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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했듯 종교철학은 종교와 철학, 이 두 단 어가 결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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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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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제2강

지난 시간 수업에 관한 소개를 미처 다 하지 못했다. 이번주는 이 수업에 대해 소개를 하게 되어있으 므로 오늘 시간까지는 각 교재들을 읽기전 한 학기 동안 우리가 종교철학이라는 과목을 어떻게 엮어 갈지를 이야기 하겠다.

지난 시간에는 "종교철학"이라는 과목명에 대해 생각했다. 주지했듯 종교철학은 종교와 철학, 이 두 단 어가 결합된 것이다. 이것은 각기 완전한 뜻을 지닌 단어들의 구성물이다. 그렇다면 이 두 단어의 관 계는 어떠한가? 가장 대중적인 인식은 양립불가다. 그렇다면 왜 그 두 단어는 결합하였는가? 무슨 취 지로 그렇게 했는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종교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 답했다. 그렇다면 그 성찰은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가? 그러한 성찰은 기독교 신학과는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종교철학이라는 과목 안에서는 기독교의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즉 이 과목 아래서는 기독교, 불교와 같은 특정종교 대신 종교 일반에 대해 다룬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다. 왜냐하면, 특정종교에 대해서는 그 종교 안에 속해있을 때만 그 종교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 역시 정당함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는 종교 밖으로 나아가 종교를 바라본다 해도 그 종교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는 이를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해도 여기서는 종교 밖으로 나아가 종교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한 종교를 알려면 그 종교 안에 있어야 한다, 종교인이 되어야한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전이적인 참여 를 통해서 그 종교에 귀속될 때 그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명제는 어느 정도로 진리인가? 무 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진리인가? (특정 종교에 대한)신앙을 전제로 해야만 (그)종교를 이해한다는 명 제는 일정한 범주와 한계를 갖는다. 이러한 범주와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른바 사이비 종교에 대한 판단 역시 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 안에서 종교를 바라보기만 해서는 그 종교에 대한 비 판 및 성찰이 어렵다. 특정 종교 안에서, 그 종교가 내세우는 진리는 바로 절대적 진리로 여겨지기 때 문이다. 이러한 것만 봐도 특정종교 안에서만 특정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는 명제가 무조건적으로 타당 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정 종교 진리의 한계와 범위를 밝혀내는 작업은 종교 안에서만 이 루어질 수 없고 밖에서 보는 작업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달리말해 특정 종교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 준은 종교 안에서도 세우고, 종교 밖에서도 세워야 한다.

적잖은 시간 동안 기독교는 종교에 대한 판단 기준을 종교 밖에 세우는 것을 금지해왔다. 이러한 금지 의 동기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였지만 교묘하게 종교적인 이유로 포장되어왔다. 속은 권력 싸움이지 만 겉은 교리 싸움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를테면 현대 한국교회사를 볼 때 예장과 기장의 분열의 표 면적인 이유는 모세오경 등에 대한 해석의 문제였지만 그 이면에는 교권싸움을 포함한 정치적, 사회적 갈등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른바 '정통'과 '이단'의 문제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볼 일이다. 개신교가 등장할 때 카톨릭은 개신교를 이단시했다. 이보다 훨씬 전에, 카톨릭과 동방정교가 분열되었을 때도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 말했다. 여기서 이 둘의 교리적 차이도 있지만, 보다 주목 해야할 것은 당시 서방과 동방정교가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민족역시 달랐 다는 것이다. 서방 카톨릭은 로마의 기반 위에 있으며, 동방 정교는 그리스의 문화적 기반 위에 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상이한 두 기반 위에서 성장해나갔다.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은 그 둘의 신화, 문화, 학문을 살펴볼 때 확연히 구분된다. 그런데 이 둘과 히브리 사유를 비교해보면 , 그리스와 로마는 또 다른 하나로 묶인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는 히브리 사유를 뿌리로 하고 그리스와 로마라는 두 토양을 토대로 발전해온 셈이다.다시, 천 년간 기독교는 한 지붕 두 가족이었다가 11세기 중엽 결 국 지붕을 달리 쓰게 되었다. 이 때 동방은 서방을 이단이라고 했고, 서방은 동방을 이단이라고 했다.

동방은 패러다임 전환이 없었지만 서방은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서 철학과 신학, 학문 등을 발전시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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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렇다 해서 기독교에 서방 카톨릭 뿐 아니라 동방 정교라는 큰 흐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 다. 한국에서 이른바 '기독교'라 불려지는 것은 서방 기독교의 영향권 아래 있는 개신교다. 루터의 종 교개혁을 분기점으로 한 기독교의 '분열'(개신교인 우리는 '종교개혁'이라 하지만 로마 카톨릭에서 볼 때 이는 서방 기독교의 '분열'이다)은 서방 기독교의 분열이다. 종교개혁, 서방 기독교의 분열이 일어날 시 카톨릭은 개신교를 이단시 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카톨릭에서 떨어져나온 개신교는 또 다시, 일정 한 중앙 체계 없이 분화를 이루어 나간다. 오늘날 개신교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흐름이 있는 것도 이 와 같은 분화를 통해서이다. 한국 개신교만해도 그 아래 극좌, 극우, 다소 좌파, 다소 우파 등 다양한 성향이 있다.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단체(KNCC)가 있기도 하고 교회는 영혼구원에만 힘써야 한다는 단체(한기총)가 있기도 하다. 성서를 번역하는 성서공회 역시 대한성서공회와 한국성경 공회로도 나뉘어졌는데, 이들 역시 서로를 이단시한다. 한국 내에서 뿐 아니라 단일교회로서는 세계에 서 가장 크다는 순복음교회도 원래는 하나님의 성회라는 종파 아래 속해있었지만, 그 교회가 너무 커 져버리는 바람에 교단의 이름 자체가 순복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순복음교회가 이단이 냐, 아니냐 하는 이단 시비는 계속 있어왔다. 7~80년대만해도 그 시비가 뜨거웠는데 90년대 이후 커 진 교세가 정착이 되고, 소위 사이비 종교와는 구별되는 순기능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자 하나의 교단 으로 인정되었고, KNCC로도 들어왔다. 이단이라고 박해받았던 이들이 정치적 이해, 사회적 이해가 달 라짐으로써 정통으로 편입되는 것이(그 반대의 현상도 일어나는 것이)이른바 '정통과 이단의 역사'다.

이러한 역사를 근거로 통일교에서는 자신들이 곧 이단에서 정통으로 될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렇듯 종교 내에서 정통과 이단을 판명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이러한 종교 내에서의 시각의 한계를 벗어나, 종교 밖으로 몇 발자국 물러나 종교를 보겠다는 흐름이 생겼는데, 이것이 비교종교학이다. 비교종교학을 전공하는 이는 심지어 자신이 특정종교 안에 있다해 도 자신이 속한 종교적 관점을 유보한채 자신이 속해 있는 종교와 타종교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비교 분석, 비판을 하려한다. 이러한 비교종교학은 "종교에 관한 학문"인 종교학이 생기면서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한 흐름이다. 이단은 자기 자신을 이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정통으로 여기 며, 그런 시비를 두고 볼 때 그 자체 내에서 그 진정성은 판단불가다. 이단 안에서 이단 내의 교주는 하나님의 육신적 임재로 여겨진다. 비교종교학은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종교에 대해 객관적으로 접 근하려고 했다. 하지만 비교종교학의 작업은 실패했다. 그 과정을 이 자리에서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 고, 이 작업의 귀결은 종교의 진정성에 대한 분석은 종교 안에서도 판정불가이고, 종교 밖에서도 판정 불가라는 것이었다. 종교학의 짧은 역사 속에서 비교종교학은 고전적인 접근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비 교종교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를 대체해서 등장한 것이 종교현상학이다. 종교현상학적 입장에서는 각종 종교의 특성을 "제의와 실행"이라는 차원에서 읽고 훑어내고 분석했다. 비교종교학적인 방법을 고수했던 인류학자들은 스스로 고도로 발전되었다고 (암묵적으로) 생각한 서구적 기준을 가지고 다른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분류, 판단해서 원시, 미개, 야만으로 칭했다. 이러한 작업은 일종의 제국주의적 횡포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힘들었으며, 기존 기독교 신학자들의 작업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들이 암묵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기독교가 가장 우월한 종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와 방법을 타종교인들(혹은 타문화권에 속한이들)은 거부했고, 이에 따른 또 다른 반성으로 인해 나온 것이 종교현상학이었다. 이에 따라 기본적으로 종교현상학적 입장에서는 각 문화가 고유한 정서 와 체계를 가졌다는, 이른바 "문화적 상대주의"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 종교현상학의 입장에서는 즉각 적인 질문이 제기된다. 그렇다면 결국 다 좋다는 얘기인가? 가치판정은 불가한 것인가? 모든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다 좋은 것인가? 이런 질문 속에서 등장한 것이 종교철학, 종교사회학, 종교심 리학이다. 종교철학, 종교사회학, 종교심리학은 각기 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을 바탕으로 하여 종교를 분석한다. 일전에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종교사회학은 사회를 단위로 심리학은 개인을 단위로 종교를 본다. 종교사회학을 시도한 이로는 대표적으로 막스 베버, 에밀 뒤르껭 등이 있으며, 종교심리학의 대 표적인 인물은 삐아제를 꼽을 수 있다. 사회학은 18세기에, 심리학은 19세기에 등장했는데, 첨언하자 면 심리학이 처음부터 "학문"으로 정립되었던 것은 아니다. 심리학의 학문적 성립은 심리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에 따라 발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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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종교철학과 종교사회학, 종교심리학은 각각의 배경학문을 통해서 종교를 성찰한다. 요즘 은 생물학, 특히 신경생물학으로도 종교를 성찰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학문들은 각기 고 유의 방법론을 통해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종교 행위에 대하여, 종교 사건에 대하여, 종교 현상에 대 하여 탐구한다. 그렇다면 종교철학과 그 외의 종교학 내의 흐름들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자아, 이른바 현상, 사건, 행위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주객에 관한 축을 세울 수 있다. 현상이 가장 객 에 가까우며, 행위는 주에 가깝다. 사건은 주와 객 사이에 위치한다. 종교사회학은 현상에서 사건을 거 쳐 행위로 나아가고, 종교심리학은 그 반대편 극에서 시작하여 행위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 둘은 행위, 사건, 현상등의 관계를 정립해낸다는 점에서는 그 목적이 같다. 하지만 종교철학은 이 현상, 행위, 사 건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보지 않는다. 철학은 이들이 행한 일차적 작업을 놓고 그것을 또 다시 한발 짝 물러서서 바라본다. 즉 종교사회학과 종교심리학은 자료를 토대로 분석하는 일차적 작업이고 종교 철학은 그 작업 결과를 반성하는 이차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철학의 작업은 우리에게 는 낯선 것이다. 상대적으로 종교사회학과 종교심리학은 삶의 현실에 대해 직접적 분석을 행하기 때문 에 익숙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메타학문적 작업이 필요하다. 세계에 대해 분석 하고, 말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성과 해석까지를 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생각한다면 종 교와 철학이 양립불가라는 견해는 매우 피상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각 아래, 우리는 이번 학기 동안 기독교를 유일무이한 무엇으로 보지 않고 일반 종교 중 하 나로, The Religion이 아니라 A Religion으로 볼 것이다. 이것은 곧 현실이기도 하다. 황제의 종교가 된 이후로 기독교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추진했으며, 이 "하나"라는 것, 즉 동일성의 원리가 결 국 동일성의 신화로까지 이어졌다. 근대를 지난 지금, 우리는 신화적 사고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성마저도 신화라는 비판. 즉 오늘날의 이성중심주의 역시 동일성의 억압적 지배 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가해지기도 한다. 현대에는 동일성 대신 이질성, 타자 등이 중심 키 워드로 등장하는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아무튼 우리는 기독교가 A Religion이 되는 현실을 직시하 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까지도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가교를 위해서 문화라는 단위를 등장시킬 필요가 있다. 종교와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잖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를테면 리차드 니버는 종교와 문화가 맺는 관계를 5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했고, 틸리히는 종교를 핵심(궁극적인 차원)으로, 문화를 그릇(표면적인 차원)으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이와 달리 문화를 전체적인 차원으로, 종교를 특수적인 차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 나 인간에게 있어 종교성을 그의 삶 전체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종교를 지엽적인 차원으 로 보기는 힘들다. 우리는 문화라는 범주를 통해서 종교가 특수적인 범위, 한계에만 갇히지 않고 일상 적인 삶의 전영역에까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또 연관되도록 해야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 가?

2000년간 기독교가 뿌리내린 서구의 문화는 곧 기독교 문화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로? 종교를 "믿음

"이라는 일반적 용어로, 문화를 "삶"이라는 일반적 용어로 바꾸어보자. 그렇다면 종교와 문화의 관계는 곧 믿음과 삶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서구 지역에서는 기독교와 문화가 쉬이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서구에서 말해지듯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가? 그들의 삶의 방식 그대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말할 수 있는가? 한국에서의 종교학자들은 세부적인 면에서는 견해를 달리하지만, 한국인의 종교성의 뿌리에는 무교와 유교가 자리잡고 있다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즉 한국인의 심층적, 무의식적 영역에는 무속성이 있으며 의식적 사유방식, 생활 방식은 유교가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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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 위에 과연 기독교는 어느 정도로 자리잡고 있는가? 나의 경우를 볼 때 할아버지도 목사고, 아버지도 목사이며, 나 또한 목사이지만 나의 종교성을 이루고 있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 기독교적인 것보다 오히려 샤머니즘, 무교적인 것이 더 많다.

과연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가? 한국인의 25%가 기독교인이라지만 한국사회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 지 않았다. 한국 개신교에서 신앙은 반공, 친미와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이다.

친미는 친일의 이름 바꿔치기이고 "기득권 논리에 대한 수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것은 예수의 가 르침과 관계없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는 그저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이렇듯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 기 독교를 보는 것은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보기 위한 취지에서 나온 한 방법이다. 기독 교 내부의 시각에서 문화를 말할 때는 문화의 특정한 양상에 대해서만 말하기 일쑤다. 이것은 일반 영 역에 대한 억압이다.

기독교와 불교인이 있다고 치자. 이들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각 종교에 대한 어떠한 지 식도 없는 사람에게 각 종교 고유의 언어를 쓰지 말고 일반 언어로 전달해보라고 해보자. 이것이 가능 한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종교언어를 일상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한 가라는 문제다. 이것이 간단하지 않다.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는 특정한 언어를 쓰지만 교회 밖에서는 이것이 통하지 않음을 알며, 그래서 교회 밖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믿음 과 삶이 따로 논다는 것을 말하며, 믿음이 삶에 착지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 수업을 통해 우리는 우 리가 믿고 있는 것을 일상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 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종교영역과 일상영역에서의 언어 가 분리되어 있음은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믿음이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 를 극복하는 것은 기독교를 일반 종교로 끌어내고 문화적으로 살펴야 하는 또 다른 큰 이유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마친 후에는 "왜 (구태여)종교인가?"를 물을 것이다. 이 시점에 대해서는 종교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풀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즉 기독교를 종교로 본 후 그 종교라는 단위조차 해체하 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만 종교는 다시 문화라는 단위로, 일상화의 단위로 끌어올려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다음시간부터 차근차근 이 작업을 해 나가기로 하겠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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