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 학습의 수업실제
- 한 국 근 세 사 -
지난 시간엔 무엇을 배웠지~?
정치구조
• 비변사의 구성원 확대, 기능 강화
• 3사의 언론기능 과 전랑의 권한
군사제도
• 훈련도감 -삼수병
•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
• 제승방략체제
⟹ 속오군
수취제도
• 전세-영정법
• 공납-대동법
• 군역-균역법
• 호패법,
오가작통제
이번 시간엔 무엇을 배울까~?
Hint 1
Hint 2
Hint
3
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4. 근대 태동기의 정치
(3)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
1. 사 림의 등장과 정치적 성장 배경을 안다.
2. 붕 당이 출현하게 된 계기를 안다.
3. 사도 세자의 죽음과 당시 영조, 사림의
정치적 의도를 연관 지을 수 있다.
붕당이란 ?
학문적·정치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모 임을 의미!
그렇다면, 붕당정치란?!
과거에 관료들이 서로 파벌을 이루어 정권을 다투
던 일
붕당정치 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붕당정치 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붕당정치 의 전개와 변질
영조의 일생
정치적 입지
왕권강화의 필요성
영조 와 왕권강화
사(思) - 생각하다
도(悼) - 슬프다
1735년 탄생
1744년 10세
혜경궁 홍씨와 혼인
1749년15세 대리청정
1762년 38세 뒤주에서 사망
1777년 추존됨 나경언의 상소
정순왕후와 노론의견제 신임사화 노론비판
사도세자 는 누구일까?
조선왕조실록 영조편, 24년 5월 19일
임금이 하문하기를, “문제(文帝)와 무제(武帝)는 누가 더 훌륭한가?”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가 훌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이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너의 마음은 반드시 무제를 통쾌하게 여길 것인데, 어찌하여 문제를 훌륭하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경제(景帝)의 정치가 무제보다 훌륭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앞으로 문제·경제의 반 정도만으로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양 한나라 무제 로 너를 경계했는데,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글귀가 있어 기(氣)가 크게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니, 시독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기(氣)가 승한 것 같지만 매우 안중(安重)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촌음(寸陰)을 아끼라는 옛말이 있는데, 춘방의 여러 신하들은 매양 서연이나 소대가 있을 적마다 성심을 다하여 부지런히 해서 원량으로 하여금 학문에 정진하게 함으로 써 임금 노릇하는 방도를 알게 한다면, 종사의 다행이겠다.”
하니, 이영복(李永福) 등이 일어나 절하면서 말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겠습니다.”하였다.
사료로 보 는 사도세자
조선왕조실록 영조편, 25년 1월 27일
다행히 천지와 조종(祖宗)의 신령(神靈)의 도움으로 을묘년11675) 에 *동궁(東宮) 을 갖는 기쁨을 누려 그 이후부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라기만을 날마다 기대하였다.
지금은 *저궁(儲宮)의 나이가 이미 공자(孔子)가 학문에 뜻을 둘 나이에 들어 천인 (天人)의 모습을 엄연히 갖추었다. 예지는 점점 고명해지고 습성은 자연에서 우러나 와,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공손하고 검소한데다 경사(經史)의 학문을 닦아, 만백성이 받들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종묘 사직의 한량없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나 의 즐거움 또한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사료로 보 는 사도세자
조선왕조실록 영조편, 38년 윤5월 13일 2번째기사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 었다. 처음에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 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 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 를 바랐었다. 정축년 ·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 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 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 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 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 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사료로 보 는 사도세자
조선왕조실록 영조편 97권, 37년 5월 23일 2번째
응교 심이지(沈履之)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邸下)의 허물은 뉘우칠 만한 것이 비록 단서가 많기는 하지만, 그 병근(病根)이 가장 심하여 마땅히 다스려야 할 것으로 (중략) 저하께서 두렵게 여기는 마음이 지나 친 데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저하께서 이미 스스로 열거하며 스스로 책망할 수 없게 되었으니, 거듭 여러 신하들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렵게 임시변통으로 수 습하기는 하지만 마침내 한 세대로 하여금 속이고 가리는 구덩이로 빠지게 하고야 맙 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은 인신(人臣)에게 있어서 극도로 악한 것인데, 어떻게 참고 따라서 그것을 가르치십니까? 그리고 또한 들으니, 전후(前後)하여 여러 신하들이 경계를 올림에 있어 대체로 실정 밖의 엄령(嚴令)이 많았고 심지어 인신이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저하께 후대하는 경우는 노여워하지 아니하고, 글 을 올릴 경우에는 번번이 듣기를 싫어하며 엄중히 책망하는 것은 역시 그것이 전파될 까 두려워하여 반드시 가리거나 숨기려고 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러나 진달한 바는 마땅히 깊이 유 념하겠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