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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경주

문서에서 국토의 (페이지 76-82)

서영채 |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ycseo@snu.ac.kr) 영화와 도시 • 73영화와 도시 • 74

460호 2020 february

1.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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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영화이다. 깜짝 놀란다. 그렇게나 오래된 영화였나 싶다가, 1992년이 아닌 게 어딘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각설하고.

이 영화에는 중요한 두 개의 도시가 나온다. 춘천과 경주 이다. 이 두 곳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한 세대가 지니는 상 징적 공간이며 특별한 장소이다. 여기에서 장소라 함은 주관 적 경험이 각인됨으로써 고유의 체취를 갖게 된 공간이라는 뜻이다. 장소는 개인의 고유성이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그 고유성은 사회적이거나 세대적일 수도 있다. 춘천과 경주 는, 특히 1970, 1980년대 대학생활을 한 내 또래들에게 공간

선배는 명숙을 마음에 두지만, 정작 명숙은 경수에게 사랑을 강요한다 무작정 떠난 경수의 춘천여행길

적 클리셰이기도 하다. 춘천은 대성리 청평 가평으로 이어지 는 북한강 벨트의 심장과 같은 장소이다. 소양호, 청평사, 강 촌과 같은 고유명사들은 엠티, 데이트, 혼자 여행하기 같은 일반명사와 연관된다. 그리고 경주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 고 있는 장소이다. 우리 세대에게는 고등학생들의 단골 수학 여행지였다. 불국사 여관촌, 여관 밥, 기차, 캠프파이어, 기타, 담배, 소주 같은 단어들이 이어져 있다. 이런 단어들은 그곳 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 게도 자기 세대 친구들과의 교유와 대화 속에서 공동의 경험

불국사 설경

460호 2020 febru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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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정서를 만들어낸다.

홍상수의 영화 <생활의 발견>은 바로 그 같은 장소적 상징 들을 바탕에 깔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경수는 춘천에서 대학 선배를 만나고, 경주로 가는 기차에서 중학 시절과 연관된 여 성을 만난다. 두 장소에서 모두 사고가 생긴다. 사람 사는 일 이 결국 사고의 연속이며, 평온함이란 두 사고 사이의 휴지 부일 뿐임을 일깨워준다. 물론 사고라 함은 젊은 남성과 젊 은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니, 자기 보존을 추구하는 DNA나 인류의 종적 차원에서 보자면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 이다. 반하고, 같이 먹고 마시고, 섹스를 한다. 그러나 그 안에 서 막상 감정과 충동의 파고를 감당해야 사람들의 입장에서 는 괴롭고 힘든 것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홍상수의 영화는 잔인하다. 보통 사람들의 언어적 감각을 가감 없이 화면 위에 올려놓는다. 무대에 오른 정련 된 대사가 아니라, 동어반복과 아이러니의 무의식을 드러내 는 날것의 일상 언어가 배우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화면 에 실감이 뚝뚝 묻어나온다. 오글거리고 소름이 돋는다.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포르노그래피이다. 일상 속에 감추어져 있어야 할 것들이, 공중 앞의 화면에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스

스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랜만에 만나는 선후배 끼리 데면데면하면서 나누는 말들, “형, 만나보고 싶더라, 정 말로” 혹은, “야, 반갑다, 정말”이라는 말에서 부가적으로 붙 어 있는 ‘정말’이라는 부사는, 별로 그렇지 않다는, 감추어져 야 할 사실을 드러낸다. 정제된 대사와 동작이 있어야 할 무 대의 자리에, 다큐멘터리 같은 실생활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다. 그런 것이 포르노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흐름은 경주에서 끝난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 상적인 공간에 솟아 있는 고대 귀족의 무덤, 그 무덤에서 흘 러나오는 소리를 전해주는 영매의 목소리가 그곳에 있다. 그 곳은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죽음 너머의 세계이다.

4. .

경주라는 장소에 관한 한, 홍상수의 영화를 지속적 으로 보아왔던 것과는 달리 나는 단 한 번의 유의미 한 경험만을 지니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탓이기도 하 지만, 경주와는 별 인연이 없었던 때문이 컸다. 5년쯤 전, 그 곳에 사는 친구를 찾아 KTX를 타고 경주에 가게 되었다. 고 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사실상 처음이었다. 기차역에서 내 려 경주 시내로 들어가는 순간, 도로 표지판에 있는 김유신, 영화와 도시 • 74

황리단길과 고분군

460호 2020 february

김춘추, 선덕여왕 같은 이름들이 경주가 어떤 곳인지를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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