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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對象關係와 對人關係
李 炳 郁*
Freud’s Object Relations and Object Relationships Byung-Wook Lee, M.D.*
머 리 말
정신분석은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은 낯선 방문객으로 다가왔다. 아니 단순히 낯설다기보다 오히려 매 우 위험한 이방인의 침입으로 여겨졌다는 것이 솔직한 심 정이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서구사회에서 비천한 신분으 로 간주되고 업신여김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주도한 학문이 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서구인들의 선입견은 오늘날에 와 서도 손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대인들에 대한 서구인 들의 혐오감은 그 뿌리가 매우 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이 면에는 종교적인 이유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보인 뛰어난 천재성에 겁을 먹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동시에 집단적 선망이 밑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신분석을 창시한 프로이트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감 정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정신에 관한 수많 은 이론들이 이론가 자신의 심리적 배경에 기초하는 수가 많 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병욱 2001). 프로 이트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정신분석 이론은 물론 완벽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 과했을 따름이다. 그의 인류에 대한 공헌은 오랜 자기 기만 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서를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확립한 이론적 무기가 프 로이트 자신에게로 되돌아 올 수 있음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매우 신중한 처신으로 일관하는 모습 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공개적 노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삶을 통해 그를 중심으로 벌어진 수많은 논란들과 온갖 잡음들은 물론 그와 관계한 인물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의 문제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저자는 프로이트가 보여준 다 양한 대인관계의 문제들이 결국 그 자신의 대상관계와 밀 접한 연관이 있음에 주목하고 그 심리적 배경을 추적해보 고자 한다.
프로이트의 대상관계
프로이트가 태어난 1856년은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무 너진 구질서의 체제를 복원시키려는 노력과 더불어 불가피 한 변화의 조짐들이 유럽 대륙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 기도 했다. 그러한 변화들 가운데 하나로 유대인에 대한 정 책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유대인 에 대한 사회적 문호를 개방하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게토 에서 해방되었으며 따라서 특히 동구에서 비참한 생활을 영 위하던 유대인들의 집단적 이주가 활발해진 시기이기도 했 다. 그 가운데 프로이트 일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로이트 의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 아말리아는 프로이트를 낳은 후 양모사업의 불황으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결국 그들이 살던 모라비아 지방을 떠나 라이프치히를 거쳐 마지막으로 비인 에 정착했다. 야곱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아말리아는 비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이었으나 매우 헌신적으로 자녀들을 키웠다. 그녀는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어떠한 고 통도 감수할 수 있는 기초가 이미 몸에 배어있던 여성이기 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 교육에도 힘을 쏟아 사회적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도 매우 컸던 여성이었다. 그 녀는 특히 장남 프로이트에 기대를 걸었다. 따라서 그녀의 아들에 대한 정성은 매우 지극한 것이었다. 이처럼 어머니 의 과잉보호 속에 성장한 프로이트는 일생동안 그런 어머 니와 한 번도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사망 시기를 전후하여 자기 분석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견했 다. 물론 프로이트의 다양한 이론적 발견들이 모두 그의 자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Psychiatry, College of Medicine, Hallym Univer- sit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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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분석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 후에도 죽을 때까지 자기 분석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Anzieu 1986). 프로이트는 부친살해욕구와 근친상간적 욕구 등을 중심으로 오이디푸스 갈등이론을 전개시켰지만 그 주된 핵 심은 부자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모자관계는 등한 시한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은 프로이트 자신의 모자관계가 그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조 기 모자관계에 대한 집중적인 탐색은 그의 뒤를 이은 클 라인에게 손을 넘겨야 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을 탐색한 Wallace(1978) 역시 부자 갈등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Krull(1986)은 프로이트가 유혹설을 포기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내세운 것도 아버지의 사망 후에 그가 죄의식 을 느낀 결과 아버지를 용서해주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 제로 서구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특히 아동에 대한 성폭 행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유혹설을 포기한 프 로이트에 대해 Masson(1984)이 가한 비판은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Klein(1964)은 조기 모자관계에서 벌어지는 유아적 환 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편집성 입장과 우울 입장을 설 명하고 가장 원초적인 방어기제로서 분리와 투사적 동일시 의 작용을 말했다. 그녀는 부자 중심의 심리학을 모자 중심 의 심리학으로 대체했으며, 프로이트의 남근 중심 이론에 서 유방 중심 이론으로 과감한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그리 고 Fairbairn(1990)은 유아기에 형성된 내적 대상과의 관 계가 일생동안 지속됨을 강조하고 유아의 내면에서 일어나 는 내적 대상에 대한 반항의 결과를 설명했다. 그리고 프로 이트가 말한 이드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아의 핵심적인 구조 형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더 나아가 Winnicott(1965)는 아 동의 홀로서기가 가능해지는데 있어서 조건없는 모성적 보 살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으며, Bion(1957) 은 상징사고의 형성이 인격형성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라 강 조하고 특히 어머니의 보유기능을 통한 유아의 건전한 심 성 발달에 대해 논하였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대상관계는 과연 어떠했을까 궁금 해진다. 아버지라는 제 3자의 개입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기 에 프로이트는 어머니로부터 각별한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성 장해나가는 시기동안 정서적으로 항상 굶주려 있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 후 자기분석을 통해서도 그러한 문제들을 적 절히 다루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Breger(2000)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사업을 돕
느라 아기를 보살필 여유가 없었으며 자신이 부재중일 경 우에는 주로 체코인 여성에게 아기를 맡기고 다녔다는 것 이다. 이후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자신의 꿈에 나타 난 세 어머니에 대해 수차례 언급한 것도 결국은 자신의 어머니와 체코인 유모, 그리고 당시 자주 드나들었던 이복 형 에마누엘의 부인 마리에 대한 혼란스런 기억 때문이라 는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 소꿉동무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두 조카들과 주로 어울렸는데 이 남매는 존 과 폴린으로서 이복형인 에마누엘의 아이들이었다. 복잡한 가계 구도의 배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어린 프로이트로 서는 이 시기가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그가 보인 다소 편집증적이고 염 세적인 경향뿐 아니라 과도한 끽연은 구강기에 속하는 조 기 모자관계에서의 욕구불만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담배와의 관련에 있어서 Grimbert(1999)는 프로이 트의 죽음에 대한 친화성을 언급했다. 일종의 위험한 불장 난인 동시에“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식의 막연한 두려 움을 그가 즐겼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금기를 넘나들며 자 신에게 주어진 심적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무도 다가가 본 적이 없는 낯선 무의식세계를 탐색하고자 했던 프로이트 에게는 담배야말로 유일한 위안자요 독창적인 사유를 촉진 시켜주는 자극제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줄기찬 흡 연은 결국 그에게 구강암, 정확히 말해서 턱암이라는 불치 병을 선사하고 말았다. 당시 프로이트 자신은 다소 반어적 인 표현이긴 하지만“반가운 종양”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 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친 불치병의 시련 자체보다도 금연 을 해야 된다는 사실에 더욱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그는 자신의 자아를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모습의 프로이트를 빈정대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 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세 개의 구멍들, 즉 입과 항문, 성기 만을 애지중지하다보니 코담배를 피우는 또 다른 콧구멍의 존재를 프로이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조롱하는 사람 도 있다. 심지어는 수십 번의 수술로 프로이트에게 고통을 안겨준 구강암의 존재도 그의 구강기 경험과 무관치 않다 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든 대상관계가 조기 모자관계만을 의미하는 것 은 아닐 것이다. 내적 대상에는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자라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의미 있는 인물 들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무 의식세계란 과거 무의식뿐만 아니라 현재 무의식도 포함하 는 매우 광범위한 개념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이 생후 1년 안에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클라인의 이 론이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대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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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 그런 의미에서 포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프로이트의 가족관계
프로이트는 일생동안 대가족사회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 안에서 마치 왕자 같은 대접을 받고 성 장했다. 그것은 유대가정의 오랜 전통이기도 했다. 장자 위 주의 모든 일처리는 특히 집안일의 대소사를 주도하는 어 머니에 의해 조장되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강력 한 힘을 지닌 권위적 존재로서 부각될 뿐 실질적인 권한은 어머니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남성본위의 전통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성장한 프로이트는 당연히 그 시절 모든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러한 의식이 프로이트 이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박을 당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신분석분야만큼 많은 여성 들을 포용했던 학문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여성들의 사 회적 진출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당시로서는 그토록 많은 여 성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수많은 이론적 대가들을 키워낸 정신분석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학문 풍토를 이미 확립하 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트 자신도 많은 여자 형제들, 딸 들과 동고동락하며 살았기에 여성을 폄하하는 시대적 분위 기속에서도 많은 여성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보일 수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
Gay(1988)는 프로이트가 자기분석에 몰두했을 때 한동 안 그를 사로잡았던 주제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특히 어린 시절 프로이트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도록 만들었던 복잡한 가족환경을 예로 들었다. 이복형 에마누엘과 그의 아들이 자 유일한 소꿉친구였던 존, 그리고 외관상으로는 할아버 지 같은 아버지의 존재, 또 다른 이복형 필립에 대해 느낀 젊은 아버지의 이미지,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 아말 리아, 여동생 안나를 낳았을 무렵 한 침대를 사용하는 부모 의 모습을 목격한 사실 등등이 그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일 들로 비쳐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살 아래인 동생 율리우스에 대한 분노와 시기 심과 더불어 그가 얼마 살지 못하고 곧바로 죽은 사실 때 문에 그리고 동생이 죽기를 바라던 소망이 현실로 나타났 다는 점에서 그가 죄의식을 느꼈다는 주장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로이트의 주관적인 추론 에 입각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당시 한 두 살에 불과했던 시기에 겪은 감정을 스스로 다시 회상해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단서는 제공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것은 동생 자체 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어머니를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 는 두려움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 신만을 돌봐주어야 한다는 어머니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그 만큼 강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Breger(2000)는 율리 우스를 잃고 난 후 상심과 실의에 빠진 어머니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실로 인해 프로이트가 받았을 심리적 좌절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그 이후로도 곧바로 누이동생 안나가 태어남으로써 비슷한 감정 상태를 반복 경 험해야만 되었다. 그 후 성장하면서 율리우스를 제외한 나 머지 여섯 명의 동생들은 모든 것을 장남 프로이트에게 양 보해야 되었다. 그러나 집안에서 그런 장남 우대는 너무도 당연시되었으며 별다른 형제간의 갈등이나 반목의 징조는 보이지 않은 것 같다. 그에 대한 대가로 프로이트는 집안일 의 대소사에 간여해야 했으며 장자로서의 심적인 부담감은 물론 집안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책임감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열정적인 구혼 과정을 거쳤지만 그의 부부관 계는 매우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모습을 띄웠다고 할 수 있 다. 부인 마르타는 연이어 육남매를 낳고 기르느라 쉴 틈조 차 없었으며 몸도 많이 쇠약해졌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마 르타에 대한 열정도 식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 각한 불화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는 오히려 자유방임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Freud 1983).
자녀들의 교육과 뒷바라지는 오로지 마르타의 몫이었다.
고부간의 갈등도 특별히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홉 식구 라는 대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 맡고 있었다는 점과 정신 분석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확립과 보존, 발전에 고심해야했 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가족들에 대해 일일이 세심한 신 경을 쓸 여지조차 없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잔정이 없다는 평을 들을 만큼 자상한 가장으로서의 오붓한 모습을 가족들과 공유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많은 자녀들 가운데 성격적 으로 잘못 비뚤어진 사람이 나온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오히 려 매우 평범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형제들 간의 우애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가족들 간의 노골적인 불화나 갈등은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오랜 핍박과 시련을 겪으며 살아온 유대인 특유의 생존방식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가족 간의 화목과 유대 야말로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 한 피난처요 안전지대였기 때문이다. Gilman(1986)에 의 하면, 오랜 기간 개종과 동화의 압력에 시달려온 유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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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의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은밀한 방식들을 개발해 냈는데, 그것은 유 대인 특유의 이중적 언어사용법, 침묵의 사용, 기록의 중요 성, 자기 증오의 방식, 인내심의 발휘 등을 통하여 자신들 의 생존을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프로이트 일가도 이러한 생존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 에서 Gay(1987)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유대적 정체성을 거 부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외부 적으로만 침묵과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을 뿐 실제로는 시오니즘이나 유대주의에 내심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가족의 생존과 안전 및 학문의 보존이 더 욱 시급한 과제였기에 잘못 처신하면 화가 미칠 수도 있는 민감한 정치적 문제만큼은 일체 관여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가족사회에서 태어나 일생동안 대가족을 이끌며 살았 던 프로이트는 학문적으로도 국제적 규모의 학회라는 대가 족을 이끌며 고군분투했다는 점에서 대가족과 더불어 사는 데 매우 익숙했던 인물이었으며, 더 나아가 항상 자신이 그 어떤 큰 집단의 리더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나르시시즘적 욕구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기보다 지키는 일에 더욱 고심했으며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룩한 학문적 성취와 업적을 보존하고 유지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 했던 것이다. 반면에 그는 자신에 반대하는 이견에 결코 용 납하지 못했으며 가족들에 대해서도 매우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것은 자신이 항상 옳다는 아집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유아적 전지전능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 러나 그에게 그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정신분석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대인관계
내적 대상관계는 모든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대인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순탄 치가 않았는데, 이는 곧 그 자신의 내적 대상관계가 원만하 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프로이트가 보여준 환자들과의 관계, 동료 및 제자들에 대한 태도 등을 보면 이율배반적인 요소들이 매우 강하게 풍기는 측면들이 적지 않다. 그의 대인관계에는 항상 시기와 의혹, 경쟁과 아 집, 편애와 제거라는 단어들이 뒤따랐다. 그에게는 이상하 게도 변함없는 우정이나 친밀 관계의 지속이 허용되지 않 은 것이다. 브로이어, 플리스, 융과 아들러 등을 포함해 수 많은 제자들과의 불화 등을 통하여 그는 고립을 자초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주로 여성들로부터 위안받고자 했다. 물
론 그중에서 가장 든든한 위안자는 평생을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켜준 딸 안나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가 죽기 직전 마지막 던진 말도 안나를 찾는 내용이었던 것이다(Schur 1972).
프로이트의 결코 순탄치 못한 대인관계는 물론 그 자신 의 성격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유달리 엄격한 초자아 및 매 우 억제적인 자아로 인해 더욱 강화된 모습을 띄었으며, 그 런 점에서 Breger(2000)가 이해한 프로이트의 대인관계는 매우 고집스럽고 냉담하며 때에 따라서는 잔인할 정도로 폭군적이었다는 것인데, 그 단적인 예로 자신이 받아들인 양자들, 다시 말해서 아들러, 융, 랑크, 페렌치 등의 제자들 을 가차없이 제거한 것은 그 자신의 전도된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행동화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 트가 겪은 학문적 좌절이나 제자들과의 불화도 그 배경을 알고 보면 당시 비인의 보수적 풍토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의 타협할 줄 모르는 완고한 사고방식 및 사람들을 다루는 그의 독특한 대인방식에 의 한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성공에 대한 강한 집착과 열망으로 초조해있던 프로이트에게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준 당시 학계의 배타적인 보수성은 그 후 모든 대학들에 대한 그의 적대적인 태도와 결코 무관할 수 없으며, 백 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수직이 아닌 순수 개업의로서 프로이트처럼 새롭고 방대한 학문체 계를 이룩했다는 사람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에 필적 할만한 인물로 융이 있지만 그는 스스로 교수직을 그만둔 것이었으며, 또한 대학으로부터 배척당한 경험도 전혀 없 다. 프로이트 자신은 스스로를 독일인이라 여겼지만 그것 은 그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 던 것이다. 그는 일개 비천한 유대인에 불과했던 인물로 비 쳐진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치료했던 대다수의 환자 들도, 그리고 그를 따랐던 수많은 제자들도 거의 모두가 유 대인들이었기에 그 후 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유대심 리학으로 규정짓고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 아리안 심리학과 구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에 대한 그와 같은 평가 절하는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힘을 얻고 있다. Roazen (1992)이 묘사한 프로이트와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 진 반목과 불화의 모습들은 오로지 각자의 이해관계에만 집 착한 유대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추잡한 이전투구와도 같은 매우 부정적인 인상만을 심어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는 프로이트를 지나치게 우상시하고 그에 대한 신비화 작 업에 선구적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는 Jones(1956)의 프로이트 전기도 그의 실제 모습에 다가서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오히려 매우 공정하고 중립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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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에서 프로이트를 조명했던 Wollheim(1981)이 더 큰호소력으로 다가온다. 그는 프로이트야말로 끝까지 인간의 이성을 믿었던 합리주의자로서 무책임한 낙관론을 매우 경 멸한 사람이었으며, 결코 인간성을 사랑한 인물은 아니었 지만 그러나 지구상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 못지않게 인간 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던 인물로 기억되는 동시에 인간의 선함에 대한 증거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풍성하게 인간 정신의 풍요로움과 신 비함을 캐내는 성과를 올린 것으로 평가했다.
1. 프로이트의 동성관계
정신분석의 초기 역사는 새로운 분야의 개척에 종사한다 는 점에서 그만큼 과도한 열정과 흥분으로 점철된 시기였 다. 그로 인해 벌어진 내부적 갈등과 반목, 그리고 숱한 잡 음과 시기심 등은 그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프로이트는 외 부적으로 가해지는 압력 뿐 아니라 내부의 적들과도 싸워 야 했다. 그는 실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숱한 만남과 결별 을 반복해야 했는데 이 또한 그의 주변 인물들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 나 Gay(1988)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제자들 간의 분란에 대해서 전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들 각자의 이해관계나 앙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는 것이다. 동료 및 친구 관계에서 드러난 프로이트의 문제 점은 매우 복잡하기 그지없다. 무명시절 그의 가장 큰 후원 자였던 브로이어와의 결별이 그 시발점이었다. 그 후 프로 이트는 베를린의 이비인후과 의사였던 플리스와 교류했지 만 그와도 곧 결별하고 말았다. 플리스는 단순한 친구라기 보다는 오히려 당시 매우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있던 프로 이트에게는 마치 치료자와도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프로이트는 강한 전이적 감정을 지니고 플리 스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플리스에게 등을 돌린 이후 한동안 고립되었던 프로이트 밑으로 몇몇 추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비인 수요회 일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처음에는 아들러, 쉬테켈, 카하네, 라이틀러 등이 참여했으며 그 후 점차 인원이 늘어 랑크, 라이크, 페렌치, 페데른, 아이팅곤, 오스카 리, 눈베르크, 어 네스트 존스, 페니켈 등이 합류했다(Fine 1979).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프로이트의 국제적인 위상이 커지고 동시 에 융이 합류하면서 프로이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들 러는 그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프로이트에 반발하는 주동세 력이 되어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몰고 정신분석을 이 탈했다. 오히려 베를린의 아브라함과 헝가리의 페렌치, 런 던의 어네스트 존스 등이 한결같이 프로이트의 오른팔 역
할을 떠맡았다. 그러나 결국 그토록 믿었던 페렌치와의 관 계마저 말년에는 서로 소원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중에 서도 프로이트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던 인물은 한때나 마 정신분석의 수호신이 될 것으로 믿었던 스위스의 칼 융 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부터 각기 서로 다른 믿음 체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입장 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결별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프로이트에게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남 아연방에서 온 분석가 프리츠 퍼얼은 프로이트의 권위적이 고 냉담한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자신의 진로를 바꾸기까 지 했다. 스위스의 목사 피스터 역시 한 때는 기독교와 정 신분석의 접목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프로이트의 고집에 꺾 인 나머지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고 말았다(Gay 1987). 타 우스크의 자살은 프로이트의 명성에도 먹칠을 한 사건이었 다(이병욱 2004). 빌헬름 라이히는 아들러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라는 사상적 배경 때문에 프로이트의 눈 밖에 밀 려났다. 프로이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너무도 반체제적인 위험한 사상이었으며 더욱이 자신의 제자들이 그러한 이념 에 몰두한다는 사실이 정신분석의 생존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이병욱 2003). 프로이트는 이처 럼 자신의 열정적인 제자들에게마저 의혹의 눈길을 보냈으 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칼 아 브라함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신뢰를 보였으나 그가 요절하 는 바람에 프로이트는 매우 안타까운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프로이트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지니고 그에게 접근한 사 람들은 대부분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프로이트 자신에게도 대 인관계의 미숙함이라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타 인에 대한 신뢰라는 측면에서 프로이트는 그만큼 결함을 지 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구심은 그 자신의 좌절된 현 실적 삶의 경험에서 재확인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강박 적이고도 나르시시즘적인 성향과도 무관치가 않아 보인다.
실제로 고된 삶의 여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게 호의적인 손짓을 보여준 인물들은 매우 적었다고 할 수 있`
다. 그리고 대다수의 제자들은 위급한 상황에 놓인 스승을 신경 쓸 여지도 없이 제각기 자기 갈 길로 떠나 버렸다. 실 제로 프로이트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구했으며 끝까지 그를 보살피고 보호했던 장본인들은 모두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2. 프로이트의 이성관계
프로이트의 최초의 이성관계는 물론 그 자신의 어머니와 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누이동생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성인기에 보인 다양한 이성관계의 특성들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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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그는 한창 자라나는 시기를 통해 집안의 왕자로 군림했으며 형제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런 그에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 모든 여성들이 헌신적 으로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여긴 것이다. 모든 여성들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물론 당시 사회의 일 반적인 시대 사조였다고는 하나, 프로이트의 과대적 나르시 시즘 성향은 특히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뿐만 아니라 마르타에 대한 구혼과정에서 보여준 초조감 이나 그 후 결혼생활에서 드러난 여러 특성들, 그리고 처제 민나와의 관계, 딸들에 대한 태도 등에서도 프로이트 자신 의 이성문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부인 마르타와 처제 민 나 사이에서 프로이트가 보인 태도는 매우 미묘한 의혹들 을 제기해 왔는데, 물론 그 시발점은 융으로부터 나온 것이 다. 자비나 슈필라인 사건으로 매우 곤혹스런 입장에 있던 융의 부인 엠마에게 보낸 서한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부 부관계에 대하여 솔직한 심경을 고백하며 그녀를 위로한 바 있지만, 융이 제기한 처제 민나와의 불륜설은 시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융 자신의 불륜 사실을 호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제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특히 헬렌 도이치, 자비나 슈필라인, 멜라니 클라인, 루 살 로메, 마리 보나파르트, 헬무트 후크 등과의 관계에서 보여 준 그의 모습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상징적인 아버지 프로이트에 대한 도전으로 그의 친딸인 안나와 극심한 경쟁적 대립과 불화를 보였던 클라인은 그에게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다. 특히 클라인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안나의 분석가 자격에 대해서였는데, 딸에 대한 아버지의 비정규적인 분석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녀 의 문제 제기는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이들 부녀지간에 이 루어진 분석에 대하여 Young-Bruehl(1988)은 근친상간 적, 그리고 피학적 환상에 대한 확신을 프로이트가 갖도록 하는데 일조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Ferris(1999)와 같은 제 3자들의 눈에도 이들 간의 분석 장면은 상식적으 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라 하겠다. 더욱이 근친상간적 소 망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던 장본인에 의해 이루어진 분석 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매우 남성적인 클라인에 비하여 헬렌 도이치는 가장 온순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딸 노릇에 충실하며 프로이트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녀가 분석했던 타 우스크가 루 살로메에 대한 연모 때문에 비관 자살하자 자 신의 명성뿐 아니라 그의 분석을 의뢰했던 프로이트의 명 성에도 누를 끼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이병욱 2004).
이는 헬무트 후크가 자신의 조카에게 살해당한 사건과 함
께 프로이트를 포함한 정신분석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명예를 안긴 사건이기도 했다. 한동안 프로이트에게 상 당한 두통거리를 제공했던 자비나 슈필라인은 융과의 관계 를 청산한 이후 러시아로 돌아가 그 후로는 교류가 단절되 었다. 그러나 그녀의 망령은 융과 프로이트가 모두 사망한 이후에 우연히 그녀가 남긴 일기와 서한들이 발견됨으로써 다시 되살아났으며, 그 결과 융과 프로이트 모두에게 수많 은 의혹들을 제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반면에 마리 보나파르트 공주는 프로이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 으며 실제로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프로이트의 런던 망 명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프로이트가 죽은 후 에 시신을 화장하자 그의 재를 담을 수 있는 항아리를 런 던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성들 은 프로이트 자신이 직접 분석했던 히스테리 환자들이었다 (Appignanesi와 Forrester 2000). 특히 브로이어가 치료 하다 중도에 탈락했던 안나 O의 경우는 프로이트로 하여금 정신분석의 기초를 확립시키는데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제 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융에 대한 끔찍스런 전이로 인해 큰 물의를 일으켰던 자비나 슈필라인에 비하면, 십대 소녀 로서 50대의 프로이트에게 치료 실패라는 불명예를 안겼 던 도라의 경우는 차라리 귀여운 애교에 가깝다. 그러나 브 로이어의 안나 O, 프로이트의 도라, 융의 자비나 슈필라인 등, 초기 분석사례들을 통하여 대가들이 보여준 다양한 시 행착오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고 한다면 전이와 역전이 현상이야말로 분석에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 는 것인가 라는 사실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실로 많은 여성들로부터 헌신적인 도움과 성 원을 얻었다. 실제로 정신분석을 탄생시킨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그가 치료했던 수많은 여성 히스테리 환자들이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고 답적인 태도로 일관했는데 그것은 프로이트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근원적인 어머니상에 대한 양가적 감정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여성들을 업신여기면 서도 그녀들에게 의지하고 보호받고자 하는 이율배반적인 요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그와 마찬가지의 역설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을지 도 모른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모든 남성들이 마치 어린 애 같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맺 음 말
인간심리에 대하여 정신분석이 밝힌 가장 큰 공헌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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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하나는 관계의 중요성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모든노이로제 현상의 원인에 있어서 아동기 경험의 중요성, 특 히 부모와 아동 간에 이루어지는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리 비도적 갈등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클라인이 주 도했던 대상관계이론에서는 문제의 핵심이 오이디푸스적인 삼자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 단계인 조 기 모자관계, 다시 말해서 이자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 한 것이다. 이처럼 정신분석의 핵심은 관계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설리반의 대인관계이론이 끼친 영향도 무시 할 수 없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이 보여준 다양한 인간관 계의 특성들을 이해하자면 그의 내적 대상관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대상관계는 신경증적 대인관계의 발원지이 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이트 자신은 주로 부자갈등 관계 에만 초점을 맞추고 진정한 모자관계의 규명에는 소홀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론적 보완과 수정은 불가 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인간적인 모순과 한계를 이해하다보면 그 역 시 평범한 인간임을 알게 된다. 동시에 이론적 창시자의 천 재성과 인간성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있기 마련이며, 또 반드시 일치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오히려 자신의 신경증 적 경향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심리적 배경을 일생동안 탐 색함으로써 그토록 고난에 찬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이론체계를 구축한 프로이트의 일관된 노 력과 헌신에 고개 숙이게 된다. 그 어떤 비난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밀고나간 그의 비타협적인 태 도에서 우리는 그의 인간적인 결함과 모순을 느낌에도 불 구하고 그가 보여준 학문적 용기와 자부심만큼은 배울 필 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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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Freud’s Object Relations and Object Relationships Byung-Wook Lee, M.D.
Freud had suffered from many complicated relationships with his intimate surroundings. Although he maintained an uniquely calm attitude, it seemed to be his own defensive style all through his life. Nowadays we are taught that our inner object relations affect the object relationships, in other words interpersonal relationships comprehensibly.
At this point, I reviewed the early life history of Freud, and their unavoidable effects on his later various inter- personal relationships. In my viewpoint, Freud showed basic affect of hunger, narcissistic grandiose self with very strict and some harsh superego, obsessive self-doubting, somewhat paranoid tendency, suppressed rage and anger including many neurotic symptoms. All his characteristics above mentioned seem to be the result from his early life experiences and his very complicated family structure.
I suppose that he might have been very confused by family secret early in life, and therefore he seemed to be forced to solve a riddle like Oedipus who answered right to Sphinx’s riddle. Confusing questions from his early years were:old father and young mother, father-like two half brothers, his contemporary nephew and niece as playmates, early caring by Czech nursemaid in substitute for mother, and another 3rd mother image on Emanuel’s wife Marie, early death of his real younger brother Julius, sibling jealousy by a birth of his younger sister Anna etc.
I suspect that these early object relations had an influence on his later complicated interpersonal relationships.
KEY WORDS:Freud·Object relations·Interpersonal relationships·Family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