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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와 한일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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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다 에미코*1)

Ⅰ. 서론

Ⅱ. 일본에서의 아방가르드 담론

Ⅲ. 한국에서의 담론

Ⅳ. 일본과 한국의 관계성

Ⅴ. 결론

Ⅰ. 서론

한국의 기존 연구에서는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기원을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에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논의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파스 큘라’에서 ‘토월회’를 거쳐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에 이르는 흐름 속 에는 일본의 다다(dada)나 대정기 신흥미술운동(大正期 新興美術運動)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운동은 일본에서 소위 ‘アヴァンガルド(아방가르드)’ 라고 불리워 온 것이며 그러므로 한국의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은 그 기원에 아방가르 드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1)

* 일본 오타니대학(大谷大學) 문학부(文學部) 국제문화학과(國際文化學科) 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2년 가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 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1) 기혜경, 투쟁의 예술 , 한국미술100년, 한길사, 2005, 284-287쪽 등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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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기해야 할 문제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파스큘라’ 및 ‘토월회’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을 확인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활동을 단순히 아방가르 드로 연결시켜도 되는가하는 점과 또 하나는 아방가르드라는 단어가 원래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정의자체가 아직 애매하다는 점이다.

‘파스큘라’와 ‘토월회’의 활동이 아방가르드로 간취된 것은 그들의 활동 내용 에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저항적인 요소를 볼 수 있다는 점과 그들의 입장이 일 본 ‘신흥미술운동’을 이끌어가는 예술가들의 모습과 겹쳤기 때문일 것이다. ‘파스 큘라’와 ‘토월회’의 핵심인물인 김복진(金復鎭, 1901-1941)이 제작한 잡지 문예운 동 표지화는 그 당시의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구성주의적인 작품이었는데 그것 역시 그들의 아방가르드성을 증명해주는 자료로 제시되었다.

여기서 거론되는 아방가르드는 서양에서 직수입된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일본과의 동시대성이 문제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본에서는 당시 ‘신흥미술운동’이 서양의 아방가르드 (Avant-Garde)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므로 ‘Avant-Garde’과 ‘アヴァンガルド’는 혼재시키면 안 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펼쳐졌다.2) 그렇다면 일본과의 관계성이 적지 않았던 1920년대의 한국미술에 대해서도 좀 더 신중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 을 것이다. 이 논고에서는 일본 아방가르드 담론을 정리한 뒤, 한국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을 전위 혹은 아방가르드와의 관계성을 통해서 분석해보겠다.

Ⅱ. 일본에서의 아방가르드 담론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용어는 원래는 군사용어에 기원이 있는 단어 로 미지의 땅에 진출하는 전위부대를 의미한다.3) 그것이 19세기 초에 생시몽과

2) 五十殿利治(오무카 토시하루), 大正期新興美術運動の研究, スカイドア, 1995.

3) W. ヘンクマン․K. ロッター(後藤狷士他 訳), 美學のキーワード, 勁草書房, 2001, pp.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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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예술적 개념으로 전용된 것이다. 이 렇듯이 공산주의자들이 ‘명확한 목적의식과 이론적 전망으로 계급투쟁과 혁명운 동을 선도하는 집단’을 아방가르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더 나아가 예술적 측 면에서 ‘인습적인 통념과 규범을 타파(打破)하고 표현의 근본적인 변혁을 지향하 는 정신과 운동을 총칭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4)

한자 ‘前衛’라는 단어는 프랑스어 ‘Avant-Garde’의 번역어이므로 일본의 외 래어 표기인 가타가나 ‘アヴァンガルド’와 같은 내용이라고 혼동되는 경우가 많지 만 일본에서는 이 두 용어를 엄격하게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다. 즉 ‘アヴァンガル ド(아방가르드)’라는 단어는 ‘예술적 전위’에만 사용되어 왔으며 공산주의적 사회 주의적인 이른바 정치적 예술운동에서는 오히려 ‘アヴァンガルド’라는 호칭이 철 저하게 기피되고 그 대신에 ‘前衛’(젠에이, 전위)라는 단어가 선호되었다.

‘Avant-Garde’는 기존의 가치관을 초극하는 운동을 가리키는데 예술적 전위 분야에서 볼 때 그 초극해야 할 대상은 기존의 화단이며 기존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사회주의 예술운동분야에서는 근대기 이후 구축되어온 ‘예술’ 그 자체가 초극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アヴァンガルド(아방가르드)’와 ‘前衛(전위)’

는 같은 ‘Avant-Garde’라는 단어를 기원에 두면서도 완전히 대립하는 개념이 되 어버린 것이다.

문제를 보다 복잡하게 만든 것은 기존의 예술분야에서 ‘アヴァンガルド’를 표방하던 일본 미술가들이 1928년을 전후로 좌익 운동에 가담하게 된 사실이다.

이것은 오무카 토시하루(五十殿利治)에 의해 상세하게 분석되어 있다.5) 대정시대 는 잘 알다시피 ‘アクション(액션)’, ‘マヴォ(마보)’, ‘三科(삼과)’, ‘造型(조형)’과 같 은 기존예술에 반역적인 운동을 펼치는 그룹들이 활약한 시대이지만 그 중에서도

‘造型(조형)’은 그러한 운동을 집대성한 그룹이었다. 그들은 ‘기존 미술의 파괴와 초극’을 목표로 하고 그들의 활동은 이른바 다다(dada)적인 양상을 보였는데 ‘반

4) 예술적 전위, 정치적 전위에 대해서는 波潟剛(나미가타 츠요시), 越境のアヴァンギャルド, NTT出版, 2005.

5) 五十殿利治, 大正期新興美術運動の研究, pp. 799-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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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인 행동’이라 해도 결국은 서구 특히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양식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라는 딜레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딜레마 돌파구를 연 것은 1927년에 개최된 ≪신러시아(新ロシア)전≫이 었다. ≪신러시아전≫에서 소개된 작품은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 1885-1953)과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 1891-1956) 등이 추진한 소위 구성주의적인 작품이 아니라, 일리야 마시코프(Il'ya Ivanovich Mashkov, 1881-1944)와 표트르 콘차로프스키(Petr Petrovich Koncharovsky, 1876-1956) 등이 그린 리얼리즘 작품이었다. 그룹 ‘조형’ 멤버들을 이들 작품을 통 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가능성을 느끼고 급속히 좌익미술에 접근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강력했던 프랑스 미술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미술을 하 나의 대안으로 수용한 셈이다. 일본 미술가들이 러시아 미술이 가지고 있던 정치 성이나 사회주의사상에 공감을 느끼고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일본 미술계 의 특수성을 엿볼 수 있다.

‘조형’은 조직 개편 후 1928년에 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 미술부(AR)과 합동 으로 제1회 ≪프롤레타리아 미술대전≫을 개최하고 이 전람회가 끝난 후에 ‘조형’

화가들은 ‘나프(NAPF)’에 가입하게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조형’이 ‘나프’로 가입한 이후 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나프’ 내에서 ‘조형’이 어떤 활동을 했느냐에 초점을 맞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조형’이 ‘나프’에 가입하기 직전부터 ‘조형’ 출신의 오카모토 토키(岡 本唐貴)와 AR 출신의 나가타 카즈나가(永田一脩)사이에는 심한 논쟁이 벌어진 것 이 잘 알려져 있다.6) 이 논쟁은 개인적 수준의 논쟁이 아니라 바로 ‘조형’과 ‘AR’

간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논쟁 끝에 ‘AR’과 ‘조형’은 화해하고

‘조형’이 ‘나프’에 가입함으로써 변증법적 발전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7) 실제로는 ‘조형’이 ‘나프’에 가입한 뒤에도 대립구조는 지속되었다.

6) 中村義一(나카무라 기이치), 傷だらけの美術運動-プロレタリア美術運動 , 日本近代美術 論爭史, 求龍堂, 1981, pp. 20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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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가 편집한 일본 프롤레타리아 미술사를 보면 ‘AR’의 활동을 경시하고

<씨 뿌리는 사람>을 비롯한 ‘나프’ 이전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활동에 대한 기술 을 안했다는 점8), 그리고 해산된 지 30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나가타가 ‘조형’

에 대해서 비판적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양자가 ‘화해’한 것인지 매우 의 문스럽다.9)

‘조형’ 멤버들이 ‘나프’에 가입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동기에 대해서도 명확 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원래 ‘조형’은 비정치주의의 미술가집단이었기 때문에 정 치성이 강한 ‘나프’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동기가 필요할 터인데 ‘조 형’ 화가들이 남긴 글들을 봐도 정치나 조합 활동에 대한 그럴듯한 의견을 발견 할 수 없다. 그런데 조직 개편에 즈음해서 발행된 기관지 조형미술(1928년4월 창간) 표지에는 벌써 ‘무산자계급 미술잡지’라는 말이 보인다.

조형미술의 창간호에 게재된 오카모토의 네오․리얼리즘 회화예술에 관 한 일론(ネオ․リアリズムの繪畵藝術に關する一論) 을 보면, “부르조아 말기의 퇴 폐 회화예술에 맞서고 우리는 우리들의 현실에 적합한 회화예술을 이룩하는 것”

이 필요하다, 그런 예술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네오․리얼리즘’을 추구해야 한 다고 주장한 바 있다. 오카모토(岡本)에 의하면 “네오․리얼리즘의 회화예술이란 인상주의 및 후기인상주의가 내포하는 주관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 주관주 의적인 요소를 배제한 현실주의”이며, 네오․리얼리즘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조 건에 맞은 세잔느까지 소급하고 세잔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 고 ‘조형’ 멤버들이 그때까지 추구해 온 다다적인 신흥예술은 부르주아 예술을 뒤 집긴 했지만 새로운 예술을 생산하지 못했다고 반성한 바 있다. 오카모토가 말하 는 주관주의를 배제한 인상주의 및 후기인상주의라는 바로 ≪신러시아전≫에서 소개된 소련의 화가 마시코프 및 콘차로프스키의 작품이라고 한다.10) 마시코프와 콘차로프스키의 작품은 양식적으로 보면 세잔느의 회화를 러시아 풍으로 해석한

7) 五十殿利治, 観衆の成立, 東京大學出版會, 2008, p. 275.

8) 岡本唐貴(오카모토 토키)․松山文雄(마쓰야마 후미오), 日本プロレタリア美術史, 造形社, 1967.

9) プロレタリア美術運動の回顧 15 永田一 脩にきく , 美術運動 104號(1977. 2), p. 76.

10) 岡本唐貴, ネオ․リアリズムの絵画芸術に関する一論 , 造型芸術(192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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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조형’ 멤버들 작품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오카모토는 ‘조형’의 논객으로서 상당수의 글을 남겼지만 그것을 자세히 살 펴보면 조형이 변모한 것은 그들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무산자)를 위한 투쟁 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미술을 배격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카모토는 프롤레타리아예술단체의 기관지 문예전선(1927년 11월)에 실 린 부르주아 미술의 파시즘에의 약진(ブルジョア美術のファシズムの躍進) 이라 는 글에서 부르주아미술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고 있다.11) 조형미술 1928년 6월 호에 발표된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 당면의 임무(プロレタリア美術運動當面の任 務) 에서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이 글 역시 프롤레타리 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말기에 이른 부르주아미술을 배격 해야 한다. 부르주아미술을 배격하는 우리들은 부르주아가 아니기 때문에 프롤레 타리아다”라는 기묘한 삼단논법으로 자신을 프롤레타리아로 정의 짓고 있다. 오카 모토의 글을 보면 ‘조형’ 그룹 입장에서는 미술과 조형상의 문제가 우선시 되어 있고 프롤레타리아와 조직,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으로 보인다.

Ⅲ. 한국에서의 담론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은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를 표방했으므로 조선인 활동가들과도 교류가 있었는데 운동이 볼쉐비키화하기 전의 클라르테 운 동을 통한 한일 양국 간의 교류와 볼쉐비키화 이후의 교류는 의미적으로 큰 차이 가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클라르테 운동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 의 기원이라고 지목되는 운동이므로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에게도 영향을 끼 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예를 들어 1920년 3월부터 1923년 5월까지 일본에서 11) 岡本唐貴, ブルジョア美術のファシズムへの躍進 , 文芸戦線 第4巻 11号(192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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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했던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 1903-1985)은 일본의 클라르테 운동에서 적 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김기 진의 형인 김복진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클라르테 운동은 잘 알려져 있듯이 반전(反戦)문학운동이다. 이 운동 명칭은 평범한 직장인이 전쟁체험을 통해서 사회의 부조리나 계급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는 앙리 바르뷔스(H. Barbusse)의 소설 클라르테(‘광명’이라는 뜻)(1919)에서 이 름을 땄는데 이 소설이 발표된 1919년이란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이 결성된 해 였다. 바르뷔스 자신도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1923년에는 프랑스 공산 당에 입당하고 최종적으로는 1935년에 모스크바에서 객사했다.

일본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의 기원을 찾아보면 고마키 오우미(小 牧近江, 1894-1978)를 비롯한 種まく人(씨 뿌리는 사람)동인들이 주도한 클라르 테 운동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이 운동을 이끌고, 잡지 씨 뿌리는 사람을 창간한 고마키 오우미는 프랑스 문학자이다. 그는 1910년 16살 때 아버 지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간 뒤 파리 법과대학에 입학하고 1918년에 졸업했다. 그 는 프랑스 체류 중에 문학자 앙리 바르뷔스가 제창한 클라르테 운동에 참가하였 다. 귀국 후 일본에서도 클라르테 운동의 씨앗을 뿌리겠다고 1921년에 씨 뿌리 는 사람을 창간하게 된다.

일본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이 소비에트 러시아 직수입이 아니라 프 랑스를 경유한 것이었던 것,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유럽에서 경험한 고마키 오우미가 이끈 반전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공산당과는 약간 거리를 두는 자유주의 적이면서도 우애를 중시하는 문학운동이 되었다.

김기진은 1923년 5월에 귀국하고, 박영희들과 함께 문예단체 ‘파스큐라 (PASKYULA)’을 결성했는데 파스큐라가 염군사와 달리 정치에 거리를 두고 자 유주의적인 활동을 한 것도 일본의 클라르테 운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확인할

12) 클라르테 운동이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아래 논문을 참조할 것. 李修京, 反戦運動

“クラルテ運動”が日本と朝鮮に与えた影響-アンリ․バルビュス, 小牧近江, 金基鎮を中心に

- , 安斎育郎․李修京編, クラルテ運動と種蒔く人, 御茶の水書房, 2000, pp. 17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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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또한 씨 뿌리는 사람 동인이었던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가 조 선의 문인들과 교류하고 조선에서 강연회를 열고 ‘카프’ 준비위원회에도 출석했다 는 사실도 잘 알려져져 있다.13)

‘카프’ 미술부 설립당시 미술인으로 소속되어 있는 것이 김복진, 안석주(安碩 柱, 1901-1950), 권구현(權九玄, 1898-1938년) 등 세 명이었는데 권구현은 1927년 제1차 방향전환에 인해 ‘카프’에서 제명당하고, 안석주는 1931년에 제2차 방향전환 에 즈음하여 제명되었다. 김복진은 1928년 일본 당국에 의해 검거되어 1933년까 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제2차 방향전환 이후 카프 미술부에는 초창기 멤버가 사라지고 그 대신에 강호, 이갑기, 이상춘, 박진명을 비롯한 문인, 영화인, 평론가 들에 의해 운영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제1차 방향전환이란 정치적인 목적의 식을 명확화 시키자는 것이며, 제2차 방향전환에서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예술활 동이 추진되는 이른바 ‘운동의 볼쉐비키화’가 진행되었다.

제2차 방향전환이 가져온 단절은 일본에서의 클라르테 운동과 ‘나프’ 활동 간에 볼 수 있는 간격과 매우 비슷하다.

카프 미술부 설립 멤버인 안석주와 김복진이 미술의 전문가였는데 제1차 방 향전환 이후의 멤버들은 ‘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인’이라는 입장에 있었 다. 일본의 ‘나프’에 소속된 조선인 활동가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정하보 (鄭河普, 1908-1941)는 원래 미술보다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원 에서 열린 제1회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전람회≫에 일본인 작가들의 작품을 가 져오려고 노력한 박석정(朴石丁)도 주로 시를 짓는 문인이었다.14)

13) 権寧珉, 中西伊之助と1920年代の韓国階級文壇―カップ創立準備会会合時の写真を公開しな がら , 社会文学(7), 日本社会文学会, 1993年, pp. 121-129.

14) 시인 박석정에 관한 논문으로써는 이순욱, 박석정의 삶과 문학활동 , 어문학 91(2006), 한국어문학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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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일본과 한국의 관계성

리재현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 ‘카프’ 활동에 참여한 예술가들을 찾아보 면 ‘해외에서 공부한 뒤’라는 기술이 눈에 뛴다. 여기서 말하는 해외는 대부분 일 본을 가리킨다. 반미(反美), 반일(反日)을 표방하는 북한에 있어 활동가들이 일본 에서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카 프’는 반일단체로 인식될 경우가 많으며 일본/일본인과 전면적으로 대립관계에 있 었다고 오해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카프는 반일보다도 반제국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되도록 합법 적으로 활동하려고 했으며 일본 프롤레타리아 단체와도 교류를 가지고 ‘나프’ 맹 원들과의 ‘연대’를 도모했다. 이것은 반제국주의라는 점에서 ‘카프’와 ‘나프’의 이해 (利害)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한일합방으로 인해 조선인이 국적상 일본인이 되고 본의 아니게 일본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던 그 시대에는 일본 그리고 일본 인과 전혀 상관하지 않은 것은 불가능하였다. 특히 지식계층은 사회적으로 상승 하기 위해서는 해외에 탈출하는 외에는 일본 교육체제 속에서 성공하거나 일본 체제를 이용할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단, 일본 체제를 이용했다 하더라도 그 정 신까지 매도한 것은 아니며 반제국주의 구호 아래는 항상 조국독립의 비원이 숨 어있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서양미술을 공부한 고희동이 한국에 귀국한 것이 1915년이 고,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미술 유학생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을 감안하 면 그 당시 근대적인 미술전문가는 극소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제1차 방 향전환 후, ‘카프’ 미술부에 미술 전문가가 없어졌다는 것은 납득할 만한 일이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은 분야를 초월한 활동이 펼쳐졌으나, 한국에서 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문학, 미술, 연극 등 모든 분야를 혼자서 담당해야 할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기존 화단에 대한 부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근대적 미술제도 도입의 역사 가 짧은 당시 한국에서는 예술적 전위를 가리키는 ‘アヴァンガルド(아방가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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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화단 형성과정에 있던 한국에서는 부정 해야 할 확고한 미술 동향이나 화단의 권위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대 정데모클라시 분위기 속에서 공부한 당시 유학생들이 다다와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에 사회를 변혁할 가능성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Ⅴ. 결론

일본 미술계에서 제창되어 있던 ‘アヴァンガルド(아방가르드)’란 구성주의나 다다, 미래파, 쉬르레알리즘에 이르기까지의 신경향 미술양식을 통틀어 지칭한 것 인데, 이것은 이른바 예술적 전위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내용을 보면 프랑스 에서 유행하는 양식을 따라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에 비해 정치적 인 전위의 현장인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에서는 삽화, 디자인, 무대미술 등을 중 심으로 제작했다가 ‘조형’ 그룹이 아방가르드를 버리고 프롤레타리아 쪽으로 합류 한 후에는 소셜리얼리즘 이름 아래 그 당시로써도 약간 예스러운 세잔느 계열의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화풍을 전쟁후의 좌익미술운동이 이어받게 된다.

한국에서는 클라르테 운동의 영향을 받은 초기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에서 김복진이나 안석주 등 미술 유학파에 의한 제작활동이 시도되었지만 ‘카프’가 볼 쉐비키화 함에 따라 그들의 활동은 도태되고 말았다. ‘카프’에 남은 문인들은 문학 활동과 동시에 미술작품도 제작했지만 정식적인 미술훈련을 받지 않았던 그들의 작품은 기술적으로는 미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프’에서 중요시된 것은 정치적 목적의식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미숙함은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았다. 한국의 프롤 레타리아 미술이란 회화의 형태적인 미(美)보다 정신성을 중시해온 한국의 전통 을 또 다른 방법으로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

* 논문투고일: 2013년 4월 21일 / 심사기간: 2013년 5월 7일-5월 17일 / 최종게재확정일: 2013 년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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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李修京(이수경), 反戦運動“クラルテ運動”が日本と朝鮮に与えた影響-アンリ․バル ビュス, 小牧近江, 金基鎮を中心に- , 安斎育郎․李修京編, クラルテ運動 と種蒔く人, 御茶の水書房,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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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일본근대미술에 있어서 소위 아방가르드란 구성주의, 다다, 미래파, 쉬르레 알리즘에 이르기까지 신경향의 미술양식을 총칭하는 단어이지만 이것은 이른바

‘예술적 전위’에 해당하는 것이며 내용적으로 보면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양 식 추종에 불과했다. 이러한 ‘예술적 전위’에 비하면 ‘정치적 전위’의 현장인 프롤 레타리아 문화운동에서는 삽화, 디자인, 무대미술 등 기능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제작활동이 진행되었는데, 신흥미술단체 <조형>이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벗어나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 합류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단체에서도 세잔 계열의 유화 작품이 제작되기 시작됐다. 이러한 세잔 계열의 작품은 그 당시에 있어도 약간 진부한 양식이 되어있었지만 그들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이름아래 세잔 화풍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 화풍은 전후(戦後의 좌익미술운동이 이어받게 된 다.

한국의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에서는 클라르테 운동의 영향을 받은 김복진 과 안석주와 같은 유학경험이 있는 미술가에 의해 제작활동이 시도되었지만 카프 가 볼쉐비키화함에 따라 그들의 활동은 도태되고 말았다. 카프에 소속한 문인들 은 문학 활동과 동시에 미술작품도 제작했지만 정식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던 그들 작품은 미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프의 미술활동에 있어 중요시된 것은 정 치적 목적의식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술적인 미숙함은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았 다. 한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미술이란 회화적 형태적인 아름다움보다도 정신성 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인의식의 전통이 계승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핵심어

아방가르드, 프롤레타리아, 전위, 오카모토 토키, 김복진, 볼쉐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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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文抄録

アヴァンガルドと日韓プロレタリア芸術運動

喜 多 恵美子*1)

近代日本の美術界において アヴァンガルド とは構成主義やダダ、未来派、

シュルレアリスムにいたるまでの新傾向の美術様式を総称したものであるが、これはい わゆる芸術的前衛に相当するものであり、内容的にはフランスで流行していた様式の 追従にすぎないことも多かった。これに対し、政治的前衛の現場であるプロレタリア文 化運動においては挿絵、デザイン、舞台美術などの機能的作品を中心に制作活動 が行われていたが、新興美術グループ 造型 が アヴァンガルド を捨ててプロレタリ ア運動に合流してからはソーシャルリアリズムの名のもとにその当時としても若干古めか しいセザンヌ系列の作品が制作されるようになった。このような画風を戦後の左翼美術 運動が引き継ぐこととなる。

韓国ではクラルテ運動の影響を受けた初期プロレタリア文化運動において金復 鎮や安夕柱ら留学経験のある美術家による制作活動が試みられたものの、カップが ボルシェビキ化するにしたがい、彼らの活動は淘汰されてしまうことになった。カップに 残った文人たちは文学活動と同時に美術作品も制作したが、正式に美術教育を受け ていない彼らの作品は技術的に未熟なものだった。しかし、カップの美術活動におい て重要視されたのは政治的目的意識であったため、このような未熟さはそれほど問題 視されなかった。韓国のプロレタリア美術とは、絵画における形態的な美よりも精神性 を重視してきた韓国の文人意識の伝統が別のかたちで継承されたものだととらえること

* 大谷大學 文學部 國際文化學科 敎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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ができる。

キーワード

アヴァンギャルド プロレタリア、前衛、岡本唐貴、金復鎮、ボルシェビ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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