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象村 申欽의 筆記 散文 一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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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象村 申欽의 筆記 散文 一考*

62) 김 광 년**

❙국문초록❙

한문산문의 독특한 글쓰기 방법의 하나인 필기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필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문체이다. 조선 전기까지 필기 산문은 몇몇 문인들에 의해서만 산발적으로 창작되었으나 조선 중기에 들 어서면서 그 저변이 대폭 확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상촌 신흠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필기 산문 작가로서 연구 의 가치를 지닌다. 본 논문에서는 「산중독언」과 「강상록」 두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그의 필기 산문의 특징을 분석해 보았다. 그의 필기 산문에는 개인의 내면을 진솔하게 고백한 내용이 많이 보이며, 전원 생활에서의 즐 거움을 담담한 어조로 표출하였다. 또한 역사 논평을 통해 현실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면모도 보여주었 다. 신흠의 필기 산문은 이 시기 필기 산문의 발전상을 잘 보여주는 표본으로서 산문사적 의미가 있다.

[주제어] 신흠(申欽), 상촌(象村), 필기(筆記), 산문(散文), 산중독언(山中獨言), 강상록(江上錄)

❙목 차❙

Ⅰ. 머리말

Ⅱ. 16세기 말~17세기 초의 필기 산문과 신흠

Ⅲ. 신흠 필기 산문의 특징적 국면들

Ⅳ. 맺음말

Ⅰ. 머리말

필기

(

筆記

)

는 한문산문의 독특한 글쓰기 방법의 하나이다

.

일반적인 한문산문 작품들이 일정한 규모와 완 결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

필기 산문은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한 주제를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로운 필치로 적어 내려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

1) 따라서 필기에서 보통의 한문산문 작품에서 보이는 엄격

* 이 논문은 지난 20131220일에 있었던 제3회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번역학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보완 한 것이다. 토론을 맡아 논문의 완성에 많은 도움을 주신 단국대 김홍백 선생께 감사드린다.

** 고려대학교 박사과정 / light1979@hanmail.net

(2)

한 규범성

,

다양한 수사 등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그만큼이나 필기 산문은 비규범적이고

이완된 장르

이다

.

2)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필기 산문은 문인들에게 가벼운 글쓰기로 취급되어 경시된 한편으로

,

부 담 없이 개인의 다양한 생각을 드러내기에 용이한 문체로서 문인들에게 애호된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

조선 중기에는 필기 산문을 창작하는 작가가 많아지고 그 내용 역시 다양화되면서 필기가 상당히 성행하 고 또 그만큼이나 발전하였다

.

특히 이 시기에는 학술성을 갖춘 필기가 전시대에 비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 며

,

3)

(

)

으로부터 청언

(

淸言

)

과 같은 소품적 성격의 필기 산문이 수용되면서4) 필기 산문에서도 개인의 내면을 고백하거나 서정적 정취를 묘사하는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

이 시기에 필기 산문을 남긴 여러 작가들 중에서

,

상촌

(

象村

)

신흠

(

申欽

, 1566~1628)

은 남긴 작품의 분량 이나 내용 등의 측면에서 주목을 요하는 작가이다

.

일단 문집에서 필기 산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작가들 에 비해 압도적인데

,

문집 󰡔상촌고

(

象村稿

)

󰡕

60

권 중에서 약

1/3

가량

(19

)

이 필기에 할애되고 있다

.

5) 그 내용 또한 개인적의 서술에서부터 문학 평론

,

역사 논평

,

철학 등에 이르기까지 필기 산문의 거의 전분야를 망라6)하고 있어서

,

신흠의 사상

,

문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들이 산적해 있다

.

그런데 기존의 신흠 연구에서는 이 자료들을 주로 그의 사상적 특징을 해명하는 데 활용해 왔을 뿐

,

문학 적 측면에서 접근해 간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

7) 신흠은 필기 산문에서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고백하 고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

이를 배제한 상태에서의 신흠 문학 연구는 그 결과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결국 우리가 신흠의 산문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의 필기 산문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본 논문에서는 신흠의 필기 산문의 현황 을 간단히 개관하고

,

신흠의 필기 산문 중에서 󰡔산중독언

(

山中獨言

)

󰡕과 󰡔강상록

(

江上錄

)

󰡕을 중심으로 하여 그 특징을 점검해 보려 한다

.

8)

1)이와 관련하여 劉葉秋의 다음 언급을 참고할 만하다. “내용에 있어서는 주로 하기 때문에 類別에 구애받지 않고 들은 것 을 곧바로 기록할 수 있으며, 형식에 있어서는 주로 하기 때문에 길고 짧은 것을 마음대로 서술할 수 있다.”(劉葉秋(지음), 김장환(옮김), 󰡔중국역대필기󰡕, 신서원, 2007, 33)

2) 필기 산문을 이완된 장르로 규정한 것은 박희병의 견해를 수용하였다. 󰡔유교와 한국문학의 장르󰡕, 돌베개, 2008, 62~66쪽 참조.

3)經學과 歷史를 주제로 한 필기들이 많이 생산되었고, 李睟光의 󰡔芝峯類說󰡕과 같이 비교적 전문적이면서 일정한 체계를 갖춘 저술도 나왔다.

4)이와 관련해서 한영규, 「조선후기 淸言小品의 특징」, 안대회(), 󰡔조선후기 小品文의 실체󰡕, 태학사, 2003; 김은정, 「󰡔小窓 淸紀󰡕 異本과 17세기 초반 朝鮮에서의 수용 양상」, 󰡔한국한문학연구󰡕 47, 한국한문학회, 2011 등을 참조.

5)金驢는 󰡔寒皐觀外史󰡕 권27에 신흠의 󰡔山中獨言󰡕과 󰡔江上錄󰡕을 함께 실으면서 그 題後에서 今按其所著, 雜述甚多라고 하여 신흠이 특히 필기 산문을 많이 남기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김려, 󰡔藫庭遺藁󰡕 권11, 「題山中獨言卷後」, 한국문집총간 289, 민 족문화추진회, 550쪽 참조.

6) 다만 패설류 작품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듯, 남긴 작품이 거의 없다.

7)「野言」의 경우에는 淸言小品의 관점에서 분석한 김은정, 「申欽의 淸言 선록집 <野言> 연구」(󰡔국문학연구󰡕 22, 국문학회, 2010)가 나왔다.

8) 이들이 선택된 이유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논의될 것이다.

(3)

Ⅱ. 16세기 말~17세기 초의 필기 산문과 신흠

조선 전기까지 우리나라의 문인들은 필기 산문의 창작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그 원인으로는 조선 초의 야사

(

野史

)

금지 정책과 필기에 대한 문인들의 인식 부족이 꼽히고 있다

.

9) 서거정

(

徐居正

)

등이 필기 산문에 비교적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각종 작품집을 편찬한 이래로 문인들은 조금씩 필기 산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수량은 많지 않았다

.

남아 있는 작품들을 통해 볼 때

15

세기까지의 필기 산문은 주로 패설

(

稗說

)

이 중심이 되었고

, 16

세기 들어 사림파

(

士林派

)

의 집권과 함께 야사 중심의 필기 산 문집 편찬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

10)

특히

16

세기 말

~17

세기 초가 되면 명대

(

明代

)

문예가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다양한 사상적 조류들이 유행 하는 등 우리나라의 문예 및 사상계가 큰 폭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추어 필기 산문 의 창작 역시 상당히 활성화되는데

,

기존에 패설이나 야사 등 주로 서사적 성격의 필기 산문이 유행하였던 반면 이 시기 들어서는 학술 논변

,

시화 등 다양한 영역11)으로 필기 산문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

이러한 정 황은 이 시기에 창작된 필기 산문을 개관해 보면 대체적으로 확인된다

.

우선 학술 필기로 성리학에 대한 잡다한 견해를 정리한 배용길

(

裵龍吉

, 1556~1609)

의 「수록

(

隨錄

)

(

󰡔금 이당선생문집

(

琴易堂先生文集

)

󰡕 권

4),

이수광

(

李睟光

, 1563~1628)

의 대표 저작 중 하나인 󰡔지봉유설

(

芝峯類 說

)

󰡕 등을 들 수 있다

.

야사 필기로는 이항복

(

李恒福

, 1556~1618)

이 직접 겪은 일사

(

逸事

) 16

조목을 기록한 「잡기

(

雜記

)

(

󰡔백사 선생별집

(

白沙先生別集

)

󰡕 권

4),

전식

(

全湜

, 1563~1642)

이 임진왜란의 경험을 일기체로 기록한 「수수차록

(

隨 手箚錄

)

(

󰡔사서선생문집

(

沙西先生文集

)

󰡕 권

6),

권득기

(

權得己

, 1570~1622)

가 설화적 성격이 강한 일사를 기 록한 「연송잡록

(

然松雜錄

)

(

󰡔만회집습유

(

晩悔集拾遺

)

󰡕

),

허균

(

許筠

, 1569~1618)

1610

(

광해군

2)

에 옥 중에 있을 때에 사대부들의 행적과 고사를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성옹지소록

(

惺翁識小錄

)

」 등이 있다

.

한편 이 시기 새로이 향유되기 시작한 청언

(

淸言

)

을 많이 담은 허균의 󰡔한정록

(

閑情錄

)

󰡕

,

이수광의 「경어

9) 이래종, 「鮮初 筆記의 전개 양상에 관한 연구:󰡔太平廣記詳節󰡕과 󰡔太平通載󰡕의 編刊과 관련하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 문, 1997, 199~202.

10) 앞의 글, 8장 참조.

11) 필기 산문은 다루어지는 주제 또는 소재에 따라 서너 가지로 분류되며, 그 분류 기준은 학자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중국쪽의 분류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劉葉秋는 小說故事類, 歷史鎖聞類, 考據辨證類의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劉葉秋, 앞 의 책) 우리나라는 林熒澤이 笑話, 野史, 詩話의 세 가지로 분류한 이래(「李朝前期의 士大夫文學」, 󰡔韓國文學史의 視角󰡕, 창 작과비평사, 1984) 稗說, 野史, 詩話, 辨證, 綜合의 5분법을 제시한 李來宗(위의 글) 등이 있다. 安芮璿은 宋代 필기를 다루 면서 필기의 분류에 隨筆雜記類를 추가하였던 바(「宋人笔记硏究:以随笔杂记为中心」, 復旦大学 博士学位論文, 2005), 이 는 필기 산문 연구에서 기존 연구자들이 소홀히 했던 개인의 일상 및 내면 기록의 측면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 최근에 나온 최두헌, 「筆記의 관점에서 본 󰡔耳目口心書󰡕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에서도 이러한 유형의 작품을 隨筆小品으로 명명하고, 이러한 수필소품적 측면이 󰡔이목구심서󰡕의 중요한 특징임을 논증하였다. 한편 기 존의 필기 산문 연구는 서사문학의 전개와 관련하여 패설, 야담 등이, 문학이론 탐구와 관련하여 시화 등이 주로 다루어졌 고, 최근 들어 조선후기의 지식 생성 및 유통 체계와 관련하여 학술논변류 작품들이 주목받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연구 성과로 진재교, 「李朝 後期 箚記體 筆記 硏究:지식의 생성과 유통의 관점에서」(󰡔한국한문학연구󰡕, 39, 한국한문학회, 2007)를 들 수 있다.

(4)

잡편」과 같은 작품들도 나왔고

,

역시 허균의 작품으로 음식을 주제로 한 「도문대작

(

屠門大嚼

)

」과 같이 특정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작품들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

그밖에 내용이 잡다하여 성격을 규정하기가 어려운 필 기 작품들도 적지 않은데

,

예컨대 이수광의 「채신잡록

(

采薪雜錄

)

,

「병촉잡기

(

秉燭雜記

)

,

「경어잡편

(

警語雜 編

)

,

「잉설여편

(

剩說餘編

)

,

장흥효

(

張興孝

, 1564~1633)

에게는 「일기요어

(

日記要語

)

(

󰡔경당선생문집

(

敬堂 先生文集

)

󰡕 권

2)

등을 들 수 있다

.

이상의 개관에서 확인할 수 있듯

, 16

세기 말

~17

세기 초에는 필기 산문의 작가층이 넓어지고

,

이수광

,

허 균 등 특히 필기 산문에 힘을 기울인 작가가 다수 나왔다

.

그리고 그 내용 또한 전통적인 패설

,

야사뿐만 아 니라 학술

,

시화

,

청언 등으로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

신흠 역시 이 시기를 대표하는 필기 작가의 한 사람으로

,

특정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 걸쳐 폭넓은 주제와 내용의 필기 산문을 창작하였다

.

아래에 각각의 작품에 대해 간단히 개관함으로써 신흠의 필 기 산문을 이해하기 위한 초석을 놓고자 한다

.

42~47

은 「휘언

(

彙言

)

」이다

.

이 작품은 경학과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으로

,

학술 논변과 역 사 평론이 혼합된 저술이다

.

42~43

는 󰡔주역󰡕

,

󰡔맹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경학에 대해 논변하였고

,

44~45

은 춘추전국시대 이래 원

·

명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역사에 대한 논평

,

46

은 신라 및 고려시대 역사에

대한 논평이다

.

47

은 상고시대의 사회

·

제도와 관련한 몇 가지 주제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논술하였다

.

48~49

는 「야언

(

野言

)

」으로

,

전원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을 초록하고 자신의 생각을 덧 붙였다

.

48

은 명 오종선

(

吳從先

)

의 󰡔소창청기

(

小窓淸紀

)

󰡕에 수록된 청언을 뽑아 표현을 다듬은 것이다

.

12)

49

는 도가적 수련법과 역리

(

易理

)

를 천명해 놓은 것으로

,

도가적 수련법에 대한 내용은 중국의 도가 서적 여러 종에서

,

역리에 대한 내용은 자신의 저술에서 뽑아놓았다

.

50~52

는 「청창연담

(

晴窓軟談

)

」으로

,

우리나라와 중국의 시 및 시인을 두루 다룬 시화집이다

.

이 작품에

대해서는 문학 분야에서 일찍부터 연구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

13)

53

은 「산중독언」으로

, 1613

(

광해

5,

신흠

48

) 4

월의 계축옥사로 그가 전리방축

(

田里放逐

)

된 직후 부터 춘천으로 중도부처

(

中道付處

)

1616

(

광해

8,

신흠

51

)

가을까지 약

4

년간의 기록을 모은 것이다

.

자신이 살아오며 겪었던 일

,

역사 및 사회에 대한 평론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

54

는 「강상록」이다

. 1616

년 겨울에 유배의 명을 받고 춘천으로 떠나기까지 몇 개월 동안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서술14)한 것으로

,

중도부처에 대한 개인적 상실감

,

울분 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

55

는 「춘성록

(

春城錄

)

」으로

,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춘천 유배 시절에 이루어진 작품이다

.

주로 역사에 대 한 논평이 많다

.

57~59

는 「구정록

(

求正錄

)

」이다

.

역학을 중심으로 경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 놓은 것이며

,

12) 김은정, 앞의 글, 2010 참조. 이 연구를 통해 󰡔야언󰡕 권1의 내용이 󰡔소창청기󰡕에서 인용해 온 것임이 밝혀졌다. 13) 이규춘, 「象村詩話 硏究」,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조융희, 17世紀 前期 詩話集 硏究」,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이석우, 「申欽의 詩評 硏究」,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박수천, 「晴窓軟談의 비평 양상」, 󰡔한국한시연구󰡕 13, 한국한시학회, 2005 .

14) 날짜별로 자신의 생각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더러 날짜 없기 기록된 조목이 있기도 하다.

(5)

1595

(

선조

28)

에 틈틈이 저술을 시작하여

1620

년에 정리를 마쳤다

.

경학에 대한 논설 외에 처세에 대한 견해도 일부 보인다

.

한편 신흠은 같은 기간 동안 상수역

(

象數易

)

에 대해 특히 더 깊이 연찬하였는데

,

그 결 과가 권

60

의 「선천규관

(

先天窺管

)

」으로 묶여졌다

.

소옹의 상수역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해설한 저작으로

,

「구정록」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상의 작품 중에서 신흠의 내면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은 「산중독언」과 「강상록」

,

「야언」 등이다

.

이 세 작품은 모두 신흠의 계축옥사

(

癸丑獄事

)

경험과 관련이 깊다

.

옥사를 겪으면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현실의 처지를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애썼던 바

,

그 과정이 이들 작품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

춘천으로 유배가기 이전까지의 생활이 담긴 「산중독언」에는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해소하여 전원에서의 삶을 누리게 된 것에 대하여 즐거움을 느끼고 과거의 재앙을 자기식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

반면 「강 상록」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데 대한 깊은 상실감과 분노가 여과 없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 4

년의 전리방축으로 충분히 자신이 댓가를 치렀다고 생각할 즈음에 갑작스럽게 더 먼 춘천으로 유배를 가라는 명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

「야언」의 경우는 그것이 온전히 신흠의 창작은 아니지만

,

전원생활에서 느낀 흥취 를 잘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신흠의 내면이 잘 드러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산중독언」은 신흠의 내면 고 백

,

전원 생활의 즐거움

,

역사 평론 등이 종합되어 있는 저술로서

,

철학적 논변을 제외한 신흠의 필기 산문의 다양한 면모들이 한데 모아져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

「강상록」은 그의 내면 고백에 특화되어 있는 저술로서 의미가 깊다

.

본고에서 이 두 저술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

Ⅲ. 신흠 필기 산문의 특징적 국면들

1. 자기 서사와 진솔한 내면 고백

「산중독언」과 「강상록」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특징은 자기 자신의 삶과 현재의 처지에 대해 서술한 조목 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

문학을 개인의 감정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거칠게 이해할 때

,

필기 산문을 문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

15)

그는 「산중독언」에서 여러 차례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

때로는 과거사를 술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성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

이때 중심은 언제나

에 맞추어져 어떠한 생각을 하였고 어떻게 행동 했는지를 서술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이를 통해 개인 신흠의 인간상을 표출하였던 바

,

예컨대 다음 과 같은 조목을 들 수 있다

.

나는 본래 벼슬할 생각이 적었지만 단지 일찍 부모님을 잃었기 때문에 집안이 쇠퇴하여서 어쩔 수 15) 최두헌, 앞의 글, 21~23쪽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6)

없이 과거에 응시하여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지위가 주부(州府)에만 이르면 그칠 줄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불행히도 국가의 어려움을 만나서 안팎으로 분주히 다니다가 어물 어물하는 사이에 외람되게 육경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이도 아직 많지 않아 감히 갑자기 물러 나겠다고 아뢰지도 못하였는데, 변화가 생기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여 재앙이 연못의 물고기에까지 미 쳤다. 재앙이 비록 무망(无妄)의 것이기는 하지만 화는 스스로 만든 것보다 배나 더하였으나, 다행히 너그러운 은전에 힘입어 죄가 전리방축에만 그쳤다. 아침저녁으로 죽 먹고 술 한 잔에 시 한 수 읊으며 지팡이 짚고 산속을 다니게 된 것이 모두 성은이다. 정인홍(鄭仁弘)이 아무리 모략을 꾸며대고 이국량 (李國亮)이 으르렁대며 씹어대도 모두 중상모략할 수는 없었으니, 비로소 화복은 사람이 억지로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16)

자신이 관직에 진출하게 된 내력을 정리하면서

,

그것은 것은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음을 담담히 술회하 였다

.

이 조목에서도 운명과 재앙에 대한 그의 생각이 드러난다

.

한 편의 완결된 작품이든

,

필기 산문의 한 조목이든 간에 그의 시선은 늘 자신의 운명과 세계의 부조리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

그의 불안한 심사가 문 장에 그대로 담긴 듯

,

재앙에 대해 분석하는 문장은 억양의 기세 변화가 강하다

.

하지만 그의 기질은 어디까 지나 너그러운 포용을 중시한다

.

그는 자신이 당한 재앙이 비록 운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것 이지만 그 고통은 스스로 초래한 화보다도 심하였다고 고백하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처분이 전리방축에 그친 것은 임금

(

광해군

)

너그러운 은전

[

寬典

]’

덕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어떠한 원 망이나 울분도 표면상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있다

.

대신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앞의 세 번째 조목과 마찬 가지로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이다

.

전리방축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자신의 한적한 삶에 보다 가치를 둠으로써 그는 현재의 고난을 잊고 심리적 위안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

그는 다른 조목에서 시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삶을 회고하기도 하였다

.

어렸을 때에는 제자백가와 구류(九流)를 다 읽었고, 중년에는 예문관과 승정원을 다 거쳤다.

만년에 와서야 방축되어 전원의 촌부가 되었으니,

음식을 입에 물고 배를 두드리며 날을 보내는데 무엇이 방해되랴?

이것은 내가 입으로 읊조려 본 8언으로 실로 나의 사적이다.17)

16) 申欽, 󰡔象村稿󰡕 권53, 「山中獨言」, 한국문집총간 72, 민족문화추진회, 1991, 351, “余本少宦情, 只緣早喪父母, 門戶凋 零, 不得不拔策決科, 以紹先業, 而意謂位至州府, 可以知止. 不幸遭國屯難, 奔走內外, 逡巡之際, 濫叨六卿, 年且未暮, 未敢遽 告休致, 變起不料, 殃及池魚. 災雖无妄, 禍倍自作, 幸賴寬典, 罪止歸田. 朝昏粥飯, 一觴一詠, 杖屨林皐, 皆聖恩也. 仁弘之搆 捏, 國亮之狺噬, 俱不得以中傷之, 始知禍福不可以人爲脅致也.” 이하 󰡔상촌고󰡕의 인용은 이 책에 의한다. 󰡔상촌고󰡕의 산문은 모두 한국문집총간 72책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용시에 작품명과 한국문집총간 72책의 쪽수 만을 밝히기로 한다. ) 「산중독언」, 357.

17) 「산중독언」 5, 351, “‘少年讀盡百家九流, 中歲歷盡鑾坡鳳掖. 晩來放作田園老傖, 何妨含哺鼓腹送日?’ 此余口占八言, 實余 事跡也.”

(7)

초년의 학문 연구

,

중년의 벼슬길

,

그리고 만년에 접어든 지금의 한적한 삶을 압축하여 서술하였는데

, “

실 로 나의 사적이다

[

實余事跡

]”

라는 표현에서 그의 진실성이 느껴진다

.

그만큼이나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

필기라는 형식을 통해 그 관심을 표면화하였던 것이다

.

8

언 작품에서는 특히 전리방축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데 전체의 절반인

2

구를 할애한 점이 눈에 띄는데

,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함께 정치적 쟁점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것에 대해 만족스 러운 감정을 나타내었다

.

신흠은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다른 필기 산문 또는 한시

,

산문 등을 통해 다채롭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

내 성격은 괜찮다고 하는 경우도 적고 다른 사람과 의기투합하는 경우도 적어서, 출사하게 되면서부 터는 여름철에 밭두둑에서 밭 가는 것처럼 한 적이 없었고 또 권력을 쥔 자의 문앞에 간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관리가 된 것이 비록 빨랐지만 처음에는 매우 곤란하였다. 중년에 목릉(穆陵)의 지우를 입어 분에 넘치는 영광을 차지하였지만 계맹(季孟)의 사이에서 오가려 하지 않아 반은 휴가를 청한 상태로 있었다. 목릉께서 승하하시자 조정의 권력층이 일신하여 큰 화가 마침내 일어났으니, 다른 사람들과 투합하지 못해 생긴 피해가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나로 하여금 두레박처럼 오 르내리면서 오후청(五侯鯖)처럼 귀한 음식맛을 보게 하였더라도 역시 하지 않았을 것이다.18)

이 조목에서 신흠은 자신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회고하고 있다

.

자신의 성격 때문에 벼슬길이 편안하지 못했지만

,

그럼에도 자신은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원래 태도를 지켰을 것 이라는 생각이다

.

한편

,

「강상록」에서 신흠은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주목된다

.

이 작품은 개관 부분에서 살폈듯 그가 춘천으로 유배가는 과정을 일기 형식을 빌려 서술하였는데

, 16

조목으로 구성된 짧은 작품이지만 자신의 억울함과 울적한 심사가 별다른 여과 없이 잘 나타나 있다

.

일단 그 서문에서부터 신흠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다

.

나는 귀양가는 명령을 기다리면서 노량(鷺梁)의 강가에 잠시 와 지냈다. 온갖 욕을 다 먹고 온갖 괴 로움을 다 받으니 마치 행각승(行脚僧)이 이곳저곳 두드려 대며 끝없는 빚을 얻어먹는데 갚든 갚지 않 든 모두가 끝나지 않은 인과(因果)인 것과 같다. 어느 날에야 조계(曹溪)의 한 잔 물을 얻어 이 많은 삶 동안에 쌓였던 근심을 씻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그 괴로운 생활을 나열하여 기록해 두니 병진년 연말이다. 방옹(放翁) 씀.19)

18) 「산중독언」, 8, 352, “余性寡可寡合, 自筮仕, 未嘗作夏畦態色, 亦未嘗一跡柄人門巷. 故通籍雖早, 初甚偃蹇. 中年荷穆陵 知遇, 忝竊分外之榮, 而不欲周旋於季孟之間, 半在請急中. 及穆陵昇遐, 朝貴一新, 而大禍遽作, 寡合之害, 遂至於此. 然若使之 桔橰浮沈, 作五侯鯖, 亦不爲也已.”

19) 「강상록」 서문, 54, 357, “余以待謫命, 來寓鷺梁江上. 喫盡萬般辱, 受盡萬般苦, 如行脚僧打東打西, 飽無量債, 償了未償 了, 俱是未了因果. 不知何日得曹溪一勺水, 洗此多生宿累. 姑列其苦活爲之錄, 丙辰殘臘也. 放翁書.”

(8)

그는 스스로를 행각승에 비유하며 윤회 인과가 끝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고초를 겪는 것도 끝나지 않는 다고 하였다

.

승려의 행각은 과거의 업보를 뉘우치고 성불

(

成佛

)

하기 위한 수행의 일환이다

.

따라서 신흠이 자신을 행각승에 비유한 것은 자신의 현재 괴로움을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하 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

행각승에 자신을 비의

(

比擬

)

하지 않고서는 그 괴로움을 이겨내기가 힘들 었던 것이다

.

뿐만 아니라 춘천으로의 유배 과정을

고활

(

苦活

)’

이라고 표현한 것 또한 신흠이 느낀 괴로움이 어떠했을지를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

내가 식구들을 이끌고 강가에서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아 집사람이 딸의 혼인 때문에 서울에 들어가 고 나 홀로 강가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강바람이 사납게 불더니 새벽에 일어나 보니 강에 얼음이 들쭉날쭉 얼어 있었다. 긴밤 잠은 오지 않고 객주(客主)의 등불은 빛나는데, 마침 명원(明遠)의 편지가 있기에 읽어 보니 더욱 암담하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10년 재상을 하다 하룻저녁에 꺾여 냉 담한 생활이 되었으니 아마 쌓인 빚 때문이리라.20)

그는 가족들과 함께 있다가 딸의 혼사로 인해 홀로 남겨진 신세가 된다

.

괴로움에 고독감이 겹쳐 그의 우 울함은 더욱 극심해지는데

,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나운 겨울 바람과 얼어붙은 강물이다

.

이 와 함께 잠도 이루지 못하는 밤의 암담한 감정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면서 신흠의 우울한 감정은 극에 달하였 다

.

밝은

[

熒然

]

등불과 암담한

[

黯然

]

자신의 심정은 마치 흑백이 대비되는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더욱 슬프게 표현해주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

이 조목은 상징적인 경물 묘사와 시각적 대비를 통해 신흠 자신의 우울한 감정을 시적

(

詩的

)

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특히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신흠이 우울감에 빠져든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좌절이기는 했으나

,

노량 강가에서 지내는 동안 좋지 않은 일이 겹쳐져서 그 우울감을 더욱 심화시킨 측면이 있다

.

다음 조목을 보면 그야말로 설상가상의 상황에 처해 있는 그의 난처한 심정을 확인할 수 있다

.

강가에 열흘 정도를 머무르다가 큰딸이 나를 만나러 왔다가 작별하는데 갑자기 유산을 하는 바람에 생사를 분간하지도 못하고 침상에 누워 있게 되었다. 나는 이웃 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여관 아낙 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이를 낳아 매일밤 밤새도록 울어대니 나는 편안히 잠을 이루지도 못하였 다. 낮에는 참선하는 승려처럼 종일 벽을 마주하고 있으니, 곤액이 모이는 것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21)

큰딸은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낙태를 하고

,

큰딸의 투병을 위해 거처를 옮기자 거기에는 밤새도록 울어대

20) 「강상록」 2, 357, “余挈家來泊江上, 未幾, 家人以女婚入京, 余獨棲江上. 一夜之間, 江風驟厲, 曉起視之, 則河氷差差矣. 夜長無寐, 旅燈熒然, 適有明遠書, 看來尤黯然. 自念十年宰相, 一夕頓作冷淡生活, 豈宿債然耶!”

21) 「강상록」 4, 357, “抵江上旬餘, 長女來覲作別, 急墮胎血崩, 不分生死, 沈綿床席. 余移寓隣店, 則店婦隔一壁產兒, 每夜呱 呱徹曉, 余不得安寢. 晝則終日面壁, 如入定僧, 厄與禍會, 其至此哉!”

(9)

는 갓난아이가 있어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이다

.

몸도 마음도 편안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내는 날들 의 괴로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

이런 상황에서 그는 바깥 출입도 하지 않고 방안에서만 지내고 있다

.

결국 그는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처럼 큰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신흠의 필기 산문에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성격에 대해 설명하는 자기 서사와

,

유배를 앞둔 우울한 감정을 다양한 방법으로 형상화하는 조목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

그런데 조선 중기의 필 기 산문에서 이처럼 작가 개인이 전면에 노출된 사례를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

앞서 개관하였듯 조선시 대에는 성리학의 융성과 함께 성리학에 관한 단편적 논의들을 모은 필기 산문이 많이 나왔고

,

그밖에 역사고 증

,

학술논변의 필기 산문은 이른바 패설야담류

,

철학 및 학술논변류를 제외하면 거의 불모지에 가까웠기 때 문이다

.

결국 신흠에 와서야 비로소 필기 산문이 개인의 영역으로 견인되었고

,

이것이 이후 시기의 문인들

,

예컨대 이덕무

(

李德懋

)

등의 자전적

,

서정적 필기 산문의 창작에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22)

신흠이 이렇게 실제 창작을 통해 조선시대 필기의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송대

(

宋代

)

이후 중국 필기 산문의 일정한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주지하다시피 송대 필기에서 서정성과 소품성을 지닌 이른바

수필잡기류

필기가 등장하기 시작했고23) 이는 명대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

중 국 문예의 동향에 민감했던 신흠은 필기 산문의 이러한 변모를 다양한 경로로 인식하고 이를 실험하였다고 본다

.

한편 「산중독언」과 「강상록」을 포함한 그의 필기 산문 대부분은 정치적 몰락기에 창작되었고

,

이 기간 동안 그가 전통적 문체 대신 제발

(

題跋

)

이나 서독

(

書牘

)

등 비교적 자유로운 글쓰기를 선호하였던 점24) 등을 고려한다면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심리적 불평

(

不平

)

을 해소하려 했던 신흠의 개인적 성향 역시 필기 산문 을 통한 내면 고백의 한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

2. 전원생활을 통한 심리적 위안 도모

신흠은 방축된 기간이 길어지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

스스로를 야인

(

野人

)

이라고 생각하 며25)세속에 휘둘리지 않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려 노력하였다

.

옥사 직후의 분노와 비관26)에서 벗어나 점차 안정된 생활과 태도를 찾아가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상태에서 삶의 보람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

다음은 계축 옥사 직후로부터 안정된 주거를 정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한 조목이다

.

계축년(1613) 4월 25일 옥사가 일어나 5월 7일에 선조대왕의 유교(遺敎) 안의 인물이라는 이유로 간원(諫院)에서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는 계를 올렸다. 15일에 청평(淸平) 한응인(韓應寅)·금계(錦

22) 이덕무의 자전적 필기 창작과 관련해서는 최두헌, 앞의 글, 91~97쪽 참조. 23) 안예선, 앞의 글, 18~20쪽 참조.

24) 9년 간의 방축 및 유배 생활에서 지어진 작품 중에서 절반 가량이 제발과 서독이다.

25) 이러한 태도는 「야언」의 서문에 잘 드러난다. 「야언」 서문, 325, “田居歲久, 已作世外人. …… 其言宜於野, 可與野人言也.”

26) 분노와 비관의 정서는 주로 그의 한시 작품을 통해 표출되었고, 필기 산문에서는 「강상록」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드러낸 작품이 확인되지 않는다. 한시에 드러난 분노와 비관의 정서에 대해서는 박해남, 󰡔상촌 신흠 문학의 궤적과 의미󰡕(보고사, 2012), 200~216쪽 참조.

(10)

溪) 박동량(朴東亮)·지추(知樞) 서성(徐渻)·관찰(觀察) 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체직을 당하였다. 관 찰공은 임소에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구속되었고, 청평 이하 세 사람은 17일에 성은을 입었다. 청평, 지추 및 나는 시골로 내쳐졌고 금계는 관직에서 완전히 석방되었다. 나는 그날로 나와 성문 밖 동생 집에서 잤다. 다음날 서강을 나서 잠시 양포(楊浦)의 황회원(黃檜原) 집으로 옮겨갔으나 조정에서 바야 흐로 죄를 더하려 하여 멀리 나가지는 못했다. 몇 개월을 머물러 중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김포로 왔 다. 처음 왔을 때에는 집이 없어서 임시로 계부님의 두 칸짜리 농막에서 머물렀는데, 우리 집안 가솔들 이 많아 수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카 익량(翊亮)이 재목을 모아다가 네 칸짜리 집을 지어 그곳에서 거처하였다. 이듬해 갑인년(1614) 2월에 동양(東陽)이 공사를 시작하여 열 칸짜리 기와집을 짓고 5월 17일에 거기로 이사하였는데, 대체로 한양의 집과 비교해 보아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27)

계축옥사 직후 자신이 조정에서 죄를 입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김포에 정착하게 된 경과를 서술한 조목 이다

.

여기에서 신흠은 자신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든 바로 그 사건에 대해 서술하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 고 시종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태도에서 그의 곤궁한 처지는 더 부각되 고 있는데

,

이는 주로 대상의 선택적 서술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달성되었다

.

날짜와 함께 한두 구절 정도로 짧고 빠르게 묘사되는 사건들

,

일국의 고위 관료였지만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모습

,

고 향에 도착해서는 거주할 집 한 칸이 없어 임시 거처에서 반 년 넘게 지내는 모습 등에서 우리는 언표

(

言表

)

에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몸과 마음이 모두 피로해져 있는 작가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

유일하게 그의 개인적 견해가 드러나는 부분은 마지막에서 새로 지은 집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는 부분 이다

.

앞에서 그간의 어려운 생활을 비교적 길게 묘사해 놓고

,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주관적 견해

,

그것도 긍정적인 생각이 피력되었다

.

여기에 와서 독자는 작가가 옥사로 인해 힘든 생활을 해왔지만 그래도 마지막 에는 사정이 그나마 나아졌다는 점에서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

짧은 한 문장이지만 이 조목 전체의 분위기를 일시에 전환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

이 부분에서 극단을 배격하고 중도

(

中道

)

를 지향하는 신흠의 태도가 읽혀진다

.

그가 좀더 강성

(

强性

)

,

어떤 도덕적 청정함을 극단까지 추구하는 인물이었다면 자신의 정의가 무너져 육체적 고통까지 겪게 되는 상 황에서 태연하게 거처가 조금 나아진 것을 가지고 만족스러운 견해를 피력했을 것으로 기대되지는 않는다

.

오히려 자신의 억울함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거나

,

아니면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전면에 내세웠을 것이다

.

그러나 신흠은 그런 강한 태도 대신 그간의 힘들었던 일들을 거처의 개선과 바꾸어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한다

.

그리고 그러한 긍정적인 태도에서 「산중독언」에 실린 수많은 사색 의 편린들이 생산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차츰 생활이 안정을 찾아 가자 그는 집 근처에 정원을 꾸미고 그곳에서 한가로이 여가를 보내려 하였다

.

27) 「산중독언」, 1, 351, “癸丑四月二十五日獄起, 五月初七日, 以宣祖大王遺敎中人, 諫院啓請削去仕版. 十五日, 與韓淸平應 寅·朴錦溪東亮·徐知樞渻·韓觀察浚謙, 同被逮. 觀察公在任所故追繫, 淸平以下三人, 十七日蒙恩. 淸平·知樞及余放歸田 里, 錦溪全釋. 余卽日出宿門外舍弟家. 翌日出西江, 俄移楊浦黃檜原家, 朝廷方欲加罪, 不得遠出. 淹數月, 至中秋, 始來金浦. 初到無室廬, 僑寓季父農幕二間, 余家累多, 不得容, 姪翊亮鳩材立四間宇處之. 明年甲寅二月, 東陽孱功, 造瓦舍十間, 五月十七 日移寓, 蓋不羨京師甲第矣.”

(11)

집 남쪽에 작은 골짜기가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잡목뿐이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맨 먼저 이 잡목들을 치워 없애고 나서 섬돌도 쌓고 연못도 팠는데, 병진년 봄에는 그 시내 위에다 자그마 한 초옥(草屋) 한 칸을 올려 세웠다. 비록 보잘 것은 없지만 나로서는 시를 읊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 이 되기에 충분하였는데, 이 뒤로는 세간에 대해 일삼는 것이 다시 없게 되었다.28)

억울한 누명을 쓰고 관직에서 쫓겨난 다음에야 그는 평소 소망하던 한가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

하지만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신흠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 고 한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그 사실 하나이다

.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정취는 더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

이 조목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

잡목을 치우고 섬돌을 쌓고 연못을 파고 한 칸짜리 띠집을 세운 것 등 세세한 부분들을 하나하나 나열했다는 점이다

.

내용상으로 핵심적인 것은 자신이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했다는 것이지만

,

그 주변부 사실에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서술했다는 점에서 대상의 주변부 에 더 관심을 가지는 소품문적 특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

한편으로는 신흠이 「야언

(

野言

)

」에 선록해 놓은 청 언소품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

독자는 작가의 서술을 하나 하나 따라가면서 그가 지은 집과 그 주변 풍 경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게 되며

,

그렇게 머릿속에 그려진 풍경을 통해 문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묘한 정취 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다음 작품은 한층 더 고즈넉한 전원생활의 풍치

(

風致

)

를 느끼게 해준다

.

새로 작은 띠집을 얽고서 산속 깊은 계곡에서 여름 녹음이 사방에 드리워졌는데 멀리 포구는 눈앞 에 가득하다. 종일 홀로 앉아 오직 날아가는 꾀꼬리 소리만 듣고 있다. 입으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그림같은 녹음은 뜨락 섬돌 가렸고 난간 바깥 강물빛은 푸른 하늘에 일렁이네 성은이 하늘과 바다처럼 큰 것 얼마나 다행인가? 귀양와 오히려 전원의 삶 다시 얻었네.

또 율시 한 수를 읊었다.

띠집에 물 뿌리고 청소하니 상쾌하고 편안하여 갈건 쓰고 검은 안석에 앉으니 한가로워라 제비새끼가 물어간 깨끗한 진흙 움푹하고

오리 병아리 목욕 마친 푸른 물결 둥글게 파문이 이네 한 골짜기에서 이미 만년의 계획 온전히 이루었고

28) 「산중독언」, 3, 351, “家之南有小洞, 荊榛極目. 余來始鋤治之, 砌之沼之, 丙辰春, 刱小茨於溪上, 雖陋足以舒嘯偃息, 自 此無復事於世間矣.”

(12)

여생은 오직 장년을 즐겨 보존하리 해산도솔은 모두 헛된 말

이곳에 조용히 살면 그게 바로 땅의 신선이라네.29)

역시 「산중독언」의 한 조목으로

,

띠집에서 여름을 보내는 작자의 느긋한 모습을 눈앞에서 보이는 것처럼 묘사해냈다

.

깊은 산속 골짜기 안

,

녹음이 드리워진 띠집에 하루종일 혼자 앉아 있는 작자는 무엇을 생각하 고 있을까

?

바로 이 순간만큼은 그의 머릿속에 근심이나 걱정이 들어올 틈이 없을 것이다

.

이는 마치 󰡔장자

(

莊子

)

󰡕에서 이야기하는

좌망

(

坐忘

)’

의 경지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

그렇게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을 무렵 어 디선가 꾀꼬리 우는 소리가 긴 침묵을 깨고 들려온다

.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온 작가는 그 조화로운 경계를 잊고 싶지 않아 곧바로 붓을 들어 두 수의 시를 연달아 써낸다

.

산문 부분과 시 부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전원생활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다

.

이것이 바로 신흠이 소망하던 전원생활의 진면목에 다름아닐 것이다

.

이 역시 청언의 정취를 풍기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

한편 이 조목은 산문으로는 충분히 표현해 낼 수 없는 작가의 정서를 시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점도 주목 된다

.

신흠은 시와 산문의 문체적 특성을 충분히 인지하고서 필요한 부분에서는 과감히 이들을 교직

(

交織

)

하 여 구체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

이는 산문 양식이 작가의 깊은 정서를 표현하기에 부족함 이 있었던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삽입시의 도입은 필기 산문의 표현력을 한층 더 확장시키고자 하는 의도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

삽입시가 일반적으로 소설이나 기행문학 등 에서 주로 활용되는 기법임을 고려해 볼 때

,

필기에서의 이같은 시도는 충분히 그 의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고 생각된다

.

3. 역사 논평을 통한 우회적 현실 비판

위와 같은 긍정적인 인식 전환에도 불구하고 신흠의 억울함과 분노는 쉽게 사그러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 다

.

그는 전원 생활을 통해 나름의 만족을 얻는 한편으로

,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사색을 지속하면서 현실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다져 나아갔다

.

신흠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지만 그것은 운명에 의한 것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숙명론적 사유를 지닌 인물이다

.

이점은 다음 조목에서 확인된다

.

화(禍)가 자신에게서 말미암지 않은 것을 소자(邵子)는 화라고 하지 않고 재(災)라고 하였다. 재와 화의 사이는 머니, 군자는 그것을 조심스러워한다.30)

29) 「산중독언」, 6, 351, “新構小茨, 在山中深谷, 當夏綠陰四垂, 遠浦極目. 獨坐終日, 唯聞流鶯送聲, 口占一絶: ‘綠陰如畫罨 庭除, 檻外江光漾碧虛. 何幸聖恩天海大? 謫來猶得返田廬.’ 又占一律: ‘瀟洒茅茨愜淨便, 葛巾烏几坐蕭然. 銜來燕子晴泥凹, 浴 罷鳧雛碧浪圓. 一壑已專成晩計, 餘生惟喜保長年. 海山兜率俱虛語, 卽此幽居是地仙.’”

30) 「산중독언」, 26, 354, “禍非由己者, 卲子不謂之禍, 謂之災. 災與禍之間, 遠矣, 君子愼之.”

(13)

그는 소옹

(

邵雍

)

의 견해를 인용하여 자신이 초래한

와 자신이 초래하지 않은

를 구분하여 말하였다

.

이 조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흠의 화복관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

다음 작품을 보자

.

“무망(无妄)은 성인의 일인데 어째서 재앙이 있으며 성인에게도 재앙이 있는가?”라고 하니 말하기 를, “성인이기 때문에 재앙이라고 한다. 재앙이란 자신이 초래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말 하기를, “자신이 초래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재앙이 오는가?”라고 하니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재앙이 올 일이 없는데 재앙이 온 것은 사정이 변해서이다. 󰡔주역󰡕은 그 변화를 헤아린 책이다. 변화는 중세 에도 면하지 못하였는데 하세(下世)는 어떠하겠는가. 연못의 고기가 재앙을 당한 것은 성문의 불 때문 이었고, 한단(邯鄲)이 포위를 당한 것은 노(魯)나라 술이 싱거웠기 때문이었고, 문왕이 유리(羑里)에 갇힌 것은 구후(九侯)가 다투었기 때문이고, 공자가 진(陳)에서 포위당한 것은 양호(陽虎)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앙이 이르러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성현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재앙이 와도 요행히 면하는 것은 성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초래한 것은 화라고 한다.”31)

이 작품은 신흠이 계축옥사로 인해 방축된 이후 춘천으로 유배되었을 때 지어진 작품32)으로

,

󰡔주역󰡕 무망 괘

(

无妄卦

,

)

육삼

(

六三

)

의 효사에

무망의 재앙은 혹 소를 묶어두었는데 길 가던 사람이 얻으니 고을 사 람이 재앙을 당한다

(

无妄之災

,

或繫之牛

,

行人之得

,

邑人之災

).”

33)라는 구절 중

무망의 재앙

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 것이다

.

그는 이 작품에서

,

인간이 삶에서 겪게 되는 고난을

로 구분하여

,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

자신에게 있지 않는 것을

라고 규정하였다

. ‘

의 경우는 스스로가 초래하지 않았는데도 어쩔 수 없 이 자신에게 닥친 것이기 때문에 고난이 닥친 것에 대해서 책임 의식을 느끼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

그러나

의 경우는 현명하게 대처하면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간 스스로 초래한 것이기 때문 에 그에 대해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

그리고 이러한

무망지재

가 인간에게 닥쳐오는 까닭은 사정이 변하였기 때문인데

,

이를 궁구한 책이 바로 󰡔주역󰡕이라고 하여 󰡔주역󰡕을 통해 재앙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

그가 인간의 고난을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 파악한 데에는 창작 당시 자신의 처지가 반영되어 있다

.

신 흠이 관직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된 계축옥사는 주지하다시피 대북파

(

大北派

)

가 소북파

(

小北派

)

를 축출하기 위해 날조해 낸 역모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잘못 없이

10

여 년 동안 고초를 겪어야 했다

.

그의 입장

31) 「무망지재설」, 33, 186, “无妄, 聖人之事也. 曷爲有災, 聖人亦有災乎? : 聖人故言災. 災者, 不自我之謂也. : 不自我, 則何以値災? : 不當災而災, 事之變也. 易慮其變, , 中世所不免, 況下世乎? 池魚殃, 城門火也; 邯鄲圍, 魯酒薄也; 文王羑, 九侯爭也; 仲尼陳, 陽虎似也. 故災至無愧, 聖賢之所能, 而災而幸逭, 非聖賢之所能. 其自我者, 謂之禍.”

32) 이 작품은 續稿에 속한 것이며, 그가 춘천으로 유배되어 있던 1617(광해 9)~1621(광해 13) 사이의 창작이다. 신흠,

󰡔象村稿󰡕 卷首, 「象村稿自序」, 한국문집총간 71, 민족문화추진회, 1991, 263, “自丁巳春至辛酉春五年之作四策爲續稿, 在纍所著.”

33) 朱熹는 이에 대해 육삼효는 양효의 자리(3)에 음효가 있으므로 正을 얻지 못했고, 그 때문에 무고하게 화를 당하게 되 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周易傳義󰡕 권10, “卦之六爻, 皆无妄者也. 六三, 處不得正, 故遇其占者无故而有災, 如行人牽牛以 去, 而居者反遭詰捕之擾也.”

(14)

에서 계축옥사와 그에 따른 자신의 실각은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거짓을 꾸며내는 대북파에게 있었다

.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억울함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

문제는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식하여 지금의 처지를 극복해 내는 것인데

,

그 근거를 바로

󰡔주역󰡕

무망지재

에서 찾았던 것이다

.

그에게 닥친 재앙은

가 아니라

였고

,

구체적으로는

무망지재

’,

즉 무고하게 당한 재앙이었다

.

34)무고하게 당한 재앙 앞에서 문왕이나 공자 같은 성인들은

부끄러움이 없이

[

無愧

]’

당당하게 맞섰고 요행

[

]

으로라도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았다

.

따라서 신흠 또한 이와 같은 자세를 본받아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무망지재

를 철학적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겠다는 자세를 이 작품에서 담아내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산중독언」을 통해 과거 역사 인물들에 대하여 나름의 논평을 가하 였다

.

한비자(韓非子)는 「세난(說難)」 편을 지었지만 유세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는데, 스스로 불러들인 것 이다.35)

혜강(嵇康)은 양생술을 하였지만 화를 당하였는데, 외부에서 스며든 것이다.36)

두 조목에서 연이어 인물 논평을 하면서

,

한 사람은 자신의 화를 자초하였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외부에 서 초래된 것이라고 보았다

.

한비의 경우는 유세의 어려움을 역설하였으므로 그 자신이 유세를 피할 법도 한 데 그러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한나라를 위해 진나라에 갔다가 죽임을 당한 경우이다

.

다시 말해 머리로 는 알고 있지만 직접 실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앙을 당했으며

,

이는 자초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

반면 혜 강의 경우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정치 현실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화를 당했다고 보 았다

.

신흠은 이 두 가지 경우 중에서 후자를 택하였다

.

즉 자신은 불가항력에 의해 지금과 같은 화를 당했고

,

자기 자신은 그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떳떳하게 지금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

하지만 현실은 항상 정의가 승리하지는 않고

,

오히려 악인이 편하게 살고 선인이 힘들게 사는 경우가 더 많다

.

신흠 역시 이점에 의문을 품었고

,

여러 지면을 통해

천도

(

天道

)’

내지는

(

)’

의 역할 내지는 의미에 대하여 부정적인 언급을 남기기도 하였다

.

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흠은 천도에 의해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선한 자는 보답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인물 논평을 통해 드러내었다

.

다음 조목을 보자

.

34) 신흠이 계축옥사를 무망지재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다음 예문에 명시되어 있다. 「耕餘錄序」, 21, 12, “癸丑夏, 余遭無 妄之災, 幸賴天恩, 放歸田里.”

35) 「산중독언」, 24, 354, “韓非說難而死於說, 自致之也.”

36) 「산중독언」, 25, 354, “嵇康養生而及禍, 外之鑠也.”

37)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 수 있다. 「秋浦黃公哀辭」, 29, 136, “所謂天道者非耶, 是耶? 其可恃耶, 其不可恃耶? 其有定乎, 其無定乎? 或定於一世, 或定於千百世, 雖未嘗不定, 而其定也不一, 欲俟其定而賢者之骨朽矣. 其如天何哉, 其如天何哉!”; 「寄淸 陰」, 34, 203, “古人雖曰樂天知命, 亦恐此強言也. 吾輩之事, 縱使古人當之, 有不暇樂焉, 知焉也.”

(15)

심정(沈貞)은 김안로(金安老)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들 사순(思順) 역시 사형을 당하고 아들 사손(思 遜)은 오랑캐에게 살해되었는데, 모두 천도(天道)이다.38)

심정

(1471~1531)

은 중종반정의 공신이었으나 남곤

(

南袞

)

등과 함께 김공저

(

金公著

)

등을 제거하기 위한 옥사를 일으켰다가 조광조 등의 인물에게 소인으로 지목되었다

.

그는 특히 조광조에 대한 원망이 심하여

1519

년에 남곤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사되었고 이후 로도 신원되지 못했던 인물이다

.

신흠은 심정이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안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

그 자식들 역시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하여 천도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

이와 함께 기묘 사화로 희생된 인사들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지고 남곤과 심정이 사후에라도 벌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안도의 심정을 드러내었다

.

39)

한편

,

중국의 역사를 대상으로 한 평론에서도 그는 천도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피력한다

.

조방(曹芳)이 사마자원(司馬子元)을 만난 것은 산양(山陽)이 맹덕(孟德)을 만난 것과 같으니 하늘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40)

조조

(

曹操

)

가문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위나라를 세운 것은 사마사

(

司馬師

)

가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진

(

)

나라를 세운 것과 같다는 것인데

,

다시 말해 남의 것을 빼앗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 그의 것을 빼앗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논리이다

.

그리고 그러한 논리의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천도

(

天道

)

에 대한 긍정이 다

.

즉 신흠은 일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천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나 양심에 맞는 올바른 방향으 로 행동해야 함을 은연중에 주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소식

(

蘇軾

)

에 대한 논평에서는 좀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구체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증명해보이고 있다

.

소장공(蘇長公)은 원우(元祐) 초년에 관각에 들어갔다가 소성(紹聖) 갑술년(1094, 철종 9)에 거친 남쪽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관직에 있던 9년 동안 장돈(章惇)이 등용되어 시대 상황이 크게 변화하였 는데, 왕안석(王安石)을 공무(孔廡)에 제사지내고 정자(程子)의 문자를 훼손시키고 원우당비(元祐黨碑) 를 새기더니, 선인태후(宣仁太后)를 추폐(追廢)하려다가 그렇게 할 수 없자 선인태후의 지원을 받았다 는 이유로 맹후(孟后)를 폐하였다. 이는 큰 것들이고 나머지 나라를 병들게 하고 정직한 사람을 질시한 것은 한두 가지로만 헤아릴 수가 없다. 이렇게 하기를 7년만에 장돈은 패하여 끝내 장공이 유배되었던

38) 「산중독언」, 13, 352, “沈貞爲金安老所殺, 子思順亦死於刑, 子思遜爲胡人所殺, 皆夭道也.”

39) 「산중독언」, 11, 352, “己卯之禍, 罹擯斥者至癸巳稍解, 丁酉益解, 仁廟卽祚而大解, 會仁廟崩而未盡伸雪. 至穆陵初載, 始 廣霈伸枉之典, ·貞削職於地中, 而靜庵以下諸賢次第褒贈, 蓋近六十年矣. 所誅褒, 皆泉壤, , 其悲矣. 然亦可以少慰志士之 懷矣.” 신흠은 다른 한편으로 신원이 너무 늦어진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 주기도 한다. 「書己卯黨 籍後」, 36, 225, “先生歿二十七年, 仁廟卽位, 稍伸其枉. 四十九年而宣廟卽位, 始大雪其冤, 褒贈其身, 錄用其後, 追削神 武之徒, 次第揭行, 而歲殆周一甲子矣. 其如善人之旣骨何?”

40) 「산중독언」, 21, 353, “曹芳之遇司馬子元, 猶山陽之遇孟德, 不可謂無天也.”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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