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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독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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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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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닉슨독트린, CSCE

김 진 호

2014년 1학기

(2)

닉슨독트린

베트남 개입 중지

• 월남전의 장기화로 인한 소모전 양상, 중․소 분 쟁의 극대화 , 쿠바 위기이후 미․소 의 표면적 갈 등의 장기화

• 닉슨의 공약은 대외 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임을 시사. 미국은 아시아 우방국의 경제군사 원조를 제공하나 해외주둔 미군은 감축할 것.

• 세계 외교 다변화와 월남전의 조기 종식, 미국

(3)

닉슨독트린

미소간의 데탕트 합의

3/31

• 닉슨과 키신저는 1960년대 이후로 양극 체제가 와해되고 중국, 프랑스, 일본을 비 롯한 새로운 세력과 국제 역학 구조가 전개됨에 따라 기존의 냉전 구조가 변했음을 인식하고 케네디 시대에 전 세계 적인 봉쇄로 이어진 구조를 개선하고자 전략적 후 퇴를 하려함.

• 키신저 보좌관은 소련과 중국 등의 사회주의 블록을 인정하고 이를 적대적으로 대처 하지 말고 세력균형게임을 하는 선에서 머물러야 한다고 제시

• 닉슨독트린은 하나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안정적 구조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양극 체제의 방식을 열전과 냉전의 구조가 아닌 외교의 효과를 극대화 하여 안정적인 양극의 구도를 심화시키는 것.

• 따라서 기존의 냉전의 대립구도에서 초강대국 사이의 세력을 안정적으로 관리및 현 상유지(status quo).

(4)

닉슨독트린

중국과의 접근

•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된 시점을 이용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

• 중국의 모택동은 문화 혁명을 추진하면서 소련의 후루시초프 수정주의(탈 스탈린 주의및 평화공존정책)를 맹비난함. 모택동은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를 포기했다고 보았음. 중소간의 국경 충돌도 있으면서 양국의 대립이 격화됨.

• 미국은 중소 관계가 균열된 것을 이용하여 소련을 견제하고 미․중 양국 간의 공통 된 외교적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아시아내의 힘의 균형을 맞추려 함.

• 월남전의 패배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만회함.

(5)

신동방정책

신동방정책

5/31

• 브란트 서독 수상은 동독을 사실상 승인하고 전후 국경선을 인정함으로써 동구권 및 동독과 평화적 공존을 하려함

• 이로 인해 모스크바 조약, 바르샤바 조약을 이끌어 내고 평화적 공존 및 경제교류의 활성화가 일어남

• 이에 대해 실향민단체와 동독인들의 인권을 옹호했던 CDU성향의 정치인들의 반발 에 직면, 모든 독일인에 대한 보호의무에 대한 책임 공방

• 기독교 사회당(CSU)은 브란트를 연방헌재에 재통일의무 위반, 모든 독일인에 대한 보호의무를 위반했다고 재소했으나 1973년 7월 31일 브란트의 정책이 연방헌재에 서 기본법과 합치한다고 결론

(6)

CSCE

유럽의 안보와 CSCE

CSCE의 배경

1. NATO 의 하멜보고서 2. 소련의 기존 요구

3. 닉슨독트린과 데탕트 합의

4. 빌리브란트의 현상유지 정책(동방정책)

5. 유럽 공동 안보를 위한 이해 일치와 경각심. 무기 통제의 필요성

(7)

CSCE

유럽의 안보와 CSCE

7/31

• 유럽안보협력회의는 본래 무기통제와 경협을 의제로 미국의 참여 배제를 유도한 소 련 측의 요구사항이었다. 그러나 독일연방공화국의 동방정책이 적극적으로 구체화 되고 현실화되어 서방측의 신뢰를 높이고 1970년대 외교 환경이 변함에 따라 미국 의 닉슨 행정부와 서방진영도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새로운 유럽 질서와 이익 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경향이 짙어졌으며 바스켓 3에 인권 조항의 신설을 서방측이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초기의 소련이 구상했던 유럽안보회의의 성격은 띠지 않고 1815년 빈회의 이후 범 유럽 최대 규모의 회의가 되었다.

(8)

CSCE

양 독일의 기구가입

• 우선 독일 연방공화국의 경우 NATO, Westeuropäische Union, EG, OECD, IEA 등의 기구에 가입되어 있었고 독일민주공화국의 경우 WP, Rat für Gemeinsame Wirtschaftshilfe(RGW;상호경제원조회의)에 가입되어 있었다. 이러한 동맹은 독일 에 의한 독일을 위한 안보를 이루고 있으며 WP와 NATO가입으로 양 독일이 통합할 수 있는 전망이 퇴색

(9)

CSCE

소련의 목표

9/31

• 소련은 독일의 분단 즉 현상 유지를 공식화하기를 원했고 독일민주공화국의 실체성, 독일 내 핵무기의 포기, 5년 후인 1975년 중립국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열리게 될 CSCE 추진과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패권에 대한 서방국의 인정, 독일연 방공화국의 앞선 기술과 광범위한 차원의 경제 지원 및 차관 등의 경제적 목표를 가 지고 독일연방공화국에 접근했다.

(10)

CSCE

소련의 목표

• 소련의 목표는 유럽 내의 질서를 소련 구도로 재편하기 위한 CSCE에 집중하였고 1971년의 상호무기감축협상(MFR), 독일연방공화국의 현존 영토의 법적 승인(de jure)과 독일민주공화국의 사실상 승인(de facto)을 독일연방공화국과의 관계 정상 화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베를린에서의 4승전국의 협상을 다시 하기로 합 의하였다.

• 1972년과 1973년의 미 ․ 소간의 정상회담에서 닉슨과 브레즈네프는 유럽에서의 데탕트에 합의를 하게 된다. 1973년 CSCE과 MBFR(MFR)이 협상되기까지 동 ․ 서 간의 무역과 기술 교류가 혁신적으로 증대되었다.

(11)

CSCE

유럽의 안보와 CSCE

11/31

• 소련은 1950년대부터 미국이 배제된 유럽 독자적인 안보회의 개최를 주장했으며 이 는 현상 유지와 더불어 NATO로 결속되어 있는 서구권을 와해시키려는 의도가 강하 였다. 따라서 이러한 의도를 파악한 서구 진영에 의해 개최되지 않았다. 그러나

MFBR(상호균형군축감축협상)을 추진하면서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미국 역시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약화를 위해 이 회담을 개최하기로 한다.

(12)

CSCE

하멜보고서

• 1967년 1월 민주당 상원의원 맨스필드(Mike Mansfiled)의 해외주둔 미군의 감축 제의와 이에 대응하는 NATO의 하멜보고서는 데탕트 논의에 탄력을 가했다. 하멜 보고서는 WTO에 의한 군사적 도발에 우려해 NATO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동구 블 록들과의 보다 안정적인 관계를 위해 주요 사항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13)

CSCE

본 정부와 소련, 동구권의 입장

13/31

• 소련의 경우 본 정부의 보복주의나 패배의 불인정 등이 동유럽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요인이 된다고 보았다. 이는 독일민주공화국의 합법성인정, 체코 뮌헨협정의 취소, 폴란드의 경계인정을 통한 동유럽의 영토 인정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명쾌한 요구 들에 대해 동유럽 정권들은 미국의 전술 전략적 핵 우위, 독일연방공화국의 재무장, 군사 블록의 심화 및 대결의 부산물로써 군사적 위협을 예전부터 주장해왔다.

(14)

CSCE

본 정부와 소련, 동구권의 입장

• 이에 대해 독일연방공화국은 중부 유럽에서 소련이 32개의 사단을 배치한 것에 대 해 국가 안보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독일연방공화국에게 더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소 비에트의 집단 안보 체제보다도 동부 국경에 배치한 병력이었다. 본 정부의 동맹국 은 집단 안보 체제를 완화하고 독일의 분단을 경감시키는 방법에 대해 일치적인 견 해를 보였다. 이렇듯 독일 문제는 유럽 불안정의 원인임과 동시에 긴장을 완화하는 핵심적 해결책이 되어 왔다.

(15)

CSCE

동구권에서 규정한 유럽안보의 위협세력

15/31

• 소련의 동맹국(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들이 집단 안보체제를 발전시키고

일부의 NATO(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국가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유럽의 안보로 확장시키고자 했다. 1966년 중반 소련은 소련의 영향력에 대해 우려하는 서유럽에 대해 소련의 이익을 증대시키는데 충분한 외교적 위치에 있다고 보았다. 1966년 4월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은 유럽의 평화 질서를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유럽 국가들이 평화적 관계를 구축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제안은 1966년

부카레스트(Bucharest) WTO 회의에서 중요한 의제로 논의되었다. 부카레스트 선언은 독일연방공화국, NATO, 미국을 유럽 안보와 세계평화에 주요 위험 요소로 규정했다.

(16)

CSCE

부카레스트 선언

부카레스트 선언은 독일연방공화국, NATO, 미국을 유럽 안보와 세계평화에 주요 위험 요소로 규정했다. 이는 서유럽 내의 반미 세력을 결집하고 두 개의 군사

블록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할슈타인 독트린의 폐기와 두 개의 독일 국가의 완전한 관계 수립은 이런 노력들의 일환이며 유럽 협력 회의에서 미국은 제외시키려 했다.

소련의 의도는 유럽의 관계에서 무력 포기를 한다는 제스쳐를 취하고 현재의

국경과 정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부카레스트 선언은 독일 문제 해결에 관한 소련의 입장을 재차 강조하며 독일의 평화정착은 두 개의 독일 국가의 존재를

(17)

CSCE

동구권 국가들의 회합과 안보 대응

17/31

1967년 4월 Karlovy Vary의 공산당 대회는 유럽 안보 회의를 겨냥한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 독일연방공화국, NATO의 정책들이 유럽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고 유럽의 평화와 안보를 위한 선언에서 독일문제가 유럽 안정을 저해하는 가장 주된 요소로 보았다. 이들 동맹에 대해 유럽 현존 경계선에 대한 서방의 인정,

독일민주공화국의 완전한 외교적 승인, 뮌헨 협정의 무효, 할슈타인 독트린의 폐기, 서 베를린의 정치적 독립성 보장, NPT 비준, 무력 포기 등이다. Kalovy Vary의

회합은 부카레스트 선언을 승인하고 지역 안보를 위한 기존의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18)

CSCE

NATO권 국가들과 유럽안보회의 논의

NATO 국가들은 1964년 파리 장관급 모임에서 벨기에, 룩셈부르크, 덴마크 회원국은 WTO와 NATO사이의 무력 포기 협정을 심사숙고할 것을 제의했다.

네덜란드, 벨기에 등 NATO 회원국들과 헝가리, 루마니아 같은 동구권 국가들과의 의견은 유사했으며 개별적인 유럽 안보에 관한 접촉은 하멜보고서의 내용에

탄력을 가했다.

1968년 6월 NATO의 장관급 회담에서는 유럽 안보 회의에 관한 심사숙고가 있었다. 여기서는 정치적 공감대보다 군사적 데탕트를 더 강조했다.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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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CE

부다페스트 선언

19/31

1969년 3월 17일 WTO 지도자들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나 유럽 안보 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이는 부다페스트 선언은 기존의 선언보다 대조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럽 안보 회의에 대해 거절한 미국과 독일연방공화국 그리고 NATO를 비난하고 1966년 부카레스트 선언의 유효함을 재차 확인하고 3가지 사항을 덧붙였다.

(1) 유럽의 정치 경제적 협력을 강화 (2) 독일 문제 해결 추구와 현상의 승인 (3) 유럽 안보 회의의 소집이다.

1969년 4월 10-11일 워싱턴에 있었던 NATO의 장관급 모임에서 부다페스트 선언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20)

CSCE

유럽의 안보와 CSCE

브란트 장관과 주 독일연방 소련 대사 짜라프킨(Semyon Tsarapkin)과의 밀도있는 회담에서 WTO는 미국을 배제하며 독일민주공화국의 국경선과 인정을

유럽안보회의의 선행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4월 26일 브란트 외무장관은 성공적인 회의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를 제시했다.

(1) 유럽안보회의를 위한 어떠한 선행조건도 없어야 한다.

(2) 유럽안보회의는 면밀하고 정확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3) 유럽안보회의 시작부터 북미(미국과 캐나다)가 참여해야 한다.

(21)

CSCE

유럽의 안보와 CSCE

21/31

브란트 외무장관은 여기서 독일민주공화국의 차이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기존에 모든 국제 회담에서 독일민주공화국의 참여를 배제했던 것을 거부했다. 이는 확실한

양보였고 2개의 독일의 사실상 승인이다. 반면에 브란트는 독일 문제 해결을 유럽안보협력회의의 참여를 통해 확실히 연관시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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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CE

미국의 입장과 로저스

1969년 12월 미국의 상원의원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는 브뤼셀에서 소련이 안보 회의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진위를 의심. WTO국가들은 그저 유럽

안보회의에서 동․서간 무력 포기 협정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UN 헌장에서 20년 동안 제안한 기본 조항이다. 그리고 무역과 기술 교류의 증대를 주장하는데 이는 다른 외교적 경로를 통해 얼마든지 구현 가능한 것이라고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입장과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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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CE

미국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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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유럽 안보 회의를 단지 유럽의 긴장을 완화하는 여러 방법 중에 하나로 보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중요한 노력은 베를린 통행, 동서독의 회담, 군사적

데탕트의 특정한 요소등과 같은 중대한 협상의 주제를 지속적으로 인식하고 면밀히 조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이 논의되기 전까지는 다른 광범위한 사안들은 효과적으로 접근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로저스는 ‘우리는 실질적인 유럽의 긴장완화를 위한 희망을 위한 협상을 선호한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강화시키거나 비준시킬 수 있는 효과를 가진 회의는 참석할 수는 없다.’ 고 밝히고 있다.

미국의 입장과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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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CE

NATO 입장

긴장완화와 방어의 두 개념을 정립하면서 북대서양 회의는 1969년 12월 3-4일 독일문제와 (베를린 문제 포함)와 무기 통제, 유럽 안보 회의의 연관을 정확하게 정립했다.

두 독일의 잠정 협정을 위해 상호간의 무력 포기 선언 교환과 그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가지고 있다면 이 문제에 관해 동서간의 협력이 든든히 촉진될 것이다.

NATO 회원국들은 유럽 안보 협력 회의에 대해 주저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동방정책으로 만들어진 성과는 베를린 협정과 동방 조약들 그리고 빈에서의 MBFR회담을 성사시키는데 타협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NATO의

미국의 입장과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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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CE

유럽안보회의와 관련한 NATO의 논의 초점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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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가들 간의 첫째 안보문제 및 통치 관계,

둘째 사람들의 통행, 정보와 지식 그리고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운 이동, 셋째 과학 기술부분과 경제 협력

넷째 인권 향상

미국의 입장과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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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CE

CSCE 1차 예비회담

닉슨 대통령의 결단으로 CSCE에 대한 긍정적 효과가 검토되었고 1972년 NPT에서 CSCE의 기본 목적을 협의하기 시작, 닉슨대통령과 브레즈네프 회담의 결과로서 1972년 11월22일과 1973년 6월 8일 사이에 유럽 안보협력 예비회담이 시작했다.

유럽안보협력회의의 1단계 회담이 1973년 7월 3일 4일 동안 4개의 핵심주제를 가지고 최종 협정되었다.

(1)유럽 국가의 관계 원칙

(2) 경제, 과학, 기술 협력과 환경 보호

미국의 입장과 로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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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CE

CSCE 2차 예비회담

27/31

두 번째 단계는 1973년 9월 18일에서 1975년 6월 21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렸다.

알바니아를 제외한 유럽의 전 국가와 미국과 캐나다의 외무장관이 참여해 2단계의

협의를 조율 미국의 입장과 로저스

(28)

CSCE

헬싱키 선언

1975년 7월 30일에서 8월 1일 35개국이 서명한 최종안이 발표되고 이는 그동안 체제 대결로 불안했던 2차 대전 이후 형성된 새로운 질서에 대해 전 유럽과 북미가 법적인 승인을 하는 것이며 세계의 지도자들은 진지하게 냉전 종식에 대해 서명했다.

(29)

CSCE

유럽의 안보와 CS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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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최종안(HFA)은 총 33페이지의 분량이며 10개의 기본원칙과 4개 의제의 최종 합의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10개의 기본원칙은 참가국가의 관계 원칙에 관한

선언에서 1.주권 평등, 주권 존중 2. 위협이나 무력 사용 배제 3. 국경의 불가침성 4. 영사 보전 존중 5. 분쟁의 평화적 해결 6. 내정 불간섭

7. 사상, 양심, 신앙, 신념의 자유를 포함하는기본 자유및 인권의 존중 8. 국민의 평등권과 자결권 9. 국가간 협력

10. 국제법에 따른 제반 의무 수행으로 되어 있다. 또한 신뢰확인조치와 안보 및 군축문제에 관한 결의문, 무역및 산업에 관한 협정, 환경 인적 접촉, 정보분야 에서의 공동 협력, 문화 교류, 교육분야에서의 공동협력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본래 소련은 안보와 경협 부문만 관심이 있었으나 미국은 인도적 협력과 인권부분을 강력히 주장하고 관철시켰다.

미 국 의 입 장 과 로 저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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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CE

CSCE를 통한 각국의 이해관계

브레즈네프 정권의 소련 안보 이익 노선은 공산주의 정권을 기반으로 한 동유럽의 현상유지를 미국과 서방국이 인정하는 것이다. 소련측은 CSCE를 통해 동유럽의 블록을 안정적으로 소비에트화 시키려고 했으며 이는 1960년대 후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반면에 서방측은 중립국과 개혁적인 동유럽 국가에 들에게 CSCE를 통해 인권과 전력 억제 양보를 유도하는 것이다. 미국은 CSCE를 추진하면서 중립국과

서방국에 실질적 지원을 강화하고 모스크바의 기본적 목적을 넘어서 동방과 미

국 의 입 장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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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CE

바스킷 3와 인권 문제

31/31

CSCE는 안보, 경협, 인권의 3개 바스킷으로 논의되었고 인권부분은 소련이 거부했던 조항이었으나 미국이 강력하게 협상의제로 넣었다. 그리고 CSCE에서 평화적인 영토 변경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독일연방공화국이 미국에 관철시키도록 주장하였고 이는 1990년 독일 통일시 소련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는 사전 초석이 되었다.

바스킷 3은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다. 소련은 모든 바스킷이 각국의 주권, 법, 관습 즉 각 국의 처한 사항을 존중할 것을 요구했으나 많은 국가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인권은 보편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 측의 주장이 강한 바스킷 1의 관철을 위해 인권 조항이 있는 바스킷 3 부분을 양보해야 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미 국 의 입 장 과 로 저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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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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