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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史講義 」 에나타난 正祖 의맹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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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史講義」 에 나타난 正祖의 맹자관*

— 「孟子條問」을 중심으로 —

1)정 성 식**

목 차

Ⅰ. 머리말

Ⅱ. 「경사강의」 맹자조문의 체제 와 내용

Ⅲ. 실용적 학문자세와 崇儒重道

Ⅳ. 「맹자조문」에 나타난 정조의 맹자관

Ⅴ. 맺음말

論文 抄錄

본 논문의 목적은 조선조 제22대 군주로 활동한 정조(正祖, 1752∼1800)의 문집인 홍재전서 의 「경사강의」 가운데 「맹자조문」을 중심으로 고찰함으로 써 정조가 맹자 에 함의되어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사상적 입장 을 견지하였는지를 해명하고자 함에 있다. 정조가 재위하였던 조선후기사회 는 내적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대 전란의 후유증과, 외적으로 서구 사상의 수용에 따른 세계관의 변화라는 그 시대의 내외적 특수성과 맞물려 성립된다. 이러한 대내외적 여건은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등의 여러 분야에 심각한 변동의 원인을 제공하여, 정치적으로는 그간 와해되었던 국가의 질서 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농업 생산의 기반을 다지

* 이 논문은 2012년도 영산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

❙ 논문투고일: 2012.05.30 / 심사개시일: 2012.06.09 / 게재확정일: 2011.06.23

(2)

는 일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정조의 통치철학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기반 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것이다.

「경사강의」, 「맹자조문」에서 정조는 부분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맹자 에 대한 기본 관점은 대부분 존숭하여 믿고 따르는 모 습이었다. 「경사강의」, 「맹자조문」에 드러난 정조의 사상적 입장은 인의(仁義) 와 성선(性善), 그리고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한 관심으로 집약할 수 있다.

정조는 이러한 맹자사상의 근본 원리들을 자연스럽게 현실적으로 구체적 이며 실용적인 학문세계로 연결되어 나가는 기본토대로 삼았으며, 그러한 사 상적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자 노력하였던 군주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정조(正祖), 경사강의(經史講義), 맹자조문(孟子條問), 인의(仁義), 성 선(性善), 왕도정치(王道政治).

Ⅰ. 머리말

홍재전서(弘齋全書) 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정조(正祖, 1752∼1800) 는 타고난 학자의 기풍을 지닌 조선조 22대 군주이다. 홍재전서 는 오 늘날 관련 학계의 많은 연구자들에게 그의 학문과 사상을 재조명하는데 있어서 긴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그의 문집 가운데 유교의 기본 경전에 대하여 신하들과 열띤 토론을 벌인 「경사강의(經史講義)」1)는 그가 걸출한 호학군주였음을 우리들에게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고전들에 나오는 핵심 개념들에 대한 질문을 신하들에게 던지면서 그 내용을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그 개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려고 했던 것이다. 「경사강의」의 「맹자조문 (孟子條問)」에 보이는 정조의 질문은 대체로 기존 주자학계의 편향된 자 세를 비평적으로 드러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반면, 초계문 신(抄啓文臣)2)들의 대답은 주자학을 변론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1) 경사강의 의 체제와 내용에 대해서는 제2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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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 초계문신의 교육이나 규장각의 정비 등에 서 알 수 있듯이, 정조는 당대의 학자 및 관료들에게 유교 경전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환기시켜 줌으로써 무엇보다 유학의 본래정신을 회복하 고자 많은 힘을 쏟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조는 평소 주자(朱子)를 대단히 존숭하는 자세를 보이지만, 기존 주 자학계의 학적 풍토나 학문자세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다. 주지하다 시피 정조가 재위하였던 18세기의 조선사회는 내적으로 임진왜란과 병 자호란이라는 대 전란의 후유증과, 외적으로 서구 사상의 수용에 따른 세계관의 변화라는 그 시대의 내외적 특수성과 맞물려 성립된다. 이러 한 대내외적 여건은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등의 여러 분야에 심각한 변 동의 원인을 제공하여, 정치적으로는 그간 와해되었던 국가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농업 생산의 기반을 다지는 일이 요청되었다. 따라서 정조의 통치철학도 이러한 시대적 분 위기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고 꽃피웠던 것이라 하겠다.

정조의 생애와 학문에 대한 기존연구는 많은 경우 역사학의 분야에서 개척되어 왔으며, 정치학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진전을 이루어 왔다.3)

2) 초계문신(抄啓文臣)은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의정부가 선발하고 규장각에 소속시켜 강의(講義)와 제술(製述)을 연마하던 문신들이다. 그들은 매달 구술고사와 필답고사를 통해 그 진취도를 점검받았다.

3) 정조의 생애와 학문에 관한 기존연구는 적지 않으나 본 연구와 연관된 자료 들을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정옥자, 조선후기문화운동사 , 일조각, 1997.

정옥자, 정조의 수상록 일득록 연구 , 일지사, 2000.

김문식,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 문헌과 해석사, 2000.

이태진, 조선유교 사회사론 , 지식산업사, 1989.

안병걸, 「정조 어제조문의 경학관」, 대동문화연구 39, 성균관대 대동문화연 구원, 2001.

안재순,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정조의 통치철학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 박 사학위논문, 1990.

김인규, 「홍재 정조의 학문관」, 온지논총 23, 온지학회, 2009.

박성순, 「정조의 실학적 경세관」, 한국실학연구 15, 한국실학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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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연구에서 정조의 통치철학에 대한 이론적 근거 내지 사상적 맥락과 관련한 탐구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라고 본다. 따라 서 본 논문에서는 홍재전서 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경사강의」 가운 데 「맹자조문」을 중심으로 고찰함으로써 정조가 맹자 에 함의되어 있 는 주요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사상적 입장을 견지하였는지를 해명하고 자함이 주된 목적이라 하겠다.

Ⅱ. 「 경사강의」맹자조문의 체제와 내용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에 들어있는 「경사강의」는 규장각 각신(閣 臣), 성균관과 지방의 유생 그리고 경연관 등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그 대부분은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 다. 그 초계문신의 답안 가운데 우수한 것을 초록하여 편집한 것이 바로

「경사강의」이다.

「경사강의」의 체제를 소개하면, 권64∼65의 근사록(近思錄)에 대한 문 답을 시작으로 하여 심경(心經, 권66)⋅대학(大學, 권67∼70)⋅논어(論語, 권71∼75)⋅맹자(孟子, 권76∼79)⋅중용(中庸, 권80∼83)⋅시경(詩經, 권84

∼92)⋅서경(書經, 권93∼100)⋅역경(易經, 권101∼105)의 뒤를 이어서 총 경(總經, 권106∼109)⋅강목(綱目, 권110∼119)의 순으로 편찬되어 있다.

이 중에 뒷부분의 10권에 걸쳐 수록된 강목은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 들과의 문답이다.

「경사강의」 가운데 「맹자조문」에 대한 대화와 토론은 「맹자」1, 「맹자」2,

「맹자」3, 「맹자」4로 편재되어 있다. 이것은 신축년(1781)⋅계묘년(1783)⋅갑 진년(1784)⋅병오년(1786)⋅정미년(1787) 등 5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맹

박현모, 「정조의 성왕론과 경장정책에 관한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9.

백민정, 「맹자 해석에 나타난 정조의 사유 경향 분석」, 철학사상 34,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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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1부터 「맹자」4까지 소개된 구성내용은 아래와 같다.

홍재전서 권76, 경사강의13, 「맹자」1 :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丑), 등 문공(滕文公), 이루(離婁)

홍재전서 권77, 경사강의14, 「맹자」2 :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

홍재전서 권78, 경사강의15, 「맹자」3 :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丑), 등 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

홍재전서 권79, 경사강의16, 「맹자」4 : 총론(總論), 양혜왕(梁惠王), 공손추 (公孫丑), 등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

「맹자」1과 「맹자」2는 신축년(1781)에 이시수(李時秀) 외 12명이 참여 하였고, 「맹자」3은 계묘년(1783)에 이현도(李顯道) 외 14명이 참여하였으 며, 「맹자」4는 갑진년(1784)에 이서구(李書九) 외 1명이 참여하였고, 병오 년(1786)에 정만석(鄭晩錫) 외 1명이 참여하였으며 정미년(1787)에 윤영희 (尹永僖) 외 2명이 답변한 것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초계문신으로 선 발되어 각기 소정의 학습을 거친 뒤에 문대(問對)에 참여한 것이다. 맹 자 관련 경의문대(經義問對)에 참여한 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축년(辛丑年, 1781) : 이시수(李時秀), 홍이건(洪履健), 이익운(李益運), 이종 섭(李宗燮), 이현묵(李顯黙), 박종정(朴宗正), 서용보(徐龍輔), 김재찬(金載瓚), 이 조승(李祖承), 이석하(李錫夏), 홍인호(洪仁浩), 조윤대(曺允大), 이노춘(李魯春)4)

계묘년(癸卯年, 1783) : 이현도(李顯道), 정만시(鄭萬始), 조제로(趙濟魯), 이면 긍(李勉兢), 김계락(金啓洛), 김희조(金熙朝), 이곤수(李崑秀), 윤행임(尹行恁), 성 종인(成種仁), 이청(李晴), 이익진(李翼晉), 심진현(沈晉賢), 서형수(徐瀅修), 신복 (申馥), 강세륜(姜世綸)5)

갑진년(甲辰年, 1784) : 이서구(李書九), 한상신(韓商新)

4) 弘齋全書 卷76~77, 「經史講義」13~14, 孟子1~2.

5) 弘齋全書 卷78, 「經史講義」15, 孟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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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丙午年, 1786) : 정만석(鄭晩錫), 김조순(金祖淳)

정미년(丁未年, 1787) : 윤영희(尹永僖), 윤광안(尹光顔), 이희관(李羲觀)6)

이와 같이 다섯 차례에 걸쳐 맹자 의 주요 구절에 대해 정조와 초계 문신 (抄啓文臣)사이에 지속적인 문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조가 주 요 구절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진술한 다음 초계문신들에게 의견을 묻고, 이에 대해 초계문신들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의 된 주요 구절들은 두 부류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맹자 라는 경전 자체의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는 내용들이다. 이는 말 그대로 ‘경학(經 學)’적 맥락에서 전개되는 문답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정조는 ‘호학 자(好學者)’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정조는 맹자 라는 경전 자체는 물론이요, 당시의 역사적 정황, 그리고 맹자 에 대한 제가(諸家) 의 주석(註釋)들에 두루 정통한 바탕 위에서 초계문신들에게 질문을 하 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둘째는 통치철학이나 정치운영과 관계 되는 내용들이다. 이는 ‘제왕학(帝王學)’적 맥락에서 전개되는 문답들이 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정조는 ‘실용적 군주’로서의 관심사를 맹자 라 는 경전에 투영시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정조는 초계문신들과의 부단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신의 통치철학을 신하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시키는 한편 군주로서의 학습장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Ⅲ. 실용적 학문자세와 崇儒重道

호학군주로서 문치(文治)에 힘을 쏟고자 한 정조에게 학문이 갖는 의 미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조는 학문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이 모두 이 학문 공부여서, 옷을 입을 때와 밥을 먹을 때도 모두가 이 학문이라고 보았다.7) 바로 학문의 일상성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

6)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16, 孟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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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학문이라는 말만 나오면 아득히 멀어서 행 하기 어려운 일로 보아 걸핏하면 ‘학문 공부는 어떻게 착수해야 하는가’

라고 말들을 하니, 정조는 이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8) 그는 학문하는 방법은 다름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지극히 마땅한 것을 강구하여 해 나가는 것일 뿐9)이라고 생각하여 실행이 가능한 실용 적인 학문을 표방한다. 정조는 후세의 유학자들은 마음과 성(性)에 대해 서 능숙하게 말을 하는 사람은 간혹 있어도 실질적인 사공(事功)에 이르 면 무엇인지 잘 모르니, 이것이 바로 체(體)는 있되 용(用)은 없는 학문이 라고 진단한다.10) 정조에게 있어서 학문이란 인간다움의 실현을 위한 일 상성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실용적 학문관의 입장에서 그는 유교의 경전들을 중요시 하였다.

특히 주자의 글을 경전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긴 정조는 말하기를, “맹 자께서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주자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하겠다. 주자의 책은 어려서부터 읽었지만, 지금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좋아하게 된다.”11)고 하여 주자학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배우는 자가 정도 (正道)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주자를 표준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 다.12) 정조는 지극한 정성과 애타는 마음으로 가슴 속에 높이 받드는 가 운데 주자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귀로 직접 말씀을 듣는 것만 같았다고

7) 弘齋全書 卷163, 「日得錄」, 文學3 : “學問非別件物事, 日用事爲, 莫非此學問 工夫, 著衣時喫飯時, 都是這箇學問.”

8) 弘齋全書 卷163, 「日得錄」, 文學3 : “今人語到學問, 視之以玄遠難行之事, 輒 曰學問工夫, 何以下手云云, 良可異也.”

9) 弘齋全書 卷164, 「日得錄」, 文學4 : “學問之道無他, 在於日用事物上, 講求其 至當處, 做將去而已.”

10) 弘齋全書 卷164, 「日得錄」, 文學4 : “後世儒者, 有或能言於說心性說, 而至於 實地事功, 昧然不知爲何物, 這便是有體無用之學.”

11) 弘齋全書 卷165, 「日得錄」, 文學5 : “孟子曰, 乃所願, 學孔子也. 子於朱子亦 云. 朱書自幼讀之, 至今愈讀愈好.”

12) 弘齋全書 卷165, 「日得錄」, 文學5 : “學者欲得正, 必以朱子爲準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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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회를 밝히기도 하였다. 정조는 요(堯)⋅순(舜)⋅우(禹)⋅탕(湯) 임금의 도는 공자로 인해 밝혀졌고, 공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의 학문 은 주자로 인해 전해졌으니, 주자를 존숭하는 것이 공자를 존숭하는 것 인 동시에 유학을 지키고 정학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이 정조 통치철학의 기본 맥락이었으며, 그 핵심은 주자학을 존숭하는 것 임을 밝힌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조의 ‘숭유중도(崇儒重道)’에 대한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조는 일찍이 경연에 임하여 말하기를, “유학 을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 왕가에 전해내려 오는 법이 다. 역대 임금이 서로 전한 400년 동안 재야와 조정을 막론하고 그 역량 을 지닌 사람이 없었던 적이 없어서 나라의 부름에 응하여 나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임금의 덕을 넓히고 세도(世道)를 담당하여 유익함이 더욱 많았으며, 혹 비록 겸양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명성이 이르는 곳에서는 그 산림에 은거한 자의 모범이 되고 풍속을 좋게 하기 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하였다.”13)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제 일 좋은 방도는 여러 사대부들이 각자 자기 자제에게 주의를 주어서 경 전을 많이 읽어 그 속에 침잠하고 바깥으로 치달리지 않게 하면, 이른바 사학이라는 것이 공격하거나 배척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생 각하였다.14)

정조는 즉위 후 그간 이름만 지키던 규장각(奎章閣)을 정비하여 문화 정치의 추진기관으로 재구성하면서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원래 규 장각은 세조 때에 이미 양성지(梁誠之, 1415∼1482)에 의하여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소각(小閣)

13) 弘齋全書 卷174, 「日得錄」, 訓語1 : “崇儒重道, 卽我家法, 列朝四百年, 勿論 在野在朝, 未嘗無其人, 進膺旌招, 則匡君德任世道, 裨益固多, 而雖謙讓不出, 風聲所曁, 亦足以儀山林而善風俗, 近日以來, 絶無聞焉.”

14) 弘齋全書 卷164, 「日得錄」, 文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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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별도로 건립하여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편액을 받아 걸고 어제(御 製)와 어서(御書)를 봉안하는 장소로 삼았었다. 규장각은 그 기능이나 성 격이 정치정세나 상황변동에 에 따라 약간씩 변질되며 그 조직이나 제 도도 여러 차례 걸쳐 정비되었던 것이다.15)

정조가 시행한 규장각의 정비 목적은 해이해진 명분을 바로잡아 질서 와 체제를 재정비하는데 있었다. 정조는 그간의 경위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즉위 초에 규장각을 세우고 각신(閣臣)에게 그 지(志)를 짓도록 명 령하였는데, 5∼6년이 걸리고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편찬을 게을리 한 때문만이 아니라 제도와 의식이 아직 서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대강 이루어지게 되었다.”16) 하였다. 정조 2년(1778)에 시작한 일이 정조 8년(1784)에 이루어졌으니 6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요, 이제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는 것은 정조의 왕권과 제도가 1784년 무렵에야 비로소 안정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규장각에 조정의 인재들 을 모으고 본인의 주도로 조선 초기 이래의 문물제도를 보완하고 정리 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결국 규장각이란 승정원(承政院)과 홍문관(弘文 館)과 예문관(藝文館) 등 여러 기관이 가졌던 기능을 통합하여 정권의 중심기구로 만들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인재육성의 제도적 장치로서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시행하였다.

정조 5년(1781)에 이르러 규장각의 소관 사항으로 초계문신제가 설치 되는데, 그는 교서에서 초계문신제의 실시 배경에 대해 첫째 인재배양 이 근본을 잃어버려 문풍(文風)이 부진하고, 둘째 근래 나이가 젊은 문관 들이 과거에만 골몰하다가 과거를 통과하고 나면 한 글자도 들여다보지 않는 습속이 있으며, 셋째 조정에서 백성에게 할당하여 권장함이 그 방 법을 무너뜨리고 신진들은 태만하고 소홀하니 그 책임을 오로지 할 겨 를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

15) 정옥자, 조선후기문화운동사 , 일조각, 1997, 101~102쪽 참조.

16) 奎章閣志 , 序文(正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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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7) 이처럼 초계문신제는 정조가 열과 성을 다하여 시행하고자 한 규 장각의 중요 기능의 하나였다.

초계문신의 시강(試講) 교과서는 사서와 삼경으로, 강의 순서는 대학 (大學) ⋅ 논어(論語) ⋅ 맹자(孟子) ⋅ 중용(中庸) ⋅ 시전(詩傳) ⋅ 서 전(書傳) ⋅ 주역(周易) 의 순서이며 이들을 차례로 익히고 난 뒤에 사 기(史記) 를 강하도록 하였다. 초계문신의 강제절목(講製節目)에는 한 달 에 강의할 칠서의 책명과 차례, 분량을 세분하여 규정하고 있고, 책에 따라 주석이나 대지를 모두 100차에 걸쳐 강하도록 세세한 진도까지 규 정되어 있었다.18)

Ⅳ. 「 맹자조문」에 나타난 정조의 맹자관

1. 仁義의 문제

맹자 첫머리인 양혜왕(梁惠王) 머리장은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는데 왕이 말하기를, ‘장로(長老)께서 천리를 멀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셨으니, 역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나요?’ 하니, 맹자가 대답하여 말 하기를, ‘왕께서는 하필 이롭게 한다 이르시오?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따름입니다.”19)로 시작하는데, 첫머리에 두는 말은 예로부터 책을 쓰는 사람들이 매우 신중하게 여겼던 바라고 여긴 정조는 초계문신에게 질문 하기를, “경전을 두루 살펴보건대, 그 책 한 부의 종지(宗旨)를 첫머리에 놓지 아니한 책이 없다. 주역 의 건곤(乾坤)과 서경 의 이전(二典)과 시경 의 이남(二南)과 논어 의 학(學)과 중용 의 성(性)과 대학 의 명 덕(明德)이 모두 이런 용례이다. 양혜왕장구에서 이 책 한 부를 포괄하는

17) 「正祖實錄」 卷11, 정조 5년 2월 庚申條.

18) 정옥자, 앞의 책, 115~118쪽 참조.

19) 孟子 , 梁惠王上, 首章 : “孟子見梁惠王, 王曰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 國乎. 孟子對曰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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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지를 찾는다면 어디서 그것을 볼 수가 있는가?”20) 하자, 초계문신인 정만석(鄭晩錫)이 대답하기를, “아마도 인의(仁義) 두 글자로 이 책의 종 지를 삼아야 할 듯 합니다.”21)라고 하였다.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 경을 두루 섭렵하였음을 시사하는 글로서 정조의 학자적 기풍을 보여준 다. 여기서 정조는 맹자 한 책의 종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자, 초계문 신은 ‘인의(仁義)’라고 대답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맹자 의 종지가 ‘인 의(仁義)’라는 것은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인의(仁義)는 사람과 금수를 구별시켜 주는 핵심 요소이며, 덕을 이루고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거이 다. 인륜세계의 모든 선(善)이 이로부터 나오므로 맹자 에는 인의에 대 한 소개가 특히 많은 편이고 주요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다. 인의에 대하 여 정조의 이해는 어떠한지 살펴보기로 하자.

「경사강의」 「맹자」는 머리장의 양혜왕장구에서 인의(仁義)와 이(利)를 분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조는 인의(仁義)라는 두 글자가 바로 맹자가 평소 자임하는 종지(宗旨)로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欲) 을 막는 일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술(覇 術)을 물리치는 일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니, 이것을 버리면 모두 가 잘못되고 편벽된 길이라고 보고 있다.22)

정조는 공자 문하에서 사람을 가르침은 요컨대 인(仁)이라는 한 글자 를 벗어나지 아니하고 일찍이 의(義)자를 겸하여 거론한 적이 없는데, 맹 자에 이르면 입만 열면 곧 인의(仁義)를 말하여 나란히 대응시켜 말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은 어째서 그러한지 묻자, 초계문신 김조순 (金祖淳)은 대답하기를 “정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공자는 하나의 인(仁)

20)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歷觀經傳, 莫不以一部宗旨, 托始于篇 首, 易之乾坤, 書之二典, 詩之二南, 論語之學, 中庸之性, 大學之明德, 皆是例 也. 若就此章之中, 求其包括一部之宗旨, 則當於何處見得耶.”

21)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恐當以仁義二字, 爲一部宗旨矣.”

22)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夫仁義二字, 乃孟子平日自任之宗旨, 存天理遏人欲, 不外于是, 尊王道黜覇術, 不外于是, 捨此則曲徑僻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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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 말했는데, 맹자는 입만 열면 곧 인(仁)과 의(義)를 말하였으니, 그 공로가 매우 많다. 대개 맹자가 말한 성선(性善)과 양기(養氣)에 대한 논 설은 모두 이전의 성인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 자가 이른바 ‘이전의 성인이 말하지 않았어도 적응이 되지 아니하고 이 후의 성인이 말하였어도 많음이 되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 다.”23) 하였다.

이어 정조가 질문하기를, “인의(仁義)라는 두 가지는 하나씩 따로따로 말하자면 인(仁)과 의(義)가 각각 체용(體用)을 갖추어 둘이 서로 대응되 니, 주자가 이른바 ‘인은 스스로 인의 체용이 있고 의는 스스로 의의 체 용이 있다’라는 것이 이것이며, 통합하여 말하자면 인과 의가 서로 체 와 용이 되어 둘이 나란히 관통되어 있으니, 주자가 이른바 ‘인과 의는 대응하여 서로 상대의 체와 용이 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양혜왕(梁 惠王) 장구에서 말한 인의는 대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관 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24) 하자, 초계문신(抄啓文臣) 정만석(鄭晩 錫)은 자신의 생각으로는 대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25)고 대답 하고 있다.

정조는 ‘의(義)와 이(利)’의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데, 유의해야할 사항으로 주목된다. 이(利)에는 의리(義理)의 이와 이욕(利慾) 의 이가 있는데, 주역 에 이른바 ‘이물화의(利物和義)’의 이와 ‘이용안 신(利用安身)’의 이는 모두 의리로 말한 것이고, 논어 에 이른바 ‘방어 리(放於利)’의 이와 ‘소인유어리(小人喩於利)’의 이는 모두 이욕으로 말

23)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程子嘗云仲尼只說一箇仁字, 孟子開口 便說仁義, 其功甚多, 蓋孟子所言性善養氣之說, 皆前聖所未發, 朱子所謂前聖 不言而不爲少, 後聖言之而不爲多者, 正謂是也.”

24)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仁義二者, 專言之則仁與義, 各具體用 而兩相對待, 朱子所謂仁自有仁之體用, 義自有義之體用是也. 合言之則仁與義 互爲體用而交須並貫, 朱子所謂仁義對爲體用是也. 此章所言之仁義, 當以對待 者看耶, 抑當以貫通者看耶.”

25)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臣意則恐當以對待者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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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이라고 파악한 정조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이국(利國)을 물은 양왕의 질문이 그것이 완전히 이욕에서 나온 것인 줄을 어찌 알아서 반드시 이와 같이 엄하게 물리친 것인가?”26)

정조는 양혜왕이 ‘자기의 나라를 이롭게 하는 방도’를 물은 것에 대해 맹자가 ‘어찌 반드시 이(利)를 말씀하십니까?’라고 물리친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에 초계문신 정만석(鄭晩錫)은 의리의 공정함에 부족함이 있어서라고 대답한다. 정조는 더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시 초계문신 이시수(李時秀)에게 질문하기를, “맹자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따라서 잘 인도해 주었다. 이를테면 호화(好貨), 호색(好色), 호악(好樂), 호용(好勇)에 대한 대답이 어느 것인들 자세하게 하나하나 깨우쳐서 듣는 사람이 아주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가르쳐주 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런데 유독 양왕의 물음에 대해서는 ‘하필왈리 (何必曰利)’라고 하여, 꺾어 버리고 엄하게 물리친 것은 어째서인가?”27) 하였다. 양왕이 빈사(賓師)를 처음 만나는 날 먼저 ‘나의 나라를 이롭게 함’을 가지고 물었으니, 이는 ‘내 몸을 이롭게 함’과는 같지 않아서, 그 이(利)가 의(義)로써 하는 것인지 이로움을 가지고 그 형세의 이로움을 인하여 인도하기를 마치 호화(好貨)와 호색(好色) 등에 대해서 물은 제나 라 왕의 질문에 답하듯이 하지 않고, 굳이 ‘어찌 반드시 이(利)를 말하는 가?’라고 하면서 꺾어 버린 것은 왜 그러한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초계문신 정만석(鄭晩錫)은 대답하기를, “제나라 선왕 이 호화와 호색에 대해 물은 것은 왕정(王政)을 논한 뒤에 있었기 때문 에 자세하고 부드럽게 깨우쳐 주어서 스스로 포기하지 않도록 해 준 것

26)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梁王利國之問, 安知其全出於利欲, 而 必如是深斥耶.”

27)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孟子之誨人, 必因其勢而利導之, 如好 貨好色好樂好勇之對, 莫不委曲婉誘, 深得納約自牖之義, 而獨於梁王之問, 必 以何必曰利, 逆折而嚴斥之者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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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양나라 혜왕이 이오국(利吾國)을 물은 것은 현자를 처음 만났을 때 였기 때문에 꺾어 버리고 엄하게 물리쳐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한 것 이니, 이것이 앞뒤로 한 말이 다르게 된 까닭입니다.”28)라고 하였다.

정조는 ‘자기를 이롭게 함’과 ‘국가를 이롭게 함’은 구별해 보아야 한 다고 생각하였다. ‘자기를 이롭게 함’은 ‘단순히 이(利)를 추구하는 것’이 지만, ‘국가를 이롭게 함’은 ‘의(義)와 부합되는 이(利)’로서 긍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초계문신은 정조의 기대와는 달 리, 한결같이 맹자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다. 정조는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대비시키는 맥락에서 ‘국익의 추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었음에 반하여, 초계문신은 ‘자신’과 ‘타인’을 대비시 키는 맥락에서 ‘자신(자기 나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의(義)’

에 어긋난다고 보았던 것이다.

2. 性善의 문제

맹자사상의 핵심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성선설(性善說)이다. 인간에게 갖추어진 본성의 실체를 선(善)이라고 한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 를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성선설은 맹자사상의 학문적 성격을 정의 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맹자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네 가지 마음 의 단서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이 인의예지의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맹자가 말하는 성선설의 본래 취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성(性)을 논하면서 입만 열면 ‘맹자가 말한 성선설의 성은 단지 이 리(理)가 형기(形氣)에 내려와 있기 이전을 가지고 말함이니, 대개 기질 (氣質)에 섞이지 아니한 리(理) 하나만을 가리켜 말한다.’라고 한다. 그러나 진심

28)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齊宣好貨色之問, 在於論王政之後, 故 委曲婉誘, 毋使自沮, 梁惠利吾國之問, 在於見賢者之初, 故逆折嚴斥, 先格其 心, 此所以前後所言之不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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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盡心章)에서는 ‘형색(形色)은 천성(天性)이다.’라고 하여, 지금 사람들의 이론 과 같지 않은 듯하다. 맹자가 말한 성선설의 본래 취지는 과연 무엇인가?”29)

이에 대해 초계문신(抄啓文臣) 이노춘(李魯春)은 대답하기를, “성(性)은 형기(形氣)를 초월하여 논한 것도 있고 기(氣)를 겸하여 가리켜 말한 것 도 있고 합쳐서 본 것도 있고 나누어 갈라놓은 것도 있습니다. 맹자가 이른바 형색은 천성이라고 한 것의 성(性)은 곧 기(氣) 안에서의 리(理)를 가리키는 것이고, 고자(告子)가 이른바 생지위성(生之謂性)이라든지 식색 성야(食色性也)의 성(性)이 아닙니다. 대저 진심장구에서 말한 많은 성 (性)자는 모두가 성선(性善)의 성(性)인데, 예로부터 성(性)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나누었느냐 합쳤느냐, 하나만 가리켰느냐 겸하여 가리켰느냐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30) 하였다.

맹자가 말하는 성선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정조는 말하기를, “ 주역 에서 계선(繼善)을 말한 것31)은 아직 태어나기 이전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기(滕文公)에서 성선(性善)을 말한 것은 이미 태어난 이후를 가리키는 것이다. 태어난 뒤라고 이미 말하였고 보면 혼연한 본 체라고 리(理) 쪽에만 치우쳐서 말할 수는 없는데, 「집주」에서는 오로지 리(理)에만 소속시키고 기(氣) 쪽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32) 라고 질문하자, 「경사강의」에서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초계문신 조제로

29) 弘齋全書 卷77, 「經史講義」, 孟子2 : “今人論性, 開口便說孟子性善之性, 只 就此理未墮在形氣前說, 蓋謂單指理不雜乎氣質而言, 然而此曰形色天性也. 若 與今人之論不同, 未知孟子說性之本旨, 果何如也.”

30) 弘齋全書 卷77, 「經史講義」, 孟子2 : “性有超形氣而論之者, 有兼指氣而言之 者, 有合而看之者, 有分而析之者, 孟子所謂形色天性之性, 卽就氣上指出理來, 而非告子所謂生之謂性, 食色性也之性也. 大抵此篇所言許多性字, 皆是性善之 性, 而千古說性, 只在分合與單指兼指而已.”

31) 周易 , 「繫辭」, 5장 :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32) 弘齋全書 卷78, 「經史講義」, 孟子3 : “易言繼善, 是指未生之前, 此言性善, 是指已生之後, 旣曰已生之後則未可偏言渾然之本體, 而集註專屬於理, 不及於 氣一邊者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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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濟魯)의 조대(條對)가 수록되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 주역 대전의 계선(繼善)과 맹자 의 성선(性善)이 비록 미생(未生)과 이생(已生)의 나 뉨이 있으나 그 천리(天理)의 본원이 됨은 마찬가지입니다. 대저 리(理) 가 기질에 내려와 있은 뒤로는 리(理)가 기(氣)에서 떨어진 적이 없고 또 한 기(氣)에 섞인 적도 없습니다. 「집주」에서 오로지 리(理)에만 소속시 킨 것은 참으로 맹자의 뜻과 앞뒤로 꼭 맞습니다.”33)라고 하였다.

정조는 맹자 의 ‘성선’이 주역 에서 말하는 ‘계선’의 의미라고 파악 하였다. 다시 말하면 정조는 맹자 의 ‘성선’이 아직 태어나기 이전의 의미에서의 선(善)이지 성(性) 그 자체가 선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여기 서 정조의 성에 대한 입장이 드러난다. 그는 ‘성선’이 담지하고 있는 사 실적 ‘본선(本善)’의 의미와 가치지향적 ‘향선(向善)’의 의미라는 갈림길 에서 ‘향선’의 방향에 무게를 더 함으로써 실천적이며 실용적인 학문세 계로 나아간 것이다. 정조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인간의 성(性)이 선하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성이 지니 고 있는 선을 발현하도록 하여 국가사회의 윤리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는데 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맹자의 성론에서 생각해 볼 문제는 성(性)의 선악(善惡) 문제 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정조는 “맹자가 이르기를, ‘사람의 성(性)이 선 한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불선한 사람은 없으며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물은 없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성(性)은 하늘의 리(理) 이고 리(理)에는 불선이 없다는 말이다. …… 정백자의 말에 또

‘선(善)은 본디 성(性)이다. 그러나 악(惡)도 성(性)이라고 아니할 수 없 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천명이 부여되는 처음을 거 슬러 올라가 보면 비록 순전한 선이어서 악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이 나서 형체가 이루어진 뒤에는 혹 선도 있고 악도 있다고 할 수

33) 弘齋全書 卷78, 「經史講義」, 孟子3 : “大傳之繼善, 孟子之性善, 雖有未生已 生之分, 而其爲天理之本原則一也. 大抵理墮在氣質之後, 理未始離乎氣, 而亦 未始雜乎氣, 集註之專屬於理者, 固與鄒聖之旨, 前後一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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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인가?”34)라고 하여 자신의 의문을 던진다.

이에 초계문신(抄啓文臣) 이노춘(李魯春)은 대답하기를, “천하에는 리 (理)를 벗어나는 사물이 없고 또한 성(性)을 벗어나는 일도 없습니다. 리 (理)는 본디 순전한 선이어서 악이 없으나, 선(善)에는 선의 리(理)가 있 고 악(惡)에는 악의 리(理)가 있으니, 악에도 또한 이 리(理)가 없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성(性)은 본디 순전한 선(善)이지만 기(氣)에는 선과 악이 있고 리(理)가 따라서 한계 지어지니, 악도 어찌 이 성(性)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는 본연(本然)만을 가리켜 천명(天命)의 근원이 되는 곳으로써 말한 것이고, 정자는 기질을 겸하여 가리켜 인물이 품부 받은 곳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본연과 기질이 다 함께 성(性)이어서, 선과 악 이 있다고 해서 기질의 성을 성이 아니라고 할 수 없으니, 이것은 인심 (人心)과 도심(道心)이 다 함께 마음이어서, 악으로 흐른다고 해서 인심 을 마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35) 하였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선으로서 이루어지는 이상사회를 이룩하고 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성선설은 성선설이 지니고 있는 그 자체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나아가서 어진 정치를 실현하 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룩하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부분에서 보다 큰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왕도정치에 대한 정조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하자.

34) 弘齋全書 卷77, 「經史講義」, 孟子2 : “孟子曰人性之善也, 猶水之就下也. 人 無有不善, 水無有不下, 蓋性卽天理, 理無不善之謂也. …… 程伯子之言又曰善 固性也. 惡亦不可不謂之性也. 此又何義也. 原天命賦與之初, 雖可謂之純善無 惡, 及人生成形之後, 或可謂之有善有惡耶.”

35) 弘齋全書 卷77, 「經史講義」, 孟子2 : “天下無理外之物, 亦無性外之事, 理固 純善無惡, 而善有善之理, 惡有惡之理, 則惡亦不可謂無此理也. 性固純善, 而氣 有善惡, 理隨而局焉, 則惡亦豈可謂非此性乎, 孟子單指本然而以天命源頭處言 之, 程子兼指氣質而以人物稟受處言之, 本然氣質, 同是性也. 氣質之性, 不可以 有善惡而謂非性者, 猶人心道心同是心也. 人心不可以流於惡而謂非心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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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王道政治의 문제

맹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선한 마음으로 어진 정 치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며, 어진 정치는 바로 왕도에 이르는 지름길이 된다. 이와 관련 정조는 ‘왕자(王者)가 훌륭한 정치를 펴고 인(仁)을 베풀 어 천하의 벼슬아치들과 농사꾼들과 장사치들과 나그네들로 하여금 모 두 그 나라로 나가고 싶어 하도록 한다면 천하가 절로 인(仁)으로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임금을 미워하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성왕(聖王)이 마땅히 매우 미워하고 엄격하게 끊어 버려야 하는데, 맹자 의 말에는 마치 그 와서 하소연하는 것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나에게로 오는 것을 이익으로 여기는 듯함이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36)라는 의문 을 제기한다. 정조의 생각으로는 왕자가 다른 나라의 백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나라 왕을 미워하던 백성의 무리를 아무런 생각 없이 용납하는 것이며, 다른 나라의 백성을 새롭게 얻게 된 것을 자기 이익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초계문신(抄啓文臣) 성종인(成種仁)은 대답하기를, “백성들 이 포악한 자를 떠나서 어진 이에게로 가는 것은 하늘의 이치가 그러합 니다. 대개 저들이 자기 임금을 미워하는 것은 그 임금을 미워함이 아니 라 바로 그 포악함을 미워하는 것이고, 저들이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은 나에게 하소연함이 아니라 바로 인(仁)에 하소연함입니다. 성현이 또한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다만 하늘의 이치를 따를 뿐입니다. 하늘의 이치 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볼 수 있으니, 사람들의 마음을 어기지 않음이 어 찌 이른바 ‘하늘의 이치를 따름’이 아니겠습니까.”37) 하였다. 다른 나라

36) 弘齋全書 卷78, 「經史講義」, 孟子3 : “王者發政施仁, 使天下仕者耕者商賈行 旅, 皆出於其國, 則天下自可以歸仁矣. 至如疾其君之民, 聖王所宜深惡而痛絶 之者, 孟子之言, 有若安受其赴愬, 而利其歸己者然何也.”

37) 弘齋全書 卷78, 「經史講義」, 孟子3 : “民情之去暴就仁, 天理然也. 蓋彼所以 疾其君者, 非疾其君也, 乃疾其暴也, 彼所以愬於我者, 非愬於我也, 乃愬於仁 也. 聖賢亦何心哉. 只循其天理而已. 天理可見於人情, 則不拂人情, 豈非所謂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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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포학한 자를 떠나서 어진 이에게로 가는 것은 왕자의 사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하늘의 이치가 그러할 뿐이라고 대답하며 정조를 설득시키고 있다.

또한 맹자는 위정자와 백성이 공동운명체가 되기 위해서는 위정자가 백성과 함께 즐거움도 근심도 같이 누려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 다.38) 이에 대해 정조는 ‘백성들의 즐거움을 즐거워하고 백성들의 근심 을 근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맞는 말로서 동의를 표명하지만, ‘천하로 서 즐거워하고 천하로써 근심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 다. 제왕(齊王)이 근심과 즐거움을 함께할 사람은 제나라 백성들뿐이라 는 것이다. 천하의 백성들은 각각 그 임금이 있으니, 근심과 즐거움을 천하와 함께 한다는 것은 자연히 왕천하 한 뒤의 일에 속하는 것이 아 니냐는 것이다. 따라서 정조는 어떻게 ‘천하로서 근심하고 즐거워하고서 도 왕천하(王天下)하지 못하는 자는 있지 않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인 지 문제를 제기한다.39)

이에 대해 초계문신(抄啓文臣) 이시수(李時秀)는 대답하기를, “당시의 임금이 참으로 왕도정치를 시행할 수 있었다면, 물이 아래로 흐르듯 백 성들이 귀의하여, 이웃 나라의 백성까지도 모두 나의 백성이 되었을 것 입니다. 더구나 이 구절은 앞 구절과 함께 왕도의 공효를 범범하게 말하 여 제나라 왕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애써 따르도록 하고자 한 것이니, 또 한 반드시 제왕만을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40) 하였다.

天理耶.”

38) 孟子 , 梁惠王下, 4장 :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 亦非也.”

39) 弘齋全書 卷76, 「經史講義」, 孟子1 : “此曰樂民之樂, 憂民之憂可矣, 曰樂以 天下, 憂以天下, 何謂也. 齊王之與同憂樂者, 只是齊國之民, 若天下之民, 各有 其君, 則憂樂之與天下同之, 自屬王天下以後事, 豈可曰憂樂天下而不王者, 未 之有也乎.”

40) 弘齋全書 卷76, 「經史講義」, 孟子1 : “當時之君, 苟能行王政, 民歸之猶水之 就下, 隣國之民, 無非吾之民也. 況此節與上節, 泛言王道之功效, 欲使齊王歆慕 而企及, 則亦未必專指齊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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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맹자가 제나라와 양나라의 임금들에게 말한 것은, 하나는 ‘여 민해락(與民偕樂)’이고 하나는 ‘여백성동락(與百姓同樂)’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그는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성인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이 고 왕도정치의 단서인데, 그 해락(偕樂)과 동락(同樂)의 방법은 과연 어 디에 있는가? 만약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고 일마다 모두 함께하려 하면 힘이 부족하고 날이 부족할 걱정이 어찌 없겠는가.”41) 하자, 초계문신 홍인호(洪仁浩)가 대답하기를, “왕도 정치의 요체는 그 하는 일을 잘 미 루어 나가는 데에 지나지 않는데, ‘혈구(絜矩)’라는 것은 잘 미루어 나간 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대학 의 평천하장(平天下章)에 혈구(絜矩)로 종지를 삼았고, 주자가 총괄하여 풀이하기를 ‘이 장의 뜻은 힘쓸 것이 백성들과 호오(好惡)를 함께하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지 않는 데에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해락이나 동락의 방법을 ‘혈구’라는 두 글자 를 버려두고 무엇으로써 하겠습니까?”42) 하였다. 정조가 왕도정치의 단 서로서 ‘여민해락’과 ‘여백성동락(與百姓同樂)’을 언급하며 그 성취 방법 을 질문하자, 홍인호(洪仁浩)는 대학 에 나오는 “백성이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어한다.”43)는 비유를 들며 왕도정치의 요체로서 ‘혈구’를 제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Ⅴ. 맺음말

우리는 지금까지 「경사강의」 가운데 「맹자조문」을 중심으로 정조의 맹자 에 대한 사상적 이해양상을 검토해보았다. 영조(英祖)를 뒤이어

41) 弘齋全書 卷76, 「經史講義」, 孟子1 : “孟子告齊梁之君, 一則曰與民偕樂, 一 則曰與百姓同樂, 此固爲聖人之能事, 王政之大端, 而其所以偕樂同樂之方, 果 安在哉. 若欲人人而與同, 事事而與偕, 則豈無力不贍日不暇之歎耶.”

42) 弘齋全書 卷76, 「經史講義」, 孟子1 : “王政之要, 不過善推其所爲, 而絜矩者, 善推之謂也, 故大學平天下章以絜矩爲宗旨, 而朱子總釋之曰此章之義, 務在與 民同好惡而不專其利, 然則偕樂同樂之方, 捨絜矩二字奚以哉.”

43) 大學 10장 :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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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계승한 정조는 당면한 문제개선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경전의 탐구를 통해 체득하고자 한 호학군주였다. 그의 호학정신은 간단하게 비교될 수 없는 탁월성을 가지며, 홍재전서 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는 평소 국정 운영에 많은 시간이 할애됨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경전 을 탐구하고자 천착하는 모습은 후세 귀감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 각한다.

정조는 맹자에 대해 당대 으뜸가는 아성(亞聖)의 재능을 가진 인물로 평가한다.44) 「경사강의」, 「맹자조문」에서 정조는 부분적으로 의문을 제 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맹자 에 대한 기본 관점은 대부분 존숭 하여 믿고 따르는 모습을 피력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경전으로서 의 맹자 의 위상과 아성으로 평가되어 온 맹자의 위상이 배경으로 자 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그의 유교의 경전 학습을 통해 유 학의 본래정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숭유중도(崇儒重道)’에 대한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울러 정조는 주자를 존숭하는 입장에 있으면서 주자의 글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이는데, 만약 학자가 바른 도리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주자를 표준으로 삼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공자와 맹자의 학문이 주자로 인해 전해졌으 니, 주자를 존숭하는 것이야말로 공자와 맹자를 존숭하는 것인 동시에 정학을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맹자 의 주요 구절에 대한 정조와 초계문신(抄啓文臣) 사 이에 문답이 있었는데, 호학군주로서의 정조의 면모가 훌륭하게 드러나 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조는 자신의 통치철학을 신하들에게 자 연스럽게 전달시키는 한편 경전 학습장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경사 강의」, 맹자조문에 드러난 정조의 사상적 입장은 ‘인의(仁義)’와 ‘성선(性 善)’, 그리고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대한 관심으로 집약할 수 있다.

먼저 정조는 인(仁)과 의(義) 두 글자가 바로 맹자가 평소 자임하는 종

44) 弘齋全書 卷79, 「經史講義」, 孟子4 : “孟子以命世亞聖之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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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宗旨)로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欲)을 막는 일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술(覇術)을 물리치는 일이 여 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정조는 ‘의(義)와 이(利)’의 문제 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는데, 그는 ‘자기를 이롭게 함’과 ‘국가를 이롭게 함’은 구별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기를 이롭게 함’은 ‘단순히 이(利)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국가를 이롭게 함’은 ‘의(義)와 부합되는 이(利)’로서 긍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다음으로 정조는 맹자 의 ‘성선’은 주역 에서 말하는 ‘계선’의 의미 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여 맹자 의 ‘성선’이란 아직 태어나기 이전의 의미에서의 선이지 성 그 자체가 선은 아니라고 이해하였다. 그는 ‘성 선’이 담지하고 있는 사실적 ‘본선(本善)’의 의미와 가치지향적 ‘향선(向 善)’의 의미라는 갈림길에서 ‘향선’의 방향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형성된 사상적 원리들은 자연스럽게 현실적으로 구체적이며 실 용적인 학문세계로 연결되어 나가는 기본토대로 작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왕도정치에 대해, 정조는 위정자와 백성이 공동운명체가 되기 위해서는 위정자가 백성과 함께 즐거움도 근심도 같이 누려야 하 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정하였고, ‘백성들의 즐거움을 즐거워하고 백성 들의 근심을 근심한다.’는 맹자의 주장에 대해 적극적인 동의를 표명 하였다.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성취하여 백성들과 하나 된 삶을 사 는 것이 왕도정치의 기본 맥락이라고 하였을 때, 정조는 이러한 왕도 정치의 근본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자 노력하였던 군주라 평가할 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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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King Jeongjo’s View of Mencius’s Philosophy Presented in Gyeongsagangeui(經史講義) / Jung Seong-sik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ideological view of King Jeongjo on primary subjects suggested in Mencius by analyzing the section of Mencius in Gyeongsagangeui of Hongjaejeonseo, which is a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of King Jeongjo (正祖, 1752∼1800) who was the 22nd king of Joseon Dynasty.

The section of Mencius in Gyeongsagangeui indicated that he believed and showed great respect for the teaching of Mencius in general although there were some occasions that the king expressed his doubt partially. The ideological view of King Jeongjo presented in the section of Mencius of Gyeongsagangeui can be summarized as the interest in benevolence and righteousness ( 仁義), goodness of

humanity (性善) and ruling based on the principle of royalty (王道政治).

Naturally, King Jeongjo accepted these foundation principles of Mencius as the bases to move into a concrete and practical academic world. He can be considered as a king who tried not to go against a path based on such ideological thoughts.

Key words: King Jeongjo, Gyeongsagangeui, the section of Mencius, benevolence and righteousness, goodness of humanity, ruling based on the principle of royalty.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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