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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의 전개과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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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의 전개과정 고찰

A Study on the Development Process of Budyonnovsk(Будённовск) hospital hostage crisis

박 희 성 (Huiseong Park)

육군군사연구소 전쟁사연구담당 책임연구원

ABSTRACT

The First Russian Chechen War began on 31 December 1994. And after six months, the Russians seemed to win. However, the Chechen rebels carried out a new type of military operation. It was terrorism within Russian territory. In June 1996, Shamil Basayev led his battalion into Budyonnovsk. Then they carried out military operations in the city, captured hospitals and detained many hostages. The Russian Unit's suppression operation failed, and negotiations were carried out. As a result, Basayev's battalion, which achieved its purpose, returned to Chechnya.

Eventually, this Budyonnovsk hostage crisis was a turning point in the first Russian-Chechen war. Although much weaker than the Russian army, Chechnya gained an opportunity to inform the world of his opinions through Budyonnovsk.

And gave Russia a new form of fear. It was to be blamed for the many civilian victims. But it stopped the Russian military operations and made them come out as the negotiating tables.

The conflict between Russia and Chechnya continues to this day. Russia carried out two Chechen wars. And after that, there was continuing conflict between terrorism and anti-terrorism. The incident was a new type of conflict between Russia and Chechnya. But it was not the subject of research because it happened during the war. In this paper, we focused on the history of the military.

Key words : Budyonnovsk(Будённовск), Russian-Chechen War, Terrorism, Hostage, Shamil Basayeb(Шамиль Басаев)

주 제 어 : 부됴놉스크, 러시아 체첸전쟁, 테러, 인질, 샤밀 바사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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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러시아-체첸전쟁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벌어진 사건이며, 러시아의 블라디미 르 푸틴(Влади́мир Пу́тин)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체첸 자치공화국에는 ‘전쟁이 없다’

라고 선언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정세진 2005). 1919년 소련 붕괴 후 자치공화국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그 대표적인 곳이 체첸공화국(Чечен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이었다. 체첸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하르(Джоха́р Дуда́ев)는 1991년 11월 2일, 러시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러시아연방에서 탈퇴하고 공식적으로 독 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독립이 불가하다고 천명한 러시아는 2번의 전쟁을 수행했다.

이는 러시아가 수행한 첫 전쟁이었다. 또한, 러시아군의 허약함을 여실히 보여준 전쟁 이었으며, 국방개혁을 통해 러시아군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 전쟁이었다.

1994년 시작된 제1차 전쟁에서 러시아와 체첸은 충돌했다. 물론 강력했던 소련군을 계승한 러시아군은 전형적인 재래식 군대를 투입했다. 이에 대해 상대적으로 전투력 이 열세였던 체첸군은 도시지역작전, 산악게릴라 작전 등으로 대항했다. 하지만 이런 기존 전투양상으로는 전쟁이 종결되지 못했다. 이때 극적 반전을 가져온 것이 바로 예상치 못했던 러시아 영토 내에서의 군대와 민간인에 대한 테러였다. 1995년 후반기 와 1996년 전반기 체첸군은 두 번의 인질극을 통해 러시아를 협상테이블로 이끌었다.

그중 결정적인 군사작전은 첫 번째 발생한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이었다. 하지 만 이 사건은 그 중요도에 비하여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앞서 연구된 대표적인 테 러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테러들과 달리 대도시가 아니어서 크게 이슈화되 지 않았으며, 또한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러시아-체첸전쟁은 러시아사와 군사사(軍事史)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주된 연구대상이 아니었다. 체첸전쟁을 다룬 연구들의 주된 내용은 역사적·종교적·국제관계 적 관계 등이 주 내용이었다. 전쟁과 직접 연관된 내용이거나 군사적·전쟁사적 관점에 서의 학술연구 결과는 적었다. 전갑기는 박사학위를 통해, 제1차 전쟁의 승패요인을 작전술 차원에서 분석하고, 전쟁의 전개과정을 5개 국면으로 나누어 사건을 재구성하 였으며, 이를 여러 요소로 분석하는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제1차 전쟁의 군사작전만 을 다루었다는 한계가 있다(전갑기 2019). 서춘식은 논문에서 제2차 체첸침공과 민군 관계를 정리했다. 이 논문에선 러시아군이 침공 준비에 있어 어디에 주안점을 주었는 지를 확인할 수 있으나, 제2차 전쟁의 군사작전을 직접 다루지는 않았다(서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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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그리고 그로즈니를 중심으로 한 육군군사연구소의 번역서는 도시지역작전의 교 훈을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평원전투와 산악전투, 그리고 테러 관 련 작전은 다루지 않은 범위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박희성 2020).

체첸전쟁과 테러에 관련된 연구로는 손영훈이 전쟁 이후부터 2010년까지의 체첸군 의 게릴라전과 테러,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의 체첸반군 주요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을 포함한 국가테러를 중심으로 다루었다(손영훈 2011). 윤영미 역시 체첸전쟁 이 후 푸틴 대통령의 대체첸 자치공화국 반테러 정책과 체첸 여성 테러리스트의 활동과 특징을 집중분석했다(윤영미 2005). 하지만 이 두 논문은 제2차 전쟁이 종료된 이후 극심했던 테러사건을 주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전쟁 중에 있었던 테러사건은 전쟁의 일환으로 보아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체첸의 ‘민족독립 군사 작전’, 러시아에서는 끔찍한 ‘테러’의 현대적 시작점이라는 데 있어 의미가 크다. 체첸 전쟁 수행과정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와 범위의 군사작전이던 것이다. 그리 고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은 러시아-체첸전쟁의 전환점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체 첸군의 저항방식이 변했고, 그런 게릴라전과 테러의 효과를 확실하게 본 계기가 되었 다. 단기적으로는 휴전회담이 본격화되었고 전쟁의 종결을 앞당기게 되었다. 장기적으 로는 체첸군의 테러를 통한 자신들의 입장표명과 경고는 계속되어 현재까지도 지속되 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테러집단과 협상했다는 오명을 안게 되었으며 테러에 대 해 두려움을 가짐과 동시에 대테러작전을 적극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기존 연구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직 어떠한 사건인지 제대로 살펴지지 않 았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부됴놉스크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군사사적 관점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그 연구수행의 방법은 이 사건을 다룬 외국의 2차 사료(도 서, 기사 등)를 주로 할 것이다. 러시아-체첸전쟁에 대한 1차 사료, 특히 군사적 자료 는 전쟁의 특성과 수행국가의 특성상 거의 외부에서 다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리고 이 사건을 최초로 다루는 것인 만큼 그 전개과정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하여,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따라서 먼저 체첸군의 부됴놉스크 진입과 병원 점령, 러시아군의 진압작전과 체첸군의 복귀를 시간순으로 서술하겠으며, 이후 부됴놉스크 사건이 휴전협상에 미친 영향을 정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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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의 전개

1. 샤밀 바사예프의 작전 개시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반이 지난 시점인 1995년 6월, 노자이 유르트(Ножай Юрт) 와 샤토이(Шатой)를 함락한 북카프카즈 군관구 사령관 크바쉰(Квашнин) 중장은

“체첸산맥에서 수행된 전쟁의 마지막 국면이 종말을 고했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 면, 두다예프 군대의 잔당은 이미 중앙통제가 불가한 4개의 군사집단으로 분리되었다 고 했다. 이들은 샤토이 남쪽, 다르가 협곡, 노자이 유르트 지역, 바무트(Бамут) 부근 에 위치했다(Кра́сная звезда́, 1995/06/15;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ета, 1995/06/16). 하지만 두다예프는 전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를 취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1996년 6월 14일, 러시아에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샤밀 바사예프(Шамиль Басаев)가 이끄는 무장단체가 러시아 스타브로폴의 인구 6만의 도시 부됴놉스크에 진입하였다(Carlotta Gall and Thomas de Wall, 1998, 257). 일부는 주 택가에서 행인과 건물을 향해 총을 쏘았고, 도시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무장세력은 인 질을 잡은 후 병원을 점령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범위와 성격을 지닌 테 러작전을 감행했던 것이다(Lietuvos rytas, 1995/06/16;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ета, 1995/06/16).

샤밀 바사예프과 대원 45명은 카마즈(КамаЗ) 화물차 2대를 이끌고 검문소 70개를 통과하여 150㎞ 떨어진 부됴놉스크에 도착했다. 사전에 파견된 바사예프 대원들도 대 열에 합류했다(А. Кольев, 1997, 110-111). 바사예프는 베데노(Ведено)에서 출발하여 다게스탄의 영토를 통과해 부됴놉스크까지 오는 동안 방해받지 않았다. 이들은 화물 (груз) 200개를 수송한다고 가장했고, 군용차량처럼 색칠한 쥐굴리(Жигули)가 호송 했다. 그리고 러시아군 복장이나 교통경찰 복장을 착용한, 슬라브인처럼 생긴 대원들 이 운전했다(Сегодня, 1995/06/16).

6월 14일(토) 아침, 바사예프 일행은 부됴놉스크 근처에서 지역방위대 전초기지에서 저지당했지만, 제복을 입은 슬라브 군인으로 위장한 운전수 2명은 속도를 늦추고 화 물 200개를 호송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량이 정지하지 않고 검문 없이 통과해 버리자, 다른 전초기지에 정지시켜 검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59). 차량이 도시에 거의 도착한 12시 15분쯤, 프라스코프 예프 근처의 지역방위대 초소가 차량을 저지했다. 위장군인들은 필요한 서류를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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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지 않았지만, 트럭의 검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지역방위대 본부로 가서 설명하겠다고 제의했다. 차량은 스트로폴스키(Ставропольский) 거리를 따라 도시로 이동했다. 또 다른 순찰차량이 선두에 서고 운송차량 1대가 지역방위대 장교 2명을 태운 뒤 뒤따랐다. 12시 30분쯤 지역방위대 본부에 도착하자 무장세력이 먼저 사격을 가했다. 호송하던 지역방위대원 3명이 죽고 1명이 부상했다. 그 후 무장세력은 자동소 총 및 유탄발사기 사격으로 본부 건물을 공격했다(А. Кольев 1997, 112).

근무하던 중위는 호송차량에서 인근에서 살해되었다. 건물 입구에서 고위장교가 기관총 사격으로 죽었다. 또한, 무장한 체첸 대원이 건물로 진입하여 시민과 대원들에 게 자동무기를 발사했다. 지역방위대 건물과 인근 거리에서 20분 동안 교전이 지속되 었고, 그 후 무장세력은 여권 및 비자 서비스센터 방문자들을 인질로 잡았다. 지역방 위대 본부 건물에 생존한 중사의 증언에 따르면, 건물 입구에 서 있는 대원 2명 중 1 명은 즉사하고, 다른 1명은 소총으로 대응사격을 했다. 바사예프의 무장세력은 비무장 대원들도 사살했다. 결국 무장세력은 건물을 신속히 탈취했지만 머물지 않았다(А. Ко льев 1997, 113).

러시아 대응군도 곧바로 구성되었다. 지역방위대가 공격당하자 고위행정부와 인접 군부대에 즉각 통보되었다. 내무군이 진입작전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게 되었다. 12시 40분쯤 부됴놉스크 인근 헬기 연대에 상황이 접수되자, 연대장 코발리오프 대령이 지 휘하고 장교 32명으로 구성된 전투단이 신속하게 편성되었다. 그들은 서둘러 차량으 로 도심에 도착했고 즉시 테러범들과 교전했지만, 8명이 사망하고 연대장 등 8명이 부상했다. 부상자들은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리고 내무군 특수분견대가 스타브로폴 에서 파견되었고, 헬리콥터가 도시 상공에 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장세력은 지 역주민들과 섞여 있어 헬기에서 발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0-161).

바사예프의 대원들은 도심에 위치한 내무군 본부, 지역 통신사와 은행 건물, 시청을 공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했다(Olga Oliker 2001, 28). 다른 2개 무리는 시장과 청소년 센터 건물 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소규모 무리로 산개하여 도보나, 탈취한 자동차를 몰면서 사방에 사격을 가했다. 주민들이 시장 광장 근처에서 살해되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59-160). 이후 목격자들은 체첸 여성 저격수들 이 가장 냉혹하고 침착하며 프로페셔널하게 목표물을 선정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ета 1995/06/16). 1개 무리는 헬리콥터와 강습연대 장교들을 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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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사격했다. 일부 체첸 대원들이 군사기지로 진입하려 했으나, 강화된 경계로 인 해 실패하고 철수했다. 시청을 점령한 무장세력은 체첸 국기를 게양했고, 그제야 누가 이런 가혹한 테러를 저질렀는지 분명해졌다. 부시장 등 많은 공무원이 인질로 잡혔다 (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0).

바사예프는 시청 건물은 고층이고 유리 외벽이어서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무장세력도 부상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 힘들어지고 있었다. 부상자들이 어디로 후송되었는지를 관찰한 바사예프는 칼리닌 거리에서 무리를 모아 도시 동쪽 외곽에 있는 병원 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머지 대원들에게도 인질들을 데리 고 병원으로 집결하도록 했다(Carlotta Gall and Thomas de Wall 1998, 257). 병원으로 가 는 길에 인질이 되기를 저항한 일부 시민들은 죽임을 당했다(Буденновск, Wayback Machine).

병원에는 의료진 450명과 환자가 있었고, 도중에 인질로 잡은 300명이 추가되었다.

이렇게 억류된 인질은 모두 1,200여 명에 이르렀다. 인질들은 지하실을 포함한 병원 병동 전체에 분산되었다. 그리고 병원 건물에 방어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지붕에는 중기관총 2정을 설치하고 주위 사방에 사격했다. 기관총 사격으로 통근버스에 있던 6 명이 사망했다. 1시간 반 전에 병원으로 후송되었던 지역방위대원과 조종사들은 처형 되었다(Carlotta Gall and Thomas de Wall 1998, 257-258; 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0).

2. 병원 점령, 러시아의 대응

병원을 점령한 바사예프의 대원들은 인질 중 6명을 본관 앞에서 사살하여 다른 인 질들을 위협했다. 부비트랩도 설치했다(Olga Oliker 2001, 28). 3시가 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1단계가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40명이 죽고 69명이 죽었다. 바사예프 대원의 손 실은 사망 6명 부상 12명이었는데, 부상자 중에는 바사예프의 동생 셰르바니도 있었 다. 그리고 대원 3명이 포로로 잡혔다(Сегодня 1995/06/16).

모든 바사예프의 대원들이 병원지구까지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치 과 정에서 한 무리가 버스와 승객들을 인질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화 물차를 빼앗아 도시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부됴놉스크에서 약 12km 떨어진 지점에서 차단되어 포위되었다. 또 한 소그룹이 도심을 빠져나갔다는 징후도 있었다. 병원이 점 령된 지 1시간 반 만에 러시아 블라고다르니(Благодарный) 연대가 부됴놉스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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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1-162).

긴장이 고조되었다. 내무군 특수부는 병원을 포위했지만 공격하지 못했다. 바사예프 는 대원 1명당 인질 10명을 죽이겠다고 말했다(Известия 1995/06/20). 가장 나쁜 상 황은 러시아의 이해 부족이었다. 그들은 누가 지휘하는지, 몇 명인지도 몰랐다. 테러 범들이 왜 부됴놉스크를 목표로 선택했는지도 초기에는 분명하지 않았다. 한편 바사 예프 동생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인질 중 소방여단 부사령관의 혈액형이 일치하 는 것으로 확인되어서 수혈하게 되었다. 체첸 전통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 피를 준 것은 그 사람과 피를 나눈 형제라고 했다. 이 때문에 부사령관을 살려두었을 뿐만 아 니라, 협상과정에서 중개인으로 임명해 러시아 정부 관리들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전 달하도록 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2).

바사예프는 자신을 밝히지 않은 채 러시아 당국에 적대행위 중단과 체첸에서의 러 시아군 철수, 인질 석방을 대가로 유엔 대표들이 중재하는 두다예프와의 협상 등을 요구했다. 이날 저녁 러시아 행정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휴가 중인 빅토르 체르노 미르딘(Виктор Черномырдин) 총리를 대신해 올레그 소스코벡(Олег Сосковец) 부 총리가 주관했다. 내무부 차관 미하일 예고로프(Михаил Егоров)가 단장이 되어 내 무부 작전단이 구성되었다. 작전단에서는 내무부와 국방부 작전부대를 파견하기로 했 다. 저녁, 예고로프(Его́ров) 부총리, 빅토르 예린(Ерин) 내무장관, 세르게이 스테파신 (Степашин) 연방정보국장이 부됴놉스크로 왔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2-163).

스타브로폴에서도 현지 내무부 본부에 작전단이 서둘러 결성되었다. 전국의 정부시 설 보안이 강화되었고, 모든 도로와 접근로를 따라 추가적인 내무군 전초기지가 설치 되었다. 모스크바에서도 테러방지 조치가 취해졌다. 러시아 정부는 체첸 출신 시민들 을 모두 조사하기 시작했다. 부됴놉스크에 부상자가 많고 병원 자체가 테러범의 손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스타브로폴뿐만 아니라 젤레노쿰스크(зелёнокумск), 게오르기 옙스크(Георгиевск), 피아티고르스크(Пятиго́рск)에서도 신속대응여단이 파견되었다.

부상자들은 젤레노콤스크로 후송되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3).

지역방위대 본부에서 최초 상황이 발생한 뒤, 바사예프의 병력이 제한받지 않고 도 시 깊숙이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내무군과 국방군의 협조 부족도 있었다.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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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헬리콥터 부대도 있었다. 내무군은 그런 부대와 전혀 협조가 되지 않았다. 부대 가 도시에 진입할 때도 내무군과 군부대는 상호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남쪽에서 젤레노쿰스크 작전부대가 진입하고 북서쪽으로부터 스페츠나즈가 헬리콥터 기지에 착 륙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그 누구도 명령을 하달하지 않았다. 전개된 지 한 시간 반 동안 명령을 기다리기만 했다. 결국 스페츠나즈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부대로 나누어 내무군 대원들과 함께 시내 소탕작전에 나섰다. 그 후에 스페츠나즈에 지역을 봉쇄하고 있던 젤레노쿰스크 작전부대가 합류했다. 다른 부대는 없었다. 이즈음 무장 세력은 병원에 집결했고, 출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А. Кольев 1997, 113). 여러 부 대가 집결한 상황에서 모스크바에서 온 관리들이 병원을 타격하는 것을 거부했다(А.

Кольев 1997, 113). 보리스 옐친(Борис Ельцин) 대통령은 “즉각 인질들을 석방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이번 공격은 냉소와 잔인함에 전례가 없 다.”고 비난했다(TIME 1995/06/26).

야간은 비교적 차분하게 지나갔다. 처음에는 의료인력들이 전화를 받게 했지만, 다 음 날 아침부터는 직접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연방정부 작전단은 인질석방을 요구했 고 테러리스트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바사예프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했다. 협상은 다음 날 시작되었다. 6월 15일 7시, 체첸 내무장관 을 지낸 이브라히모프 사령관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는 바사예프의 보좌관 아스람베 크 바다로프와 만날 수 있었다. 이브라히모프는 1시간여에 걸친 협상 동안 여성, 어린 이, 환자를 풀어 줄 것을 간청했다. 아스람베크는 초기에 말한 정치적 요구사항을 되 풀이하면서 거부했다. 그는 즉각적인 기자회견을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러시아군 지휘 관들은 테러범에 대해 무력사용을 하겠다는 의견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당분간 협상을 유지하기로 했다. 부됴놉스크 지역 작전단은 한 번 더 협상을 해보기로 했다. 11시경 예린 내무장관이 회의에 참석하려 했지만 100m 떨어진 곳에 멈추게 하고 건물 내부 로 들어오는지 못하게 했다. 두 번째 회의에서도 구체적인 결과는 합의되지 않았다.

병원을 점령한 무장세력은 인질들을 위한 음식과 약 반입만 허용했다. 바사예프는 체 첸에서 온 장로 대표단이나 지역 체첸 대표자들에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3).

그 무렵 알파와 베가 특수목적부대, 모스크바와 북카프카즈 군관구의 내무군 부대, 드제르진스키 사단의 특수단, 스타브로폴 제21공수강습여단, 제68군단 소속 여단 등 작전부대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도시와 병원은 이중 경계망으로 포위되었다. 도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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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화학공장 보안에 특별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 화학공장이 폭발하면 스타브로 폴 지역에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에 테러 목표일 수도 있다고 판단되었 다. 이런 위급한 상황을 고려하여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휴가를 단축하고 모스크바로 복귀했다(А. Кольев 1997, 163-164).

3. 협상과 기자회견

세계 통신사들은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두다예프는 같 은 날 밤 이타르타스(ITARTAS)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의 어떤 부대에도 러시아 영토에서 테러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А. Кольев 1997, 164). 한편 바사예프는 러시아 정부에 최후통첩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 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전 세계에 그와 동포들이 본 체첸 비극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아스람베크를 통해 14시에 기자회견을 열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 지만 두 차례 시간이 연기되자, 18시에 인질 사살을 지시했다. 이어 20시까지 기자단 이 도착하지 않으면 인질 10명을 추가로 사살하겠다고 경고했다. 언론사 대표 30명은 병원에 늦게서야 도착했다. 마침내 기자회견을 통해 여러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바 사예프가 작전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명확한 정보들이 러시아 지도자들과 세계에 전 해졌다. 가장 유명한 체첸군 사령관 중 한 명인 샤밀 바사예프 대령이 직접 지휘했다 는 것이 확인되었다(Известия 1995/06/17).

바사예프는 협상시작과 동시에 두다예프와 아슬란 마스하도프(Асла́н Масха́дов)의 지시도 없이 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베데노가 함락되어 상부 와 통신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이 작전의 원래 목적지는 모스크바였다. 그러나 지역방 위대 전초기지를 매수할 돈이 부족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됴놉스크는 우연히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체첸 지역사회에는 러시아군 폭격과 포 격에 의해 무의미한 민간인 사망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체첸 대원들은 러시아군 을 향해 총격했지만, 러시아군은 주민들을 공격했다. 모든 지역사회를 포기하고 나니, 러시아로 가는 길 외에 다른 길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 테러 여정의 목적은 체첸에서 의 전쟁을 멈추거나 아니면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바사예프는 자신의 일행을 정보 대대라고 지칭했다. 그는 부됴놉스크에서 공격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며, 이 이유로 많은 인질을 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그는 많은 대원이 부상했기 때문에 병원으로 이 동했다. 그는 부상자들 때문에 작전을 멈추지 않겠다고 사전에 서로 동의했음에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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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고, 부상자들을 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러시아군과의 총격전으로 바사예프의 대대는 심지어 병원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인질들도 총에 맞았다. 비 록 앞으로는 군인과 지역방위대, 오몬(ОМОН) 대원이 먼저 총살되겠지만, 여성과 아 이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러시아 작전단은 스타브로폴 지역에 거주하는 체첸 인 2천 명을 사살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 시민이었기 때문에 바사 예프는 상관하지 않았다. 바사예프는 부됴놉스크에 침입한 초기 몇 시간 동안 민간인 사상자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자신의 군대가 지역방위대와 군대와 싸웠으며 민간인 사 상자는 부수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바사예프는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면서 체첸전 쟁 종식, 두다예프 대통령과의 협상 개시, 러시아군의 체첸 철수 등 최후통첩 조건을 되풀이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5).

<그림 1> 부됴놉스크 관련 지도

Ⅲ. 러시아군의 진압작전

1. 진압작전 전개와 실패

6월 16일, 러시아의회 두마의 오전 전체 회의에서 인질 사건이 논의되었다.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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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령관들이 병력투입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옐친이 G7 회담을 위해 캐 나다 핼리팩스(Halifax)로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무력사용에 여부를 결정을 내릴 수 없 었다. 옐친은 이 비극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협상권을 부여하겠다고 했다 G7 회담에서 각국 정상들은 러시아와 체첸 양측을 모두 비난했다. 기자들의 질문에 옐친은 반군은 이마에 검은 띠를 한 끔찍한 범죄자일 뿐이라고 비난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5-166).

예고로프가 다른 탈출구를 모색했다. 그는 중개인을 통해 부됴놉스크를 떠나는 것 에 동의한다면 비행기와 지정한 경로와 목적지, 원하는 만큼의 돈을 제공하겠다고 했 다. 바사예프는 최후통첩 요구조건만 되풀이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4). 결국 정부 수뇌부들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병원 강습이 결정되었다. 예고로프가 작전을 지휘했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인질들이 사살될 것을 우려하여 직접 상황을 통제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러시아연방정보국(ФСБ) 소속 알파부대를 투입하기로 했다(А. Кольев 1997, 113).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이 수립되 었다. 강제 진입이 시작되면, 알파 특수신속대응부대가 병원 본 건물을 공격하여 점령 하고, 모스크바 군관구 특수신속대응분견대는 외상병동을 점령하고, 모스크바시 특수 신속대응분견대는 전염병동을 점령하고, 내무부 특수신속대응분견대는 주차장을 점령 한다. 베가 분견대와 스페츠나즈 부대는 알파부대를 엄호하기로 했다. 장갑차량이 지 원사격을 하기로 했다. 저격수 위치도 지정되었다. 하지만 6월 15일 5시에 개시예정인 진압작전을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Известия 1995/06/21,28). 알파부대 본진도 아 침쯤에야 병원에 도착했다(А. Кольев 1997, 113).

진압작전은 계획대로 5시에 개시되었다. 알파부대가 1층에 진입했을 때 작전이 중 지되었고, 부대들은 300m 떨어진 공터까지 철수했다(А. Кольев 1997, 114). 처음에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첫 제대는 주차장 근처까지 접근했고, 다른 두 제대는 외상건물과 전염병 건물을 점령했다. 인질 86명이 발견되었다. 첫 제대가 주차장에서 병원 본건물로 기동하기 시작했을 때 바사예프의 병력이 기관총과 유탄발 사기, 자동무기 사격을 가했고, 작전제대는 포화를 뚫고 겨우 출입문에 접근했다. 다 른 두 제대도 격렬한 사격을 받았다. 전염병 건물을 점령한 대원 5명이 구내식당을 통해 병원 본 건물까지 도착하는 데 성공했지만, 수류탄이 투척 되면서 안으로 진입 하지 못했다. 1층의 거의 모든 창문이 보호용 금속격자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출입문 이나 2층 창문을 통해서만 본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진압부대는 거의 3시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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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더 이상의 적극적인 조처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필요한 사격지원을 받지 못했 기 때문이다. 장갑차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고, 이후 장갑차가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6-167).

강습은 성공하지 못했다. 산발적인 총 격전이 계속되었지만, 곧 휴전과 협상을 위한 논의가 시작됐다. 9시 20분, 강습은 취소되었고, 석방된 인질들은 병원에서 나올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들 중 몇 몇은 러시아군에게 살인자라고 소리쳤다 (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7). 그래도 공격결과 인질 95명이 풀려날 수 있었다. 알파대원 3명이 사망 했고 부상자는 10명도 넘었다. 체첸 대원 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언론에서는 6명이 부상했다고 했다(А. Кольев 1997, 114).

그 후 두마의회 의장 카쉬피로브스키 (Кашпировский) 등이 바사예프와 협 상하기 위해 도착했지만, 협상에는 실패 했다. 의원들은 다시 바사예프 부대원들 에게 비행기 1대와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하는 어떤 나라에도 방해받지 않고 비행 할 수 있는 허가를 제공했다. 바사예프는 이번에도 거절했고 체첸전쟁에 대한 이전 요구를 되풀이했다. 러시아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체첸 대원은 단 한 명의 인질도 사 살하지 않았다. 12시 40분 러시아 협상단은 병원을 나섰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7). 바사예프는 인질 일부를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이어진 짧은 휴전 동안 인질 154명을 풀어주었는데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었다(Lietuvos aidas 1996/06/11-13).

14시 30분, 강습작전이 재개되었다. 약 1시간 동안 작전 진행 후, 작전종료와 추가 명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옐친은 핼리팩스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더 이상의 강습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명령으로 상황은 새로운 국면 을 맞이했다. 2차 작전에서 러시아군 5명이 사망했다(Известия 1995/06/28). 병원을

<그림 2> 진압작전 상황도 출처 : 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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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었다. 처음부터 바사예프군은 인질들과 함께 도시를 빠져 나갈 수단을 요구했다. 알파와 베가부대의 전문가들은 많은 인질이 잡혀 있는 병원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어디론가 이동하는 차량을 공격하는 것이 쉽다고 주장했다(А.

Кольев 1997, 114).

2. 바사예프의 요구 수용

체르노미르딘은 저녁 TV를 통해 체첸 무장세력은 유혈사태를 멈추고 무고한 사람 들을 석방하라고 부탁했다. 그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인질들의 자유를 확보하는 데 찬성한다고 말했지만, 러시아는 체첸에서의 전쟁이 북부 코카서스 지역 전체로 퍼져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Lietuvos aidas 1996/06/11-13). 야간에 바사예프는 기자 10명이 참석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두 번의 토요일 강습으로 인질 30명이 사망했으며, 시신은 지하실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시체를 보 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많은 체첸 대원이 죽었는지 밝히기를 거부하 면서 기자들에게 이번 강습으로 민간인 인질이 처형되지 않았다고만 확신시켰다. 그 리고 지금까지 처형된 인질은 총 11명이라고 말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9).

그날 밤 체르노미르딘은 바사예프와의 협상에 나섰다(А. Кольев 1997, 110-111).

체르노미르딘은 바사예프와 두 차례 전화통화를 통해 복귀하는 과정에서 대원들의 안 전을 보장하기 위해 동행할 소수 인질을 제외한 인질들을 석방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바사예프는 체첸에서의 러시아 군사작전이 완전히 종료되기 위한 공식 평화협상이 즉 시 시작되며, 자신의 부대를 위한 수송수단이 제공되며,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 지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3가지 조건을 제기하며 평화협상이 시작되면 나머지 인 질들은 석방하겠다고 했다. 바사예프는 처음에 러시아에서 체첸 관련 국민투표를 시 행할 것을 요구했으나 도중에 이 요구는 철회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9). 체르노미르딘은 모든 조건 이행을 약속하고, 협상대표단이 이미 구성되었으며 체첸복귀 준비가 되어있고 말했다. 체르노미르딘은 다만 체첸 협상대표 단을 두다예프가 이끌어야 한다는 요구에 동의하기를 거부했는데, 그의 행방과 연락 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Московский комсомолец 1995/06/20).

바사예프는 논의해야 한다며 그 제안에 최종 합의를 하지 않았지만, 협상을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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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위해 다음날 10시까지 기다리기로 동의했다. 체르노미르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날 아침 병원을 둘러싼 러시아군과 바사예프 대원 사이에 다시 총격전이 벌어졌다.

협상이 진행되던 6월 17일 내무군과 스페츠나즈, 알파부대가 3차 진압작전을 진행했 다. 알파부대가 은밀히 접근하는 동안에 스페츠나즈가 정문에 사격을 가했다. 진압부 대는 1층을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일부 인질들을 풀어주고 저격수와 기관 총사수 일부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머지 공간은 탈취하지 못했다. 2시간 후 재공격도 마찬가지였다(Olga Oliker 2001, 28). 바사예프는 지하와 옥상에서 기관총으 로 러시아군 장갑차에 대응했다. 중앙 복도에서 위치한 저격수들은 러시아군에 대비 하고 있었다(Carlotta Gall and Thomas de Wall 1998, 268).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상가들은 군부대가 독자적으로 작전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결국, 병원 탈환작전은 중지되었다(Olga Oliker 2001, 28). 6월 18일 10시에 바사예프 는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통보했다. 양측은 한 시간 후에 다시 전화하기로 합 의했다. 코발리오프와 오를로프는 합의문 초안을 완성하기 위해 두마 의원들과 함께 병원에 도착했다. 후에 바사예프는 다시 요구를 수정했다. 체첸에서의 전쟁 활동은 즉 시 중단되어야 하고 평화협상이 시작되어야 한다. 체첸 검찰총장 우스만 이마예프가 이번 협상에서 두다예프를 대표하여, 전쟁 종료와 평화협상 개시에 대해 러시아 총리 의 공식발표를 요구했다. 바사예프는 총리 발표 이후 여성과 어린이 100명을 즉시 추 가로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69).

체르노미르딘도 동의했다. 그러나 약속된 인질 석방을 준비하고 더 이상의 도발은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명령은 앞으로 몇 시간 안에 내려질 것이고 실행 여 부는 그 후 전화로 전달되기로 했다. 결국, 체르노미르딘은 협상을 통해 바사예프 대 원들이 체첸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체첸국경을 넘은 후 인질을 풀어주는 조건이었다(Matthew Evangelista 2002, 40) 러시아연방 정부의 성명서는 다음과 같았 다(The Chronicles of Hel, Wayback Machine).

러시아연방 정부 성명

러시아연방 정부는 부됴놉스크에 억류된 인질들을 석방하기 위해

1. 1995년 6월 19일 오전 5시부터 체첸 영토에서의 전투작전 및 폭격의 즉각 중단 을 보장한다. 이 조치와 함께 인질로 잡혀 온 어린이, 여성, 노인, 병, 부상자 모 두 석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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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첸분쟁의 평화적 해결 조건을 협상할 권한을 가진 대표단은 미하일로프를 단 장으로 하여, 보좌관으로 볼스키를 임명한다. 협상은 대표단이 그로즈니에 도착 하는 대로 1995년 6월 18일부터 곧바로 시작된다. 군 철수 문제 등 다른 모든 문 제는 협상테이블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3. 다른 인질들이 모두 석방된 후, 바사예프와 그의 일행에게 수송수단을 제공하고 현장에서 체첸 영토로 가는 수송로를 확보할 것이다.

4. 러시아연방 정부 공식대표 코로비니코프와 메드베디코프는 이 성명서를 바사예 프에게 전달한다.

러시아연방 총리 체르노미르딘 1995. 6. 18

바사예프는 스타브로폴 지역 행정대표들과 인질석방 절차와 체첸복귀에 대한 협상 을 계속했다. 그는 오후 5시까지 비행기를 제공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이렇게 짧은 시 간 안에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대신 이카루스 버스가 제공되었 다. 바사예프는 인질 130명을 동행하겠다고 했고, 코발리오프가 인질들과 동행하겠다 고 요청했다. 기자 동행도 논의했다. 15시 30분 세르게이 카발리오프 등 대신들이 병 원을 떠났고, 인질 126명도 함께 병원에서 풀려났다. 6월 20일 20시 체첸에서의 전쟁 활동은 체첸주둔 러시아연방군 사령관 쿨리코프 장군의 명령으로 종료되었다 (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70).

3. 바사예프 대대의 체첸복귀

바사예프는 그날 밤 체르노미르딘과의 대화 중에 다음 날 5시에 인질을 풀어주겠다 고 했다. 그러나 바사예프 부하들의 출국 절차와 인질석방을 위한 절차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 때문에 인질들은 합의된 시간에 풀려나지 못했다. 세부사항은 스 타브로폴에 있는 내무부 작전단장 빅토르 메드베디코프(Виктор Медведицков) 장 군과 바사예프가 협상하고 있었다. 마침내 체첸군의 귀환 경로, 동행할 인질 수, 이동 절차에 대해 합의했다(Сегодня 1995/06/21). 함께 가겠다는 기자들은 안전보장도 없 이 자원했다는 확인서를 작성하였고, 붉은 이카루스 7대가 제공되었다. 체첸 대원의 시신을 운반하기 위해 냉장트럭도 준비되었다(Известия 199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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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상황이 종료되었다. 바사예프는 최초 요구는 얻지 못했지만,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남기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러시아군이 제공한 버스를 타고 체첸으로 복귀하게 되었다(Olga Oliker 2001, 28). 15시 10분 그들은 버스에 탑승했다. 각 버스 에는 체첸군 8∼10명, 러시아 두마 의원 1∼2명, 기자 1∼2명, 인질 20여 명씩이 탑승 하였다. 인질들은 창가에 배치되었고, 체첸 대원은 중앙에 앉았다. 통로에 무기와 탄 약이 실렸다. 운전자는 인질 중에서 뽑혔고, 그 옆에 대원 1명이 착석했다. 부상자는 별도 버스에 탑승하여 필요에 따라 부상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전개 상황에 따라 나머지 인원이 작전할 수 있게 했다. 최종적으로 인질 114명, 언론인 11명과 두마 대 리인 9명도 함께 탑승했다. 탑승자 중에는 부됴놉스크 시장도 있었다. 바사예프와 함 께 얼마나 많은 체첸 대원이 병원을 나갔는지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바사예프에 따르면 작전 시작 전 127명의 대원이 있었다고 한다. 작전 중 16명이 사망하고, 15명 이 중상을 입었고 10명은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71).

15시 15분 행렬이 모즈도크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역방위대 호송차량이 동행했다. 헬리콥터와 항공기는 상공을 순찰했다. 지역방위대가 미리 도로를 통제했기 때문에 순조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알파부대는 매복을 준비했으나, 결국 명령은 하달 되지 않았다(А. Кольев 1997, 114).

버스대열은 순조롭게 북오세티야에 접근하던 중 급정지하게 되었다. 장갑차가 길을 막고 있었고, 인근에 헬리콥터 2대가 착륙해 있었다. 카바르니 노발카르와 북오세티야 의 내무장관은 지역주민들의 적대감 때문에 공화국 영토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는 공동발표를 했다. 쿨리코프 장군은 노선을 변경하여 300km나 더 걸리는 다게스탄 을 경유하여 베데노로 가게 했다. 바사예프가 항의했지만, 결국 동의했다. 버스대열은 다시 온 길로 따라 22시 30분에 스테프노야로 돌아왔다. 거기에서 네프테쿰스크(Неф теку́мск) 아치쿨락(Ачикулак)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다음날 5시 다게스탄 국경 키 즐랴르(Кизлярский)에 도달했고 2시간 동안 정지했다. 8시 30분에 하사브유르트(Ха савюрт)에 도착하여 마을광장에 멈춰 섰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환호하며 맞이했다. “샤밀! 샤밀! 영웅들을 위해 만세! 전쟁은 끝났다!” 버스대열은 즉시 지역방 위대와 오몬에게 둘러싸였다. 바사예프도 방어태세를 갖추었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71).

버스대열이 언제 다시 이동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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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예프는 언론에 공식발표를 했다. 그는 왜 하사브유르트에 정지했는지, 이것이 도발 인지 아닌지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복귀 여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인질들을 풀어줄 예정지인 체첸의 잔다크(Зандак)로 가야 한다 고 했다. 그리고 체첸 대원들은 베데노로 가겠다고 했다. 이어서 러시아군의 추가도발 시 인질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대원들과 자신의 안전에 대한 보장이 전혀 주 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Stasysw Knezys & Romanas Sedlickas 1999, 171-172).

마침내 8시간의 대기 끝에 4시 50분 다시 버스대열이 이동했다. 7시 10분 마침내 두다예프 세력권으로 남아있는 산악지대 최후 다섯 마을 중 하나인 잔다크에 도착했 다. 환호하는 군중들과 무장한 체첸인들, 바사예프의 형제가 만났다. 바사예프는 군중 들에게 연설했다. 그는 자신의 작전은 복수행위가 아니라 전쟁과 체첸국가의 전멸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고 했다. 병원에서 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바사예프와 이 스마일로프는 다시 한번 부됴놉스크 주민들에게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용서를 구했 다. 또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달라고 부탁했다. 인질들이 탄 버 스대열은 러시아로 복귀했다. 부됴놉스크의 비극은 일단락 되었다(Московский ком сомолец 19995/06/22).

Ⅳ. 부됴놉스크 사건의 영향

1. 부됴놉스크 사건의 결말

부됴놉스크 사건의 결과는 참혹했다. 하지만 바사예프의 복귀로 상황이 완전히 종 결되진 않았다. 바사예프 대대와 인질이 병원을 나오자마자 정밀수색을 통해 시신 6 구가 추가 발견하였다. 그리고 부됴놉스크는 시신을 묻기 시작했다. 러시아 국방부와 내무부 군인과 관리들도 시신을 매장했다.

피해자 수치는 발표 기관마다 조금씩 다르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전체 사건에서 민간인 129명이 숨지고 415명이 다쳤다. 이 중 18명이 부상자가 사망한 것이다 (Gazeta. Ru, 2002/10/04). 여기에는 최소한 105명의 인질 사망자가 포함된다(Буденн овск Wayback Machine). 그러나 별도추산에 따르면, 병원에 대한 특수부대 공격으로 166명의 인질이 사망하고 541명이 부상했다(Adam Dolnik 2007, 105). 최소 러시아 지역 방위대 11명과 군인 14명이 사망했다(Буденновск, Wayback Machine). 러시아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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럽평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민간인 130명, 경찰관 18명, 군인 18명이 사망하 고 400명 이상이 부상했다. 내무부에 따르면 러시아 주민 12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다 른 소식통들은 119명이라고 보도했다). 또 부상자 126명이 스타브로폴 병원에 입원했 으며, 이 중 군인 22명이 사망했다. 이들 외에도 환자 53명이 부됴놉스크 사건으로 고 통받았다. 시립 건물 54개와 민가 110채를 포함하여, 160개 이상의 건물들이 파괴되거 나 손상되었다. 인질 중 많은 이들이 트라우마를 겪었고 부됴놉스크의 새로운 시설에 서 치료를 받았다. 6월 22일 러시아에서는 애도의 날이 선포되었다. 바사예프 죽은 대 원들을 장사지냈지만, 다음 날 러시아군은 잔다크를 폭격했고, 폭탄이 묘지 일대에서 떨어졌다(Известия 1995/06/21).

부됴놉스크 사건의 중요성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인질극을 벌인 자들을 달래 기 위해, 협상하기 위한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행동은 러시아 정부의 입지를 크게 약 화시켰다. 둘째는 정부가 병원 탈환 노력을 수용하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군 계층 간 갈등을 낳게 했다(Olga Oliker 2001, 28). 또한 그 과정에서 러시아군의 작전이 중 단되었고, 이 기회를 활용한 체첸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 재편성할 기회를 얻었고 국가적인 게릴라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육군본부 2010).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옐친은 테러분자들의 요구를 들어준 모습이 되었다.

러시아 국민은 크렘린의 선전에 좋게 반응하지 않았고, 체첸 테러분자들의 전술을 비 난하기보다 오히려 러시아 보안군이 평온을 찾는 데 무능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Small Wars Journal 2012/10/30). 6월 20일 민족민주주의연합회는 바사예프가 처벌을 받 지 않고 부됴놉스크에서 떠나도록 허용하고 반군의 요구로 협상을 시작한 것은 정부 가 가장 싫어하는 것인 범죄집단과 반란을 정부가 인정하고 분리주의와 테러를 조장 하는 것을 한 것이라고 비난했다(А. Кольев 1997, 115). 그리고 6월 30일에는 니콜라 이 예르고프(Николай Егоров) 부총리겸 국무장관, 연방정보국장 세르게이 스테파 신, 빅토르 에린 내무부 장관, 예브게니 쿠즈네쵸프(Евгений Кузнецов) 스파브로 폴 주지사 등이 사임했고, 러시아에는 테러리스트의 정치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테러와의 전쟁과 대한 특별법이 채택되었다(Olga Oliker, 2001, 28).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은 전쟁의 전환점이라 일컫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를 기 점으로 체첸군은 게릴라전(또는 테러)으로 전쟁수행 방식을 전환하고, 양측이 휴전협 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체첸군은 약화되지 않고 이 전보다 더 강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Matthew Evangelista 2002,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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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휴전회담의 본격화

6월 18일, 체첸공화국의 평화조성을 위한 조직구성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6월 19일부터 30일까지 유럽안보위원회(ОБСЕ) 중재하에 2차례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로 즈니에서 첫 회담이 시작되었고 6월 22일까지 계속되었다. 무기한 전투행동 중지를 연장하기로 합의했다(Первая Чеченская Война, newsruss). 6월 27일부터 30일까지 제2차 협상이 개최되었고, 포로교환, 체첸군 해산·러시아군 철수·체첸에서의 자유선거 실시라는 대원칙에 합의했다. 7월 1일 회담에서 11월 5일이 선거일로 확정되었다. 그 리고 7월 24일 3차 회담이 개최되었고, 7월 29일부터 30일 사이에 군사문제에 대하여 합의했다. 여기에는 “군사행동을 즉각 중지한다. 전문감시위원회를 창설하고 루마노프 와 마샤다예프를 공동위원장으로 한다. 전쟁포로와 다른 인질들을 교환한다. 불법무장 단체를 해산하고 러시아군은 체첸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다. 공포스러운 행동과 파괴 활동을 중지한다.”라고 규정했다. 7월 30일 ‘체첸공화국 상황의 평화적 조정에 관한 합 의문(군사문제 영역에 관한 합의)’에 서명했다. 여기에는 사격중지, 포로의 일괄적인 상호 인계, 체첸군의 무기반납에 대해 규정했다(Ю.В.Лебедев, Ю.Д.Новиков, В.В.Ш толь 1999, 302)

물론 모든 합의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 휴전을 위반했다. 체첸군은 불법 무장단체가 아니라 ‘자위대’로서 마을로 돌아왔다. 협상으로 인해 한동안 긴장이 해소 되었던 체첸 전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8월 18∼19일, 러시아군은 아초이 마르탄(Ач хой-Мартан)을 봉쇄했다. 이런 상황은 그로즈니에서 회담에서 해결되었다. 8월 21 일, 체첸 야전사령관 알로우디 함자토프(Алауди Хамзатов)의 무장세력이 아르군(Ар гун)을 점령했지만, 연방군의 강력한 포격 후에 장갑부대가 진입하자 후퇴했다(Перв ая Чеченская Война, newsruss). 8월 21일 러시아군 총참모장 콜레스니코프(Колес ников)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체첸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은 정치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루빨리 결정하여야 한다. 브레스크의 평화(Бреский Мир, 전쟁도 아 닌 평화도 아닌)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다. 병력과 전투장비가 표적도 없이 대치하고 있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언제 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 참 난처하다. 사람들은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지쳐있다(Виктор Бранец 1998, 278).”

9월, 아초이 마르탄과 세르노보스크(Серноводск)는 정착지 민병대 때문에 러시아 군이 봉쇄했다. 체첸 측은 앞선 합의에 따라 자신들이 권리가 있는 자위대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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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 지역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9월 23일, 옐친은 매스컴을 통해 체첸공화국 국민에 게 성명을 발표했다. 옐친의 명령으로 러시아군은 체첸을 공격했고 갈기갈기 찢었다.

그런데 갑자기 평화주의자인 양 “러시아연방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체첸공화국의 문제 들을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신념은 확고합니다.”라고 강조했 다`. 이 발표에 대해 보리스 니콜라이비츠는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이는 얼굴을 피가 나도록 때려놓고, 자, 어떻게 화해를 할까요? 라고 지껄이는 것과 같다.”라고 평가했다 (Виктор Бранец 1998, 280-281).

10월 6일, 지난 4월 사마쉬키(Самашки) 전투를 지휘한 로마노프(Романов) 장군이 체첸 주둔군(ОГВ)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동시에 평화협상 러시아 대표 임무까 지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차량 폭발로 두개골과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혼수상 태에 빠졌고, 협상은 중단되었다. 차례로 체첸에 대한 보복공격이 있었고, 특히 두다 예프를 살해하려고 노력했다. 10월 8일, 두다예프를 목표로 로신 추(Рошни-Чу)에 대 한 공습이 진행되었지만, 두다예프 제거 시도는 실패했다(Первая Чеченская Войн а, newsruss). 당시에 ОБСЕ 산도르 메사로쉬(Сандор Мессарош) 단장도 현장에서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공군사령부나 방공군사령부 모두 자신의 부대가 아니라고 부 인했다. 크라스나다르(Краснодар)나 브제노브카(Буженовко)에 위치한 공군의 실수 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감찰국은 11월 3일에야 연방감찰원에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보고했다(Виктор Бранец 1998, 281-282).

10월 19일, 옐친은 크렘린 기자회견에서 체첸에 관한 두 가지 관심사항을 공개적으 로 이야기했다. 체첸사태는 그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가장 환멸적인 것이며, 1994년 가을의 발생한 대립이 전쟁 발발로 인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사라졌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옐친의 이런 얘기는 옐친 정권의 가장 큰 죄악이 전쟁을 실수로 일으켰다는 것을 스스로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Виктор Бранец 1998, 281).

Ⅴ. 맺음말

러시아군의 강습으로 시작된 제1차 러시아-체첸전쟁이 시작된 지 6개월 동안, 전투 의 양상은 계속 바뀌었다. 수도 그로즈니에서의 도시지역작전, 이어서 평원지역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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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악지역작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비록 희생은 막대했지만, 전쟁은 러시아의 단계적 승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체첸군의 패배는 확실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첸군은 새로운 형태의 전투 수행을 감행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 영토 내에서 벌 어진 군사작전 또는 테러였다.

1996년 6월 14일 샤밀 바사예프가 이끄는 무장세력은 부됴놉스크에 진입하였다. 최 고 내무군 지역방위대 본부를 공격한 뒤, 도심 내에서 주민들을 살해하고 시청 등 여 러 건물을 점령했고 체첸 국기를 게양했다. 이후 바사예프 일행은 지역 병원을 점령 하고 1,000명이 넘는 인질을 억류했다. 그들이 요구사항은 체첸에서의 러시아군의 철 수와 체첸과 관련된 선거를 러시아에서 실시하며, 자신들의 복귀를 보장하라는 것이 었다. 이런 체첸군의 행위에 대해 러시아도 즉각 반응하였다. 각지에도 진압부대가 부 됴놉스크로 집결하였고 협상도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세 차례의 진압작전은 결국 성 공하지 못하고 피해만 발생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협상을 통해 바사예프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0일 체첸에서의 전쟁활동을 중지한다는 체첸주둔 사령관 의 명령이 하달되었고, 선거에 대한 논의도 진척되었다. 그리고 인질을 대동한 바사예 프 일행은 체첸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러시아와 체첸의 테러문제는 국제적으로 중요시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 시발점 이라고 할 수 있는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는 게 현실이 었다. 이에 이 논문에서는 정치 외교적 접근방식을 제한하고,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의 경과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집중하면서 군사사적인 의미를 더하였다. 따라서 외국의 관련 2차 사료들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경과 과정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세밀하게 다루어 이 논문을 읽는 이가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하였 다. 또한, 이를 통해 러시아와 체첸의 테러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게 하였다.

다만 경과과정을 재구성하는 데 집중하여 연구의 영역을 확대하지 못한 것은 연구 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초적인 정리와 연구들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 런 성과들이 축적되면 종합적으로 정치적 외교적 분석 도구를 사용한 다양한 연구결 과가 손쉽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 사건에 대한 이 논문은 러 시아-체첸전쟁을 이해하고, 또한 지금까지 문제시되는 양국 사이의 테러문제를 이해 하는 데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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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접수: 2020. 11. 27. / 수정 접수: 2021. 1. 11. / 게재확정: 2021. 1. 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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