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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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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국 GNC 대표

파키스탄에 26년 째 살고 있는 저에게 많은 분들이‘왜 하필이면 테러 위험과 가난・군사독재, 그리고 술집이나 노래방 하나 없는 황량한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이냐’고 묻습니다. 그런 질문은 하는 분들은 파키스탄 시장의 매력과 잠재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제가 경영하는 회사 이름은‘좋은 이웃(Good Neighbor Corporation)’입니다. 파키스탄의 좋은 이웃이 되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 입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사업을 하였습니다. 내가 파키스탄을 처음 찾은 것은 1989년. 진도모피 영업이사를 그만두고 일본 기업에 가죽과 모피 등 원자재를 납품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양 가죽이 싸고 좋다는 말을 듣고 펀잡주 의 주도인 라호르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와 본 거리를 돌아보니 정말 할 것이 많았고 온통 사업 아이템 천지였습니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기회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여기에 걸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는 한국과 파키스탄은 비자 면제 협정을 체결한 상태여서 무비자 입국 이 가능했고 장기 체류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비자문제가 상당히 어려워졌지만….

파키스탄에 오는 우리 동포들은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찾아온 부적응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 한국의 문화는 우선이 일이고 다음이 가정인데 이곳 사람들은 첫째가 가정이고 그 다음이 일입니다. 일이 우선인 한국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현지 직원들을 대하니 근본부터가 맞지를 않았습니다. 저는 매번 가정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현지 직원들을 해고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악순환의 반복이었습니다.

부록II진출기업기고문

이곳은 일제 차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차는 가뭄에 콩나 듯이 포니와 포니2 가 정말 가끔씩 보이곤 했습니다. 일제 차의 부품을 한국 에서 생산해 파키스탄으로 수입해서 판매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많은 부품업체들을 만났고 우선은 일본 차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업체들을 탐문 하여 접촉하였습니다. 샘플링부터 시작해서 시장에 한국에서 만든 일제차 부품을 판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족한 만한 결과를 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IMF 당시 파키스탄이 1998년 5월 말 첫 핵실험으로 서방세계로부터 경제제제 를 당하게 되면서 나의 시련은 시작되었습니다. 파키스탄에서는 신용장을 개설해도 한국의 어느 은행도 받지를 않는 상황이어서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현금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용장으로 거래를 하던 업자들이 어느 누구도 현금거래에 응하려고 하는 업체는 없었습니다. 기 수주했던 많은 오더들이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정말 많이 느꼈습니다. 파키스탄에 들어오셨거나 앞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분들은 반드시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영업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자기를 지킬 수가 있고 지키지 못한다면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때 얼마나 어려웠던지 국제학교에 다니던 아들, 딸의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쫓겨나오고 결국 2년간 아이들을 홈스쿨링 하면서 마음속 으로 피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현지 IT 사업에 뛰어 든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2000년 7월 파키스탄 한인회장 자격으로 서울에서 열린 제1회 전세계 한인회장 대회에 갔다가 한국전파기지 관리국(KRT)이 제공한 무선통신 중계기(중계소간 전파 취약지점에 설치해 무선통신을 원활하게 해주는 기기) 소개 책자를 보고 사업아이디어를 얻었습 니다. 당시 파키스탄 휴대전화 가입자는 80만 명이어서 무선통신 태동기였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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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가입자 수는 1억만 명으로 125배 가까이 늘었다. 그 당시에 현지 Mobilink, Paktel (현 챠이나 모바일) 및 PTML 등 현지 통신업체를 찾아가 한국 중계기의 우수성을 알리고 시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바일 링크에 첫 4대의 중계기를 납품하기까지 1년이 걸렸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첫째도‘인내’둘째도

‘인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걸 서두르지 않는 현지 문화 때문입니다. 이곳 으로 진출하려고 하는 자영업자들은 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한국 사람들은 결과물을 빨리 얻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현실 입니다.

여기서 자영업자들이 알아두어야 할 한 가지 사항은“현지 직원이 분쟁이 있는 거래처를 응원하는 현상”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솟구쳐서 몸이 떨릴 정도로 분개했습니다. 이들의 이런 처신이 종교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알게 된 것은 최근에 알았습니다. 모든 무슬림은 한 형제라는 이들의 교리가 원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우리는 결국 이교도 들이고 분쟁 상대는 그들의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2007년 10월에 아내는 라호르에 남겨두고 먼저 수도인 이슬라마바드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많은 통신 본사들이 이곳에 있어서 옮기게 되었습니다.

팍텔과의 기지국 건설 계약으로 본격적으로 기지국 건설 사업에 뛰어들 즈음 팍텔사가 내부적으로 매각을 결정 중국의 챠이나 모바일과 비밀리에 매각 협상 중이었던 것을 모르고 있다가 많은 손해를 보면서 통신 쪽의 일을 접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통신사들이 Vender 체제로 전환하면서 개별 계약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계속 사업을 하려면 Vender와의 하청 계약을 해야만 했습니다.

2008년 2월에 다시 알카텔 루센트와 기지국 건설에 대한 계약을 하게 되었습 니다. 3월에는 당시 무샤라프 대통령령으로 CDWA(Clean Drinking Water for

부록II진출기업기고문

all) Project 를 수주한 GP-Bidc 와 3700만불의 하청 계약을 하였습니다. 이 계약 으로 인해 치명적인 손해를 당하게 되고 사업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모든 기반을 이곳으로 옮겨온 까닭에 한국으로의 귀국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 아니지만 결국 파키스탄에 남아야겠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힘든 가운데 열심히 사업에 열중하며 살아가고 있습 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천천히 삶의 가치와 의미, 가족과 이웃의 소중함을 느끼고 실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국은 너무 빠르고 바빠서 자신의 삶도 가족의 소중함도 이웃에 대한 배려도 느끼고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나는 서울에 들를 때마다 여러 기업들을 찾아가 파키스탄 진출을 권유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위험하다’‘시장이 없다’며 꺼 립니다. 그때마다 내 가슴은 답답합니다. 인구 2억의 시장을 놓치고 있다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반면 최근 몇 년 새 중국업체들의 진출은 엄청나게 늘고 있습니다. 중국은 정부가 나서 유망분야를 알려주고 후원합니다.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남아 최대 시장을 놓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몇 년 지나면 파키스탄은 중국기업 독무대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꿈은 현지에 첨단 기술과 농업을 접목시킨 기술학교를 세우는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파키스탄에서 사업을 하며 얻은 것을 현지인들 에게 돌려주고 싶어서입니다. 또한, 파키스탄이 농업 국가이고 세계 곡창지대 중에 한곳이고 앞으로 다가올 식량전쟁을 위해서도 한국이 꼭 필요할 나라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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