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Ⅲ. 평화번영정책과 초등학교 통일교육

1. 통일교육의 변천과정

학교 통일교육은 국내외 통일 환경과 남북한 관계, 국민들의 통일의식 등의 총체 적인 변화 속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정치 변동과 교육과정의 개정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통일교육의 변화된 내용은 실제 각 교 과에 반영되어 있다. 학교 통일교육은 아래와 같이 교육과정과 학교통일교육 관련 내용에 따라 반공교육, 통일․안보교육, 통일교육으로 변천하여 왔다.29)

29) 한만길 외(2000), 「통일교육 실태 조사와 활성화 방안 연구」, 도서출판 백의, p.61.

학교 통일교육은 1988년 4차 교육과정까지는 반공교육, 멸공교육, 승공교육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반공교육이었으며, 5차 교육과정에서 ‘통일안보교육’으로, 6차 교육과정에서 ‘통일교육’으로 정식 명명30)되었다.

① 반공교육 시기(1948년-1987년)

1980년대 중반까지의 반공교육은 상대방(북한 및 공산진영)의 이념과 체제의 한 계와 모순을 비판하면서 북한 체제를 부정하는데 목적을 두고 우리(남한 및 자유진 영)의 이념과 체제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이에 대한 신념을 내면화하려는 교육으로 서 북한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대결의식과 적대감을 고취하는데 목표를 두 고 있다. 때문에 북한에 대한 전적인 부정과 남한에 대한 전적인 긍정이라는 비타 협적인 흑백논리에 기초하여 이루어졌고,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나 경계심을 고취시 키는 ‘부정적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시도되었다.31)

이러한 반공교육은 1948년 12월 문교부가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학생 간부 2,400여명을 중앙학도훈련소에 입소시키고, 초중고 대학의 체육교사 380명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시켜 육군소위로 임명, 각급 학교 학 도호국단에 배치한 데서32) 시작되었는데, 이후 1951년 초 백낙준 문교장관이 전시 교육 방침으로서 ‘멸공필승의 신념을 배양하고 전국(戰局)과 국제 집단 안전 보장의 인식을 명확히 할 것’을 제시하여 미국의 대소전진기지로서의 남한의 역할과 분단 을 당연시하는 냉전적 의식이 교육내용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33)

이렇게 시작된 반공교육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계승 강화되었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혁명공약 1조)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좌익계 인사 숙청, 반공법 제정 등의 반공정책 강화의 일환으로 반공교육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는데, 1961년 10월 ‘반공교 육 강화를 위한 교사용 지침서’를 제작하여 배포한데 이어 1962년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개편 반공 내용을 대폭 보강하고, 1963년 각급 학교 교유과정을 개편하면서 반공·도덕 교육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34) 그리고 중학교의 「승공통일의 길」

30) 차우규(2002), “학교통일교육의 실천 방향과 활성화방안 모색”, 「제4차 통일교육발전워크숍」, p.4.

31) 한만길(1997), 「학교 통일교육 내용의 체계화 방안 연구」, 한국교육개발원, p.21.

32) 김진경(1989), “분단이후 반공교육의 전개과정”, 「전환기의 민족교육」, 푸른나무, p.183.

33) 유진오(1956), 「국제생활」, 일조각, p.97. 김진경, 상게서에서 재인용.

34) 김진경(1989), 전게서, p.187.

이란 책을 국정 교과서로 개발 보급하고, 고등학교 사회과의 반공 도덕 교육과정을 마련함으로써 반공교육이 교육과정의 한 영역으로 공식화되었다.35)

이렇게 교육과정으로 자리잡은 반공교육은 1968년의 북한 무장공비 사건을 계기 로 전면적 이데올로기 교육으로 발전하게 된다. 1968년 5월 향토예비군 발족에 이 어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되고, 1969년에는 고등학교와 대학에 ‘교련’ 과목 이 설치되었으며, 1970년에는 여고생에게까지 교련 교육이 확대되어 반공교육은 군 사 교육화 되었다. 나아가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학교교육의 모든 영역에 거쳐 안보교육체제를 정비 강화한다는 교육방침을 확립하여 반공교육 을 국가안보교육 이데올로기화 하게 된다. 유신시절 3차 교육과정 개편에서 도덕과 (국민윤리과)를 사회과로부터 독립시켜 반공교육을 의식, 가치관, 태도로까지 내면 화시키는 ‘사상’ 교육화를 시도하게 되고, 환경정리․특별활동․학교행사 등 학교교 육 모든 영역에 거쳐 반공교육을 전면화하여 반공교육은 학교교육을 지배하는 강력 한 이데올로기로 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국가통치이데올로기로 전면화된 반공교육은 5공화국 시대의 4차 교육과 정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당시 반공 교육은, ‘자유민주주의는 선’이요, ‘공산주의는 악’이며, ‘북한은 소련의 괴뢰’로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적’으로서 경계 하고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고, 북한의 공산집단과 싸워 이기기 위해 국민적인 단결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② 통일, 안보교육시기(1988년-1992년)

이런 반공교육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대약진과 1989년 소련의 변화 등 동서 냉 전의 해체라는 국제 정세 변화에 조응하여, ‘5차 교육과정’에서 ‘통일안보교육’으로 그 명칭이 바뀌고36), 공산체제 및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의 우월성, 민주시민정신 고취 등의 내용이 보강되었고, 북한을 우리를 위협하는 존 재인 동시에 북한은 언젠가는 합쳐서 함께 살아야 할 형제라는 이중성을 띤 대상으 로 교육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공산당 = 뿔 달린 도깨비’ 식의 비합리적 교육 내용들이 일부 개선되었다. 그러나 통일안보교육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35) 한만길(2001), “통일교육의 어제와 오늘”, 「경남대 사이버 통일교육」, 경남대, 17강 자료 축약.

36) 한만길 외(2000), 전게서, p.62.

강조하고, 북한 공산주의 집단을 몰아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공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③ 통일교육시기(1992년 이후)

김영삼 정부(6차 교육과정)에 들어서서 ‘통일교육’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안보교육 이 통일교육의 하위 개념화되고, 교과서에서 이념 비판 부분의 내용이 축소되는 등 1993년 초 이전보다 상당히 진보적인 ‘통일교육 지침’이 만들어져 학교로 배포되었 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 비판 부분의 축소를 대체할 만한 통일교육 내용을 확보하 지 못함으로써 통일교육이 양적으로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고, 북한의 핵 위기나 김 일성 사망 이후 조문파동 등으로 촉발된 남북 대립 등의 사회적 변화를 학교 반공 교육의 질적인 변화로 이끌지 못하였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통일교육은 1980년대 중반까지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강도 를 달리해 왔을 뿐 이데올로기 교육인 ‘반공교육’으로 일관했고 1987년 5차 교육과 정에서는 ‘통일안보 교육’, 그리고 1992년 6차 교육과정에서는 ‘통일교육’으로 명칭 을 달리하면서 도덕교육론적 접근을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37)

1997년부터는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어 2003년까지 교과서 개편이 이루어졌다. 7차 교육과정 개편 중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 통일교육에서 ‘화해와 평화통일’

의 중요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강화되었지만 학교통일교육은 오히려 축소되지 않았을까 우려하였다.

6차 교육과정에서는 추구하는 인간상으로서 ‘자주적인 사람’이라는 항목을 통해 평화 통일을 명시하고 있었지만, 7차 교육과정에서는 추구하는 인간상으로서 ‘민주 시민 의식을 기초로 공동체의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이라고 간략하게 명시하고 있는데,

‘교육과정의 구성 방침’에는 평화 통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그 세부적인 내용인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지침’에서 범교과 교육의 하나로 통일교육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간 학교 통일교육을 전담하다시피 해왔던 도덕(윤리)과의 수업 시수와 교과서 분량이 축소되면서 통일교육의 내용은 오히려 축소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교육인적자원부는 통일관련 ‘특별활동’과 7차 교육과정의 ‘학교 재량시간’을 활용한 통일교육을 권장하고 있다.

37) 한만길 외(2000), 상게서, p.63.

교육과정의 변천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동안 통일교육은 시대, 이념, 상황논리에 따라

2. 현행 7차 교육과정과 초등학교 통일교육의 검토