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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과 옛 신안SB조선소 부지

문서에서 국토의 (페이지 58-66)

방승환│‘닮은 도시 다른 공간’ 저자 (archur@naver.com) 2020 urbaN ODySSey•2

460호 2020 february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는 순간 어디서도 본 적 없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배 를 새로 만들고 처음으로 물에 띄우는 과정을 ‘진수(進水)’라고 한다. 진수의 방식은 여 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슬라이딩 도크(sliding dock)’는 경사면에서 배 자체의 무게로 미 끄러져 내려가는 방식이다. 육중한 배는 없지만 슬라이딩 도크와 골리앗 크레인(goliath crane)만으로도 그 자리에 있었을 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쩌면 거대한 두 장치 사이 에 배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통영의 구겐하임(?)을 꿈꾸는 옛 신아SB조선소 부지

이곳은 수주 잔량이 한때 세계 16위였을 정도로 잘 나갔던 조선소였다. 1946년 설립된 최기호조선소(이후 ‘신아SB’로 이름을 바꿈)는 최고의 수주 잔량을 기록한 이듬해에 워 크아웃을 신청했다. 갑작스러운 과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아SB의 성장은 견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출자액에 관계없이 직원 모두가 똑같이 성과급을 배분 받던 시절도 있었 다고 하는데, 결국 2017년 신아SB는 파산 선고됐다.

눈앞에서 본 슬라이딩 도크와 골리앗 크레인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철제 계단을 이용 해 도크 상판 위로 올랐다. 경사져 내려가는 도크의 끝은 바다 아래다. 상판 위에 설치된 레일은 선박의 이동에 쓰였을 것이다. 레일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자 어느 순간 시선이 수 평선에 맞춰졌다. 그 순간보다 더 내려가면 이제 바닷속이다. 이 과정이 내게는 생경했다.

파산 선고 후 신아SB조선소 부지를 매입한 LH는 ‘통영 폐조선소 도시재생 사업을 위 한 아이디어 및 설계팀 선정을 위한 국제지명초청 설계공모’를 실시했고 몇 달 뒤 포스 코A&C건축사사무소와 Henn GmbH 외 5개사로 이루어진 컨소시엄을 현상설계 당선

도시재생을 기다리고 있는 옛 신아Sb조선소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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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지명초청 설계공모 당선작

자로 선정했다. 지역 언론에서는 이 땅의 미래를 ‘세계적 관광 명소’, ‘통영의 구겐하임 (Guggenheim)’으로 소개했다. 그들은 재생사업을 통해 통영의 이미지와 지역경제가 크 게 개선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당과 통영시민문화회관

신아SB조선소 재생사업이 도시이미지와 지역경제를 개선하기 위해 추진한 처음은 아니었 다. 2002년 4월 경상남도와 토지공사는 ‘윤이상국제음악당’ 건립계획을 발표했고 이듬해 취임한 통영시장은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을 설계한 프랭크 게리(Frank Gehry)에게 설 계를 의뢰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건물은 현재 통영에 없 다. 2009년 사업 예산이 축소되고 그마저도 국고에 반납할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확보된 예산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했기 때문이다. 명칭도 ‘윤이상국제음악당’에서

‘통영국제음악당’으로 바뀌었다. 2013년 10월 통영국제음악당 준공식을 알리는 보도자료 에 따르면 음악당 건립을 통해 시민의 자긍심이 고취되고 문화 수준이 향상되며 문화예 술도시로서의 기반이 확고해질 것이라고 한다.

통영국제음악당이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문화예술을 계승 · 발전시키기 위한 처음은 아니었다. 1997년 남망산 기슭에 통영시민문화회관이 지어졌다. 통영시민문화회관은 당 시 건립됐던 공공문화시설의 보편을 따랐다. 유지 관리가 쉬운 돌로 마감됐고 거대한 기 둥과 건물 위 육중한 지붕은 다분히 전통건축을 상징한다. 무엇보다 거대한 규모의 건물 이 자리 잡은 곳은 도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높은 곳이었다. 두 건물 모두 공공을 위한 문 화 및 전시시설임에도 대중들이 가기에는 멀고 힘든 곳에 자리 잡았다. 이유는 통영이 유 치환, 윤이상, 김상옥, 김춘수, 박경리, 전혁림 등을 배출한 예향이고 그 정신을 이어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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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양한 예술활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통영시가 다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대외적으로 보내기 위함이다.

높은 곳에서 메시지를 보내는 건물들

통영국제음악당과 통영시민문화회관이 특정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높은 자리에 큰 규 모로 지어진 처음은 아니다. 통영 원도심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강구안을 가운데 두고 통영시민문화회관과 마주보는 자리에 큰 한옥이 있다. 1605년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 이 경준이 지은 세병관이다. 통제영의 본관 격인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목조건 물임을 감안하면 유별나게 크다(연면적 578㎡). 세병관의 공식적인 용도는 객사(客舍)다.

객사는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였는데, 첫 번째 용도는 외국 사신이나 벼슬아치 들이 머물렀던 숙소다. 두 번째 용도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향망궐배(向望闕排)를 하 던 장소다.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이고 ‘향망궐배’는 ‘달을 보며 임금이 계신 대 궐을 향해 올리는 절’이니 결국 객사는 지방에서 한양에 있는 왕을 상징하는 시설이었다.

하지만 세병관은 벽이 없는 통간 구조이기 때문에 숙소로 쓰이기 어렵다. 궐패를 모셨던 단(壇)도 바닥 가운데를 45cm 정도 올리는 수준에서 끝냈다.

사실 세병관은 객사라는 기능보다는 건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더 큰 건물이었다. 건물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건물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큰 현판에 적 힌 ‘세병관’이라는 건물명이다. ‘세병관’에서 ‘세병’은 당나라 때 시인 두보가 지은 ‘마행세 병(馬行洗兵)’이라는 시에서 가져왔다. 전체 문장은 아래와 같다.

안득장사만천하 安得壯士挽天河 정세갑병영불용 淨洗甲兵永不用

통영시민문화회관과 통영국제음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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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하면 “어찌하면 장수를 얻어서 은하수 를 끌어와 갑옷과 병기를 깨끗이 씻고 영원히 사용하지 않도록 할까”이다. 이 문장은 더 이 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당시 사람 들의 마음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천초목과 민중의 삶을 염려하는 지도자의 세계관으로 해석된다. 세병관의 조성 주체가 조선 정부라 는 점을 감안하면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설득 력 있어 보인다.

세병관 외에도 통제영 내 건물들은 평화, 적어도 무탈(無頉)의 기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럼 메시지의 수신자는 누구였을까? 1차적인 수신자는 통제영을 만든 계기가 된 왜구다. 하지만 왜구는 항시적인 수신자는 아니었다. 어쩌면 세병관과 통제영의 메시 지를 늘 접하는 대상은 그 주변에서 생을 이어가는 백성이다. 수신자가 왜구에서 백성으 로 바뀌면 메시지의 내용은 조금 달라진다. “조선정부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천초목과 민중의 삶을 염려하고 있으며, 다시는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쓰고 있으니 백성 들은 전란 전의 일상을 회복하고 무엇보다 조선왕조에 대한 여전한 충심을 보이라.”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작은 것들

동피랑과 서피랑 그리고 통영의 주산(主山) 격인 여항산으로 둘러싸인 원도심에서 세병 관을 포함한 삼도수군통제영의 영역은 크다. 하지만 원도심에는 큰 것과 대별되는 작은 것들이 더 많다. 근현대에 지어진 건물들을 하나씩 지우고 그 자리에 기와와 초가가 올 라간 집을 채우면 큰 것과 작은 것들의 대비는 더 확연해진다. 과거 통영의 모습을 보 여주는 ‘통영성도’나 ‘통영지도’도 이런 확연한 대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두 지도에서 통제영 건물들은 사각형의 명확한 영역을 이루고 있다. 반면 원도심의 나머지 건물들 은 불규칙하고 자잘하다. 작은 것들이다. 건물의 배치도 정확한 질서 없이 지형에 맞춰 져 있다.

큰 것과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통영 원도심의 풍경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동피 랑 꼭대기다. 동피랑은 ‘동쪽 벼랑’이라는 뜻으로 발음도 예쁜 ‘피랑’은 ‘비탈’의 지역 사투 리다. 동피랑은 통영 원도심에서 작은 것들이 모여 있는 대표적인 장소다. 2007년까지만 해도 통영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였지만 현재는 통영을 방문하는 관광객 중 3분의 1이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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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원도심과 세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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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 실제 「통영시 주요 관광지 월별 관광객 현황(2016년)」에 따르면 연간 관광객 649만 4724명 중 216만 3168명이 동피랑을 찾았다. 2007년 시민단체 ‘푸른통영21’이 ‘동피랑의 색과 그림이 있는 골목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동피랑 벽화공모전’을 개최했다. 이 후 벽화마을로 입소문이 나며 외지인들이 찾아왔고 거주 인구가 늘어나면서 마을 보존 여론이 형성됐다. 2014년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발전의 모범적 사례 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지속가능발전교육 공식프로젝트’ 인증을 획득했다.

동피랑이 작은 것들의 집합 그리고 그 가치를 느끼게 해준 처음은 아니다. 봄날의 책방 을 비롯해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몰려 있어서 걷는 재미가 꽤 괜찮은 봉숫골에 전혁림 미 술관이 있다. ‘색채의 마술사’, ‘바다의 화가’로 불리는 전혁림(1915~2010)은 한국적 색면 추상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2003년 5월, 전혁림이 30년 가까이 살던 집을 허물고 미술 관이 신축됐다. 전혁림 미술관에서 통영의 작은 것들의 가치를 떠오르게 한 건 건물 전체 를 덮고 있는 세라믹 타일이나 무언가를 형상화했다는 건물형태가 아닌 공간구조다. 처

동피랑이 작은 것들의 집합 그리고 그 가치를 느끼게 해준 처음은 아니다. 봄날의 책방 을 비롯해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몰려 있어서 걷는 재미가 꽤 괜찮은 봉숫골에 전혁림 미 술관이 있다. ‘색채의 마술사’, ‘바다의 화가’로 불리는 전혁림(1915~2010)은 한국적 색면 추상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2003년 5월, 전혁림이 30년 가까이 살던 집을 허물고 미술 관이 신축됐다. 전혁림 미술관에서 통영의 작은 것들의 가치를 떠오르게 한 건 건물 전체 를 덮고 있는 세라믹 타일이나 무언가를 형상화했다는 건물형태가 아닌 공간구조다.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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