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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한미 동맹

2. 한미 동맹관계의 변천

(1) 한미안보협의회의 구성 이전: 1953∼1967년

1968년 한미안보협의회의(SCM)가 설치되기 이전까지의 한미 동 맹의 관계는 미국이 전쟁 후 복구 과정을 거쳐 근대화의 초석을 다지게 되는 한국을 보호하는 관계로 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미 국은 한미 간 합의의사록의 체결과 함께 한국에 경제 및 군사 원 조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은 토지 및 시설을 한 국에 주둔하는 미군에 제공하고, 한국의 안보는 미군의 손에 의존 하는 체제로 정착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무상원조(Grant Aid)사업, 대외군사판매(FMS: Foreign Military Sales), 방산기술 지원 및 협력사업 등의 형태로 한국군 전력 증강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우리 국군의 월남전 파병을 계기로 한미 관계는 보호-피보호의 일방적 관계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여 상호 보완적 동맹관계로 발전하게 되며, 1960년대 후반 한미 동맹관계 가 더욱 결속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자격으로 한국군을 작전지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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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연도 병력 규모 감축 내용

제1차 감축

1953년 325,000 한국전쟁 정전협정 당시 주한미군 병력 규모 1954년 223,000 정전협정 1년 동안 2개 사단 10만여 명 철수

∼1957년 70,000 1957년까지 2개 사단(제2, 7사단) 7만 명을 제외하고 대폭 철수

∼1970년 63,000

1960년대 월남전 수행에 따른 미군 병력의 부족으로 인 해 주한미군의 대폭 감축이 논의되었으나 1965년 한국 군의 베트남 파병 결정의 보상으로 주한미군 감축이 유 보, 1960년대 주한미군의 규모는 5만∼6만 명 유지

제2차 감축

1971년 43,000 1969년 7월 25일 닉슨의 괌 독트린 발표 “아시아의 방 어는 아시아인의 힘으로”, 1971년까지 2만 명 철수

∼1977년 43,000 1977년 카터의 감축 공약까지 주한미군의 수준은 4만 3,000명 선에서 동결

제3차 감축

∼1980년 40,000

카터 행정부의 감축정책(1977. 3)

- 제1단계(1978∼1979년): 제2사단의 1개 여단과 기타 지원 병력 6,000여 명 철수

- 제2단계(1979∼1981년): 보급, 지원 병력 9천 명 철수 - 제3단계(1981∼1982년): 남은 2개 여단과 사단본부 철수, 지상군 철수 이후 증강된 공군과 정보통신 부대는 계속 주 둔, 그러나 1978년 3천 명 철수 이후 감축정책 잠정 중단

∼1989년 44,000

레이건 행정부 8년 동안 4만 명 수준을 유지, 1988년 서울올림픽을 대비하여 6,000명 정도 일시적으로 증원 하기도 하였으며, 1989년 제4차 감축 계획이 수립될 당 시 주한미군 병력을 4만4,000명 수준으로 유지

제4차 감축

∼1992년 37,000

1989년 7월 미 의회를 통과한 넌․워너 수정안에 따른 조치로 미 국방부는 1990년 4월 동아시아전략구상 (EASI)을 제출하였으며, 이에 따른 주한미군 감축을 단 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 따라 1992년 12월 7,000명의 미군을 감축한 것을 끝으 로 감축 계획을 무기한 보류키로 결정

∼2004년 37,000 1992년 수준인 3만7,000명을 2004년까지 유지

제5차

감축 ∼2006년 29,500

2004년 미국의 해외주둔군 재배치계획(GPR) 정책에 따라 한국 정부와 주한미군 감축 협상

- 제1단계(2004년): 2여단 전투단 3,600명을 이라크로 재배치하는 것을 포함하여 5,000명 감축

- 제2단계(2005∼2006년): 육․공군 지원부대 등 5천명 감축

- 제3단계(2007∼2008년): 육군 지원부대 등 2,500명 감축.

2006년 현재 주한미군 2만9,500명

<표 4> 주한미군 규모 및 감축 추이

50 한미 동맹의 형성 및 변화 결정요인 분석과 향후 전망

주한미군의 주둔은 계속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조인된 지 5개월 후 미 정부는 주한 미 육군 2개 사단 철수 를 발표하고, 1955년 초까지 2개 사단 병력만 남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외의 참전국 군대도 대부분 철수하였다. 주한 미8군 사령부는 주한미군 병력 감축으로 더 이상 한국에 사령부를 유지 해야 할 명분이 감소함에 따라 1954년 11월 일본으로 이동하여 미 극동지상군 사령부(Camp Zama)와 통합되었다. 주한 미 지상군 철수 와 함께 미 공군도 철수하여 일본, 필리핀 등지로 이동하였다.

(2) 상호보완적 동맹관계: 1968∼1977년

1968년은 한미 동맹이 보호-피보호의 일방적 관계에서 벗어나 는 계기를 맞게 되는 해이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 미수 사건과 1월 23일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계기로 구축된 한미안보협의회의(SCM)는 한국이 자국의 안보를 미국의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체제에서 탈피하여 미국과 협의를 통 해 결정하는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시기 를 한미 간 상호보완적 동맹관계를 형성하는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 것도 한미안보협의회의의 설치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베트남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미국은 적극적 군사 개입 정책에 대하여 심한 국내외적 반발로 분란을 겪게 되고, 1969년 7 월 닉슨 대통령은 괌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 의 손으로”라는 정책 방향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한미 동맹의 관계도 일정정도의 수정 궤도에 들어서게 된다.

미 정부는 의회와 NSC의 권고에 따라 이를 구체화하여 1971년 6월까지 아시아에서 총 4만2,000명의 미군을 철수시키기로 하고 그 중 주한미군 7사단 2만 명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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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그 대안으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5개년 계획을 지 원해 주기로 하였다.17)

당시 우리 안보에 대한 정부와 국민들의 불안은 극에 달하였고, 정부의 대미 협상 중 국회 결의와 내각 총사퇴 불사론까지 내세 우면서 미군 감축에 반대하였지만 미군 감축은 1971년 3월 전격 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1968년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 등 의 한국 안보를 위협하는 일련의 사건들도 미군 감축의 결정, 즉 닉슨의 괌 독트린을 이끌어낼 정도의 미국 내 반전 분위기를 어 떻게 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우 리 정부의 국방정책 당국자들로 하여금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깨 닫게 하는 귀중한 계기가 되고, 이때부터 한국의 자주국방의 의지 는 강화되기 시작했다.

(3) 군사동맹의 재결속: 1978∼1989년

1981년 취임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 교를 전면 백지화하고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 국방비를 대규모로 증액하는 한편, 우방국과의 군사적 결속을 강 화하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2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미국이 한반도로부터 미 지상군 전투병력을 철수할 계획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레이건 대통령의 대소 강경정 책으로 인해 한미 연합군의 대북 억지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레이건의 집권기간(1981∼1989년) 동안 미국의 무역수지 및 재정적자가 악화된 반면,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가운 데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억지력이 강화되어 가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안보지원정책에 대한 점진적 변화를 추진하였다.

17) 유재갑,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의 입장」, 2003 참조

52 한미 동맹의 형성 및 변화 결정요인 분석과 향후 전망

연도 GDP(A) 방산물자 수출(B) 비중(B/A)

1975 2,145,909 47 0.002

1976 2,955,558 232 0.008

1977 3,792,583 810 0.021

1978 5,112,583 1,641 0.032

1979 6,556,260 7,865 0.120

1980 6,383,419 11,711 0.183

1981 7,146,924 12,481 0.175

1982 7,621,874 16,766 0.220

1983 8,451,061 30,129 0.357

1984 9,321,050 11,631 0.125

1985 9,661,904 10,635 0.110

자료: World Bank, 방위사업청

<표 5> 방산물자 수출 추이

(단위: 만 달러, %)

한국의 방위산업은 꾸준한 신장세를 보여 1979년 이후 한국의 방산물자 수출 실적은 급격히 늘어 1983년에는 GDP 대비 0.35%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한국의 방산물자 수출이 미국 의 동종 방산물자 수출시장을 잠식하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한 국을 더 이상 미국의 일방적인 안보지원 대상국으로 인정하지 않 게 되었으며 1987년 FMS 차관을 중단하고 선진국과 같은 수준의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게 되었다.

미 의회는 경제적인 이유와 국제정세의 변화를 내세워 더 이상 미국이 우방의 방위비 부담까지 떠맡을 수 없다는 논리로 1987년 부터 NATO 회원국, 한국, 일본 등 우방국에게 방위비 분담을 요 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1988년 제20차 한미안보협의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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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한국 정부는 미국측과 연합방위 증강 사업비로 4,500만 달 러, 1990년에는 7,0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후 한 미 양국은 한국의 경제 사정, 북한의 위협수준, 미국 내 정치 및 경제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한미 간 방위비 분담금 결 정을 위한 협상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한편, 1989년 3월 부시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미 의회를 중심으 로 주한미군 철수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월 14일 므라젝

(Roberk J. Mrazek) 민주당 하원의원이 한국의 경제성장 등을 이유로

주한미군 철군을 주장한 이래, 4월 19일 상원 군사위원장 넌(Sam

Nunn) 의원은 메네트리 주한미군사령관을 의회에 출석시켜 주한

미군 철군 일정수립을 촉구하였다. 6월 2일에는 민주당의 레빈 상 원의원은 주한미군 4만3,000명 중 5년간의 단계적 철수를 통해 1 만 명만을 잔류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감군 안을 제출하였다.

또한 1989년 7월 31일, 민주당의 넌 의원과 공화당의 워너 의원 을 포함한 상원 군사위원회 소속의원 13명의 공동발의로 「한미 안보관계에 관한 법안(일명 넌․워너 수정안)」이 상원 본회의에 제출 되었다. 이 법안은 첫째, 미국은 동아시아 및 한국에 있어서의 주 둔 군사력의 위치, 전력구조, 임무를 재평가하고, 둘째, 한국은 자 신의 안보를 위해 보다 많은 책임과 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셋째,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의 부분적, 점진적 감군의 필요성과 가능성 에 대해 협의해야 한다는 판단을 바탕으로 미 행정부에 주한미군 에 관한 철수계획을 수립, 대통령은 1990년 4월까지 한국과의 협 상 결과를 보고하며, 발표일로부터 1년 이내에 추가 보고서를 제 출할 것을 규정하였다.18)

18) 이 법안은 1990년 및 1991년 회계연도 국방예산 수권법안에 첨부된 수정안 형태 로 제출되어 8월 2일 구두표결로 상원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54 한미 동맹의 형성 및 변화 결정요인 분석과 향후 전망

단계 병력 감축 휴전협정 관리 체제 연합지휘 체계

제1단계 (1990∼

1992년)

- 육․공군 6,987명(육군 5,000명, 공군 1,987명)

- 군정위 수석대표로 한 국군 장성 보임, JSA (판문점) 한국 경비병 증가

- CFC 해체

- GCC 분리/한국군 사 령관 임명, 작전통제권 검토

제2단계 (1993∼

1995년)

- 감축 완료시 미 2사단 2 개 여단, 7공군 1개 전 투 비행단 규모로 재편

* 북한 핵개발 연계 일단 보류

- JSA(판문점) 경비 임 무 인수

- CFC 해체

- GCC 분리/한국군 사 령관 임명, 작전통제권 검토

제3단계 (1996년

이후)

- 북한 위험 정도, 억제 개념, 미군의 지역 역할 에 따라 주둔 규모 결정 (최소규모 장기 체류)

- 미 2사단 책임 지역 인수

- 전시작통권 확인 - 한미기획사령부 정착 - 한미병렬 체제 발전

* 용산기지 이전 자료: DoD, A Strategic Framework, 1990, 1992.

<표 6> 넌․워너 수정안에 따른 3단계 주한미군 재조정 계획안

(4) 냉전 종식과 새로운 ‘안보 동반자관계’ 모색: 1990~2001년 1990년대 들어 미국 내 조야를 중심으로 한미 군사관계에 대한 재조정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90년 4월 19일, 미 국방부는 89년 4월에 상원에서 통과된 「넌․워너 수정안」에 따라 대통령 보 고서인 ‘21세기를 지향한 아․태지역의 전략적 틀(A Strategic Framework for the Asia Pacific Rim: Looking for the 21st Century)’, 일명 ‘동아 시아전략구상(EASI: East Asia Strategic Initiative)’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동아시아전략구상(EASI)’의 핵심은 80년대 이후 유럽을 능가하 는 미국의 최대 교역대상국들이 포함되어 있는 아․태지역의 중 요성에 대한 재인식, 구소련에 의한 전통적 안보위협의 감소, 국 내 재정압박에 따른 국방예산의 대폭 삭감 등의 제반요인들을 고 려하여 아․태지역에서의 미군주둔전략을 재검토하는 것이었다.

EASI는 1990년부터 3단계로 구분하여 1단계로 1∼3년 이내에 는 역내 주둔 13만5,000명에서 1만4,000명을 철수시키고, 2단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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