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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통치술이 북한 군사정책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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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통치술이 북한 군사정책에 미친 영향

박용환*1)

Ⅰ. 서론

Ⅱ. 김정은의 통치술

Ⅲ. 김정은 시대 북한 군사정책

Ⅳ. 평가와 전망

Ⅴ. 결론

Abstract

The Influence of Kim Jong Un’s Craft of Ruling on North Korean Military Policy

After his grip on power, Mr. Kim is focusing on consolidating his power by show of force and reign of terror by ruthless purge and taming the army. This craft of rul- ing by Kim Jong Un led North Korea to pursue military adventurism and offensive military policies.

Three nuclear tests and several missile launches by Kim Jong Un raised high mili- tary tensions in the Korean Peninsula. Also it caused the international society to im- pose high level of sanction, resulting isolation of the North and severance of relation- ship with its traditional ally, China. Moreover North Korea’s threat and provocation against South Korea near the cease fire line sever inter-Korean exchange and lead to the shut-down of Kaesong Industrial Complex.

Kim Jong Un is relying heavily on weapons of mass destruction program, such as nukes and missiles, for the maintenance of its hereditary leadership. He will continue to sustain its reign of terror and consolidate its power by provocation against South Korea, to induce solidarity of its regime and to confront pressure from the interna- tional community.

Key Words : Craft of Ruling, Military Policy, Weapons of Mass Destruction, Nuclear Weapon, Missile

*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수, 북한학 박사, parkyh51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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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북한은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3남인 김정은 을 후계자로 내세웠다. 김정은은 김정일 사망 직후 최고사령관직을 시작으로 조 선노동당 제1비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인민군 ‘원수’ 칭호 등 모든 권력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북한의 절대 권력자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2016년 5월 6일에는 36년 만에 제7차 당 대회를 개최하고 ‘노동당 위원장’직을 포함 모두 9개의 감투를 쓰는 3대 세습의 셀프대관식과 함께 북한의 최고 통치자로 등극했 다. 하지만 국정경험 부족과 나이 어린 김정은이 북한을 어떻게 통치해 나갈지에 대해 우리를 포함한 국제사회는 불안과 걱정의 시선을 보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집권 5년차인 지금 외형적으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는 식량난과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생활이 핍박을 받고 있고,1) 외부 적으로 북핵문제와 인권문제, 남북관계 등으로 국제사회와 마찰을 빚고 있다.

김정은은 권력승계 이후 세 번의 핵실험과 수회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였 고, 2013년 3월에는 노동당 전원회의를 통해 ‘경제발전과 핵무력 병진’이라는 정책노선을 채택하고 아버지 김정일에 이어 ‘선군정치’에 의한 북한 통치를 지 속할 것임을 밝혔다. 또 김정은은 ‘7일 전쟁’이라는 새로운 전쟁 계획을 준비해 놓고 이의 준비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군부대를 수시로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 애국주의’와 ‘유일사상 10대 원칙’2)을 새

1) 김정은은 집권 직후 2012년 신년사를 통해 “현 시기에 인민들의 먹는 문제, 식량문제를 푸는 것은 강성국가 건설의 초미의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식량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2) 김정은은 2013년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을 개정하였다. 새롭게 개정된 ‘10대 원칙’

에는 사망한 김정일의 이름을 넣고 ‘유일사상체계’에서 ‘유일영도체계’로 제목을 바꾸었다. 서문 에는 핵무력을 중추로 하는 군사력 증강을 강조하고 있다. 또 김정은은 2014년 2월 실시된 노동당 제8차 ‘사상일꾼대회’에서 연설을 통해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이 말과 문서로만 형식적 으로 진행됐다”면서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확고히 세우는데 당 사상사업의 화력을 총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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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게 내세우며 선대 조상들의 혁명성과 정통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무자비한 숙청과 ‘계급 길들이기’ 등 공포통치를 병행하면서 자신의 정권 공고화에 힘을 쏟고 있다.

정치지도자의 통치 스타일은 ‘특정한 환경에서 정치지도자가 자신(혹은 조직) 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타의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동원하는 과정 에서 표출하는 다양한 활동 양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임재천, 2014, p. 9). 따라 서 정치지도자의 의사결정 방식 및 조직 구성원과의 상호작용 방식은 주로 지도 자의 ‘개인적 특성’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독재국가의 지도자는 민주주의국가 지도자에 비해 법적・제도적 구속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음에 따라 개인적 특성이 정책결정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집권 5년차인 북한 김정은 정권의 통치술에 대해 분석해 보고, 이러한 통치술이 북한 군사정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제2장 에서는 김정은의 통치술 형성에 영향을 준 요인과 김정은이 지금까지 현지지도 를 통해 보여준 현상을 바탕으로 그 통치행태를 분석해 보고, 제3장에서는 김정 은 체제에서 북한 군사정책과 김정은의 통치술이 북한 군사정책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제4장에서는 김정은의 군사정책이 북한 체제와 남북관계, 북한의 대외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평가해 보고, 앞으로 김정은의 통치유형에 대해 전망해 볼 것이다.

Ⅱ. 김정은의 통치술

1. 김정은의 통치술 형성 배경

가. 성장과정 및 성격

일반적으로 지도자의 능력과 자질은 추종자들의 사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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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들의 협력과 지지, 그리고 만족감과 행복을 주는 데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 져 있다(Julius Gould, 1964, p. 241). 따라서 정치지도자의 성장과정과 성격적 특징은 통치술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지도자의 성격적 특징은 그을 추종하는 추종자들의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1984년 1월 8일3) 김정일과 김정일의 세 번째 부인이자 만수대 예술 단 무용수 출신인 고영희4) 사이에서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다시 말해 김정은은 서자의 자식임과 동시에 그 서열에 있어서도 정실부인의 아들인 ‘정남’

을 포함하여 3번째 서열로 김정일의 후계구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위치였 다. 이러한 이유로 생전에 김일성은 김정일의 정실부인에서 낳은 장남 ‘김정남’

을 후계자로 간주했으며 고영희가 낳은 ‘정철’, ‘정은’, ‘여정’은 정식 손자로 인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5) 또한 이는 북한이 전통적으로 유교적 사상을 중시하는 문화를 고려해 볼 때 김일성 가계의 정통성을 무시하는 것으로 김일성으로서는 쉽게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장남인 김정남이 2001년 일본 입국과 정에서 비자문제로 국제적 망신을 당하면서 김정일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고, 2남인 ‘정철’은 건강상의 문제로 후계구도에서 밀려나면서 ‘정은’은 자연스럽게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받게 되었다.

김정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김정일의 요리사를

3) “김정은 1984년 1월 8일생… 미, 생일 공식 언급.” 「동아일보」. 2016년 7월 8일. 김정은의 출생연 도에 대해서는 1982년과 1983년 설도 있다. 일본 NHK(2009년 12월 11일)는 북한 당국자들이 2009년 6월부터 평양 주재 외교관들에게 김정은의 출생연도를 1982년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그동 안 1983년 1월 8일생 주장을 변경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북한이 ‘강성대국’ 원년으로 선전하고 있는 2012년에 김정은 나이를 30세로 맞추기 위한 것이며, 또 2012년은 김일성 출생 100주년에 김정일 나이가 70세가 되는 해이므로 김정은의 출생연도 조작을 통하여 그의 카리스마를 높이려 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또 김정은의 이모인 고용숙은 2016년 5월 27일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 뷰에서 김정은이 1984년생이라고 밝히는 등 김정은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4) 고영희 아버지 고경택은 1913년 8월 14일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며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 카에 정착했다. 고영희는 1952년 6월 26일 출생하여 10살 때인 1962년 10월 21일 제99차 ‘귀환 선’을 타고 북한으로 갔다. 고영희는 만수대 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하다 1976년 김정일의 눈에 띄었고, 2004년 유방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김정일과 동거하면서 정철, 정은, 여정을 낳았다.

5) “북 김일성, 김정은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산케이신문」. 2012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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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낸 후지모토 겐지는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라는 책에서 “일곱 살 어린이가 마흔 살 어른인 나를 향해 쏘아보듯 날카로운 눈빛을 건넸다”며 김정 은과의 첫 대면에서 당황했던 상황을 설명한 바 있다.

김정은은 프랑스를 거쳐 16세 때 스위스로 유학하면서 베른 리베펠트-슈타인 휠츨리 공립학교를 ‘박운’이라는 가명으로 다녔는데, 유학시절에는 농구를 비롯 한 스포츠와 영화,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으며 주변 동료들과는 접촉이 별로 없었 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학시절 동료들에 의하면 운동경기에서 상대에게 지 기를 싫어하는 등 승부욕이 강했다고 한다(월간중앙, 2016). 또 김정은의 이모 고용숙에 의하면 김정은이 어린 시절 말썽꾼은 아니었지만, 성질이 급하고 인내 심이 없었다6)고 회고하는 등 김정은은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강하고 저돌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의 이 같은 강한 성격과 승부욕은 그의 생모인 고영희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영희는 서열상 윗선인 정실부인의 아들 ‘정남’을 후계구 도에서 밀어내고 자신의 소실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따라서 고영희는 건강상에 이상이 있는 ‘정철’보다는 ‘정은’을 일 찍부터 후계자로 내세우기로 마음먹고 어렸을 때부터 김정은을 그렇게 훈련시 킨 것이다.

김정은은 2000년 말 유학을 마치고 북한으로 들어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제 군 간부 양성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교’ 특설반에서 군사이론과 전략 전술을 익혔다. 김정은은 여기서 2년간 포병학을 공부하였고, 졸업논문으로 “위 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해 포병사격의 정확도를 높이는 방법”을 제출한

6) “김정은 1984년생… 8세부터 권력승계 조짐.” 「세계일보」. 2016년 5월 30일.

7) 1998년 미국으로 망명한 김정은의 이모 고용숙과 그녀의 남편인 박건에 의하면 고영희가 1990년 초부터 김용순 당위원회 대남비서를 자기 측근으로 만들어 김정철, 김정은 형제의 후계자 옹립을 준비해 왔다고 미 정보당국에 진술하였고, 김용순 비서가 2003년 10월 26일 사망하자 고영희는 리제강과 리용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을 통해 김정철, 또는 김정은의 후계자 옹립을 추진하였 다고 증언하였다. 또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후지모토 겐지에 의하면 고영희는 간부들과 식사자 리에서 김정철보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우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장성장,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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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선동매체들이 김정은을 군사전략의 천재라고 추켜 세우고, 특히 포병전술의 대가로 선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과 김정은의 잦은 포병 부대 방문 등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김정은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한 불안감, 할아버지 김일성의 냉대, 생모인 고영희의 조기 사망, 외로운 유학생활 등으로 인해 외골 수적이고 과격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김정은은 비 교적 안정되고 차분하기보다는 불안정하고 과격하며 모험적인 성격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나. 김일성・김정일의 영향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은 33세의 비교적 어린 나이에 구소련의 통치자 였던 스탈린을 등에 업고 북한의 최고 권력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김일성은 항상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명분을 만들어 숙청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해나갔다.

김일성은 자신의 최고 경쟁자였던 조선공산당 총책임자 박헌영, 소련파의 대 표자인 허가이, 연안파의 무정, 갑산파의 김창봉 등을 각종 죄명을 씌워 일찍이 숙청함으로써 오랜 기간 동안 북한에서 자신만의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자신에게 불리한 핸디캡(어린 나이, 인지도)을 극복하고 북한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한 과시적 행보도 병행하였다. 현지 지도 시 주민들과 과감한 스킨십은 물론 거침없는 연설을 통해 북한 주민들을 사로잡았 다. 이 같은 김일성의 정치적 행보는 북한 주민들에게 그를 신격화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김정일은 집권 당시 2번의 핵실험과 수회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3번의 서해교 전, 천안함사태, 연평도 포격도발사건 등 한반도에 군사적 위기상황을 조성하면 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였다. 또 자신의 정권에 위기가 닥칠 때는 ‘벼랑 끝전술’을 구사하여 순간순간 그 위기를 극복하면서 정권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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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김일성・김정일의 통치술은 김정은이 후계자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 정을 운영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할아버지 김일성의 통치술, 즉 현지 지도 시 인민들과의 과감한 스킨십, 대중적 연설, 카리 스마적 리더십은 북한 주민들에게 신격화되어 있어 김정은이 이를 적극 모방할 경우 자신도 김일성과 같이 조기에 북한 주민들에게 존경받고 절대 통치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은은 2015년 10월 10일 실시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열병식 연설에서 “존 경하는 평양시민”이라든가 ‘인민’이라는 단어를 총 90여 회 사용하였고, 2016년 신년사에도 ‘인민’이라는 용어를 총 44회 사용하는 등 ‘인민제일주의’를 강조하 고 나섰다. 이는 김정은이 김정일과 달리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대중적 풍토를 따라함으로써 인민들에게 김일성에 대한 향수를 유발시키고 자신에 대한 충성 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에서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로 이어져온 절대 수령주의에 의한 통치방식, 3대 세습에 따른 북한 주민의 불만, 김정은의 국정경험 부족과 정치적 기반 불안, 북핵문제로 인한 국제사회의 대북압박 등도 김정은이 통치술을 전개하는 데 영 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김정은은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북한 주 민과 엘리트집단을 조기에 장악할 수 있는 강력한 통치스타일이 필요했던 것이 다.

2. 김정은 통치행태

가. 공포통치

김정은은 권력 승계 이후 2012년 7월 15일 이영호 총참모장을 시작으로 현영 철 인민무력부장,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등 주요 직위자를 숙청하였다.8)

8) 김정은은 자신의 고모부이자 노동당 행정부장인 장성택을 2013년 12월 8일 정치국확대회의에서

‘반당반혁명종파행위자’로 몰아 회의장에서 끌고 나간 지 사흘 만에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 판소에서 사형을 선고하고 즉시 처형하였다. 2015년 4월 30일에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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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정찰총국장을 대장에서 중장으로 강등시키고 김정각 인민무력부장을 임 명 7개월 만에 해임시키는 등 2012년 한 해에만 40%가 넘는 주요 직위자를 교체 하였다.

<표 1> 주요 직위자 변동률

구 분 주요 직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7월

직 위 154개 62개 51개 55개 27

교체비율 40.3% 32.4% 35.7% 17.5%

* 자료: 정보사령부, 2015.

2011년 김정일 사망 당시 꾸려진 국가장의위원회 명단 232명과 비교할 때는 새로운 인물의 비율이 2012년 27.0%, 2013년 35.1%, 2014년 44.0%, 2015년 51.3%로 변화해 이제는 절반 이상이 새 인물로 채워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진 희관, 2015).

김정은은 정권출범 이후 지난 4년 동안 군부의 4대 핵심요직(총정치국장, 총참 모장, 인민무력부장, 작전국장) 중에서 총정치국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4번 이상 씩 교체하였고,9) 고위엘리트들에 대한 처형 수도 140여 명1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군 장령들의 연령도 기존 60~70대에서 40~50대의 비교적 젊은 층 으로 세대교체를 하였다. 이와 함께 김정은은 군부의 계급장을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하는 ‘계급 길들이기’도 병행하고 있다.11)

시 졸았다는 이유로 평양 부근 사격장에서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 없이 체포 3일 만에 고사총으로 공개 처형하였다.

9) 북한군 군부의 핵심보직인 총참모장은 이영호 ⇒ 현영철(2012. 7) ⇒ 김격식(2013. 5) ⇒ 리영길 (2013. 8) ⇒ 리명수(2016. 2)로 교체되었고, 인민무력부장은 김영춘 ⇒ 김정각(2012. 4) ⇒ 김격식 (2012. 12) ⇒ 장정남(2013. 5) ⇒ 현영철(2014. 6) ⇒ 박영식(2015. 5)으로 교체되었다.

10) “김정은 공포정치에 엘리트집단 체제 이탈 이어지나.” 「한국일보」. 2016년 4월 12일.

11) 현영철은 2012년 차수에서 같은 해 10월에 대장으로, 2013년 6월에는 상장으로, 2014년 6월에는 다시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장정남은 2013년 5월 상장에서 2013년 8월에 대장으로, 2014년 2월 에는 상장으로, 2014년 8월에는 다시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최용해는 2012년 4월 차수에서 2012 년 대장으로, 2013년 2월에는 다시 차수로 승진하였다. 정찰총국장인 김영철은 2012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나 그간 대장→중장→대장→상장으로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다가 2015년 8월 다시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윤동현 인민무력부 부부장은 2012년 3월 상장으로 등장했으나 2013년 4월 중장으로, 같은 해 10월에는 소장으로 강등되었다가 2015년 10월에는 다시 중장으로 진급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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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은 일반 주민들에게도 공포통치를 자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 다. 2013년 1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는 남성 2명이 남한 영상물을 봤다는 이유 로 총살당하였고,12) 2015년 4월에는 은하수 관현악단의 총감독과 3명의 단원을 나체 상태로 예술계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관총으로 처형하였다.13) 2016 년 들어서는 일반 주민들에 대한 공개처형이 대폭 늘었으며14) 김정은의 지시로 주민단속기구인 ‘3・12 상무’15)조직을 재가동하는 등 김정은의 공포통치가 북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김정은이 북한 주민 을 대상으로 공개처형을 확대하고 있는 것은 제4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강화되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증대되자 공개처형을 주민 통제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김정일 시대에도 숙청은 권력 장악의 보편적 수단이었지만 최고핵심 엘리트 들에 대한 처형은 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장성택의 경우에도 세 번의 혁명화 교육을 통해 좌천시켰지만 결국 권력핵심으로 다시 불러들여 충성하도록 만들 었다(이승열, 2015, p. 389).

김정은이 이와 같이 공포통치방식으로 북한을 통치하는 이유는 첫째, 김정은 정권의 불안정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김정은이 숙청과 배제의 정치를 통해 권력 안정화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에 비해 짧은 후계수업으로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고히 하지 못한 상태에서 권력을 승계받았

었다. 윤정린 호위사령관도 2010년 4월 상장에서 대장으로 진급 이후 상장으로 강등되었다가 대장으로 복귀하였다.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은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2015년 10월 중장 에서 소장으로 강등되어 나타났다. 최부일 인민보안부장은 대장(2013년 6월) → 상장(2014년 7월) → 소장(2014년 12월)에서 2015년 10월 다시 대장으로 승진하는 등 고급 장령들에 대해 계급 길들이기를 하였다.

12) “남한 영상물 봤다고 사형 북 당국, 처벌・단속 강화.” 「세계일보」. 2015년 7월 2일.

13) “북한 정치탄압・나체처형…인권상황 비난.” 「미 VOC」. 2016년 4월 14일.

14) 2016년 8월 현재 북한 당국은 약 60여 명의 주민을 공개처형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김정은 집권 이후 연평균 처형자 수 30여 명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준이다. “북, 올 들어 60여 명 공개처 형… 김정은식 공포통치 확산.”「연합뉴스」. 2016년 8월 12일.

15) 노동당조직지도부가 중심이 돼 ‘거주지를 이탈해 불법행위를 일삼는 자들을 강력히 단속할 데 대하여’라는 제안서를 김정은으로부터 비준받아 조직한 주민단속기구이다. 3・12 상무라는 명칭 이 붙은 것은 2014년 3월 12일에 결성된 조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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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따라서 김정은은 자신의 불안한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인사에 대해서는 과감한 숙청과 배제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김정일 시대에는 주요 직위자에 대한 보직을 함부로 바꾸지 않고 장기 간 보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김일성은 46년간 집권하면서 인민무력부장을 5번 교체하였고, 김정일은 18년 집권 동안 인민무력부장을 4번 교체하였다.16) 다시 말해 김일성・김정일은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을 군부의 수뇌로 앉혀 ‘총구 의 배반’을 막았다. 하지만 김정은에게는 짧은 후계자 수업으로 인해 믿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결국 김정은의 통치전략은 자신이 믿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 지 어떤 한 사람이나 집단이 세력화될 시간을 주지 않고 숙청과 같은 공포심을 조장해 반역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권력 승계 직후인 2012년 1월 10일 금수산기념궁전광장에 육・해・공 군 장병들을 모아놓고 자신에 대한 충성맹세를 하는 결의대회를 실시하였고,17) 같은 해 8월 28일에는 총정치국이 ‘소위’ 이상 인민군 장교들에게 김정은을 배신 하지 않고 어떠한 배신행위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맹세 및 서약문을 작성하도 록 하였다.18) 이는 김정은이 집권 초기 자신의 정권이 얼마나 불안정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 김정은은 북한 주민들에게 핸드폰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외부의 정보가 북 한 내부에 확산되자 2014년 11월 국가안전보위부에 휴대전화를 감시할 수 있는

‘1080상무조’라는 조직을 신설하고 여기에서 당 기관과 간부를 제외한 사법・행 정기관의 간부, 그리고 일반 주민의 휴대전화를 임의로 검열하고 회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영훈, 2015, p. 18). 이는 김정은이 2010 년 중동과 아프리카지역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혁명인 ‘재스민 혁명’19)의 교훈을

16) 김정일 시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은 무려 10년 넘게 자리를 유지하였다.

17) “북 인민군 결의대회… 김정은에게 충성맹세.” 「연합뉴스」. 2012년 1월 10일.

18) “정부당국자 북 군 장교 충성서약 받는다.” 「연합뉴스」. 2012년 8월 28일.

19) ‘재스민 혁명’은 2010년 12월 18일부터 2011년 1월까지 북아프리카 튀지니에서 시작된 민주화 요구 민중시위를 말한다. 이로 인해 23년 동안 튀지니를 장기 집권했던 제인 엘아비디네벤 알리 대통령이 물러났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재스민 혁명으로 촉발된 민주화운동은 요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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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북한 내부에 외부의 정보유입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둘째, 김정은의 젊은 나이와 국정경험 부족이다. 이는 김정은의 국정운영 능력 을 말하는 것으로서 김정은은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후계자의 자리에 앉았고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후계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따라서 후계수업 부족에 서 오는 국정운영 능력 부족은 원로엘리트들을 통제하고 북한 인민들로부터 신 임을 받기에는 본인 스스로가 불안하다고 판단했다. 김정일이 생존 시 김정은의 후계체계에 이상이 없도록 측근 인물들로 심어놓았다고는 하나, 김정은의 지지 세력이 확고하지 않은 상황에서 김정일의 갑작스런 사망은 김정은으로서는 불 안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북한과 같이 1인 독재체제하에서 절대 권력자의 갑작 스런 죽음은 엘리트집단 간에 권력투쟁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 다. 따라서 국정경험이 부족하고 자기 지지기반이 약한 김정은으로서는 절대 권 력자로서 위엄을 보여줌으로써 국정운영의 기강을 바로잡고 내부 권력투쟁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셋째, 전통적인 수령통치방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김정은이 김일 성・김정일의 통치술을 답습하는 것으로서 최고 존엄에 대한 절대적인 승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수령은 유일무이한 절대적 존재다. 다시 말해 수령인 자신에게 이견을 제시하거나 지시를 불이행하고 불만을 표시하는 간부 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숙청을 보여줌으로써 절대 권력자에 대한 도전을 사전 에 차단하고 그 권위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2013년 신년사를 통해 ‘김 일성-김정일 애국주의’를 새로운 통치이데올로기로 내세우고 ‘김일성 따라 하 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김정은이 선대 수령들의 혁명위업을 계승하고 자신이 그 정통성을 이어받은 후계자라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권위를 유지하겠다 는 것이다.

김정은이 이와 같이 군부와 당 등 엘리트 집단에 대한 지속적인 숙청과 배제의

알제리, 수단, 이집트, 예멘, 바레인 등 중동과 아프리카의 회교권 국가들로 확산되어 2011년 10월에는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었다. 당시 북한은 이러한 여파를 우려하여 언론과 주 민통제를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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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통치를 통해 권력안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북한에 아직 자신의 정권이 공고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부적으로는 엘리트 집단의 군기를 바로 잡고 인민 들로부터는 능력 있는 통치자로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며, 외부적으로는 비록 자신이 나이는 어리지만 북한을 이상 없이 통치하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보여주 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15년 국정원이 국회정보위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김일성 체제의 리더십 이 100이라면 김정일은 50~70, 김정은은 10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또 김정일 시대에는 실권 없는 엘리트의 탈북이 이루어 졌다면,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는 체제 핵심 엘리트의 탈북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되고 있다 고 밝혔다.20) 실제로 북한에 김정은의 공포통치가 자행되면서 이에 겁을 먹은 엘리트 집단의 탈북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5월에는 아프리카 주재 북한외교 관이 가족과 함께 국내로 입국하였고, 2014년에는 동남아 외교관이 탈북해 국내 로 입국하는 등 김정은 정권 들어 북한 해외 주재관들의 탈북이 2013년 8명, 2014년 18명, 2015년 20명 등 총 4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21) 또 2015 년 12월에는 북한군 정찰총국 소속 대좌 출신 고위 군관이 북한을 탈북하여 국 내로 입국하는 등 김정은 정권 들어 핵심 엘리트 계층의 탈북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북한에 김정은의 공포통치가 자행되면서 핵심 엘리트계층이 반김정은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 과시형 통치

김정은은 권력 승계 이후 현지 지도를 하면서 인민들과 과감한 스킨십을 실시 하는가 하면, 복장을 풀어 제치고 주민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등 인민 친화 적 행보를 보여주었다. 또 김정은은 소형 어선을 타고 해안초소를 방문하는가 하면, 잠수함에 직접 승선하여 해군 훈련을 현지 지도하고, 휴전선 인근 군부대

20) “북 권력 핵심 보위부 장관급 간부도 탈북.” 「동아일보」. 2015년 10월 22일.

21) “북 엘리트 엑소더스… 김정은 체제 균열 오나.” 「매일경제」. 2016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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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직접 방문하여 작전지침을 하달하는 등 통치자로서 대범한 모습도 보여주었 다. 이와 함께 김정은은 2014년 3월 공군장교들의 비행능력을 테스트하겠다며 장성급 간부를 소집하여 비행훈련을 실시하였고, 5월에는 군단장급 이상 육군간 부들에 대해 전투능력을 테스트하겠다면서 실탄사격을 직접 주관하는가 하면, 7월에는 해군장성들을 강원도 원산 인근 동해안에 불러 모아 놓고 수영대회를 열어 그 능력을 평가하기도 하였다.

북한은 2015년 10월 10일 열병식에서 신형탄도미사일을 공개하면서 핵탄두를 탑재한 전략로켓으로 소개하고, 10월 12일 김일성・김정일 추모전시회에서는 잠 수함탄도미사일(SLBM) 모형을 보여주며 핵 실전배치를 주장하였다. 또 2016년 3월 9일에는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핵탄두 소형화・표준화에 성공했다고 주장 하며 핵탄두 내 기폭장치로 추정되는 물체의 사진과 함께 핵탄두 설계도를 공개 하였다.22) 이는 김정은이 자신들의 핵개발 능력을 대외적으로 공개함으로써 국 제사회의 파장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군부대를 현지 지도하면서 부대관리와 훈련에 열성과 모범을 보인 해부대 지휘관과 정치지도원에 대해서는 ‘영웅’칭호나 현지 ‘진급’이라는 파격 적인 선물을 주는가 하면, 반대로 부대훈련이나 사격 성적이 미흡한 부대의 지휘 관과 정치지도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강등이나 보직을 해임시키는 등 상과 벌을 엄격히 적용하면서 군 기강을 바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로 김정은은 2014년 4월 북한군 제681군부대 산하 포병부대의 포사격훈련장을 시찰하였는데, 이 부대의 사격 명중률이 저조하자 심하게 질책하고 이 부대를 해체했으며, 이 부대에 근무하는 간부 167명에 대해서는 계급을 강등시켰다고 한다.23)

김정은이 그동안 현지 지도를 통해 보여준 통치스타일은 아버지 김정일에 비 해 개방적이고 공개적인 통치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김정일이 ‘폐

22) 북한은 이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과학・기술자들과 만나 “핵탄을 경량화해 탄도로켓 에 맞게 표준화・규격화를 실현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2016년 3월 9일.

23) “김정은 4월 간부 167명 대규모 강등.” 「마이이치신문」. 2014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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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형・은둔형’ 지도자라면, 김정은은 ‘개방형・공개형’ 지도자라는 것이다. 이는 김정은이 어린 나이와 국정경험 부족이라는 자신의 핸디캡을 북한 주민들에게 불식시키려는 데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후계자 시절부터 할아버지 김일성의 체중, 헤어스타일, 복장착용방 식, 손동작에 이르기까지 김일성의 외모를 그대로 모방하고 다녔으며(이승열, 2015, p. 15), 권력 승계 이후에는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실시하던 육성 신년사를 그대로 낭독하는가 하면 인민들과 과감한 스킨십을 실시하고, 제7차 당 대회를 통해서는 과거 김일성이 사용했던 ‘노동당 위원장’직을 자신이 감투를 쓰는 등

‘김일성 따라 하기’를 하고 있다. 이는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에게 우상으로 추앙 받고 있는 선대 김일성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인민들에게 김일성에 대 한 향수를 유발시키고 자신이 김일성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후계자라는 것을 표 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24)

김정은이 이와 같이 과시형 통치술을 전개하고 있는 이유는 첫째, 자신의 통치 자상 확립 차원이다.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은 18년 통치기간 동안 대중연설은 물론 인민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는 ‘은둔형 통치술’을 전개하였다. 김정일은 1992년 4월 25일 ‘인민군창건 60주년’ 행사장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 게 영광이 있으라”25)고 외친 것이 김정일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대중연설이었 다. 김정일이 이와 같이 은둔형 통치술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김일성 으로부터 20년이 넘는 충분한 후계자 수업과 검증을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다져놓았기 때문으로 보인다.26) 이에 비해 김정은은 짧은 후계자 수업으 로 인해 인민들에게 자신의 능력은 물론 통치자로서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는

24) 북한은 이에 대해 “우리의 최고 영도자, 최고사령관 동지께서는 젊으시다”며 “김일성 주석이 불과 15세에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0세 때에 인민으로부터 태양송가, ‘조선의 별’을 받았으며 20대에 항일유격대를 창건했다”고 하면서 김정은을 김일성의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서 그 우월 성을 강조하였다. “조선의 태양은 영원하다.” 「로동신문」. 2012년 1월 28일.

25) “북한 김정일과 다른 김정은 ‘쇼맨십’ 통치스타일.” 「연합뉴스」. 2014년 12월 12일.

26) 김정일은 1973년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 1974년 4월 14일 ‘유일사상체계확립 10대 원칙’을 추진 하였고, 1982년에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통해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확립시켰다. 또 1984년에는 ‘8・3인민소비품운동’을 전개하는 등 후계자로서 그 능력을 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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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김정은은 과시적이고 인민 친화적 통치술 전개를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이 능력 있는 통치자라는 이미지를 주입시킬 필요가 있었 던 것이다.

둘째, 통치력의 과시이다. 김정은이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통치술을 펼치고 있 는 것은 자신의 어린 나이와 국정경험 부족이라는 핸디캡을 북한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북한에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고 김정은 정권이 등장했을 때 우리를 포함한 국제사회에서는 국정경험이 부족하고 나이 어린 김정은이 북한을 과연 어떻게 통치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였 다. 따라서 김정은은 자신의 이러한 핸디캡을 불식시키고 능력 있는 통치자라는 모습을 인민들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나 이 많은 원로들을 대동하고 공개 활동을 하는 모습이나, 서해 및 휴전선 일대를 직접 현지 지도하는 모습, 군 고위 장령들에 대해 그 능력을 평가하는 모습, 미국 농구선수 ‘로드먼’을 초청하여 친선농구대회를 개최하는 것 등은 김정은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이 같은 공개 활동을 실시함으로써 자신이 개방된 지도자라는 것을 홍보하는 한편, 북한을 이상 없이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알 리기 위한 차원에서 실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은의 이와 같은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통치술은 그의 어린나이에서 비롯 된 과시형 권력행보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즉 어린 나이에 최고 지도자로 서 인민들에게 추앙받고 싶은 욕구가 대내・외적인 파격적인 행보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이승열, 2015, p. 45).

이상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김정은의 통치술은 그의 성장환경과 성격, 김일 성・김정일의 통치스타일, 그리고 북한이 처해있는 대내・외적 상황 등이 복합적 으로 작용하여 형성된 통치술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그림으로 도식하면 <그림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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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김정은 통치술 형성

Ⅲ. 김정은 시대 북한 군사정책

1. 김정은 군사정책

가. 공세적 정책

김정은은 2013년 1월 1일 육성 신년사를 통해 2013년을 “싸움준비완성에 일 대의 전환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군부대 훈련장을 수시로 현지 지도하였 다. 또 각종 훈련 시에는 남한의 주요 시설을 상정해 놓고 타격하게 하는 등 실전과 같은 훈련을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7)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정은은 권력 승계 초기에는 주로 격려 위주의 부대방문을 실시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훈련지도와 신무기 시험 참관 등 실 전적인 현지 지도에 중점을 두고 실시하고 있다. 또 군 관련행사 참가도 열병식,

27) 북한은 김정은이 2014년 6월 5일 군부대를 현지 지도하는 모습을 조선중앙TV를 통해 보도했는 데, 이때 우리의 백령도와 연평도에 배치된 스파이크 미사일기지와 청와대가 북한군의 타격목표 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포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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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경기, 회의, 공연 등의 행사 위주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핵 관련 장비, 미사일 부품・발사 참관 등 군사력 과시에 중점을 두고 실시하고 있다. 2016년 들어서는 김정은이 4・5차 핵실험 명령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참관에 이어 핵무기 병기화 사업, 로켓엔진 지상실험 참관 등 전략무기 관련 활동이 다수 식별되고 있다.28)

<표 2> 김정은 군부대 현지지도

2016년 7월 5일 기준

연도 12년 13년 14년 15년 16년

횟수 25회 14회 7회 12회 14회

특징 부대방문

(22회, 88%)

훈련참관 (6회, 43%)

훈련참관 (5회, 71%)

신무기 시험참관

신무기/사격 참관 (10회, 71%)

* 자료: 정보사령부, 2016.

이와 함께 김정은은 군부에 대한 신속한 권력 재편작업도 병행하였다. 2012년 7월 이영호 총참모장 숙청을 시작으로 장성택, 현영철로 이어지는 엘리트 집단 의 핵심인물을 제거하고 군단장급의 80% 이상을 상대적으로 젊은 50대로 교체 하는 등 신속한 구조 조정을 통해 권력을 재편성하였다.29) 또 군 장령들의 계급 을 진급시켰다가 강등시키는 등의 롤러코스트식 인사를 실시하고 있다.

김정은이 이와 같이 군단장급 인사를 젊은 층으로 세대교체시키고, 계급장을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하는 ‘계급 길들이기’를 하고 있는 것은 군 엘리트들에 대 한 군기잡기와 더불어 군부의 ‘충성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상호 견제와 경쟁을 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고 있 는 것이다.

김정은은 어려운 경제현실 속에서도 대남우위의 군사력을 유지하는 데 역량 과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2014년 국방백서에 의하면 남북한 군사력은 <표 3>에 서 보는 바와 같이 그 격차가 더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8) 김정은은 2016년 1월 1일부터 7월 5일까지 총 21회의 군 관련 행사를 참가하였는데, 이 중 핵・미 사일 관련 행사가 총 16회로 76%를 차지하였다.

29) “배 나온 지휘관 전쟁 못해… 군단장급, 50대로 물갈이.” 「중앙일보」. 2015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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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남북 군사력 비교

2014년 10월 기준

구분 한국 북한

병력

육군 49.5만여 명 102만여 명

해군 7.0만여 명 6만여 명

공군 6.5만여 명 12만여 명

계 63만여 명 120만여 명

주 요 전 력

지 상 군

부 대

군단(급) 12(특전사 포함) 15

사단 44(해병대 포함) 81

기동여단 14(해병대 포함) 74(교도여단 미포함)

장 비

전차 2,400여 대(해병대 포함) 4,300여 대 장갑차 2,700여 대(해병대 포함) 2,500여 대 야포 5,600여 문(해병대 포함) 8,600여 문

다련장/방사포 200여 문 5,500여 문

유도무기 60여 기(발사대) 100여 기(발사대)

해 군

수 상 함 정

전투함정 110여 척 430여 척

상륙함정 10여 척 260여 척

기뢰전함정 10여 척 20여 척

지원함정 20여 척 40여 척

잠수함정 10여 척 70여 척

공군

전투임무기 400여 대 820여 대

감시통제기 60여 대(해군 포함) 30여 대

공중기동기 50여 대 330여 대

훈련기 160여 대 170여 대

헬기 690여 대 300여 대

예비 병력 310만여 명 770만여 명

* 자료: 국방부, 2014, p. 239.

국방백서에 의하면 북한군 전력은 병력 1만여 명이 증가한 것을 포함하여 전 차와 장갑차는 약 400여 대가 늘어났고, 방사포는 700여 문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구형전차인 T-54/55 계열의 전차를 천마호・선군호30) 등 신형전차

30) 선군호 전차는 기존 전차에 포탑을 개량해 사거리가 길고 속도도 시속 70km로 기동력이 뛰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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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교체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해군은 함정 10여 척이 증가한 총 820여 척으로 이 중 약 60%가 평양~원산 이남기지에 전진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16년 8월 24일에는 신포 앞바다에서 SLBM 시험발사가 성공함으로써 수중 미사일 발사능력을 보유 하였고, 또 레이더에 잘 잡히지 않으면서 고속기동이 가능한 신형 ‘파도 관통형 고속함정(VSV: Very Slender Vessel)’31)을 서해함대 사령부에 배치한 것으로 알 려지고 있다.32) 북한은 수중전 능력 보강을 위해 탄도미사일 탑재가 가능한 신포 급 잠수함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 정보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공군은 큰 변화는 없으나 1950년대에 생산된 MIG-15/17기는 구형이긴 하나 부품을 북한이 직접 생산하고 정비가 손 쉬어 가동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은 전투기의 약 40%를 평양~원산 이남지역에 전진 배치시켜 놓고 있 어 미그기종의 경우 휴전선 인근기지에서 발진 시 남해안까지 약 20여 분이면 도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북한은 미사일 전력을 통합하고 자동화함으로써 언제라도 김정은이 발사명령 만 내리면 바로 발사할 수 있는 체계로 개편하였고, 또 전략군 예하에 편성되어 있는 스커드・노동・무수단 사단을 여단으로 개편하고 그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도 록 하였다. 이와 함께 북한은 동해상에 중・단거리 미사일을 수시로 발사하고 있 는데, 이는 북한이 미사일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시험발사로 판단된다.33) 북한 은 김정은 집권 이후 지금까지 37발의 탄도미사일(스커드 16발, 노동 11발, 무수 단 6발, SLBM 4발)을 발사하였는데, 이는 김정일이 집권 18년 동안 발사한 탄도 미사일 16발의 2배가 넘는 양이다. 현재 북한은 스커드미사일 600여 발을 포함

며 대량 인명살상이 가능한 열압력탄 발사기를 장착하고 있어 방어력도 크게 높인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31) ‘파도 관통형 고속함정(VSV: Very Slender Vessel)’은 레이더에 잘 잡히지 않는 스텔스기능을 보유하고 있으며 속도 또한 50노트(시속 90km) 이상 고속 기동이 가능한 함정으로 기동성이 뛰어나다.

32) “북 시속 90km 스텔스함정 서해 배치… NLL 근처 출몰.” 「중앙일보」. 2015년 5월 27일.

33)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미사일은 그 정확도가 많이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스커드 미사일의 경우 그 공산오차율(사정거리 대비 공산오차 반경)이 0.15~0.3%로 세계평균오차율 0.01~0.05%에 비해 10배 정도 뒤처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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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총 1,000여 발의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으며 대포동 미사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전배치를 완료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표 4> 북한의 실전 배치된 탄도미사일 현황

구 분 SCUD-B SCUD-C 노동 무수단 화성-13(추정)

사거리((km) 300 500 1,300 3,000 이상 12,000

탄두중량(kg) 1,000 770 700 650 650~1,000

로켓단수 1단 1단 1단 1단 2~3단

배치연도 1988년 1988년 1988년 2007년 ?

보유수량 22~600기 90~200기 50기 6여 기

* 자료: 문장렬, 2016, p. 13.

이 외에도 20만여 명에 이르는 북한군 특수전부대는 개전 초 한국군 후방에 집중 침투하여 국가 및 군사 주요 시설을 타격하고 후방 교란작전을 전개함으로 써 우리의 초기 전투준비태세를 방해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2014년 7월 육・해・공군과 특수전부대가 통합된 ‘섬 상륙훈련’을 실시 하였고, 2015년에는 NLL 인근에서 700여 발의 포사격 훈련을 실시하였다. 또 기갑 및 기계화 부대의 전방지역 돌파훈련과 전방군단의 도하훈련도 강화하는 등 공세적 훈련을 통한 전쟁수행 능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김정은은 2014년 10월 북한군 제526대연합부대를 현지 지도한 자리에서 “싸 움은 계획대로만 진행되지 않고 예상치 못한 정황이 조성될 수 있다”며, “훈련에 서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현대전에 맞게 부단히 개선해야 한다”34)고 강조하였다.

또 김정은은 직접 포병부대를 불시에 방문해 초시계를 들고 실사격까지 걸린 시간을 점검하는가 하면, 수시로 훈련장을 방문하여 훈련 상태를 점검하는 등 공세적 훈련을 실시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북한은 2012년 3월 22일 대남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3일 안에 남한 전역을 점령하고 전쟁을 종결한다는 ‘3일 전쟁’35) 시나리오를 공개하였다. 또

34) “북 김정은 잇단 군부대 시찰… 연합실기동훈련 참관.” 「연합뉴스」. 2014년 10월 24일.

35) ‘3일 전쟁’ 시나리오에 따르면 북한은 ① 1일차에는 25만여 발의 포탄과 1,000여 발의 미사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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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은 2012년 8월 ‘7일 전쟁계획’36)이라는 새로운 전쟁계획을 승인하고 새 작전계획에 따른 훈련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군부대를 자주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은 2012년 9월 ‘전시사업세칙’을 9년 만에 개정하였다. 개정된 전시사업세칙에 따르면 전시선포시기를 추가하고, 전시선포 권한도 기존 최고사 령관 단독결정에서 당 중앙위원회, 당 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최고사령부 공동명령으로 조정하였다.37) 이는 북한의 엘리트 집단이 젊은 나이와 국정운영 경험이 부족한 김정은이 즉흥적이고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 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2016년 4월 8일까지 총 225회의 공개 활동을 실시하였는 데, 그중에서 군 또는 군 관련 활동이 118회로 52.4%를 차지하였다(정보사령부, 2016). 김정은이 이와 같이 군부대 훈련장을 자주 찾는 것은 군부의 힘을 이용하 여 자신의 정권을 공고화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라도 한반 도에서 무력도발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김정은이 이와 같이 실전중심의 군사훈련을 직접 지도하고 군 고급간부들에 대한 사격대회나 전투기 조종, 전투수영을 직접 지도하는 등 공세적으로 군부대 를 운용하고 있는 것은 북한과 같이 군사주의를 국가운영방식으로 채택하고 있 는 나라에서는 군부의 장악 없이는 안정적인 정권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한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김정은이 군대훈련을 직접 진두지휘하고 나이 많은 군 장령들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북한 주민들로부터 경험

이용 선제공격으로 남한과 미군 기지를 초토화하고, 특수전부대를 투입하여 남한의 군사시설을 타격하며, ② 2일차에는 항공육전부대를 투입하여 남한의 주요 도시에서 시가전을 전개하고 전 차 및 장갑차, 대량살상무기 등을 이용 한미 전력을 궤멸시키며, ③ 마지막 3일차에는 점령한 남한 주요 도시에 대해 안정화 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우리민족끼리」. 2012년 3월 22일.

36) 김정은이 승인한 ‘7일 전쟁’계획은 북한이 기습남침을 하거나 국지전이 전면전으로 확전될 경우 미군이 본격 개입하지 못하도록 7일 안에 남한 전역을 점령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1일차에는 특정지역에 기습공격을 실시하고, 2일차에는 이를 전면전으로 확대하며, 3일차에는 핵・미사일 등 비대칭전력을 이용 총공격을 감행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4일차에는 특수전병력을 투입하여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것이다.

37) “북 전시사업세칙 개정, 남한 내 종북세력 요청 있을 때 전쟁 선포.” 「조선일보」. 2013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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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족한 어린 지도자가 아닌 원숙한 장군 지도자로서 신뢰를 얻기 위한 것으로 도 보인다.

나. 군사모험주의 정책

김정은은 2012년 4월 6일 당중앙위원회 일꾼들과의 담화를 통해 “우리는 당의 선군혁명로선을 틀어쥐고 나라의 군사적 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해나가야 합니 다”38)라고 하면서 김정일에 이어 강성국가 건설에 있어 군사강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김정은은 정권출범 이후 세 번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한반 도에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특히 2016년 9월 9일에 실시한 5차 핵실험 은 4차 핵실험에 비해 그 강도가 2배에 달하는 것으로 북한의 핵 제조 기술이 날로 향상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2013년 3월에는 ‘정전협정’ 파괴 와 ‘남북한 불가침 합의’를 전면 폐지한다고 발표하고 바로 이어 최고사령부의

‘제1호 전투태세’ 돌입과 ‘전시상황’을 선포하는 등 한반도에 6・25전쟁 이후 최 고의 군사적 위기상황을 조성하였다. 2014년 3월에는 파주와 백령도, 삼척 등지 에서 남한의 주요 시설을 탐지하던 북한 무인항공기가 추락되었고,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경기도 연천지역에서 우리의 민간단체가 실시한 대북전단 살포 지역 을 향해 고사총을 발사하기도 하였다.39) 2015년 8월 4일에는 DMZ 남측지역에 목함지뢰를 설치하고 이로 인해 한국군이 피해를 입는 등 대남 군사도발과 위협 을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김정은 정권의 군사행동은 김정은이 정권장악 초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외부의 위기를 생성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실시된 계획된 군사 적 모험주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군사적 무력시위와 대남군사도발을

38) 「조선중앙통신」. 2012년 4월 19일.

39) 북한은 2014년 10월 10일 16시 50분경 경기도 연천지역에 대북전단을 띄우던 장소를 향해 14.5mm고사총 수십 발을 발사하였다. 이 중 2~3발이 우리 측 민통선 일대 군 주둔지와 연천군 중면사무소 인근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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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외부로부터 위기를 생성하고 이를 이유로 인민들에게 결속을 강요하고, 이 것을 자신의 체제안정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군사적 무력시위를 통해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군사능력을 과시함과 동 시에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그 주도권을 장악할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2014년 한 해에만 공수낙하훈련은 20%, 포병 실사격 훈련은 50% 이상 증가하는 등 특수전부대의 야간 낙하훈련과 NLL 인근에서 포병사격훈련을 집중 실시하였다. 또 북한군 특수전부대인 경보병부대40)가 추진철책을 넘어 군사분계 선(MDL) 인근까지 침투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고 있고, MDL 인근에는 한국군 GP와 유사한 건물을 만들어놓고 이를 점령하는 훈련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 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북한군의 훈련모습은 김정은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제라도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을 하기 위한 준비 차원으로 판단된다.

한미 정보 당국자에 따르면 북한은 핵무기의 미사일 탄두 탑재 능력이 우수하 고 정밀도가 높은 KN-02 단거리 미사일과 300mm 신형 방사포 개발에 능력을 향상시키고 있으며, 미사일 탄두 모양 또한 기존의 원뿔형에서 삼각뿔로 교체함 으로써 탄착지점의 정확도를 높이고 탄두 중량을 줄이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 하고 있다.41) 또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이동식 차량발사대(TEL)를 100대(노동 27~30대, 무수단 27대, 스커드 B・C 38~40대) 이상 보유하고 있어 어디서나 신속하게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발사 시험 횟수도 급격히 늘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정은이 군사모험주의를 군사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 김정일의 경험적 요인을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집권 당시 북핵문제로 국 제사회와의 마찰을 ‘벼랑끝전술’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전술을 전개하면서 그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적 실리를 챙겼다. 김정은 역시 아버지 김정일이 닦아 놓은

40) 북한군 특수전부대는 25kg 군장을 메고 하룻밤에 40km, 주야로 120km를 주파하는 강행군과 400m의 강을 30분 안에 수영해 횡단하는 훈련, 그리고 김일성 주석이 천리행군을 하며 일본을 무찔렀다 면서 경보병부대에 3일간 쉬지 않고 걷는 천리행군도 훈련기간에 한 차례씩 하도록 하는 등 강훈련을 실시하고 있다(박용환, 2015, p. 129).

41) “삼각뿔 탄두로 개량… 중량 줄이고 명중률 크게 높여.” 「문화일보」. 2015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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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전술’에 기초한 군사적 모험을 통해 자신의 정권안정은 물론 어려운 경 제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정은의 군사정책인 공세적 정책은 주로 한반도 에서 전쟁수행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내부적 군사력 운용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군사모험주의 정책은 김정은이 자신의 정권안정과 대외 협상력을 강화 하기 위한 군사적 무력시위와 도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군사정책 영향 요인

김정은 정권의 군사정책인 ‘공세적 정책’과 ‘군사모험주의 정책’은 김정은의 통치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김정은이 보여준 무자비 한 숙청과 군부의 계급 길들이기, 주요 직위자에 대한 공개처형 등의 공포통치는 군부에 공포심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공세적 군사훈련과 대남우위의 군사 력 보유를 통해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지면 한반도에서 무력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 공세적 군사정책을 추구토록 하였고, 과시형 통치술은 김정은이 자신의 핸 디캡(어린 나이, 국정경험 부족)을 불식시키고 자신이 능력 있는 지도자라는 것 을 보여주기 위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대남군사도발, 한반도 전쟁위기설과 같은 대범한 군사행동을 전개토록 하는 군사모험주의 정책을 추구하게 만들었 다는 것이다. 이를 그림으로 도식하면 <그림 2>와 같다.

이 외에도 김정은의 군사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한미연합훈 련에 따른 군사적 위기감 고조, 북핵문제로 인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강화, 재 스민 혁명과 같은 독재정권의 몰락 등이 있다. 다시 말해 대외적 압박과 불안 요소 또한 김정은으로 하여금 보다 강력한 군사정책을 추진토록 영향을 미쳤다 는 것이다.

지금 김정은이 보여주고 있는 공포통치와 과시형 통치술은 지속되면 될수록 북한 군사정책 또한 공세적이고 군사모험주의 방향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정은 자신이 아직 권력 공고화에 성공했다는 확신이 서지 않은 상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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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통치자로서 내부적으로는 엘리트 집단 간의 권력다툼을 사전에 차단하고, 북 한 주민에게는 능력 있는 통치자라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외부 적으로는 과감한 군사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군사강국으로서 그 위상을 확립하고 국제사회에서 협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인민들의 먹고사는 문제보다 자신의 권력 공고화에 쏟는 역 량이 지나칠 경우 내부적으로는 주민들의 불만이 확산될 수 있고, 외부적으로는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북한제재로 인해 김정은 정권이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그림 2> 김정은 통치행태가 군사정책에 미친 영향

Ⅳ. 평가와 전망

1. 평가

김정일 시대 북한 군사정책은 대내적으로는 취약한 권력기반을 공고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군정치를 내세우고 강성대국 건설을 표방하여 내부통제와 내 부불만 수습에 임하는 한편, 대남 면에서는 서해교전, 미사일 발사,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과 같은 무력도발을 통해 위협을 고조시켜 남남 갈등을 유발하고 전쟁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반전평화 여론을 고양시켰다. 대외 면에서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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및 6자회담 당사국들과 핵 문제를 내세워 경제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끈질긴 협상을 이어 온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박현옥, 2012, p. 329).

김정은 정권에서의 북한 군사정책 역시 아버지 김정일에 이어 선군정치에 의 한 강성국가 건설을 표방하면서 어려운 경제난으로 남한을 능가하는 군사력 건 설이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핵・미사일을 중심으로 한 비대칭 전략무기 개발과 이를 이용한 군사정책 추진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정일 시대와 차이점이라면 김정은이 보다 공세적이고 모험주의적인 군 사정책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김정은이 젊은 나이와 국정경험 부족에 서 오는 현상으로 보여 진다.

이 같은 김정은 정권의 군사정책은 내부적으로는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인해 북한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고, 외부적으로는 국제사회와의 마찰로 인해 북한의 대외활동이 차단되는 등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이 그동안 보여준 군사정책을 북한의 체제유지 면, 대외관계 면, 남북관계 면으로 구분하여 평가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체제유지 면: 주민 불만 확산

김정은은 2012년 신년사에 “현 시기에 인민들의 먹는 문제, 식량문제를 푸는 것은 강성국가 건설의 초미의 문제”42)라며 농업생산 증대를 위한 노력을 강조하 였고, 이어 4월 6일 당중앙위 일꾼들과의 담화에서는 “현 시기 인민생활문제를 풀고 나라의 경제를 추켜세우는 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강성국가건설 구상을 실 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나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43)라고 강조하였다. 이 같은 김정은의 발언은 집권 초기 북한의 식량사정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식량난 해결 없이는 자신의 정권안정이 어렵다고 판단한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의

42) “위대한 김정일 동지의 유훈을 받들어 2012년 강성부흥의 전성기가 펼쳐지는 자랑찬 승리의 해로 빛내이자.” 「로동신문」. 2012년 1월 1일.

43) 「조선중앙통신」. 2012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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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난과 경제난은 좀처럼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한 ‘2015년 세계 식량 불안정 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2014~2016년 영양결핍 상태인 북한 주민수가 1,050만 명(이는 북한 주민의 41.6%에 해당)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또 5살 이하 어린이의 27.9%가 만성적 영양실조라고 밝혔다.44) 이러한 인민들의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2013년 군사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20%

가 넘는 102억 달러(11조 2,842억 원)를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4차 핵실험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되자 2016년 3월 28일 노동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을 통해 “혁명의 길은 멀고 험하다. 풀뿌리를 씹어야 하 는 고난의 행군을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45)고 하면서 ‘제2차 고난의 행군’ 가 능성을 내비쳤다. 실제로 최근 평양에서는 주민들에게 매달 1kg씩 식량을 거두 는 등 고난의 행군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북한은 농민들에 게는 군대 지원용으로 식량을 추가로 더 내놓으라고 하면서 주민들 사이에 불안 감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46) 여기에 2016년 들어서는 제7차 노동당 대회를 앞두 고 평양시민을 포함한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70일 전투’를 실시하였고, 70일 전투가 끝나자 바로 이어 ‘200일 전투’에 돌입하는 등 연이은 집단노력동원으로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RFA」방송에 의하면 2016년 1월 1일 양강도 삼수군에 위치한 포성역 건물 김일성 초상화 밑에서 김정은을 비하하는 낙서가 발견돼 사법당국이 필체조사 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낙서에는 “김정은 개새끼”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47) 또한 북한 간부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전쟁 광기에 빠진 김정은의 폭언과 인민들을 혹사하는 행위들을 가리켜 ‘부나비(불을 보고 날아드는 나비)는 불에 타 죽기 마련’, ‘남잡이(남을 해치는 것)가 제잡이(자신을 해치는 것)’라며 비난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북한에서는 김정은을 비난하는 낙서가 자주 발견되

44) “북, 주민 태반이 영양부족인데 핵 놀음만 할 텐가.” 「국민일보」. 2015년 5월 29일.

45) “조선의 최강의 힘.” 「로동신문」. 2016년 3월 28일.

46) “북, 평양주민에 매달 식량 1kg씩 거둬.” 「조선일보」. 2016년 3월 29일.

47) “북, 양강도 기차역에서 김정은 개새끼 낙서 발견.” 「미 RFA」. 2016년 3월 23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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