직되었다

.

의용단은 비슷한 시기에 동명의 단체가 여럿 존재하였다

.

임시정부 인사들이 주도해서 만든 평양 중심의 조직뿐만이 아니라

,

대한적십자사 청년단에서 발전한 황해도 지역 의용단

,

그리고 부산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의용단도 있었다

. 1919

10

월 長淵郡에서 張奎燮이 주도한 대한적십자회 조직이

1920

1

월에 개편한 대 한적십자사청년회의용단은 松禾

·

甕津

·

海州 등지에서 임시정부 발행의 독립공채 매각

,

독립신문 배포를 통한 선전활동에 힘을 기울이던 중

1921

5

월에 발각되었다

.

부산의 의용단은

1922

4

월에 姜永祚

·

朴甲 善

·

朴德述 등이 조직하였으나 곧 발각되었다

.

1)

임시정부 인사들이 조직한

의용단

에 관해서는 金恩智의 논문이 유일한 대표작으로 파악된다

.

2) 임시정부의 연통제 시행과 연결된 국내 조직으로서의 의용단과 그 활동에 초점을 맞춰 서술된 이 논문은 의용단의 설립부터 활동내용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냈다

.

김은지의 논문은 의용단에만 국한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내용 을 구비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

그러나

1920

독립전쟁의 원년

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서간도 독립군 단체들의 무장투쟁 노선의 연대라는 관점에서 조망했을 때는 아직도 설명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있다

.

우선 의용단의 조직 주체에 대한 문제이다

.

김은지는 의용단을 안창호가 조직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

그러 나 이것은 도산일기 라는 자료를 피상적으로 읽어낸 데 따른 결과라고 판단되며

,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안창호의 위상과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둘째는 광복군총영과 사령부와의 관계를 혼동하고 있 다

.

그리고 정작 중요한 것은

1920

년 임시정부가 독립전쟁론을 천명한 가운데 의용단이 갖고 있던 역사적 맥락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하였다

.

본고에서는 의용단을 다룬 선행 연구의 내용과 가급적 겹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용단 문제를 다룰 것이 다

.

특히 위에서 제기한 세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명이 중심내용이 될 것이며

,

이를 통해서

1920

년 임시정부 가 표방한 독립전쟁론 구현의 흐름을 의용단 문제와 결합시켜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

1)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8, 국사편찬위원회, 1990, 40쪽.

2)金恩智,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비밀결사 義勇團의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4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8.

(3)

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

1. 독립전쟁론과 籌備團의 운용

1919

년 수립 직후 임정의 독립운동 노선은 외교론과 준비론을 골간으로 하고 있었다

.

때문에 임정 활동의 주요부분은 파리강화회의 및 워싱턴회의 등을 대상으로 한 외교활동에 할애되고 있었고

,

군사활동에 관한 적 극적인 인식과 모색은 시도되지 못하고 있었다

.

그러던 것이 임정의 조직과 제도가 명문상으로 보완되기 시 작하는

1919

11

5

일 공포된 「大韓民國臨時官制」에 의해서 임시대통령 직할기관으로 大本營

·

參謀府

·

軍事參議會의 설치가 규정되었고

,

군무부의 조직이 명문화되었다

.

3)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은

1920

1

13

, 1920

년을

독립전쟁의 제

1

이라고 규정한 「국무원포고」 제

1

호와

1

24

일 발표된 「군무부포고」 제

1

호에 의해서 탄력을 받게 되었다

.

「국무원 포고」 제

1

호는 러시아

·

만주지역 동포들을 대상으로 발포된 것으로서 이 지역 동포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

4) 「군무 부포고」 제

1

호도 지금이 바로 전쟁을 일으킬 시기라고 밝히고

,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양성과 조직에 민족 전원이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

5)

이와 같이 임시정부가

1919

년 말에서

1920

년대로 접어들면서 기존의 외교론과 준비론에서 방향을 바꾸어 군사적 모색을 도모한 것은 이를 주도했던 인물들의 영향도 한몫을 했다

. 1919

11

월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독립전쟁에 대한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고

,

안창호 역시

1920

년을

독립전쟁의 해

로 선포하면서 군사조직 구축의 필요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

6)

두 사람은 임시정부의 독립전쟁론 구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국무원포고」 제

1

호와 「군무부포고」 제

1

호를 통해서 표명된 임정의 군사정책은

1920

3

2

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행한 국무총리 이동휘의 시정 연설을 통해 그 요지가 천명되었다

.

이 시정연설에서 이동휘는 장기적인 독립전쟁

·

군사교육 실시

·

의용병 모집

·

독립전쟁기지 설정 방침을 발표하였다

.

7)

1919

년에 제정 발표된 일련의 군사정책이 원론적

·

법제적 측면이 강하였음에 비해 이 시정방침의 군사활동 지침은 보다 구체적인 활동목표를 적시하고 있었다

.

8)

이 시기 일제 상해총영사관은

1920

년 임정 시정방침 중 군사정책에 관련되는 내용을

개전준비 활동

으로 파악하였다

.

전쟁을

독립운동의 최후수단

으로 규정한 이

개전준비 활동

규율적

·

지구적

인 방법을 통한 장기적인 준비방법을 수립한 것이다

.

그것은 군사적 식견을 겸비한 인물의 소집과 군사회의 개최

,

국외의용 병 모집과 훈련

,

만주

·

노령지역에서 모집한 병사에 대한 군사교육 실시

,

기존 독립군 단체의 군무부 통할

,

3)한상도, 「大韓民國臨時政府의 초기 軍事活動과 在滿獨立軍」, 西巖趙恒來敎授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 아세아문화사, 1992, 736쪽.

4) 독립신문 1920년 2월 5일. 5) 독립신문 1920년 2월 14일.

6)이성우, 「籌備團의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5, 한국근현대사학회, 2003, 312쪽. 7) 독립신문 1920년 3월 4일; 한상도, 앞의 글, 739쪽 재인용.

8)한상도, 위의 글, 740쪽.

(4)

국내의용병 파견

,

미국

·

러시아를 통한 군수물자 수입과 확보

,

국내 및 중국 내의 양식 비축

,

군사선원 파견

,

군법 및 군규 제정 등이었다

.

9)

안창호 계열10) 또한 준비론에 입각한 독립전쟁을 주장하였다

.

안창호는

1920

년 안동현 광복군영 조직을 주도하는 등 독립전쟁 구현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

그는 임정 창설 직후부터 군사활동에 대한 관심이 매 우 높았다

. 1919

7

8

일 안창호 자신의 내무총장 시정방침 연설에서

가급적 군사활동에 대한 노력을 경 주할 것

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

11) 하지만 당시 여건상 임정 내에서 군사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미 약한 것이었다

.

12) 그러다가

1920

년대 벽두부터 안창호는

독립전쟁의 해

를 주장하였다

.

1920

1

21

일 안창호는 독립전쟁에 대한 보다 분명한 방침을 천명하였다

.

안창호가 천명한 독립전쟁 방략은 온 민족이 대통일적인 결속 하에 해외에서는 정식으로 개전하고 국내에서는 기습적으로 돌격하는 것 이었다

.

그리고 돌격전은

1·2·3

단계로 구성하고 최후 승리까지 잠복하면서 지구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

13) 군사행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병력확보가 우선 과제였다

.

이를 위해서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국민개병 제를 규정하였는데 그 실현에도 역시 안창호의 역할이 컸다

. 1919

4

11

일 제정된 「대한민국임시헌장」

6

조는 국민의 병역의무를 규정하였고

, 9

11

일자로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법」 제

10

조에서도 병역의무 를 명문화하였다

. 1920

1

24

일 발표된 「군무부포고」 제

1

호에서

군인양성

군대편성

을 위해

忠勇한 大韓男女

의 동원을 촉구하였다

.

이렇듯 임정의 군사정책은 국민개병제에 근거한 것이었고

,

이를 위해서 착수 한 사업이 군적등록 사업과 이를 토대로 한 國民軍 편성이었다

.

14)

임정 군법국장 孫斗煥과 金甫淵은

1920

1

18

일 안창호를 방문하여 국민개병제 실현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

이를 위한 군적등록사업은

1920

1

월 중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

이는

1

13

일 「국무원 포고」 제

1

호를 통한

1920

년의

독립전쟁 원년

규정 사실과

, 1

24

일 「군무부포고」 제

1

호 발표 시기와 일치 하고 있다

.

군적등록 대상은 국내외 모든

18

세 이상 남자로 규정되었지만15) 상해지역 한인사회가 일차적인 대상이 되었다

.

군적등록은 강제규정이 아닌 지원제로 시행되었는데

,

안창호가 계획단계부터 적극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16)

1920

3

20

일 거행된 제

1

회 국민군 편성식에는 국무총리 이동휘 이하 정부 각원과 손정도 임시의정원

9)한상도, 위의 글, 739쪽.

10) ‘안창호 계열’은 흥사단 계통 인물들과 독립신문 의 편집과 운영을 주도하고 있던 李光洙·李英烈·趙東祐·朱耀翰 등을 들 수 있다. 1920년 안창호는 미주 흥사단을 확대하고자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이 조직의 초기 입단자 는 임시사료편찬위원회에서 임원이나 조역으로 일했던 청년들이나 독립신문 편집·운영진, 임시정부 서기·비서로 활동 하고 있던 청년층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서북 출신이었기 때문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는 서북 출신자들의 집결 형태로 이해 되었다. 이는 임시정부 내의 이승만, 이동휘 등 다른 세력과 큰 차이점이 되었다(송하연, 「상해 임시정부의 安昌浩지지 세 력에 대한 재고찰」, 한국근현대사연구 91, 한국근현대사학회, 2019, 59쪽).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2(임정편 II), 국사편찬위원회, 1971, 400쪽. 12) 한상도, 앞의 글, 736쪽.

13) 도산일기 1920년 1월 21일(朱耀翰 편, 증보판 安島山全書 4, 흥사단, 2015. 이하 생략).

14) 한상도, 앞의 글, 738쪽. 15) 독립신문 1920년 2월 14일. 16) 한상도, 앞의 글, 738쪽.

(5)

의장 및 임시육군무관학교 생도 등

200

여 명이 참석하였다

.

이로써

국민개병의 제

1

으로 의미부여 되었던 국민군 편성은 결실을 맺게 되었고

,

이후에도 군적등록 사업은 상해 거류민단을 주축으로 일정기간 지속되었 다

.

17) 이때 결성된 국민군은 실제 전투병력이 아닌 예비군의 성격이 강했다

.

임시정부는 상해뿐만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일단 유사시에 봉기할 수 있는 예비 군사조직을 만들고자 하였 다

.

그 첫 시도는 주비단이었다

.

군무부에서는

1919

12

18

일 「임시군사주비단제」를 「군무부령」 제

1

호 로 발표하고 임시정부 관할하에 군사주비단을 조직하기 위한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

주비단의 가장 큰 목적 은 국방계획에 대비하는 것으로서 그 특징은 군대식 조직을 갖는 것이었다

.

그리고 본부는 군무총장이 필요 로 하는 국내 각도와 국외 중요지역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

본부의 사령장이 군무총장의 지휘통솔 을 받도록 함으로써 주비단의 최고책임은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 갖도록 하였다

.

18)

이에 따라 군무부 주관으로 국내에서 황해도와 서울 두 개의 주비단이 조직되었다

.

황해도 주비단은

1920

1

월 황해도 鳳山郡

·

瑞興郡

·

載寧郡

·

信川郡

·

黃州郡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 3.1

운동 이후 망명해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한 崔明植이 임시정부로부터 「주비단규칙」을 황해도로 가져와 李承吉에게 전달하면서 황해도 각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지부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

황해도 주비단은 재판기록이나 신문기사 등 을 통해서 실명이 확인되는 인물은

130

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

19)

서울 주비단은 대한광복회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 1918

년 대한광복회원들이 체포될 때 이를 피한 우 재룡은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와 연계를 추진하면서 의열투쟁단체 조직을 구상했다

.

우재룡은 이런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1920

2

(

)

장응규를 임시정부에 파견했다

.

장응규는 임시정부로부터 서울에서 주비단 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했다

.

이에 따라 우재룡은

1920

6

월 서울 경신학교 교정에서 주비단을 조 직하였다

.

20)

그런데 주비단은 현실적으로 국내에서 군사조직체로서 기능하지는 못하였다

.

그리고 애초에 「임시군사주 비단제」에 명시된 의열투쟁 활동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

비록 황해도 주비단에서 두세 건 정도의 비조직 적인 의열투쟁이 있었지만

,

주비단의 주요활동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모집에 집중되었다

.

특히 황 해도 주비단에서는 군자금만을 모집하기 위한 韓勇團이라는 별동조직을 운영하기도 했다

.

21)

황해도 주비단에 비해서 서울 주비단의 활동은 더욱 미미했다

.

서울 주비단은 결성 직후인

1920

년 말경에 핵심인물들이 거의 체포되어

12

28

일자로 관할 경성지방법원 검사에게 송치되었다

.

22) 황해도 주비단도

1921

4

월에 봉산

·

재령

·

신천 등지에서 활동하던 단원

50

여 명이 검거되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 을 통 해서 보도되었다

.

23)일제 육군성의 자료에 의하면

,

이 당시 황해도 사리원경찰서의 수사에 의해서 검거된 주

17) 군적등록업무는 1920년 2월 7일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등록사업 개시 50여일 후 거행된 국민군 편성식 때까지 등록된 인원은 갑종 40명, 을종 100여 명이었고, 이 중 국무총리 李東輝·법무총장 申圭植·노동총판 安昌浩·비서장 金立·내무 차장 李圭洪·재무차장 尹顯振 등 임정각료들도 포함되었다(한상도, 위의 글, 739쪽).

18) 한시준 편, 대한민국임시정부법령집 , 국가보훈처, 1999, 173~174쪽; 이성우, 앞의 글, 313~314쪽. 19) 이성우, 위의 글, 315~316쪽.

20) 이성우, 「경북지역 의병참여자들의 의병전쟁 이후의 활동」, 국학연구 37, 한국국학진흥원, 2018, 528쪽. 21) 이성우, 「籌備團의 조직과 활동」, 337쪽.

22)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국사편찬위원회, 2009, 109쪽.

(6)

비단원과 그 별동대인 한용단원은 피체자

37

,

미피체자가

25

명이었다

.

24) 이때부터 황해도 주비단도 사실 상 와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비록 그 활동에서는 한계가 분명했지만

, 1920

년 초부터 국내에서 조직 된 주비단은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대표적인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

.

2. 義勇團의 조직과 활동

주비단과 함께 義勇團이라는 조직도 거의 같은 시기에 결성되었다

.

둘의 성격은 비슷했다

.

기본적으로 국 내에 거점 및 조직을 확보한 후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독립전쟁이 시작되면 내응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그래서 의용단은 무장투쟁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으나 실제 활동상 그 준비적 기반 을 다지는 데 주력했으므로 비무장투쟁에 가까운 단체였다는 평가도 있다

.

25)

주비단이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공식적으로 조직을 주도한 것이었다면

,

의용단은 임시정부 내 일부 인사들 의 발기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

선행 연구에 의하면

,

의용단은 안창호가 설립을 주도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단체였다

.

26) 의용단 발기회는

1920

1

월 말에 거행되었다

.

의용단 발기인은 임시의정원 의장 孫貞道

,

교통 부 차장 金徹

,

국무원 비서장 金立

,

재무부 차장 尹顯振

,

金奎植 부인 金淳愛

,

경무국장 金九 등이었다

.

27)

1

24

일 안창호는 金錫璜

·

윤현진

·

손정도 등과 청년단 취지서와 章程을 의정하였다

.

이때 청년단의 명 칭을 義勇團으로 고쳤다

.

「의용단 취지서」에는 한국인들을 선전포고 즉시 모두 떨쳐 일어날 義軍으로 규정 하였고

,

적과 싸우다 총을 맞아 죽는 것은 현시점에서 대한국민으로서의 진의미와 진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표명하였다

.

28) 「의용단 장정」에는 의용단이 조국 광복을 위해서 정부의 뜻에 따라 여러 가지 운동에 진력하 지만

,

적과 전쟁행위를 할 때는 독립군으로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

29) 요컨대 의용단은 일본과의 개전시에 즉시 전투에 참가할 독립군 예비전력으로서 구성되었다

.

의용단은

10

명으로 分團을 삼고

, 10

개 분단으로 小團

, 10

개 소단으로 聯團을 조직하고

,

연단의 통괄을 위해서 사령부를 두며 사령장이 이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

30) 그러나 보통 때에는 의열투쟁이나 군자금 모집과 같은 임시정부 의 뜻에 따라 여러 가지 활동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

일제측도 의용단의 목적을

국가의 독립에 있으며

,

그 수단으로서 먼저 일본 요로의 대관 및 친일조선인을 살육하고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는 것

으로 파악하 였다

.

31)

23) 독립신문 1921년 4월 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117쪽. 2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116~120쪽.

25)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8, 국사편찬위원회, 1990, 40쪽.

26) 김은지, 앞의 글, 196-197쪽. 각주15) 김석황이 안창호에게 계속해서 의용단 관련 업무를 상의하였고, 의용단 「장정」과 「취 지서」에 안창호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것, ‘광복군총영’과의 연계에 있어서도 안창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 을 들어 의용단 조직은 안창호가 주도한 것으로 보았다.

2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79쪽. 2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1쪽. 2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1쪽. 3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119쪽. 3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79쪽.

(7)

1920

1

31

일 오후

4

시경 안창호는 손정도 집에서 거행된 의용단 발기회에 참석하여 의용단 시설에 관한 일을 상의하였다

. 3

13

일에는 의용단 총무 김석황이 내방하여 본국에 들어가 선전대를 조직할 일로 안창호와 의논하였다

.

이후 김석황은 국내로 잠입하여 평양과 서울 및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

김석황은

4

월 중순에 평양에 잠입하여 金東宣을 포섭하였다

.

그리고

5

월경 평양 소재 미국인이 경영하던 紀笏병원에 위장 입원한 뒤 이곳을 아지트로 삼고

6

32) 중 의용단 조직을 마무리하였다

.

김동선은 서울로 가서 黃中極을 의용단에 가입시키고

5

월 하순 평양에 귀환하였다

.

김석황은

6

월 상순 일경에게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그의 첩 姜道聖을 시켜 「의용단장정」

50

매와 기타 문서를 황중극에게 건네주도록 하였는데

,

황중 극은 이것을 가지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

김석황은 기홀병원에 머물면서 金泰福을 의용단에 입단시켰다

.

김동 선은 金在淳을 가입시켰는데

,

김재순은 거병할 때 사용할 목적으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

33)

1920

7

월 안창호가 상해에서 의용단 직원회에 참석하였을 때 김석황은 의용단 조직이 평양에

5

백 인

,

경성에

100

여 인

,

황해도 등 각처를 합하여 천여 인이라고 보고하였다

.

34)「의용단장정」 중 임정 외곽단체로 서 의용단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제

2

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2조 본 단은 조국의 광복에 희생의 정신으로 정부의 뜻에 따라 아래에 열기하는 운동에 진력하며 적과 전쟁행위를 할 때는 독립군으로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포고문 혹은 勸說로 국민을 고취하여 적개심을 격발시키며 지구력을 가지게 하는 것 2. 정부 기관을 보좌하여 재정 및 이외의 사무를 원조하는 것

3. 국민에게 개병주의와 皆納주의를 고취하는 것

4. 권고 및 그 외의 방법에 의해 총독부에 속하는 관공리를 퇴직시키는 것 5. 적의 관청에 납세를 거부하게 하는 운동을 하는 것

6. 일본의 貨抵制를 장려하는 것

7. 군무부에 연락을 취해 가능한 방법으로 군사상 실제 방편을 획책 또는 준비하는 것 8. 임시정부 공보 및 기관지의 傳布를 보편화하는 것

9. 본 단과 주의가 같은 다른 단체와 서로 협화, 원조하는 것

10. 정부의 명령 또는 지휘가 있을 때 그 외의 광복운동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에 종사하는 것35)

그러나 의용단은

8

월 초 발생한 평양경찰부 자동차 습격 사건으로 그 정체가 발각되었다

.

36) 의용단원들이

8

3

일 평안남도 청사에 폭탄을 던져 청사의 폭파를 기도하였고 또 같은 달

7

일 평양부 내 운전 중인 자동

3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9쪽. 3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0쪽. 34) 도산일기 1920년 7월 5일.

3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1~82쪽. 36)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5쪽.

(8)

차를 저격한 것이다

.

그 이래 약

2

개월에 걸친 수사 끝에 자동차 저격 인물과 폭탄투하 관련 용의자 일부가 검거되어

10

12

일 사건이 관할 검사에게 송치되었다

.

이 때 검거된 의용단원은 다음과 같다

.

37)

연번 이름 나이 주소 비고 체포여부

1 金禮鎭 28세 정도 平壤府 將別里 238 미체포

2 張惠根 28세 정도 平安北道 碧潼郡 미체포

3 張仁甲 26세 정도 黃海道 載寧郡 미체포

4 洪錫雲 불상 平南 中和郡 楓洞面 楓井里 121 체포

5 金義昌 30세 동도 동군 祥原面 新邑里 체포

6 呂行烈 28세 동도 동군 楓洞面 南陽里 121 미곡상 체포

7 미상 미상 동도 平壤府 大察里 167 미상

8 表永準 25세 平南 江東郡 三登面 紫陽里 69 무직 崔昇煥 체포

9 劉成三 23세 동도 동군 동면 下達里 金凞俊, 張飛 사망

10 金孝祿 17세 동도 大同郡 秋乙美面 梨木里 537 숭실중학 2년 체포

11 金炳道 26세 동도 林原面 南四里 105 농업 체포

12 林世煥 29세 동도 中和郡 看東面 干支井里 336 농업 전 면장 체포

13 林台煥 42세 동 222 농업 전 면장 체포

14 李光潤 21세 平安南道 平壤府 上需里 188 무직 체포

15 高賢淑 22세 동 131 무직, 여 체포

16 鄭善王 20세 동도 동부 磚九里 39 여, 재봉업 이씨 체포

17 李起榮 24세 동도 江東郡 冕達面 巴陵里 124 무직 朴斗一, 李永武, 李重爀 체포

18 林承業 29세 동도 平壤府 倉內里 48 무직 체포

19 金燦奎 45세 동도 平原郡 永柔面 槐泉里 9 예수교 목사 체포

20 韓俊寬 36세 동도 平壤府 竹典里 46 吳服商 체포

21 金錫璜 29세 黃海道人 현재 주소 부정 체포

<표 1> 의용단원 검거 내용

이 사건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

의용단 단독이 아닌 광복군총영과의 합작에 의해서 사건이 진행되었음이 드러났다

.

일제의 조사에 의하면

, ‘

범인

이 속하는 비밀결사는 평안남도 청사

,

신의주역

,

선천경찰서 및 선천 군청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

전후하여 몹시

격월한

불온문서 「最急警告文」을38) 배포하였는데

,

이 경고문은

37)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6~87쪽. 3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90쪽.

(9)

광복단 總營

이 보낸 것이었다

.

39)

일제의 신문조서에 의용단 사건의 개요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

김예진

,

장혜근 및 장인갑 기타

12

명은

1920

7

월 중 평양부 내 각처에서 회합 결과 평안남도제

3

,

평양경찰서 및 평양부청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하고

8

3

일 오후

9

시경

3

대로 나누어 전기 각 청사에 폭탄 투하를 기도하였다

.

그러나 제

3

부 청사에 만 폭탄을 투척하고 오우야마

[

橫山

]

순사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주하였다

.

40)

표영준은

1920

7

2

일 상해 임시정부를 원조할 목적으로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추빈리 군참사 南應 祐에게서

350

원을 모금하였다

. 8

2

일 김예진 등과 폭탄투척의 실행을 모의하고 민심을 선동할 목적으로

8

3

일 유성삼과 함께 평양시내 각처에서 불온문서 「최급경고문」을 배포하였다

.

그리고 제

3

부 자동차에 타 있는 경찰관을 사살하기 위해

8

9

일 오후

9

시경 평안자동차상회의 자동차를 제

3

부의 자동차로 오인하여 표영준은 권총

3

,

유성삼은 권총

4

발을 발사하여 운전수 高水烈에게 찰과상을 입혔으며 차체에

4

군데 손상 을 입혔다

.

유성삼은 실행 후 현장으로부터 도주하였는데 동

16

일 평양부 신양리에서 동지의 오발탄에 맞아 평양기홀병원에 입원 가료

2

일만인

8

19

일 사망하였다

.

41)

여행렬은 홍석운의 권유에 의해 의용단에 가입하였고 표영준과 유성삼으로부터 권총

,

탄환을 부탁받고 이 를 은닉하여 동지들의 행동을 원조하였다

.

뿐만 아니라

8

26

일 여행렬은 단독으로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 면 채송리 부호 文廣魯에게서 현금

1000

원을 모금하였다

. 9

월 중에는 도내 주민에게서 약

500

원을 모집하였 다

.

또 신한청년 을 동지에게 반포하고 독립공채 응모자 모집을 위해 지방 자산가를 조사하다가 이번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다

.

42)

김효록

·

김병도

·

임세환

·

임태환

·

한준관

·

이광윤

·

고현숙

·

정씨

·

홍석운

·

許成燮

·

金松爀

·

이기영

·

김찬규

·

金宗健

·

임승업

·

김의창 등은 모두 본건 폭탄 투척 인물의 사정을 알고 그들에게 방을 주어 은닉하 거나 혹은 도주시켜 음식물을 공급하거나 또는 폭탄

,

권총

,

탄환을 예치하고

불온문서

와 독립신문 등을 배포하고 기타 제반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

한준관은 자택에 교통지국을 설치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여 이를 동 지 수명에게 분배하였고

,

이기영은 교통부 서기로서 한준관과 함께 행동하였다

.

김송혁

·

김의창 외 수명은

1920

6

월 중 평양 기홀병원 내에서 조직된 의용단의 단원이 되었다

.

43)

평양경찰부 자동차 습격사건으로 일경에게 추격을 받던 의용단 총무 김석황은

1920

9

16

일에 중국 봉천 城外後塔에서 권총으로 무장한 일경에게 저항하다가 평양경찰서와 봉천 일본영사관 경찰

14

명에게 체 포되었다

.

그리고 동년

12

5

일에 평양지방법원에서 「제령 제

7

호」 위반으로 징역

10

년을 언도 받았다

.

44) 의용단 평남 中和 분단원도 체포되었다

.

김석황의 권유로 文彬 등 농민출신들이 주도한 중화 의용단 분단 은 분단장 문빈 이하 서무부

·

掌財部 등의 부서를 갖추고

1921

1

월까지 황해도 황주 일대에서 군자금 모

3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8쪽. 40)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8쪽. 41)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9쪽. 4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9쪽. 43)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9쪽. 44)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92쪽.

(10)

집활동을 전개하였다

.

문빈은 의용단 본부 총무 김석황의 권유로 동단 중화군 분단을 조직하여 林斗南 이하 다수 단원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였는데

, 1921

1

17

일 평양에서 검거되었다

.

이에 관련된 인물들은 다 음과 같다

.

45)

연번 성명 나이 직책 주소 체포여부

1 文彬 26 義勇團分團長 中和郡 中和面 長山里 未逮捕

2 林斗南 25 面書記, 分團庶務部長 中和郡 東頭面 蔡松里 逮捕

3 崔觀鎬 32 分團掌財部長 中和郡 中和面 正涉里 逮捕

4 李俊培 24 分團軍資金募集員 中和郡 中和面 長山里 逮捕

5 金振聲 35 分團軍資金募集員 中和郡 中和面 長山里 逮捕

6 張秀成 30 分團軍資金募集員 大同郡 龍淵面 陽地里 逮捕

7 崔斗鎬 23 分團軍資金募集員 中和郡 中和面 正涉里 未逮捕

8 李貞鉉 28 分團軍資金募集員 中和郡 右生陽面 魚鳬山里 逮捕

9 孫利範 25 分團軍資金募集員 中和郡 右生陽面 魚鳬山里 逮捕

10 崔京範 22 分團軍資金募集員 中和郡 右生陽面 大柳里 逮捕

11 金和洙 22 分團軍資金募集員 中和郡 右生陽面 書玉里 逮捕

12 金圭稷 23 分團軍資金募集員 中和郡 右生陽面 魚鳬山里 逮捕

13 文郁 18 分團軍資金募集員 中和郡 中和面 長山里 逮捕

14 方基萬 23 分團軍資金募集員 大同郡 栗里面 楸斌里 逮捕

15 林義杰 21 分團軍資金募集員 大同郡 栗里面 柳新里 逮捕

16 朱利南 22 分團軍資金募集員 大同郡 栗里面 楸斌里 逮捕

17 朱耀南 27 分團軍資金募集員 大同郡 栗里面 楸斌里 逮捕

<표 2> 의용단 중화 분단원 검거 내용

Ⅲ. 의용단과 광복군사령부의 위상

1. 안창호와 의용단의 관계

일단 유사시에 국내에서 봉기할 수 있는 예비 군사조직으로 조직된 의용단은 군자금 모집을 주내용으로 하면서 임시정부를 돕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

의용단의 의열투쟁 중에서 주목되는 점은 광복

45)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95쪽.

(11)

군총영과 합작했다는 사실이다

.

광복군총영은

1920

7

1

일 광복단46)과 민국독립단 결합에 의해서 안동 현에서 창립되었고

,

임정 산하의 특무부대로 활동하였다

.

47)

의용단은 광복군총영과

1920

8

3

일 일제기관 폭파사건에 가담하였는데

,

이 사건은 미국의원단이 한 국을 방문하는 때에 맞추어 계획된 일이었다

.

당시 미 의원시찰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에 임시정부는 이때를 맞추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했다

.

그 결과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국내에서는 비밀결 사를 중심으로 지역적으로 만세시위운동

,

관공서 폭파 등이 계획되거나 실행에 옮겨졌다

.

광복군총영의 이름 으로 의용단이 가담한 관공서 폭파사건은 이러한 취지하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

48)

의용단에서는 김석황의 주도로 권총

·

폭탄 등의 운반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

김석황은 이를 위해서 김성근을 단장으로 하는 救國冒險團을 끌어들였다

.

구국모험단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고

,

무장 항일 투 쟁을 위한 화약 제조를 목적으로

1919

6

월 상해에서 조직되었다

.

49)구국모험단은 폭파활동의 현장에는 참 여하지 않고

,

폭탄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

김성근은 상해에서 제조한 폭탄

12

개를 임득삼에게 휴대 시켜 단동 이륭양행에 운반하게 하였으며

,

운반된 폭탄을 각지 의용단 지단에 송달하게 하였다

.

그 결과 노 기순은 폭탄과 단총

10

자루를 가지고 평양에 잠입하여 투탄사건에 참여하였다

.

그리고 만주에서 문일민

·

장 덕진 등 광복군총영의 제

2

파견대가 폭탄을 가지고 입국하자 평양에 있던 의용단원들이 이에 합류하였다

.

50) 이와 같이 의용단의 국내 활동이 진행되었지만

,

안창호는 장차 모습을 드러낼

광복군영

즉 광복군사령부 를 임정 군사조직의 지휘부로 삼고

,

의용단을 여기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 ‘

광복군영

은 서간도 무장세력을 통합하여 임시정부의 직속부대로 삼기 위해서 안창호가

1920

년 초반부터 한족회 출신인 李鐸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 편성하고 있던 군사조직이었다

.

그 결과 광복군은 광복군총영과 광복군사령부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

둘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연구자들 간 에 논란이 될 정도로 그 실체가 모호하다

.

연구 초기에는 광복군사령부가 먼저 생기고 그 후에 총영이 군사 적 목적만을 수행할 특수부대로서 조직되었다는 설이 정설처럼 전해졌으나

,

51) 최근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기 존에 정설처럼 전해지던 사령부 – 총영 성립 순서가 부정되고

,

광복군총영은

1920

7

월에

,

광복군사령부는

8

월에 조직이 완료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

52) 광복군 총영장은 광복단 부단장이던 오동진이며

,

46) 의용대는 1920년 2월 안동현의 대한청년단연합회원을 중심으로 관전현에 설치했는데, 3월(음력 정월) 경에 광복단으로 개 칭했다. 단장은 이탁, 부단장은 오동진이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9, 「광복단원의 폭탄투척미수사 건 경찰신문조서 – 김최명·김성택 심문조서(1920.8.22)」, 국사편찬위원회, 1997].

47) 김영범, 의열투쟁 I-1920년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60쪽. 48) 김은지, 앞의 글, 201~202쪽.

49) 단장에 金聲根, 참모부장에 金泰淵, 서무부장에 李英烈, 기술부장에 黃一淸 등과 단원 24명으로 구성되었다. 50) 김은지, 앞의 글, 201~202쪽.

51) 애국동지원호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원호회, 1956; 신재홍, 「오동진 연구」, 국사관논총 4, 국사편찬위원회, 1989; 채영국, 「3.1운동 이후 서간도지역 독립군단 연구」,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 지식산업사, 1990; 박민 영,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신편한국사 48, 국사편찬위원회, 2002, 210쪽.

52) 윤대원, 「서간도 대한광복군사령부와 대한광복군총영에 대한 재검토」, 한국사연구 133, 한국사연구회, 2006;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영범, 의열투쟁 I-1920년 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한상도, 「이탁의 독립운동 역정과 생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8, 독립기 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12)

립일은 「대한광복군총영 약장」에 명기된

1920

7

1

일이다

.

광복군사령부는

1920

8

10

일 광복군 직 원을 임명하면서 조직편제를 완성하였다

.

53) 사령장은 대한독립단 총단장 조맹선을 내정하였으나

,

러시아에 출장 중이었으므로 대신 참모장 이탁에게 사무대리 직함을 주었다

.

54) 광복군사령부는 정규군 총지휘부

,

광 복군총영은 비정규 무장조직의 본영 겸 국내공작 특별기관이었다

.

55)

의용단과 관련하여 짚고 넘어갈 점은 안창호가 의용단을 흡수케 했던 조직이 정말로

광복군총영

이었을까 라는 문제이다

.

선행 연구에서는 안창호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으로 서간도 독립단체들과의 연합기관 인 광복군총영에 의용단을 연합시키고자 했다고 주장하였다

.

56)

그런데 이와 같은 광복군총영의 의용단 흡수설은 선행 연구 이전에 일제의 자료에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 다

. “

만주에서 박장호

,

조맹선이 지배하는 대한독립단과 안병찬이 인솔하는 독립청년단은 연합하여

광복군총 영

이라고 하는

,

이탁이 사령관이 되어 평북 국경으로부터 침습하여 관공리의 살해와 폭탄투척을 행동으로 나타낼 것을 방침으로 결정했을 때

,

안창호는 김석황에게 협동 동작을 채택할 것을 권고하였다

는 것이다

.

57) 그러나 위의 예문은

광복군총영

이 아니라

, ‘

광복군사령부

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

요컨대 당시 일제가

총영

사령부

의 구체적인 내용을 혼돈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그 같은 경우는 다음 예문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 “

동단

(

光復團總營

)

은……중국 柳河縣 三源浦에 본 부를 두고 회장 이탁이 거느리는 한족회 및 寬甸縣 香爐溝에 본거를 갖춘 安秉瓚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한독 립청년

(

)

연합회 및 상해 잠칭정부 의정원장을 단장으로 하고 동 원 황해도대의원 김석황을 총무로 하는 의 용단의

3

파를 합동하여 이탁을 사령으로 추대한 연합기관임이 판명되었다

는 것이다

.

58) 이 예문내용 또한 광복군사령부에 해당하는 것인데 오히려

광복단총영

즉 광복군총영의 설명인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

또 구 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사령부는 대한청년단연합회

,

대한독립단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으나

,

일제의 자료 에서는 대한독립단이 빠져있고 대신 김석황의 의용단을 한 축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

대한독립단 중에서도 민국독립단 세력이 사령부 구성의 주축이었고

,

또 당시 이탁은 한족회를 나와서 청 년단연합회의 교육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광복군사령부는 사실상 민국독립단이 청년단연합회를 흡수 확 대한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

59) 아무튼

1920

5

월 상해에서 안창호와 이탁이 구체적으로 광복군사령부 조직을 논의한 이래 광복군사령부는 대한독립단 외에 대한청년단연합회

,

광복단 등 서간도 지역 활동 단체들 을 토대로 임정 군사조직으로서 성립하게 된다

.

60)

안창호가 의용단을 흡수케 했던 것은 총영이 아니라 사령부였다는 사실은 김석황 예심신문조서에서 분명

53) 도산일기 1920년 8월 10일.

54) 국가보훈처 편, 李慈海自傳, 국가보훈처, 2007, 104쪽.

55) 김영범, 앞의 책, 60쪽; 대한광복군총영과 사령부의 관계에 대한 논란의 정리는 박성순, 「대한독립단의 위상과 대한광복군 사령부의 성립」, 숭실사학 45, 숭실사학회, 2020 참조.

56) 김은지, 앞의 글, 201쪽.

57) 不逞團關係雜件 ‒ 朝鮮人ノ部 ‒ 在內地 11 , 「不逞團ノ首魁金錫璜逮捕ニ關スル件」. 5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88쪽.

59) 윤대원, 앞의 글, 131쪽. 60) 한상도, 앞의 글, 107쪽.

(13)

히 확인된다

.

김석황이 두 번째로 국내에 들어가서 의용단 평양 지단을 조직하고 상해에 가서 안창호를 만났 을 때 안창호가 김석황에게 한 말이 결정적 자료이다

. “

실은 그대가 귀국 후에 관전현 대한청년단연합회원 오학수

·

이탁

·

안병찬

·

김승만

(

평북독판부 독판

이인혁 등을 중심으로 하여 이번 광복군사령부라는 것을 조직하고 동 사령부를 관전현에 설치하여 이탁이 사령관으로 되어 가정부의 군무부 지휘 감독 하에 종래 각 지에 있던 각종 단체를 여기에 합하기로 하였으므로 의용단도 위의 광복군사령부에 합치하는 외에 별도리가 없다

.”

고 한 것이다

.

61)

이와 아울러

8

3

일 평안남도 청사 폭탄 투척사건에 이르기까지 이미

7

월부터 의용단이 총영과 연락을 취하고 활동한 사실을 고려하면

,

김석황이 총영에 편입되기를 거부했다는 것은 당시 상황과도 어긋난다

.

따 라서 김석황이 편입을 거부한 것은 총영이 아니라 사령부였던 것이다

.

그렇다면 김석황은 의용단을 광복군사 령부에 편입시키는 것을 왜 반대했을까

?

선행 연구에 의하면

,

김석황이 안창호의 권유를 듣지않고 의용단 단독행위를 고집한 것은 김석황 개인적 인 노선의 영향과 의용단원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

다른 단체와 연합을 하게 되면 의용단의 조직이나 활동 등 전반적인 방향에 변화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김석황은 연합제의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

게다가

광복군총영

은 의용단을 능가하는 규모였으므로 연합이 흡수로 진행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

그렇게 되면 국내에서 의용단 의 입지는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

62)

우선 위 설명에서 언급된

광복군총영

광복군사령부

의 오인이라는 점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

의용 단이 광복군총영 설치 직후부터 합동작전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아

,

이전부터 의용단이 총영의 전신인 광복단 과 교류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청년단연합회원이어야만 광복단원이 될 수 있었고

,

이들이 사실상 안동현 교통국원으로 활동했으며 또 이들을 중심으로 광복군총영이 조직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

63) 사전에 의용단과 광복군총영 간에 교류 협력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이때까지만 해도 의용단은 광복군총영과 대등한 입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장차 총영보다 상위에 있는 광복군사령부라는 총지휘부가 생길 예정이며

,

그 이후에는 의용단도 여기에 부속되어야 한다는 안창호의 종용이 있은 이후에는 김석황이 이에 대한 거부의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김석황은 자신이 지휘하는 의용단을 이끌고 국내에서 직접 거사를 일으키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

당시 김석황의 심리를 전해주는 상세한 자료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

김석황이 개별행동을 고집 했던 이유를 밝힌 일제측 자료가 있다

.

그에 의하면

안창호는 김석황에게

(

광복군영과 ‒ 필자 주

)

협동 동작 을 채택할 것을 권고하였는데도

,

(

김석황 ‒ 필자 주

)

는 의용단의 조직을 완성하고 全鮮을 통해서 일제히 거 사할 뜻을 갖고 있어서 잠시 개별 행동을 고집하였다

고 서술하였다

.

64)요컨대 김석황은 의용단을 이끌고 개 별적으로 국내에서 거사할 뜻을 품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김석황의 이러한 뜻은 안창호의 계획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

6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84, 676쪽. 62) 김은지, 앞의 글, 201~202쪽.

63)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29(義烈鬪爭 2), 「金聖澤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1997.

6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在內地 11 , 「不逞團ノ首魁金錫璜逮捕ニ關スル件」.

(14)

2. 안창호의 광복군사령부 중심노선

앞서 살펴본 대로 의용단과 관련된 선행 연구에서는 안창호가 의용단을 주도적으로 조직한 것으로 본 다

.

65)그런데 의용단의 조직은 정말로 안창호가 주도했던 것인가

?

아니면

,

의용단 발기자들이 안창호에게 크 게 의존한 결과인가

?

안창호가 의용단을 조직한 것이라면

,

왜 굳이 광복군사령부를 조직하고 의용단을 여기 에 흡수시키려고 했는가

?

안창호의 원래 뜻이 광복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면

,

의용단은 왜

?

누가 주도적으로 조직한 것인가

?

1920

1

31

일 오후

4

시경 안창호는 의용단 단장 손정도 집에서 거행된 의용단 발기회에 참석하였지 만

,

이 자리에서 발기회 명단에는 이름을 등재하지 않았다

.

그 자리에서 밝힌 이유는 세인의 오해를 받을 염 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

당시 임정 내에서 안창호는 지방색과 당파성을 조장하는

주범

으로 지목되고 있던 실 정이었다

.

당시 임정 내부에 도산의 영향력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들이 실재했고

,

특히

지방열 창조자

로 지 목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

66)

선행 연구에 의하면

,

이와 같은 지역적 편향성이 안창호가 사실상 의용단 조직에 깊이 관여했음에도 불구 하고

,

발기인 명단에조차 그의 이름을 올리지 않은 주요한 이유로 지목된다

.

의용단이 주로 서북파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

실제로 현재 이력이 파악되는 의용단 핵심 인물들의 대부분은 거의가 평안남 북도와 황해도 등

서북파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

67)

그런데 이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분석이지만

,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안창호가 주도적으 로 의용단을 조직했는가라는 문제는 좀더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

의용단원들이 국내에서 상해로 마련해 간 군자금 유용사건이 발생했을 때 연루 의심을 받던 단장 손정도가

친밀한 사이

인 안창호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

68) 여기에서 손정도가 의용단 총책임자의 위치에 있었고

,

안창호는 局外的 인물로 존재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안창호는 단지 의용단원들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서 북인의 영수 또는 임정의 실력자로서 예우받고 있었다

.

그래서 애초부터 의용단 발기인들은 안창호에게 단의 명칭이나 조직의 세부사항을 상의했다고 보여진다

.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의용단 조직에 안창호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 ‘

안창호의 의용단

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

이를 뒷받침하는 일제 자료가 있다

.

의용단의 수립 목적과 관련하여 일제측은 임정에서 실의한 손정도가 자파의 세력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용단을 결성하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 “

상해의 의용단은 올 봄 孫貞 道가 가정부 부내에서 失意한 결과 불령선인 중 동지로 조직한 단체로 프랑스조계 長安里

263

호의 자택에 그 본부를 두고 손 자신이 단장이 되고 김석황이 총무로서 한결같이 중요한 일을 맡았

다는 것이다

.

69) 일제

65) 김은지, 앞의 글, 186쪽.

66) 도산일기 1920년 2월 17일; 4월 21일.

67) 김은지, 앞의 글, 192~194쪽; 그런데 의용단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손정도·김철·김립·윤현진·김순애·김구 중에서 김철은 전남 함평, 김립은 함북 명천, 윤현진은 경남 양산이 고향이다.

68)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91쪽. 69)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2, 91쪽.

(15)

는 의용단이 안창호 소유가 아닌 손정도의 조직이며

,

김석황이 총무로서 사실상 의용단의 중요업무를 관장하 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안창호 또한 처음부터 의용단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공식 무 장투쟁 조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안창호가 임정의 군사조직으로 인정한 것은 군무부 산하의 광 복군사령부였다

.

1920

2

24

일 구국모험단원 林得山이 안창호를 내방하여 의용단에 관한 일을 상의하였다

.

70) 그와 관 련된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

주비단과 겹치는 의용단이 지금 왜 필요한 지를 안창호에게 문의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이는 당시 안창호가 임정의 군사정책을 사실상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

그 리고

3

2

일 김석황이 안창호를 내방하여

義勇團을 위하여 노력 襄助하라

고 청하였는데

,

이는 매우 주목 할 부분이다

.

71) 만약 안창호가 의용단 조직을 주관했다면 의용단을 위해서 노력하고 적극 도우라는 김석황 의 주문은 불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후에도 안창호는 임정의 의열투쟁 지원조직인 구국모험단의 임득산과 회동하면서 의열투쟁은 철저하게 임정 군무부의 지휘하에 시행되도록 할 것을 주문하였다

.

72)

5

11

일 임득산이 서간도 독립군세력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안동현으로 출발할 때에도 안창호는 임득산이 관리하는

모험청년들

즉 의열투쟁에 종사하는 인사들이 부분적으로 행동치 말게 하고

,

안동광복군73)과 합동하여 해당 기관의 지휘대로 행동케 하며

,

군사 국장 도인권에게 받은 단총은 광복군 기관에 송부할 것을 지시하였다

.

74)

안창호는 일제와의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열투쟁 방식의 지엽적 충돌에 대해서는 극도의 예 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 5

10

일 군무차장 金羲善과 이탁이 일찍이 언약한 안동현 광복군 일을 협의키 위하여 내방했을 때에도 그러한 면을 확인할 수 있다

.

이 자리에서 김희선이 의열투쟁 방침을 제안하자 안창 호는

3

단의 방침을 제시하였는데

, (1)

적의 통치를 거절하는 행위

, (2)

전투 준비 행위

, (3)

각국에 선전 교 섭 행위 등

3

단의 대적 방침을 천명한 후 단포와 작탄사용 즉 의열투쟁은

일시 불평으로 무의미하게 사용하 는 것은 불가

라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

그리고 앞서 열거한

3

단의 방침이

民國

의 최대 독립전쟁이라고 하자 김희선이 찬동하였으며

,

안창호는 이 사업을 이탁에게 맡겨 이미 조직된 광복군을 사용하기를 바란다고 당부 하였다

.

75)

7

4

일 안창호는 본국으로부터 온 김석황의 내방을 받았다

.

이 자리에서 김석황은

의용단이 대확장되어 인원이 천여 명에 이른지라 정부의 명만 있으면 卽起하여 폭동하게 되었다

.”

고 보고하였다

.

그러나 안창호는 의용단의 단독 행동을 불허하여

내지에 관하여 군사적 행동은 정부로서 이탁 군과 관계를 만들었으니 이번

70) 도산일기 1920년 2월 24일. 71) 도산일기 1920년 3월 2일. 72) 도산일기 1920년 4월 16일.

73) 이때 안창호가 광복군으로 지칭한 기설 조직은 실은 대한광복단이었다. 다만 1개 단체 부속이 아닌 정부군이라는 것을 강조 하려는 의도가 광복단이 아닌 광복군으로 표현된 것이다(김영범, 앞의 책, 59쪽).

74) 도산일기 1920년 5월 11일. 75) 도산일기 1920년 5월 10일.

(16)

일로 이탁 군과 相協關係한 후에 입국하라

고 당부하였다

.

이에 김석황이 자기는 손정도나 안창호의 직접 명 령을 받지 이탁의 지휘는 받들 뜻이 없다고 하자 안창호는 그를 장시간에 걸쳐 설득하였다

.

그리고 저녁에 이탁을 면회하여 김석황의 심리를 말하고 잘 교섭하라고 지시하였다

.

76)

다음날인

7

5

일 이탁이 내방하자 안창호는 김석황이 의용단 일을 독단으로 행동할 마음이 많으니 잘 타 협하여 정부 지휘하에 聽從케 하라고 다시 한번 당부하였다

.

그리고 의용단직원회에 참석하여 김석황의 보고 를 들었는데

, “

의용단 조직은 평양에

5

백 인

,

경성에

100

여 인

,

황해도 등 각처를 합하여 천여 인이라

.

해 인들이 원하는 바는 속히 무기를 구입하여 적견을 박멸하며

,

또 돌기하여 전쟁이라도 할 뜻이 있다

.”

는 내용 이었다

.

이에 안창호는

여하간 의용단이 정부에서 설치한 광복군의 통솔 하에서 행동하면 가하거니와 그 범 위 외에서 자유로 행동한다면 대사를 방해하는 것이니

,

만일 자유 행동만 힘써 고집하면 도산은 탈퇴할 수밖 에 다른 방도가 없다

.”

고 엄중 경고하였다

.

그리고 김석황에게 무기를 사사로이 구입치 말고 이탁과 원만히 타협하여 입국하라고 당부하였다

.

77)

7

8

일 이탁과 의용단에 관해 토론할 때 안창호는 다시 한 번 의용단을 반드시 광복군영에 부속시키라고 지시하였다

.

78) 이후부터 안창호는 이탁과 함께 광복군사령부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 7

10

일 이탁이 준 비한 광복군제 초안을 토의하였다

. 7

12

일 국무회의 때 군무부가 「광복군영편제안」을 제출하였으나 이론 이 많아 결정을 보지 못하였다

.

79)

7

16

일 국무회의에서 안동 광복군영 이름은 別動隊라고 고치자고 제의되었다가 이에 대하여 중론이 각 출하더니 다시 광복군이라 하게 되었고

,

그 편제안에 대하여는 籌備院이라는 것은 삭제하고 다시 광복군사령 부로 기초하여 제출하게 하였다

.

80)

7

26

일 「대한광복군참리부규정」

,

「대한광복군사령부규정」

,

「대한광복 군영규정」을 확정하여

8

1

일을 시행일로 공포하고

, 8

10

일 국무회의에서 안동 광복군 직원을 임명함으 로써 광복군사령부 편제를 완성하였다

.

81)

8

10

일 광복군사령부의 편제가 완비되었으나

,

안창호가 줄기차게 요구했던 의용단의 사령부 편입은 끝 내 실행되지 못하였다

. 8

3

일 오후

9

시경 의용단이 총영과 합작으로 평안남도제

3

·

평양경찰서

·

평양부 청 폭탄 투척사건을 전개하였고

,

이 사건으로 김석황을 위시한 주요 단원들이 대부분 검거됨으로써 사실상 의용단이 해체 수순을 밟았기 때문이다

.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본 무장투쟁은

1922

년까지 광복군총영과 광복군사령부로 나뉘어 전개되었 다

.

광복군사령부는 정규전

,

광복군총영은 비정규전을 총괄하였다

.

82) 광복군사령부는

1920

8

월 조직되어

1922

8

월 대한통의부에 참여할 때까지

2

년여 동안 활동하였다

.

83) 광복군총영은 결성된 후 즉시 독립전쟁

76) 도산일기 1920년 7월 4일. 77) 도산일기 1920년 7월 5일. 78) 도산일기 1920년 7월 8일. 79) 도산일기 1920년 7월 10·12일. 80) 도산일기 1920년 7월 16일. 81) 도산일기 1920년 8월 10일. 82) 김영범, 앞의 책, 60쪽.

83) 김병기, 「서간도 광복군사령부의 성립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9, 한국근현대사학회, 1998, 174쪽.

(17)

을 전개하여 주목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

.

창설 연도인

1920

년에만 하더라도 일제 군경과의 교전이

78

,

주 재소 습격이

56

개소

,

행정기관 파괴가

20

개소

,

사살

95

명의 전과를 올렸다

.

84)

1920

년에 접어들면서 임정은 종래의 외교론에서 벗어나 독립전쟁론을 야심차게 주장하였다

.

그 실현을 위 해서 군무부에서 주비단을 조직했고

,

또 임정 내 일부 인사들이 주비단과 성격이 비슷한 의용단을 조직하였 다

.

당시 임정의 군사정책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안창호는 서간도 독립운동세력을 모아 광복군사령부 조직 을 계획했고

,

의용단을 여기에 흡수시키려고 하였다

.

그러나

1920

8

월 초 평양부 내 일제기관 폭파사건으 로 의용단원들이 검거되면서 의용단의 광복군사령부로의 편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

그러나 의용단의 존재 는

1920

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본 무장투쟁 사실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

Ⅳ. 맺음말

1920

년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종래의 외교론에서 벗어나 독립전쟁론을 야심차게 추진하였 다

. 1919

11

5

일 공포된 「大韓民國臨時官制」에 의해서 군무부 조직이 명문화되면서 독립전쟁을 위한 기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은

1920

1

13

일 당해 연도를

독립전쟁의 제

1

이라고 규정한 「국무원포고」 제

1

호와

1

24

일 발표된 「군무부포고」 제

1

호에 의해서 탄력을 받게 되었 다

.

「군무부포고」 제

1

호는 지금이 바로 전쟁을 일으킬 시기라고 밝히고

,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양성 과 조직에 민족 전원이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

그 실행조직으로서 군무부에서 籌備團을 조직했고

,

또 임정 내 일부 인사들이 義勇團을 조직하였다

.

둘의 성격은 비슷했다

.

기본적으로 국내에 거점 및 조직을 확보한 후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 다가 독립전쟁이 시작되면 내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주비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공식적으로 조직을 주도한 것이었다면

,

의용단은 孫貞道

·

金徹

·

金立

·

尹顯振

·

金淳愛

·

金九 등에 의해서 발기되었고 安昌浩가 후견인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한 모양새를 띠었다

.

그러나 당시 임정의 군사정책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안창호는 서간도 독립운동세력을 모아 광복군사령부 조직을 계획했고

,

의용단을 여기에 흡수시키려고 하였다

.

이는 안창호가 군무부 산하 광복군사령부를 대한민 국 임시정부 군사력의 총지휘부로 운영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

안창호는 의용단 총무 金錫璜을 만날 때마다

,

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의용단을 광복군사령부에 편입시킬 것을 종용하였다

.

그리고 안창호와 함께 광복군사령부 설립의 주도자였던 李鐸에게도 의용단이 군무부의 지시를 어기고 자의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관리할 것을 지시하였다

.

그러나

1920

8

월 초 평양부 내 일제기관 폭파사건으로 광복군총영과 합작했던 의용단원들이 검거되면

8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67, 811~813쪽.

참조

관련 문서

진로와 직업과는 자신의 흥미, 적성, 능력을 이해하고 다양한 직업 세계 및 진로에 대한 폭넓은 탐색과 경험을 바탕으로 진로 계획을 수립하며 진학 또는 취업에 필요한

• 지하수위가 높으며, 토양의 염분에 의핚 토양 입자의 분산 때문에 입단(粒團 Aggregate) 구조 없이 단일 입자로맊 되어 있기 때문에 투수(透水 Water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수백년 동안 부족간의 전쟁, 가뭄 그리 고 질병이 공동 방목지에 생활하는 인간과 짐승의 수를 제한하였기 때문에 이 공동 방목지는 유지될 수

생활 주변의 사물과 현상을 수학적으로 탐구하고 조작하고 의사소통하는 활동을 통하여 수학의 기본적인 개념을 익히고, 이를 직업 생활, 경제생활 등의

• 창의적 체험활동 교육과정은 전인교육 이념에 바탕을 둔 자율 활 동과 개개인의 소질과 잠재력을 계발・신장하기 위한 동아리 활 동,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한 나눔과

• 지체장애 학생들을 위한 중학교 체육은 건강, 도전, 경쟁, 표현, 안전의 다섯 가지 영역별 목표와 더불어, 장애 상태와 운동 능 력 수준에 적합한 신체활동의

초등학교 영어는 학습자들이 영어 학습에 흥미와 자신감을 가지고 일 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기초적인 영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길러

⑦ 과거의 삶이 반영된 작품을 오늘날의 삶에 비추어 감상하기를 지도할 때에 는 시대상이 반영된 소재나 인물 간의 대화 등을 단서로 삼아 분석적으로 접근 하는 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