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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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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HYSICIAN OF KOREA

J Korean Med Assoc 2019 December; 62(12):604-606

pISSN 1975-8456 / eISSN 2093-5951 https://doi.org/10.5124/jkma.2019.62.12.604 604 대한의사협회지

송제 서재필,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

송제(松齊) 서재필(Philip Jaishon, MD)은 독립운동가로 서 독립협회의 활동과 그보다 앞선 시기 갑신정변의 주역 으로 더 알려져 있으나, 그의 일생 전체를 조감한다면 미국 에서 의사로 활동한 것이 더 큰 규정성을 갖는다. 그는 미국 병리과 전문의까지 취득한 최초의 조선인 출신 미국 의사였 다. 보통 ‘서재필 박사’로 불리는 ‘박사’의 명칭도 의사를 뜻하 는 MD였다. 그의 정치적 행적은 갑신정변, 독립협회, 미국 에서의 3.1 운동, 해방 정국 등 굵직한 근현대사의 주요 국 면에 등장하지만, 그 세월은 모두 합쳐 약 10년을 넘지 못 한다. 그러나 약 30년 이상을 의사로서 살아가는 일상의 삶 을 유지해 나갔다.

첫 번째 망명과 의사가 되기까지

1864년 1월 7일 전남 보성군에서 태어난 서재필은 만 19세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라는 정치 혁명 의 실패에 따라 치른 대가는 혹독했다. 대역죄인으로 몰 린 가족에게는 죽음밖에 없었다. 생부와 형은 사약으로, 동생은 종로 거리에서 참수로, 생모와 아내는 자결로, 2세 아들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 은 서재필은 참담한 마음을 가슴에 품고 일본(약 6개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서재필

이 왕 준 | 명지의료재단

Philip Jaishon, a pioneer who got ahead the times

Wang Jun Lee, MD

Myongji Medical Foundation, Seoul, Korea

Received: November 14, 2019 Accepted: November 18, 2019 Corresponding author: Wang Jun Lee

E-mail: lovehospital@mjh.or.kr © Korean Medical Association

This is an Open 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 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약력: 1864년 1월 7일 전남 보성군(외가)에서 출생 1884년(만19세)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 1892년(만27세) 한국인 최초 미국 의사 면허 취득 1895년(만30세) 1차 귀국 및 독립협회 활동 1919년(만54세) 미국 동부지역(필라델피아) 3.1 운동 계승 활동 1929년(만64세) 한국인 최초 미국 병리학 전문의 취득 1947년(만82세) 2차 귀국과 미군정 고문관으로 활동 1951년(만86세) 미국 필라델피아 몽고메리병원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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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서재필 605

Lee WJ•Philip Jaishon, a pioneer who got ahead the times

체류)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역만리 사고무친 인 미국에 도착한 서재필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첫 번째 은인인 사업가 홀렌백 (John Wells Hollenback)을 만나 만23세에 해리힐맨중 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를 졸업하였다(이때 부터 Philip Jaishon라는 미국 이름 사용). 서재필은 갑신 정변 실패에 따른 죄명 때문에 갈 수 없는 나라가 된 ‘조선’ 으로 선교사로 가라는 홀렌백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그와 결별하고 다시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두 번째 은인인 미 육군 군의총감부 도서관장이었던 빌링스(John Shaw Billings)를 만나 그의 권유로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 음을 먹었다. 그것은 그가 도서관에서 한문과 일어로 된 동양의학 서적을 영어로 번역·정리하는 업무와 연결되는 것도 있었다. 만23세에 컬럼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톤대 학의 전신) 부설 야간대학인 코크란대학에서 1년을 공부 하고 이어서 역시 야간학부인 컬럼비안대학교 의과대학 (야간대학)에서 3년을 공부한 끝에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미국 의학사(MD)를 취득하게 된다. 서재필의 나이 만27세 였다(만25세에 미국 국적 취득). 서재필이 4년 만에 의학 사 취득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미국 의학교육이 아직 표준 화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당시 의학의 교 육적 배경은 서재필이 훗날 만61세에 다시 펜실베니아의 과대학교 전문의 과정에 입학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 리고 만64세에 병리학 전문의를 취득함으로써 한국인 최 초의 전문의가 되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서재필이 의학 사를 취득한 다음 해인 1894년 1년 동안 워싱턴 소재 가필 드(Garfield) 병원에서 인턴을 하며 임상경험을 하였다. 이 때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을 하고 개 업을 하였으나 당시 인종차별이 심해 의원 경영에 고전을 겪었다.

11년 만의 귀국과 독립협회의 활동

서재필이 결혼한 다음 해인 1895년 을미사변으로 친일 파를 중심으로 다시 정권을 잡은 김홍집 내각의 권유로 망 명 11년 만에 고종 황실 중추원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귀국 (1차)하였다. 갑신정변 실패를 통해 민중과 유리된 혁명은 실패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되새기고 있는 서재필은 김홍 집 내각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미국인 자격으로 한국에 체류하면서 민중을 계몽하는 방향 으로 귀국 활동을 정했다. 이에 따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1896년 4월 7일) 사설을 통해 자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민중계몽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서재필의 주장 은 러시아에의 의존도가 강했던 고종과 러시아, 귀국 때부 터 적대시했던 일본, 제국주의 열강에 대열에 서 있는 미국 등 모든 나라로부터 협공을 당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됨 에 따라 결국 2년 6개월만인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귀 환하였다.

미국에서의 3.1 운동과 30년 만에 의업으로

복귀 그리고 해방 이후 두 번째 귀국

미국으로 돌아온 해인 1898년 서재필은 미국과 스페인 전 쟁의 군의관으로 쿠바에서 미국으로 상이군인을 수송하는 병원선인 하지(Hodge)호에서 약 6개월 종군한 후, 종전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가서 그 후 약 25년 동안(1899-1924년) 인쇄업·문구업에 관한 사업을 했다. 사업 막바지인 1919년 3.1 운동이 미국에도 전파됨에 따라 서재필은 1922년 까지 3년 동안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에 매달렸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가 출범한 다음 날인 4월 14일에 이승만 등과 함 께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 한 뒤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는 3.1 운동 이후 미국에서 벌인 최초의 대규모 조선인 정치집회 였다. 이후 서재필은 ‘대한공화국 통신부’의 총책임자로 영 문월간지 ‘조선 평론’을 발간하여 조선의 독립 의지를 세계 에 홍보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간의 워싱턴 군축회의 (1921년 11월-1922년 2월)에서 미국이 조선 문제를 일제의 내치에 속하는 기정사실(fait a compli)로 간주해 상정조차 하지 않자 서재필은 깊은 좌절에 빠진 이후 별다른 항일운동 을 전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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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 대한의사협회지

J Korean Med Assoc 2019 December; 62(12):604-606

서재필은 3년 동안의 독립운동에 따른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의업을 떠난 지 30년 만인 만61세에 펜실베 니아의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약 1년 동안 보수교육을 받은 후 영면에 이르기까지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개업과 병원 봉 직의를 반복하는 의사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고령인 만 65세부터 만70세 사이에 의학 논문 5편을 발표하여 끈질기 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하자 만74세인 서재필은 자진해서 징병 의무관으로 들어가 4년간 열심히 근무함에 따라 1945년 1월 미국 의회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서재필은 나이 만83세에 남한의 미군정 당시 미군 사령 관 하지 중장의 미군정 최고 고문관과 과도정부 특별 의정관 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에 귀국(2차)하여 신생 조국의 발전 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이승만 세력 과 반대세력 간에 파벌싸움이 거세지자 그 파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서재필은 1년 8개월 동안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1948년 미국으로 귀환했다. 서재필은 그 후 미국에서 소규모 의 개업의로 활동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1월 5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노리스타운(Norristown)에 있 는 몽고메리(Montgomery)병원에서 파란만장한 만86세의 삶을 마감했다. 서재필은 정치가와 의사, 그 양면성에서 의사로서 조선(한 국)에 미친 영향은 없지만, 의사라는 직업은 서재필의 삶을 규정하고 뒷받침하는 버팀목이었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한 후 줄곧 의사라는 직업을 바탕으로 일상을 꾸려나갔다. 그 러나 20대 갑신정변, 30대 초반 독립활동, 50대 중반 3.1 운 동, 80대 중반 해방정국 등 인생의 고비마다 조국과 시대의 부름에 순응하여 역사의 전면에 뛰어들었다. 그는 진정 시대 를 앞서 나갔던 민족의 선각자였다. ORCID

Wang Jun Lee, https://orcid.org/0000-0002-3042-1557

Conflict of Interest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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